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29일 일요일

콜레라 시대의 사랑

(...) 이제는 나이도 들고 성질도 온순해졌지만, 두 사람은 가능하면 그 사건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간신히 치유된 상처는 마치 어제 입은 상처처럼 다시 피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1권 p.57.

(...) 그녀의 편지는 그 어떤 감정의 위험도 피했으며, 단지 항해 일지를 쓰듯이 성실하게 자신의 일상적인 일들을 이야기하는데 그쳤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 그 편지들은 심심풀이용으로, 자기 손은 불에 넣지 않으면서 뜨거운 불길을 유지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반면에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한 줄 한 줄마다 자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1권 p.124.

"부자라니, 난 그저 돈 많은 가난한 사람일 뿐이오. 그건 다른 것이오."
2권. p.10.

(...) 고독한 사냥꾼으로서 먹이를 낚으면서 너무나 많은 과부들을 알게 된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세상은 행복한 과부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 젊은 신부의 수많은 꿈 중의 하나에 불과한 안정을 대가로 자신의 성(姓)뿐만 아니라 개성까지도 포기한 시절 이후, 다시금 자신이 자유 의지의 주인이 되었다는 의식을 갖곤 했다. 오직 그 여자들만이 자신이 미친 듯이 사랑했고 또한 아마도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 하지만 죽는 날까지 젖을 주고 더러워진 기저귀를 갈아주며, 아침마다 술책을 사용하여 기분 좋게 해주어야 했던 남자가 자신의 사주를 받아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을 본 여자들은 그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삶이었다. 사랑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별개의 것, 즉 또 다른 삶이었다.
2권. pp.73~74.

사실대로 말하자면 후베날 우르비노의 구혼은 결코 사랑의 이름으로 제안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제안했다고 하기엔 이상한 세속적인 재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즉 사회적, 경제적 안정과 질서, 행복, 눈앞의 숫자 등 모두 더하면 사랑처럼 보일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거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만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었고, 이런 의문은 그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녀 역시 사랑이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2권. p.78.

그러자 모든 의심이 사라졌고, 이성이 가장 점잖은 행동이라고 지시하는 바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행할 수 있었다. 페르미나 다사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기억을 즉시 수세미로 문질러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고, 자신의 기억 속에 그가 차지하고 있었던 자리에 양귀비의 초원을 꽃 피웠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것은 마지막으로 평소보다 더 깊은 한숨을 쉬며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 올케들이 수도원의 감옥에서 산 채로 썩지 않은 것은 이미 자신 안에 그런 감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2권. p.80.

(...) 페르미나 다사가 자신이 죽음의 함정에 빠져 있다고 잘못을 돌린 사람은 (...) 바로 남편이었다. 직업적인 권위와 세속적인 매력 뒤에 감춰진 본모습이 구원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그는 가문의 사회적 무게 덕택에 대담해진 가련한 악마였던 것이다.
2권. p.81.

"아주 특별한 종류의 콜레라임에 틀림없군. 시체들의 목덜미에 하나같이 확인 사살한 총구멍이 나 있으니 말이야."
2권. p.118.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눈물 모양의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서 더욱 빛나고 있었다. 앨리스가 다시 한 번 거울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2권. p.120.

두 사람은 서로 그대로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니까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라 손자뻘 정도 되는 이미 사라진 두 젊은 남녀의 덧없는 기억 이외에는 공통점이 아무 것도 없는, 죽음의 습격만을 기다리고 있는 두 늙은 남녀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2권. p. 256.

"빌어먹을. 모두 지옥이나 가라고 해. 우리 과부들이 좋은 게 있다면, 우리에게 명령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야."
2권. p.288.

(...) 그런 다음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그의 꺾을 수 없는 힘, 그리고 용감무쌍한 사랑을 보면서 한계가 없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일지도 모른다는 때늦은 의구심에 압도되었다.
선장이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2권. p. 331.

