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글을 쓰고 난 후 못 적은 내용이나 하룻동안 주워들은 이야기를 참고해서 더 써보려 한다.
이 영화에서 떠오른 다른 작품이 란티모스 감독의 '송곳니'외에도 데이빗 린치의 드라마 '트윈 픽스'가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인디언 복장 때문인데 '트윈 픽스'에서는 벤자민 혼의 지적 장애가 있는 아들이 인디언 복장을 하고 있었다. 트윈 픽스에서는 인디언 경찰도 있기 때문에 인디언은 여러 의미로 사용되지만, 시즌2에서 정신이 나간 상태로 남부군 놀이를 하던 벤자민 혼의 아들이 인디언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이상하게 만든 설정이라 할 만했다.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는 그 상하로 계속 이동하는 카메라 앵글 때문에 '기생충'과 닮아있다. 그
영화에서는 인종과 관련된 계급 문제가 핵심적인 소재였고, 분리된 주거와 다른 언어 등이 부각되었다. 영화 시작에서 개똥이 뒹구는 바닥을 물로 청소하는 앵글은 주인공의 낮은 계급을 극단적으로 부각시켰다. 하지만 어린 쿠아론에게 그 식모
아주머니는 누나 같고 어머니 같은 친근한 존재라는 점에서 단순한 계급 갈등이 아닌 묘한 라틴 아메리카적 현대의 특이성이 드러났다.
'어느 가족'의 경우는 손석희 사장이 뉴스룸에서 봉준호 감독을 인터뷰하면서 자신이 '기생충'과 유사한 점이 있었던 것처럼 느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기실 피로 연결되지 않은 개인들이 가족인 척 하고 더 나아가 혈연 가족보다 더 정이 깊은 모습을 보여준 '어느 가족'과 적어도 가족들의 연대가 깨지지는 않은 '기생충'은 설정이 매우 다르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동아시아 국가의 감독들이 작년과 올해 깐느에서 최고상을 받았다는 점과 가족을 소재로 했다는 외양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손석희 사장이 무의식적으로 느낀 것으로 추정되는 공통점이 왠지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아마도 가난한 가족의 위태로운 상황이 아닐까?
인디언의 경우 몇 가지 해석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원주민의 상징으로 쓰였다는 게 일차적으로 설득력이 있었다. 인디언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었지만 백인 이주민에 의해 몰살되고 소수자로 전락했다. 사실 한국 관객만 염두에 두었다면 굳이 인디언 설정을 가지고 왔을까 싶은데 글로벌 관객을 대상으로 한다면 직관적으로 그네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면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영화 '기생충'에서 원주민은 누구인가? 굳이 따져보면 문광이 저택에서 가장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녀가 원주민에 해당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 건축가에게 고용되어 살았을 것이고, 박사장에게도 고용되어 살았다는 측면에서 인디언과 일대일 매치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인디언을 미국 내의 타자로 보면서 자본주의의 화신과 같은 미국과 한국의 관계에 대한 비유로서 인디언을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국 언론에서도 인정받은 글로벌 기업의 박사장,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저택을 차지한 외국인 등이 미국 혹은 자본주의의 상징으로서 원주민 격의 한국을 혹은 피지배계급을 억압하는 식으로 보는 류이다. 수긍은 가지만 그렇게까지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문득 드는 생각이지만 그리고 아마 부차적인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인디언 소품을 아마존을 통해 직구했다는 대사와 그들의 아픈 역사에 대해 아무 고민이 없이 놀이로 소모되는 인디언이라는 외피를 감안하면 인디언은 타자에 대한 무감각, 무공감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박사장과 아들 다송에게 인디언은 놀이의 하나이고 직구한 작은 인디언 도끼는 생존을 위한 방어/생계 수단이 아니라 상황극을 위한 소품이었다. 이 대목에서 다송이 쏘던 장난감 활도 도끼와 동일한 기능의 소품이라 하겠는데, '괴물'에서 배두나가 양궁을 했던 걸 감안한 이중적 장치라는 생각도 든다. 짧게 더 붙이면 저택의 건축가의 이름을 굳이 '남궁'씨로 정한 것은 '설국열차'의 남궁민수와 연결지은 감독의 의도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 봤다. 아마 잘 찾아보면 감독이 전작들의 소재 혹은 장면을 차용한 것들이 더 있을 것 같다.
