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 차원에서 극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두 개의 짧지 않은 영화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와 인크레더블2다. 공교롭게도 모두 전작에 이은 속편이고, 두 영화에서 모두 캐서린 키너가 연기한다.
먼저 시카리오 후속편이다. 드니 빌뇌브가 빠지고 에밀리 블런트가 빠진 상태의 후속작이 과연 어떨 것인가를 생각하면 당연히 기대감이 뚝 떨어지고 평소라면 보러 가지 않았을 터이다. 하지만 앤트맨 과 와스프를 보느니 이 영화를 볼 터이고, 또한 어디에서 잘못 보았는지 영화가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평가들도 읽었다.
오래간만에 찾은 CGV 용산. 그리 크지 않은 18관에서 영화가 상영되었다. 그것도 아마 마지막 상영일이었던 것 같다. 관람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내가 더 좋은 자리로 옮길 생각을 못 하게 만들 정도로는 많이 있었다.
영화는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밀입국하던 한 남자가 단속에 걸리자 자폭하는 장면에 이어 미국 마트 내에서 폭탄 테러를 벌인 한 이슬람 신도를 보여준다. 그러자 미국 국방부 장관은 잘 됐다, 이제 미국이 압도적 폭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경고를 보냈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 이야기인데 왜 이슬람 신도의 폭탄 테러가 나오나 의아하던 차에 장소는 아프리카로 건너 뛰어서 일련의 과정이 있은 후 예멘의 테러 단체가 소말리아 배를 통해 멕시코로 가서 미국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라는 친절한 해설을 덧붙였다. 그러하니 결국 문제는 다시 멕시코 카르텔이다, 이 놈들을 분쇄해야한다는 계획을 세우면서 카르텔 두목의 딸을 미국이 납치하면서 경쟁 카르텔의 소행처럼 보이게 하여 분란을 일으키자는 결론이 내려지고 실행된다.
이제는 어벤져스의 타노스로 너무 유명해진 조쉬 브롤린이 주연으로서 이 작전을 총괄한다. 어떤 무기상에게서 헬기를 비롯한 온갖 무기를 구매하고, 콜롬비아에서 사는 베네치오 델 토로를 찾아 복수의 기회를 제공한다. 카르텔 두목 딸의 납치는 너무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왔다가 다시 멕시코로 갔다가 멕시코 경찰의 총격을 받으며 전투가 벌어지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데 델 토로는 그 소녀를 데리고 방랑길에 오른다. 멕시코 경찰 수십 명이 죽은 것이 문제가 되어 작전은 취소가 되고 델 토로와 소녀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지시가 내려온다. 일이 간편하게 돌아가서 어린 시카리오들에 의해 델 토로가 총을 맞고 죽었고, 딸은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그러나 조쉬 브롤린이 이끄는 대원들은 헬기 두 대에서 내려 어린 시카리오들을 학살하고 그 딸을 다시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델 토로는 살아있었다! 총알이 빰에서 빰으로 관통하여 치명상을 입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지 않는 자유를 얻었다. 이후 영화는 1년 후 그를 쏜 어린 시카리오를 델 토로가 정장을 잘 차려입고 찾아가 상담을 하려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볼 때는 몰랐지만 3부가 또 만들어진다고 하니 이 둘이 3부에서 활약을 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신경질적으로 사람을 긴장시키는 음악을 자주 사용했다. 1편에서처럼 멕시코 카르텔의 살벌한 행태는 나오지 않았고 대신 카르텔과 공생하는 멕시코 경찰의 부패상과 사람들을 국경 너머로 보내주며 돈을 버는 꼬마 시카리오들이 미국의 적으로 주요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힘의 균형은 미국 요원들에게 너무 쏠려있는 것처럼 보였고, 과연 이들의 행동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지 모호했다. 아마도 카르텔과의 전쟁을 미 국방부가 원하는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겠지만 조쉬 브롤린의 동기가 애매하고, 왜 카르텔 두목의 딸을 애초의 계획과 달리 살리는지도 명확치 않다.
인크레더블을 하도 오래전에 보아 속편이 1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모르는 상태로 관람했다. 하도 극찬 일색이라 2시간을 보낼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다.
픽사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보는 것이 하도 오랜만이라 본 영화 전의 단편을 보는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만두?를 빚던 아주머니가 만두가 사람이 되는 걸 보며 깜짝 놀랐다가 만두를 자식처럼 키우는데 결국 결혼해서 집을 떠나버리자 좌절하는 이야기였다. 밝혀지기론 아주머니에게 만두처럼 생긴 아들이 있었고 그가 결혼 후 집을 나가버린 후 좌절한 것이 만두와의 관계로 형상화된 것이었다. 아들을 젊은 여자에게 주느니 차라리 먹어버린다는 설정이 극단적이긴 하지만 재미있었다.
영화 초반은 인크레더블 가족 5명이 두더지처럼 그러나 엄청나게 큰 기계로 땅을 마구 파헤치고 건물 도로를 망가뜨리는 악당을 물리치는 과정이 그려진다. 결국 이야기는 최근의 여러 수퍼 히어로 영화에서 반복되는 주제처럼 이 초능력자들이 기여한바도 있지만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많아 격리하거나 능력을 쓰지 못 하게 해야한다는 여론에 대한 것이었다.
이들 가족은 능력을 숨긴 채 평범한 직장에서 일해야 할 운명에 처했는데 갑자기 한 IT 재벌이 접근하여 수퍼 히어로를 합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며 달콤한 제안을 해온다. 다만 남편이자 가장인 미스터 인크레더블이 아니라 아내인 일래스티걸이 먼저 활동을 해야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남편은 이제 집에 남아 세 아이를 돌봐야했다. 큰 딸은 남자 아이와 연애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았고, 초등학생 혹은 중학생인 큰 아들은 수학을 못 해서 아버지에게 물어보나 미스터 인크레더블도 수학을 잘 못 했고, 갓난아기를 보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공감이 되는 장면이 너무 많았고, 내 자리 인근에서 아이들을 데려와 영화를 보는 어느 아주머니도 종종 그런 장면들에서 웃고 계셨다.