2008년 6월 28일 토요일

장미의 이름

(...) 철학에 대한 증오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가짜 그리스도는 그 사자가 그랬듯이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잘 들어 두어라.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호르헤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리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장미의 이름(하) pp.638~639.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장미의 이름을 이제서야 아주 힘겹게 한 번 읽게 되었다. 교황과 황제 그리고 수도회간의 투쟁 부분은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만 책읽기를 힘들게 만든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다 읽고 나니 그 지루했던 부분들이 책 전체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부분들이었음이 느껴진다. 지루하고 유치찬란한 그 논쟁들은 그 과거는 물론 지금까지도 어느 사회에서나 되풀이되고 있고, 언제든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을 것이니...

묵시록의 상황이 그대로 연출되어 일곱 개의 나팔이 하나씩 울린다는 생각이 든다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할 필요도 없다. 이미 구원받을 자와 비참한 최후를 맞을 사람은 정해졌을 터이니. 행여 세계가 멸망하는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상징적 의미로) 일곱 개 나팔이 다 울릴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두번째 나팔부터 막도록 노력하면 어떨까.

2008년 6월 23일 월요일

Terminator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6년 생활을 마감하던 마지막 겨울 방학을 장식한 영화가 있었으니 터미네이터다. 시골 소년이었던 나는 중학생이 되어 원주 시내에서 좀 놀겠다는 기대도 있었고, 풋사랑의 재미를 느끼는 시절이기도 했다. 소위 청소년이 되려는 시기에 본 터미네이터는 당시의 상황과 어울려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랑하는 방법도 학습하는 것인지라 그 때까지는 영화의 키스 장면이 나와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시골 마을에서 키스는 커녕 어떤 농밀한 신체 접촉도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학급 친구들이 저학년 시절 이성에 대한 단순한 적대심을 버리고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하여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주고, 졸업 선물을 주고 받는 등 변화가 나타났다. 그래서인지 이전에 많은 로맨스 영화들을 봤겠지만 로맨스가 주된 내용이 아닌 터미네이터의 연애 장면이 오히려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터미네이터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시간축을 무시한 영화의 내용이었다. 존 코너의 아버지가 미래에서 날아왔다는 설정 때문에 애당초 존 코너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인지 궁금증이 생겼고, 마침 토요명화에서 방영한 터미네이터를 본 학급 친구와 그 이야기를 나눴으나 별 소득은 없었던 것 같다.

여하튼 터미네이터는 몸짱 아놀드가 돌아오겠다, 돌아왔다를 연발하며 3편까지 제작되었고, 최근 2, 3편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번에 볼 때 시간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를 주목했지만 대충 얼버무리기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3편은 어떤 블로그에서 본 대로 1, 2편의 패러디 영화의 성격이 강했다.

시간 이동은 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였다. 그러나 '잘못된' 과거를 바꾸겠다는 은밀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변경된 과거로 인해 현재가 통째로 바뀌는 위험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거나, 과거에서 다른 행동을 해도 결국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과로 이어지곤 했다. 터미네이터에서는 기계들이 인간 군대의 지도자를 제거하기 위해 과거로 인간형 병기를 보낸다는 설정이다. 미래 인간 군대에서도 대응하기 위한 사람과 기계 병기를 차례로 보내는데 결국 존 코너를 지켜낸다.

터미네이터에 대한 몇 가지 설명 방식들을 봤지만 납득하기는 힘들고, 지금 떠오르는 의문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기계들은 왜 존 코너 암살을 위한 터미네이터를 띄엄띄엄 보내나?
- 터미네이터1, 2, 3는 거의 10년씩의 시간 간격을 두고 제작되었다. 이런 제작 시기의 문제 때문에 10년 주기로 기계들이 과거로 투입되는 것은 이해할만하나 매번 업그레이드된 성능의 터미네이터를 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터미네이터 여러 대를 보내지도 않고, 더 자주 보내지도 않은 이유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3편에서 아놀드는 자신이 공장에서 양산되는 모델임을 밝히기도 했다.) 로봇과 인간의 전쟁이 몇 년 지속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로봇이 스스로 개발을 거듭해 진화된 병기를 양산했다면, 존 코너가 이끄는 인간이 한정된 자원과 재래식 무기로 어떻게 승리를 할 수 있는지도 납득하기 힘들다.

