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 30일 수요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화려한 캐스팅과 믿을만한 감독이 만든 놈, 놈, 놈. 칸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후 2008년 7월 드디어 국내에서 개봉했다. 호의적인 평가가 많지만 별로라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어제 영화를 보기 직전 내 주변 사람마저 영화를 보며 잠깐 졸았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나는 배우와 감독만 믿고 영화평, 영화 정보는 일체 보지 않은 채 관람을 했다.

주인공은 송강호?

영화가 시작하고 조금 후 하늘에서 새가 한 마리 날고 옆에 송강호라는 이름이 나왔다. 정우성, 이병헌 이름이 나왔던가 싶었다. 영화 제목은 분명 '좋은 놈', '나쁜 놈'에 이어 '이상한 놈'이 나오는데. 조금 후 다른 배우들의 이름이 나온다. 영화는 세 명 배우의 쓰리톱 체제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송강호야말로 주인공인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씨네21의 김지운 감독 인터뷰를 보니 그런 생각이 더 강해지게 된다.

'멋'의 기준은 개인차가 있겠으나, 언제나 홀홀단신으로 그야말로 웨스턴에서나 나오는 복장으로 장총을 정확하게 쏴대는 정우성은 멋있는 놈이다. 이병헌은 잔인한 캐릭터지만 총, 칼을 가리지 않고 최고의 기술을 선보인다는 측면에서 멋있다. 반면 송강호는 이전 영화들의 역할과 유사하게 이번에도 그다지 뛰어난 재능은 없으면서 실수를 연발하여 관객의 웃음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태구 역할을 맡은 송강호는 이상하고 웃기는 놈이지만 멋있는 놈은 아니다.

김지운 감독은 영화에 대한 많은 기대와 실망감에 대해 오락 영화로 봐달라는 주문을 했다. 오락 영화는 재미있어야 한다. 스펙터클이건 액션이건 코미디건. 이병헌이 멋있지만 창이 역할이 전면에 나섰다면 영화는 잔혹하게 흘렀을 것이다. 정우성도 멋있지만 이 친구는 당체 무슨 동기로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다. 원한 관계가 원래 있었는데 영화에서는 뺐다고 하고, 영화에서 독립군과 약간의 연결점이 있고 막판 일본군 살해 장면이 있어 애국심이라는 단서는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런 동기는 너무 미미해서 마지막까지 봐도 정우성도 꽤 이상한 놈으로 비춰진다. 그러기에 영화의 재미를 유지하는 상당 부분은 송강호가 이끌어야했고 이점으로만도 그가 진정한 주인공의 자격을 갖췄으리라.

영화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캐릭터가 얼추 딱 정립된 것처럼 보이면서도 캐릭터의 통일성이 불안하기 그지없다. 좋은 놈은 이상하고, 나쁜 놈은 좋았던 시절이 있는 것 같고, 이상한 놈은 좋은 면이 꽤 많지만 예전에는 유례없는 악한이었던 것 같다. 손가락 귀신에 얽힌 이병헌과 송강호의 관계는 수수께끼를 던진다. 이병헌은 뛰어난 칼 솜씨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을 자르지 못해 칼 탓만 하고 있었다. 과거 자신이 당했던 기억이 행동을 저지했으리라.

영화 막판에 밝혀지는 사실들은 송강호의 존재를 더 알 수 없게, 더 이상한 놈으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것 같다. 영화에 나타나지 않은 거대한 송강호의 실체가 있으리라는 상상만 할 뿐. 김지운 감독이 어떤 단서를 숨겨놨는지는 영화를 다시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감독의 설명을 들어보면 송강호야말로 나라잃은 민족의 잡초같은 삶을 대변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욕망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삶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연이지만 보물 지도를 획득해서 간직하고, 보물을 찾으면 어떻게 운반할지에 대한 고민도 없이 혼자서 돌진하고, 보물을 찾아봤자 하고 싶은 게 집 짓고 가축 기르는 것 밖에 없단다. 방향성을 잃은 민족의 이상할 수밖에 없는 삶?

영화의 내러티브가 부족함은 감독도 인정하는 바인데 보물지도의 행방을 아는 집단이 어찌 그리 많은지 모르겠고, 보물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던 것은 일본군밖에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석유를 보고 실망에 잠긴 송강호의 반응은 알 수 없기에 매혹적인 목표에 대한 단순하지만 질긴 욕망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 같다. 창이의 다이아를 챙긴 태구는 영화 막판 또 다시 무엇인가를 향해 질주한다. 질주의 끝은 없을 것이다.