영화는 중반부터 예측이 가능한 부분이 있었다. 결국 재벌의 여동생, 주로 발명을 담당한 그녀가 스크린슬레이버였음이 드러났고, 인크레더블 가족이 물리쳐야할 주요한 적도 그녀였다. 오후의 영화 관람이 너무 피곤하여 후반부의 전투 장면은 거의 통째로 놓쳐버렸지만 큰 후회나 미련은 없다.
영화는 몇 가지 재미있는 지점들을 제공했다. 어머니가 생계를 해결하고 아버지가 집에 남아 아이들을 돌보는 상황 자체가 주는 어려움은 웃음 포인트가 되었다. 이 대목은 최근의 미투 운동으로 대표되는 페미니즘과 연결이 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기 잭잭이 온갖 초능력을 갖고 있으며 화가 날 때는 악마 같이 변하기도 하는 장면은 은유적으로 해석하면 오히려 현실적이다. 아기는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고, 화를 내고 떼를 쓰면 아무리 부모라도 아기가 귀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스크린슬레이버는 악당이지만 그의 주장은 어찌 보면 수퍼 히어로에 열광하는 문화에 대한 일침으로 받아들여도 될만한 것이었다. 수동적인 인간, 무력한 인간들이 만연했기 때문에 오히려 수퍼 히어로에 열광한다는 진단은 오히려 그(녀)가 악당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아마 이 애니메이션의 세계관에서는 실재하는 수퍼 히어로들을 없애겠다는 목적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2018년 7월 25일 수요일
인랑 (2018)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알고 있던 인랑이 김지운 감독에 의해 한국적 맥락으로 변형되어 극장에 걸렸다. 바로 오늘 개봉되었고 마침 시간이 되어 조조로 관람하였다.
예고편만 공개되었을 때 내가 가본 커뮤니티에서는 기대보다는 우려가 압도적이었고, 최근 며칠 시사회 반응은 좋았다는 글 제목을 얼핏 보았다. 원작을 보지 않았기에 원작과 비교하려고하는 부담감은 갖지 않은 채 편견없이 영화를 보았고, 그 결과 애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영화를 액션 영화로 분류한다면 수준급의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영화 초반의 시위와 테러 장면, 섹트라는 테러 집단을 응징하는 특기대의 진압 과정, 남산 타워에서의 총격 및 차량 액션(특히 드론의 총질이 훌륭했다), 그리고 공안부를 무찌르는 인랑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우성과 강동원의 대결까지 영화는 액션으로 가득하다.
로맨스 영화로 보면 어떨까. 영화는 최근 실제 연인설이 제기된 강동원과 한효주의 러브 라인을 주요 줄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둘은 처음부터 서로를 이용하여 자신의 혹은 조직의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 하지만 영화의 화면 배치가 암시하는 바 둘은 남산 케이블카에서의 첫 만남부터 사랑에 빠졌다. 그리하여 인랑이라고 하는 임중경(강동원)은 정우성이 잘 정리하듯 테러리스트인 한효주를 전혀 죽일 생각이 없었고, 조직의 명령을 거역하며 조직을 탈출한다. 하지만 강동원은 북한으로 가는 한효주를 따라가지 않고 역에 남으며 로맨스의 앞날, 결말을 애매하게 만든다.
정치 드라마로 보면 어떨까. 영화는 초반 정우성의 내러이션을 통해 2018년에서 6년 지난 2024년 남북이 통일에 전격 합의한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이 부분이 가장 문제적이라고 느껴지는데 왜냐하면 정우성은 '앞으로 6년' 후라며 2018년의 시점에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회고가 아니라 예언이기 때문이다. 내러이션의 정우성은 극중 특기대 훈련대장이라는 캐릭터가 아니라 2018년 현재 살아있는 배우 정우성이란 말인가? 다시 돌아가면 2024년부터 통일에 반대하는 세력이 무장을 하며 섹트라는 테러 집단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후 영화는 5년이 더 지난 2029년 시점에서 시작된다.
테러 집단의 이름을 섹트로 지은 것은 왜일까? 사실 섹트라면 종교적인 폐쇄 집단의 의미로 사용될 터인데 영화속 섹트가 종교적이라는 암시는 전혀 없었다. 더 구체적인 이름을 지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여하튼 영화의 핵심 배경은 남북이 주변 강대국의 무장화 움직임 속에서 생존을 위해 통일을 결단하지만 공안부로 대변되는 통일 반대 세력이 섹트 같은 테러 조직을 사실상 먹여살리며 공작을 벌였고 특기대가 이런 계획을 분쇄하며 더 공고한 통일의 길로 간다는 스토리다. 그렇다보니 맨 마지막의 어떤 컷은 통일부의 선전 영화인가 싶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 관계를 해소하는 차원의 통일에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음에도 왠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졌다. 결국 모든 일이 끝나고 DMZ로, 평양으로 그리고 신의주로 더 나아가 유럽까지 열차를 타고 달려가고 휴가를 보내는 꿈같은 일들이 펼쳐질 터인데 공안부의 자기파괴적 공작이 정당화될 수 있겠냐는 항변이 들리는 것 같았다.
현재 한국에는 없는 공안부는 그 깃발 모양에서부터 국정원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한 조직이다. 공안은 공각기동대에서 등장한 조직이고 인랑 원작에 등장하는지도 모르겠다. 북한 간첩을 만들어내기까지 하며 생존하는 국정원이 통일을 반기지 않을 가능성도 많겠지만 국가정보를 관리할 일이 통일 이후에도 충분히 많을 터인데 국정원을 통일 반대 세력으로 설정한 것은 그럴 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과하다는 느낌이다. 물론 영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이런 류의 국가 폭력 조직간의 대결을 설정했다고 넘어갈 수 있고 원작에 유사한 설정이 있었다고 짐작도 해본다.
