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21일 월요일
적벽
대학원 사람들과 영화를 봤다. 한국에서는 '적벽대전'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했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적벽'이 원제였다. '적벽지전'이 다음 편이다. 나도 한동안 그랬지만 영화가 두 번으로 나뉘어 상영되는 것을 모르고 봤다가 낭패를 본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삼국지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적벽의 '전투'는 다음 편에 나올 것이다.
그렇지만 소규모 전투가 주를 이룬 이번 영화의 전투 장면도 볼만했다. 적벽의 대규모 전투를 보지 못해 실망한 사람이 많은 모양이지만 나는 아주 즐겁게 봤다. 나중에 밥을 먹으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 당시의 무기를 제대로 고증한 것인지, 배우들의 신장이 적절했는지 등에 대한 논란이 일긴 했지만.
여러 판본으로 삼국지를 다섯 번 이상은 본 것 같고, 코에이의 게임도 많이 했건만 삼국지의 세세한 부분은 많이 잊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가 얼마나 원작에 충실했는가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다. 그래서 대강의느낌을 요약한다면 '적벽'은 역사서보다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에 더 중점을 둔 영화인 것 같고, 오우삼 스타일이 강하게 덧입혀졌고, 특히 전투 장면에서는 반지의 제왕 류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삼국지-용의 부활의 실패가 보여주듯 원작에서 과도하게 벗어난 작품은 감독의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관객의 공감을 얻기 힘든데 적벽은 적절한 선을 지켰다.
영화는 첫장면부터 악한 조조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만들어 나갔다. 간웅 조조의 이미지는 강력한 정치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정통 왕조의 황제를 무시하고, 민간인, 적군을 가리지 않고 대학살을 자행하고, 무엇보다도 소교라는 미녀를 얻기 위해 오를 치는 듯한 설정을 통해 구축된다. 하지만 조조의 대척점인 유비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인 것만도 아니다. 유비는 자기를 따르는 백성을 지키며 대의를 중시하는 장면을 빼면 그다지 호감이 가는 캐릭터로 그려지지 않았다. 신야에서 패한 이후상황이 안 좋긴 했으나 주유가 방문했을 때 누추한 곳에서 짚신을 삼고 있는 장면은 비참함을 과장한 것이리라.
누구를 유명 배우로 썼느냐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전통적으로 중시되는 유비, 관우, 장비, 조조라는 인물이 아니라 제갈량과 주유의 라이벌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간 금성무의 연기에 의문을 품어왔으나 이번 제갈량 역할은 그에게 꽤 적합했다. 문무를 겸비한 인물인 주유 역할의 양조위도 괜찮은 캐스팅. 장비, 관우는 소설의 이미지보다 작았고, 유비는 너무 늙었고, 조운은 너무 경쾌했다. 조조의 배우는 선한 이미지를 많이 풍기는 인물인데 그래서 오히려 간웅의 역할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손권도 아버지,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 한 나라의 지도자로 우뚝 서는 과도기 캐릭터의 모습을 잘 연기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영화를 보기 전에 라디오에서 오우삼 스타일이 어떻게 영화에 반영되는지 조금 들은 편이라 영화를 보면서 주목했는데 역시나. 유비, 손권의 동맹이 결정되는 주유와 제갈량의 악기 연주 장면은 과장되었고, 흰 비둘기는 여러 번 날아다녔다. 비둘기는 단순히 난 정도가 아니라 과도하게 클로즈업되기까지 했다. 워낙 주연급 인물이 많이 필요한 영화라 일대일 대결이 많지는 않았지만, 조운과 하후X의 전투 장면은 지나치게 길었다. 소설 속의 조운 실력이라면 그렇게 오래 경합할리가 없을 터인데.
장비는 장팔사모를 거의 쓰지 않았다. 전투 장면이나 평소의 모습까지 장비는 많은 부분에서 반지의 제왕의 드워프족 김미를 연상시켰다. 작고 단순한. 레골라스의 이미지는 관우, 조운의 전투 장면에서 조금씩 스며나왔다. 주유의 기술도 일부 그런 면이 있었고. 전투 장면에서는 이렇게 반지의 제왕이 섞여 있는데 이는 세계적 영화 흥행을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하지만 절대악이 있고 악의 세력의 근원을 없애는데 성공하는 반지의 제왕과 달리 삼국지에서 조조는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유비, 손권은 적벽에서 단기적인 성공만 거둘 뿐이다.
마지막으로 축구 장면에 대한 분석을 빠뜨릴 수 없다. 무기 부분도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축구는 거의 엉터리다. 중국 축구계는 축구의 중국 기원설을 계속 제기하는 모양이고, 영화는 그런 연장선으로 보인다. 골대가 현재와 다를 뿐 선수들이 태클을 한다거나 묘기를 부리며 드리블을 하는 것은 명백히 현대 축구의 모습이다. 심지어 공까지 거의 구형에 가까운데 과거에 그런 공을 썼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말을 타고 와서 응원하는 대규모 관중들을 보면 어이가 없어진다. 영화의 맥락에서 축구가 나온 것은 전쟁의 승부는 축구처럼 딱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즉 영화 막판의 전투에서 조조군이 패한 것은 적벽에서 수전을 통해 만회할 수 있다는 조조의 자신감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었다. 하지만 축구의 승부야말로 다음 경기에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것이다. 거의 10배의 병력으로 전쟁에서 지기는 어렵지만 동일한 숫자의 선수들이 뛰는 축구는 공정한 룰만 있다면 승부 예측이 훨씬 어려운 법이다. 그렇다면 조조의 지나친 자신감과 오만함에 대한 경고, 그리고 참패를 예고하는 언급일지도...
