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씨네21에는 송경원 기자가 쓴, 대자본을 투입하고 2018년 연말에 개봉하여 모두 손익분기점에 크게 미치지 못한 세 편의 영화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글을 읽다보니 영화를 보고 읽어야할 것 같아 영화들을 보고 나중에 기사의 나머지를 읽었다. 송경원의 글은 대개 수긍할만했지만 나로서는 과하게 비판적이라는 느낌이었다.
마약왕은 송강호 원톱 주연 영화로서 송강호에게 절대적으로 기대고 있다. 나도 개봉 전부터 큰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 기왕에 흥행에 실패한 이후 봐서인지 큰 재미를 느끼진 못했다. 작은 밀수꾼이 마약 밀매를 하다가 나중에 제조도 하고, 피맛을 본 이후에는 직접 몸에 뽕을 놔서 마약쟁이가 되고 파멸한다는 이야기다. 우민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두삼에게서 박정희를 발견한다면 제대로 본 거라고 친절하고 설명하는 걸 읽고 난 후 보니 과연 그러했다. 친절하게 이두삼의 부인을 육영수 여사의 머리 스타일로 변신시킨 장면까지 있었다. 설에 만난 친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이제는 자기가 보수화되었다고 말하는 그는 박정희가 없었으면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들 수가, 그러니까 이런 경제발전의 세상을 만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오랜 친구의 그런 반응은 나를 적잖이 당황스럽게 만들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지만, 이 시점에 박정희 말년에 대한 비판 영화가 적절한 것이냐라는 질문은 던질 수도 있겠다.
아마 영화의 기획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기 전에 이루어졌고, 원래의 박근혜 정권 말기를 겨냥한 영화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파급력도 크고 논쟁도 더 크게 되었을 터이지만 갑자기 시작된 문재인 정부에서 이 영화는 이미 몰락한 박정희 정부와 그의 딸인 박근혜 정권도 과거의 일이 된 상황에서 이들 부녀의 정권이 이렇게 추악했다는 걸 환기시키는 역할 정도에 그쳤다. 이두삼은 직접적으로 박정희와 악수하고 대면하는 위치에 올랐고, 권력의 중요직에 있는 여러 인물에게 뇌물을 바쳤다. 박정희 사후 여러 곳에 전화를 돌리는 이두삼의 수첩에는 여러 권력자들의 연락처가 몇 페이지에 걸쳐 빼곡히 적혀있었다.
후반부의 텅빈 저택에서 엽총을 쏘아대는 이두삼의 광경은 연극적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상당히 길게 묘사된 그 장면에서 감독은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을까?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에만 빠져있는 폭군의 말로?
스윙 키즈는 어떤가. 작년 초에 이런 영화가 올해 개봉한다는 씨네21의 기사에서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탭 댄스를 추는 모임이 만들어진다는 줄거리를 보고 경악했던 기억이 난다. 거제 수용소에서 탭 댄스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 엄청난 거리감은 결국 영화의 설득력을 무너뜨렸다. 강형철의 예전 작품인 써니는 웃음 포인트는 많았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몇 장면 때문에 좋게 평가할 수 없었다. 스윙 키즈는 비극의 장소인 포로수용소에서마저 많은 웃음 포인트를 넣었고 어떤 지점에서는 설득이 될 뻔도 했다.
감독의 인터뷰를 영화를 본 후에 많이 찾아서 읽어보았다. 나로서는 뜨악한 설정은 기록사진에서 수용소에서 탈춤 추는 걸 보고 떠올렸다고 한다. 완전한 판타지는 아니라는 것이고, 영화는 뮤지컬 원작이 있다고도 한다. OK. 영화가 흥겨운 전반부와 광기의 후반부로 급격히 전환되는 이유에 대해 감독은 뻔한 전개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막판 주인공들이 갑자기 죽어버리는 설정에 대해 친구는 B급, C급 영화에서 많이 보던 장면이라 평했다. 하지만 거제수용소의 실제 역사를 감안한다면 감독이 비극의 결말을 제시하며 남북한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의 비극을 환기한다는 그 취지에는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흑인 하사, 가짜 전쟁영웅의 동생인 북한군 포로,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게 들어온 민간인, 뚱뚱한 영양실조의 중국군 포로, 젊은 여성으로 이루어진 스윙 키즈 탭 댄스단은 여러 마이너리티들의 조합이자 전쟁 참전국들이 고르게 포함된 다층적 메타포일 것이다. 결국 이 순진무구한 존재들은 이데올로기의 광기 때문에 비참하게 죽어간다(미국인은 죽지 않는다. 그들이 살인자였다). 감독의 취지는 남북 화해 모드의 현실에서 이 관계가 다시 옛날처럼 전쟁으로 돌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매우 동감하게 된다. 하지만 포로 수용소라는 장소를 그저 용광로 같은 소재로 보지 말고 그 비극성의 역사적 심각함을 생각했어야 한다. 애초에 시작을 말았어야 할 기획이라고 본다.