영화가 근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는 방식은 약간 게으른 것 같았다. 사실상 거의 지금 현실을 그대로 가져갔고, 일반 주택가에는 통일에 반대하는 벽보들이 건물 외벽이나 담장을 뒤덮는 것으로서 포인트를 주었다. 차량에서는 택시들이 차 위에 무언가 볼록 튀어나온 형태로 다니는 것이 이색적이긴 하다. 버스의 번호 앞에 알파벳을 붙이기도 하고 전철역 출구에도 알파벳이 붙어서 현재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주긴 한다. 가장 다른 점은 총격전이 서울 중심에서 벌어진다는 것인데, 총기 모델을 보는 눈이 없어 얼마나 적실한 설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특기대의 방탄 능력이 뛰어난 아머? 전투복?과 빨간 두 개의 동그라미가 빛나는 안면 마스크가 가장 지금과 다른 시대라는 느낌을 주었다.
영화는 인간 늑대라는 제목을 스토리 속에서 변주했다. 예고편에도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탈을 쓴 늑대가 인랑의 진실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사실 인랑의 실체는 영화를 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공안부에서 파악하는 인랑은 특기대 내의 비밀 조직이라는 것인데 영화 후반부의 장면을 보면 임중경만이 인랑인 것처럼 이해되기도 하여 헛갈렸다. 여하간 임중경은 인랑이라는 것이 확정적이고 그는 공안부의 겁없이 무장 안한 애송이들은 물론이고 쿨한 외모로 바주카포를 쏘아대는 공안부 내의 특임대도 홀로 다 물리치는 괴물 같은 전투 유닛이다. 갑옷 같은 전투복이 방탄 기능은 훌륭하지만 아이언맨 같은 능력을 주는 정도는 아닌 것 같고, 등에 짋어진 통 속에서 늑대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가스가 입으로 주입되는 건가 의아했다. 그런 전투력으로 왜 영화 초반에 섹트의 리더를 놓쳤을까?
임중경이 인랑이라는 설정을 통해 김지운 감독은 또 하나의 유명한 모티브를 결합시켰다. 바로 빨간 모자 이야기다. 이 모티브는 아주 꾸준하게 등장해서 집요할 정도이다. 영화에는 한효주를 중간으로 하고 초반에 한효주의 여동생 그리고 막판에 남동생이 전면에 등장하는데 이 세 남매 모두가 해당 시점에 빨간 외투를 걸치고 있다. 그에 더해 한효주는 강동원을 자신의 책방으로 유인한 이후 비극적 버전의 빨간 외투 이야기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빨간 모자를 누가 죽였나? 할머니? 늑대? 어머니? 그녀는 누구 탓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억울하다고 했다. 이 대사는 엔딩 크레딧 막판에 한 번 더 등장한다.
영화의 주요 기제 중 하나인 2024년의 피의 금요일은 특기대가 잘못된 정보에 의해 무장하지 않은 여고생 10여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임중경은 이 일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것으로 보이고 그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그는 한효주의 동생이 섹트의 일원으로서 자폭 테러를 할 순간인데도 그녀를 죽이지 못했다. 그 여동생은 자폭을 했지만 한효주는 당신이 죽인 건 아니라며 그를 두둔했다. 임중경은 상관 지시로 한효주를 죽여야했지만 역시 죽이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구원했으며, 마지막에는 투병생활을 하던 남동생이 누나와 북한으로 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 결국 늑대여야 할 임중경은 세 명의 빨간 모자를 모두 죽이지 않았다. 늑대가 할머니를 잡아먹고 빨간 모자를 잡아 먹는 것은 식욕이라는 욕망의 결과물이다. 물론 할머니를 먹고 배가 불렀을 터인데 금세 손녀까지 잡아먹는 것은 탐욕이라고 해야할 수도 있다. 빨간 모자는 엄마 심부름을 했을 뿐인데 왜 죽어야했나. 운이 나빴다고 해야 할까? 탐욕스러운 늑대가 존재한다는 것이 부조리한 것은 아닐까?
한효주는 자신이 섹트에 들어가 활동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여겼다. 여동생의 경우는 왜 그랬는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언니를 따라 가입하고 활동한 것인지 모른다. 특기대가 학살했던 여고생처럼 그녀도 고1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는 테러에 사용될 폭탄을 운반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순진했던 그녀, 자신을 둘러싼 특기대를 보며 분노의 자폭을 선택한 그녀는 세계 도처에서 자폭 테러를 하고 내전에 휩싸인 10대 전투원들을 연상시킨다. 그 어린 청춘들은 어른들이 주입한 생각대로 행동하다가 도구처럼 사용되고 그렇게 죽어갔다. 자신의 사고를 하지 못하는 존재는 바로 특기대 대원들이고 또한 공안부의 요원들이다. 그저 상관의 명령이 떨어지면 따지지 않고 움직이는 기계, 로봇, 짐승. 임중경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다며 특기대를 떠났고 인간이 되어가는 듯 보였다. 섹트와 공안부 양쪽으로부터 덫에 걸린 한효주는 두 조직이 붕괴되자 자유의 몸이 되었고, 그야말로 아무 죄 없는, 순진무구한 그녀의 남동생은 빨간 옷을 입고도 안전하게 북한 땅으로 떠났다.
