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6일 수요일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991)

비정성시를 보아야지 마음만 먹고 있던 와중에 최근 한국에 개봉한 거의 4시간짜리 대만 영화,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화제다. 일반 관객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전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유명한 영화(음악) 팟캐스트들에서는 주요한 소재로 다뤄지고 있다. 영화를 보고 씨네21 송경원의 글과 중앙일보 김형석의 글까지 읽어보았다.

이제는 고인이 된 영화감독의 역작이라는 말보다는 대만의 1960년대를 다룬 영화라는 점에 마음이 더 끌렸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기대보다 훨씬 복잡한 당시 대만 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물론 감독이 60년대 대만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재현했는지는 미지수고 우리나라 사람이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송경원의 말처럼 누군가가 다 말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치더라도 영화의 장면이 실제와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따져볼 수는 있다. 어느 정도 고증이 되었다고 가정하고 내용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내가 위에 언급한 두 가지 글은 공히 빛을 중요하게 다뤘다. 그러한 지적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납득이 된다. 영화에는 빛이 매우 중요한 테마였다. 샤오쓰는 야간학교라는 공간을 벗어나 주간학교로 진입하고자 했다. 영화 촬영장에서 빛/조명이 중요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촬영장에서도 장면마다 손전등을 비추는가 마는가, 촬영 중인가 아닌가, 밤인가 낮인가에 따라 다양한 조합이 등장한다. 김형석이 소년이 손전등을 훔쳐서 놀다가 말미에 다시 촬영장에 반납하고는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어둠의 세계로 완전히 가버린 소년의 마음과 행동으로 해석한 것은 맞는 말 같고 감독이 의도한 것 같다. 전력 공급이 부족해서 일어난 밤의 깜빡거림에 대한 지적도 유익했다.

나에게 더 주목되는 지점들을 두서없이 적어본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군인의 풍경이다. 소년들의 학교 교복마저 군복처럼 보이는 가운데 영화 속 대만의 도시에는 갑작스럽게 탱크들이 거리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학교에서 멀지 않은 평지에서 군인들이 사격 훈련을 하고 있다. 당시의 대만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도 해방 직후, 한국전쟁 즈음 혹은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에나 상상할만한 탱크의 시내 활보는 충격적이었다.

군인의 폭력은 적군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거대한 살상이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는 그 가능성, 그 상상 자체가 사회의 긴장을 유발했을 것이다. 공산화된 중국에서 도망쳐온 사람들은 60년 정도라면 여전히 고향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 것이고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마저도 배제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대만이라는 땅은 아직 낯설 뿐이고, 일단 왔으니 어떻게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싸워야 할 투쟁의 장이다. 어른들은 직업의 안전성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부모의 관심이 부족한 아이들, 사내 아이들은 갱이 되어 다른 조직과 싸움을 벌인다.

소년 갱들의 다툼은 성인의 범죄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고, 갱들의 다툼은 종종 살인으로 이어졌다. 일본과 공산당과의 싸움과 그 유산으로서 대만에는 사무라이 칼과 총들이 많았다. 일본인 지배자들이 살다가 도망치듯 버리고 간 집에 들어와 살게 된 대만/중국인들의 아이들은 다락에서 사무라이 검(긴 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다)과 권총을 찾아내서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실제 조직간 다툼에서 살상 무기로도 사용했다. 이런 종류의 유혈낭자한 소년 폭력은 한국 문학에서 본 기억이 없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갖고 놀 정도로 검이나 총이 많지는 않았던 것일까? 정부에서 강력한 단속을 했을까?

