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20일 수요일

영화 곡성에 대한 말과 글을 보고

시네타운 나인틴의 곡성 편을 어제 들었다. 처음 알게된 김반장이라는 사람이 영화를 네 번 봤다면서 영화의 여러 수수께끼에 대해 해설했다. 과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럴 듯한 설명들이긴 했다.

영화를 보고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기왕 이런 내용들을 들은 김에 관련 리뷰를 검색하다보니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지난 달에 무려 두 시간에 걸쳐 곡성에 대해서만 깊은 분석을 한 인터넷 방송을 발견했다.

이동진의 글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그의 팟캐스트를 듣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브랜드가 많은 신뢰를 주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다. 영화 곡성은 그가 한국영화로는 몇 년만에 만점의 평점을 주면서 관객몰이를 한 측면도 있는 듯 하다.

두 시간짜리 영상은 이동진의 평론가로서의 능력을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어필하는 점은 그의 설명이 크게 어렵지 않다는 점일 것 같다. 영화평론은 어렵고 현학적인 글이 워낙 많아서 이렇게까지 써야하나 싶은 느낌을 많이 받는데 이 영상은, 아마 대중적인 타겟을 염두에 둔 영상이기에 더욱 그렇겠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별로 없다.

그는 신중을 기하는 차원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주장을 한 사람의 의견으로만 받아들여달라고 당부했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이동진은 하나의 텍스트를 해석함에 있어 창작자의 의도를 밝히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수용하는 독자,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도 중요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누가 최초인지 모르지만 김반장도 제기한 장모 귀신(가능)설을 염두에 둔 듯한 코멘트도 영상 막판에 나오긴 하는데 이동진의 해석은 거의 무난하다. 부제 양이삼의 이름을 성경 구절의 차용이라고 추측한 부분이나 일광이 살을 날리는 대목에 대한 해석, 예를 들어 흑백이 각각 어느 편인지와 누가 누구를 해하는지에 대해 설명은 영화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한 번 영화를 본지라 세세한 부분에 대한 남들의 해석은 그게 그랬었나, 그랬구나라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긴 하다.

일단 이동진 해석에서 여전한 의문들을 적어보고 싶다. 천우희가 연기한 무명이 신적인 존재인 점은 분명하다. 무명이라는 이름조차 시나리오 상의 이름이고 누가 그녀를 무명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이동진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무명은 이름이 없다는 뜻임이 거의 확실해보인다. 그는 이름 없음이 신적인 존재의 증거라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일본인 혹은 외지인도 이름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분명 이름이 있'었'다. 그는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물론 곡성에 사는 누구도 일본인을 그의 행정상의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그저 불길한 일본인, 외지인일 따름이다. 교묘하게도 곽도원이 연기한 종구가 일본인의 여권을 휴대폰으로 사진찍을 때 이름이 있어야 할 부분은 가려진다. 만약 여권에 이름이 없다면 종구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여권에 외지인이라고 적혀있을리도 만무하다. 아마 원래 시나리오대로 영화 종반부에 그 일본인이 아주 오래 전에 한국에 들어온 증거가 팩스로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다면 그의 이름이 밝혀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마도 감독은 쿠니무라 준의 존재를 이름 없는 '외지인'으로 신비하게 남겨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논리적으로 외지인은 신적 존재로 충분히 간주할 수 있다.

이동진이 말했는지 지금은 조금 헛갈리는데 쿠니무라 준이 계속 신적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는 해설이 있었다. 그는 도망치고 숨고 울기도 한다. 전에 씨네21 기사에서 지적하듯 시장에서 닭값을 두고 흥정도 한다. 만약 이 외지인이 사흘만에 죽은 후 부활하는데, 죽기 전에는 신성이 약하거나 아예 없는 존재였다면 어떨까. 사실 예수에 대한 해석도 이 대목이 결정적이긴 하다. 예수가 원래 유일한 하느님과 동격이었는지 아니면 인간이었다가 신이 되었는지(혹은 자신이 신 혹은 하느님의 아들임을 깨달았는지) 아니면 아예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일 뿐인지.

곡성이 예루살렘이고 외지인이 예수의 모티브를 차용했다면 인간이다가 신이 되는 설정도 가능하다. 인간 중 무언가 다른 인간, 카리스마가 있는 인간, 선지자prophet가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로 봐도 무방하다. 원래 조금 특별한 능력이 있던 인간이 더 높은 신적 존재로 승격되는 것은 고대의 상상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 외지인의 존재는 애매하긴 하다. 일본인인데 죽기 전의 행동을 보면 무당 일을 하기도 하고, 알몸(훈도시는 청불 등급으로 가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외지인과 한 편임을 보여주기 위해 일광까지 훈도시를 입고 만다)으로 산짐승을 날로 먹기도 한다. 그런데 이 무당의 모습이 이동진은 네팔 샤만을 나홍진이 직접 관찰하고 섞어 놓은 것 같다고 한다. 일본 무당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굿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외지인의 행동은 일본적인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인틴에서는 온갖 레퍼런스를 차용하되 그대로 도입하지 않고 자꾸 비트는 것이 나홍진의 의도라는 말을 들었다. 예수인줄 알았는데 악마였고, 무당이 아이를 살리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외지인과 한 편이었고, 바보처녀인줄 알았는데 마을의 수호신 혹은 자연이고 등등.

이런 비틀기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무너졌다는 혐의나 비판의 근거가 될 터이다. 이승훈pd는 나홍진 감독이 곡성을 코미디라고 규정한 것에 대해 분개하는 듯 했는데 나 감독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원전을 비틀다 못해 정반대의 대상으로까지 전환시킨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다. 패러디는 적당히 원작을 바꿔야하기 때문이다.