생각해보면 빨간 색의 모티브는 한국 사회의 레드 컴플렉스를 상징할 수도 있겠다.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이 되며 당의 색을 빨간 색으로 바꾸는 대변신으로 이 사회에서 빨간 색이 '빨갱이'로 연결될 여지는 훨씬 줄었지만 아직도 어디의 누군가는 종북 세력과 빨갱이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빨간 옷을 입고 북한에 간다는 설정은 그렇기 때문에 매우 도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만하면 다 썼을까? 잘 모르겠다.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처럼 분단 한국의 현실을 다른 모티브와 잘 섞어서 영화로 만들었다. 남과 북은 통일을 하겠다는데 대한민국 내 정부 조직들이 말 그대로의 전투를 벌이고, 어제의 동지가 다른 편에 넘어가 나를 죽이려고 하고, 상관과 부하가 생사의 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현재의 남북 화해 국면에서 앞으로 제발 이렇게는 하지 말자는 당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무열과 최민호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끝내야겠다. 김무열이라는 배우는 전에 본적이 없고, 샤이니의 최민호의 연기도 이 영화로 처음 보았다. 김무열은 강동원의 최대 적으로서 매우 비중있는 역을 맡았고 최민호는 비교적 짧게 출연한다. 김무열은 공안부에서 맡은 직책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젋은 얼굴이었지만 설득력있는 연기를 한 것 같고, 최민호는 곱상한 평소의 외모를 많이 망가뜨리며 애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인랑이라는 조직에 어울리는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캐스팅의 이유가 궁금하다. 늑대가 이렇게 고울 수도 있다는 사례?
예고편만 공개되었을 때 내가 가본 커뮤니티에서는 기대보다는 우려가 압도적이었고, 최근 며칠 시사회 반응은 좋았다는 글 제목을 얼핏 보았다. 원작을 보지 않았기에 원작과 비교하려고하는 부담감은 갖지 않은 채 편견없이 영화를 보았고, 그 결과 애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영화를 액션 영화로 분류한다면 수준급의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영화 초반의 시위와 테러 장면, 섹트라는 테러 집단을 응징하는 특기대의 진압 과정, 남산 타워에서의 총격 및 차량 액션(특히 드론의 총질이 훌륭했다), 그리고 공안부를 무찌르는 인랑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우성과 강동원의 대결까지 영화는 액션으로 가득하다.
로맨스 영화로 보면 어떨까. 영화는 최근 실제 연인설이 제기된 강동원과 한효주의 러브 라인을 주요 줄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둘은 처음부터 서로를 이용하여 자신의 혹은 조직의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 하지만 영화의 화면 배치가 암시하는 바 둘은 남산 케이블카에서의 첫 만남부터 사랑에 빠졌다. 그리하여 인랑이라고 하는 임중경(강동원)은 정우성이 잘 정리하듯 테러리스트인 한효주를 전혀 죽일 생각이 없었고, 조직의 명령을 거역하며 조직을 탈출한다. 하지만 강동원은 북한으로 가는 한효주를 따라가지 않고 역에 남으며 로맨스의 앞날, 결말을 애매하게 만든다.
정치 드라마로 보면 어떨까. 영화는 초반 정우성의 내러이션을 통해 2018년에서 6년 지난 2024년 남북이 통일에 전격 합의한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이 부분이 가장 문제적이라고 느껴지는데 왜냐하면 정우성은 '앞으로 6년' 후라며 2018년의 시점에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회고가 아니라 예언이기 때문이다. 내러이션의 정우성은 극중 특기대 훈련대장이라는 캐릭터가 아니라 2018년 현재 살아있는 배우 정우성이란 말인가? 다시 돌아가면 2024년부터 통일에 반대하는 세력이 무장을 하며 섹트라는 테러 집단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후 영화는 5년이 더 지난 2029년 시점에서 시작된다.
테러 집단의 이름을 섹트로 지은 것은 왜일까? 사실 섹트라면 종교적인 폐쇄 집단의 의미로 사용될 터인데 영화속 섹트가 종교적이라는 암시는 전혀 없었다. 더 구체적인 이름을 지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여하튼 영화의 핵심 배경은 남북이 주변 강대국의 무장화 움직임 속에서 생존을 위해 통일을 결단하지만 공안부로 대변되는 통일 반대 세력이 섹트 같은 테러 조직을 사실상 먹여살리며 공작을 벌였고 특기대가 이런 계획을 분쇄하며 더 공고한 통일의 길로 간다는 스토리다. 그렇다보니 맨 마지막의 어떤 컷은 통일부의 선전 영화인가 싶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 관계를 해소하는 차원의 통일에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음에도 왠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졌다. 결국 모든 일이 끝나고 DMZ로, 평양으로 그리고 신의주로 더 나아가 유럽까지 열차를 타고 달려가고 휴가를 보내는 꿈같은 일들이 펼쳐질 터인데 공안부의 자기파괴적 공작이 정당화될 수 있겠냐는 항변이 들리는 것 같았다.
현재 한국에는 없는 공안부는 그 깃발 모양에서부터 국정원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한 조직이다. 공안은 공각기동대에서 등장한 조직이고 인랑 원작에 등장하는지도 모르겠다. 북한 간첩을 만들어내기까지 하며 생존하는 국정원이 통일을 반기지 않을 가능성도 많겠지만 국가정보를 관리할 일이 통일 이후에도 충분히 많을 터인데 국정원을 통일 반대 세력으로 설정한 것은 그럴 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과하다는 느낌이다. 물론 영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이런 류의 국가 폭력 조직간의 대결을 설정했다고 넘어갈 수 있고 원작에 유사한 설정이 있었다고 짐작도 해본다.
영화가 근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는 방식은 약간 게으른 것 같았다. 사실상 거의 지금 현실을 그대로 가져갔고, 일반 주택가에는 통일에 반대하는 벽보들이 건물 외벽이나 담장을 뒤덮는 것으로서 포인트를 주었다. 차량에서는 택시들이 차 위에 무언가 볼록 튀어나온 형태로 다니는 것이 이색적이긴 하다. 버스의 번호 앞에 알파벳을 붙이기도 하고 전철역 출구에도 알파벳이 붙어서 현재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주긴 한다. 가장 다른 점은 총격전이 서울 중심에서 벌어진다는 것인데, 총기 모델을 보는 눈이 없어 얼마나 적실한 설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특기대의 방탄 능력이 뛰어난 아머? 전투복?과 빨간 두 개의 동그라미가 빛나는 안면 마스크가 가장 지금과 다른 시대라는 느낌을 주었다.