영화에 많이 등장한 '계획', '냄새', '선'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을 터인데 큰 주제이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더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내가 못 본 이야기 중에 개들에 대한 것을 써본다. 영화에서 저택에는 개가 세 마리 살았던 것 같다. 비글이 있었던 것 같고 나머지 둘을 잘 모르겠다. 개는 몇 차례 등장했는데 송강호가 연기한 기택의 가족들과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가령 박소담 역의 딸은 술 마시며 육포를 뜯어먹는데 그게 사실은 개먹이였다. 폭우로 캠핑이 취소되고 박사장 가족이 갑자기 돌아오며 벌어지는 대소동 이후 아들이 다혜의 침대 밑에 숨었을 때 그의 정체를 폭로할 뻔한 것은 그를 알아챈 강아지였다. 문광의 남편이 꼬챙이에 찔려 죽은 후 개는 죽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 꼬챙이에 여전히 남아있는 소시지를 탐했다. 이렇게 기택의 가족은 개와 유사한 처지로 묘사되는 경우들이 있었고, 그 개는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눈앞의 욕심에만 충실했다. 물론 영화 제목이 시사하는 바대로 기택 가족 그리고 문광의 가족은 기생충, 즉 벌레, 영화상에서는 특히 바퀴벌레와 동격으로 취급되었다. 송강호가 주인이 나간 집 거실에서 술파티를 벌이며 바퀴벌레가 불이 켜지면 막 구석으로 숨는다는 대사를 한 이후 곧바로 그것이 자신들에게 닥친 현실이 되며 기택 가족은 정말 바퀴벌레처럼 어두운 곳, 사각지대로 숨어들었다. 영화 초반 반지하 집에서 송강호는 식탁(?) 위의 바퀴벌레를 손으로 튕겨냈던 바, 이는 자신보다 더 낮은 자들에 대한 가혹한 태도를 암시할 수도 있고, 자신이 바퀴벌레가 되었을 때 인간의 손가락 튕김의 타격을 피하기 위해 몸부림칠지 몰랐다는 경고였을 수 있겠다. 더 생각해본다면 카프카의 '변신'에서 인간이 단지 벌레의 모양이 되었다는 이유로 죽어야만 했듯이 벌레가 아니라 정체가 인간인 타인에 대해 더 존중해야한다는 메타포일 수도 있겠다.
몇 차례 보고들은 해석 중 하나로 기택 가족이 '전원 백수'이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니 너무 잘 한다는 설정에 대한 것이 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고 설득력이 떨어진다. 어느 누구도 그 정도로 맡은 일을 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기우는 영어보다 연애를 더 하는지도 모르고, 기정은 그림을 무슨 식으로 가르치는지 모를 일이다. 기택도 경력에 비해서는 운전을 잘 했고, 충숙은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는데, 단지 투포환 선수여서 힘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온갖 요리를 잘 하고 저택의 집안일을 잘 해내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능력은 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거나, 재기의 발판이 없어서 주저앉은 사람이 많다는 의미였다는 해석이 나온다. 그리고 인생사에서 운이 있고 없고에 따라 사람의 경제적 처지가 극명하게 갈릴 수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땅부자, 비트코인 부자, 주식 부자 중 많은 경우가 극히 운이 좋았을 것이다. IT 기업도 속성상 대기업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면 그 사장은 벼락부자일 가능성이 높다.
문광의 남편 근세가 있던 지하실의 많은 책들은 의문스러운 소품이다. 그 책들이 고시서적으로 보이기에 근세가 젊은 시절을 고시공부로 보낸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있고 그럴 듯 하긴 하다. 하지만 이미 사업을 하다가 망한 사람이 다시 고시 공부를 하는 걸까? 고시가 아니라 공무원 시험 준비라고 해도 마찬가지인데 이미 사회 재진입을 포기한 근세에게 있어 그런 수험 서적의 의미는 무엇일까? 클래식 음악을 듣고 책을 많이 본 유사 지식인임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젊은 시절 고시를 준비한 게 아니라 사업이 망한 이후 오히려 살길은 공무원이라는 생각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공무원 열풍을 풍자한 것일까? 치킨집, 대만 카스테라나 공무원이나 모두 극한의 생존 문제의 결론으로서 나온 눈에 보이는 해결방안이고 동시에 치열한 경쟁 때문에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은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 정도로 기생충 이야기는 일단 마쳐야겠다.