2008년 7월 15일 화요일
Why Lady First?
왜 남자들이 여자를 배려(하는 척) 해야하나? 단순히 여자를 꼬드기기 위한 행위일 수도 있지만 이미 꼬드긴 여자도 꾸준히 배려하는 (물론 그렇지 않은 다수의 남자들이 있지만) 이유는? 그냥 멋있어 보여서일까? 여성이 약자라서? 하지만 이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어제 발견한 것 같다. 생물학적인 설명이다.
영화, 드라마에서 생명이 위태로운 위기의 순간, 예를 들어 타이타닉 같이 선박이 침몰하거나 로스트 에서처럼 비행기가 추락하고 무인도에서 살아야하는 상황을 보자. 구명보트에 탈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되어 있다면 누구를 태울 것인가. 생명은 분명 평등하지 않고 우선순위가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타려고 다투다 아비규환의 상태를 만드는 대신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선장 같은 사람이야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말할테고 삶의 나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
누가 오래 살 것인가를 따져볼 때 당연히 더 어린 사람을 살리는 쪽이 인류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유리한 선택이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어떨까? 요즘이야 여자들이 더 오래 산다고 하지만 수명을 놓고 볼 때 원래부터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자들의 가치는 아기를 낳아 인류의 존재를 지속시킬 수 있기에 빛난다. 영화 속에서 위기 상황에서도 여자를 우선하는 수많은 장면들은 남자가 단지 여자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를 희생했다기보다 인간에게 내재한 하나의 본능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생물학에서 종의 본능은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최우선 목표라고 보고 있으니 전혀 틀린 설명도 아닐 것이다.
영화, 드라마에서 생명이 위태로운 위기의 순간, 예를 들어 타이타닉 같이 선박이 침몰하거나 로스트 에서처럼 비행기가 추락하고 무인도에서 살아야하는 상황을 보자. 구명보트에 탈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되어 있다면 누구를 태울 것인가. 생명은 분명 평등하지 않고 우선순위가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타려고 다투다 아비규환의 상태를 만드는 대신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선장 같은 사람이야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말할테고 삶의 나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
누가 오래 살 것인가를 따져볼 때 당연히 더 어린 사람을 살리는 쪽이 인류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유리한 선택이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어떨까? 요즘이야 여자들이 더 오래 산다고 하지만 수명을 놓고 볼 때 원래부터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자들의 가치는 아기를 낳아 인류의 존재를 지속시킬 수 있기에 빛난다. 영화 속에서 위기 상황에서도 여자를 우선하는 수많은 장면들은 남자가 단지 여자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를 희생했다기보다 인간에게 내재한 하나의 본능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생물학에서 종의 본능은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최우선 목표라고 보고 있으니 전혀 틀린 설명도 아닐 것이다.
2008년 6월 30일 월요일
크로싱: 비와 백구와 축구
아... 왜 이렇게 글 쓰는 게 늦어지나. 영화 본 지 보름은 지났건만. 기억을 그러모아 어떻게든 끝내보리라. 스포일러 당연히 있다.
처음부터 이 영화를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차인표가 나온 영화가 재미있었던 적도 없었고. 하지만 지난 달 말미를 기념하여 선택한 영화는 결국 '크로싱'이었다. 졸리와 맥어보이의 원티드를 원하기도 했고, 결국 그저께 본 쿵푸팬더를 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가벼운 영화들보다 볼만한 한국 영화 한 편을 우위에 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그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다.
영화는 고통 그 자체다. 영화평 중 "재미도 감동도 없는"이라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다.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들지만 이는 카타르시스도 아니고 누구나 영화를 보며 느낄 수밖에 없는 고통의 소산일 따름이기 때문이리라. 확실히 영화는 재미로 볼 것도 아니고, 감동보다는 분노만을 느끼게 만든다. 분단으로 이산 가족을 보지 못하는 아픔은 이미 60년이 다 된 일인데, 탈북자들도 상당수가 이산 가족이었다. 결국 차인표는 금방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달리 부인, 아들과 (생)이별을 한다. 많은 이별은 예정에도 없이 찾아오는 것이리라.
가족의 문제도 있지만 영화는 식량난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는 북한 정권을 정면으로 비난한다. 북한 국경의 경비병은 돈만 주면 편하게 두만강을 왕복하게 허용하지만 무임도강하는 생계형 도피자에게 기꺼이 개머리판, 총알 세례를 가한다. 중국으로 도망치다 걸리면 정신개조를 위해 수용소에서 무임금 노동력으로 소모되다 죽을 뿐이다. 구더기가 득실대는 상처를 안고 죽은 미선의 이미지는 말문을 막히게 할 뿐이다.
영화의 비판적 시각은 북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도적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탈북자 지원 사업에 대한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을 더 많이 구하기 위해 개인이 아닌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단체가 필요함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들은 관료제의 무뚝뚝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남한이 아니라 병든 아내와 아들이 있는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용수(차인표)의 기대는 간단히 무시된다.
