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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1일 수요일

버닝(2018)

이창동 감독의 이 새로운 영화는 무엇에 대한 것일까? 아직 읽어보지 못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라고 한다. 제목 자체가 '버닝'이니 무언가를 태우는 이야기고 실제로 영화의 마지막은 방화의 장면이다.

사실 태우는 것은 마지막의 포르쉐와 그 안의 한 인간과 피묻은 옷들만이 아니었다. 담배와 대마초가 피워졌다. 비닐 하우스가 꿈 속에서 불탔다. 태양도 불타올랐다고 해야할까? 자동차가 연료를 태웠다? '보일'러?

영화의 중반부터 이야기는 반포에 사는 '벤'이 후암동에 사는 해미를 살해하는 이야기로 이해되었다.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의 일부 리뷰들을 보니 그런 해석도 가능하지만 감독은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았다는 글들이 많은 걸 보니 벤이 해미를 죽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거의 분명하게 그런 암시를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파주의 종수 집 근처의 비닐 하우스는 벤의 직접적인 언급과 달리 불타지 않았으므로 벤의 방화는 살인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언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벤은 해미의 실종을 연기처럼 사라졌다고까지 말했다. 벤의 집에 있는 해미의 시계, 벤의 집에 새로 들어온 주인 없는 고양이가 '보일'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장면까지. 대마초를 피우는 것으로 대표되지만 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벤이 해미를 죽이고, 해미와 비슷하게 연고가 없는 가난한 젊은 여성을 또 만나고 살인을 하는 이야기라고 볼 여지는 많다. 그렇다면 종수는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 벤을 죽였고 그것은 그에게 정당한 행위였을 것이다.

몇 개 본 리뷰에서 고양이가 이름에 반응한 것은 우연일 수도 있다는 의견은 수긍이 가지만 벤의 집 화장실에 있는 시계는 많이 의심스럽지 않은가? 물론 또 다른 씬에서 종수가 해미의 옛 동료를 만났을 때 그녀의 팔에 같은 시계가 있었으므로, 대량 생산된 손목 시계 하나가 그 주인의 정체를 확정시켜줄 수는 없다. 이것은 감독이 관객의 판단을 혼란시키기 위한 조치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확실히 모호한 장면들이 많다. 해미는 처음에는 그저 가끔씩 일하며 돈을 모아 아프리카 여행을 가는 흔한 청춘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들에게 그녀는 카드 빚이 많고 거짓말을 잘 하는 아이였다. 그녀는 파주의 옛집 옆에 우물이 있어서 자기가 그 안에 빠져있었다고 했지만 정작 그녀의 가족은 우물이 없었다고 하고 이장도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16년간 연락이 두절되었던 종수의 어머니는 우물은 있었다고 하는데 다만 물이 없는 마른 우물이라고 했다. 최소 16년 이전의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이제 우물이 불필요한 세상에서 기억에서 사라져도 이상치 않을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골에 살았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보면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지 여부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최소한 다섯 명의 당사자들의 기억이, 그것도 단순한 장소의 존재 여부가 엇갈린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아마 종수 엄마의 진술처럼 마른 우물이 있고, 아직은 어렸던 해미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고 종수가 해미를 구해준 적이 있고 해미 가족들은 마른 우물이니까 그런 우물이 없었다고 말했을 수는 있겠다. 

고양이의 경우도 그렇다. 해미는 자기의 원룸에 고양이가 있다고, 그러니까 밥 좀 주라고 종수에게 부탁했다. 다만 고양이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니 안 보일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종수는 고양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고양이 사료를 몇 번 주는 씬을 감안하면 고양이가 먹은 건지 누가 치운 건지 몰라도 최소한 사료가 없어지긴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원룸의 주인은 고양이를 키울 수 없는 건물이라고 말했다. 종수조차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러 오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고양이라는 소재는 양자물리학의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염두에 둔 것일까? 벤이 동시 존재를 말한 걸 감안하면 영화는 양자물리학을 적극 도입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마저 들게 만든다.

물론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최승호의 등장이었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어떻게 봐도 최승호 같이 생긴 이 배우가 누구인지가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가장 궁금했다. 정말 최승호라는 이름이 있었고 구글 검색은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파란만장한 젊은 날을 살았고, 자존심이 너무 세어서 손해를 본 중장년의 남성이라는 캐릭터는 어느 정도는 그의 삶과 일치하는 것도 같다. 현실에서는 언론인으로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살던 그가 공무원을 폭행하여 재판정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장면은 재미있었다.