영화는 인간 늑대라는 제목을 스토리 속에서 변주했다. 예고편에도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탈을 쓴 늑대가 인랑의 진실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사실 인랑의 실체는 영화를 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공안부에서 파악하는 인랑은 특기대 내의 비밀 조직이라는 것인데 영화 후반부의 장면을 보면 임중경만이 인랑인 것처럼 이해되기도 하여 헛갈렸다. 여하간 임중경은 인랑이라는 것이 확정적이고 그는 공안부의 겁없이 무장 안한 애송이들은 물론이고 쿨한 외모로 바주카포를 쏘아대는 공안부 내의 특임대도 홀로 다 물리치는 괴물 같은 전투 유닛이다. 갑옷 같은 전투복이 방탄 기능은 훌륭하지만 아이언맨 같은 능력을 주는 정도는 아닌 것 같고, 등에 짋어진 통 속에서 늑대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가스가 입으로 주입되는 건가 의아했다. 그런 전투력으로 왜 영화 초반에 섹트의 리더를 놓쳤을까?
임중경이 인랑이라는 설정을 통해 김지운 감독은 또 하나의 유명한 모티브를 결합시켰다. 바로 빨간 모자 이야기다. 이 모티브는 아주 꾸준하게 등장해서 집요할 정도이다. 영화에는 한효주를 중간으로 하고 초반에 한효주의 여동생 그리고 막판에 남동생이 전면에 등장하는데 이 세 남매 모두가 해당 시점에 빨간 외투를 걸치고 있다. 그에 더해 한효주는 강동원을 자신의 책방으로 유인한 이후 비극적 버전의 빨간 외투 이야기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빨간 모자를 누가 죽였나? 할머니? 늑대? 어머니? 그녀는 누구 탓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억울하다고 했다. 이 대사는 엔딩 크레딧 막판에 한 번 더 등장한다.
영화의 주요 기제 중 하나인 2024년의 피의 금요일은 특기대가 잘못된 정보에 의해 무장하지 않은 여고생 10여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임중경은 이 일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것으로 보이고 그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그는 한효주의 동생이 섹트의 일원으로서 자폭 테러를 할 순간인데도 그녀를 죽이지 못했다. 그 여동생은 자폭을 했지만 한효주는 당신이 죽인 건 아니라며 그를 두둔했다. 임중경은 상관 지시로 한효주를 죽여야했지만 역시 죽이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구원했으며, 마지막에는 투병생활을 하던 남동생이 누나와 북한으로 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 결국 늑대여야 할 임중경은 세 명의 빨간 모자를 모두 죽이지 않았다. 늑대가 할머니를 잡아먹고 빨간 모자를 잡아 먹는 것은 식욕이라는 욕망의 결과물이다. 물론 할머니를 먹고 배가 불렀을 터인데 금세 손녀까지 잡아먹는 것은 탐욕이라고 해야할 수도 있다. 빨간 모자는 엄마 심부름을 했을 뿐인데 왜 죽어야했나. 운이 나빴다고 해야 할까? 탐욕스러운 늑대가 존재한다는 것이 부조리한 것은 아닐까?
한효주는 자신이 섹트에 들어가 활동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여겼다. 여동생의 경우는 왜 그랬는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언니를 따라 가입하고 활동한 것인지 모른다. 특기대가 학살했던 여고생처럼 그녀도 고1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는 테러에 사용될 폭탄을 운반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순진했던 그녀, 자신을 둘러싼 특기대를 보며 분노의 자폭을 선택한 그녀는 세계 도처에서 자폭 테러를 하고 내전에 휩싸인 10대 전투원들을 연상시킨다. 그 어린 청춘들은 어른들이 주입한 생각대로 행동하다가 도구처럼 사용되고 그렇게 죽어갔다. 자신의 사고를 하지 못하는 존재는 바로 특기대 대원들이고 또한 공안부의 요원들이다. 그저 상관의 명령이 떨어지면 따지지 않고 움직이는 기계, 로봇, 짐승. 임중경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다며 특기대를 떠났고 인간이 되어가는 듯 보였다. 섹트와 공안부 양쪽으로부터 덫에 걸린 한효주는 두 조직이 붕괴되자 자유의 몸이 되었고, 그야말로 아무 죄 없는, 순진무구한 그녀의 남동생은 빨간 옷을 입고도 안전하게 북한 땅으로 떠났다.
생각해보면 빨간 색의 모티브는 한국 사회의 레드 컴플렉스를 상징할 수도 있겠다.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이 되며 당의 색을 빨간 색으로 바꾸는 대변신으로 이 사회에서 빨간 색이 '빨갱이'로 연결될 여지는 훨씬 줄었지만 아직도 어디의 누군가는 종북 세력과 빨갱이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빨간 옷을 입고 북한에 간다는 설정은 그렇기 때문에 매우 도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만하면 다 썼을까? 잘 모르겠다.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처럼 분단 한국의 현실을 다른 모티브와 잘 섞어서 영화로 만들었다. 남과 북은 통일을 하겠다는데 대한민국 내 정부 조직들이 말 그대로의 전투를 벌이고, 어제의 동지가 다른 편에 넘어가 나를 죽이려고 하고, 상관과 부하가 생사의 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현재의 남북 화해 국면에서 앞으로 제발 이렇게는 하지 말자는 당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무열과 최민호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끝내야겠다. 김무열이라는 배우는 전에 본적이 없고, 샤이니의 최민호의 연기도 이 영화로 처음 보았다. 김무열은 강동원의 최대 적으로서 매우 비중있는 역을 맡았고 최민호는 비교적 짧게 출연한다. 김무열은 공안부에서 맡은 직책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젋은 얼굴이었지만 설득력있는 연기를 한 것 같고, 최민호는 곱상한 평소의 외모를 많이 망가뜨리며 애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인랑이라는 조직에 어울리는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캐스팅의 이유가 궁금하다. 늑대가 이렇게 고울 수도 있다는 사례?