기독교에 대한 영화의 시선은 약간 애매하다. 영화를 본 날 다른 이의 생각 궁금해 인터넷을 뒤진 결과 영화가 기독교에 지나치게 비판적이라 싫다는 반응들이 있었다. 나도 신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는 용수의 격렬한 반응을 보며 기독교계가 안 좋은 반응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엔딩 크레딧을 보니 이미 기독교계의 협조가 있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탈북자를 도운 것은 기독교계라는 기본 사실이 있기 때문일까. 종교의 이념 자체와 이를 사리사욕을 위해 악용하는 성직자, 교단의 문제는 별개로 둬야 하는데, 크로싱은 기독교 이념 자체를 지지하는 영화는 아니다.
크로싱은 수없이 많은 경계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살아가며 보통 주어진 틀 안에서 살아간다. 삶의 공간이건 신분의 문제이건 경계선을 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넘나드는 것을 일상으로 삼으면서 양 세계의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한다. 무당이나 성직자들도 그런 종류의 사람인데, 크로싱에서는 브로커라는 존재들이 해당된다. 용수의 한국행을 조장한 브로커는 사욕을 위해 용수를 속여서 이용했고, 준이의 한국행을 도운 브로커들은 돈을 받고 냉정하게 일을 처리할 뿐이지만 어린 준이의 절대적 불행에 동정하기도 한다.
이런 얘기들을 쓰려던 게 아니었는데 서론이 길어져서 본론에 충실할 수 없지만 제목에 충실한 내용은 아래 적어본다.
위에 브로커 얘기를 적긴 했는데 영화에서 수많은 경계를 넘는 것은 비로 나타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지상의 물리적, 심리적 경계와 상관없이 조용히 그리고 차갑게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씻어내린다. 눈물도 비에 대응하는 설정이다. 영화 말미의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물이었다. 경계들 때문에 헤어진 사람들은 경계를 넘어 원래 하나였던 사람과 만나지 못하게 되면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준이는 비를 좋아한다. 맑은 날이 아니라 궂은 날에 내리는 비를 좋아한다멸 결과는 뻔할지도 모른다. 비는 수해를 낳기도 하지만 가뭄을 해갈하기도 하니 이중적 장치이지만 준이가 비를 좋아한다는 설정은 결말의 파국을 예고한 것 같다.
백구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기른 마지막 개가 (이름까지) 백구여서인지 영화를 보며 반가우면서 안타까웠다. 부인과 아들까지 죽는 마당에 개라고 무사할리 없다. 북한의 식량난 때문에 백구는 영화 초반 준이네 식구의 지위에서 아침 밥상을 가득 채운 음식으로 변했다. 엔딩 부분의 가상의 행복한 삶 속에서도 백구는 빠질 수 없는 일원이었다. 백구의 죽음, 그것은 한 마리 개의 죽음 이상의 의미다. 이어지는 불행을 알리는 중요한 서막이었다. 만약 백구가 진돗개라면 애시당초 함경도에 있을 가능성 자체가 거의 없다. 백구는 북한의 현실의 일부라기보다 메타포로 사용된 설정이다.
마지막으로 축구를 보자. 크로스, 크로싱은 센터링이라는 잘못된 용어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축구에서 득점을 위한 중요한 기술이다. 대지를 가르듯 그라운드를 횡단하여 스트라이커의 머리와 다리로 전달되는 공의 아름다움...
심각한 영화 타인의 삶에서도 축구 장면이 스쳐가듯 나온다. 이렇게 축구는 평화로운 일상의 일부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으로 많은 영화에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용수는 축구 '선수'였고, 준이도 축구를 너무 좋아한다. 그리고 사진에도 나오지만 백구도 축구를 좋아한다. -_- 축구 선수라는 설정은 이상한 곳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바로 주중 독일 대사관에 북한 사람들이 몰려 들어갈 때 축구 선수라는 경력이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용수는 북한을 떠나며 아내의 약과 아들의 축구화, 축구공을 사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중국에서 번 돈은 잃어버렸지만 남한에서 번 돈은 고스란히 모아 나이키 축구공을 사기에 이른다. 하지만 공을 받을 준이는 북한도 아닌 몽골의 사막이라는 타향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용수는 아들에게 크로스를 할 기회도 얻지 못한 것이다.
절대 고통의 영화 크로싱. 하지만 이런 현실이 멀지 않은 곳에, 소위 같은 민족에게 일어나는 일임에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이 고통을 가중시킨다. 영화 포스터는 "그 날, 우리는 살기 위해 헤어졌습니다"라고 말한다. 살기 위한 몸부림은 모든 생명의 본능이다. 하지만 살기 위한 헤어짐은 용수의 삶과 다른 가족의 죽음으로 결론이 났으니 용수는 그냥 북한에 있으면서 온 가족의 가난한 삶을 지켜보는 편이 나았으려나?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사회는 다수의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기에 개개인의 불행은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지 모른다.
처음부터 이 영화를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차인표가 나온 영화가 재미있었던 적도 없었고. 하지만 지난 달 말미를 기념하여 선택한 영화는 결국 '크로싱'이었다. 졸리와 맥어보이의 원티드를 원하기도 했고, 결국 그저께 본 쿵푸팬더를 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가벼운 영화들보다 볼만한 한국 영화 한 편을 우위에 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그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다.