세 주인공의 복장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다. 가장 당하는 부분이 많은 송강호는 흐트러진 옷차림을 계속해서 교정하고 재생시킨다. 밧줄타기, 마상 총격을 일상으로 삼는 정우성이 모자를 항상 쓰고 있는 것도 희한하다. 옷으로 만들어내는 캐릭터. 캐릭터의 성격을 좋은, 나쁜, 이상한 놈으로 유지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싸우는 마당에서도 그들은 복장을 잘 갖춰야했다.


-영화에 들어가기 전 인터뷰에서 장르를 먼저 생각하고 이야기를 선택하는 영화는 <놈놈놈>이 마지막이라고 했잖나. 그때 장르를 선택한다는 것은 모종의 이야기와 주제도 같이 선택한다는 것을 포함한다고 말한 것 같다. 당시 웨스턴이라는 장르에 관해서는 시각적인 지점을 많이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기에 웨스턴이라는 장르에서 비롯된 이야기와 주제가 뭐였다고 생각하나.

=그때도 말했지만 웨스턴은 스페인 여행을 하다가 떠올린 것이다. 어릴 때부터 웨스턴을 만들고 싶다는 영화적 로망은 있었는데, 그런 벌판을 보니 일종의 해방감이나 막 내달리고 싶은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저 멀리에 뭐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마구 내달리고자 하는. 영화 안에도 그런 대사가 있지만, 꿈이나 욕망, 집착을 갖고 뭔가를 쫓아갈 때 그것을 또 쫓아오는 인생의 무리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집착이나 욕망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이런 광활한 대평원을 배경으로 웨스턴영화 안에서 보여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뭔가를 쫓아갔다가 그것을 보고 다시 어떤 다른 두려움과 공포가 쫓아와서 다시 거기서 벗어나 다시 무언가를 쫓아가는…. 인생은 이런 추격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엔딩의 대추격전에 인생의 카오스와 혼란과 아비규환을 집어넣으려 했던 것이다. 일제시대 한반도에서 쫓겨난 선조들도 만주라는 대륙을 봤을 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로또당첨을 바라는 식으로 그 공간에 뛰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태구라는 인물도 이를테면 알량한 로또 번호를 받은 건데 이게 맞는지 안 맞는지 끝까지 가서 확인해보고 싶어하는 거다. 로또나 지도나 한낱 종잇조각 아니냐.

-그런 추격전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구성해나갔나.

= 내가 영화를 만들 때는 어떤 이미지, 영화적 순간들을 가장 우위에 두고 거꾸로 만들어간다. 여기에 이르려면 무엇을 거쳐야 하나 하면서 거꾸로. 단점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놈놈놈>은 결국 마지막에 대평원을 달리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다. 물론 이야기를 직조하는 과정이 부실하다고 지적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내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나는 이야기가 부실하다는 부분보다는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성취하지 못했던 부분을 이야기하면 더 재밌지 않을까,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면서도 작은 영화에 스펙터클이 없는 게 큰 하자가 되지 않는 것처럼 이런 오락영화에서 이야기가 탄탄하면 더 좋겠지만 내러티브의 부재가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했던 것이다.

-그런 액션에서 추구했던 스타일이 있었나.

=한국에서 성취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우리가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귀시장은 사람들이 결과물만 보니까 쉽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반 헬싱>이나 <스파이더 맨>에서는 다 와이어캠으로 찍은 것이잖나. 그런데 우리는 와이어를 매단 사람들이 직접 했으니까. 그러니까 슈퍼크레인이라든가 와이어캠이라든가 도기캠이 해야 할 것들을 슈퍼맨, 와이어맨, 도기맨이 했다. (웃음) 이게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일인가. 여러 재밌는 장면이 많은데, 지붕 위의 도원을 찍으면서 아래로 뛰어내리니까 카메라도 같이 뛰어내리고 다시 아래서 창이를 잡으면서 뒤로 빠지는 식의 촬영은 <스파이더 맨>에서도 없었을 거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이렇게 만들어낸 것은 어떤 영화에서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귀시장신과 대평원은.

=도원은 전문가이기 때문에 멀리서 모든 것을 파악하는 캐릭터다. 태구처럼 눈앞에 보이는 것을 치고 가는 게 아니라 그가 세력 분포를 파악한 뒤 하나씩 잡아가는 전문가스러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공중으로 올라가야 했다. 도원은 도르레 장치로 위에 올라가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수의 열세를 극복해나간다. 도원의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서 수직과 하강의 동선을 짰던 거다. 대평원은 아까 말했듯 욕망의 집합체, 카오스적인 상황을 정신없이 보여주기 위해 대폭발을 시켰던 것이다.

김지운 감독 씨네21 인터뷰
http://movie.naver.com/movie/mzine/read.nhn?office_id=140&article_id=0000011614

2008년 7월 27일 일요일

묘지

택시는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서울의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붉은 십자가들이 희고 거대한 묘역을 이루며 빛나고 있었다.

