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영화로 충분히 흥미로운 소재를 다뤘다. 방송에서 들었던 내용과 실제 봤을 때 내 느낌은 좀 달랐는데 짧은 방송 시간 때문에 비약, 생략된 소개를 했던 거라고 이해해본다.
한국 개봉명은 영화의 내용, 핵심 테마를 그대로 공개해버린다. 헝가리어의 원제는 영어 번역의 제목과 같아 보인다. 몸과 영혼, 신체와 영혼에 대해.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의 남녀가 꿈 속에서 매번 만난다는 이유로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이상하지만 실제 그런 일이 있다면 이해할 수는 있다. 부부조차 같은 꿈을 꾸는 일은 거의 없다. 같은 꿈을 꾼다는 말은 밤 중의 수면 행위의 일부로서, 일종의 불가사의한 체험으로서의 꿈을 두 사람만이 공유한다는 영화 속의 표면적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겠고, 일상의 관용적 표현으로, 그러니까 훨씬 현실적인 의미로 두 사람이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도 함께 고려할 수 있다. 영화에 나오는 부부는 도축장의 사장 부부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부부의 사이는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고, 결코 같은 꿈을 꿀 것 같지 않다.
영화는 주인공 남성 엔드레(?)의 불편한 신체, 쓰지 못 하는 왼쪽 팔을 상당히 여러 번 강조했다. 그는 늙었고, 한 팔이 불편하지만 회사에서는 사장과 가장 친한 중역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꿈 속에서 당당한 숫사슴으로서 암사슴이 먹이를 찾는 것을 도와주고, 눈 덮인 숲 속을 끝없이 질주한다. 여자와의 사랑을 몇 년 전에 포기했다는 그가 사슴이 되는 꿈을 꾼 것은 마리아가 도축장에 오기 전부터의 일처럼 보였다. 영화의 시작 자체가 사슴 장면이고, 이후 회사에 첫 출근한 마리아를 엔드레가 눈여겨 보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즉 본 적도 없는 여자의 영혼을 꿈 속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다. 몸으로 만나기 전, 눈으로 보기 전부터 만나는 영혼의 만남이라니 매우 시적이고 해야할까 싶은 재미있는 설정이다.
남성은 둘이 같은 꿈 속에서 숫사슴, 암사슴으로 만난다는 걸 알아채고, 그것에 대해 마리아와 이야기를 계속 하면서 어떤 순간에는 꿈 속에서 왜 도망갔냐고 추궁하기까지 했다. 보통 이해하기로 꿈은 꾸는 사람 마음대로 통제할 수는 없는 일일 터인데.
마리아는 매우 독특한 사람이다. 대인관계랄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휴대전화가 없는 것이 대표적이었다), 숫자에 강하고 기억력이 비상하게 발달되어 있다. 그녀는 엔드레를 처음 만나서 한쪽 팔이 불편하다는 점을 대놓고 말할 정도로, 그리고 자신을 마리카라고 부르지 말라고 말하는 식으로 너무 솔직하다. 그녀는 어린 시절 심리 상담을 해준 것으로 보이는 의사?를 성인이 되어서 다시 찾았다. 그녀로서도 자신에게 다가와 준(실제로 엔드레는 두 사람이 꿈에서 만난다는 걸 알기 전부터 적극적으로 접근했고 그녀도 그 점을 집에 가서 인형극을 하며 고마워하는 식이었다) 엔드레에게 더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관계의 문법들을 공부해가며 연기해가며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엔드레는 어느 순간 포기하는 듯 보였고, 그 순간 그녀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영화 후반의 피칠갑의 잔혹한 순간이 지나가고(영화 초반 무표정한 소가 틀에 갖혀 살해되고, 머리가 예리한 칼에 의해 몸에서 떨어져 나가며 피가 흥건했던 장면과 연관이 있을까?) 둘은 서로의 사랑을 아주 직접적으로 확인한다. 마리아가 사랑의 순간에 매우 조용했던 장면이 인상적인데 왜냐하면 그녀는 사랑을 연기하는 교성이 요란한 성인 비디오물을 보며 어떻게 할지를 공부해놨기 때문이다. 그녀는 책 혹은 동영상에서 배운 사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본 모습으로서 사랑을 했다.
