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 깁슨 감독의 신작 영화 핵소 리지는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오키나와에서 미일 양군이 치열하게 싸운 장소의 이름이다. 데스먼드 도스라는 실제 인물이 이 장소에서 미군이 모두 철수했는데 혼자 남아 수십 명의 동료와 몇 명의 일본군까지 구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영화화했다.
영화가 재미있는 점은 데스먼드 도스라는 인물이 원래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는데 자원 입대하였고, 더구나 군대에서 중대장은 물론 동료군인들이 제대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가지 않고 굳이 죽음의 소굴로 들어갔다는 거다.
거기다 핵심적인 내용은 그가 제칠일안식교라는 특정한 교파의 신자라서 총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인데도 군대에 갔다는 것이다. 그는 총은 안 잡아도 의무병은 될 수 있지 않겠냐고 생각하고 군대에 갔다. 더구나 교리상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에 쉬어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군대에서 허용되리라 생각했다니 평시도 아닌 전시의 군인으로서는 매우 독특한 사람이라 할 수밖에 없고 그런 병사를 부하로 두어야했던 장교나 부사관들이 화를 낸 것도 당연히 이해가 간다. 오직 그가 정말로 전쟁터에서 쓸모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야 칭송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
영화의 절반은 데스먼드가 군대에 가기 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차대전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친구들이 눈앞에서 죽어간 후유증으로 알콜중독에 빠지고 가족들을 때렸다. 어릴 적 동네의 높은 산에 오르기를 좋아했던 데스먼드는 어린 시절 동생(?형?)을 돌로 때려 죽일 뻔한 경험을 통해 10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머리에 박혀버린다.
데스먼드에 대한 실화에 따르면 영화에도 나온 장면이지만 그가 아마도 10대 후반은 되었을 시절 아버지가 권총을 들고 어머니를 학대할 때 막으려고 하다가 권총이 발사된 걸 보고는 총을 잡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런 장면에서 데스먼드와 제칠일안식교의 관계는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상에서는 원래 해당 교파의 신자이기 때문에 총을 잡기 않는 것처럼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그 사건 이후로 총을 안 잡겠다고 맹세했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교파의 신자가 된 것이 부모의 영향인지 아니면 벽에 걸린 10계명의 그림 때문인지도 불확실하다.
그는 장성하여 바보같은 미소를 지으며 어떤 간호사에게 빠져들었고 그 간호사는 그 멍청한 웃음에 진실함을 느껴 그와 결혼한다. 그 시기는 그의 군 입대와 겹쳐진다. 영화에 따르면 그는 청혼을 한 이후 입대했고, 군대에서 휴가를 얻어 결혼한다. 이후 그는 돌연 핵소 리지가 있는 오키나와에 도착한다. 이 부분도 현실과 다르다. 현실에서는 이미 그 전에 괌 등지에서 전투를 경험한 이후 오키나와로 이동했는데 영화는 아무 설명없이 첫 실전을 핵소 리지에서 경험한 것처럼 그려놨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초짜 의무병의 기적같은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강조하는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그는 영화에서 그려진 대로 혹은 부족하게 그려졌지만 공식적으로 75명의 부상병을 구해낸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자신은 50명쯤 구한 것 같다고 했고, 당시 함께 있던 동료들은 100명은 구했을 것이라고 증언해서 중간의 75명으로 정했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볼 수도 있다.
그냥 뒀으면 자연적으로 혹은 일본인의 확인 사살로 목숨을 잃었을 수십 명을 구한 인물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호평을 보내는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은 멜 깁슨이 도스를 그려내는 방식을 향한다. 영화가 그를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마치 메시아처럼 그려냈다는 것이다. 실제 예수의 생에 대한 흥행작 감독이기도 한 멜 깁슨은 브레이브 하트에서도 죽음을 불사하는 영웅적 인물을 그려낸 바 있다.
