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15일 일요일

The level of Being

그저께는 짐짝이 되었다. 다마스에 네 명이 타야했는데 두 명은 좌석에 앉았지만, 둘은 화물칸에 짐들과 함께 앉았다. 크지도 않은 다마스에 덩치 큰 장정 두 명이 있으니 쪼그려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둘은 인간으로서 좌석에 앉지 못하고 화물이 되어 철창 밖을 바라보는 아픔을 느꼈다. 안에서 소리를 쳐도 아는 형조차 무심하게 눈앞에서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그 안에 갖혀있다는 가상의 상황을 연기한 것뿐이지만 그 갑갑함은 예전에 술집에서 주변 사람의 장난으로 수갑을 했을 때에 못지 않았다. 문득 인간 존재의 등급이 이렇게 철저하게 나눠지는구나 싶었다.

얼마전 에반게리온 시리즈에 등장하는 제레가 독일어이며 영혼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레(SEELE, soul). 위키피디아의 에반게리온 용어 해설 페이지를 보니 제레는 써드 임팩트을 일으켜 인류보완계획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들이 현실 속에서 찌질하게 살아가며 서로에게 상처주는 일을 없애고, 인류를 한 차원 높은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 차원 높은 인간. The Higher Man. 니체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종교를 통해 추구하는 것도 현실의 고난과 번뇌를 초월하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인간이 되는 것조차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에반게리온에서는 고슴도치인지 바늘두더지인지 헛갈리지만 서로 다가갈수록 상처를 주는 그 딜레마는 원래 쇼펜하우어가 한 말이란다. 하지만 가만 생각하니 고슴도치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지 의문이 생겼다. 위 사진들처럼 고슴도치는 종종 몸을 맞대고 살아가는데 다치고, 딜레마 상황에 놓일까? 따지고 보면 고슴도치의 딜레마란 인간 관계의 어려움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례지만 현실적인 상황은 아닌 것이다.

인간이 되는 것은 다른 생명체를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니 삶이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http://en.wikipedia.org/wiki/Neon_Genesis_Evangelion_glossary
http://scshin.egloos.com/3598268

2008년 6월 10일 화요일

The King: 사기다! (strong spoiler)

이 투 마마에서 처음 접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라틴계의 미소년 쯤으로 여겨졌다. 아마로 신부의 죄에서는 처녀가 애를 배도록 만든 신부 역할을 맡아서 좀 깬다 싶었다. 수면의 과학에서도 범상치 않은 역할이었고, 그나마 바벨에서는 이해할만한 인물을 연기했다. 하지만 난 평범한 캐릭터보다 희한하고 엽기적인 캐릭터에 더 열광하는지라 이 배우가 마음에 들었다.그런데 베르날의 영화 중 내가 놓친 영화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좋은 영화를. 바로 더 킹이다.

아주 우연히 그리고 급작스럽게 더 킹을 만났다. 매달 발급되는 알라딘의 맥스무비 할인쿠폰을 이용해서 급하게 볼 영화를 찾던 와중에 씨네큐브에서 이 영화가 상영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혼자 보기에 좋은 영화인 것 같아 덥썩 예매했다.

극장에 가기 전에 영화 정보를 확인하지 않아서 신작 영화인줄 알았고,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계속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미 2005년에 개봉되었단다. 이 글을 쓰는 것은 영화를 보고 시간이 꽤 지난 시점이라 기억이 많이 사라진 것이 아쉽지만 영화의 내적 논리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보는 재미를 느낀 흔치 않은 영화였다. '~의 왕'도 아닌 더 킹이라는 대범한 제목을 건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주요 줄거리는 막 제대한 엘비스(베르날)가 죽은 어머니가 남긴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만난 적이 없는 아버지를 찾아나서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이다. 핵심은 가족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주인공들을 살펴보면 윌리엄 허트(데이빗, 아버지 역),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엘비스, 데이빗의 사생아), 펠 제임스(맬러리, 데이빗의 딸), 폴 다노(폴, 데이빗의 아들), 로라 해링(트윌라, 데이빗의 부인)이다. 사진 속에 나타나듯 원래 가족의 일원인 폴 다노는 사라지고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연히.

