2017년 11월 20일 월요일

베이츠 모텔

시즌5의 8편은 영화 사이코를 길게 늘여 제작한 이 시리즈의 백미였다. 리하나가 모텔 방에서 샤워를 할 때는 설마 영화의 그 살인 장면이 재연되는 것인가 궁금했는데(실제 그렇게 상상하도록 연출되었다), 매우 우스꽝스럽게 영화를 비틀었다. 아마 매우 불행한 생을 살고 유부남에 놀아난 흑인 여성(이지만 실제로는 리하나!)을 사이코의 희생자로 만들기에는 부적절했을 것이다. 대신 그녀의 정부, 유부남인 샘이, 그 건장한 백인 남성이 노마의 식칼의 희생자가 되었고 정확히 영화에서 연출된 것처럼 샤워 커튼을 부여잡으며 죽어갔다.

시즌 피날레이자 시리즈 피날레가 가까워지며 완전히 미쳐버린 노마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궁금하였는데 드라마의 주연들이 그 처리를 맡았다. 보안관이자 양아버지가 먼저 노마를 처리하려고 나섰는데 거의 성공했지만 어처구니 없이 역습을 당해 죽었고, 배다른 형제인 딜런, 유일하게 노마를 가족으로서 걱정하며 끝까지 목숨만은 건지게 하고 싶었던 그 형이 노마를 어쩔 수 없이 죽였다. 노마의 상태를 잘 알고 있을 딜런이 단지 2년 떨어져있었다는 이유로 노마의 정신을 되돌릴 일말의 가능성을 희망했다는 건 이상하긴 했다. 그저 형제로서의 감정이 이성을 넘어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불행한 결말을 이미 예감한 듯 했고, 그래서 준비한 권총으로 드라마의 주인공을 안식으로 이끌었다. 가끔씩 제정신인 노마가 죽고 싶어서 식칼을 들고 딜런에게 덤볐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사이코에서는 주인공이 여자 가발을 쓰고 어머니 흉내를 냈던 것 같은데 드라마에서는 노마가 어머니의 옷을 입고 여자 연기를 했지만 가발까지 쓰지는 않았다. 노마는 충분히 환상을 통해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노마가 왜 노만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시선이 느껴진다고 해서 어머니 형태의 정체성이 사람 몸 속에 생겨나는 건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는다.

노마 베이츠를 연기한 배우는 이번에 새로 시작한 굿 닥터라는 드라마의 주연이기도 하다. 한국 드라마가 원작이라 한국에서도 관심이 많을 듯 한데 희대의 사이코를 연기한 배우가 곧 바로 좋은 의사가 되었다니 재미있다. 굿 닥터를 보진 않았는데 설마 미친 의사는 아니겠지?

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에단 호크의 최근작들 : 본 투 비 블루, 모디

오랜 영화팬들이 에단 호크(이선 호크가 맞겠지만 이미 익숙해진 터라 에단으로 적는다)를 알게 되는 계기는 죽은 시인의 사회일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비교적 늦게 봤기 때문에 그 작품이 아니라 기네스 팰트로우와 함께 출연한 위대한 유산을 통해 처음으로 이 배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잘생긴 배우로 이름을 널리 알린 그는 그 이미지 때문인지 주요 영화 시상식에서는 수상을 거의 못 했던 것 같다. imdb에서 보니 보이후드를 통해 주요 시상식들에서 조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하지는 못 했고, 예전에 트레이닝 데이로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다. 오히려 비포 시리즈의 제작에 참여한 것 때문에 후보에 오른 횟수가 많아 보일 정도다.

그런데 이제 그의 연기에 대해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듯 하다. 보이후드 이후 출연한 작품들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고 있다. 본 투 비 블루에서는 마약없이는 예술을 할 수 없는 비운의 재즈 뮤지션 쳇 베이커를, 모디에서는 장애가 있지만 예술적 재능이 넘치는 모디의 무식쟁이 남편으로 역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발레리안에서도 단역으로 출연해 독특한 배역을 맡아 무난히 소화해냈다.