영화에서 일본군이 도처에 깔렸고, 실수로 들어간 굴 속도 일본군이 그렇게 많건만 도스가 어떻게 발각되지 않았는지도 신기한 일이고, 더구나 굴 속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 부상병을 치료해주는 장면은 더욱 기가 막히다. 절벽 아래 있던 미군들이 일본군마저 밧줄로 내려보내는 미지의 인물을 미쳤다고 생각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전쟁 중에 적군을 적대적으로 보는 건 당연하다고 해도 될 일인데 그런 적군마저 다쳤다면 사랑으로 보듬는 그의 모습은 인간을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몸이 멀쩡한 일본군이었다면 아마도 도스를 그 자리에서 죽였을 것이다. 그만큼 일본군들은 그저 악귀 같은 존재들로 그려졌다. 한국, 중국이나 동남아 같은 식민지가 아니라 자신들의 영토(오키나와가 근대에 일본에 편입된 건 일단 부차적으로 치자)를 지키는 군인들이지만 영화에서는 땅 속에서 우르르 튀어나오는 짐승이나 벌레떼처럼 그려졌고, 항복하는 척하면서도 수류탄을 몰래 던지는 악마 같은 심성이 드러나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일본인들의 말, 일본어는 자막도 안 달아서 그저 외계어, 효과음 정도로 치부된다.
데스먼드는 홀로 남아 미친듯이 한 명 한 명 부상병들을 절벽 아래로 내려보낸 후 부대원들과의 다음 공격에도 참가하여 큰 부상을 입는다. 영화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수류탄 파편으로 인한 다리 부상 외에 오랜 병원 신세를 진 끝에 폐 하나도 결핵으로 잃게 된다. 영화에 나오지 않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가 영화에서 결혼한 여성이 죽은 이후 다른 여성과 다시 결혼한다는 점이다. 할아버지가 된 후의 일이긴 하다.
2017년 2월 6일 월요일
어라이벌에 대한 생각 (2)
한국에서 '컨택트'라는 다소 어이없는 제목이 붙어 개봉한 영화 어라이벌의 원작 소설을 영어로 읽어보고, 영화를 다시 보았다. 원문으로 읽은 테드 창의 원작 소설 'The story of your life'은 지나치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과학적 논리나 용어들이 많아서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원작 소설은 단편이라고는 해도 너무 짧은 이야기도 아니었다. 읽은데 시간이 적잖이 걸렸는데, 무엇보다 우선 평가할 점은 영화가 원작의 내용을 꽤 많이 가져가서 썼다는 점이다. 캥거루라는 단어의 기원이나 논 지로 썸 게임 같은 부분은 정확히 옮겨서 이용되었다. 영화 엔딩 부분도 원작의 엔딩과 맞추기 위해 꽤 노력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책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영화에서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강대국들의 갈등과 세계적 전쟁 발발 가능성이라는 장치를 이용한 반면 소설에는 그런 긴장감이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샹 장군 같은 인물이 원작에는 없다. 영화는 딸 하나의 출생과 죽음의 과정을 짤막하게 보여준 후 곧바로 외계인이 온 후 인간들의 불안을 다루며 무언가 불길한 일이 생길 거라는 암시를 계속 준다. 감독의 전작들을 생각한다면 어떤 흉한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지만 영화는 평화를 주는 외계인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불안의 정서는 영화적 긴장감을 위한 장치로 볼 수 밖에 없다.
딸의 이름이 영화에서 하나라고 제시되는데 원작에는 안 나왔던 것 같다. 하나Hannah라는이름의 영어 철자가 앞에서부터 읽어도, 뒤어서부터 거꾸로 읽어도 같아진다는 바로 그 설정 때문에 선택된 이름일 것이다. 마치 주인공인 루이스가 외계인 헵파포드가 준 보편언어 덕분에 선형적이지 않은 시간 관념을 갖게 된 것처럼.
영화의 전체적 틀은 맨 앞에 딸 하나의 출생과 사망이라는 하나의 스토리가 있다고 제시한 다음, 영화의 대부분인 그 다음 이야기가 딸의 출생이라는 사건의 시작이 어떻게 가능했나라는 그 전 이야기를 다룬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 루이스는 외계인이 떠나면서 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다시 말한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인상적인 점은 영화 제목인 어라이벌이 딸의 출생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된 것이었다. 그리고 디파쳐는 딸의 사망을 말하는 단어로 등장했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어라이벌은 외계인 헵타포드의 도래로 보는 게 일차적인 반응일 수밖에 없다. 물론 헵타포드의 도착도 중요한 사건이지만 루이스의 인생에서는 남편될 남자와의 만남, 그리고 그와 낳은 딸과의 삶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헵타포드가 3천년의 미래를 운운하며 루이스의 행동이 인류와 헵타포드 종족의 긴 미래에 핵심적이라고 하기에도 모자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됨을 알려주긴 하지만 개인사로 보자면 그건 부차적이다.
