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23일 월요일
Terminator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6년 생활을 마감하던 마지막 겨울 방학을 장식한 영화가 있었으니 터미네이터다. 시골 소년이었던 나는 중학생이 되어 원주 시내에서 좀 놀겠다는 기대도 있었고, 풋사랑의 재미를 느끼는 시절이기도 했다. 소위 청소년이 되려는 시기에 본 터미네이터는 당시의 상황과 어울려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랑하는 방법도 학습하는 것인지라 그 때까지는 영화의 키스 장면이 나와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시골 마을에서 키스는 커녕 어떤 농밀한 신체 접촉도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학급 친구들이 저학년 시절 이성에 대한 단순한 적대심을 버리고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하여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주고, 졸업 선물을 주고 받는 등 변화가 나타났다. 그래서인지 이전에 많은 로맨스 영화들을 봤겠지만 로맨스가 주된 내용이 아닌 터미네이터의 연애 장면이 오히려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터미네이터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시간축을 무시한 영화의 내용이었다. 존 코너의 아버지가 미래에서 날아왔다는 설정 때문에 애당초 존 코너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인지 궁금증이 생겼고, 마침 토요명화에서 방영한 터미네이터를 본 학급 친구와 그 이야기를 나눴으나 별 소득은 없었던 것 같다.
여하튼 터미네이터는 몸짱 아놀드가 돌아오겠다, 돌아왔다를 연발하며 3편까지 제작되었고, 최근 2, 3편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번에 볼 때 시간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를 주목했지만 대충 얼버무리기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3편은 어떤 블로그에서 본 대로 1, 2편의 패러디 영화의 성격이 강했다.
시간 이동은 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였다. 그러나 '잘못된' 과거를 바꾸겠다는 은밀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변경된 과거로 인해 현재가 통째로 바뀌는 위험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거나, 과거에서 다른 행동을 해도 결국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과로 이어지곤 했다. 터미네이터에서는 기계들이 인간 군대의 지도자를 제거하기 위해 과거로 인간형 병기를 보낸다는 설정이다. 미래 인간 군대에서도 대응하기 위한 사람과 기계 병기를 차례로 보내는데 결국 존 코너를 지켜낸다.
터미네이터에 대한 몇 가지 설명 방식들을 봤지만 납득하기는 힘들고, 지금 떠오르는 의문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기계들은 왜 존 코너 암살을 위한 터미네이터를 띄엄띄엄 보내나?
- 터미네이터1, 2, 3는 거의 10년씩의 시간 간격을 두고 제작되었다. 이런 제작 시기의 문제 때문에 10년 주기로 기계들이 과거로 투입되는 것은 이해할만하나 매번 업그레이드된 성능의 터미네이터를 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터미네이터 여러 대를 보내지도 않고, 더 자주 보내지도 않은 이유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3편에서 아놀드는 자신이 공장에서 양산되는 모델임을 밝히기도 했다.) 로봇과 인간의 전쟁이 몇 년 지속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로봇이 스스로 개발을 거듭해 진화된 병기를 양산했다면, 존 코너가 이끄는 인간이 한정된 자원과 재래식 무기로 어떻게 승리를 할 수 있는지도 납득하기 힘들다.
2. 2, 3편의 터미네이터는 어떻게 의복까지 함께 복원되는가?
- 2, 3편의 터미네이터들이 알몸으로 과거로 갔다가 처음 얻어입은 옷을 입은 상태로 매번 재생되는데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몇 번씩 총알로 벌집이 되는 터미네이터들이 그 때마다 옷까지 다 헤지면 또 누군가의 의복을 갈취해야하니 번거롭고, 단순히 의상 담당자가 귀찮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누드를 덜 보여줘서 심의 등급을 낮추거나, 막되먹은 기계라도 옷을 입혀서 관객의 눈을 편하게 해주기 위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3. 터미네이터는 왜 인간형인가?