느닷없이 아버지를 처음 찾아간 날 엘비스는 가혹하게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들어야했다. 데이빗의 논리는 예전의 사고는 안타깝지만 지금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엘비스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현실을 거부하고 거대한 복수를 계획한다. 그 복수 과정에 이복동생과의 사랑이라는 변수가 개입하여 문제는 아주 복잡해진다.

여동생 맬러리와 엘비스가 심각한 사이라는 것을 눈치챈 폴은 엘비스를 찾아가 따졌고, 나중에 엘비스는 아니라고 했지만 내 생각엔 다분히 고의적으로 폴을 살해했다. 영화 전반부에 폴이 데이빗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라는 말이 거듭해서 명시적으로 언급되었는데, 그 아들이 사라진 것이다. 가족은 큰 위기에 빠진다.

영화의 배경으로 깔리는 교회의 이미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는 교회와 기독교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데이빗은 지역 사회에서 신뢰를 받는 목사지만 목회자가 되기 이전에 엘비스라는 사생아를 낳았다. 하지만 신의 은총으로 과거의 과오는 용서받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신이 자신의 과거를 지워줬다고 믿었는지 몰라도 그 무책임함은 결국 부적절한 아들이 적합한 아들을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아내와 아들, 딸 한 명씩을 둔 단란하고 이상적인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겠다는 욕심은 부적절한 아들을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집으로 불러들였고, 결국 아내와 딸까지 잃고 만다. 이제 그가 적합하다고 믿은 가족은 사라지고 원래 가족이 되었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원래의 아들(엘비스)만이 남는다. 그 아들은 묻는다. 신은 나를 용서할 것인가?


마침내 데이빗은 비록 사생아지만 엘비스가 자신의 아들임을 교회 내에서 선포했고, 소수의 신도는 저주를 하며 떠났지만 많은 이들은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박수를 쳤다. 현실의 아들이 사라진 이후에 많은 무리를 하며 받아들인 또 다른 아들.


맬러리는 오빠를 사랑하고 오빠의 아이를 잉태한 것을 나중에야 알았고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엘비스는 태연하게 음료수를 마시며 왕관을 쓴다. 목사인 아버지 데이빗이 기독교의 권위와 가식을 등에 업고 자기를 거부했을 때부터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았던 것일까. 아무도 사생아이자 살인자인 엘비스를 저지하지 못했다. 나는 맬러리가 자살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엘비스가 맬러라와 트윌라를 제대하며 은닉해서 가져온 총으로 죽이며 스토리를 완결했다.

영화의 내용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매력적인 십대 여고생 역할을 맡은 펠 제임스가 사실은 30대라는 것이 가장 충격적이다. 사기 수준이다. 영화 찍을 때는 비록 20대 후반이었지만, 심지어 오빠로 나온 폴 다노는 물론 베르날보다도 나이가 많다. 나는 완전히 10대로 철썩같이 믿고, 성관계 장면을 어떻게 찍은 것일까, 역시 18세는 넘은 배우겠구나 짐작하는 정도였건만.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로라 해링을 다시 만난 것도 반가웠는데 장성한 자식들을 둔 중년 여성으로 나와 이질감이 느껴지긴 했다.

2008년 5월 18일 일요일

Speed Racer: Panic!

아동용 영화같다는 영화 평을 얼핏 보고 극장에 갔지만 레이싱 영화가 어떻길래 그럴까 고개가 꺄우뚱해졌다. 어쨌거나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라는 말에 어느 정도의 기대를 갖고 갔다.