영화는 고통 그 자체다. 영화평 중 "재미도 감동도 없는"이라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다.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들지만 이는 카타르시스도 아니고 누구나 영화를 보며 느낄 수밖에 없는 고통의 소산일 따름이기 때문이리라. 확실히 영화는 재미로 볼 것도 아니고, 감동보다는 분노만을 느끼게 만든다. 분단으로 이산 가족을 보지 못하는 아픔은 이미 60년이 다 된 일인데, 탈북자들도 상당수가 이산 가족이었다. 결국 차인표는 금방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달리 부인, 아들과 (생)이별을 한다. 많은 이별은 예정에도 없이 찾아오는 것이리라.
가족의 문제도 있지만 영화는 식량난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는 북한 정권을 정면으로 비난한다. 북한 국경의 경비병은 돈만 주면 편하게 두만강을 왕복하게 허용하지만 무임도강하는 생계형 도피자에게 기꺼이 개머리판, 총알 세례를 가한다. 중국으로 도망치다 걸리면 정신개조를 위해 수용소에서 무임금 노동력으로 소모되다 죽을 뿐이다. 구더기가 득실대는 상처를 안고 죽은 미선의 이미지는 말문을 막히게 할 뿐이다.
영화의 비판적 시각은 북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도적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탈북자 지원 사업에 대한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을 더 많이 구하기 위해 개인이 아닌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단체가 필요함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들은 관료제의 무뚝뚝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남한이 아니라 병든 아내와 아들이 있는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용수(차인표)의 기대는 간단히 무시된다.
기독교에 대한 영화의 시선은 약간 애매하다. 영화를 본 날 다른 이의 생각 궁금해 인터넷을 뒤진 결과 영화가 기독교에 지나치게 비판적이라 싫다는 반응들이 있었다. 나도 신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는 용수의 격렬한 반응을 보며 기독교계가 안 좋은 반응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엔딩 크레딧을 보니 이미 기독교계의 협조가 있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탈북자를 도운 것은 기독교계라는 기본 사실이 있기 때문일까. 종교의 이념 자체와 이를 사리사욕을 위해 악용하는 성직자, 교단의 문제는 별개로 둬야 하는데, 크로싱은 기독교 이념 자체를 지지하는 영화는 아니다.
크로싱은 수없이 많은 경계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살아가며 보통 주어진 틀 안에서 살아간다. 삶의 공간이건 신분의 문제이건 경계선을 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넘나드는 것을 일상으로 삼으면서 양 세계의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한다. 무당이나 성직자들도 그런 종류의 사람인데, 크로싱에서는 브로커라는 존재들이 해당된다. 용수의 한국행을 조장한 브로커는 사욕을 위해 용수를 속여서 이용했고, 준이의 한국행을 도운 브로커들은 돈을 받고 냉정하게 일을 처리할 뿐이지만 어린 준이의 절대적 불행에 동정하기도 한다.
이런 얘기들을 쓰려던 게 아니었는데 서론이 길어져서 본론에 충실할 수 없지만 제목에 충실한 내용은 아래 적어본다.
위에 브로커 얘기를 적긴 했는데 영화에서 수많은 경계를 넘는 것은 비로 나타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지상의 물리적, 심리적 경계와 상관없이 조용히 그리고 차갑게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씻어내린다. 눈물도 비에 대응하는 설정이다. 영화 말미의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물이었다. 경계들 때문에 헤어진 사람들은 경계를 넘어 원래 하나였던 사람과 만나지 못하게 되면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준이는 비를 좋아한다. 맑은 날이 아니라 궂은 날에 내리는 비를 좋아한다멸 결과는 뻔할지도 모른다. 비는 수해를 낳기도 하지만 가뭄을 해갈하기도 하니 이중적 장치이지만 준이가 비를 좋아한다는 설정은 결말의 파국을 예고한 것 같다.
백구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기른 마지막 개가 (이름까지) 백구여서인지 영화를 보며 반가우면서 안타까웠다. 부인과 아들까지 죽는 마당에 개라고 무사할리 없다. 북한의 식량난 때문에 백구는 영화 초반 준이네 식구의 지위에서 아침 밥상을 가득 채운 음식으로 변했다. 엔딩 부분의 가상의 행복한 삶 속에서도 백구는 빠질 수 없는 일원이었다. 백구의 죽음, 그것은 한 마리 개의 죽음 이상의 의미다. 이어지는 불행을 알리는 중요한 서막이었다. 만약 백구가 진돗개라면 애시당초 함경도에 있을 가능성 자체가 거의 없다. 백구는 북한의 현실의 일부라기보다 메타포로 사용된 설정이다.
마지막으로 축구를 보자. 크로스, 크로싱은 센터링이라는 잘못된 용어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축구에서 득점을 위한 중요한 기술이다. 대지를 가르듯 그라운드를 횡단하여 스트라이커의 머리와 다리로 전달되는 공의 아름다움...
심각한 영화 타인의 삶에서도 축구 장면이 스쳐가듯 나온다. 이렇게 축구는 평화로운 일상의 일부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으로 많은 영화에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용수는 축구 '선수'였고, 준이도 축구를 너무 좋아한다. 그리고 사진에도 나오지만 백구도 축구를 좋아한다. -_- 축구 선수라는 설정은 이상한 곳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바로 주중 독일 대사관에 북한 사람들이 몰려 들어갈 때 축구 선수라는 경력이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용수는 북한을 떠나며 아내의 약과 아들의 축구화, 축구공을 사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중국에서 번 돈은 잃어버렸지만 남한에서 번 돈은 고스란히 모아 나이키 축구공을 사기에 이른다. 하지만 공을 받을 준이는 북한도 아닌 몽골의 사막이라는 타향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용수는 아들에게 크로스를 할 기회도 얻지 못한 것이다.