- 이것은 얼핏 생각하는 것보다 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3편에서 기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순간을 보면 로봇들은 인간처럼 머리와 몸통이 있지만 다리 대신 바퀴가 달려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인간과 기계의 전투가 심화될 때를 보면 기계들은 보통 두 다리를 가진 인간형이다. 과연 두 다리를 가진 로봇이 가장 효율적일까? 기계들이 인간형인 것은 효율성이나 기계들의 진화의 산물이라기보다 기계와 인간의 대결을 역사상 지속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결의 또 다른 형태로 풍자한 것이 아닐까 싶다.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 매트릭스 등에서 꾸준히 인간 아닌 것이 인간과 같은 의지와 감정을 가지게 된다면 인간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들이 제기되어왔다. 순전히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나 인간의 신체가 노화, 사고, 병으로 망가졌을 때를 대비해 '만든' 복제인간의 존재는 어떻게 봐야 할까? 터미네이터는 스스로 기계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기에 인간이 되겠다고 하지는 않고 무게나 힘 등에서 인간과 확실히 차이가 나기에 문제가 덜 되지만 아일랜드에서처럼 복제인간들이 인권을 주장하고 나서면 외형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어 골치아픈 문제가 제기된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2편에서는 확실히 그리고 3편에서는 불분명하게 아놀드가 프로그램된 명령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을 통해 스스로를 버리는 모습이 나온다. 비록 아놀드는 자신은 죽음에 대한 관념이 없다고 하지만 2편의 자살신은 에일리언 시리즈에서 시고니 위버가 용광로에 뛰어들어 죽는 장면과 여러모로 유사해보인다.
이 시리즈에서 기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 매트릭스 시리즈에서처럼 인간을 동력원으로 착취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인간의 통제가 '싫은' 것인지, 기계가 아닌 존재들은 전부 없애겠다는 것인지, 그렇다면 에너지는 어떻게 얻으려고 했던 것인지, 의지가 있다면 기계들끼리의 권력 투쟁은 없었는지 등 설명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 3편 마지막에서는 스카이넷이 요즘 회자되는 집단 지성과 비슷한 것처럼 설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기계들의 '배후'나 다른 기계를 통제하는 메인 컴퓨터는 정말 없는지도 궁금한 점이다.
4. 시간 여행이 애당초 가능한 것인가?
- 이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시간이 시계에서 보는 가시적인 존재가 아님은 물론, 선후 관계가 항상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 정도만 말할 수 있으리라. 과거, 현재, 미래라는 분류의 불분명함. 불가능한 진보. 영원회귀...
2008년 6월 15일 일요일
토마토의 공포
매점에서 토마토가 다 팔려나가 대신 과자 한 봉지를 사고 말았다. 토마토에 대한 이 글은 쓴다고 생각한지 한참 지났지만 이제서야 대충이라도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쇠고기로 인해 촉발된 먹거리에 대한 걱정은 우리가 별 생각없이 섭취했던 온갖 음식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생쥐깡, 통조림의 온갖 이물질 등 눈에 보이는 것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걱정도 스멀스멀 자라났다.
그러는 와중에 미국에서는 살모넬라 토마토가 나타나 식중독을 일으키는 것이 큰 이슈가 되었다. 그나마 좋아하는 토마토인데 식중독이라니 믿을 거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우리' 토마토는 안전하다고 했겠고 나도 몇 개 먹었지만, 스스로를 신이 축복한 나라로 여기는 미국에서 왜 그리 위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지는 신만이 알 일인지 어떤지.
미국은 토마토의 위험을 이미 인지했는지 단지 상상력이 풍부해서인지 토마토가 식인을 하는 영화들을 두 편이나 만든 바 있다. 토마토 공격대, 토마토 대소동 2. 보진 않았지만 1988년에 만들어진 2편에는 무려 조지 클루니가 출연했단다.
스파이더윅 크로니클이라는 최근 영화를 보면 (정확하진 않지만 단순화해서) 괴물들을 퇴치하는데 토마토가 사용된다. 그래서 여기부터는 토마토에 어떤 신성한 의미가 부여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토마토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찾아보았지만 뾰족한 해답은 없었다. 다만 케찹이나 파스타 등 음식 재료로 널리 쓰이는 토마토가 처음부터 환영받는 먹거리는 아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초창기 미국의 청교도들은 토마토를 최음제로 여겨 기피했다고 한다.
스페인 발렌시아의 토마토 축제는 유명하고, 축제 기간 동안 엄청난 분량의 토마토가 놀잇감으로 사용되지만 이 축제 자체는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스파이더윅 크로니클에서 토마토가 사용되는 장면을 보면 붉은 점액이 퍼지는 이미지를 보게 되는데 토마토의 붉은 색이 피와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생명과 열정. 발렌시아에서 토마토를 던지며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감각을 되살리는 것일까.
http://en.wikipedia.org/wiki/Tomato
쇠고기로 인해 촉발된 먹거리에 대한 걱정은 우리가 별 생각없이 섭취했던 온갖 음식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생쥐깡, 통조림의 온갖 이물질 등 눈에 보이는 것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걱정도 스멀스멀 자라났다.