주인공의 성은 레이서요, 이름이 스피드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조롱한대로 영화는 아동용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도 어색하지 않았다. 실제 레이싱 경기장의 박진감이 아니라 CG로 창조한 롤러코스터 같은 경기장에서 카트레이서를 방불케 하는 폭력적 레이스가 펼쳐졌다.



인투더와일드를 비롯해 요즘 많은 영화에 출연하는 에밀 허쉬가 스피드 레이서 역을 맡았고, 로스트에서 최고의 훈남으로 등극한 매튜 폭스가 레이서 X로 나온다. 수잔 서랜든이 비교적 젊은 엄마로 나와 어색했고, 존 굿맨은 키가 너무 크게 나와 한동안 알아보지 못했다. 비는 역시 대사가 많지 않았고(이건 영화 전체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캐릭터의 일관성이 떨어지는 역할을 맡았다. 과연 미국에서조차 저조한 흥행을 거둔 이 영화로 비가 월드 스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원작 만화라는데 영화가 원작의 세세한 부분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은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만.



감독은 이 영화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가족에 대한 사랑? 거대 자본이 짜고 치는 판에서 레이싱에 대한 순수한 열정만으로 우승하는 도전 정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기대한 것은 매트릭스 3부작의 영향이 클 것이다. 실제 이 영화는 매트릭스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화려한 영상은 기본이고, 네오에 대응하는 스피드 레이서라는 한 명의 영웅에 의해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기본 줄기도 그렇다. 하지만 매트릭스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진 반면 스피드 레이서는 별다른 두통거리를 주지 않는다. 매트릭스가 생각하거나 즐길 수 있는 두 가지 알약을 줬다면 스피드 레이서는 보고 즐기라는 헐리웃 영화의 기본적인 메뉴만 제공할 뿐이다. 그것도 나름의 미덕이지만 워쇼스키의 영화를 기다린 팬들은 아마도 더 많은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2008년 5월 14일 수요일

Dodgeball: A True Underdog Story


"Dodgeball(피구의 제왕)"을 처음으로 다 봤다. 몇 년 전 한국에서 극장 개봉하기 전 올해 꼭 봐야 할 영화로 점찍어두었건만 약속은 지키지 못했고 시간이 마구 흘러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상영할 때 뒷부분만 봤다. 하지만 뒤만 봐서는 이 영화가 왜 그렇게 기대작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교롭게 최근 일본 피트니스 클럽에 대한 책을 읽어서인지 이번에 제대로 보니 영화는 의외로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Dodgeball은 의미상 거의 피구와 대응하는 단어다. '피구왕 통키'의 기억 때문일까? 피구는 왠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찾아보니 Dodgeball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주로 하는 스포츠로 미국에는 프로 다지볼 리그도 있단다(http://www.thendl.com/). 요는 피구왕 통키의 경우가 일본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스포츠를 부각한 것과 달리 '피구의 제왕'은 적어도 그럴 듯한 배경은 있다는 점이다. 비록 영화에서 국제 피구 대회가 소재이긴 하지만(불꽃슛을 장착하지 못한 일본 팀은 아주 간단히 패배한다).

영화는 짐(gym)간의 대결을 다루는데 궁극적으로는 이상적인 신체에 대한 이념의 대결이기도 하다.


헬스클럽, 피트니스클럽, 체육관 등 뭐로 부르건 간에 요즘 사회에는 위 사진의 배경처럼 성난 황소를 다룰 정도의 힘과 근육을 기르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 훈련하는 장소들이 즐비하다. 영화가 시작할 때 벤 스틸러는 날씬하고 근육으로 다져진 몸매를 자랑하며 자신의 Globo Gym을 광고한다. 짐의 이름은 나이키, 맥도날드처럼 흔히 볼 수 있는 글로벌 기업을 연상시킨다. 또 벤 스틸러의 영화 속 이름은 White Goodman이다. 이름부터 좋은 이미지가 풀풀 풍겨나오지만 그의 좋은 몸매와 부 그리고 그의 피트니스 제국은 결국 패배하고 만다.

