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최근에 본 '리틀 드러머 걸'의 여주인공을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찬욱 감독이 만든 존 르 카레 원작의 이 드라마는 마이클 섀넌과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라는 유명 배우가 출연했지만 주인공인 여배우는 처음 보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본 적이 있는 얼굴 같았고, 그 이전 작품은 레이디 맥베스가 아닌가 싶었다. 검색해보니 정말 그러했다. 그녀의 이름은 플로렌스 퓨.
리틀 드러머 걸에서 극중 역할이 배우이면서 스파이로 활약하는 것인데 그녀의 거침없는 행동, 연기는 레이디 맥베스에서 그녀의 배역을 생각하면 매우 납득이 갔다. 그녀의 출연작은 아직 많지 않은데 거의 주연으로 출연했고 앞으로도 여러 작품이 공개될 예정이다.
레이디 맥베스는 제목에서부터 직접적으로 맥베스와 연결점이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마담 보바리와 유사성도 있다. 맥베스를 생각하니 최근에야 감상하게 된 넷플릭스의 대표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즈도 맥베스에서 따온 듯한 설정이 있다.
소문의 일본 영화인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과연 훌륭했다. 딱 보면 저예산인 것이 분명한 조잡한 화면의 영화이지만 그 시도 자체는 확실히 칭찬할만했다.
표면적으로 네 겹의 이야기가 겹쳐진 설정, 소설로 치면 액자 소설 같은 그러나 액자라고 하기는 애매한 중층의 서사 구조는 단순한 설정에 지친 사람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을 것 같다.
1차적인 차원, 바로 영화 시작 부분에서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좀비 주제의 공포 영화 장면이 진행된다. 그러나 곧바로 영화감독이라고 주장하는 캐릭터가 배우들의 연기를 지적하며 더 실감나게 하라고 다그친다. 즉 처음부터 영화의 이야기가 이중적임이 드러난다. 처음 등장한 여자, 남자 캐릭터는 사실 영화 속의 영화의 배우들이다.
좀비 영화 촬영 현장의 애환이 이어지더니 갑자기 영화 세트 밖에서 진짜 좀비가 나타나고 영화 스태프들이 차례차례 좀비로 변하며 여주인공을 제외한 모두가 좀비가 되거나 사망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렇게 1차적인 이야기가 종료되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이어서 1개월전으로 시간이 거슬러올라간다. 먼저 이야기에서 영화감독 역할로 출연한 배우가 실제 현실에서 영화 감독이었음이 드러나고 그가 생방송으로 좀비 영화를 찍기로 결정되는 과정이 펼쳐진다.
이야기는 또 한 번 전환되는데 영화 감독에게 아내와 딸이 있음이 드러난다. 그런데 아내는 1차적인 차원에서 출연했던 배우였다. 딸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영화 스태프를 직업으로 갖고 있다. 아내와 딸은 각기 다른 동기로 영화감독이 만들게 된 생방송 좀비 영화의 각본을 달달 외우게 된다. 영화 제작 과정, 특히 저비용 영화에서 흔히 그렇듯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촬영 전 준비과정부터 그랬는데 실제 촬영일에 위기는 절정에 이른다. 두 명의 출연 배우가 나타나지 못하며 영화감독과 그의 아내(그녀는 예전에 배우였으나 너무 배역에 몰두하여 다른 배우의 팔을 부러뜨린 후 연기를 그만두었다)가 대신 연기를 하게 된다. 영화 속 감독이 자신의 영화의 배우로도 출연하는 것이다. 좀비 역할을 맡은 사람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고, 카메라 담당은 갑자기 허리가 망가져 카메라를 들지 못하고, 영화 스태프 역할을 맡은 배우는 물을 잘못 먹어 설사를 한다. 그러나 생방송을 위해 영화는 계속 촬영된다.
첫번째 좀비 배우가 술에 취하자 감독이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는 위치에서 그의 몸을 움직여서 연기하도록 만든다. 감독의 소위 디렉팅이라는 것을 매우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만한데 사실 1차적 차원에서 이 좀비가 매우 실감났다는 것이 참으로 역설적이다.
감독의 아내는 오래간만의 연기자 복귀 자리에서 뛰어난 연기력과 순발력을 보였지만 나중에는 의욕이 넘치다못해 폭주하여 영화 자체를 망가뜨리게 된다. 그러자 그녀를 기절시키며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깨어난 그녀는 다시 영화에 등장하여 처음 그 장면을 볼 때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세번째 이야기 구조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은 감독의 딸이 펼친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배우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영화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생방송으로 돌아가는 원 컷 영화의 촬영과정에서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해결책을 제시했다. 사실상의 감독이 된 것이다. 클라이막스는 마지막 장면인데 이 장면을 찍기 위한 장비가 고장나자 그녀는 인간 피라미드를 쌓아서 그 장면의 촬영을 가능하도록 만든다. 이 지점은 사실 감동적이기까지 한데 왜냐하면 어린 시절 젊은 아빠가 꼬마인 그녀를 목마를 태우는 사진 한 장에서 딸이 영감을 받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전 장면에서 어린 시절 딸 사진을 보며 통곡하던 아버지, 감독이 나왔던 바, 자신과의 사진을 촬영 현장에 갖고 온 아버지에 대한 딸의 고마움이 영화를 무사히 끝마치는 원동력이 된다.
이렇게 영화는 끝이 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영화의 촬영 장면들이 또 다른 카메라에 의해 찍힌 것이 보인다. 여기서의 장면은 조금 전까지 배우들이 영화 스태프로서 좀비 영화를 찍는 것과 다르다. 이전에는 영화 속 감독과 스태프가 생방송 영화 촬영 및 상영이라는 좀체 있기 어려운 작업을 해내는 과정이 드러났지만 기실 그들이 찍은 영상이 영화 첫 부분의 1차적 차원의 영화가 아니었다. 실제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라는 이 영화의 촬영 스태프들이 1차적 차원을 찍은 것이고, 세번째 단계의 영화 촬영 장면은 이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촬영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아마 정확한 설명을 위해서는 각 차원과 인물들에 대해 번호를 매길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내가 적은 것이 영화를 보지 않은 누군가에게 오해없이 전달되리라는 자신은 없다.
영화에는 많은 카메라와 모니터 혹은 TV 화면이 등장한다. 영화를 실제 만드는 배우와 스태프 이외에 제작자, 시청자까지 다층적인 인물들도 있다. 배우를 찍는 카메라를 또 촬영화고 있는 카메라를 다시 촬영하는 카메라의 복잡한 구성도 있고, 영화에서 감독 역할을 맡은 배우는 순전히 소품으로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진지한 연기를 주문하고 카메라를 멈추면 안 된다고 외친다.
방송사와 제작자는 비교적 영화 작품 자체에 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생방송으로 촬영되어 공개되는 영화라는 모험을 하지만 감독 선정부터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것이 드러나고, 영화의 전개가 몇 차례 이상해지더라도 크게 신경쓰지 않거나 그냥 중단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 속 감독과 배우인 아내, 그리고 큰 역할을 한 딸은 매우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진지하게 이 허술한 좀비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해낸다.
엔딩 크레딧의 영화 스태프들이 열심히 뛰어다니며 영화를 찍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그 열정과 진지함을 생각하면 이 영화는 영화를 만든다는 행위의 진지함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인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진지함에 있어 배우보다는 감독이나 스태프들이 더 강조되고 있기도 하다. 마지막 인간 피라미드 장면에 이르면 배우, 스태프, 제작자가 모두 혼연일체가 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데 이를 보는 관객도 헛웃음도 짓다가 따뜻한 감동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