밍이 권총으로 장난을 치다가 샤오쓰를 향해 권총이 격발되었을 때는 영화 제목의 ‘소년 살인’이 밍이 소년 샤오쓰를 죽이는 것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샤오쓰는 멀쩡하고, 그 뒤편 어딘가가 총알에 맞은 흔적도 없다. 그러나 그 상징적 장면과 정반대로 샤오쓰가 밍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소년’ 샤오쓰가 여자아이를 살인한 사건의 진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진상 자체는 송경원의 말처럼 영화의 본질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도 대만 사회에서 최초의 미성년 살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널리 알려지면서 사건 이름이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으로 굳어진 모양이지만 고령가 주변에서 소년들은 이미 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다. 사건이 크게 된 이유는 갱단 멤버를 다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찰의 의문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철학적이고 얌전한 소년이 저지른 살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샤오쓰는 갱단과 함께 다니긴 하지만 나름대로 성적도 괜찮은 아이였다. 하지만 갱단과 다니며 폭력에 전염 혹은 면역이 되었기 때문인지 그의 폭력성은 영화 초반부터 튀어나온 것 같다. 막판에 교무실에서 전구를 야구방망이로 깨버린(직후 아버지와 자전거를 밀며 나누던 대화에서 나온 것처럼 그가 때린 것은 전구라기 보다 교장(?)의 머리였던가?) 그의 행동은 어린 시절 나의 행동 혹은 드러내지 못한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의 현실성은 미국에 대한 동경으로도 드러난다.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일본의 향기가 진하게 묻어있던 60년 경의 대만은 이제 일본이 아니라 미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진으로 도배된 캣(키가 너무 작아 친구라고 보기 불가능할 정도지만 노래와 의리 하나는 기막혔던 캣)의 방이 상징적이고, 샤오쓰의 큰 누나의 미국 유학도 그런 사회의 단면이다. 자격 서류를 중국에 두고 온 엄마는 미국으로 가능한 빨리 가라고 딸을 종용했다. 이런 부분에서 한국과 대만은 매우 닮아있는데 아들이 아닌 딸을 유학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도 구한말부터 여자아이가 해외 유학을 가긴 했다. 캐릭터들의 이름이 허니, 슬라이, 캣과 같이 영어식인 것도 재미있다.

야구방망이라는 물건도 재미있다. 야구방망이가 있다는 것은 아이들이 야구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이 즈음에 세계적으로 야구를 많이 하는 나라는 별로 없었다. 미국에서 개발된 이 스포츠는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일본의 식민지인 대만과 한국에도 깊이 이식되었다. 일본을 벗어나 미국의 우산으로 들어간 대만과 한국에서 야구방망이는 이상하지 않은 물건이긴 한데 영화에서는 야구를 하는 장면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방망이는 그저 흉기인 몽둥이로 사용될 뿐이다. 여전히 한국에서 야구 '빠따'는 흉기로 인정된다.

4시간이 한 시간 같다는 뉴스 제목이 보이긴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생각만큼 지루하지 않았다, 감독의 다른 작품도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 작품이 인생에서 누구나 꼭 봐야할 영화라고 찬양하는 평론가, 작가들의 말에 100% 공감은 안 되지만 곱씹어볼 여지가 많은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2017년 12월 4일 월요일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On body and soul (2017)

영화음악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영화로 충분히 흥미로운 소재를 다뤘다. 방송에서 들었던 내용과 실제 봤을 때 내 느낌은 좀 달랐는데 짧은 방송 시간 때문에 비약, 생략된 소개를 했던 거라고 이해해본다.

한국 개봉명은 영화의 내용, 핵심 테마를 그대로 공개해버린다. 헝가리어의 원제는 영어 번역의 제목과 같아 보인다. 몸과 영혼, 신체와 영혼에 대해.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의 남녀가 꿈 속에서 매번 만난다는 이유로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이상하지만 실제 그런 일이 있다면 이해할 수는 있다. 부부조차 같은 꿈을 꾸는 일은 거의 없다. 같은 꿈을 꾼다는 말은 밤 중의 수면 행위의 일부로서, 일종의 불가사의한 체험으로서의 꿈을 두 사람만이 공유한다는 영화 속의 표면적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겠고, 일상의 관용적 표현으로, 그러니까 훨씬 현실적인 의미로 두 사람이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도 함께 고려할 수 있다. 영화에 나오는 부부는 도축장의 사장 부부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부부의 사이는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고, 결코 같은 꿈을 꿀 것 같지 않다.

영화는 주인공 남성 엔드레(?)의 불편한 신체, 쓰지 못 하는 왼쪽 팔을 상당히 여러 번 강조했다. 그는 늙었고, 한 팔이 불편하지만 회사에서는 사장과 가장 친한 중역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꿈 속에서 당당한 숫사슴으로서 암사슴이 먹이를 찾는 것을 도와주고, 눈 덮인 숲 속을 끝없이 질주한다. 여자와의 사랑을 몇 년 전에 포기했다는 그가 사슴이 되는 꿈을 꾼 것은 마리아가 도축장에 오기 전부터의 일처럼 보였다. 영화의 시작 자체가 사슴 장면이고, 이후 회사에 첫 출근한 마리아를 엔드레가 눈여겨 보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즉 본 적도 없는 여자의 영혼을 꿈 속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다. 몸으로 만나기 전, 눈으로 보기 전부터 만나는 영혼의 만남이라니 매우 시적이고 해야할까 싶은 재미있는 설정이다.