그렇게 보자면 원작 소설의 한글 번역본의 제목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잘못 된 게 아닌가 싶다. '당신'은 따지고 보면 루이스의 딸, 영화에서는 하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아이다. 그렇다면 존칭을 붙일 게 아니라 "너의 인생의 이야기"라고 해야 적절하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고 하면 마치 작가가 독자들을 '당신'으로 지칭하는듯한 뉘앙스가 강하다.
소설에서는 빛이 공기 중에서 물로 이동할 때 굴절되는 현상을 매우 강조한다. 빛이 가장 빠른 길이 어디인지 미리 아는 것처럼 물을 만나자 정확한 각도로 꺾여서 이동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기 중의 한 지점 a에서 물 속의 한 지점 b까지는 직관적으로는 직선적으로 이동해야 가장 빠를 것 같지만 빛으로서는 굴절되어 이동해야 가장 빠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가 마치 정해져있다는 듯한 영화의 메시지와 연결시켜 보면 현 시점에서 가장 빠른 길로 보이는 과정이 나중의 시점까지 고려할 때 실제로 가장 빠른 진행 과정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루이스가 영화에서 보인 여러 행동처럼 타인의 눈으로 보면 무모하게 혹은 미친 것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정답일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작에서는 다른 역설적 논리도 다룬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서 나중에 되새겨보아야겠다. 하지만 모든 일의 과정이 정해져있다는 식의 논리라면 꽤나 위험하기도 하다. 또 인간들이 헵타포드의 비선형적 시간 관념을 그들의 언어를 배움으로써 터득하게 되면, 즉 루이스처럼 미래를 알 게 되는 인간들이 많아지면 그것이 반드시 평화에 이바지할 것인지도 의문이다. 논리적으로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때문에 사회적 혼란이 생각만큼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모든 인간이 자기가 예쁜 외동딸을 낳을 건데 10대나 20대에 불치병으로 혹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것을 알고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영화와 소설이 달랐던 점 하나만 더 적고 마무리하겠다. 영화에서 이언과 루이스의 결합이 그럴 듯하다는 장치들이 깔려있기는 하지만 무언가 둘이 사랑에 빠지기엔 부족했다는 느낌이 있다. 반면 소설에서는 이 두 연인이 외계인이 떠나기 전에 이미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래서 루이스는 남자에게 나를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연구에 참여시킨 게 아니냐고 농담을 던진다.
컨택트는 외계인과의 만남을 뜻하는 말로 많이 사용되는 것 같다. 조디 포스터가 주연했던 예전 영화에서는 그들과 만나기 위한 지난한 과정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 어라이벌에서 외계인은 멀리서 메시지만 보낸 게 아니라 지구의 열두 곳에 갑자기 도래했다. 그들과의 접촉, 컨택트는 의미있는 일이었지만 원작 소설이 그렇고 영화의 엔딩이 그렇듯 남녀의 사랑과 아이를 갖자는 둘의 결단의 결과인 한 자녀의 도착, 탄생이야말로 영화의 주제다. 그러므로 컨택트라는 한국 개봉시의 영화명은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원작 소설은 단편이라고는 해도 너무 짧은 이야기도 아니었다. 읽은데 시간이 적잖이 걸렸는데, 무엇보다 우선 평가할 점은 영화가 원작의 내용을 꽤 많이 가져가서 썼다는 점이다. 캥거루라는 단어의 기원이나 논 지로 썸 게임 같은 부분은 정확히 옮겨서 이용되었다. 영화 엔딩 부분도 원작의 엔딩과 맞추기 위해 꽤 노력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책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영화에서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강대국들의 갈등과 세계적 전쟁 발발 가능성이라는 장치를 이용한 반면 소설에는 그런 긴장감이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샹 장군 같은 인물이 원작에는 없다. 영화는 딸 하나의 출생과 죽음의 과정을 짤막하게 보여준 후 곧바로 외계인이 온 후 인간들의 불안을 다루며 무언가 불길한 일이 생길 거라는 암시를 계속 준다. 감독의 전작들을 생각한다면 어떤 흉한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지만 영화는 평화를 주는 외계인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불안의 정서는 영화적 긴장감을 위한 장치로 볼 수 밖에 없다.
