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9일 수요일

곡성 (2016)

숱한 화제를 낳은 영화라는 소문만 듣고 있다가 오늘 보게 되었다. 주변인의 말로는 해석이 분분한 이 영화에 대한 설명 중 외계인 이야기도 있다던데 아무리 생각해도 외계인이 어떻게 나온 해석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기독교 역사에 관심을 갖던 터라 영화 도입부부터 누가복음의 구절을 인용한 영화의 스탠스가 도전적으로 다가왔다. 과연 기독교를 어떻게 영화에 버무린 것일까.

그러나 감독 인터뷰에서 드러난 대로 곡성이 예루살렘이고 외지인인 일본인이 예수처럼 왔다가 죽고 부활하는 설정이긴 한데 외지인은 자신의 정체가 결국 악마임을 확연히 드러내버린다. 인간들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신적 존재인 예수가 악마적인 야비한 미소와 시커먼 얼굴을 드러낼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이것은 기독교적 구도를 차용했지만 결코 기독교적인 내용은 아니다.

악마는 자신을 해치러온 부제가 너는 누구냐며 정체를 묻자, 너는 이미 내가 악마라고 확신하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악마는 영화 중반에서도 자신의 집을 찾아온 경찰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도 어차피 안 믿을 거라고 말했다. 마치 이미 어떤 확신을 갖고 있는 이상 자신이 하느님과 교신하는 예수라고 해도 너는 안 믿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듯 하기도 했다. 영화는 확실히 반복적으로 뜬 소문을 믿는 나약한 인간들의 심리, 신념을 문제시하고 있다.

일종의 반전처럼 일본인이 한 때 곡성의 문제의 근원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선한 무당인 것처럼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가 이미 그렇지 않은 이상 일본인이 악마라는 점을 의심할 수는 없다.

인터뷰에 따르면 나홍진 감독이 이 영화에서 신적 존재로 위치시킨 캐릭터는 천우희가 연기한 '무명'이라는 여성이다. 사람이 아니라 영적 존재라는 것인데 누가복음의 구절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유령(혹은 그냥 영)은 육신이 없지만 자신은 육신이 있다고 말하며 의심하지 말라고 한다. 무명이 육신이 없는 듯 나오는 장면이 있다고 누군가 적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딱히 알아채지는 못 했다. 오히려 악마인 외지인은 자신의 육체성을 부제에게 확인시켰다.

어찌되었건 씨네21의 칼럼에서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예수 혹은 그에 필적한 악마라는 존재, 혹은 그와 별개로 혹은 다른 종교적 맥락에서 신적 존재로서 무명이 등장한다고 할 때 이들의 존재적 위치는 너무 일관성이 없다. 순전히 관객을 헛갈리게 만들려다 실수를 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나홍진 감독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하필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질문을 한다고 할 때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영화의 논리를 볼 때 악의 근원은 악마다. 씨네21 칼럼의 내용에 비춰볼 때 감독의 전작인 추격자와 황해에도 역시 악마가 등장했다고 한다. 그 대척점으로서 위치한 무명은 마을 사람들을 지키려고 하고, 조언을 해주기도 하지만 방관한다. 나홍진은 신이 개입할 수는 없다고 방관해야 한다는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일광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황정민이 분한 무당은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애초 시나리오 상으로는 분명히 악마와 한 편이다. 둘이 같은 차에 타는 장면이 원래 시나리오에 있고 촬영도 했지만 뺐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 왜 한 편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영화 장면으로만 보면 둘 모두 피해자들의 사진을 찍는 습관이 있어서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고, 갈등 구조상 무명이 악마, 일광과 모두 대립하고 있다는 정도가 아니었던가?

다시 악마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기독교 신학의 하나의 해석으로서 인간 예수가 신적 존재로 고양되었다는 입장과 유사하게 영화 속 악마도 아마도 무당이었던 인간이었다가 점점 더 힘이 센 악마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면 영화에서 일본인의 모습은 너무 이상하다. 시나리오 상 일본인은 신원조회 결과 수십 년 전에 죽었어야 할 인물이라는 점이 증명된다고 하니 영화 속 모습이 어떤 평범한 인간이 악마가 들어왔건 무슨 이유가 되었건 더 센 악마로 변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미 악마인데 수십 년 전 일본인의 외양을 하고 돌아다니며 시장에서 한국말도 못 해서 애처로운 얼굴로 닭값을 흥정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일광이 굿을 할 때 말뚝? 정?을 박을 때 죽을 것처럼 구는 것은 또 무언가. 기독교적 악마를 한국 무당이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인가? 보통 엑소시즘, 구마는 가톨릭 사제가 해야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새로운 종교적 해석인가?

영화를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검은 사제다. 오컬트라는 장르적 요소도 있고, 신부와 부제가 등장하기도 하고 돼지 때문이기도 하다. 검은 사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에 등장하는 마가복음의 구절,악마(악령)들이 돼지 속으로 들어갔다는 그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어린 돼지 속에 악마를 가둔다. 곡성은 영화 초반에 스치듯 돼지 한 마리를 카메라로 잡는데 확언할 수는 없지만 어떤 연관이 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나홍진 감독은 주인공인 평범하고 그저 아픈 딸을 구하는 일념 하에 살인도 불사하는 한 아버지가 딸이 미쳤건 악마에 씌어서건 엄마와 외할머니를 죽이는 걸 막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 정도 했으면 최선을 다 했다, 나머지는 인간이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사회의 상처입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힘빠지게 만드는 역설적인 이야기 같기도 하다.

악마, 귀신, 무당 같은 것들을 그저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한 은유로서 받아들이면 될까? 일제 식민지적 유산의 악마성, 치명성일까? 그저 독버섯이 문제인데 소문에 현혹된 사람들이 괜시리 종교적 장치들에 달려든 것이 오히려 문제일까? 그런 식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감독이 의도하고 그려낸 영화 내의 논리와는 다르다. 작품이 일단 창작자의 손을 떠나면 더 이상 창작자만의 것이 아니기도 하니 마음껏 해석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무섭다는 평들 때문에 잔혹한 장면이 나올까 괜히 겁먹고 긴장하다가 그렇게 잔인하지는 않아 안도하기도 했다. 다시 보거나 더 생각해보거나 해야겠지만 떡밥이 많은 것에 비해 영화의 영양가가 높은 것인가는 현재로서는 회의적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