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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6일 수요일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991)

비정성시를 보아야지 마음만 먹고 있던 와중에 최근 한국에 개봉한 거의 4시간짜리 대만 영화,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화제다. 일반 관객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전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유명한 영화(음악) 팟캐스트들에서는 주요한 소재로 다뤄지고 있다. 영화를 보고 씨네21 송경원의 글과 중앙일보 김형석의 글까지 읽어보았다.

이제는 고인이 된 영화감독의 역작이라는 말보다는 대만의 1960년대를 다룬 영화라는 점에 마음이 더 끌렸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기대보다 훨씬 복잡한 당시 대만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물론 감독이 60년대 대만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재현했는지는 미지수고 우리나라 사람이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송경원의 말처럼 누군가가 다 말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치더라도 영화의 장면이 실제와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따져볼 수는 있다. 어느 정도 고증이 되었다고 가정하고 내용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내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글은 공히 빛을 중요하게 다뤘다. 그러한 지적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납득이 된다. 영화에는 빛이 매우 중요한 테마였다. 샤오쓰는 야간학교라는 공간을 벗어나 주간학교로 진입하고자 했다. 영화 촬영장에서 빛/조명이 중요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촬영장에서도 장면마다 손전등을 비추는가 마는가, 촬영 중인가 아닌가, 밤인가 낮인가에 따라 다양한 조합이 등장한다. 김형석이 소년이 손전등을 훔쳐서 놀다가 말미에 다시 촬영장에 반납하고는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어둠의 세계로 완전히 가버린 소년의 마음과 행동으로 해석한 것은 맞는 말 같고 감독이 의도한 것 같다. 전력 공급이 부족해서 일어난 밤의 깜빡거림에 대한 지적도 유익했다.

나에게 더 주목되는 지점들을 두서없이 적어본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군인의 풍경이다. 소년들의 학교 교복마저 군복처럼 보이는 가운데 영화 속 대만의 도시에는 갑작스럽게 탱크들이 거리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학교에서 멀지 않은 평지에서 군인들이 사격 훈련을 하고 있다. 당시의 대만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도 해방 직후, 한국전쟁 즈음 혹은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에나 상상할만한 탱크의 시내 활보는 충격적이었다.

군인의 폭력은 적군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거대한 살상이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는 그 가능성, 그 상상 자체가 사회의 긴장을 유발했을 것이다. 공산화된 중국에서 도망쳐온 사람들은 60년 정도라면 여전히 고향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 것이고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마저도 배제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대만이라는 땅은 아직 낯설 뿐이고, 일단 왔으니 어떻게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싸워야 할 투쟁의 장이다. 어른들은 직업의 안전성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부모의 관심이 부족한 아이들, 사내 아이들은 갱이 되어 다른 조직과 싸움을 벌인다.

소년 갱들의 다툼은 성인의 범죄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고, 갱들의 다툼은 종종 살인으로 이어졌다. 일본과 공산당과의 싸움과 그 유산으로서 대만에는 사무라이 칼과 총들이 많았다. 일본인 지배자들이 살다가 도망치듯 버리고 간 집에 들어와 살게 된 대만/중국인들의 아이들은 다락에서 사무라이 검(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다)과 권총을 찾아내서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실제 조직간 다툼에서 살상 무기로도 사용했다. 이런 종류의 유혈낭자한 소년 폭력은 한국 문학에서 본 기억이 없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갖고 놀 정도로 검이나 총이 많지는 않았던 것일까? 정부에서 강력한 단속을 했을까?

밍이 권총으로 장난을 치다가 샤오쓰를 향해 권총이 격발되었을 때는 영화 제목의 ‘소년 살인’이 밍이 소년 샤오쓰를 죽이는 것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샤오쓰는 멀쩡하고, 그 뒤편 어딘가가 총알에 맞은 흔적도 없다. 그러나 그 상징적 장면과 정반대로 샤오쓰가 밍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소년’ 샤오쓰가 여자아이를 살인한 사건의 진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진상 자체는 송경원의 말처럼 영화의 본질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도 대만 사회에서 최초의 미성년 살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널리 알려지면서 사건 이름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으로 굳어진 모양이지만 고령가 주변에서 소년들은 이미 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다. 사건이 크게 된 이유는 갱단 멤버를 다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찰의 의문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철학적이고 얌전한 소년이 저지른 살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샤오쓰는 갱단과 함께 다니긴 하지만 나름대로 성적도 괜찮은 아이였다. 하지만 갱단과 다니며 폭력에 전염 혹은 면역이 되었기 때문인지 그의 폭력성은 영화 초반부터 튀어나온 것 같다. 막판에 교무실에서 전구를 야구방망이로 깨버린(직후 아버지와 자전거를 밀며 나누던 대화에서 나온 것처럼 그가 때린 것은 전구라기 보다 교장(?)의 머리였던가?) 그의 행동은 어린 시절 나의 행동 혹은 드러내지 못한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현실성은 미국에 대한 동경으로도 드러난다.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일본의 향기가 진하게 묻어있던 60년 경의 대만은 이제 일본이 아니라 미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진으로 도배된 캣(키가 너무 작아 친구라고 보기 불가능할 정도지만 노래와 의리 하나는 기막혔던 캣)의 방이 상징적이고, 샤오쓰의 큰 누나의 미국 유학도 그런 사회의 단면이다. 자격 서류를 중국에 두고 온 엄마는 미국으로 가능한 빨리 가라고 딸을 종용했다. 이런 부분에서 한국과 대만은 매우 닮아있는데 아들이 아닌 딸을 유학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도 구한말부터 여자아이가 해외 유학을 가긴 했다. 캐릭터들의 이름이 허니, 슬라이, 캣과 같이 영어식인 것도 재미있다.