2. 2, 3편의 터미네이터는 어떻게 의복까지 함께 복원되는가?
- 2, 3편의 터미네이터들이 알몸으로 과거로 갔다가 처음 얻어입은 옷을 입은 상태로 매번 재생되는데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몇 번씩 총알로 벌집이 되는 터미네이터들이 그 때마다 옷까지 다 헤지면 또 누군가의 의복을 갈취해야하니 번거롭고, 단순히 의상 담당자가 귀찮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누드를 덜 보여줘서 심의 등급을 낮추거나, 막되먹은 기계라도 옷을 입혀서 관객의 눈을 편하게 해주기 위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3. 터미네이터는 왜 인간형인가?
- 이것은 얼핏 생각하는 것보다 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3편에서 기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순간을 보면 로봇들은 인간처럼 머리와 몸통이 있지만 다리 대신 바퀴가 달려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인간과 기계의 전투가 심화될 때를 보면 기계들은 보통 두 다리를 가진 인간형이다. 과연 두 다리를 가진 로봇이 가장 효율적일까? 기계들이 인간형인 것은 효율성이나 기계들의 진화의 산물이라기보다 기계와 인간의 대결을 역사상 지속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결의 또 다른 형태로 풍자한 것이 아닐까 싶다.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 매트릭스 등에서 꾸준히 인간 아닌 것이 인간과 같은 의지와 감정을 가지게 된다면 인간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들이 제기되어왔다. 순전히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나 인간의 신체가 노화, 사고, 병으로 망가졌을 때를 대비해 '만든' 복제인간의 존재는 어떻게 봐야 할까? 터미네이터는 스스로 기계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기에 인간이 되겠다고 하지는 않고 무게나 힘 등에서 인간과 확실히 차이가 나기에 문제가 덜 되지만 아일랜드에서처럼 복제인간들이 인권을 주장하고 나서면 외형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어 골치아픈 문제가 제기된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2편에서는 확실히 그리고 3편에서는 불분명하게 아놀드가 프로그램된 명령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을 통해 스스로를 버리는 모습이 나온다. 비록 아놀드는 자신은 죽음에 대한 관념이 없다고 하지만 2편의 자살신은 에일리언 시리즈에서 시고니 위버가 용광로에 뛰어들어 죽는 장면과 여러모로 유사해보인다.
이 시리즈에서 기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 매트릭스 시리즈에서처럼 인간을 동력원으로 착취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인간의 통제가 '싫은' 것인지, 기계가 아닌 존재들은 전부 없애겠다는 것인지, 그렇다면 에너지는 어떻게 얻으려고 했던 것인지, 의지가 있다면 기계들끼리의 권력 투쟁은 없었는지 등 설명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 3편 마지막에서는 스카이넷이 요즘 회자되는 집단 지성과 비슷한 것처럼 설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기계들의 '배후'나 다른 기계를 통제하는 메인 컴퓨터는 정말 없는지도 궁금한 점이다.

4. 시간 여행이 애당초 가능한 것인가?
- 이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시간이 시계에서 보는 가시적인 존재가 아님은 물론, 선후 관계가 항상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 정도만 말할 수 있으리라. 과거, 현재, 미래라는 분류의 불분명함. 불가능한 진보. 영원회귀...

