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쿠아론의 화제작!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로마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지금 일반 상영관에서도 볼 수 있지만 보통 대중적 인기가 없는 영화를 상영하는 작은 영화관 몇 곳에서만 상영되고 있다. 김세윤 작가는 이 영화를 큰 스크린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오래 묵혀둔 프로젝터를 틀어서 80인치 스크린으로 감상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잠들기를 기다린 후 밤 늦게 보기 시작한 나는 중간에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시 졸고 말았다. 많이 놓치지는 않았으나 흐름이 조금 끊긴 것은 사실. 늦은 밤의 몽롱함 때문인지 이 극찬을 받은 영화, 내가 좋아했던 그 영화들의 감독의 신작이 처음에는 왜 그렇게 격찬을 받는지 잘 와닫지 않았다.
영화는 1970년경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다. 쿠아론 감독 자신의 이야기라는 정도는 알고 봤다. 큰 집에 사는 한 가족이 있다(그러니까 쿠아론의 가족인데 영화속 이름은 변경되었다). 가족은 할머니 하나(나중에 밝혀지기론 외할머니다), 부모, 아이들 넷이다. 개가 한 마리 있고 집에서 일하는 식모(?)는 두 명이다. 이 부유한 집의 가족과 식모들의 차이는 한 눈에 들어온다. 흑백 화면이기에 피부색 차이까지 잘 들어오지는 않지만 가족들은 백인(혼혈이라도 거의 백인에 가까운)이고 식모들은 인디오에 더 가까울 것으로 추정되는 인종이다. 가족의 친척, 그러니까 쿠아론의 삼촌집도 상당히 부유해보였고 이곳은 아예 미국인이 한 가족일 정도로 더욱 백인에 가까워보였다.
주인공은 식모 중 한 명인 클레오다. 아이들의 엄마처럼 늘씬하고 호리호리하지 않은, 그러니까 잘 사는 백인, 부르주아 백인과 거의 정반대에 놓인 인물로서 클레오가 설정된다. 그녀가 처음 등장하는 영화의 오프닝은 알고보면 바닥에 있던 개똥을 물로 닦아내는 광경이었다. 영화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는 이 집의 개 한 마리가 어떻게 그렇게 똥을 많이 싸느냐다. 클레오가 개똥을 자주 안 치웠던 것인지 몰라도 복도라고 불러야할지 모를 그 장소를 카메라가 비출 때는 자주 개똥이 여러 곳에 놓여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큰 집을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해야할 클레오에게는 큰 도전인 셈이다.
이런 현격한 계급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클레오가 집주인들로부터 천대를 받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우대를 받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저녁에 온 가족이 모여 예능 프로그램 혹은 웃긴 영화를 보고 있을 때 그녀도 그 옆에 앉아 같이 감상을 해도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의도치 않게 임신을 했어도 쫓겨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에게 아기침대까지 제공될 예정이었다. 클레오는 쉬는 시간에 밖에 나가 연애를 할 여유도 있었다. 특히 아이들에게 있어 그녀는 식모보다는 이모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평범한 일상은 아버지의 부재와 클레오의 임신으로 인해 바뀌어갔다. 클레오를 임신하게 만든 페르민은 그녀와의 연락을 끊었다. 출장을 갔다는 아버지는 사실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다. 페르민은 멕시코 정부의 사주를 받은 청년단체에서 일하며 결국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학살하는 주범 중 하나가 된다. 아기침대를 고르던 클레오는 그 때 학살의 광경을 목격하고, 그 중에 총을 든 페르민을 본 충격 때문인지 갑자기 양수가 터졌지만 아이를 사산하고 만다. 쿠아론 감독은 사산의 과정을 꽤 길고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학살자라는 충격은 연이은 사산의 충격으로 이어졌고, 그녀는 죽은 아이를 잠깐 안아보고 의료진에게 아이를 넘겨주어야했다.