절대 고통의 영화 크로싱. 하지만 이런 현실이 멀지 않은 곳에, 소위 같은 민족에게 일어나는 일임에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이 고통을 가중시킨다. 영화 포스터는 "그 날, 우리는 살기 위해 헤어졌습니다"라고 말한다. 살기 위한 몸부림은 모든 생명의 본능이다. 하지만 살기 위한 헤어짐은 용수의 삶과 다른 가족의 죽음으로 결론이 났으니 용수는 그냥 북한에 있으면서 온 가족의 가난한 삶을 지켜보는 편이 나았으려나?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사회는 다수의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기에 개개인의 불행은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지 모른다.
2008년 6월 29일 일요일
콜레라 시대의 사랑
(...) 이제는 나이도 들고 성질도 온순해졌지만, 두 사람은 가능하면 그 사건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간신히 치유된 상처는 마치 어제 입은 상처처럼 다시 피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1권 p.57.
(...) 그녀의 편지는 그 어떤 감정의 위험도 피했으며, 단지 항해 일지를 쓰듯이 성실하게 자신의 일상적인 일들을 이야기하는데 그쳤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 그 편지들은 심심풀이용으로, 자기 손은 불에 넣지 않으면서 뜨거운 불길을 유지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반면에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한 줄 한 줄마다 자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1권 p.124.
"부자라니, 난 그저 돈 많은 가난한 사람일 뿐이오. 그건 다른 것이오."
2권. p.10.
(...) 고독한 사냥꾼으로서 먹이를 낚으면서 너무나 많은 과부들을 알게 된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세상은 행복한 과부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 젊은 신부의 수많은 꿈 중의 하나에 불과한 안정을 대가로 자신의 성(姓)뿐만 아니라 개성까지도 포기한 시절 이후, 다시금 자신이 자유 의지의 주인이 되었다는 의식을 갖곤 했다. 오직 그 여자들만이 자신이 미친 듯이 사랑했고 또한 아마도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 하지만 죽는 날까지 젖을 주고 더러워진 기저귀를 갈아주며, 아침마다 술책을 사용하여 기분 좋게 해주어야 했던 남자가 자신의 사주를 받아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을 본 여자들은 그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삶이었다. 사랑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별개의 것, 즉 또 다른 삶이었다.
2권. pp.73~74.
사실대로 말하자면 후베날 우르비노의 구혼은 결코 사랑의 이름으로 제안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제안했다고 하기엔 이상한 세속적인 재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즉 사회적, 경제적 안정과 질서, 행복, 눈앞의 숫자 등 모두 더하면 사랑처럼 보일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거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만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었고, 이런 의문은 그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녀 역시 사랑이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2권. p.78.
그러자 모든 의심이 사라졌고, 이성이 가장 점잖은 행동이라고 지시하는 바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행할 수 있었다. 페르미나 다사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기억을 즉시 수세미로 문질러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고, 자신의 기억 속에 그가 차지하고 있었던 자리에 양귀비의 초원을 꽃 피웠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것은 마지막으로 평소보다 더 깊은 한숨을 쉬며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 올케들이 수도원의 감옥에서 산 채로 썩지 않은 것은 이미 자신 안에 그런 감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2권. p.80.
(...) 페르미나 다사가 자신이 죽음의 함정에 빠져 있다고 잘못을 돌린 사람은 (...) 바로 남편이었다. 직업적인 권위와 세속적인 매력 뒤에 감춰진 본모습이 구원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그는 가문의 사회적 무게 덕택에 대담해진 가련한 악마였던 것이다.
2권. p.81.
"아주 특별한 종류의 콜레라임에 틀림없군. 시체들의 목덜미에 하나같이 확인 사살한 총구멍이 나 있으니 말이야."
2권. p.118.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눈물 모양의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서 더욱 빛나고 있었다. 앨리스가 다시 한 번 거울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2권. p.120.
두 사람은 서로 그대로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니까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라 손자뻘 정도 되는 이미 사라진 두 젊은 남녀의 덧없는 기억 이외에는 공통점이 아무 것도 없는, 죽음의 습격만을 기다리고 있는 두 늙은 남녀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2권. p. 256.
"빌어먹을. 모두 지옥이나 가라고 해. 우리 과부들이 좋은 게 있다면, 우리에게 명령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야."
2권. p.288.
(...) 그런 다음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그의 꺾을 수 없는 힘, 그리고 용감무쌍한 사랑을 보면서 한계가 없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일지도 모른다는 때늦은 의구심에 압도되었다.
선장이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2권. p. 331.
1권 p.57.
(...) 그녀의 편지는 그 어떤 감정의 위험도 피했으며, 단지 항해 일지를 쓰듯이 성실하게 자신의 일상적인 일들을 이야기하는데 그쳤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 그 편지들은 심심풀이용으로, 자기 손은 불에 넣지 않으면서 뜨거운 불길을 유지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반면에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한 줄 한 줄마다 자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1권 p.124.