남성은 둘이 같은 꿈 속에서 숫사슴, 암사슴으로 만난다는 걸 알아채고, 그것에 대해 마리아와 이야기를 계속 하면서 어떤 순간에는 꿈 속에서 왜 도망갔냐고 추궁하기까지 했다. 보통 이해하기로 꿈은 꾸는 사람 마음대로 통제할 수는 없는 일일 터인데.

마리아는 매우 독특한 사람이다. 대인관계랄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휴대전화가 없는 것이 대표적이었다), 숫자에 강하고 기억력이 비상하게 발달되어 있다. 그녀는 엔드레를 처음 만나서 한쪽 팔이 불편하다는 점을 대놓고 말할 정도로, 그리고 자신을 마리카라고 부르지 말라고 말하는 식으로 너무 솔직하다. 그녀는 어린 시절 심리 상담을 해준 것으로 보이는 의사?를 성인이 되어서 다시 찾았다. 그녀로서도 자신에게 다가와 준(실제로 엔드레는 두 사람이 꿈에서 만난다는 걸 알기 전부터 적극적으로 접근했고 그녀도 그 점을 집에 가서 인형극을 하며 고마워하는 식이었다) 엔드레에게 더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관계의 문법들을 공부해가며 연기해가며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엔드레는 어느 순간 포기하는 듯 보였고, 그 순간 그녀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영화 후반의 피칠갑의 잔혹한 순간이 지나가고(영화 초반 무표정한 소가 틀에 갖혀 살해되고, 머리가 예리한 칼에 의해 몸에서 떨어져 나가며 피가 흥건했던 장면과 연관이 있을까?) 둘은 서로의 사랑을 아주 직접적으로 확인한다. 마리아가 사랑의 순간에 매우 조용했던 장면이 인상적인데 왜냐하면 그녀는 사랑을 연기하는 교성이 요란한 성인 비디오물을 보며 어떻게 할지를 공부해놨기 때문이다. 그녀는 책 혹은 동영상에서 배운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본 모습으로서 사랑을 했다.

이 일이 있은 이후 재미있게도 그녀는 이제 꿈을 꾸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이 결실을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두 사람이 사슴으로서 만났던 것으로 보이는 숲 속의 장면, 나무에서인지 무언가 떨어져 물 위에 파문이 이는 장면으로 끝난다. 사슴들이 없는 풍경, 이 곳은 다른 사슴들 혹은 토끼들 혹은 여우들(?)의 영혼의 만남을 주선하는 곳일까? 아름답다면 아름답지만 기괴함하다는 느낌도 가시지 않는 영화였다.


트윈 픽스 블루레이, DVD 판매 소식

트윈 픽스 더 리턴의 폭풍이 지나가고 한동안 이 시리즈를 잊고 살았다. 그런데 이틀 전쯤 우연히 새 블루레이 발매에 대한 소식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물론 블루레이가 12월에 발매되기로 예정된 것은 알고 있었다. 당시 린치 자신이 직접 트윗을 했던 것 같고, 그 때 블루레이의 제목으로 트윈 픽스 시즌3이라고 소개를 해서 내가 예전에 올린 글의 내용과 배치되는, 그러니까 시즌4가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제 하루이틀 내에 나올 새 블루레이/DVD 타이틀의 제목은 트윈 픽스 시즌3이 아니라 '트윈 픽스 : 어 리미티드 이벤트 시리즈'다. 제작 과정이 필요했을 터이니 타이틀이 바뀐 것이 한 달 내의 일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일찌감치 나왔던 OST 음반의 제목은 진작부터 시즌3이 아니라 어 리미티드 이벤트 시리즈로 되어 있었다. 아마도 시즌 3으로 할 것인지 말지 린치 자신이 고민했던 모양이다.