영화에서는 자동차가 주요한 소재로 사용되었다. 이 집에는 자동차가 적어도 두 대는 있다. 아버지는 포드사의 폭이 넓은 자동차를 모는데 집안에 주차시킬 때마다 차 옆이 긁히지 않도록 조심해야할 정도로 너무 넓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떠난 이후 이 차를 매우 조심성없이 몰아서 양 옆이 다 긁히게 만든다. 마치 남편의 존재를 지우려는 듯한 그 행동은 결국 남편과의 결별을 정식화하는 과정에서 포드의 그 큰 차를 팔아치우고 더 작은 차를 사는 것으로 이어진다.
새 차를 산 아내/어머니 소피아는 아이들과 클레오를 데리고 여행을 간다. 이 여행은 사실 남편이 자신의 짐을 빼도록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 여행 과정에서 바다를 즐겨 찾은 이 가족은 큰 위기에 처한다.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바다에서 놀던 아이 두 명이 엄마 말을 듣지 않고 더 깊은 곳에서 놀다가 거의 익사할 지경에 처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바다에 전혀 들어가지 않던 클레오-그녀가 수영을 할 수 있는지조차 불투명하며 그녀는 출산한지 얼마되지 않아 몸이 약한 상태였다-가 높은 파도 속으로 전진하며 두 아이를 구해내는 장면은 숭고하다고 할만하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잃은 것을 만회하려는 듯이 주인집의 아이들을 구조했다. 이어진 엄마와 네 자녀 그리고 클레오가 바닷가에서 얼싸안은 장면은 영화의 포스터 이미지이기도 하다. 혼자 남은 여자, 아이(들)을 홀로 키워야하는 처지의 엄마로서 소피아와 클레오는 운명을 공유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짐 정리, 집 정리를 하는 와중에 클레오가 옥상에 올라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긴 시간 동안 옥상 위의 클레오는 내려오지 않는다. 그녀가 위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고, 그녀가 아래로 몸을 던지거나 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영화 초반이 집의 일부인 바닥에 카메라를 고정시켜 보여주었던 것처럼 영화의 끝은 집의 가장 높은 곳을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며 잡고 있다. 상징의 차원에서 보자면 개똥을 치우기 위해 바닥을 응시하던 클레오를 더 고양된 인격을 가진 존재로 위치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전작인 그래비티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하겠는데, 그래비티에서는 우주에서 계속 하강해 물속을 거쳐 지상으로 올라오는 생명의 역사가 축약된 바 있다. 클레오는 승천한 것일까? 첫 장면에서 클레오가 안 보였지만 존재했던 것처럼 마지막에서도 그녀가 안 보여도 존재하고 있을 것 같다.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씬은 그래비티를 즉각 연상시킨다. 해외 리뷰에서도 감독이 이 영화를 본 것이 그래비티를 만든 직접적 계기인 것처럼 연출되었다는 평이 있다. 그러나 칠드런 오브 멘, 그래비티에 이어 로마도 직접적으로 젊은 엄마와 아기라는 소재가 사용되었고(이 투 마마 탐비엔도 그런 면이 있었던 것 같다), 이는 단순히 한 여성이 잉태를 하고 출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칠드런 오브 멘에서처럼 인류의 미래가 달린 문제일 수도 있고, 그래비티처럼 인류의 역사를 포함하면서 초월하는 생명의 역사에 대한 고찰이기도 했다. 후반부 바다에서 아이들을 구출하는 장면은 그래비티의 후반부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대학생들을 학살한 젊은 남성들이 훈련을 하던 장면에는 미국인 교관과 한국인 교관이 있었다. 한국인 교관은 새로 왔고 엄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는 한국말로 청년들을 통제했다. 실제 있었던 일인지 매우 궁금해지는 부분이었다. 71년에 왜 한국인 교관이 멕시코 정부의 일을 했던 것일까? 군부 독재의 경험 때문일까? 태권도? 월남전? 미국인 교관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는데 한국인이 개입되어있었다면 흥미로운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영화가 알폰소 쿠아론의 경험이 반영된 것이라면 그가 어린 시절 이런 광경을 목격했을까? 영화에서는 클레오만 그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쿠아론이 클레오의 말을 전해들었는지 아니면 아예 다른 경로로 전해들은 것을 클레오의 경험으로 상상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