영화 개봉 초기의 반응은 칭찬 일색이었다. 특히 언론 기사, 리뷰는 거의 하나도 빼지 않고 긍정적이었다. 흥행 참패 이후에서야 150억 투자한 상업 영화 감독으로서 책임감이 없었다는 때늦은 비판이 나오긴 했다. 아이돌 출신 배우의 열연, 새로운 배우들의 발견, 신나는 탭 댄스, 올바른 영화의 취지까지 흠을 잡지 않으려면 장점은 많다. 그러나 보헤미안 랩소디가 역주행 흥행을 하는 상황에서 몰살로 끝나는 영화의 결말은 너무 어두웠던 모양이다. 그 반작용인 것처럼 극한직업이라는 코미디 영화가 지금까지 흥행 싹쓸이를 하고 있다.
PMC 더 벙커는 송경원 기자가 세 작품 중 그나마 후하게 평한 영화였다. 많은 대사가 영어로 처리되는데 새로운 느낌을 준다는 장르적 차원에서는 호의적으로 평할만한 영화였다. 특히 막판에 낙하산 씬과 미사일 씬은 한국 영화에서 이런 것도 볼 수 있구나 싶었다. 아주 짧은 시간을 다룬 이 영화에서 대선 투표일에 출구 조사 결과가 대통령이 인터뷰하는 와중에 실시간으로 급변하는 장면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눈여겨본 것은 하정우가 맡은 배역의 이름인 에이햅이다. 에이햅은 모비 딕의 그 유명한 선장 캐릭터다. 선장, 캡틴. 에이햅이 다리를 잃은 것은 흰 고래 때문이고 그 고래에 대한 집착, 죽음에 대한 집착이 소설의 줄기다. 이 영화가 소설의 에이햅과 같은 것은 한쪽 다리를 잃은 캐릭터라는 점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에이햅이 의족을 한 이유는 낙하산에서 한 명을 더 안고 내려와서이고 이는 죽어가는 동료를 데리고 다녀야하느냐는 영화에서 줄기차게 제기되는 문제와 연결된다. 결과적으로 죽어버리더라도 그냥 놔두면 속절없이 죽을 동료를 살려보겠다는 노력은 해야하지 않겠냐는 것이 영화의 대답이었다. 실제로 영화는 그냥 두면 죽을 북한 의사를 애써 살려내는 것으로 끝난다. 소설 모비 딕이 죽을 것을 알면서 죽으러가는 이야기라면 영화는 노력해도 동료가 거의 죽을 걸 알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살려보는 노력을 해본다는 이야기다.
영화가 복잡하게 돌아가서 미국이 대선일에 서울 하늘에서 미사일을 북한 소행으로 위장해 날리고 막고, 중국이 북한을 먹으려고 하기도 하고, 중국과 미국이 공중전을 벌이는 등 살벌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잘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 모든 소동의 결과 미국 대통령은 재선을 하는 모양인데 한반도는 어떻게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정우는 사실상 미국인이고 이선균은 북한 사람인데 이 사람들이 한국 땅에서 살아남아서 나중에 어떻게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세 영화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남북 관계를 다룬다. 스윙 키즈가 이념 대립의 극한에서 전쟁을 벌이던 과거를, 마약왕은 일본이라는 제3국을 경유한 남북 민간 합작의 한 형태를, PMC는 가상의 미래에 지하 벙커에서의 전투를 그린다. PMC는 굳이 따지면 남한 쪽은 개입을 하지 않는다고 하겠다. 미군과 북한군 그리고 민간 전투 집단들의 조합. 근래에 북한을 다룬 영화는 너무 많다 싶을 정도로 많이 나왔다. 한국 내의 사건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총기를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너무 좋은 소재였을까? 북한을 전반적으로 악마처럼 그리는 경우는 거의 없는 듯 하지만 언뜻언뜻 드러나는 실제 북한의 모습과 영화 속의 그 모습들은 얼마나 닮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떤 가상의 전형을 만들어 놓고 답습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