2019년 6월 11일 화요일
기생충 (2019)
소문의 그 영화, 사람들이 스포일을 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는 그 영화 기생충을 나도 보았다. 안경을 가져가지 않아 또렷하지 않은 영상을 봐야했지만 후반부의 폭력적인 장면들을 덜 생생하게 본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다.
평자들은 주로 계급의 문제로 이 영화를 해석하고 있고 상하의 구별이 뚜렷한 영화의 카메라 앵글을 보건대 그런 해석은 타당하다. 천국-연옥-지옥과 딱 맞지는 않지만 저택-반지하-지하(의 지하)라는 공간적 배치는 사람의 등급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가 흔히 하는 방식처럼 부르주아를 비난하고 노동자를 더 대우해야한다는 차원의 이야기는 아닌 듯 하다. 어떤 대사에서 부자가 착하다는 말이 강조되고, 빈자들은 사기, 주거침입, 절도 더 나아가 폭행, 살인을 별다른 죄책감없이 행했다.
상황은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마치 영화 '어스'를 연상시키는 지하세계의 사람들은 노동자보다 더 낮은, 아예 보이지 않는 존재들까지 다룬다. 지하인은 모스 부호라는 형식으로 주인에게 신호를 보내지만 주인은 신경을 쓰지 않거나 오독하거나 이해를 하지 못 한다. 오직 지하세계를 경험한 반지하인 아들이 나중에 신호를 이해하게 되지만 응답할 방법은 없다. 단지 상상 속에서 부자가 되어 그 저택을 사고 지하의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사실상 희망없는 꿈 밖에.
영화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아버지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였다. 최근에 경제적 상황이 안 좋은 이유는 대왕 카스테라를 비롯한 반짝 인기업종을 따라하다가 망했다는, 뉴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망한 자영업자의 경로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지하세계의 남성, 문광의 남편도 대왕카스테라가 망하고 사채를 빌려쓴 결과 지하인이 되었다고 설정이 되었다. 양자를 가른 것은 사채를 썼느냐의 여부인 듯 하고 그 결과로 반지하인은 상승을 꿈꾸기도 하지만 지하인은 상승의 꿈을 포기하고 주인에게 감사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지하인과 반지하인의 대결에 대해 섬뜩함을 느낀다는 평을 커뮤니티에서 많이 보았다. 전투는 부자나 정치인을 향해 벌여야하는데 빈자들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은 지배전략의 효과이기도 하고 쉬운 싸움 상대를 고른 결과일 수도 있겠다.
남궁현자라는 유명건축인이 설계한 것으로 설정된 저택의 풍경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출세작 '송곳니'의 저택을 연상시켰다. 다시 확인해본 결과 카메라 앵글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통유리를 통해 집 안에서 잔디 마당을 볼 수 있다는 점과 잔디 마당이 넓고 주요 공간으로 활용된다는 점에서는 유사했다. 봉준호 감독이 '송곳니'를 참고했다면 반지하 집 안에서 밖을 바라본 풍경을 대비시켰다는 점에서 더 진척을 이뤘다고 할 수 있겠다.