"부자라니, 난 그저 돈 많은 가난한 사람일 뿐이오. 그건 다른 것이오."
2권. p.10.
(...) 고독한 사냥꾼으로서 먹이를 낚으면서 너무나 많은 과부들을 알게 된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세상은 행복한 과부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 젊은 신부의 수많은 꿈 중의 하나에 불과한 안정을 대가로 자신의 성(姓)뿐만 아니라 개성까지도 포기한 시절 이후, 다시금 자신이 자유 의지의 주인이 되었다는 의식을 갖곤 했다. 오직 그 여자들만이 자신이 미친 듯이 사랑했고 또한 아마도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 하지만 죽는 날까지 젖을 주고 더러워진 기저귀를 갈아주며, 아침마다 술책을 사용하여 기분 좋게 해주어야 했던 남자가 자신의 사주를 받아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을 본 여자들은 그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삶이었다. 사랑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별개의 것, 즉 또 다른 삶이었다.
2권. pp.73~74.
사실대로 말하자면 후베날 우르비노의 구혼은 결코 사랑의 이름으로 제안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제안했다고 하기엔 이상한 세속적인 재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즉 사회적, 경제적 안정과 질서, 행복, 눈앞의 숫자 등 모두 더하면 사랑처럼 보일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거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만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었고, 이런 의문은 그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녀 역시 사랑이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2권. p.78.
그러자 모든 의심이 사라졌고, 이성이 가장 점잖은 행동이라고 지시하는 바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행할 수 있었다. 페르미나 다사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기억을 즉시 수세미로 문질러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고, 자신의 기억 속에 그가 차지하고 있었던 자리에 양귀비의 초원을 꽃 피웠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것은 마지막으로 평소보다 더 깊은 한숨을 쉬며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 올케들이 수도원의 감옥에서 산 채로 썩지 않은 것은 이미 자신 안에 그런 감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2권. p.80.
(...) 페르미나 다사가 자신이 죽음의 함정에 빠져 있다고 잘못을 돌린 사람은 (...) 바로 남편이었다. 직업적인 권위와 세속적인 매력 뒤에 감춰진 본모습이 구원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그는 가문의 사회적 무게 덕택에 대담해진 가련한 악마였던 것이다.
2권. p.81.
"아주 특별한 종류의 콜레라임에 틀림없군. 시체들의 목덜미에 하나같이 확인 사살한 총구멍이 나 있으니 말이야."
2권. p.118.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눈물 모양의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서 더욱 빛나고 있었다. 앨리스가 다시 한 번 거울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2권. p.120.
두 사람은 서로 그대로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니까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라 손자뻘 정도 되는 이미 사라진 두 젊은 남녀의 덧없는 기억 이외에는 공통점이 아무 것도 없는, 죽음의 습격만을 기다리고 있는 두 늙은 남녀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2권. p. 256.
"빌어먹을. 모두 지옥이나 가라고 해. 우리 과부들이 좋은 게 있다면, 우리에게 명령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야."
2권. p.288.
(...) 그런 다음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그의 꺾을 수 없는 힘, 그리고 용감무쌍한 사랑을 보면서 한계가 없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일지도 모른다는 때늦은 의구심에 압도되었다.
선장이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2권. p. 331.
2008년 6월 28일 토요일
장미의 이름
(...) 철학에 대한 증오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가짜 그리스도는 그 사자가 그랬듯이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잘 들어 두어라.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호르헤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리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장미의 이름(하) pp.638~639.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장미의 이름을 이제서야 아주 힘겹게 한 번 읽게 되었다. 교황과 황제 그리고 수도회간의 투쟁 부분은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만 책읽기를 힘들게 만든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다 읽고 나니 그 지루했던 부분들이 책 전체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부분들이었음이 느껴진다. 지루하고 유치찬란한 그 논쟁들은 그 과거는 물론 지금까지도 어느 사회에서나 되풀이되고 있고, 언제든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을 것이니...
묵시록의 상황이 그대로 연출되어 일곱 개의 나팔이 하나씩 울린다는 생각이 든다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할 필요도 없다. 이미 구원받을 자와 비참한 최후를 맞을 사람은 정해졌을 터이니. 행여 세계가 멸망하는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상징적 의미로) 일곱 개 나팔이 다 울릴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두번째 나팔부터 막도록 노력하면 어떨까.
장미의 이름(하) pp.638~639.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장미의 이름을 이제서야 아주 힘겹게 한 번 읽게 되었다. 교황과 황제 그리고 수도회간의 투쟁 부분은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만 책읽기를 힘들게 만든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다 읽고 나니 그 지루했던 부분들이 책 전체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부분들이었음이 느껴진다. 지루하고 유치찬란한 그 논쟁들은 그 과거는 물론 지금까지도 어느 사회에서나 되풀이되고 있고, 언제든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을 것이니...
묵시록의 상황이 그대로 연출되어 일곱 개의 나팔이 하나씩 울린다는 생각이 든다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할 필요도 없다. 이미 구원받을 자와 비참한 최후를 맞을 사람은 정해졌을 터이니. 행여 세계가 멸망하는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상징적 의미로) 일곱 개 나팔이 다 울릴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두번째 나팔부터 막도록 노력하면 어떨까.
