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14일 수요일
Dodgeball: A True Underdog Story
"Dodgeball(피구의 제왕)"을 처음으로 다 봤다. 몇 년 전 한국에서 극장 개봉하기 전 올해 꼭 봐야 할 영화로 점찍어두었건만 약속은 지키지 못했고 시간이 마구 흘러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상영할 때 뒷부분만 봤다. 하지만 뒤만 봐서는 이 영화가 왜 그렇게 기대작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교롭게 최근 일본 피트니스 클럽에 대한 책을 읽어서인지 이번에 제대로 보니 영화는 의외로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Dodgeball은 의미상 거의 피구와 대응하는 단어다. '피구왕 통키'의 기억 때문일까? 피구는 왠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찾아보니 Dodgeball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주로 하는 스포츠로 미국에는 프로 다지볼 리그도 있단다(http://www.thendl.com/). 요는 피구왕 통키의 경우가 일본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스포츠를 부각한 것과 달리 '피구의 제왕'은 적어도 그럴 듯한 배경은 있다는 점이다. 비록 영화에서 국제 피구 대회가 소재이긴 하지만(불꽃슛을 장착하지 못한 일본 팀은 아주 간단히 패배한다).
영화는 짐(gym)간의 대결을 다루는데 궁극적으로는 이상적인 신체에 대한 이념의 대결이기도 하다.
헬스클럽, 피트니스클럽, 체육관 등 뭐로 부르건 간에 요즘 사회에는 위 사진의 배경처럼 성난 황소를 다룰 정도의 힘과 근육을 기르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 훈련하는 장소들이 즐비하다. 영화가 시작할 때 벤 스틸러는 날씬하고 근육으로 다져진 몸매를 자랑하며 자신의 Globo Gym을 광고한다. 짐의 이름은 나이키, 맥도날드처럼 흔히 볼 수 있는 글로벌 기업을 연상시킨다. 또 벤 스틸러의 영화 속 이름은 White Goodman이다. 이름부터 좋은 이미지가 풀풀 풍겨나오지만 그의 좋은 몸매와 부 그리고 그의 피트니스 제국은 결국 패배하고 만다.
상대편으로 나온 빈스 본은 Average Joe's 짐을 운영한다. 이 짐은 우락부락한 몸매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아주 '평균적'인 혹은 막되먹은 몸매를 가져도 괜찮은 장소다. (영화 막판에 여자친구를 임신시키는 발칙한 놈이지만)고등학생부터 중년의 아저씨까지 연령도 다양하다. 이 짐은 친근하고 가족적인 공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러니다. 체육관이 꼭 근육질 몸매를 만들기 위한 곳은 아니라도 속성상 막되먹은 몸매로 바보같은 장난을 하기 위한 장소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몸을 가눌 수도 없이 비만에 찌든 벤 스틸러가 닭다리를 물어뜯는 모습은 첨단 시설에서 만들어낸 근육질 몸과 소파에 앉아 스낵을 먹으며 만들어낸 뚱보가 한끗 차이임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국 사회에 만연한 패스트푸드로 인한 비만을 탈출하기 위한 운동이 지나치게 되면 즉 강박관념의 산물이라면 언제라도 실패할 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애버리지 조의 체육관이 영화 막판처럼 대규모가 되었는데 글로보 짐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을까? 피터(빈스 본)의 선의가 후대 경영자에게까지 이어질까? 괜한 걱정인지 모르지만 미국식 자본주의 사회에서 애버리지 조는 취약한 구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영화 초반처럼 경영난에 시달리며 또 다른 White Goodman에게 합병당할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자본이 공격하는 공(ball)을 피하기(dodge) 위해서 또 다시 라스 베가스에서 도박을 해야한다면 지나치게 취약한 구조다. 게다가 피터가 개성있는 몸매를 중시하지만 형체없고 막연한 평균(average)을 동시에 말한다면 결국 글로보 짐의 흔한 근육덩어리들과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 없지 않을까? 평범한 막되먹은 몸매와 평범한 근육질 몸매... 애버리지 조의 막되먹음도 자유로운 바디라인을 권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Mad Cow Disease or BSE(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광우병 열풍이다. 이미 외국에서 여러 번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광우병에 걸렸을 수도 있는 소를 한국이 수입하게 된다고 하자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고 있다. 문득 작년에 본 꿀벌의 실종에 대한 다큐가 떠오른다. 꿀벌의 죽음에 따른 생태계의 파괴, 그 이후의 예측할 수 없는 파국이 예고되고 있지만 그다지 신경쓰는 사람은 없다. 광우병에 대해서 국내 언론도 간간이 위험을 경고했고 작년 KBS는 꽤 정성들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 쇠고기 협상 이전에 광우병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