상대편으로 나온 빈스 본은 Average Joe's 짐을 운영한다. 이 짐은 우락부락한 몸매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아주 '평균적'인 혹은 막되먹은 몸매를 가져도 괜찮은 장소다. (영화 막판에 여자친구를 임신시키는 발칙한 놈이지만)고등학생부터 중년의 아저씨까지 연령도 다양하다. 이 짐은 친근하고 가족적인 공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러니다. 체육관이 꼭 근육질 몸매를 만들기 위한 곳은 아니라도 속성상 막되먹은 몸매로 바보같은 장난을 하기 위한 장소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몸을 가눌 수도 없이 비만에 찌든 벤 스틸러가 닭다리를 물어뜯는 모습은 첨단 시설에서 만들어낸 근육질 몸과 소파에 앉아 스낵을 먹으며 만들어낸 뚱보가 한끗 차이임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국 사회에 만연한 패스트푸드로 인한 비만을 탈출하기 위한 운동이 지나치게 되면 즉 강박관념의 산물이라면 언제라도 실패할 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애버리지 조의 체육관이 영화 막판처럼 대규모가 되었는데 글로보 짐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을까? 피터(빈스 본)의 선의가 후대 경영자에게까지 이어질까? 괜한 걱정인지 모르지만 미국식 자본주의 사회에서 애버리지 조는 취약한 구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영화 초반처럼 경영난에 시달리며 또 다른 White Goodman에게 합병당할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자본이 공격하는 공(ball)을 피하기(dodge) 위해서 또 다시 라스 베가스에서 도박을 해야한다면 지나치게 취약한 구조다. 게다가 피터가 개성있는 몸매를 중시하지만 형체없고 막연한 평균(average)을 동시에 말한다면 결국 글로보 짐의 흔한 근육덩어리들과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 없지 않을까? 평범한 막되먹은 몸매와 평범한 근육질 몸매... 애버리지 조의 막되먹음도 자유로운 바디라인을 권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Mad Cow Disease or BSE(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광우병 열풍이다. 이미 외국에서 여러 번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광우병에 걸렸을 수도 있는 소를 한국이 수입하게 된다고 하자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고 있다. 문득 작년에 본 꿀벌의 실종에 대한 다큐가 떠오른다. 꿀벌의 죽음에 따른 생태계의 파괴, 그 이후의 예측할 수 없는 파국이 예고되고 있지만 그다지 신경쓰는 사람은 없다. 광우병에 대해서 국내 언론도 간간이 위험을 경고했고 작년 KBS는 꽤 정성들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 쇠고기 협상 이전에 광우병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

이번 쇠고기 협상에 별 문제가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주장하듯 광우병에 걸린 소를 먹을 확률이 지극히 낮은 것은 맞는 말이다. 자동차 사고로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지만 자동차 운전을 막지 않듯 광우병에 걸린 소가 있다고 소를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억지인 측면이 있다.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한다는 '기우'라는 고사가 떠오르는데 과학적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하더라도 대재앙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거나 애써 무시하며 살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면 왜 이번 쇠고기 협상이 문제인가?

미국에 대한 정치적 선물이었다는 의혹을 제기할 수 있겠고, 단지 졸속협상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다. 영어 해석에 문제가 있는 관료들의 무능함, 거짓이 드러났는데 뻔뻔하게 같은 말을 반복하는 태도도 물론 문제였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쇠고기를 먹는 식습관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소뼈가 들어간 음식을 즐겨먹는 한국인의 식습관을 문제삼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극히 제한된 시기에 맛볼 수 있었던 쇠고기를 일상적으로 먹는 지금의 생활이 올바른지 생각해볼 일이다.