2008년 6월 23일 월요일
Terminator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6년 생활을 마감하던 마지막 겨울 방학을 장식한 영화가 있었으니 터미네이터다. 시골 소년이었던 나는 중학생이 되어 원주 시내에서 좀 놀겠다는 기대도 있었고, 풋사랑의 재미를 느끼는 시절이기도 했다. 소위 청소년이 되려는 시기에 본 터미네이터는 당시의 상황과 어울려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랑하는 방법도 학습하는 것인지라 그 때까지는 영화의 키스 장면이 나와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시골 마을에서 키스는 커녕 어떤 농밀한 신체 접촉도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학급 친구들이 저학년 시절 이성에 대한 단순한 적대심을 버리고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하여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주고, 졸업 선물을 주고 받는 등 변화가 나타났다. 그래서인지 이전에 많은 로맨스 영화들을 봤겠지만 로맨스가 주된 내용이 아닌 터미네이터의 연애 장면이 오히려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터미네이터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시간축을 무시한 영화의 내용이었다. 존 코너의 아버지가 미래에서 날아왔다는 설정 때문에 애당초 존 코너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인지 궁금증이 생겼고, 마침 토요명화에서 방영한 터미네이터를 본 학급 친구와 그 이야기를 나눴으나 별 소득은 없었던 것 같다.
여하튼 터미네이터는 몸짱 아놀드가 돌아오겠다, 돌아왔다를 연발하며 3편까지 제작되었고, 최근 2, 3편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번에 볼 때 시간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를 주목했지만 대충 얼버무리기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3편은 어떤 블로그에서 본 대로 1, 2편의 패러디 영화의 성격이 강했다.
시간 이동은 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였다. 그러나 '잘못된' 과거를 바꾸겠다는 은밀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변경된 과거로 인해 현재가 통째로 바뀌는 위험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거나, 과거에서 다른 행동을 해도 결국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과로 이어지곤 했다. 터미네이터에서는 기계들이 인간 군대의 지도자를 제거하기 위해 과거로 인간형 병기를 보낸다는 설정이다. 미래 인간 군대에서도 대응하기 위한 사람과 기계 병기를 차례로 보내는데 결국 존 코너를 지켜낸다.
터미네이터에 대한 몇 가지 설명 방식들을 봤지만 납득하기는 힘들고, 지금 떠오르는 의문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기계들은 왜 존 코너 암살을 위한 터미네이터를 띄엄띄엄 보내나?
- 터미네이터1, 2, 3는 거의 10년씩의 시간 간격을 두고 제작되었다. 이런 제작 시기의 문제 때문에 10년 주기로 기계들이 과거로 투입되는 것은 이해할만하나 매번 업그레이드된 성능의 터미네이터를 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터미네이터 여러 대를 보내지도 않고, 더 자주 보내지도 않은 이유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3편에서 아놀드는 자신이 공장에서 양산되는 모델임을 밝히기도 했다.) 로봇과 인간의 전쟁이 몇 년 지속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로봇이 스스로 개발을 거듭해 진화된 병기를 양산했다면, 존 코너가 이끄는 인간이 한정된 자원과 재래식 무기로 어떻게 승리를 할 수 있는지도 납득하기 힘들다.
2. 2, 3편의 터미네이터는 어떻게 의복까지 함께 복원되는가?
- 2, 3편의 터미네이터들이 알몸으로 과거로 갔다가 처음 얻어입은 옷을 입은 상태로 매번 재생되는데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몇 번씩 총알로 벌집이 되는 터미네이터들이 그 때마다 옷까지 다 헤지면 또 누군가의 의복을 갈취해야하니 번거롭고, 단순히 의상 담당자가 귀찮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누드를 덜 보여줘서 심의 등급을 낮추거나, 막되먹은 기계라도 옷을 입혀서 관객의 눈을 편하게 해주기 위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3. 터미네이터는 왜 인간형인가?
- 이것은 얼핏 생각하는 것보다 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3편에서 기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순간을 보면 로봇들은 인간처럼 머리와 몸통이 있지만 다리 대신 바퀴가 달려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인간과 기계의 전투가 심화될 때를 보면 기계들은 보통 두 다리를 가진 인간형이다. 과연 두 다리를 가진 로봇이 가장 효율적일까? 기계들이 인간형인 것은 효율성이나 기계들의 진화의 산물이라기보다 기계와 인간의 대결을 역사상 지속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결의 또 다른 형태로 풍자한 것이 아닐까 싶다.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 매트릭스 등에서 꾸준히 인간 아닌 것이 인간과 같은 의지와 감정을 가지게 된다면 인간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들이 제기되어왔다. 순전히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나 인간의 신체가 노화, 사고, 병으로 망가졌을 때를 대비해 '만든' 복제인간의 존재는 어떻게 봐야 할까? 터미네이터는 스스로 기계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기에 인간이 되겠다고 하지는 않고 무게나 힘 등에서 인간과 확실히 차이가 나기에 문제가 덜 되지만 아일랜드에서처럼 복제인간들이 인권을 주장하고 나서면 외형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어 골치아픈 문제가 제기된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2편에서는 확실히 그리고 3편에서는 불분명하게 아놀드가 프로그램된 명령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을 통해 스스로를 버리는 모습이 나온다. 비록 아놀드는 자신은 죽음에 대한 관념이 없다고 하지만 2편의 자살신은 에일리언 시리즈에서 시고니 위버가 용광로에 뛰어들어 죽는 장면과 여러모로 유사해보인다.