그러는 와중에 미국에서는 살모넬라 토마토가 나타나 식중독을 일으키는 것이 큰 이슈가 되었다. 그나마 좋아하는 토마토인데 식중독이라니 믿을 거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우리' 토마토는 안전하다고 했겠고 나도 몇 개 먹었지만, 스스로를 신이 축복한 나라로 여기는 미국에서 왜 그리 위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지는 신만이 알 일인지 어떤지.
미국은 토마토의 위험을 이미 인지했는지 단지 상상력이 풍부해서인지 토마토가 식인을 하는 영화들을 두 편이나 만든 바 있다. 토마토 공격대, 토마토 대소동 2. 보진 않았지만 1988년에 만들어진 2편에는 무려 조지 클루니가 출연했단다.
스파이더윅 크로니클이라는 최근 영화를 보면 (정확하진 않지만 단순화해서) 괴물들을 퇴치하는데 토마토가 사용된다. 그래서 여기부터는 토마토에 어떤 신성한 의미가 부여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토마토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찾아보았지만 뾰족한 해답은 없었다. 다만 케찹이나 파스타 등 음식 재료로 널리 쓰이는 토마토가 처음부터 환영받는 먹거리는 아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초창기 미국의 청교도들은 토마토를 최음제로 여겨 기피했다고 한다.
스페인 발렌시아의 토마토 축제는 유명하고, 축제 기간 동안 엄청난 분량의 토마토가 놀잇감으로 사용되지만 이 축제 자체는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스파이더윅 크로니클에서 토마토가 사용되는 장면을 보면 붉은 점액이 퍼지는 이미지를 보게 되는데 토마토의 붉은 색이 피와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생명과 열정. 발렌시아에서 토마토를 던지며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감각을 되살리는 것일까.
http://en.wikipedia.org/wiki/Tomato
The level of Being
그저께는 짐짝이 되었다. 다마스에 네 명이 타야했는데 두 명은 좌석에 앉았지만, 둘은 화물칸에 짐들과 함께 앉았다. 크지도 않은 다마스에 덩치 큰 장정 두 명이 있으니 쪼그려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둘은 인간으로서 좌석에 앉지 못하고 화물이 되어 철창 밖을 바라보는 아픔을 느꼈다. 안에서 소리를 쳐도 아는 형조차 무심하게 눈앞에서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그 안에 갖혀있다는 가상의 상황을 연기한 것뿐이지만 그 갑갑함은 예전에 술집에서 주변 사람의 장난으로 수갑을 했을 때에 못지 않았다. 문득 인간 존재의 등급이 이렇게 철저하게 나눠지는구나 싶었다.
얼마전 에반게리온 시리즈에 등장하는 제레가 독일어이며 영혼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레(SEELE, soul). 위키피디아의 에반게리온 용어 해설 페이지를 보니 제레는 써드 임팩트을 일으켜 인류보완계획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들이 현실 속에서 찌질하게 살아가며 서로에게 상처주는 일을 없애고, 인류를 한 차원 높은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 차원 높은 인간. The Higher Man. 니체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종교를 통해 추구하는 것도 현실의 고난과 번뇌를 초월하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인간이 되는 것조차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에반게리온에서는 고슴도치인지 바늘두더지인지 헛갈리지만 서로 다가갈수록 상처를 주는 그 딜레마는 원래 쇼펜하우어가 한 말이란다. 하지만 가만 생각하니 고슴도치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지 의문이 생겼다. 위 사진들처럼 고슴도치는 종종 몸을 맞대고 살아가는데 다치고, 딜레마 상황에 놓일까? 따지고 보면 고슴도치의 딜레마란 인간 관계의 어려움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례지만 현실적인 상황은 아닌 것이다.