2008년 6월 15일 일요일

토마토의 공포

매점에서 토마토가 다 팔려나가 대신 과자 한 봉지를 사고 말았다. 토마토에 대한 이 글은 쓴다고 생각한지 한참 지났지만 이제서야 대충이라도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쇠고기로 인해 촉발된 먹거리에 대한 걱정은 우리가 별 생각없이 섭취했던 온갖 음식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생쥐깡, 통조림의 온갖 이물질 등 눈에 보이는 것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걱정도 스멀스멀 자라났다.

그러는 와중에 미국에서는 살모넬라 토마토가 나타나 식중독을 일으키는 것이 큰 이슈가 되었다. 그나마 좋아하는 토마토인데 식중독이라니 믿을 거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우리' 토마토는 안전하다고 했겠고 나도 몇 개 먹었지만, 스스로를 신이 축복한 나라로 여기는 미국에서 왜 그리 위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지는 신만이 알 일인지 어떤지.

미국은 토마토의 위험을 이미 인지했는지 단지 상상력이 풍부해서인지 토마토가 식인을 하는 영화들을 두 편이나 만든 바 있다. 토마토 공격대, 토마토 대소동 2. 보진 않았지만 1988년에 만들어진 2편에는 무려 조지 클루니가 출연했단다.

스파이더윅 크로니클이라는 최근 영화를 보면 (정확하진 않지만 단순화해서) 괴물들을 퇴치하는데 토마토가 사용된다. 그래서 여기부터는 토마토에 어떤 신성한 의미가 부여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토마토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찾아보았지만 뾰족한 해답은 없었다. 다만 케찹이나 파스타 등 음식 재료로 널리 쓰이는 토마토가 처음부터 환영받는 먹거리는 아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초창기 미국의 청교도들은 토마토를 최음제로 여겨 기피했다고 한다.

스페인 발렌시아의 토마토 축제는 유명하고, 축제 기간 동안 엄청난 분량의 토마토가 놀잇감으로 사용되지만 이 축제 자체는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스파이더윅 크로니클에서 토마토가 사용되는 장면을 보면 붉은 점액이 퍼지는 이미지를 보게 되는데 토마토의 붉은 색이 피와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생명과 열정. 발렌시아에서 토마토를 던지며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감각을 되살리는 것일까.

http://en.wikipedia.org/wiki/Tomato

The level of Being

그저께는 짐짝이 되었다. 다마스에 네 명이 타야했는데 두 명은 좌석에 앉았지만, 둘은 화물칸에 짐들과 함께 앉았다. 크지도 않은 다마스에 덩치 큰 장정 두 명이 있으니 쪼그려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둘은 인간으로서 좌석에 앉지 못하고 화물이 되어 철창 밖을 바라보는 아픔을 느꼈다. 안에서 소리를 쳐도 아는 형조차 무심하게 눈앞에서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그 안에 갖혀있다는 가상의 상황을 연기한 것뿐이지만 그 갑갑함은 예전에 술집에서 주변 사람의 장난으로 수갑을 했을 때에 못지 않았다. 문득 인간 존재의 등급이 이렇게 철저하게 나눠지는구나 싶었다.

얼마전 에반게리온 시리즈에 등장하는 제레가 독일어이며 영혼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레(SEELE, soul). 위키피디아의 에반게리온 용어 해설 페이지를 보니 제레는 써드 임팩트을 일으켜 인류보완계획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들이 현실 속에서 찌질하게 살아가며 서로에게 상처주는 일을 없애고, 인류를 한 차원 높은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 차원 높은 인간. The Higher Man. 니체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종교를 통해 추구하는 것도 현실의 고난과 번뇌를 초월하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인간이 되는 것조차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에반게리온에서는 고슴도치인지 바늘두더지인지 헛갈리지만 서로 다가갈수록 상처를 주는 그 딜레마는 원래 쇼펜하우어가 한 말이란다. 하지만 가만 생각하니 고슴도치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지 의문이 생겼다. 위 사진들처럼 고슴도치는 종종 몸을 맞대고 살아가는데 다치고, 딜레마 상황에 놓일까? 따지고 보면 고슴도치의 딜레마란 인간 관계의 어려움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례지만 현실적인 상황은 아닌 것이다.