인디언 설정은 어떤 의미였을까? 인디언 차림의 송강호는 결국 살인을 저지른다. 그 대상은 공교롭게도 숙주인 이선균. 그도 인디언 차림이었다. 송강호가 인디언 흉내를 낸 것은 근무의 연장이었을 뿐이지만 같은 인디언을 죽인다는 설정은 인디언의 폭력성이라는 잘못된 이미지를 차용한 것은 아닐 터이다. 숙주와 기생충,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라도 원래는 같은 족속, 인간이라는 것을 환기하는 것일까? 원래 인디언 놀이는 다송이라는 아들 캐릭터가 시작한 것이다. 지하인이라는 귀신을 본 후의 부작용인 듯한데 인디언놀이가 다송의 '~인 체'하는 삶의 방식의 일환인지(실제 다송은 인디언의 옷, 화살, 텐트라는 외양 외에 인디언에 대해 이해하려는 태도는 전혀 없다)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영화에서 가장 웃음을 안겨준 대사는 '코너링'이었다. 처음 운전기사가 된 송강호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사장역의 이선균은 음료가 가득 든 컵을 들고 차가 회전할 때 음료가 얼마나 흔들리는지를 지켜보았다. 결과적으로 음료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그러니까 차가 부드럽게 방향전환을 하는 걸 확인하자 사장이 '코너링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사는 다른 누구도 아닌 경찰이 우병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아들을 운전병으로 뽑은 이유로 내놓은 말이기도 했다. 즉 우병우에 대한 환기와 동시에 오랜 운전 경력이 있다면 정말 코너링이 좋을 수도 있었는데 우병우의 아들이 정말 그러했을까라는 의구심을 다시 갖게 만드는 짧지만 복합적인 장면이었다.
마찬가지로 문광이라는 캐릭터가 반지하인 가족을 궁지로 몰아놓은 이후 북한 뉴스 여자 앵커를 흉내내는 장면은 현 국제정치 상황을 반영했다. 모르는 사람인 척하며 온 가족이 빌붙어서 부자집에 고용된 상황을 폭로하는 영상을 보낼 메시지의 전송 버튼이 김정은의 미사일 버튼같다는 평가도 대사로 등장했다. 메시지 전송과 미사일 발사를 비유할 수는 있지만 문광이 뉴스 앵커를 흉내낼 하등의 이유는 없다. 그래서 뜬금없다는 평가를 볼 수도 있었다. 아마 감독은 국내 정치의 계급 투쟁 혹은 생존 투쟁과 함께 북한이 얽힌 국제정치의 상황까지 짧게나마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는 배우들의 이전 작품에서의 캐릭터를 잘 활용했다.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이었던 송강호가 운전기사로 일한다는 설정은 금방 납득이 갔고, 조여정의 역할도 이전 작품들의 이미지를 상당히 가져와서 활용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선균은 여러 이미지를 연기할 수 있기에 이번 작품 캐릭터의 전거를 어디에서 찾아야하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고, 나머지 배우들은 이전 활동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에 뭐라 말하기 어렵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분배적 정의가 실현되면 비극은 줄어들 수 있다는 메시지가 아니라면 영화의 톤은 매우 비관적이다.
평자들은 주로 계급의 문제로 이 영화를 해석하고 있고 상하의 구별이 뚜렷한 영화의 카메라 앵글을 보건대 그런 해석은 타당하다. 천국-연옥-지옥과 딱 맞지는 않지만 저택-반지하-지하(의 지하)라는 공간적 배치는 사람의 등급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가 흔히 하는 방식처럼 부르주아를 비난하고 노동자를 더 대우해야한다는 차원의 이야기는 아닌 듯 하다. 어떤 대사에서 부자가 착하다는 말이 강조되고, 빈자들은 사기, 주거침입, 절도 더 나아가 폭행, 살인을 별다른 죄책감없이 행했다.
상황은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마치 영화 '어스'를 연상시키는 지하세계의 사람들은 노동자보다 더 낮은, 아예 보이지 않는 존재들까지 다룬다. 지하인은 모스 부호라는 형식으로 주인에게 신호를 보내지만 주인은 신경을 쓰지 않거나 오독하거나 이해를 하지 못 한다. 오직 지하세계를 경험한 반지하인 아들이 나중에 신호를 이해하게 되지만 응답할 방법은 없다. 단지 상상 속에서 부자가 되어 그 저택을 사고 지하의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사실상 희망없는 꿈 밖에.