이 시리즈에서 기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 매트릭스 시리즈에서처럼 인간을 동력원으로 착취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인간의 통제가 '싫은' 것인지, 기계가 아닌 존재들은 전부 없애겠다는 것인지, 그렇다면 에너지는 어떻게 얻으려고 했던 것인지, 의지가 있다면 기계들끼리의 권력 투쟁은 없었는지 등 설명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 3편 마지막에서는 스카이넷이 요즘 회자되는 집단 지성과 비슷한 것처럼 설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기계들의 '배후'나 다른 기계를 통제하는 메인 컴퓨터는 정말 없는지도 궁금한 점이다.
4. 시간 여행이 애당초 가능한 것인가?
- 이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시간이 시계에서 보는 가시적인 존재가 아님은 물론, 선후 관계가 항상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 정도만 말할 수 있으리라. 과거, 현재, 미래라는 분류의 불분명함. 불가능한 진보. 영원회귀...
2008년 6월 15일 일요일
토마토의 공포
매점에서 토마토가 다 팔려나가 대신 과자 한 봉지를 사고 말았다. 토마토에 대한 이 글은 쓴다고 생각한지 한참 지났지만 이제서야 대충이라도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쇠고기로 인해 촉발된 먹거리에 대한 걱정은 우리가 별 생각없이 섭취했던 온갖 음식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생쥐깡, 통조림의 온갖 이물질 등 눈에 보이는 것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걱정도 스멀스멀 자라났다.
그러는 와중에 미국에서는 살모넬라 토마토가 나타나 식중독을 일으키는 것이 큰 이슈가 되었다. 그나마 좋아하는 토마토인데 식중독이라니 믿을 거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우리' 토마토는 안전하다고 했겠고 나도 몇 개 먹었지만, 스스로를 신이 축복한 나라로 여기는 미국에서 왜 그리 위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지는 신만이 알 일인지 어떤지.
미국은 토마토의 위험을 이미 인지했는지 단지 상상력이 풍부해서인지 토마토가 식인을 하는 영화들을 두 편이나 만든 바 있다. 토마토 공격대, 토마토 대소동 2. 보진 않았지만 1988년에 만들어진 2편에는 무려 조지 클루니가 출연했단다.
스파이더윅 크로니클이라는 최근 영화를 보면 (정확하진 않지만 단순화해서) 괴물들을 퇴치하는데 토마토가 사용된다. 그래서 여기부터는 토마토에 어떤 신성한 의미가 부여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토마토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찾아보았지만 뾰족한 해답은 없었다. 다만 케찹이나 파스타 등 음식 재료로 널리 쓰이는 토마토가 처음부터 환영받는 먹거리는 아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초창기 미국의 청교도들은 토마토를 최음제로 여겨 기피했다고 한다.
스페인 발렌시아의 토마토 축제는 유명하고, 축제 기간 동안 엄청난 분량의 토마토가 놀잇감으로 사용되지만 이 축제 자체는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스파이더윅 크로니클에서 토마토가 사용되는 장면을 보면 붉은 점액이 퍼지는 이미지를 보게 되는데 토마토의 붉은 색이 피와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생명과 열정. 발렌시아에서 토마토를 던지며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감각을 되살리는 것일까.
http://en.wikipedia.org/wiki/Tomato
쇠고기로 인해 촉발된 먹거리에 대한 걱정은 우리가 별 생각없이 섭취했던 온갖 음식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생쥐깡, 통조림의 온갖 이물질 등 눈에 보이는 것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걱정도 스멀스멀 자라났다.
그러는 와중에 미국에서는 살모넬라 토마토가 나타나 식중독을 일으키는 것이 큰 이슈가 되었다. 그나마 좋아하는 토마토인데 식중독이라니 믿을 거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우리' 토마토는 안전하다고 했겠고 나도 몇 개 먹었지만, 스스로를 신이 축복한 나라로 여기는 미국에서 왜 그리 위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지는 신만이 알 일인지 어떤지.
미국은 토마토의 위험을 이미 인지했는지 단지 상상력이 풍부해서인지 토마토가 식인을 하는 영화들을 두 편이나 만든 바 있다. 토마토 공격대, 토마토 대소동 2. 보진 않았지만 1988년에 만들어진 2편에는 무려 조지 클루니가 출연했단다.
스파이더윅 크로니클이라는 최근 영화를 보면 (정확하진 않지만 단순화해서) 괴물들을 퇴치하는데 토마토가 사용된다. 그래서 여기부터는 토마토에 어떤 신성한 의미가 부여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토마토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찾아보았지만 뾰족한 해답은 없었다. 다만 케찹이나 파스타 등 음식 재료로 널리 쓰이는 토마토가 처음부터 환영받는 먹거리는 아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초창기 미국의 청교도들은 토마토를 최음제로 여겨 기피했다고 한다.
스페인 발렌시아의 토마토 축제는 유명하고, 축제 기간 동안 엄청난 분량의 토마토가 놀잇감으로 사용되지만 이 축제 자체는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스파이더윅 크로니클에서 토마토가 사용되는 장면을 보면 붉은 점액이 퍼지는 이미지를 보게 되는데 토마토의 붉은 색이 피와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생명과 열정. 발렌시아에서 토마토를 던지며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감각을 되살리는 것일까.
http://en.wikipedia.org/wiki/Tom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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