2018년 7월 11일 수요일
버닝(2018)
이창동 감독의 이 새로운 영화는 무엇에 대한 것일까? 아직 읽어보지 못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라고 한다. 제목 자체가 '버닝'이니 무언가를 태우는 이야기고 실제로 영화의 마지막은 방화의 장면이다.
사실 태우는 것은 마지막의 포르쉐와 그 안의 한 인간과 피묻은 옷들만이 아니었다. 담배와 대마초가 피워졌다. 비닐 하우스가 꿈 속에서 불탔다. 태양도 불타올랐다고 해야할까? 자동차가 연료를 태웠다? '보일'러?
영화의 중반부터 이야기는 반포에 사는 '벤'이 후암동에 사는 해미를 살해하는 이야기로 이해되었다.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의 일부 리뷰들을 보니 그런 해석도 가능하지만 감독은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았다는 글들이 많은 걸 보니 벤이 해미를 죽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거의 분명하게 그런 암시를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파주의 종수 집 근처의 비닐 하우스는 벤의 직접적인 언급과 달리 불타지 않았으므로 벤의 방화는 살인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언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벤은 해미의 실종을 연기처럼 사라졌다고까지 말했다. 벤의 집에 있는 해미의 시계, 벤의 집에 새로 들어온 주인 없는 고양이가 '보일'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장면까지. 대마초를 피우는 것으로 대표되지만 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벤이 해미를 죽이고, 해미와 비슷하게 연고가 없는 가난한 젊은 여성을 또 만나고 살인을 하는 이야기라고 볼 여지는 많다. 그렇다면 종수는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 벤을 죽였고 그것은 그에게 정당한 행위였을 것이다.
몇 개 본 리뷰에서 고양이가 이름에 반응한 것은 우연일 수도 있다는 의견은 수긍이 가지만 벤의 집 화장실에 있는 시계는 많이 의심스럽지 않은가? 물론 또 다른 씬에서 종수가 해미의 옛 동료를 만났을 때 그녀의 팔에 같은 시계가 있었으므로, 대량 생산된 손목 시계 하나가 그 주인의 정체를 확정시켜줄 수는 없다. 이것은 감독이 관객의 판단을 혼란시키기 위한 조치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확실히 모호한 장면들이 많다. 해미는 처음에는 그저 가끔씩 일하며 돈을 모아 아프리카 여행을 가는 흔한 청춘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들에게 그녀는 카드 빚이 많고 거짓말을 잘 하는 아이였다. 그녀는 파주의 옛집 옆에 우물이 있어서 자기가 그 안에 빠져있었다고 했지만 정작 그녀의 가족은 우물이 없었다고 하고 이장도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16년간 연락이 두절되었던 종수의 어머니는 우물은 있었다고 하는데 다만 물이 없는 마른 우물이라고 했다. 최소 16년 이전의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이제 우물이 불필요한 세상에서 기억에서 사라져도 이상치 않을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골에 살았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보면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지 여부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최소한 다섯 명의 당사자들의 기억이, 그것도 단순한 장소의 존재 여부가 엇갈린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아마 종수 엄마의 진술처럼 마른 우물이 있고, 아직은 어렸던 해미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고 종수가 해미를 구해준 적이 있고 해미 가족들은 마른 우물이니까 그런 우물이 없었다고 말했을 수는 있겠다.
고양이의 경우도 그렇다. 해미는 자기의 원룸에 고양이가 있다고, 그러니까 밥 좀 주라고 종수에게 부탁했다. 다만 고양이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니 안 보일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종수는 고양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고양이 사료를 몇 번 주는 씬을 감안하면 고양이가 먹은 건지 누가 치운 건지 몰라도 최소한 사료가 없어지긴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원룸의 주인은 고양이를 키울 수 없는 건물이라고 말했다. 종수조차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러 오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고양이라는 소재는 양자물리학의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염두에 둔 것일까? 벤이 동시 존재를 말한 걸 감안하면 영화는 양자물리학을 적극 도입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마저 들게 만든다.
물론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최승호의 등장이었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어떻게 봐도 최승호 같이 생긴 이 배우가 누구인지가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가장 궁금했다. 정말 최승호라는 이름이 있었고 구글 검색은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파란만장한 젊은 날을 살았고, 자존심이 너무 세어서 손해를 본 중장년의 남성이라는 캐릭터는 어느 정도는 그의 삶과 일치하는 것도 같다. 현실에서는 언론인으로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살던 그가 공무원을 폭행하여 재판정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장면은 재미있었다.
어떤 리뷰는 이 영화를 계급 관계로 해석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렇게 볼 여지가 다분하다. 벤은 자신은 직업이 없다고 하는데 그는 반포의 고급 빌라?에 살며 포르쉐를 몰고 다닌다. 설정상 나이는 30전후일 것 같았다. 벤은 해미나 나중에 데리고 다닌 젊은 여성을 자신의 부자 친구 모임에 초대하여 그녀들이 소위 '쇼'를 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그 가난한 여성들의 몸부림을 비웃는다. 벤이 어떤 직업을 갖고 일한다는 암시는 전혀 없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일을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젊은 여자를 데리고 시간을 보내고, 운동을 하고 쇼핑을 한다. 미술관?에서 가족과 만나는 씬을 보면 가족이 부유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벤이 엄밀한 의미의 부르주아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재벌2, 3세 같이 조상이 돈이 많은 젊은이라고 분류해야 할 수도 있다.