이번 쇠고기 협상에 별 문제가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주장하듯 광우병에 걸린 소를 먹을 확률이 지극히 낮은 것은 맞는 말이다. 자동차 사고로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지만 자동차 운전을 막지 않듯 광우병에 걸린 소가 있다고 소를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억지인 측면이 있다.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한다는 '기우'라는 고사가 떠오르는데 과학적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하더라도 대재앙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거나 애써 무시하며 살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면 왜 이번 쇠고기 협상이 문제인가?
미국에 대한 정치적 선물이었다는 의혹을 제기할 수 있겠고, 단지 졸속협상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다. 영어 해석에 문제가 있는 관료들의 무능함, 거짓이 드러났는데 뻔뻔하게 같은 말을 반복하는 태도도 물론 문제였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쇠고기를 먹는 식습관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소뼈가 들어간 음식을 즐겨먹는 한국인의 식습관을 문제삼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극히 제한된 시기에 맛볼 수 있었던 쇠고기를 일상적으로 먹는 지금의 생활이 올바른지 생각해볼 일이다.
인류가 육식을 한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육식을 위해 다른 동물들을 우리에 가두고 조직적으로 기른 역사는 길지 않으리라. 대통령의 말대로 우리는 누구나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를 꼭 먹어야 할까? 농경사회에서 소는 기본적으로 농사를 짓기 위한 도구였기에 소를 많이 먹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쇠고기는 고급 한식당이나 아웃백과 같은 비싼 패밀리 레스토랑의 주요 메뉴로 사용된다. 비싼 고기를 먹는 폼나는 생활... 우리는 미국인들처럼 쇠고기를 마음껏 먹고 싶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19세기말에 시작된 근대인으로의 신체 개량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며칠 전 경향신문에서 고미숙씨는 광우병은 육식을 위해 소를 사육한 인간이 받는 천벌이라고 했다. 인간을 위해 길러졌기에 이종(異種)인 인간이 당연히 피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어제는 눈이 왔다고 하는데 요즘 환경 재앙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많아지고 있고 강도도 높아지고 있다. 쓰촨성의 지진은 대륙판의 충돌로 인한 것이라는데 그런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단지 지금 잘살아보겠다는 개개인의 몸부림은 가까운 미래의 재앙을 점점 키우고 있는 것 같다. 굳이 광우병 고기를 먹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미쳐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2008년 4월 18일 금요일
어른이 무섭지 않다
한국 YMCA의 역사를 훑어보며 '청년'이라는 말을 YMCA에서 쓰기 시작하자 그 말이 유행처럼 번져나가서 짝퉁 '청년회'를 막느라 고생했다는 대목을 발견했다. 그 전에는 소년에서 바로 장년으로 점프하는 체계였다고 한다. 아동이라는 것도 근대가 창출해낸 것이라고 하는데, 인생의 구분이 참 세분화되었구나 싶다. 유아, 소아, 어린이, 소년, 청소년, 청년, 젊은이, 청장년, 장년, 중년, 노년 등등. 그건 오르고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더 늘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결혼은 안 했으니 아직 청년에 머무른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회사에 다닌 경험 때문인지 50~60대를 만나도 별 부담없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개인적인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이면 문제가 달라지긴 하지만. 학교에서 계속 있었다면 1년이라는 학년 차이도 크게 느껴지고 3년 이상 차이나면 아득한 선배로 생각하기 쉬웠을 터이다. 대학 2, 3학년 친구들이 노땅이 되었다고 좌절하는 것이 가소롭게 보인지 이미 오래. 이런 저런 일로 사장님들과도 많이 만나다 보니 이젠 어른이 무섭지 않다. 대신 애들이 무섭다.