이 일이 있은 이후 재미있게도 그녀는 이제 꿈을 꾸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이 결실을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두 사람이 사슴으로서 만났던 것으로 보이는 숲 속의 장면, 나무에서인지 무언가 떨어져 물 위에 파문이 이는 장면으로 끝난다. 사슴들이 없는 풍경, 이 곳은 다른 사슴들 혹은 토끼들 혹은 여우들(?)의 영혼의 만남을 주선하는 곳일까? 아름답다면 아름답지만 기괴함하다는 느낌도 가시지 않는 영화였다.
글을 올리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더 써보고 싶은 내용이 있어 추가한다.
영화의 테마는 꿈도 있지만 짝짓기도 있다. 짝짓기는 유전자 보존을 위한 본능적 행위라고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데, 영화에서는 다른 층위들이 존재한다.
위에 언급했지만 포르노 영상 속의 짝짓기가 등장하는데 순전히 관객, 소비자를 위한 신체들의 인위적 연기, 소리들이 존재한다. 또 도축장이라고 할까 사육장이랄까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직장, 장소에서 소들의 짝짓기가 있다. 바로 이 소들의 짝짓기를 돕기 위한 발정제(?)가 영화의 큰 줄기를 형성하는데, 이렇게 사육된 소들의 짝짓기는 유전자 보존 본능이라기보다 인간의 육식을 위한 도구적 행위에 불과하다. 물론 유전자 보존을 위한 본능도 작동했겠지만, 이는 소들의 본능을 조작하는 인간 욕망의 결과이다.
새로 공장에 투입된 젊은 남성은 암탉 무리 속의 우두머리 수탉으로 묘사되는데, 그는 건장한 신체와 얼핏 매튜 매커너히를 연상시키는 외모로 공장의 젊은 여성들의 관심을 끌어모은다. 그가 실제로 그 여성들과 잤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그렇게 간주된다. 사장은 부인이 그 남성과 잤으리라고 우려한다. 여기는 인간의 관계지만 비유적으로 제시된 뛰어난 수탉 한 마리와 수많은 암탉의 관계로 정리해도 될 것이다.
정신과 의사(?)와 엔드레의 대화는 둘 사이의 관계보다 대화 속의 이야기로서 짝짓기가 등장한다. 사실 이 대화가 엔드레와 마리아의 짝짓기가 가속화되는 직접적 계기이기도 하다. 발정제 도난 사건 수사의 일환으로 엔드레는 의사와 상담을 하게 되는데 그녀는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 불편한 질문들을 이어간다. 없어진 물건의 성격과 관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질문이지만(질문자인 여성 신체의 성적 매력 때문에 남성은 더욱 불편해진다) 그로 인한 대화를 통해 꿈 속 사슴들의 짝짓기의 성격이 규정된다. 사슴들은 다른 존재는 하나도 없이 오직 암수 두 마리만 존재하지만 같이 다니거나 바라보거나 기껏해야 코가 닿을 뿐이다. 여성 의사는 꿈 속에서 짝짓기를 했냐고 물어보지만 엔드레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엔드레와 마리아는 꿈에서 처음 만나는 영혼들이었고, 서로를 알아가는 중이었다. 실제 짝짓기는 영화 막판에 실제 현실로서 실현되고, 꿈에서 더 이상 사슴은 나오지 않게 된다.
엔드레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어떨까. 둘은 모두 각자의 집에서 혼자 사는 외로운 사람들이다. 엔드레는 과거에 살림을 꾸렸던 모양이고, 마리아는 20대 중반의 나이로 보이지만 여전히 혼자 인형극을 하는 10대나 그 이하의 어린이 같은 행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 둘의 결합을 위해 남자는 더 젋은 시절로 돌아가야 했고, 여자는 어른이 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의 피칠갑은 여성이 된다는 관용적 의미의 생리나 첫 경험의 혈흔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마리아가 축 늘어진 남자의 왼팔을 다정하게 잡으며 그 팔도 쓸모없는 게 아니라는, 엔드레의 신체는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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