인간이 되는 것은 다른 생명체를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니 삶이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http://en.wikipedia.org/wiki/Neon_Genesis_Evangelion_glossary
http://scshin.egloos.com/3598268
얼마전 에반게리온 시리즈에 등장하는 제레가 독일어이며 영혼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레(SEELE, soul). 위키피디아의 에반게리온 용어 해설 페이지를 보니 제레는 써드 임팩트을 일으켜 인류보완계획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들이 현실 속에서 찌질하게 살아가며 서로에게 상처주는 일을 없애고, 인류를 한 차원 높은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 차원 높은 인간. The Higher Man. 니체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종교를 통해 추구하는 것도 현실의 고난과 번뇌를 초월하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인간이 되는 것조차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에반게리온에서는 고슴도치인지 바늘두더지인지 헛갈리지만 서로 다가갈수록 상처를 주는 그 딜레마는 원래 쇼펜하우어가 한 말이란다. 하지만 가만 생각하니 고슴도치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지 의문이 생겼다. 위 사진들처럼 고슴도치는 종종 몸을 맞대고 살아가는데 다치고, 딜레마 상황에 놓일까? 따지고 보면 고슴도치의 딜레마란 인간 관계의 어려움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례지만 현실적인 상황은 아닌 것이다.
인간이 되는 것은 다른 생명체를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니 삶이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http://en.wikipedia.org/wiki/Neon_Genesis_Evangelion_glossary
http://scshin.egloos.com/3598268
2008년 6월 10일 화요일
The King: 사기다! (strong spoiler)
이 투 마마에서 처음 접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라틴계의 미소년 쯤으로 여겨졌다. 아마로 신부의 죄에서는 처녀가 애를 배도록 만든 신부 역할을 맡아서 좀 깬다 싶었다. 수면의 과학에서도 범상치 않은 역할이었고, 그나마 바벨에서는 이해할만한 인물을 연기했다. 하지만 난 평범한 캐릭터보다 희한하고 엽기적인 캐릭터에 더 열광하는지라 이 배우가 마음에 들었다.그런데 베르날의 영화 중 내가 놓친 영화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좋은 영화를. 바로 더 킹이다.
아주 우연히 그리고 급작스럽게 더 킹을 만났다. 매달 발급되는 알라딘의 맥스무비 할인쿠폰을 이용해서 급하게 볼 영화를 찾던 와중에 씨네큐브에서 이 영화가 상영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혼자 보기에 좋은 영화인 것 같아 덥썩 예매했다.
극장에 가기 전에 영화 정보를 확인하지 않아서 신작 영화인줄 알았고,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계속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미 2005년에 개봉되었단다. 이 글을 쓰는 것은 영화를 보고 시간이 꽤 지난 시점이라 기억이 많이 사라진 것이 아쉽지만 영화의 내적 논리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보는 재미를 느낀 흔치 않은 영화였다. '~의 왕'도 아닌 더 킹이라는 대범한 제목을 건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주요 줄거리는 막 제대한 엘비스(베르날)가 죽은 어머니가 남긴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만난 적이 없는 아버지를 찾아나서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이다. 핵심은 가족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주인공들을 살펴보면 윌리엄 허트(데이빗, 아버지 역),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엘비스, 데이빗의 사생아), 펠 제임스(맬러리, 데이빗의 딸), 폴 다노(폴, 데이빗의 아들), 로라 해링(트윌라, 데이빗의 부인)이다. 사진 속에 나타나듯 원래 가족의 일원인 폴 다노는 사라지고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연히.
느닷없이 아버지를 처음 찾아간 날 엘비스는 가혹하게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들어야했다. 데이빗의 논리는 예전의 사고는 안타깝지만 지금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엘비스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현실을 거부하고 거대한 복수를 계획한다. 그 복수 과정에 이복동생과의 사랑이라는 변수가 개입하여 문제는 아주 복잡해진다.
여동생 맬러리와 엘비스가 심각한 사이라는 것을 눈치챈 폴은 엘비스를 찾아가 따졌고, 나중에 엘비스는 아니라고 했지만 내 생각엔 다분히 고의적으로 폴을 살해했다. 영화 전반부에 폴이 데이빗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라는 말이 거듭해서 명시적으로 언급되었는데, 그 아들이 사라진 것이다. 가족은 큰 위기에 빠진다.
영화의 배경으로 깔리는 교회의 이미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는 교회와 기독교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데이빗은 지역 사회에서 신뢰를 받는 목사지만 목회자가 되기 이전에 엘비스라는 사생아를 낳았다. 하지만 신의 은총으로 과거의 과오는 용서받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신이 자신의 과거를 지워줬다고 믿었는지 몰라도 그 무책임함은 결국 부적절한 아들이 적합한 아들을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아내와 아들, 딸 한 명씩을 둔 단란하고 이상적인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겠다는 욕심은 부적절한 아들을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집으로 불러들였고, 결국 아내와 딸까지 잃고 만다. 이제 그가 적합하다고 믿은 가족은 사라지고 원래 가족이 되었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원래의 아들(엘비스)만이 남는다. 그 아들은 묻는다. 신은 나를 용서할 것인가?