딸의 이름이 영화에서 하나라고 제시되는데 원작에는 안 나왔던 것 같다. 하나Hannah라는이름의 영어 철자가 앞에서부터 읽어도, 뒤어서부터 거꾸로 읽어도 같아진다는 바로 그 설정 때문에 선택된 이름일 것이다. 마치 주인공인 루이스가 외계인 헵파포드가 준 보편언어 덕분에 선형적이지 않은 시간 관념을 갖게 된 것처럼.
영화의 전체적 틀은 맨 앞에 딸 하나의 출생과 사망이라는 하나의 스토리가 있다고 제시한 다음, 영화의 대부분인 그 다음 이야기가 딸의 출생이라는 사건의 시작이 어떻게 가능했나라는 그 전 이야기를 다룬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 루이스는 외계인이 떠나면서 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다시 말한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인상적인 점은 영화 제목인 어라이벌이 딸의 출생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된 것이었다. 그리고 디파쳐는 딸의 사망을 말하는 단어로 등장했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어라이벌은 외계인 헵타포드의 도래로 보는 게 일차적인 반응일 수밖에 없다. 물론 헵타포드의 도착도 중요한 사건이지만 루이스의 인생에서는 남편될 남자와의 만남, 그리고 그와 낳은 딸과의 삶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헵타포드가 3천년의 미래를 운운하며 루이스의 행동이 인류와 헵타포드 종족의 긴 미래에 핵심적이라고 하기에도 모자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됨을 알려주긴 하지만 개인사로 보자면 그건 부차적이다.
그렇게 보자면 원작 소설의 한글 번역본의 제목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잘못 된 게 아닌가 싶다. '당신'은 따지고 보면 루이스의 딸, 영화에서는 하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아이다. 그렇다면 존칭을 붙일 게 아니라 "너의 인생의 이야기"라고 해야 적절하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고 하면 마치 작가가 독자들을 '당신'으로 지칭하는듯한 뉘앙스가 강하다.
소설에서는 빛이 공기 중에서 물로 이동할 때 굴절되는 현상을 매우 강조한다. 빛이 가장 빠른 길이 어디인지 미리 아는 것처럼 물을 만나자 정확한 각도로 꺾여서 이동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기 중의 한 지점 a에서 물 속의 한 지점 b까지는 직관적으로는 직선적으로 이동해야 가장 빠를 것 같지만 빛으로서는 굴절되어 이동해야 가장 빠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가 마치 정해져있다는 듯한 영화의 메시지와 연결시켜 보면 현 시점에서 가장 빠른 길로 보이는 과정이 나중의 시점까지 고려할 때 실제로 가장 빠른 진행 과정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루이스가 영화에서 보인 여러 행동처럼 타인의 눈으로 보면 무모하게 혹은 미친 것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정답일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작에서는 다른 역설적 논리도 다룬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서 나중에 되새겨보아야겠다. 하지만 모든 일의 과정이 정해져있다는 식의 논리라면 꽤나 위험하기도 하다. 또 인간들이 헵타포드의 비선형적 시간 관념을 그들의 언어를 배움으로써 터득하게 되면, 즉 루이스처럼 미래를 알 게 되는 인간들이 많아지면 그것이 반드시 평화에 이바지할 것인지도 의문이다. 논리적으로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때문에 사회적 혼란이 생각만큼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모든 인간이 자기가 예쁜 외동딸을 낳을 건데 10대나 20대에 불치병으로 혹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것을 알고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영화와 소설이 달랐던 점 하나만 더 적고 마무리하겠다. 영화에서 이언과 루이스의 결합이 그럴 듯하다는 장치들이 깔려있기는 하지만 무언가 둘이 사랑에 빠지기엔 부족했다는 느낌이 있다. 반면 소설에서는 이 두 연인이 외계인이 떠나기 전에 이미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래서 루이스는 남자에게 나를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연구에 참여시킨 게 아니냐고 농담을 던진다.
컨택트는 외계인과의 만남을 뜻하는 말로 많이 사용되는 것 같다. 조디 포스터가 주연했던 예전 영화에서는 그들과 만나기 위한 지난한 과정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 어라이벌에서 외계인은 멀리서 메시지만 보낸 게 아니라 지구의 열두 곳에 갑자기 도래했다. 그들과의 접촉, 컨택트는 의미있는 일이었지만 원작 소설이 그렇고 영화의 엔딩이 그렇듯 남녀의 사랑과 아이를 갖자는 둘의 결단의 결과인 한 자녀의 도착, 탄생이야말로 영화의 주제다. 그러므로 컨택트라는 한국 개봉시의 영화명은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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