2008년 4월 17일 목요일
일본 축구 도입사
1921(大正10)年9月10日に、大日本蹴球協会(The Football Association of Japan)として設立されました。
1917(大正6)年に東京の芝浦埋立地で第3回極東選手権大会が行われ、日本は初めて公式な国際試合に出場しました。しかし、結果は中国にもフィリピンにも惨敗。この結果を受け、日本のサッカーを強くしたい、アジア諸国と対等な試合ができるようにしたいと、翌年の1918(大正7)年に東京・名古屋・豊中で大会を開催しました。出場したのは主に中等学校チームで、大学や専門学校は少数でしたが、新聞報道の誤りにより、ロンドンのメディアでは全日本選手権大会が行われたと報道されてしまいました。翌1919(大正8)年に、イギリス大使館を通じてイングランドサッカー協会(The Football Association)から大銀杯が贈られ、「全日本蹴球協会の成立を聞き、はるかに祝意を表してこの銀杯を寄贈します。全国大会で優勝したチームに授与するようお取り計らいください」と書かれた手紙が添えられていました。このときまだ全国規模の大会も行われておらず、日本のサッカー競技を統括する組織もできていませんでした。しかし、この寄贈された大銀杯を授与すべく全日本選手権大会を行うこととし、東京高等師範学校の校長であった嘉納治五郎と、校友会蹴球部部長の内野台嶺らが中心となって大日本体育協会の協力を得、1921(大正10)年9月10日に大日本蹴球協会(The Football Association of Japan)を設立することとなりました。戦後、名称を「日本蹴球協会」と改めて国際サッカー連盟(FIFA)に加盟、1974年に財団法人化した際に「財団法人 日本サッカー協会」と名称変更しました。
http://www.jfa.or.jp/fanzone/faq/jfa/answer/index.html#answer2
日本での競技の歴史
日本にサッカーがやって来たのは、一説には19世紀、明治時代のことだといわれています。初めて組織化されたのは1921年で、創立された協会は「大日本蹴球協会」でした。
その後、1925年に(財)日本体育協会、1929年に国際サッカー連盟(FIFA)に加盟。1936年には第11回ベルリン大会に初出場を果たしました。
日本チームがオリンピックで初めてメダルを獲得したのは、1968年の第19回メキシコシティー大会で、銅メダルでした。
日本のサッカーの歴史は、(財)日本サッカー協会のホームページ「主要年表」で詳細がご覧いただけます。
http://www.joc.or.jp/sports/football.html
母国からの伝来
フットボールが日本にやってきたのは1873年(明治6年)。東京築地にあった海軍兵学寮の教官として来日した英国海軍のアーチボールド・ダグラス少佐と33人の部下たちが、訓練の余暇にレクリエーションとしてプレーしたのが最初だとされている。
1873年といえば、明治新政府によって欧米に派遣された岩倉使節団が帰国した年。新しい国づくりのために、西洋の国家制度や産業、文化などを積極 的に取り込もうとする機運が日本に溢れていた時期でもあった。また、英国で初めてフットボールの統一ルールが定められ、イングランドサッカー協会(FA) が設立されてから10年後のことであった。
フットボールの普及
ダグラス 少佐らの帰国後、日本からフットボールの記憶が消えてしまう時期もあったが、1900年代に入るとフットボールは日本国内に急速に普及していく。それは学 校教育を通してという日本特有のものであったが、東京高等師範学校で教えていたスコットランド生まれのデ・ハビラントや、名古屋の第八高等学校蹴球部を指 導したオックスフォード出身のウィルデン・ハートら、多くの英国人がフットボールの普及にかかわった。