12월 4일 정오 즈음인 지금 영국 아마존을 보면 이 블루레이는 이미 판매 중이다. 제품 정보를 보면 오늘 발매한 것으로 되어 있다. 미국은 여전히 12월 5일 발매한다고, 즉 지금은 예약구매만 할 수 있는 상황이다.
https://www.amazon.co.uk/Twin-Peaks-Limited-Packaging-Blu-ray/dp/B075MVHM41
https://www.amazon.com/Twin-Peaks-Limited-Event-Blu-ray/dp/B076M4XM6H
6시간 혹은 8시간으로도 소개된 부가 영상들이 기대가 되는 바이지만 한참 배송대행지들이 바쁜 요즘에 이 타이틀을 주문한다면 언제나 도착할지 모르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 직전까지 가보니 직배 운송료가 7.98달러로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 고민을 해봐야겠다.

어디선가 블루레이가 리지언 프리라고 본 것 같은데, 미국 아마존의 제품은 A/1로 되어 있고, 다행히 한국도 포함되어 있다. 영국 아마존 제품은 리지언 프리였다.

2017년 11월 20일 월요일

베이츠 모텔

시즌5의 8편은 영화 사이코를 길게 늘여 제작한 이 시리즈의 백미였다. 리하나가 모텔 방에서 샤워를 할 때는 설마 영화의 그 살인 장면이 재연되는 것인가 궁금했는데(실제 그렇게 상상하도록 연출되었다), 매우 우스꽝스럽게 영화를 비틀었다. 아마 매우 불행한 생을 살고 유부남에 놀아난 흑인 여성(이지만 실제로는 리하나!)을 사이코의 희생자로 만들기에는 부적절했을 것이다. 대신 그녀의 정부, 유부남인 샘이, 그 건장한 백인 남성이 노마의 식칼의 희생자가 되었고 정확히 영화에서 연출된 것처럼 샤워 커튼을 부여잡으며 죽어갔다.

시즌 피날레이자 시리즈 피날레가 가까워지며 완전히 미쳐버린 노마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궁금하였는데 드라마의 주연들이 그 처리를 맡았다. 보안관이자 양아버지가 먼저 노마를 처리하려고 나섰는데 거의 성공했지만 어처구니 없이 역습을 당해 죽었고, 배다른 형제인 딜런, 유일하게 노마를 가족으로서 걱정하며 끝까지 목숨만은 건지게 하고 싶었던 그 형이 노마를 어쩔 수 없이 죽였다. 노마의 상태를 잘 알고 있을 딜런이 단지 2년 떨어져있었다는 이유로 노마의 정신을 되돌릴 일말의 가능성을 희망했다는 건 이상하긴 했다. 그저 형제로서의 감정이 이성을 넘어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불행한 결말을 이미 예감한 듯 했고, 그래서 준비한 권총으로 드라마의 주인공을 안식으로 이끌었다. 가끔씩 제정신인 노마가 죽고 싶어서 식칼을 들고 딜런에게 덤볐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사이코에서는 주인공이 여자 가발을 쓰고 어머니 흉내를 냈던 것 같은데 드라마에서는 노마가 어머니의 옷을 입고 여자 연기를 했지만 가발까지 쓰지는 않았다. 노마는 충분히 환상을 통해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노마가 왜 노만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시선이 느껴진다고 해서 어머니 형태의 정체성이 사람 몸 속에 생겨나는 건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는다.

노마 베이츠를 연기한 배우는 이번에 새로 시작한 굿 닥터라는 드라마의 주연이기도 하다. 한국 드라마가 원작이라 한국에서도 관심이 많을 듯 한데 희대의 사이코를 연기한 배우가 곧 바로 좋은 의사가 되었다니 재미있다. 굿 닥터를 보진 않았는데 설마 미친 의사는 아니겠지?

2017년 11월 12일 일요일

에단 호크의 최근작들 : 본 투 비 블루, 모디

오랜 영화팬들이 에단 호크(이선 호크가 맞겠지만 이미 익숙해진 터라 에단으로 적는다)를 알게 되는 계기는 죽은 시인의 사회일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비교적 늦게 봤기 때문에 그 작품이 아니라 기네스 팰트로우와 함께 출연한 위대한 유산을 통해 처음으로 이 배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잘생긴 배우로 이름을 널리 알린 그는 그 이미지 때문인지 주요 영화 시상식에서는 수상을 거의 못 했던 것 같다. imdb에서 보니 보이후드를 통해 주요 시상식들에서 조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하지는 못 했고, 예전에 트레이닝 데이로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다. 오히려 비포 시리즈의 제작에 참여한 것 때문에 후보에 오른 횟수가 많아 보일 정도다.