종수는 어떨까. 그는 육체 노동, 그것도 일용직 성격의 일을 하며 돈을 번다. 아버지의 부재로 떠맡게 된 파주의 집에서 외양간을 치우기도 한다. 그는 해미의 원룸이 근사하다며 자신의 '방'은 싱크대 옆에 변기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정체성은 작가다. 그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을 써본 적도 없고 무엇을 써야할지도 모른다. 오직 영화의 막판이 되어야 해미의 방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쓸 뿐이다. 사실 그 전에 아버지 죄의 정상참작을 위한 탄원서라는 소설을 쓰긴 했다. 이장은 그 탄원서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그 글이 소설에 다름 아님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그 글은 매우 잘 써졌다며 작가로서 종수의 재능을 암시했다. 누군가의 리뷰에서 말하는 것처럼 해미의 방에서 쓴 글의 내용이 이후 장면들일 수도 있겠다. 일단 그가 왜 해미의 방에 있는지가 납득이 가지 않지만 시점의 측면에서는 확실히 그 때부터 종수의 시점을 벗어난 것 같다. 혹은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쓰는 장면 자체가 소설이 아닐까? 혹은 해미의 방은 사실 종수의 방이고, 해미가 실종되자 종수는 그 이전까지의 장면 모두를 소설로서 써본 것이 아닐까? 주인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줄 때는 자신이 같이 있으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라며 잔뜩 경계한 상태였는데 모든 장면이 시간 순으로 진행되었다면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는 전혀 어떤 결정적 해석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쓰고 보니 마지막 생각, 자신의 방에서 소설을 쓰는 종수의 상상이 영화의 대부분이라는 해석이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이 된다.
현재로서는 마지막으로 쓰고 싶은 것은 미국과 중국에 대비된 한국의 처지를 영화가 다룬 방식이다. 이 부분은 그렇게 두드러지는 소재는 아니지만 TV 장면 속의 트럼프, 벤의 집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중국에 대한 대화 등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현재 국제사회의 G2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게다가 종수의 집은 대남 방송이 들리는 휴전선 근처의 마을이다. 이런 정치적 현실은 강대국에 의해 운명이 좌우된 대한민국의 탄생과 현재까지의 역사를 환기시킨다. 마치 벤이 비닐하우스 태우는 것이 자연법칙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강대국들은 범죄적 행위가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벤은 한국 출신의 미국인이 아닌가?
파주라는 공간은 출판사가 많고 신도시가 존재하지만 영화 속의 그 장소는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젊은 여성들이 떠난 농촌에는 외국인 여성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수 아버지를 위한 탄원서를 받기에 부적절했다. 의사소통도 되지 않고 이 땅에 정착하지 얼마 되지 않은 귀화한 한국인은 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파주에서 좋은 이웃이었다는 증거로 전혀 적당하지 않았다. 종수는 아마도 고등학교까지는 파주에서 다녔을 것 같지만 그 마을에 그가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고향에서마저 소외된 종수는 이미 명백한 현실이 된 이웃 사람 동남아 여성에게서 이중의 소외감을 느낀다.
아직 이창동 감독이 직접 말한 내용이나 씨네21 등에 실린 관련 글은 하나도 읽지 않았다. 조만간 읽어보고 생각을 더 정리해봐야겠다.
사실 태우는 것은 마지막의 포르쉐와 그 안의 한 인간과 피묻은 옷들만이 아니었다. 담배와 대마초가 피워졌다. 비닐 하우스가 꿈 속에서 불탔다. 태양도 불타올랐다고 해야할까? 자동차가 연료를 태웠다? '보일'러?
영화의 중반부터 이야기는 반포에 사는 '벤'이 후암동에 사는 해미를 살해하는 이야기로 이해되었다.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의 일부 리뷰들을 보니 그런 해석도 가능하지만 감독은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았다는 글들이 많은 걸 보니 벤이 해미를 죽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거의 분명하게 그런 암시를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파주의 종수 집 근처의 비닐 하우스는 벤의 직접적인 언급과 달리 불타지 않았으므로 벤의 방화는 살인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언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벤은 해미의 실종을 연기처럼 사라졌다고까지 말했다. 벤의 집에 있는 해미의 시계, 벤의 집에 새로 들어온 주인 없는 고양이가 '보일'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장면까지. 대마초를 피우는 것으로 대표되지만 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벤이 해미를 죽이고, 해미와 비슷하게 연고가 없는 가난한 젊은 여성을 또 만나고 살인을 하는 이야기라고 볼 여지는 많다. 그렇다면 종수는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 벤을 죽였고 그것은 그에게 정당한 행위였을 것이다.
몇 개 본 리뷰에서 고양이가 이름에 반응한 것은 우연일 수도 있다는 의견은 수긍이 가지만 벤의 집 화장실에 있는 시계는 많이 의심스럽지 않은가? 물론 또 다른 씬에서 종수가 해미의 옛 동료를 만났을 때 그녀의 팔에 같은 시계가 있었으므로, 대량 생산된 손목 시계 하나가 그 주인의 정체를 확정시켜줄 수는 없다. 이것은 감독이 관객의 판단을 혼란시키기 위한 조치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확실히 모호한 장면들이 많다. 해미는 처음에는 그저 가끔씩 일하며 돈을 모아 아프리카 여행을 가는 흔한 청춘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들에게 그녀는 카드 빚이 많고 거짓말을 잘 하는 아이였다. 그녀는 파주의 옛집 옆에 우물이 있어서 자기가 그 안에 빠져있었다고 했지만 정작 그녀의 가족은 우물이 없었다고 하고 이장도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16년간 연락이 두절되었던 종수의 어머니는 우물은 있었다고 하는데 다만 물이 없는 마른 우물이라고 했다. 최소 16년 이전의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이제 우물이 불필요한 세상에서 기억에서 사라져도 이상치 않을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골에 살았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보면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지 여부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최소한 다섯 명의 당사자들의 기억이, 그것도 단순한 장소의 존재 여부가 엇갈린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아마 종수 엄마의 진술처럼 마른 우물이 있고, 아직은 어렸던 해미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고 종수가 해미를 구해준 적이 있고 해미 가족들은 마른 우물이니까 그런 우물이 없었다고 말했을 수는 있겠다.