인류가 육식을 한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육식을 위해 다른 동물들을 우리에 가두고 조직적으로 기른 역사는 길지 않으리라. 대통령의 말대로 우리는 누구나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를 꼭 먹어야 할까? 농경사회에서 소는 기본적으로 농사를 짓기 위한 도구였기에 소를 많이 먹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쇠고기는 고급 한식당이나 아웃백과 같은 비싼 패밀리 레스토랑의 주요 메뉴로 사용된다. 비싼 고기를 먹는 폼나는 생활... 우리는 미국인들처럼 쇠고기를 마음껏 먹고 싶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19세기말에 시작된 근대인으로의 신체 개량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며칠 전 경향신문에서 고미숙씨는 광우병은 육식을 위해 소를 사육한 인간이 받는 천벌이라고 했다. 인간을 위해 길러졌기에 이종(異種)인 인간이 당연히 피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어제는 눈이 왔다고 하는데 요즘 환경 재앙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많아지고 있고 강도도 높아지고 있다. 쓰촨성의 지진은 대륙판의 충돌로 인한 것이라는데 그런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단지 지금 잘살아보겠다는 개개인의 몸부림은 가까운 미래의 재앙을 점점 키우고 있는 것 같다. 굳이 광우병 고기를 먹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미쳐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2008년 4월 18일 금요일

어른이 무섭지 않다

이제 와서 내가 어른이 아니라고 하면 야유를 받을 일인지 모르지만 마음만은 청춘이고 싶은데 길을 걷다 문득 내가 어른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국 YMCA의 역사를 훑어보며 '청년'이라는 말을 YMCA에서 쓰기 시작하자 그 말이 유행처럼 번져나가서 짝퉁 '청년회'를 막느라 고생했다는 대목을 발견했다. 그 전에는 소년에서 바로 장년으로 점프하는 체계였다고 한다. 아동이라는 것도 근대가 창출해낸 것이라고 하는데, 인생의 구분이 참 세분화되었구나 싶다. 유아, 소아, 어린이, 소년, 청소년, 청년, 젊은이, 청장년, 장년, 중년, 노년 등등. 그건 오르고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더 늘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결혼은 안 했으니 아직 청년에 머무른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회사에 다닌 경험 때문인지 50~60대를 만나도 별 부담없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개인적인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이면 문제가 달라지긴 하지만. 학교에서 계속 있었다면 1년이라는 학년 차이도 크게 느껴지고 3년 이상 차이나면 아득한 선배로 생각하기 쉬웠을 터이다. 대학 2, 3학년 친구들이 노땅이 되었다고 좌절하는 것이 가소롭게 보인지 이미 오래. 이런 저런 일로 사장님들과도 많이 만나다 보니 이젠 어른이 무섭지 않다. 대신 애들이 무섭다.

2008년 4월 17일 목요일

일본 축구 도입사

JFAはいつ設立されたの?

1921(大正10)年9月10日に、大日本蹴球協会(The Football Association of Japan)として設立されました。
1917(大正6)年に東京の芝浦埋立地で第3回極東選手権大会が行われ、日本は初めて公式な国際試合に出場しました。しかし、結果は中国にもフィリピンにも惨敗。この結果を受け、日本のサッカーを強くしたい、アジア諸国と対等な試合ができるようにしたいと、翌年の1918(大正7)年に東京・名古屋・豊中で大会を開催しました。出場したのは主に中等学校チームで、大学や専門学校は少数でしたが、新聞報道の誤りにより、ロンドンのメディアでは全日本選手権大会が行われたと報道されてしまいました。翌1919(大正8)年に、イギリス大使館を通じてイングランドサッカー協会(The Football Association)から大銀杯が贈られ、「全日本蹴球協会の成立を聞き、はるかに祝意を表してこの銀杯を寄贈します。全国大会で優勝したチームに授与するようお取り計らいください」と書かれた手紙が添えられていました。このときまだ全国規模の大会も行われておらず、日本のサッカー競技を統括する組織もできていませんでした。しかし、この寄贈された大銀杯を授与すべく全日本選手権大会を行うこととし、東京高等師範学校の校長であった嘉納治五郎と、校友会蹴球部部長の内野台嶺らが中心となって大日本体育協会の協力を得、1921(大正10)年9月10日に大日本蹴球協会(The Football Association of Japan)を設立することとなりました。戦後、名称を「日本蹴球協会」と改めて国際サッカー連盟(FIFA)に加盟、1974年に財団法人化した際に「財団法人 日本サッカー協会」と名称変更しました。
http://www.jfa.or.jp/fanzone/faq/jfa/answer/index.html#answer2