-이장욱, 고백의 제왕, 창비 2008 여름호.

소설 속에도 나오지만 기묘하게 불쾌해지고 불콰해져야 받아들일만한 이야기다. 도시의 밤 거리를 걸으면 유난히 십자가들이 눈에 띈다. 기독교인이 저렇게 많은 걸까, 저 많은 교회의 목사님들이 다 밥 먹고 살 정도로 교인이 충분한 건가 괜한 걱정을 하기도 했다.

컴컴한 밤 거리의 십자가들에서 묘지를 연상한 작가의 시선이 새로웠다. 하지만 사진의 출처인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면 외국인도 십자가를 보며 공동묘지를 연상했다고 한다. 사람을 못 박아 죽였으니 십자가 자체가 죽음이고, 서양의 묘지에서 십자가를 흔히 볼 수 있으니 서양인의 시각에선 곧바로 묘지를 연상했으리라.

신을 믿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측불가능한 현실의 삶을 쉽게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함이다. 도시의 밤거리를 붉게 물들인 십자가들은 신의 이름으로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련가. 현실을 제대로 살기도 전에 죽음과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저편의 세상을 생각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제멋대로 해석하는 신의 뜻은 얼마나 많은 억지를 조장하는가.

당당해져야 한다. 비루한 삶을 신에 기대어 이어가지 말고 더 강해져야 한다. 신이라는 버팀목을 믿는다면 더 열심히 연구해서 당당한 교인이 되어라. 열등감과 불안감에 폭력을 휘두르지 말고.

2008년 7월 24일 목요일

러브 레터, 트윈 픽스

올블로그에 갔다가 나카야마 미호에 대한 글을 봤다. 잊혀진 스타에 대한 글은 보기 힘든 법이라 반가운 마음에 가서 글을 읽다 러브 레터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브 레터는 여러 가지로 개인적인 의미가 있는 영화라 떠올리는 것만으로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게 된다.

오늘 다시 보며 드는 생각은 영화가 참 처음부터 어처구니 없었구나라는 것이다. 와타나베 히로코가 죽은 남자친구 이츠키의 졸업앨범을 볼 때 어머니가 이츠키는 전학을 갔다고 말해줬는데 주소록에 왜 남자친구인 이츠키의 주소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전학생 사진이 남아있는 것도 희한하긴 하지만 아마 그 졸업앨범에는 죽은 이츠키의 주소는 없었을 것이다. 와타나베 히로코의 순진함과 순수함 혹은 어리석음 덕택에 영화가 전개될 수 있었고 히로코가 몰랐던 진실이 밝혀지었던 것이구나 싶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전학을 한 학생에게도 졸업 앨범을 주나? 확인해볼 수 있을까.

며칠 전부터는 트윈 픽스를 다시 본다. 정확히 말하면 출시되자마자 아마존닷컴에서 사고는 처박아 둔 시즌 2 DVD를 보는 건데 전에 본 것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다. 아마도 고등학교 혹은 대학1학년 때 유선방송에서 KBS에서 방영한 버전을 재방송으로 볼 때 시즌2의 뒷부분을 봤던 것 같다. 그 부분만으로도 상당히 내 의식을 자극했고, 누가 범인인지는 극장판 Fire walk with me를 보며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시즌 2를 보다보니 이미 16화에 범인이 아주 명확하게 밝혀진다. TV 시리즈에서 범인이 밝혀지지 않아 극장판을 만든 것으로 생각했건만. 실망이고 17화 이후를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그래도 예전에는 그 부분만 봐도 재미있었으니 언젠가 이어서 보긴 할 것 같다.

2008년 7월 21일 월요일

적벽


대학원 사람들과 영화를 봤다. 한국에서는 '적벽대전'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했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적벽'이 원제였다. '적벽지전'이 다음 편이다. 나도 한동안 그랬지만 영화가 두 번으로 나뉘어 상영되는 것을 모르고 봤다가 낭패를 본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삼국지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적벽의 '전투'는 다음 편에 나올 것이다.

그렇지만 소규모 전투가 주를 이룬 이번 영화의 전투 장면도 볼만했다. 적벽의 대규모 전투를 보지 못해 실망한 사람이 많은 모양이지만 나는 아주 즐겁게 봤다. 나중에 밥을 먹으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 당시의 무기를 제대로 고증한 것인지, 배우들의 신장이 적절했는지 등에 대한 논란이 일긴 했지만.