그런데 이제 그의 연기에 대해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듯 하다. 보이후드 이후 출연한 작품들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고 있다. 본 투 비 블루에서는 마약없이는 예술을 할 수 없는 비운의 재즈 뮤지션 쳇 베이커를, 모디에서는 장애가 있지만 예술적 재능이 넘치는 모디의 무식쟁이 남편으로 역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발레리안에서도 단역으로 출연해 독특한 배역을 맡아 무난히 소화해냈다.

본 투 비 블루에서 에단보다 조금 더 눈에 띈 것은 영화 속 영화에서 그의 아내이자 영화 속에서는 애인이 되는 카먼 이조고의 존재였지만 에단 호크의 쳇 베이커 연기와 노래는 나쁘지 않았다. 영화는 주요 영화 시상식에서 철저히 무시되었지만 플롯이나 연기나 그다지 흠잡을 것은 없어보였다. 무엇보다 이조고가 두 가지 역을 맡음으로써 극의 효과가 배가되게 한 설정들이 마음에 들었다.

모디의 경우는 영화 제목이 알려주듯 에단 호크의 역할이 본 투 비 블루보다 훨씬 축소된 영화다. 그러나 모드가 그녀의 작품들의 공의 절반을 남편에게 돌리듯 에단 호크의 캐릭터도 중요했다. 윽박지르는 고용주에서 어느 순간 모드의 소원처럼 남편이 되어버렸고, 모드의 작품이 잘 될 수록 점점 더 집안일까지 더 담당하게 되었다. 모드가 닭을 잡았을 때 별 말 하지 않은 것이나 모드가 집의 벽과 창문에 그림을 허락없이 그렸을 때에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하면서도 화내지 않고 그냥 받아들인 장면들도 마음에 들었다.

연기가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화면을 압도하는 배우는 아니었던 에단 호크가 앞으로도 액션이나 수퍼 히어로 영화로 흥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최근 3, 4년 새 원숙해진 연기를 보며 그의 연기로 인해 영원히 기억에 남을 영화가 탄생할 가능성을 점쳐본다.

2017년 11월 6일 월요일

행복 목욕탕 (2016)

네이버의 기자, 평론가 평점을 보면 보통, 나쁘지 않다 정도의 영화다. 하지만 정말 오래간만에 눈물을 흘리며 영화를 봤다. 신파라는 규정이 틀리지 않지만 곰곰 생각할 때 이 영화가 눈물을 짜내기 위해 오버를 했다는 결론은 내리기 힘들었다. 물론 스토리의 설정들은 비현실적이고 우연이 지나친 면이 있다. 적어도 음악 사용에 있어서는, 이른바 내가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며 감독이 이래도 안 울거야라고 다그치는 듯했던 그 음악에 비교하면, 과잉이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컨대 이 영화의 설정은 어떤 잘 짜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논리들의 결합으로 보인다. 마지막에 후타바의 시신을 다른 곳도 아닌 집에서 태우기 위해 목욕탕, 그것도 나무를 태워서 물을 데우는 오래된 방식의 목욕탕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기가 낳지 않은 아이를 하나도 아닌 둘을 키우기 위해서 엄마 자신이 어릴 적에 버려진 아이일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뻔뻔하지만 설득력이 있는 아버지 역할을 맡기기 위해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다기리 죠가 필요했을 것이다. 여섯 명의 인간 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망나니 젊은이가 그녀가 죽기 전에 목욕탕에 돌아와야 했을 것이다.