1917年(大正6年)には日本で最初のフットボールの公式国際大会が芝浦埋立地で行われ、これを契機に普及の輪は大きく広がっていく。そして翌 1918年(大正7年)1月には、現在の全国高校サッカー選手権の前身である日本フットボール大会(大阪)が、2月には関東蹴球大会(東京)、東海蹴球大 会(名古屋)がそれぞれ開催された。
しかしさまざまな事情から、それらを統括する全国的な組織が誕生することはなかった。そんな時、ある出来事がフットボール創世記の日本に起こる。そして、それが日本フットボール界を大きく前進させることになった。
誤解が生んだ貴重な贈り物
1919 年(大正8年)3月12日、東京朝日新聞紙上に突如として掲載された記事は、当時のフットボール関係者を驚かした。紙面には立派な銀製のトロフィーの写真 とともに「イングランドサッカー協会から『日本の蹴球協会』へ純銀製の立派なカップを寄贈してきた」という内容の記事が掲載されていたからだ。
外国通信社の誤解により、前年に大阪、東京、名古屋で行われた大会が、「日本にも国内を統括する団体ができ、その全日本選手権の地方予選が3カ所で同時に行われた」かのようにロンドンへ伝わった。
このニュースを受けたイングランドサッカー協会(FA)では、早速、日本へ銀杯(FA杯)を寄贈する話がまとまり、1919年(大正8年)1月には FA杯と「フットボール協会の設立に祝意を表するとともに全日本選手権の優勝チームに授与してほしい」との書簡がロンドンから送られたのだった。
同年3月28日、当時の東京高等師範校長であり、大日本体育協会会長を務めていた嘉納治五郎が英国大使館にてFA杯を受領。その際、英国大使は「これによって、日本のスポーツが一層盛んになり、そしてまた、両国の国際関係も親密になるように」と述べた。
協会設立と全日本選手権
そし て1921年9月10日に大日本蹴球協会が設立された。同年11月には全日本選手権が行われ、優勝チームである東京蹴球団にはエリオット駐日英国大使から FA杯が授与された。なお、大日本蹴球協会、ならびに全日本選手権設立の際には、英国大使館書記官ウィリアム・ヘーグが多大な尽力を果たした。
こうして4チームのエントリー(うち1チームは事情により棄権)で始まった全日本選手権は拡大を続け、日本で最も権威のある大会として受け継がれている。
一時は出場資格が限られた時期もあったが、第52回大会(1972年度・昭和47年度)から、日本協会全加盟チームに出場資格を与えるオープン化に踏み切ると、この年の大会には地域予選を含めて75チームが参加。翌年にはその数は807まで増加した。
その後も拡大の一途をたどる大会は、第78回大会(1997年度・平成9年度)からは、全国を9ブロックに分けて行っていた予選を廃止し、全国47 都道府県代表チームに出場権を与えるとともに、18歳未満の第2種加盟チームにも門戸を開放。地方予選からの参加チーム総数は6,000を越えた。
なお、決勝大会は各都道府県予選を勝ち抜いた47チームに、Jリーグ加盟チーム、JFL上位チーム、総理大臣杯上位チーム、全日本ユース優勝チーム を加えた80チームで争われているが、こうした出場資格の拡大はイングランドのFAカップの精神に習ってのこと。イングランドから寄贈されたFA杯から始 まった大会にとっては当然の流れだった。
http://www.britishcouncil.org/jp/japan-sport-footballculture-history-japan.htm
(4)日本のサッカーの歴史
サッカーは、明治維新後に日本に伝えられたと言われています。1873年(明治6年)には、当時日本の海軍兵学寮に教官として招かれたイギリス人将 校ダグラス少佐が、日本海軍の軍人たちにサッカーを教えたという記録が残されています。19世紀の終わりになると、学校の先生を養成するために設立された 師範学校を中心に、サッカーのクラブが設立されるようになります。そして、師範学校を卒業したサッカー選手が、全国各地で学校の先生となってサッカーが広 く全国に広まることとなりました。