본 투 비 블루에서 에단보다 조금 더 눈에 띈 것은 영화 속 영화에서 그의 아내이자 영화 속에서는 애인이 되는 카먼 이조고의 존재였지만 에단 호크의 쳇 베이커 연기와 노래는 나쁘지 않았다. 영화는 주요 영화 시상식에서 철저히 무시되었지만 플롯이나 연기나 그다지 흠잡을 것은 없어보였다. 무엇보다 이조고가 두 가지 역을 맡음으로써 극의 효과가 배가되게 한 설정들이 마음에 들었다.

모디의 경우는 영화 제목이 알려주듯 에단 호크의 역할이 본 투 비 블루보다 훨씬 축소된 영화다. 그러나 모드가 그녀의 작품들의 공의 절반을 남편에게 돌리듯 에단 호크의 캐릭터도 중요했다. 윽박지르는 고용주에서 어느 순간 모드의 소원처럼 남편이 되어버렸고, 모드의 작품이 잘 될 수록 점점 더 집안일까지 더 담당하게 되었다. 모드가 닭을 잡았을 때 별 말 하지 않은 것이나 모드가 집의 벽과 창문에 그림을 허락없이 그렸을 때에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하면서도 화내지 않고 그냥 받아들인 장면들도 마음에 들었다.

연기가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화면을 압도하는 배우는 아니었던 에단 호크가 앞으로도 액션이나 수퍼 히어로 영화로 흥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최근 3, 4년 새 원숙해진 연기를 보며 그의 연기로 인해 영원히 기억에 남을 영화가 탄생할 가능성을 점쳐본다.

2017년 11월 6일 월요일

행복 목욕탕 (2016)

네이버의 기자, 평론가 평점을 보면 보통, 나쁘지 않다 정도의 영화다. 하지만 정말 오래간만에 눈물을 흘리며 영화를 봤다. 신파라는 규정이 틀리지 않지만 곰곰 생각할 때 이 영화가 눈물을 짜내기 위해 오버를 했다는 결론은 내리기 힘들었다. 물론 스토리의 설정들은 비현실적이고 우연이 지나친 면이 있다. 적어도 음악 사용에 있어서는, 이른바 내가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며 감독이 이래도 안 울거야라고 다그치는 듯했던 그 음악에 비교하면, 과잉이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컨대 이 영화의 설정은 어떤 잘 짜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논리들의 결합으로 보인다. 마지막에 후타바의 시신을 다른 곳도 아닌 집에서 태우기 위해 목욕탕, 그것도 나무를 태워서 물을 데우는 오래된 방식의 목욕탕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기가 낳지 않은 아이를 하나도 아닌 둘을 키우기 위해서 엄마 자신이 어릴 적에 버려진 아이일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뻔뻔하지만 설득력이 있는 아버지 역할을 맡기기 위해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다기리 죠가 필요했을 것이다. 여섯 명의 인간 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망나니 젊은이가 그녀가 죽기 전에 목욕탕에 돌아와야 했을 것이다.

영화의 원제는 목욕탕물을 데우는 뜨거운 사랑 정도일 것 같은데, 영화를 다 보고 나야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고 너무 납득이 되는 제목이다. 그녀 자신은 엄마에게 버려진 아이로 자라서 다 설명하지 않아도 대강 이해가 되는 어려운 삶을 살아왔을 것이고, 바람둥이까지는 아니라도 여자 관계가 복잡하고 책임감이 모자란 남편을 만나 고생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말기암 4기 진단, 두세 달의 남은 수명. 남편은 돌아와야했고 다행이도(?) 순순히 돌아올 상태였다. 다만 어릴 적 자기와 꼭 닮은 처지에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자기가 낳지 않은 딸은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하지만, 이제는 그 아이가 혼자 고난에 맞서고 극복해야했다. 결국 딸은 교실 내 탈의라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이지메를 극복했다. 탐정은 일본 흥신소의 이미지로 흔하게 나오는 험악한 사내가 아니라 어린 딸을 혼자 기르는 착한 남성이었다. 그 탐정마저 후타바의 심성에 감복하여 그녀를 위해 하기 힘든 일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후타바라 역할을 맡은 배우는 어린 시절 미모로 한 시대를 풍미한 미야자와 리에. 이제 그녀는 너무 말라서 죽기 직전의 환자 역할이 어울리는 외모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연기력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다. 후타바는 밝고 씩씩한 사람이지만 아즈미를 낳고 도망간 후 매년 게를 보내주던 기미에를 대면하자 뺨을 때렸고, 자기를 버리고 어느 부자와 결혼해 손자까지 본 친모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자 그 집에 돌(단단한 강아지 인형)을 던졌다. 이렇게 그녀는 수십 년의 억울함, 분노를 완전히 무화시킬 정도로 성인의 반열에 올라서지는 않았다. 이런 나약함, 불완정성이 남편이 만들어준 인간 피라미드를 보며 죽기 싫다며 오열하는 그녀 캐릭터의 비극성을 극대화시킨다.