영화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아버지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였다. 최근에 경제적 상황이 안 좋은 이유는 대왕 카스테라를 비롯한 반짝 인기업종을 따라하다가 망했다는, 뉴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망한 자영업자의 경로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지하세계의 남성, 문광의 남편도 대왕카스테라가 망하고 사채를 빌려쓴 결과 지하인이 되었다고 설정이 되었다. 양자를 가른 것은 사채를 썼느냐의 여부인 듯 하고 그 결과로 반지하인은 상승을 꿈꾸기도 하지만 지하인은 상승의 꿈을 포기하고 주인에게 감사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지하인과 반지하인의 대결에 대해 섬뜩함을 느낀다는 평을 커뮤니티에서 많이 보았다. 전투는 부자나 정치인을 향해 벌여야하는데 빈자들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은 지배전략의 효과이기도 하고 쉬운 싸움 상대를 고른 결과일 수도 있겠다.
남궁현자라는 유명건축인이 설계한 것으로 설정된 저택의 풍경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출세작 '송곳니'의 저택을 연상시켰다. 다시 확인해본 결과 카메라 앵글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통유리를 통해 집 안에서 잔디 마당을 볼 수 있다는 점과 잔디 마당이 넓고 주요 공간으로 활용된다는 점에서는 유사했다. 봉준호 감독이 '송곳니'를 참고했다면 반지하 집 안에서 밖을 바라본 풍경을 대비시켰다는 점에서 더 진척을 이뤘다고 할 수 있겠다.
인디언 설정은 어떤 의미였을까? 인디언 차림의 송강호는 결국 살인을 저지른다. 그 대상은 공교롭게도 숙주인 이선균. 그도 인디언 차림이었다. 송강호가 인디언 흉내를 낸 것은 근무의 연장이었을 뿐이지만 같은 인디언을 죽인다는 설정은 인디언의 폭력성이라는 잘못된 이미지를 차용한 것은 아닐 터이다. 숙주와 기생충,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라도 원래는 같은 족속, 인간이라는 것을 환기하는 것일까? 원래 인디언 놀이는 다송이라는 아들 캐릭터가 시작한 것이다. 지하인이라는 귀신을 본 후의 부작용인 듯한데 인디언놀이가 다송의 '~인 체'하는 삶의 방식의 일환인지(실제 다송은 인디언의 옷, 화살, 텐트라는 외양 외에 인디언에 대해 이해하려는 태도는 전혀 없다)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영화에서 가장 웃음을 안겨준 대사는 '코너링'이었다. 처음 운전기사가 된 송강호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사장역의 이선균은 음료가 가득 든 컵을 들고 차가 회전할 때 음료가 얼마나 흔들리는지를 지켜보았다. 결과적으로 음료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그러니까 차가 부드럽게 방향전환을 하는 걸 확인하자 사장이 '코너링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사는 다른 누구도 아닌 경찰이 우병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아들을 운전병으로 뽑은 이유로 내놓은 말이기도 했다. 즉 우병우에 대한 환기와 동시에 오랜 운전 경력이 있다면 정말 코너링이 좋을 수도 있었는데 우병우의 아들이 정말 그러했을까라는 의구심을 다시 갖게 만드는 짧지만 복합적인 장면이었다.
마찬가지로 문광이라는 캐릭터가 반지하인 가족을 궁지로 몰아놓은 이후 북한 뉴스 여자 앵커를 흉내내는 장면은 현 국제정치 상황을 반영했다. 모르는 사람인 척하며 온 가족이 빌붙어서 부자집에 고용된 상황을 폭로하는 영상을 보낼 메시지의 전송 버튼이 김정은의 미사일 버튼같다는 평가도 대사로 등장했다. 메시지 전송과 미사일 발사를 비유할 수는 있지만 문광이 뉴스 앵커를 흉내낼 하등의 이유는 없다. 그래서 뜬금없다는 평가를 볼 수도 있었다. 아마 감독은 국내 정치의 계급 투쟁 혹은 생존 투쟁과 함께 북한이 얽힌 국제정치의 상황까지 짧게나마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는 배우들의 이전 작품에서의 캐릭터를 잘 활용했다.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이었던 송강호가 운전기사로 일한다는 설정은 금방 납득이 갔고, 조여정의 역할도 이전 작품들의 이미지를 상당히 가져와서 활용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선균은 여러 이미지를 연기할 수 있기에 이번 작품 캐릭터의 전거를 어디에서 찾아야하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고, 나머지 배우들은 이전 활동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에 뭐라 말하기 어렵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분배적 정의가 실현되면 비극은 줄어들 수 있다는 메시지가 아니라면 영화의 톤은 매우 비관적이다.