마침내 데이빗은 비록 사생아지만 엘비스가 자신의 아들임을 교회 내에서 선포했고, 소수의 신도는 저주를 하며 떠났지만 많은 이들은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박수를 쳤다. 현실의 아들이 사라진 이후에 많은 무리를 하며 받아들인 또 다른 아들.
맬러리는 오빠를 사랑하고 오빠의 아이를 잉태한 것을 나중에야 알았고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엘비스는 태연하게 음료수를 마시며 왕관을 쓴다. 목사인 아버지 데이빗이 기독교의 권위와 가식을 등에 업고 자기를 거부했을 때부터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았던 것일까. 아무도 사생아이자 살인자인 엘비스를 저지하지 못했다. 나는 맬러리가 자살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엘비스가 맬러라와 트윌라를 제대하며 은닉해서 가져온 총으로 죽이며 스토리를 완결했다.
영화의 내용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매력적인 십대 여고생 역할을 맡은 펠 제임스가 사실은 30대라는 것이 가장 충격적이다. 사기 수준이다. 영화 찍을 때는 비록 20대 후반이었지만, 심지어 오빠로 나온 폴 다노는 물론 베르날보다도 나이가 많다. 나는 완전히 10대로 철썩같이 믿고, 성관계 장면을 어떻게 찍은 것일까, 역시 18세는 넘은 배우겠구나 짐작하는 정도였건만.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로라 해링을 다시 만난 것도 반가웠는데 장성한 자식들을 둔 중년 여성으로 나와 이질감이 느껴지긴 했다.
아주 우연히 그리고 급작스럽게 더 킹을 만났다. 매달 발급되는 알라딘의 맥스무비 할인쿠폰을 이용해서 급하게 볼 영화를 찾던 와중에 씨네큐브에서 이 영화가 상영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혼자 보기에 좋은 영화인 것 같아 덥썩 예매했다.
극장에 가기 전에 영화 정보를 확인하지 않아서 신작 영화인줄 알았고,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계속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미 2005년에 개봉되었단다. 이 글을 쓰는 것은 영화를 보고 시간이 꽤 지난 시점이라 기억이 많이 사라진 것이 아쉽지만 영화의 내적 논리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보는 재미를 느낀 흔치 않은 영화였다. '~의 왕'도 아닌 더 킹이라는 대범한 제목을 건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주요 줄거리는 막 제대한 엘비스(베르날)가 죽은 어머니가 남긴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만난 적이 없는 아버지를 찾아나서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이다. 핵심은 가족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주인공들을 살펴보면 윌리엄 허트(데이빗, 아버지 역),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엘비스, 데이빗의 사생아), 펠 제임스(맬러리, 데이빗의 딸), 폴 다노(폴, 데이빗의 아들), 로라 해링(트윌라, 데이빗의 부인)이다. 사진 속에 나타나듯 원래 가족의 일원인 폴 다노는 사라지고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연히.
느닷없이 아버지를 처음 찾아간 날 엘비스는 가혹하게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들어야했다. 데이빗의 논리는 예전의 사고는 안타깝지만 지금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엘비스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현실을 거부하고 거대한 복수를 계획한다. 그 복수 과정에 이복동생과의 사랑이라는 변수가 개입하여 문제는 아주 복잡해진다.
여동생 맬러리와 엘비스가 심각한 사이라는 것을 눈치챈 폴은 엘비스를 찾아가 따졌고, 나중에 엘비스는 아니라고 했지만 내 생각엔 다분히 고의적으로 폴을 살해했다. 영화 전반부에 폴이 데이빗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라는 말이 거듭해서 명시적으로 언급되었는데, 그 아들이 사라진 것이다. 가족은 큰 위기에 빠진다.