빨간 색이 좋다는 후타바는 빨간 차를 운전하다가 자신과 정반대로 시간이 남아돌아 불만이라는 청년을 만날 수 있었고, 암으로 인해 하얀 변기 속에 빨간 피를 흩뿌렸고, 탐정의 딸로부터 빨간 꽃을 선물받았고, 장례식 후 빨간 꽃에 둘러쌓이고 그 꽃들과 함께 아궁이 속에서 불타며 빨간 연기를 내뿜었다. 그 뜨겁고 빨간 사랑으로 인해 남은 그녀의 가족들, 그러나 실제로 빨간 피의 성분은 전혀 다른, 혈육이 아닌 존재들이 따뜻함에 어쩔줄 몰라 좋아하게 된다.

A ghost story (2017)

몇 달 전 영화에 대한 리뷰글을 스치듯 지나가며 온 몸을 가리는 하얀 천을 뒤집어쓴, 그 전통적인 유령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올해 초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케이시 애플렉이 있다.

어디에선가 영화가 별로라는 말을 본 듯도 하여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케이시 애플렉과 루니 마라가 출연한 영화를 그냥 지나갈 수는 없었다. 감상을 짧게 말하자면 나쁘지 않았다고 하겠고, 감상 후 찾아본 리뷰들은 대개 호평 일색이었다. 

케이시 애플렉에 대해 말하자면 그의 연기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다. 매번 루저 역할을 맡아왔기 때문에 배우 자체에 대한 호감이 높지 않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공식적으로 그를 연기가 별로인 배우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졌지만 나에겐 인상적이지 않은 배우 정도였다. 

이 영화에서 케이시 애플렉은 거의 대부분 시간을 하얀 천 속에서 연기했다. 설정상 영안실에서 일어날 때 그를 덮고 있던 하얀 천이 그대로 그의 신체를 가리고 있는 것이라 두 눈의 위치에 구멍이 뚫려있을리가 없지만, 영안실에서 시체가 일어난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의 유령이니 구별해서 봐야할 일이긴 하다. 여하간 그의 연기란 것을 영화에서 보기는 매우 어렵다. 눈의 위치에 구멍이 있으니 그의 눈동자도 보일 법 하지만 특수 효과를 넣었는지 거의 검게 보일 뿐이다. 물론 유령은 설정상 눈동자가 없어야하지만 그 연기를 하는 케이시의 눈이야 카메라에 드러날 수 있고, 어느 순간엔 눈동자를 본 것 같기도 하다. 유령 역할로서 그는 그저 천천히 걸어다니고, 많은 시간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그러고보니 눈에 구멍을 뚫어놓지 않으면 유령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유령이 무엇을 보고자 하는지 알기 어려우니 유치하게 보임에도 그런 설정을 한 것 같다. 생각해보면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는, 그러니까 천을 쓰지 않은 케이시가 유령으로서 화면 속에 있다면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헛갈릴 수 있을 것이다. 하얀 천을 쓰고 있으면서 이것은 사람이 아니다, 유령이다라는 것을 분명히 시각적으로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 몇 개가 있는데 강함의 순서로 적어보겠다. 가장 큰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은 마지막에 아내가 벽 속에 숨긴 쪽지를 보고 소멸하는 컷이다. 과연 무슨 말이 있었길래 그 유령은 마침내 소멸하게 된 것일까. 영화에서 옆 집에 있던 유령은 낡은 집이 포크레인에 의해 허물어지자 자기가 기다린 누군가가 돌아오지 않는 것 같다며 사라진 바 있다. 그렇다면 회한에 가득한 유령이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 때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설정이 아닐까 싶고, 아내의 쪽지에도 유령에게 깨달음을 주는 어떤 메시지가 있었을 것 같다. 쪽지 내용이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는데 놀랍게도 감독의 인터뷰가 있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루니 마라가 촬영 당시 생각나는대로 무언가 적었는데 그녀도 잊어버렸고, 감독 자신은 알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아마 알지만 말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쪽지의 메시지 몇 글자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핵심적인 관건이 아니라는 감독의 설명도 수긍이 간다.