인간이 되는 것은 다른 생명체를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니 삶이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http://en.wikipedia.org/wiki/Neon_Genesis_Evangelion_glossary
http://scshin.egloos.com/3598268

2008년 6월 10일 화요일

The King: 사기다! (strong spoiler)

이 투 마마에서 처음 접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라틴계의 미소년 쯤으로 여겨졌다. 아마로 신부의 죄에서는 처녀가 애를 배도록 만든 신부 역할을 맡아서 좀 깬다 싶었다. 수면의 과학에서도 범상치 않은 역할이었고, 그나마 바벨에서는 이해할만한 인물을 연기했다. 하지만 난 평범한 캐릭터보다 희한하고 엽기적인 캐릭터에 더 열광하는지라 이 배우가 마음에 들었다.그런데 베르날의 영화 중 내가 놓친 영화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좋은 영화를. 바로 더 킹이다.

아주 우연히 그리고 급작스럽게 더 킹을 만났다. 매달 발급되는 알라딘의 맥스무비 할인쿠폰을 이용해서 급하게 볼 영화를 찾던 와중에 씨네큐브에서 이 영화가 상영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혼자 보기에 좋은 영화인 것 같아 덥썩 예매했다.

극장에 가기 전에 영화 정보를 확인하지 않아서 신작 영화인줄 알았고,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계속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미 2005년에 개봉되었단다. 이 글을 쓰는 것은 영화를 보고 시간이 꽤 지난 시점이라 기억이 많이 사라진 것이 아쉽지만 영화의 내적 논리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보는 재미를 느낀 흔치 않은 영화였다. '~의 왕'도 아닌 더 킹이라는 대범한 제목을 건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주요 줄거리는 막 제대한 엘비스(베르날)가 죽은 어머니가 남긴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만난 적이 없는 아버지를 찾아나서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이다. 핵심은 가족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주인공들을 살펴보면 윌리엄 허트(데이빗, 아버지 역),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엘비스, 데이빗의 사생아), 펠 제임스(맬러리, 데이빗의 딸), 폴 다노(폴, 데이빗의 아들), 로라 해링(트윌라, 데이빗의 부인)이다. 사진 속에 나타나듯 원래 가족의 일원인 폴 다노는 사라지고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연히.

느닷없이 아버지를 처음 찾아간 날 엘비스는 가혹하게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들어야했다. 데이빗의 논리는 예전의 사고는 안타깝지만 지금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엘비스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현실을 거부하고 거대한 복수를 계획한다. 그 복수 과정에 이복동생과의 사랑이라는 변수가 개입하여 문제는 아주 복잡해진다.

여동생 맬러리와 엘비스가 심각한 사이라는 것을 눈치챈 폴은 엘비스를 찾아가 따졌고, 나중에 엘비스는 아니라고 했지만 내 생각엔 다분히 고의적으로 폴을 살해했다. 영화 전반부에 폴이 데이빗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라는 말이 거듭해서 명시적으로 언급되었는데, 그 아들이 사라진 것이다. 가족은 큰 위기에 빠진다.

영화의 배경으로 깔리는 교회의 이미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는 교회와 기독교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데이빗은 지역 사회에서 신뢰를 받는 목사지만 목회자가 되기 이전에 엘비스라는 사생아를 낳았다. 하지만 신의 은총으로 과거의 과오는 용서받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신이 자신의 과거를 지워줬다고 믿었는지 몰라도 그 무책임함은 결국 부적절한 아들이 적합한 아들을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아내와 아들, 딸 한 명씩을 둔 단란하고 이상적인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겠다는 욕심은 부적절한 아들을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집으로 불러들였고, 결국 아내와 딸까지 잃고 만다. 이제 그가 적합하다고 믿은 가족은 사라지고 원래 가족이 되었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원래의 아들(엘비스)만이 남는다. 그 아들은 묻는다. 신은 나를 용서할 것인가?