영화의 배경으로 깔리는 교회의 이미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는 교회와 기독교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데이빗은 지역 사회에서 신뢰를 받는 목사지만 목회자가 되기 이전에 엘비스라는 사생아를 낳았다. 하지만 신의 은총으로 과거의 과오는 용서받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신이 자신의 과거를 지워줬다고 믿었는지 몰라도 그 무책임함은 결국 부적절한 아들이 적합한 아들을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아내와 아들, 딸 한 명씩을 둔 단란하고 이상적인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겠다는 욕심은 부적절한 아들을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집으로 불러들였고, 결국 아내와 딸까지 잃고 만다. 이제 그가 적합하다고 믿은 가족은 사라지고 원래 가족이 되었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원래의 아들(엘비스)만이 남는다. 그 아들은 묻는다. 신은 나를 용서할 것인가?
마침내 데이빗은 비록 사생아지만 엘비스가 자신의 아들임을 교회 내에서 선포했고, 소수의 신도는 저주를 하며 떠났지만 많은 이들은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박수를 쳤다. 현실의 아들이 사라진 이후에 많은 무리를 하며 받아들인 또 다른 아들.
맬러리는 오빠를 사랑하고 오빠의 아이를 잉태한 것을 나중에야 알았고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엘비스는 태연하게 음료수를 마시며 왕관을 쓴다. 목사인 아버지 데이빗이 기독교의 권위와 가식을 등에 업고 자기를 거부했을 때부터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았던 것일까. 아무도 사생아이자 살인자인 엘비스를 저지하지 못했다. 나는 맬러리가 자살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엘비스가 맬러라와 트윌라를 제대하며 은닉해서 가져온 총으로 죽이며 스토리를 완결했다.
영화의 내용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매력적인 십대 여고생 역할을 맡은 펠 제임스가 사실은 30대라는 것이 가장 충격적이다. 사기 수준이다. 영화 찍을 때는 비록 20대 후반이었지만, 심지어 오빠로 나온 폴 다노는 물론 베르날보다도 나이가 많다. 나는 완전히 10대로 철썩같이 믿고, 성관계 장면을 어떻게 찍은 것일까, 역시 18세는 넘은 배우겠구나 짐작하는 정도였건만.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로라 해링을 다시 만난 것도 반가웠는데 장성한 자식들을 둔 중년 여성으로 나와 이질감이 느껴지긴 했다.
2008년 5월 18일 일요일
Speed Racer: Panic!
아동용 영화같다는 영화 평을 얼핏 보고 극장에 갔지만 레이싱 영화가 어떻길래 그럴까 고개가 꺄우뚱해졌다. 어쨌거나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라는 말에 어느 정도의 기대를 갖고 갔다.
주인공의 성은 레이서요, 이름이 스피드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조롱한대로 영화는 아동용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도 어색하지 않았다. 실제 레이싱 경기장의 박진감이 아니라 CG로 창조한 롤러코스터 같은 경기장에서 카트레이서를 방불케 하는 폭력적 레이스가 펼쳐졌다.
인투더와일드를 비롯해 요즘 많은 영화에 출연하는 에밀 허쉬가 스피드 레이서 역을 맡았고, 로스트에서 최고의 훈남으로 등극한 매튜 폭스가 레이서 X로 나온다. 수잔 서랜든이 비교적 젊은 엄마로 나와 어색했고, 존 굿맨은 키가 너무 크게 나와 한동안 알아보지 못했다. 비는 역시 대사가 많지 않았고(이건 영화 전체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캐릭터의 일관성이 떨어지는 역할을 맡았다. 과연 미국에서조차 저조한 흥행을 거둔 이 영화로 비가 월드 스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원작 만화라는데 영화가 원작의 세세한 부분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은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만.
감독은 이 영화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가족에 대한 사랑? 거대 자본이 짜고 치는 판에서 레이싱에 대한 순수한 열정만으로 우승하는 도전 정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기대한 것은 매트릭스 3부작의 영향이 클 것이다. 실제 이 영화는 매트릭스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화려한 영상은 기본이고, 네오에 대응하는 스피드 레이서라는 한 명의 영웅에 의해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기본 줄기도 그렇다. 하지만 매트릭스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진 반면 스피드 레이서는 별다른 두통거리를 주지 않는다. 매트릭스가 생각하거나 즐길 수 있는 두 가지 알약을 줬다면 스피드 레이서는 보고 즐기라는 헐리웃 영화의 기본적인 메뉴만 제공할 뿐이다. 그것도 나름의 미덕이지만 워쇼스키의 영화를 기다린 팬들은 아마도 더 많은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주인공의 성은 레이서요, 이름이 스피드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조롱한대로 영화는 아동용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도 어색하지 않았다. 실제 레이싱 경기장의 박진감이 아니라 CG로 창조한 롤러코스터 같은 경기장에서 카트레이서를 방불케 하는 폭력적 레이스가 펼쳐졌다.