이동진의 말 중 기독교와 무속이라는 두 가지 종교(?)는 사실 아무 종교여도 무관했고 다만 한국 영화기에 한국인에 가장 친숙한 두 개를 차용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또한 이동진은 양이삼 부제가 외지인을 만나 악마를 보게 되는 절정의 순간에 대한 해석에서 부제가 동굴에 찾아갔기에 악마의 모습을 보인 것이지 다른 사람이 갔으면 다른 정체를 드러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외지인의 정체가 가변적이라면 외지인의 정체는 일본인 기반에 무속인이되 일본적이기도 네팔적이기도 한 의례를 행하고 예수처럼 비난받고 고난을 받아 처형당한 후 사흘 후에 부활하지만 결국 악마로 정체가 드러나기도 하는 혼종성이 정당화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압도적으로 많이 차용된 기독교 모티브를 감안한다면 이렇게 분명치 않은 정체는 상당한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기독교인의 분개를 살 것이 분명하다.

일광은 외지인과 한 편이라는 점이 분명하다고 인정된다. 그런데 언제부터 둘이 한 편이 된 것일까? 영화상에서는 그 점이 분명치 않다. 둘은 공통적으로 훈도시를 입고, 미놀타 카메라로 희생자들의 사진을 찍는 행동을 하며 무당이다. 이동진은 일광이라는 이름이 일본의 빛이라는 뜻이라고까지 해석했다.

그런데 무당이라고 하면 구한말 개화기에 타파해야할 구습, 악습의 대표적인 경우였다. 서양에서 일본을 경유해 들어온 소위 서구 문명의 기준에 비춰서 그러했다. 여전히 무당은 한국인의 삶 속에 살아있는 존재들이기만 대개는 케이블 방송의 싸구려 방송 소재로나 사용하는 미신으로 여기고 있다.

어쨌거나 무당이라면 한국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이런 무당이 일본에서 온 악마를 추종하는 것은 어찌 보면 상당히 냉소적인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어제 읽은 곡성에 대한 몇 개의 영어 리뷰에서는 일제 식민지의 과거가 몇 번 언급되었다. 영미권 기자/비평가의 눈에는 한국의 식민지 과거가 영화에 개입되었다고 보는 모양인데 이 점에 대해 상세한 분석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동진은 무당에 대해 설명하며 사실 무당들이 토속적 귀신만 섬기는 게 아니라 현대에 오면 맥아더도 신으로 섬기고 또 누구인지 기억이 안나지만 하여간 서구의 누군가를 신으로 모시는 포용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무속의 맥아더 숭배는 잘 알려진 바이고, 현대 이전에는 중국의 귀신들도 모셨으니, 일본 귀신이 용하다면 못 모실 일도 없을 터이다. 이렇게까지 하여 일광이 외지인과 한 편이 된 것을 이해는 하더라도 어떤 계기로 둘이 만났는가는 설명되지 않는다. 김반장의 해석을 보면 마을의 다른 집들에서 살인 사건이 날 때마다 할매들이 무당을 불렀고 그 때마다 일광이 오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을 내놨는데 그렇다면 해명이 될 듯도 한데 완벽한 이론은 아닌 것 같다.

이동진은 두 시간의 긴 해석을 하며 결국 이 영화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에 대한 것이라고 정리해냈다. 종교라는 것은 세상의 악, 개인의 불행에 대한 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답은무명이 집으로 가려는 종구를 붙잡으며 비논리적으로 내뱉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답은 답이라는 거다. 기실 기독교에서도 믿지 못할 것을 일단 믿어야한다는 거니 종교는 원래 그런 속성이 있다고도 하겠다. 하지만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세상의 질서인 코스모스가 있고, 이는 신이 이미 정해놓은 바인데 여기에 우연이라는 카오스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공포에 떨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는 카오스마저도 자신들의 논리로 다 설명해낼 수 있다. 부제는 악마가 마을 불행의 원인임을 확인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고 겁이 많은 종구는 딸이 왜 피부병이 생기고 욕을 하고 칼을 휘두르는지 끝내 모른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물론 종구가 죽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긴 하다).

평범한 인간들은 우연히 닥치는 불행에 무력하게 무너진다. 이동진이 정리하기도 했고 나홍진이 직접 말하기도 했지만 감독은 세상의 어떤 범죄들은 인간이 저지른다고 보기에 너무 처참하고 이해불가하기 때문에 신적 존재, 아마도 악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행할 수 없는 악행이 있다는 것이다. 악령에 사로잡힌 인간이나 악마 자체가 인간 사회에 있다고 본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평범한 사람이 이런 악마를 마주치면 낚여서 버둥대다 당하는 수밖에 없다는 체념적인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편 감독은 종구를 위로하려고 했다, 최선을 다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다독인다고 하는데 얼마나 위안을 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최근 IS가 일으키는 무차별 테러는 폭탄 조끼가 아니라 대형 트럭으로 사람을 쳐서 80명을 넘게 죽이는, GTA에서도 차마 하기 힘든 형태로까지 나오고 있다. 이 희생자들의 가족은 악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악마는 꼬리가 있지도 뿔이 달리지도 않았다. 분명한 종교적, 정치적 의도에 의해 일어난 테러이고, 근원을 따지면 서구의 책임도 적지 않다. 곡성의 하이브리드 악마는 구마 사제도 없애지 못할 것 같은데, 인간 세계의 눈에 보이는 악마적 존재라고 해서 처치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선악의 구분 자체가 작위적이기도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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