2019년 6월 7일 금요일
미끄러짐
결혼 초에 샀던 크록스 슬리퍼는 이제 바닥이 많이 닳았다. 그래서 미끄러운 곳을 지나가거나 눈비가 오는 날에는 좀 위험하다. 어제는 전형적으로 그런 위기 상황에서 큰 사고가 날 뻔했다.
차를 가져가지 않고 마을버스로 동네 마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빗줄기가 예상보다 훨씬 굵어졌다. 우산도 가지고 나오지 않은 터라 택시를 타려고 했지만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몇 대는 그냥 지나가버렸고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그냥 마을버스를 다시 탈까 싶던 와중에 용케 택시를 잡은 아내가 나를 불렀고, 아들을 안고 있던 나도 부랴부랴 택시로 뛰어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횡단보도와 인접한 약간 경사진 보도블록에서 미끄러졌고, 내 품에 있던 아이는 대략 1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날아갔다.
나는 약간 아팠지만 어디 까진 곳도 없었는데, 아들은 황당한 상황에 처음에 멍한 상태였다가 울기 시작했다. 원래는 아이를 그 자리에서 달래야할 터이지만 비가 계속 많이 내리는 상황이라 아내가 아이를 안고 택시 안으로 급히 들어갔고, 행인들이 애를 어쩌나라며 걱정하는 소리를 하는 와중에 나도 약간의 민망함과 아이에 대한 걱정과 함께 택시에 탔다.
다행히 아이는 다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이후 식탁 모서리에 부딪혀 한 번 더 울어야했지만.
바닥이 닳은 크록스 신발을 아내는 당장 버리겠다고 말했다. 전에도 미끄러진 적이 있던 터이긴 했다. 아내의 조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만 다행으로 아이가 안정적인 자세로 떨어졌지만 조금만 다르게 날아갔어도 크게 다쳤을 수도 있었다.
살다보면 찰나의 순간이 엄청나게 다른 결과로 나올 수도 있었음을 실감하는 일들이 생각보다는 종종 생긴다. 아내의 기도 덕분에 그나마 이렇게 버텨올 수 있었을까?
차를 가져가지 않고 마을버스로 동네 마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빗줄기가 예상보다 훨씬 굵어졌다. 우산도 가지고 나오지 않은 터라 택시를 타려고 했지만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몇 대는 그냥 지나가버렸고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그냥 마을버스를 다시 탈까 싶던 와중에 용케 택시를 잡은 아내가 나를 불렀고, 아들을 안고 있던 나도 부랴부랴 택시로 뛰어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횡단보도와 인접한 약간 경사진 보도블록에서 미끄러졌고, 내 품에 있던 아이는 대략 1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날아갔다.
나는 약간 아팠지만 어디 까진 곳도 없었는데, 아들은 황당한 상황에 처음에 멍한 상태였다가 울기 시작했다. 원래는 아이를 그 자리에서 달래야할 터이지만 비가 계속 많이 내리는 상황이라 아내가 아이를 안고 택시 안으로 급히 들어갔고, 행인들이 애를 어쩌나라며 걱정하는 소리를 하는 와중에 나도 약간의 민망함과 아이에 대한 걱정과 함께 택시에 탔다.
다행히 아이는 다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이후 식탁 모서리에 부딪혀 한 번 더 울어야했지만.
바닥이 닳은 크록스 신발을 아내는 당장 버리겠다고 말했다. 전에도 미끄러진 적이 있던 터이긴 했다. 아내의 조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만 다행으로 아이가 안정적인 자세로 떨어졌지만 조금만 다르게 날아갔어도 크게 다쳤을 수도 있었다.
살다보면 찰나의 순간이 엄청나게 다른 결과로 나올 수도 있었음을 실감하는 일들이 생각보다는 종종 생긴다. 아내의 기도 덕분에 그나마 이렇게 버텨올 수 있었을까?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