어떤 리뷰는 이 영화를 계급 관계로 해석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렇게 볼 여지가 다분하다. 벤은 자신은 직업이 없다고 하는데 그는 반포의 고급 빌라?에 살며 포르쉐를 몰고 다닌다. 설정상 나이는 30전후일 것 같았다. 벤은 해미나 나중에 데리고 다닌 젊은 여성을 자신의 부자 친구 모임에 초대하여 그녀들이 소위 '쇼'를 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그 가난한 여성들의 몸부림을 비웃는다. 벤이 어떤 직업을 갖고 일한다는 암시는 전혀 없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일을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젊은 여자를 데리고 시간을 보내고, 운동을 하고 쇼핑을 한다. 미술관?에서 가족과 만나는 씬을 보면 가족이 부유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벤이 엄밀한 의미의 부르주아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재벌2, 3세 같이 조상이 돈이 많은 젊은이라고 분류해야 할 수도 있다.

종수는 어떨까. 그는 육체 노동, 그것도 일용직 성격의 일을 하며 돈을 번다. 아버지의 부재로 떠맡게 된 파주의 집에서 외양간을 치우기도 한다. 그는 해미의 원룸이 근사하다며 자신의 '방'은 싱크대 옆에 변기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정체성은 작가다. 그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을 써본 적도 없고 무엇을 써야할지도 모른다. 오직 영화의 막판이 되어야 해미의 방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쓸 뿐이다. 사실 그 전에 아버지 죄의 정상참작을 위한 탄원서라는 소설을 쓰긴 했다. 이장은 그 탄원서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그 글이 소설에 다름 아님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그 글은 매우 잘 써졌다며 작가로서 종수의 재능을 암시했다. 누군가의 리뷰에서 말하는 것처럼 해미의 방에서 쓴 글의 내용이 이후 장면들일 수도 있겠다. 일단 그가 왜 해미의 방에 있는지가 납득이 가지 않지만 시점의 측면에서는 확실히 그 때부터 종수의 시점을 벗어난 것 같다. 혹은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쓰는 장면 자체가 소설이 아닐까? 혹은 해미의 방은 사실 종수의 방이고, 해미가 실종되자 종수는 그 이전까지의 장면 모두를 소설로서 써본 것이 아닐까? 주인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줄 때는 자신이 같이 있으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라며 잔뜩 경계한 상태였는데 모든 장면이 시간 순으로 진행되었다면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는 전혀 어떤 결정적 해석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쓰고 보니 마지막 생각, 자신의 방에서 소설을 쓰는 종수의 상상이 영화의 대부분이라는 해석이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이 된다.

현재로서는 마지막으로 쓰고 싶은 것은 미국과 중국에 대비된 한국의 처지를 영화가 다룬 방식이다. 이 부분은 그렇게 두드러지는 소재는 아니지만 TV 장면 속의 트럼프, 벤의 집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중국에 대한 대화 등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현재 국제사회의 G2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게다가 종수의 집은 대남 방송이 들리는 휴전선 근처의 마을이다. 이런 정치적 현실은 강대국에 의해 운명이 좌우된 대한민국의 탄생과 현재까지의 역사를 환기시킨다. 마치 벤이 비닐하우스 태우는 것이 자연법칙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강대국들은 범죄적 행위가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벤은 한국 출신의 미국인이 아닌가?

파주라는 공간은 출판사가 많고 신도시가 존재하지만 영화 속의 그 장소는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젊은 여성들이 떠난 농촌에는 외국인 여성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수 아버지를 위한 탄원서를 받기에 부적절했다. 의사소통도 되지 않고 이 땅에 정착하지 얼마 되지 않은 귀화한 한국인은 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파주에서 좋은 이웃이었다는 증거로 전혀 적당하지 않았다. 종수는 아마도 고등학교까지는 파주에서 다녔을 것 같지만 그 마을에 그가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고향에서마저 소외된 종수는 이미 명백한 현실이 된 이웃 사람 동남아 여성에게서 이중의 소외감을 느낀다.

아직 이창동 감독이 직접 말한 내용이나 씨네21 등에 실린 관련 글은 하나도 읽지 않았다. 조만간 읽어보고 생각을 더 정리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