다음으로는 루니 마라가 부동산 업자가 남기고 간 커다란 파이를 몇 분간 바닥에 앉아 먹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마치 트윈 픽스 더 리턴에서 로드하우스 바닥 청소를 하는 장면처럼 길었던 이 장면은 그녀의 슬픔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무엇인지 아리송한 트윈 픽스 씬과는 차이가 있긴 했지만 정신없이 많은 컷을 이어붙이는 요즘 영상들과 확연히 다른 이 영화의 성격을 대표하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 집에서 어느 순간 있었던 파티 장면에서 한 남자의 일장 연설도 주목할만하다. 자연은 파괴되고 지구는 언젠가 멸망할 텐데 인간의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허무로 가득한 말들로 기억된다. 이 장면의 메시지야 그 자체로는 이해할 수 있는데 영화에서의 위치를 어떻게 잡은 것인지 궁금하다. 아내가 남긴 메시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수십 혹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집을 떠나지 못했던 유령에게 다른 어느 것도 의미가 없었다. 살아있던 시절, 아이도 없는 상황에서 그의 삶에서 아내보다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없었을 것 같다.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었으므로 음악에 대한 사랑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아내보다 음악을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시간관에 대해서는 긴 논의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가능한 짤막하게 생각해보고 싶다. 영화에서 전시된 것을 보면 케이시와 루니가 그 집에 살다가 이사를 가려고 했는데, 이사를 가기 직전 케이시가 죽고 유령이 되었다. 그가 죽기 전에 피아노에서 소리가 났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유령의 소행이었다. 이미 여기서 시간이 꼬이고 있다. 케이시가 죽기 전에 그의 유령이 피아노에서 소리를 낸 것이다. 또한 아주 먼 미래의 어느 순간 그 집의 자리에 들어선 고층 빌딩에서 유령이 자살(?)을 시도하는 듯한 장면 후에 시간은 과거로 돌아가 미국에 유럽의 백인이 정착하던 시절이 된다. 유령은 그 백인들이 인디언들의 화살로 몰살당하는 장면을 본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집이 있던 자리는 무덤 위에 지은 것일 수도 있고 무덤이 아니라도 많은 과거의 인물들이 죽은 그 자리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들의 유령들이 그 자리에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영화에서는 케이시의 유령만이 그 자리, 그 집에 존재한다. 그 유령은 자꾸 순환하는 시간의 고리에 갖혀서 어느 순간에는 유령이 다른 자신의 유령, 조금 더 과거의 유령을 지켜보는 장면까지 연출된다. 그런데 조금 더 새로운 유령이 더 오래된 유령을 알아채지는 못 하는 것 같다. 유령의 시간은 사람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연출되었다. 유령의 시각에서 어느 순간에 한 가족은 살아있었다고, 죽었고, 어느 순간 해골이 되어 있었다.  그 순환의 고리는 아내가 남긴 쪽지로 끊어질 수 있었다. 이 시간관에 완전히 설득되지는 않지만 매우 흥미로운 설정이었음은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