日本での競技の歴史

日本にサッカーがやって来たのは、一説には19世紀、明治時代のことだといわれています。初めて組織化されたのは1921年で、創立された協会は「大日本蹴球協会」でした。

その後、1925年に(財)日本体育協会、1929年に国際サッカー連盟(FIFA)に加盟。1936年には第11回ベルリン大会に初出場を果たしました。

日本チームがオリンピックで初めてメダルを獲得したのは、1968年の第19回メキシコシティー大会で、銅メダルでした。

日本のサッカーの歴史は、(財)日本サッカー協会のホームページ「主要年表」で詳細がご覧いただけます。

http://www.joc.or.jp/sports/football.html


母国からの伝来
フットボールが日本にやってきたのは1873年(明治6年)。東京築地にあった海軍兵学寮の教官として来日した英国海軍のアーチボールド・ダグラス少佐と33人の部下たちが、訓練の余暇にレクリエーションとしてプレーしたのが最初だとされている。

1873年といえば、明治新政府によって欧米に派遣された岩倉使節団が帰国した年。新しい国づくりのために、西洋の国家制度や産業、文化などを積極 的に取り込もうとする機運が日本に溢れていた時期でもあった。また、英国で初めてフットボールの統一ルールが定められ、イングランドサッカー協会(FA) が設立されてから10年後のことであった。

フットボールの普及
ダグラス 少佐らの帰国後、日本からフットボールの記憶が消えてしまう時期もあったが、1900年代に入るとフットボールは日本国内に急速に普及していく。それは学 校教育を通してという日本特有のものであったが、東京高等師範学校で教えていたスコットランド生まれのデ・ハビラントや、名古屋の第八高等学校蹴球部を指 導したオックスフォード出身のウィルデン・ハートら、多くの英国人がフットボールの普及にかかわった。

1917年(大正6年)には日本で最初のフットボールの公式国際大会が芝浦埋立地で行われ、これを契機に普及の輪は大きく広がっていく。そして翌 1918年(大正7年)1月には、現在の全国高校サッカー選手権の前身である日本フットボール大会(大阪)が、2月には関東蹴球大会(東京)、東海蹴球大 会(名古屋)がそれぞれ開催された。

しかしさまざまな事情から、それらを統括する全国的な組織が誕生することはなかった。そんな時、ある出来事がフットボール創世記の日本に起こる。そして、それが日本フットボール界を大きく前進させることになった。

誤解が生んだ貴重な贈り物
1919 年(大正8年)3月12日、東京朝日新聞紙上に突如として掲載された記事は、当時のフットボール関係者を驚かした。紙面には立派な銀製のトロフィーの写真 とともに「イングランドサッカー協会から『日本の蹴球協会』へ純銀製の立派なカップを寄贈してきた」という内容の記事が掲載されていたからだ。

外国通信社の誤解により、前年に大阪、東京、名古屋で行われた大会が、「日本にも国内を統括する団体ができ、その全日本選手権の地方予選が3カ所で同時に行われた」かのようにロンドンへ伝わった。

このニュースを受けたイングランドサッカー協会(FA)では、早速、日本へ銀杯(FA杯)を寄贈する話がまとまり、1919年(大正8年)1月には FA杯と「フットボール協会の設立に祝意を表するとともに全日本選手権の優勝チームに授与してほしい」との書簡がロンドンから送られたのだった。