인투더와일드를 비롯해 요즘 많은 영화에 출연하는 에밀 허쉬가 스피드 레이서 역을 맡았고, 로스트에서 최고의 훈남으로 등극한 매튜 폭스가 레이서 X로 나온다. 수잔 서랜든이 비교적 젊은 엄마로 나와 어색했고, 존 굿맨은 키가 너무 크게 나와 한동안 알아보지 못했다. 비는 역시 대사가 많지 않았고(이건 영화 전체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캐릭터의 일관성이 떨어지는 역할을 맡았다. 과연 미국에서조차 저조한 흥행을 거둔 이 영화로 비가 월드 스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원작 만화라는데 영화가 원작의 세세한 부분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은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만.
감독은 이 영화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가족에 대한 사랑? 거대 자본이 짜고 치는 판에서 레이싱에 대한 순수한 열정만으로 우승하는 도전 정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기대한 것은 매트릭스 3부작의 영향이 클 것이다. 실제 이 영화는 매트릭스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화려한 영상은 기본이고, 네오에 대응하는 스피드 레이서라는 한 명의 영웅에 의해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기본 줄기도 그렇다. 하지만 매트릭스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진 반면 스피드 레이서는 별다른 두통거리를 주지 않는다. 매트릭스가 생각하거나 즐길 수 있는 두 가지 알약을 줬다면 스피드 레이서는 보고 즐기라는 헐리웃 영화의 기본적인 메뉴만 제공할 뿐이다. 그것도 나름의 미덕이지만 워쇼스키의 영화를 기다린 팬들은 아마도 더 많은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2008년 5월 14일 수요일
Dodgeball: A True Underdog Story
"Dodgeball(피구의 제왕)"을 처음으로 다 봤다. 몇 년 전 한국에서 극장 개봉하기 전 올해 꼭 봐야 할 영화로 점찍어두었건만 약속은 지키지 못했고 시간이 마구 흘러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상영할 때 뒷부분만 봤다. 하지만 뒤만 봐서는 이 영화가 왜 그렇게 기대작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교롭게 최근 일본 피트니스 클럽에 대한 책을 읽어서인지 이번에 제대로 보니 영화는 의외로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Dodgeball은 의미상 거의 피구와 대응하는 단어다. '피구왕 통키'의 기억 때문일까? 피구는 왠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찾아보니 Dodgeball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주로 하는 스포츠로 미국에는 프로 다지볼 리그도 있단다(http://www.thendl.com/). 요는 피구왕 통키의 경우가 일본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스포츠를 부각한 것과 달리 '피구의 제왕'은 적어도 그럴 듯한 배경은 있다는 점이다. 비록 영화에서 국제 피구 대회가 소재이긴 하지만(불꽃슛을 장착하지 못한 일본 팀은 아주 간단히 패배한다).
영화는 짐(gym)간의 대결을 다루는데 궁극적으로는 이상적인 신체에 대한 이념의 대결이기도 하다.
헬스클럽, 피트니스클럽, 체육관 등 뭐로 부르건 간에 요즘 사회에는 위 사진의 배경처럼 성난 황소를 다룰 정도의 힘과 근육을 기르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 훈련하는 장소들이 즐비하다. 영화가 시작할 때 벤 스틸러는 날씬하고 근육으로 다져진 몸매를 자랑하며 자신의 Globo Gym을 광고한다. 짐의 이름은 나이키, 맥도날드처럼 흔히 볼 수 있는 글로벌 기업을 연상시킨다. 또 벤 스틸러의 영화 속 이름은 White Goodman이다. 이름부터 좋은 이미지가 풀풀 풍겨나오지만 그의 좋은 몸매와 부 그리고 그의 피트니스 제국은 결국 패배하고 만다.
