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13일 월요일

핵소 리지

멜 깁슨 감독의 신작 영화 핵소 리지는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오키나와에서 미일 양군이 치열하게 싸운 장소의 이름이다. 데스먼드 도스라는 실제 인물이 이 장소에서 미군이 모두 철수했는데 혼자 남아 수십 명의 동료와 몇 명의 일본군까지 구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영화화했다.

영화가 재미있는 점은 데스먼드 도스라는 인물이 원래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는데 자원 입대하였고, 더구나 군대에서 중대장은 물론 동료군인들이 제대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가지 않고 굳이 죽음의 소굴로 들어갔다는 거다.

거기다 핵심적인 내용은 그가 제칠일안식교라는 특정한 교파의 신자라서 총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인데도 군대에 갔다는 것이다. 그는 총은 안 잡아도 의무병은 될 수 있지 않겠냐고 생각하고 군대에 갔다. 더구나 교리상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에 쉬어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군대에서 허용되리라 생각했다니 평시도 아닌 전시의 군인으로서는 매우 독특한 사람이라 할 수밖에 없고 그런 병사를 부하로 두어야했던 장교나 부사관들이 화를 낸 것도 당연히 이해가 간다. 오직 그가 정말로 전쟁터에서 쓸모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야 칭송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

영화의 절반은 데스먼드가 군대에 가기 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차대전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친구들이 눈앞에서 죽어간 후유증으로 알콜중독에 빠지고 가족들을 때렸다. 어릴 적 동네의 높은 산에 오르기를 좋아했던 데스먼드는 어린 시절 동생(?형?)을 돌로 때려 죽일 뻔한 경험을 통해 10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머리에 박혀버린다.

데스먼드에 대한 실화에 따르면 영화에도 나온 장면이지만 그가 아마도 10대 후반은 되었을 시절 아버지가 권총을 들고 어머니를 학대할 때 막으려고 하다가 권총이 발사된 걸 보고는 총을 잡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런 장면에서 데스먼드와 제칠일안식교의 관계는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상에서는 원래 해당 교파의 신자이기 때문에 총을 잡기 않는 것처럼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그 사건 이후로 총을 안 잡겠다고 맹세했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교파의 신자가 된 것이 부모의 영향인지 아니면 벽에 걸린 10계명의 그림 때문인지도 불확실하다.

그는 장성하여 바보같은 미소를 지으며 어떤 간호사에게 빠져들었고 그 간호사는 그 멍청한 웃음에 진실함을 느껴 그와 결혼한다. 그 시기는 그의 군 입대와 겹쳐진다. 영화에 따르면 그는 청혼을 한 이후 입대했고, 군대에서 휴가를 얻어 결혼한다. 이후 그는 돌연 핵소 리지가 있는 오키나와에 도착한다. 이 부분도 현실과 다르다. 현실에서는 이미 그 전에 괌 등지에서 전투를 경험한 이후 오키나와로 이동했는데 영화는 아무 설명없이 첫 실전을 핵소 리지에서 경험한 것처럼 그려놨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초짜 의무병의 기적같은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강조하는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그는 영화에서 그려진 대로 혹은 부족하게 그려졌지만 공식적으로 75명의 부상병을 구해낸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자신은 50명쯤 구한 것 같다고 했고, 당시 함께 있던 동료들은 100명은 구했을 것이라고 증언해서 중간의 75명으로 정했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볼 수도 있다.

그냥 뒀으면 자연적으로 혹은 일본인의 확인 사살로 목숨을 잃었을 수십 명을 구한 인물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호평을 보내는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은 멜 깁슨이 도스를 그려내는 방식을 향한다. 영화가 그를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마치 메시아처럼 그려냈다는 것이다. 실제 예수의 생에 대한 흥행작 감독이기도 한 멜 깁슨은 브레이브 하트에서도 죽음을 불사하는 영웅적 인물을 그려낸 바 있다.

영화에서 일본군이 도처에 깔렸고, 실수로 들어간 굴 속도 일본군이 그렇게 많건만 도스가 어떻게 발각되지 않았는지도 신기한 일이고, 더구나 굴 속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 부상병을 치료해주는 장면은 더욱 기가 막히다. 절벽 아래 있던 미군들이 일본군마저 밧줄로 내려보내는 미지의 인물을 미쳤다고 생각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전쟁 중에 적군을 적대적으로 보는 건 당연하다고 해도 될 일인데 그런 적군마저 다쳤다면 사랑으로 보듬는 그의 모습은 인간을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몸이 멀쩡한 일본군이었다면 아마도 도스를 그 자리에서 죽였을 것이다. 그만큼 일본군들은 그저 악귀 같은 존재들로 그려졌다. 한국, 중국이나 동남아 같은 식민지가 아니라 자신들의 영토(오키나와가 근대에 일본에 편입된 건 일단 부차적으로 치자)를 지키는 군인들이지만 영화에서는 땅 속에서 우르르 튀어나오는 짐승이나 벌레떼처럼 그려졌고, 항복하는 척하면서도 수류탄을 몰래 던지는 악마 같은 심성이 드러나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일본인들의 말, 일본어는 자막도 안 달아서 그저 외계어, 효과음 정도로 치부된다.

데스먼드는 홀로 남아 미친듯이 한 명 한 명 부상병들을 절벽 아래로 내려보낸 후 부대원들과의 다음 공격에도 참가하여 큰 부상을 입는다. 영화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수류탄 파편으로 인한 다리 부상 외에 오랜 병원 신세를 진 끝에 폐 하나도 결핵으로 잃게 된다. 영화에 나오지 않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가 영화에서 결혼한 여성이 죽은 이후 다른 여성과 다시 결혼한다는 점이다. 할아버지가 된 후의 일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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