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처음 감상 후의 날 것의 생각을 적고 이어서 리뷰, 리캡들을 참고한 내용을 적어보겠다. 에피소드의 시작은 좋은 집에서 즐겁게 사는 듯한 제임스 델로스 회장의 일상이 펼쳐진다. 이어서 윌리엄이 위스키를 들고 들어온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데 이어서 밝혀지지만 델로스는 마치 웨스트월드의 일반적인 호스트처럼 같은 대사를 반복한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나온대로 델로스 회장은 이미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의 마음은 어떤 식인지 몰라도 로봇의 몸 속에 이식되었다. 델로스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님은 일찍 눈치챌 수 있는 편이었다.
엘시의 재등장은 놀라웠지만 지난 편에서 크래독 소령을 죽이지 않고 4편에서 한 번 더 잘 써먹은 걸 보면 영화와 달리 긴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드라마 시리즈에서 하나의 캐릭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된다. 엘시 덕에 버나드는 손쉽게 머릿 속에 액체를 가득 채울 수 있었고, 다시 건강해졌다.
깜짝 요소 중 하나는 지난 번에 식민지 인도에서 호랑이를 피해 탈출한 젊은 여성이 윌리엄의 딸이라는 설정이다. 윌리엄과 델로스의 대화에서 자꾸 가족이 언급되었고, 윌리엄의 딸이 똑똑한 아이라는 대사가 나오길래 윌리엄의 딸이 등장하겠구나 싶었지만 마지막 장면을 보기 전까지 그 여성이 윌리엄의 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 했다.
돌로레스가 나오지 않은 점도 독특했다. 그녀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리뷰들은 대체로 리사 조이의 감독 데뷔작인 이번 에피소드에 대해 호평을 했다. 크레딧을 볼 때마다 의심을 하긴 했지만 이 시리즈의 작가인 리사 조이는 조내던 놀란의 아내였다. 많은 이들이 리사 조이가 이 시리즈의 감독을 더 많이 맡아야 한다고 평가했다.
로봇 델로스는 생각보다 많은 함의가 있는 존재였다. 로봇 델로스의 공간은 윌리엄이 은밀한 곳에 만들어서 관리할 정도로 특별한 장소였다. 인간으로서 죽은 이후에도 마음을 호스트의 몸에 이식하여 영원히 살겠다는 부자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곳이었다. 잘 눈치채지 못했지만 로봇의 몸에서 영생을 바란 것은 명백히 델로스 자신이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기술력이 아직 불완전하여 인간의 마음이 로봇의 몸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 한 형편이었다.
즉 웨스트월드를 비롯한 델로스 가문의 파크들은 인간들이 마음껏 욕망을 발산하는 오락의 장소라는 1차적 차원 뒤에서 손님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자본화하려는 윌리엄과 델로스 사의 욕망이 있었고 심지어 안드로이드 기술을 이용해 유한한 삶, 인간의 굴레를 넘어서려는 욕망까지 얽혀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윌리엄이 말하듯 델로스 같은 인간은 이렇게 애써서 더 살게 만들 가치가 없는 존재인지 모른다.
버나드는 비밀의 장소에서 델로스 회장 외에 그런 인간과 로봇의 혼종이 하나 더 있었다는 점을 알아채는데 그게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포드 박사라는 말도 있고, 늙은 윌리엄 혹은 에밀리/그레이스라는 설도 제기되었다.
배너티 페어에 게시된 관련 글은 이번 에피소드가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라는 작품에 크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리사 조이가 이미 밝힌 내용이라고 하는데 그 영화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더 적지는 못하겠다.
델로스 회장이 있던 실험실이자 거주 공간의 세팅은 순환성의 상징을 매우 노골적으로 보여줬다. 둥근 레코드판, 둥근 바퀴는 물론 공간 자체가 원형이었다. 이 순환성의 공간에서 델로스는 대사마저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 에러를 내며 망가질 뿐이지만 원래의 목적은 두 개의 원이 접하여 만들어지는 팔자(8)형의 무한이다. 하지만 유한하게 만들어진 대신 자신의 복제물을 자손의 형태로 남기며 생명을 이어가는 인간의 굴레를 벗어난 인간은 대체 무엇인가? 넥플릭스의 얼터드 카본은 유사한 테마의 영화, 드라마 중 하나의 극단을 보여준 바 있다. 드라마 오프닝에서도 무한의 형상을 노골적으로 제시하는데, 이 드라마에서 인간의 마음은 계속해서 몸을 바꿔가며 영생을 이어가게 된다. 그래서 아이 상태에서 원래의 신체를 잃은 다케시는 갑자기 어른 몸에 들어가는데 그러고도 성인 남녀의 사랑을 이해하는 등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설정으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얼터드 카본의 사회가 아니라 웨스트월드 단계에서도 이미 누가 인간인지 알 수 없음은(물론 비로봇으로서의 인간이 항상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철학은 인간이라는 자체로 엄청난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 같긴 하다) 충분히 보는 이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