야구방망이라는 물건도 재미있다. 야구방망이가 있다는 것은 아이들이 야구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이 즈음에 세계적으로 야구를 많이 하는 나라는 별로 없었다. 미국에서 개발된 이 스포츠는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일본의 식민지인 대만과 한국에도 깊이 이식되었다. 일본을 벗어나 미국의 우산으로 들어간 대만과 한국에서 야구방망이는 이상하지 않은 물건이긴 한데 영화에서는 야구를 하는 장면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방망이는 그저 흉기인 몽둥이로 사용될 뿐이다. 여전히 한국에서 야구 '빠따'는 흉기로 인정된다.

4시간이 한 시간 같다는 뉴스 제목이 보이긴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생각만큼 지루하지 않았다, 감독의 다른 작품도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 작품이 인생에서 누구나 꼭 봐야할 영화라고 찬양하는 평론가, 작가들의 말에 100% 공감은 안 되지만 곱씹어볼 여지가 많은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2008년 8월 27일 수요일

베이징 올림픽의 끝

일요일에 끝난 올림픽이 벌써 한두 달 전의 일처럼 느껴진다. 국제 유가는 하락세를 멈추고 다시 조금 올랐으며, 중국 경제는 올림픽 기간에 오히려 더 안 좋아졌고, 한국 경제는 주가의 꾸준한 하락과 급등하는 환율로 요약된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13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자랑스러운 태극전사들은 금의환향했다. IOC는 공식적으로 국가의 순위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메달 수의 정확한 집계를 위해 메달 순위를 기록한다. 본래 의미야 어찌되었건 한국은 목표로 했던 10-10을 초과하여 금메달 13개, 세계 7위라는 성과를 거둔다. 10+10=13+7. 지독한 우연인가.

한국은 이상한 나라다. 원래 스포츠 강국이지만 자국 개최를 등에 업고 세계 1위에 오른 중국을 제외하면 10위 안에 있는 국가 중 유일하게 전체 메달 중 금메달의 비율이 가장 높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세 종류 메달의 비율이 비슷하거나 가장 따기 힘든 금메달의 비율이 제일 낮아야 한다. 은메달을 따고도 처절한 눈물을 흘리는 한국 스포츠계의 풍토 때문일까. 우리 선수들은 유난히 금메달에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했던 것이리라.

메달 순위 세계 10위 안을 보면 흔히 선진국이라 부르는 혹은 강대국의 경험이 있는 국가들이다. 중국, 미국, 러시아, 영국, 독일, 호주, 한국, 일본, 이탈리아, 프랑스. 묘한 경쟁 의식을 가지게 되는 일본이 지난 대회 5위에서 8위로 변한 것이 눈에 띈다. 이래저래 한국은 자랑할만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이 글을 쓰게 된 주된 동기는 영국의 순위 때문이었다.

영국의 BBC는 영국의 올림픽 선수단의 환영식을 중계했다. 방송 자체를 아직 보진 못했지만 그런 게 있었던 건 확실하다. 한국의 경우도 기를 들고 앞장선 박태환, 장미란 등 금메달을 딴 선수를 중심으로 환영식을 열었다. 잠깐 보니 트로트, 댄스, 인순이 누나 등 온갖 장르를 넘나드는 가수들의 축하 공연이 있었고, 금메달 딴 선수들은 개인기를 선보였다. 국민대축제란다. 많은 네티즌들은 이런 행사를 왜 하냐, 지금이 80년대냐라며 불만을 표현했다.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수많은 근대 스포츠의 발상지이자 선진국인 영국에서도 내용은 다를지라도 환영식을 한단다. 영국에서 전통적으로 이런 행사를 계속 했다면 할 말이 없지만, 이번에 특별히 하는 거라도 쳐도 이해할만하다. 메달 순위 4위이기 때문이다. 한국 방송의 올림픽 중계만 봐서는 중국이나 미국이 금메달 따는 건 봐도 영국 금메달은 거의 못 본다. 어디서 그렇데 메달을 획득했을까 싶어 찾아보니 사이클에서 무려 8개. 요트, 조정, 수영 등 물 관련 스포츠에서 8개를 땄다. 얘네도 메달 편중이 참 심하구나 싶다.

5위를 한 독일은 카누, 승마, 펜싱, 근대5종, 트라이애슬론 등 한국에서 안 보여줄만한 종목들에서 많은 금메달을 얻었다. 재미를 잘 느끼지도 못하는 종목에서 선전했던 영국, 독일의 선수들의 경기 장면을 보여주지 않은 한국 방송의 중계 행태를 비난하자는 건 아니다. 자기들 유리한 종목에 많은 메달을 만들어 놓고 동양인이 유리한 종목은 메달 수를 적게 제한하는 있는지없는지 모를 차별을 규탄하자는 것도 아니다.

올림픽이 세계 평화와 인류의 화합을 위해 개최된다는 취지와 아주 작은 성과를 인정할수밖에 없지만 결국 국가 중심의 경쟁은 화합보다 큰 갈등의 씨앗이 되기에 경계해야 한다. 올림픽 메달 순위라는 것이 가볍게 볼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한국은 올림픽 메달이라는 것이 거의 모든 운동 선수들의 최종 목표가 되어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TV를 응시하면 자기 몸을 혹사하는 인간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펼쳐진다. 스포츠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다. 몸은 붕대투성이가 된다. 이건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다. 국가는 운동선수를 메달을 따는 기계로 만들어버린다. 메달에 너무나 집착하는 한국이기에 운동기계는 수시로 새 기계로 대체된다. 선진국에 급하게 도달하려는 국가의 비극이리라. 10대신 13을 얻은 이번 올림픽은 다음 올림픽 메달 수에 대한 부담을 낳아 한국 체육계에 불행한 미래를 초래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