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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일 금요일

어 콰이어트 플레이스

에밀리 블런트가 출연하여 관심을 갖고는 있었지만 별다른 정보없이 영화를 봤다. 씨네21 같은 곳에서 얼핏 보기로 평이 나쁘지 않아 보였고, 감상 후 해외의 리뷰들도 대부분 호평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서 그렇게 높이 평가할 부분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보지 못 하는 반면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괴물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내지 못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영화가 내세운 가장 독특한 설정이다.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설정은 매우 큰 제약이다. 영화는 그 한계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에밀리 블런트를 출산이 임박한 엄마로 설정했다. 당연히 출산 과정은 많은 소리를 동반하게 되고, 엄마의 고통보다도 막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영화에서는 아기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워서 상자 안에 넣어 소리를 최소화한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왜 영화의 부부-이들은 실제 부부사이란다-는 소리를 내면 안 되는 세상에서 아이를 갖게 되었을까. 영화의 흐름을 보건대 초반부에 로켓 장난감을 갖고 놀다 소리를 내고 괴물의 희생양이 된 막내 아들을 생각하며 아이를 더 낳은 것 같다는 심증은 간다. 하지만 우는 아기를 언제나 산소마스크를 씌워 조용히 만들 수는 없다. 내가 기르고 있는 경험을 토대로 보건대 아이들이 언제 울지 언제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래의 막내, 셋째가 아이다운 호기심 때문에 죽음을 맞이했다면 넷째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장난치다 소리를 내는 위험한 상황은 몇 번이고 일어날 수 있다. 그럴 경우 형, 누나와 부모는 셋째 때처럼 침묵을 하며 남은 이들의 목숨을 유지하거나 비극의 광경을 함께 슬퍼하다가 죽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대책없이 아이를 낳은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기계를 만지는 능력 외에 직접 무언가를 제작하는 능력까지 갖고 있었다. 기계 장치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는데 누나 역할의 아이가 실제로 청각장애가 있고 영화에서도 그런 설정이라고 하니 보청기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기계의 볼륨을 높일 때 나는 소리를 괴물들이 질겁을 하는 것만 보면서는 원래 괴물을 공격하는 무기인줄로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런 효과를 미리 알고 제작했다면 진작에 실험을 했을 터이니 보청기의 부수 효과가 괴물을 퇴치했다고 봐야겠다. 괴물들은 두꺼운 철판도 종이처러 가볍게 찢어버리는 다리를 갖고 있지만 일단 괴로운 소리를 들은 후 엽총으로 얼굴을 맞으면 퇴치가 되었다. 인간들이 마침내 괴물을 퇴치할 매뉴얼을 얻었다.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욕조에서 피를 흘리며 아이를 낳기 직전의 상태였던 에밀리 블런트가 나중에 샤워실에서 피묻은 손으로 벽을 턱 짚으며 아이를 남편에게 내보인 장면이었다. 싸이코나 타이타닉의 유명한 장면들이 연상되면서, 괴물을 유도하기 위한 용도였으나 어찌되었건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포가 터지는 와중에 에밀리 블런트는 아이를 낳고 탯줄도 끊으며 알아서 출산 과정을 처리했다. 그녀가 자체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혈압계로 자신의 상황을 체크하고 달력에 날짜를 표시하며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것을 생각하면 출산 과정을 그것도 남편의 도움이 없을 경우도 가정하여 대비했을 것이다.

타자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인지 뉴요커의 영화평에서는 영화가 백인 일색임에 대한 불편함이 드러났다. 요즘 영화에서는 다양성이 강조되다보니 오히려 구색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섞어놨다는 느낌의 영상물도 적지 않다. 영화는 분명 다양성을 다루지 않는다. 괴물과 인간의 화합 따위는 고려되지 않는다. 어제 훑어본 침입종 인간이라는 책의 내용과 유사하게 괴물과 인간은 지구의 최고 포식자 자리를 놓고 다툴 뿐이다. 그리고 청각장애 소녀의 우연한 발견 덕분에 괴물들이 소탕될 수도 있고, 너무 많은 괴물들이 몰려와 그 가족은 모두 죽고 괴물 퇴치의 비급은 영원히 소실될지도 모른다.

청각이 예민한 괴물과 청각 장애 소녀의 극명한 대비. 남편 역이자 영화의 감독은 소리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리를 낼 수 있는 자유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정치적 메시지까지 있을까? 눈이 멀고 싫은 소리를 내는 존재는 소멸시키는 괴물은 망가진 정치 권력에 대한 메타포일까? 뉴요커의 리뷰에서 죽어가는 성인 남성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분노의 외침을 지른다고 지적했는데 그렇다면 이런 식의 상상에 근거가 될 수도 있겠다.

영화는 설정 내에서 나름대로 논리적인 완결성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놀라운 지점은 별로 없었기에 아쉬웠다. 괴물은 어디선가 많이 본 형태인데 어떤 영화의 괴물과 유사한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