마침내 데이빗은 비록 사생아지만 엘비스가 자신의 아들임을 교회 내에서 선포했고, 소수의 신도는 저주를 하며 떠났지만 많은 이들은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박수를 쳤다. 현실의 아들이 사라진 이후에 많은 무리를 하며 받아들인 또 다른 아들.


맬러리는 오빠를 사랑하고 오빠의 아이를 잉태한 것을 나중에야 알았고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엘비스는 태연하게 음료수를 마시며 왕관을 쓴다. 목사인 아버지 데이빗이 기독교의 권위와 가식을 등에 업고 자기를 거부했을 때부터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았던 것일까. 아무도 사생아이자 살인자인 엘비스를 저지하지 못했다. 나는 맬러리가 자살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엘비스가 맬러라와 트윌라를 제대하며 은닉해서 가져온 총으로 죽이며 스토리를 완결했다.

영화의 내용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매력적인 십대 여고생 역할을 맡은 펠 제임스가 사실은 30대라는 것이 가장 충격적이다. 사기 수준이다. 영화 찍을 때는 비록 20대 후반이었지만, 심지어 오빠로 나온 폴 다노는 물론 베르날보다도 나이가 많다. 나는 완전히 10대로 철썩같이 믿고, 성관계 장면을 어떻게 찍은 것일까, 역시 18세는 넘은 배우겠구나 짐작하는 정도였건만.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로라 해링을 다시 만난 것도 반가웠는데 장성한 자식들을 둔 중년 여성으로 나와 이질감이 느껴지긴 했다.

2008년 5월 18일 일요일

Speed Racer: Panic!

아동용 영화같다는 영화 평을 얼핏 보고 극장에 갔지만 레이싱 영화가 어떻길래 그럴까 고개가 꺄우뚱해졌다. 어쨌거나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라는 말에 어느 정도의 기대를 갖고 갔다.



주인공의 성은 레이서요, 이름이 스피드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조롱한대로 영화는 아동용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도 어색하지 않았다. 실제 레이싱 경기장의 박진감이 아니라 CG로 창조한 롤러코스터 같은 경기장에서 카트레이서를 방불케 하는 폭력적 레이스가 펼쳐졌다.



인투더와일드를 비롯해 요즘 많은 영화에 출연하는 에밀 허쉬가 스피드 레이서 역을 맡았고, 로스트에서 최고의 훈남으로 등극한 매튜 폭스가 레이서 X로 나온다. 수잔 서랜든이 비교적 젊은 엄마로 나와 어색했고, 존 굿맨은 키가 너무 크게 나와 한동안 알아보지 못했다. 비는 역시 대사가 많지 않았고(이건 영화 전체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캐릭터의 일관성이 떨어지는 역할을 맡았다. 과연 미국에서조차 저조한 흥행을 거둔 이 영화로 비가 월드 스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원작 만화라는데 영화가 원작의 세세한 부분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은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만.



감독은 이 영화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가족에 대한 사랑? 거대 자본이 짜고 치는 판에서 레이싱에 대한 순수한 열정만으로 우승하는 도전 정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기대한 것은 매트릭스 3부작의 영향이 클 것이다. 실제 이 영화는 매트릭스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화려한 영상은 기본이고, 네오에 대응하는 스피드 레이서라는 한 명의 영웅에 의해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기본 줄기도 그렇다. 하지만 매트릭스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진 반면 스피드 레이서는 별다른 두통거리를 주지 않는다. 매트릭스가 생각하거나 즐길 수 있는 두 가지 알약을 줬다면 스피드 레이서는 보고 즐기라는 헐리웃 영화의 기본적인 메뉴만 제공할 뿐이다. 그것도 나름의 미덕이지만 워쇼스키의 영화를 기다린 팬들은 아마도 더 많은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