영화의 원제는 목욕탕물을 데우는 뜨거운 사랑 정도일 것 같은데, 영화를 다 보고 나야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고 너무 납득이 되는 제목이다. 그녀 자신은 엄마에게 버려진 아이로 자라서 다 설명하지 않아도 대강 이해가 되는 어려운 삶을 살아왔을 것이고, 바람둥이까지는 아니라도 여자 관계가 복잡하고 책임감이 모자란 남편을 만나 고생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말기암 4기 진단, 두세 달의 남은 수명. 남편은 돌아와야했고 다행이도(?) 순순히 돌아올 상태였다. 다만 어릴 적 자기와 꼭 닮은 처지에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자기가 낳지 않은 딸은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하지만, 이제는 그 아이가 혼자 고난에 맞서고 극복해야했다. 결국 딸은 교실 내 탈의라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이지메를 극복했다. 탐정은 일본 흥신소의 이미지로 흔하게 나오는 험악한 사내가 아니라 어린 딸을 혼자 기르는 착한 남성이었다. 그 탐정마저 후타바의 심성에 감복하여 그녀를 위해 하기 힘든 일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후타바라 역할을 맡은 배우는 어린 시절 미모로 한 시대를 풍미한 미야자와 리에. 이제 그녀는 너무 말라서 죽기 직전의 환자 역할이 어울리는 외모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연기력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다. 후타바는 밝고 씩씩한 사람이지만 아즈미를 낳고 도망간 후 매년 게를 보내주던 기미에를 대면하자 뺨을 때렸고, 자기를 버리고 어느 부자와 결혼해 손자까지 본 친모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자 그 집에 돌(단단한 강아지 인형)을 던졌다. 이렇게 그녀는 수십 년의 억울함, 분노를 완전히 무화시킬 정도로 성인의 반열에 올라서지는 않았다. 이런 나약함, 불완정성이 남편이 만들어준 인간 피라미드를 보며 죽기 싫다며 오열하는 그녀 캐릭터의 비극성을 극대화시킨다.

빨간 색이 좋다는 후타바는 빨간 차를 운전하다가 자신과 정반대로 시간이 남아돌아 불만이라는 청년을 만날 수 있었고, 암으로 인해 하얀 변기 속에 빨간 피를 흩뿌렸고, 탐정의 딸로부터 빨간 꽃을 선물받았고, 장례식 후 빨간 꽃에 둘러쌓이고 그 꽃들과 함께 아궁이 속에서 불타며 빨간 연기를 내뿜었다. 그 뜨겁고 빨간 사랑으로 인해 남은 그녀의 가족들, 그러나 실제로 빨간 피의 성분은 전혀 다른, 혈육이 아닌 존재들이 따뜻함에 어쩔줄 몰라 좋아하게 된다.

A ghost story (2017)

몇 달 전 영화에 대한 리뷰글을 스치듯 지나가며 온 몸을 가리는 하얀 천을 뒤집어쓴, 그 전통적인 유령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올해 초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케이시 애플렉이 있다.

어디에선가 영화가 별로라는 말을 본 듯도 하여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케이시 애플렉과 루니 마라가 출연한 영화를 그냥 지나갈 수는 없었다. 감상을 짧게 말하자면 나쁘지 않았다고 하겠고, 감상 후 찾아본 리뷰들은 대개 호평 일색이었다. 

케이시 애플렉에 대해 말하자면 그의 연기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다. 매번 루저 역할을 맡아왔기 때문에 배우 자체에 대한 호감이 높지 않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공식적으로 그를 연기가 별로인 배우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졌지만 나에겐 인상적이지 않은 배우 정도였다. 