同年3月28日、当時の東京高等師範校長であり、大日本体育協会会長を務めていた嘉納治五郎が英国大使館にてFA杯を受領。その際、英国大使は「これによって、日本のスポーツが一層盛んになり、そしてまた、両国の国際関係も親密になるように」と述べた。

協会設立と全日本選手権
そし て1921年9月10日に大日本蹴球協会が設立された。同年11月には全日本選手権が行われ、優勝チームである東京蹴球団にはエリオット駐日英国大使から FA杯が授与された。なお、大日本蹴球協会、ならびに全日本選手権設立の際には、英国大使館書記官ウィリアム・ヘーグが多大な尽力を果たした。

こうして4チームのエントリー(うち1チームは事情により棄権)で始まった全日本選手権は拡大を続け、日本で最も権威のある大会として受け継がれている。

一時は出場資格が限られた時期もあったが、第52回大会(1972年度・昭和47年度)から、日本協会全加盟チームに出場資格を与えるオープン化に踏み切ると、この年の大会には地域予選を含めて75チームが参加。翌年にはその数は807まで増加した。

その後も拡大の一途をたどる大会は、第78回大会(1997年度・平成9年度)からは、全国を9ブロックに分けて行っていた予選を廃止し、全国47 都道府県代表チームに出場権を与えるとともに、18歳未満の第2種加盟チームにも門戸を開放。地方予選からの参加チーム総数は6,000を越えた。

なお、決勝大会は各都道府県予選を勝ち抜いた47チームに、Jリーグ加盟チーム、JFL上位チーム、総理大臣杯上位チーム、全日本ユース優勝チーム を加えた80チームで争われているが、こうした出場資格の拡大はイングランドのFAカップの精神に習ってのこと。イングランドから寄贈されたFA杯から始 まった大会にとっては当然の流れだった。

http://www.britishcouncil.org/jp/japan-sport-footballculture-history-japan.htm


(4)日本のサッカーの歴史
サッカーは、明治維新後に日本に伝えられたと言われています。1873年(明治6年)には、当時日本の海軍兵学寮に教官として招かれたイギリス人将 校ダグラス少佐が、日本海軍の軍人たちにサッカーを教えたという記録が残されています。19世紀の終わりになると、学校の先生を養成するために設立された 師範学校を中心に、サッカーのクラブが設立されるようになります。そして、師範学校を卒業したサッカー選手が、全国各地で学校の先生となってサッカーが広 く全国に広まることとなりました。
その結果、1918年(大正7年)には現在の高校選手権のもととなる日本最初のサッカー大会が大阪でスタートするとともに、1921年(大正10 年)には、現在の日本サッカー協会のもととなる「全日本蹴球協会」が設立され、第1回の「全国優勝競技大会」(現在元旦に決勝戦が行われる天皇杯全日本選 手権大会の前身)が行われました。

http://www.mext.go.jp/worldcup/dokuhon/2_1_4.htm


일본 야구 日本での競技の歴史

日 本の社会人野球の発端は1879年(明治11年)に新橋駅の鉄道関係者によってつくられた、「新橋アスレチックスクラブ」でした。日本の景気が好調だった 1916年頃(大正5年)、企業が野球チームを持つようになり、各地で実業団野球大会が開催さ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都市対抗野球大会の誕生は1927年 (昭和2年)です。

1949年(昭和24年)2月16日には342の加盟チームを有する日本社会人野球協会が発足、1990年(平成2年)に現在の(財)日本野球連盟が設立されました。

1992 年第25回バルセロナ大会から野球がオリンピック競技になることを受け、全日本アマチュア野球連盟が同日設立されました。(財)日本野球連盟は、社会人や 少年野球などアマチュア野球の大会開催、野球技術や審判技術の向上のための講習会、少年野球の育成に努めています。

オリンピックには、1992年第25回バルセロナ大会から3大会連続出場し、バルセロナでは銅メダル、1996年第26回アトランタ大会で銀メダル、2000年第27回シドニー大会では4位入賞という成績を残してい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