고양이의 경우도 그렇다. 해미는 자기의 원룸에 고양이가 있다고, 그러니까 밥 좀 주라고 종수에게 부탁했다. 다만 고양이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니 안 보일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종수는 고양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고양이 사료를 몇 번 주는 씬을 감안하면 고양이가 먹은 건지 누가 치운 건지 몰라도 최소한 사료가 없어지긴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원룸의 주인은 고양이를 키울 수 없는 건물이라고 말했다. 종수조차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러 오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고양이라는 소재는 양자물리학의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염두에 둔 것일까? 벤이 동시 존재를 말한 걸 감안하면 영화는 양자물리학을 적극 도입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마저 들게 만든다.
물론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최승호의 등장이었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어떻게 봐도 최승호 같이 생긴 이 배우가 누구인지가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가장 궁금했다. 정말 최승호라는 이름이 있었고 구글 검색은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파란만장한 젊은 날을 살았고, 자존심이 너무 세어서 손해를 본 중장년의 남성이라는 캐릭터는 어느 정도는 그의 삶과 일치하는 것도 같다. 현실에서는 언론인으로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살던 그가 공무원을 폭행하여 재판정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장면은 재미있었다.
어떤 리뷰는 이 영화를 계급 관계로 해석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렇게 볼 여지가 다분하다. 벤은 자신은 직업이 없다고 하는데 그는 반포의 고급 빌라?에 살며 포르쉐를 몰고 다닌다. 설정상 나이는 30전후일 것 같았다. 벤은 해미나 나중에 데리고 다닌 젊은 여성을 자신의 부자 친구 모임에 초대하여 그녀들이 소위 '쇼'를 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그 가난한 여성들의 몸부림을 비웃는다. 벤이 어떤 직업을 갖고 일한다는 암시는 전혀 없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일을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젊은 여자를 데리고 시간을 보내고, 운동을 하고 쇼핑을 한다. 미술관?에서 가족과 만나는 씬을 보면 가족이 부유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벤이 엄밀한 의미의 부르주아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재벌2, 3세 같이 조상이 돈이 많은 젊은이라고 분류해야 할 수도 있다.
종수는 어떨까. 그는 육체 노동, 그것도 일용직 성격의 일을 하며 돈을 번다. 아버지의 부재로 떠맡게 된 파주의 집에서 외양간을 치우기도 한다. 그는 해미의 원룸이 근사하다며 자신의 '방'은 싱크대 옆에 변기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정체성은 작가다. 그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을 써본 적도 없고 무엇을 써야할지도 모른다. 오직 영화의 막판이 되어야 해미의 방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쓸 뿐이다. 사실 그 전에 아버지 죄의 정상참작을 위한 탄원서라는 소설을 쓰긴 했다. 이장은 그 탄원서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그 글이 소설에 다름 아님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그 글은 매우 잘 써졌다며 작가로서 종수의 재능을 암시했다. 누군가의 리뷰에서 말하는 것처럼 해미의 방에서 쓴 글의 내용이 이후 장면들일 수도 있겠다. 일단 그가 왜 해미의 방에 있는지가 납득이 가지 않지만 시점의 측면에서는 확실히 그 때부터 종수의 시점을 벗어난 것 같다. 혹은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쓰는 장면 자체가 소설이 아닐까? 혹은 해미의 방은 사실 종수의 방이고, 해미가 실종되자 종수는 그 이전까지의 장면 모두를 소설로서 써본 것이 아닐까? 주인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줄 때는 자신이 같이 있으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라며 잔뜩 경계한 상태였는데 모든 장면이 시간 순으로 진행되었다면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는 전혀 어떤 결정적 해석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쓰고 보니 마지막 생각, 자신의 방에서 소설을 쓰는 종수의 상상이 영화의 대부분이라는 해석이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이 된다.
현재로서는 마지막으로 쓰고 싶은 것은 미국과 중국에 대비된 한국의 처지를 영화가 다룬 방식이다. 이 부분은 그렇게 두드러지는 소재는 아니지만 TV 장면 속의 트럼프, 벤의 집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중국에 대한 대화 등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현재 국제사회의 G2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게다가 종수의 집은 대남 방송이 들리는 휴전선 근처의 마을이다. 이런 정치적 현실은 강대국에 의해 운명이 좌우된 대한민국의 탄생과 현재까지의 역사를 환기시킨다. 마치 벤이 비닐하우스 태우는 것이 자연법칙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강대국들은 범죄적 행위가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벤은 한국 출신의 미국인이 아닌가?
파주라는 공간은 출판사가 많고 신도시가 존재하지만 영화 속의 그 장소는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젊은 여성들이 떠난 농촌에는 외국인 여성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수 아버지를 위한 탄원서를 받기에 부적절했다. 의사소통도 되지 않고 이 땅에 정착하지 얼마 되지 않은 귀화한 한국인은 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파주에서 좋은 이웃이었다는 증거로 전혀 적당하지 않았다. 종수는 아마도 고등학교까지는 파주에서 다녔을 것 같지만 그 마을에 그가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고향에서마저 소외된 종수는 이미 명백한 현실이 된 이웃 사람 동남아 여성에게서 이중의 소외감을 느낀다.
아직 이창동 감독이 직접 말한 내용이나 씨네21 등에 실린 관련 글은 하나도 읽지 않았다. 조만간 읽어보고 생각을 더 정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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