이 영화에서 케이시 애플렉은 거의 대부분 시간을 하얀 천 속에서 연기했다. 설정상 영안실에서 일어날 때 그를 덮고 있던 하얀 천이 그대로 그의 신체를 가리고 있는 것이라 두 눈의 위치에 구멍이 뚫려있을리가 없지만, 영안실에서 시체가 일어난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의 유령이니 구별해서 봐야할 일이긴 하다. 여하간 그의 연기란 것을 영화에서 보기는 매우 어렵다. 눈의 위치에 구멍이 있으니 그의 눈동자도 보일 법 하지만 특수 효과를 넣었는지 거의 검게 보일 뿐이다. 물론 유령은 설정상 눈동자가 없어야하지만 그 연기를 하는 케이시의 눈이야 카메라에 드러날 수 있고, 어느 순간엔 눈동자를 본 것 같기도 하다. 유령 역할로서 그는 그저 천천히 걸어다니고, 많은 시간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그러고보니 눈에 구멍을 뚫어놓지 않으면 유령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유령이 무엇을 보고자 하는지 알기 어려우니 유치하게 보임에도 그런 설정을 한 것 같다. 생각해보면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는, 그러니까 천을 쓰지 않은 케이시가 유령으로서 화면 속에 있다면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헛갈릴 수 있을 것이다. 하얀 천을 쓰고 있으면서 이것은 사람이 아니다, 유령이다라는 것을 분명히 시각적으로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 몇 개가 있는데 강함의 순서로 적어보겠다. 가장 큰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은 마지막에 아내가 벽 속에 숨긴 쪽지를 보고 소멸하는 컷이다. 과연 무슨 말이 있었길래 그 유령은 마침내 소멸하게 된 것일까. 영화에서 옆 집에 있던 유령은 낡은 집이 포크레인에 의해 허물어지자 자기가 기다린 누군가가 돌아오지 않는 것 같다며 사라진 바 있다. 그렇다면 회한에 가득한 유령이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 때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설정이 아닐까 싶고, 아내의 쪽지에도 유령에게 깨달음을 주는 어떤 메시지가 있었을 것 같다. 쪽지 내용이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는데 놀랍게도 감독의 인터뷰가 있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루니 마라가 촬영 당시 생각나는대로 무언가 적었는데 그녀도 잊어버렸고, 감독 자신은 알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아마 알지만 말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쪽지의 메시지 몇 글자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핵심적인 관건이 아니라는 감독의 설명도 수긍이 간다.

다음으로는 루니 마라가 부동산 업자가 남기고 간 커다란 파이를 몇 분간 바닥에 앉아 먹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마치 트윈 픽스 더 리턴에서 로드하우스 바닥 청소를 하는 장면처럼 길었던 이 장면은 그녀의 슬픔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무엇인지 아리송한 트윈 픽스 씬과는 차이가 있긴 했지만 정신없이 많은 컷을 이어붙이는 요즘 영상들과 확연히 다른 이 영화의 성격을 대표하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 집에서 어느 순간 있었던 파티 장면에서 한 남자의 일장 연설도 주목할만하다. 자연은 파괴되고 지구는 언젠가 멸망할 텐데 인간의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허무로 가득한 말들로 기억된다. 이 장면의 메시지야 그 자체로는 이해할 수 있는데 영화에서의 위치를 어떻게 잡은 것인지 궁금하다. 아내가 남긴 메시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수십 혹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집을 떠나지 못했던 유령에게 다른 어느 것도 의미가 없었다. 살아있던 시절, 아이도 없는 상황에서 그의 삶에서 아내보다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없었을 것 같다.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었으므로 음악에 대한 사랑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아내보다 음악을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시간관에 대해서는 긴 논의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가능한 짤막하게 생각해보고 싶다. 영화에서 전시된 것을 보면 케이시와 루니가 그 집에 살다가 이사를 가려고 했는데, 이사를 가기 직전 케이시가 죽고 유령이 되었다. 그가 죽기 전에 피아노에서 소리가 났는데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유령의 소행이었다. 이미 여기서 시간이 꼬이고 있다. 케이시가 죽기 전에 그의 유령이 피아노에서 소리를 낸 것이다. 또한 아주 먼 미래의 어느 순간 그 집의 자리에 들어선 고층 빌딩에서 유령이 자살(?)을 시도하는 듯한 장면 후에 시간은 과거로 돌아가 미국에 유럽의 백인이 정착하던 시절이 된다. 유령은 그 백인들이 인디언들의 화살로 몰살당하는 장면을 본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집이 있던 자리는 무덤 위에 지은 것일 수도 있고 무덤이 아니라도 많은 과거의 인물들이 죽은 그 자리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들의 유령들이 그 자리에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영화에서는 케이시의 유령만이 그 자리, 그 집에 존재한다. 그 유령은 자꾸 순환하는 시간의 고리에 갖혀서 어느 순간에는 유령이 다른 자신의 유령, 조금 더 과거의 유령을 지켜보는 장면까지 연출된다. 그런데 조금 더 새로운 유령이 더 오래된 유령을 알아채지는 못 하는 것 같다. 유령의 시간은 사람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연출되었다. 유령의 시각에서 어느 순간에 한 가족은 살아있었다고, 죽었고, 어느 순간 해골이 되어 있었다.  그 순환의 고리는 아내가 남긴 쪽지로 끊어질 수 있었다. 이 시간관에 완전히 설득되지는 않지만 매우 흥미로운 설정이었음은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