その結果、1918年(大正7年)には現在の高校選手権のもととなる日本最初のサッカー大会が大阪でスタートするとともに、1921年(大正10 年)には、現在の日本サッカー協会のもととなる「全日本蹴球協会」が設立され、第1回の「全国優勝競技大会」(現在元旦に決勝戦が行われる天皇杯全日本選 手権大会の前身)が行われました。
http://www.mext.go.jp/worldcup/dokuhon/2_1_4.htm
일본 야구 日本での競技の歴史
日 本の社会人野球の発端は1879年(明治11年)に新橋駅の鉄道関係者によってつくられた、「新橋アスレチックスクラブ」でした。日本の景気が好調だった 1916年頃(大正5年)、企業が野球チームを持つようになり、各地で実業団野球大会が開催さ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都市対抗野球大会の誕生は1927年 (昭和2年)です。
1949年(昭和24年)2月16日には342の加盟チームを有する日本社会人野球協会が発足、1990年(平成2年)に現在の(財)日本野球連盟が設立されました。
1992 年第25回バルセロナ大会から野球がオリンピック競技になることを受け、全日本アマチュア野球連盟が同日設立されました。(財)日本野球連盟は、社会人や 少年野球などアマチュア野球の大会開催、野球技術や審判技術の向上のための講習会、少年野球の育成に努めています。
オリンピックには、1992年第25回バルセロナ大会から3大会連続出場し、バルセロナでは銅メダル、1996年第26回アトランタ大会で銀メダル、2000年第27回シドニー大会では4位入賞という成績を残しています。
2008년 4월 14일 월요일
위험사회
울리히 벡이 학교를 다녀가기도 했지만 위험사회라는 것이 실감이 나는 것 같다. 어린애들이 납치되고 죽어서 돌아오고, 굴지의 기업인 삼성은 특검으로 뒤숭숭하고, 닭, 오리들이 떼로 죽어나간다. 생쥐깡을 비롯한 음식물 안전에 대한 논란은 음식물 가격 급상승과 더불어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안겨준다. 사회에 의심과 적대감이 넘친다. 불법 체류 노동자의 범죄가 터지니 다 내쫓아버리라고 하고, 태안의 환경 문제가 다시 지적되자 거기 사시는 분들이 알아서 하세요라는 여론이 급등한다. 이것뿐이겠는가. 느닷없는 4월의 더위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한편 Sharkwater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왔는데 상어보다 무서운 사람이야기다. 사람이 건드리지 않으면 상어도 무섭지 않아라는 것 같은데 과연 그런지는 더 알아볼 일이다.
2008년 4월 10일 목요일
미녀들의 수난-무방비 도시, 연의 황후
개봉 전부터 손예진의 파격 변신이 예고된 무방비 도시를 보며 관객들은 적어도 배우들의 외모 변신에 무방비로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밖의 극적 전개에서는 제대로 당했을 것이다. 조폭의 변종인 폭력적인 소매치기단의 권력 다툼이 그렇게 심각하지 몰랐고, 로미오와 줄리엣 류의 해서는 안 되는 사랑, 부모에 대한 원망 등 비극적 요인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어 슬픔을 강요하지만 그다지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진 않는다. 강한 여장부로 분한 손예진은 영화 내내 여러 남자들의 물리적 폭력과 협박에 의외로 쉽게 굴복하며 그녀가 강한 캐릭터인 건 맞는지조차 의심을 사게 했다.