상대편으로 나온 빈스 본은 Average Joe's 짐을 운영한다. 이 짐은 우락부락한 몸매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아주 '평균적'인 혹은 막되먹은 몸매를 가져도 괜찮은 장소다. (영화 막판에 여자친구를 임신시키는 발칙한 놈이지만)고등학생부터 중년의 아저씨까지 연령도 다양하다. 이 짐은 친근하고 가족적인 공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러니다. 체육관이 꼭 근육질 몸매를 만들기 위한 곳은 아니라도 속성상 막되먹은 몸매로 바보같은 장난을 하기 위한 장소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몸을 가눌 수도 없이 비만에 찌든 벤 스틸러가 닭다리를 물어뜯는 모습은 첨단 시설에서 만들어낸 근육질 몸과 소파에 앉아 스낵을 먹으며 만들어낸 뚱보가 한끗 차이임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국 사회에 만연한 패스트푸드로 인한 비만을 탈출하기 위한 운동이 지나치게 되면 즉 강박관념의 산물이라면 언제라도 실패할 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애버리지 조의 체육관이 영화 막판처럼 대규모가 되었는데 글로보 짐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을까? 피터(빈스 본)의 선의가 후대 경영자에게까지 이어질까? 괜한 걱정인지 모르지만 미국식 자본주의 사회에서 애버리지 조는 취약한 구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영화 초반처럼 경영난에 시달리며 또 다른 White Goodman에게 합병당할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자본이 공격하는 공(ball)을 피하기(dodge) 위해서 또 다시 라스 베가스에서 도박을 해야한다면 지나치게 취약한 구조다. 게다가 피터가 개성있는 몸매를 중시하지만 형체없고 막연한 평균(average)을 동시에 말한다면 결국 글로보 짐의 흔한 근육덩어리들과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 없지 않을까? 평범한 막되먹은 몸매와 평범한 근육질 몸매... 애버리지 조의 막되먹음도 자유로운 바디라인을 권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Mad Cow Disease or BSE(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광우병 열풍이다. 이미 외국에서 여러 번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광우병에 걸렸을 수도 있는 소를 한국이 수입하게 된다고 하자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고 있다. 문득 작년에 본 꿀벌의 실종에 대한 다큐가 떠오른다. 꿀벌의 죽음에 따른 생태계의 파괴, 그 이후의 예측할 수 없는 파국이 예고되고 있지만 그다지 신경쓰는 사람은 없다. 광우병에 대해서 국내 언론도 간간이 위험을 경고했고 작년 KBS는 꽤 정성들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 쇠고기 협상 이전에 광우병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
이번 쇠고기 협상에 별 문제가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주장하듯 광우병에 걸린 소를 먹을 확률이 지극히 낮은 것은 맞는 말이다. 자동차 사고로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지만 자동차 운전을 막지 않듯 광우병에 걸린 소가 있다고 소를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억지인 측면이 있다.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한다는 '기우'라는 고사가 떠오르는데 과학적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하더라도 대재앙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거나 애써 무시하며 살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면 왜 이번 쇠고기 협상이 문제인가?
미국에 대한 정치적 선물이었다는 의혹을 제기할 수 있겠고, 단지 졸속협상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다. 영어 해석에 문제가 있는 관료들의 무능함, 거짓이 드러났는데 뻔뻔하게 같은 말을 반복하는 태도도 물론 문제였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쇠고기를 먹는 식습관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소뼈가 들어간 음식을 즐겨먹는 한국인의 식습관을 문제삼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극히 제한된 시기에 맛볼 수 있었던 쇠고기를 일상적으로 먹는 지금의 생활이 올바른지 생각해볼 일이다.
인류가 육식을 한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육식을 위해 다른 동물들을 우리에 가두고 조직적으로 기른 역사는 길지 않으리라. 대통령의 말대로 우리는 누구나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를 꼭 먹어야 할까? 농경사회에서 소는 기본적으로 농사를 짓기 위한 도구였기에 소를 많이 먹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쇠고기는 고급 한식당이나 아웃백과 같은 비싼 패밀리 레스토랑의 주요 메뉴로 사용된다. 비싼 고기를 먹는 폼나는 생활... 우리는 미국인들처럼 쇠고기를 마음껏 먹고 싶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19세기말에 시작된 근대인으로의 신체 개량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며칠 전 경향신문에서 고미숙씨는 광우병은 육식을 위해 소를 사육한 인간이 받는 천벌이라고 했다. 인간을 위해 길러졌기에 이종(異種)인 인간이 당연히 피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어제는 눈이 왔다고 하는데 요즘 환경 재앙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많아지고 있고 강도도 높아지고 있다. 쓰촨성의 지진은 대륙판의 충돌로 인한 것이라는데 그런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단지 지금 잘살아보겠다는 개개인의 몸부림은 가까운 미래의 재앙을 점점 키우고 있는 것 같다. 굳이 광우병 고기를 먹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미쳐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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