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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30일 월요일

크로싱: 비와 백구와 축구

아... 왜 이렇게 글 쓰는 게 늦어지나. 영화 본 지 보름은 지났건만. 기억을 그러모아 어떻게든 끝내보리라. 스포일러 당연히 있다.

처음부터 이 영화를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차인표가 나온 영화가 재미있었던 적도 없었고. 하지만 지난 달 말미를 기념하여 선택한 영화는 결국 '크로싱'이었다. 졸리와 맥어보이의 원티드를 원하기도 했고, 결국 그저께 본 쿵푸팬더를 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가벼운 영화들보다 볼만한 한국 영화 한 편을 우위에 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그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다.

영화는 고통 그 자체다. 영화평 중 "재미도 감동도 없는"이라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다.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들지만 이는 카타르시스도 아니고 누구나 영화를 보며 느낄 수밖에 없는 고통의 소산일 따름이기 때문이리라. 확실히 영화는 재미로 볼 것도 아니고, 감동보다는 분노만을 느끼게 만든다. 분단으로 이산 가족을 보지 못하는 아픔은 이미 60년이 다 된 일인데, 탈북자들도 상당수가 이산 가족이었다. 결국 차인표는 금방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달리 부인, 아들과 (생)이별을 한다. 많은 이별은 예정에도 없이 찾아오는 것이리라.

가족의 문제도 있지만 영화는 식량난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는 북한 정권을 정면으로 비난한다. 북한 국경의 경비병은 돈만 주면 편하게 두만강을 왕복하게 허용하지만 무임도강하는 생계형 도피자에게 기꺼이 개머리판, 총알 세례를 가한다. 중국으로 도망치다 걸리면 정신개조를 위해 수용소에서 무임금 노동력으로 소모되다 죽을 뿐이다. 구더기가 득실대는 상처를 안고 죽은 미선의 이미지는 말문을 막히게 할 뿐이다.

영화의 비판적 시각은 북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도적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탈북자 지원 사업에 대한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을 더 많이 구하기 위해 개인이 아닌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단체가 필요함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들은 관료제의 무뚝뚝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남한이 아니라 병든 아내와 아들이 있는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용수(차인표)의 기대는 간단히 무시된다.

기독교에 대한 영화의 시선은 약간 애매하다. 영화를 본 날 다른 이의 생각 궁금해 인터넷을 뒤진 결과 영화가 기독교에 지나치게 비판적이라 싫다는 반응들이 있었다. 나도 신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는 용수의 격렬한 반응을 보며 기독교계가 안 좋은 반응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엔딩 크레딧을 보니 이미 기독교계의 협조가 있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탈북자를 도운 것은 기독교계라는 기본 사실이 있기 때문일까. 종교의 이념 자체와 이를 사리사욕을 위해 악용하는 성직자, 교단의 문제는 별개로 둬야 하는데, 크로싱은 기독교 이념 자체를 지지하는 영화는 아니다.

크로싱은 수없이 많은 경계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살아가며 보통 주어진 틀 안에서 살아간다. 삶의 공간이건 신분의 문제이건 경계선을 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넘나드는 것을 일상으로 삼으면서 양 세계의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한다. 무당이나 성직자들도 그런 종류의 사람인데, 크로싱에서는 브로커라는 존재들이 해당된다. 용수의 한국행을 조장한 브로커는 사욕을 위해 용수를 속여서 이용했고, 준이의 한국행을 도운 브로커들은 돈을 받고 냉정하게 일을 처리할 뿐이지만 어린 준이의 절대적 불행에 동정하기도 한다.


이런 얘기들을 쓰려던 게 아니었는데 서론이 길어져서 본론에 충실할 수 없지만 제목에 충실한 내용은 아래 적어본다.

위에 브로커 얘기를 적긴 했는데 영화에서 수많은 경계를 넘는 것은 비로 나타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지상의 물리적, 심리적 경계와 상관없이 조용히 그리고 차갑게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씻어내린다. 눈물도 비에 대응하는 설정이다. 영화 말미의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물이었다. 경계들 때문에 헤어진 사람들은 경계를 넘어 원래 하나였던 사람과 만나지 못하게 되면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준이는 비를 좋아한다. 맑은 날이 아니라 궂은 날에 내리는 비를 좋아한다멸 결과는 뻔할지도 모른다. 비는 수해를 낳기도 하지만 가뭄을 해갈하기도 하니 이중적 장치이지만 준이가 비를 좋아한다는 설정은 결말의 파국을 예고한 것 같다.


백구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기른 마지막 개가 (이름까지) 백구여서인지 영화를 보며 반가우면서 안타까웠다. 부인과 아들까지 죽는 마당에 개라고 무사할리 없다. 북한의 식량난 때문에 백구는 영화 초반 준이네 식구의 지위에서 아침 밥상을 가득 채운 음식으로 변했다. 엔딩 부분의 가상의 행복한 삶 속에서도 백구는 빠질 수 없는 일원이었다. 백구의 죽음, 그것은 한 마리 개의 죽음 이상의 의미다. 이어지는 불행을 알리는 중요한 서막이었다. 만약 백구가 진돗개라면 애시당초 함경도에 있을 가능성 자체가 거의 없다. 백구는 북한의 현실의 일부라기보다 메타포로 사용된 설정이다.


마지막으로 축구를 보자. 크로스, 크로싱은 센터링이라는 잘못된 용어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축구에서 득점을 위한 중요한 기술이다. 대지를 가르듯 그라운드를 횡단하여 스트라이커의 머리와 다리로 전달되는 공의 아름다움...

심각한 영화 타인의 삶에서도 축구 장면이 스쳐가듯 나온다. 이렇게 축구는 평화로운 일상의 일부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으로 많은 영화에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용수는 축구 '선수'였고, 준이도 축구를 너무 좋아한다. 그리고 사진에도 나오지만 백구도 축구를 좋아한다. -_- 축구 선수라는 설정은 이상한 곳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바로 주중 독일 대사관에 북한 사람들이 몰려 들어갈 때 축구 선수라는 경력이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용수는 북한을 떠나며 아내의 약과 아들의 축구화, 축구공을 사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중국에서 번 돈은 잃어버렸지만 남한에서 번 돈은 고스란히 모아 나이키 축구공을 사기에 이른다. 하지만 공을 받을 준이는 북한도 아닌 몽골의 사막이라는 타향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용수는 아들에게 크로스를 할 기회도 얻지 못한 것이다.

절대 고통의 영화 크로싱. 하지만 이런 현실이 멀지 않은 곳에, 소위 같은 민족에게 일어나는 일임에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이 고통을 가중시킨다. 영화 포스터는 "그 날, 우리는 살기 위해 헤어졌습니다"라고 말한다. 살기 위한 몸부림은 모든 생명의 본능이다. 하지만 살기 위한 헤어짐은 용수의 삶과 다른 가족의 죽음으로 결론이 났으니 용수는 그냥 북한에 있으면서 온 가족의 가난한 삶을 지켜보는 편이 나았으려나?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사회는 다수의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기에 개개인의 불행은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