연의 황후에서 진혜림은 연의 공주으로서 최초로 여성 군주가 되기 위한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하지만 훈련을 받는 그녀의 표정은 항상 코믹하게 끝난다. 영화 내내 코믹 연기가 절반은 되는 것 같았다. 군주의 책임을 버리고 유유자적하는 멋진 남성과의 전원 생활을 택했지만 혈통은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최근 많이 보게 된 견자단의 연기는 좋았건만 좀처럼 시대상황에 맞지 않는 온갖 설정은 몰입을 방해한다. 중국의 자신감은 역사마저 간단히 무시하게 만드는 것인지, 이 영화가 원래 판타지 영화인지 모호하기만 하다.
미녀들이 수다를 떨건 수난을 당하건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두 영화는 결국 여성의 역할과 이미지에 대한 고정 관념을 고착시키는 건 아니었을까.
2008년 4월 4일 금요일
The other Boleyn girl
이 영화를 보며 스칼렛 요한슨의 섹시함은 얼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탈리 포트만과 비교가 됐기 때문인지 아니면 병상에 오래 누워있다가 출산 연기를 해서 그런지 극중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에서 섹시함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괴상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5년쯤 전에 영국사 강의를 들을 때 박지향 교수님은 헨리 8세 부분에서 앤 불린 이야기가 꽤 유명하다고 했다. 난 전혀 몰랐는데. 이 여자가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이고 정식으로 왕비가 된 것도 미드 튜더스를 보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것 같다. 거기다 메리 불린? 메리의 존재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이 영화는 너무 부각을 해서 실존 인물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위키피디아(http://en.wikipedia.org/wiki/The_Other_Boleyn_Girl)를 찾아보니 실존 인물이지만 극정 설정과 달리 메리가 앤의 언니라는 의견이 더 많고 프랑스 궁정에 갔다 온 것도 메리란다.
워낙 걸출한 두 여배우가 주연을 맡아 그녀들의 섹시함 대결(영화 전단지엔 어김없이 뜨거운 베드신을 찬사하는 문구가 포함되었다)에 시선이 집중되기 쉽지만 영화 전체의 흐름을 보자면 긴 이야기를 다 넣기 위해 설렁설렁 넘어가는 부분이 많음을 지적할 수 있다. 앤 불린이 헨리와 처음 만났을 때와 프랑스에 다녀온 이후 변한 점을 느낄 수 없었는데도 헨리는 아들을 낳은 메리를 버리고 앤에게 달려든다. 몸을 허락하지 않는 앤을 위해 캐서린을 버리고 로마 가톨릭에도 등을 돌린 헨리의 모습은 미색에 미혹되어 정신이 나간 발정난 남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단순히 정욕을 위해 그렇게 엄청난 정치적 결정들을 내렸을까? 이런 것들은 원작 소설을 봐야 제대로 잘못을 추궁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헨리 8세는 너무나 감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튜더스의 헨리 8세가 너무 날씬하다 못해 빈약해 보이는 반면 에릭 바나는 원래 체격도 있는데다 잔뜩 부풀려진 의상을 종종 입어서 덩치에 있어서는 그림을 통해 접하는 실제 헨리 8세에 근접한 것 같다. 앤 불린은 그림 속의 인물보다 너무 예쁘지만 그 시대에는 나탈리의 미모가 부족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목인 The other Boleyn girl은 당연히 메리를 두고 말하는 것이지만(극중 둘의 어머니가 헨리에게 Which one?이라고 묻듯) 영화의 비중으로 보면 오히려 앤 불린이 The other 쪽인 것 같다. 작가는 메리가 앤의 위치에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야심가가 아닌 순수하게 남자를 사랑한 여자 쪽이. 사랑은 얼마나 허망하던가. 메리는 왜 헨리를 사랑했으며 어떻게 계속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