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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21일 월요일

적벽


대학원 사람들과 영화를 봤다. 한국에서는 '적벽대전'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했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적벽'이 원제였다. '적벽지전'이 다음 편이다. 나도 한동안 그랬지만 영화가 두 번으로 나뉘어 상영되는 것을 모르고 봤다가 낭패를 본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삼국지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적벽의 '전투'는 다음 편에 나올 것이다.

그렇지만 소규모 전투가 주를 이룬 이번 영화의 전투 장면도 볼만했다. 적벽의 대규모 전투를 보지 못해 실망한 사람이 많은 모양이지만 나는 아주 즐겁게 봤다. 나중에 밥을 먹으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 당시의 무기를 제대로 고증한 것인지, 배우들의 신장이 적절했는지 등에 대한 논란이 일긴 했지만.

여러 판본으로 삼국지를 다섯 번 이상은 본 것 같고, 코에이의 게임도 많이 했건만 삼국지의 세세한 부분은 많이 잊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가 얼마나 원작에 충실했는가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다. 그래서 대강의느낌을 요약한다면 '적벽'은 역사서보다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에 더 중점을 둔 영화인 것 같고, 오우삼 스타일이 강하게 덧입혀졌고, 특히 전투 장면에서는 반지의 제왕 류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삼국지-용의 부활의 실패가 보여주듯 원작에서 과도하게 벗어난 작품은 감독의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관객의 공감을 얻기 힘든데 적벽은 적절한 선을 지켰다.

영화는 첫장면부터 악한 조조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만들어 나갔다. 간웅 조조의 이미지는 강력한 정치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정통 왕조의 황제를 무시하고, 민간인, 적군을 가리지 않고 대학살을 자행하고, 무엇보다도 소교라는 미녀를 얻기 위해 오를 치는 듯한 설정을 통해 구축된다. 하지만 조조의 대척점인 유비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인 것만도 아니다. 유비는 자기를 따르는 백성을 지키며 대의를 중시하는 장면을 빼면 그다지 호감이 가는 캐릭터로 그려지지 않았다. 신야에서 패한 이후상황이 안 좋긴 했으나 주유가 방문했을 때 누추한 곳에서 짚신을 삼고 있는 장면은 비참함을 과장한 것이리라.

누구를 유명 배우로 썼느냐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전통적으로 중시되는 유비, 관우, 장비, 조조라는 인물이 아니라 제갈량과 주유의 라이벌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간 금성무의 연기에 의문을 품어왔으나 이번 제갈량 역할은 그에게 꽤 적합했다. 문무를 겸비한 인물인 주유 역할의 양조위도 괜찮은 캐스팅. 장비, 관우는 소설의 이미지보다 작았고, 유비는 너무 늙었고, 조운은 너무 경쾌했다. 조조의 배우는 선한 이미지를 많이 풍기는 인물인데 그래서 오히려 간웅의 역할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손권도 아버지,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 한 나라의 지도자로 우뚝 서는 과도기 캐릭터의 모습을 잘 연기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영화를 보기 전에 라디오에서 오우삼 스타일이 어떻게 영화에 반영되는지 조금 들은 편이라 영화를 보면서 주목했는데 역시나. 유비, 손권의 동맹이 결정되는 주유와 제갈량의 악기 연주 장면은 과장되었고, 흰 비둘기는 여러 번 날아다녔다. 비둘기는 단순히 난 정도가 아니라 과도하게 클로즈업되기까지 했다. 워낙 주연급 인물이 많이 필요한 영화라 일대일 대결이 많지는 않았지만, 조운과 하후X의 전투 장면은 지나치게 길었다. 소설 속의 조운 실력이라면 그렇게 오래 경합할리가 없을 터인데.

장비는 장팔사모를 거의 쓰지 않았다. 전투 장면이나 평소의 모습까지 장비는 많은 부분에서 반지의 제왕의 드워프족 김미를 연상시켰다. 작고 단순한. 레골라스의 이미지는 관우, 조운의 전투 장면에서 조금씩 스며나왔다. 주유의 기술도 일부 그런 면이 있었고. 전투 장면에서는 이렇게 반지의 제왕이 섞여 있는데 이는 세계적 영화 흥행을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하지만 절대악이 있고 악의 세력의 근원을 없애는데 성공하는 반지의 제왕과 달리 삼국지에서 조조는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유비, 손권은 적벽에서 단기적인 성공만 거둘 뿐이다.

마지막으로 축구 장면에 대한 분석을 빠뜨릴 수 없다. 무기 부분도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축구는 거의 엉터리다. 중국 축구계는 축구의 중국 기원설을 계속 제기하는 모양이고, 영화는 그런 연장선으로 보인다. 골대가 현재와 다를 뿐 선수들이 태클을 한다거나 묘기를 부리며 드리블을 하는 것은 명백히 현대 축구의 모습이다. 심지어 공까지 거의 구형에 가까운데 과거에 그런 공을 썼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말을 타고 와서 응원하는 대규모 관중들을 보면 어이가 없어진다. 영화의 맥락에서 축구가 나온 것은 전쟁의 승부는 축구처럼 딱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즉 영화 막판의 전투에서 조조군이 패한 것은 적벽에서 수전을 통해 만회할 수 있다는 조조의 자신감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었다. 하지만 축구의 승부야말로 다음 경기에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것이다. 거의 10배의 병력으로 전쟁에서 지기는 어렵지만 동일한 숫자의 선수들이 뛰는 축구는 공정한 룰만 있다면 승부 예측이 훨씬 어려운 법이다. 그렇다면 조조의 지나친 자신감과 오만함에 대한 경고, 그리고 참패를 예고하는 언급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