여러 판본으로 삼국지를 다섯 번 이상은 본 것 같고, 코에이의 게임도 많이 했건만 삼국지의 세세한 부분은 많이 잊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가 얼마나 원작에 충실했는가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다. 그래서 대강의느낌을 요약한다면 '적벽'은 역사서보다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에 더 중점을 둔 영화인 것 같고, 오우삼 스타일이 강하게 덧입혀졌고, 특히 전투 장면에서는 반지의 제왕 류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삼국지-용의 부활의 실패가 보여주듯 원작에서 과도하게 벗어난 작품은 감독의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관객의 공감을 얻기 힘든데 적벽은 적절한 선을 지켰다.

영화는 첫장면부터 악한 조조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만들어 나갔다. 간웅 조조의 이미지는 강력한 정치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정통 왕조의 황제를 무시하고, 민간인, 적군을 가리지 않고 대학살을 자행하고, 무엇보다도 소교라는 미녀를 얻기 위해 오를 치는 듯한 설정을 통해 구축된다. 하지만 조조의 대척점인 유비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인 것만도 아니다. 유비는 자기를 따르는 백성을 지키며 대의를 중시하는 장면을 빼면 그다지 호감이 가는 캐릭터로 그려지지 않았다. 신야에서 패한 이후상황이 안 좋긴 했으나 주유가 방문했을 때 누추한 곳에서 짚신을 삼고 있는 장면은 비참함을 과장한 것이리라.

누구를 유명 배우로 썼느냐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전통적으로 중시되는 유비, 관우, 장비, 조조라는 인물이 아니라 제갈량과 주유의 라이벌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간 금성무의 연기에 의문을 품어왔으나 이번 제갈량 역할은 그에게 꽤 적합했다. 문무를 겸비한 인물인 주유 역할의 양조위도 괜찮은 캐스팅. 장비, 관우는 소설의 이미지보다 작았고, 유비는 너무 늙었고, 조운은 너무 경쾌했다. 조조의 배우는 선한 이미지를 많이 풍기는 인물인데 그래서 오히려 간웅의 역할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손권도 아버지,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 한 나라의 지도자로 우뚝 서는 과도기 캐릭터의 모습을 잘 연기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영화를 보기 전에 라디오에서 오우삼 스타일이 어떻게 영화에 반영되는지 조금 들은 편이라 영화를 보면서 주목했는데 역시나. 유비, 손권의 동맹이 결정되는 주유와 제갈량의 악기 연주 장면은 과장되었고, 흰 비둘기는 여러 번 날아다녔다. 비둘기는 단순히 난 정도가 아니라 과도하게 클로즈업되기까지 했다. 워낙 주연급 인물이 많이 필요한 영화라 일대일 대결이 많지는 않았지만, 조운과 하후X의 전투 장면은 지나치게 길었다. 소설 속의 조운 실력이라면 그렇게 오래 경합할리가 없을 터인데.

장비는 장팔사모를 거의 쓰지 않았다. 전투 장면이나 평소의 모습까지 장비는 많은 부분에서 반지의 제왕의 드워프족 김미를 연상시켰다. 작고 단순한. 레골라스의 이미지는 관우, 조운의 전투 장면에서 조금씩 스며나왔다. 주유의 기술도 일부 그런 면이 있었고. 전투 장면에서는 이렇게 반지의 제왕이 섞여 있는데 이는 세계적 영화 흥행을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하지만 절대악이 있고 악의 세력의 근원을 없애는데 성공하는 반지의 제왕과 달리 삼국지에서 조조는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유비, 손권은 적벽에서 단기적인 성공만 거둘 뿐이다.

마지막으로 축구 장면에 대한 분석을 빠뜨릴 수 없다. 무기 부분도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축구는 거의 엉터리다. 중국 축구계는 축구의 중국 기원설을 계속 제기하는 모양이고, 영화는 그런 연장선으로 보인다. 골대가 현재와 다를 뿐 선수들이 태클을 한다거나 묘기를 부리며 드리블을 하는 것은 명백히 현대 축구의 모습이다. 심지어 공까지 거의 구형에 가까운데 과거에 그런 공을 썼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말을 타고 와서 응원하는 대규모 관중들을 보면 어이가 없어진다. 영화의 맥락에서 축구가 나온 것은 전쟁의 승부는 축구처럼 딱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즉 영화 막판의 전투에서 조조군이 패한 것은 적벽에서 수전을 통해 만회할 수 있다는 조조의 자신감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었다. 하지만 축구의 승부야말로 다음 경기에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것이다. 거의 10배의 병력으로 전쟁에서 지기는 어렵지만 동일한 숫자의 선수들이 뛰는 축구는 공정한 룰만 있다면 승부 예측이 훨씬 어려운 법이다. 그렇다면 조조의 지나친 자신감과 오만함에 대한 경고, 그리고 참패를 예고하는 언급일지도...

2008년 7월 15일 화요일

Why Lady First?

왜 남자들이 여자를 배려(하는 척) 해야하나? 단순히 여자를 꼬드기기 위한 행위일 수도 있지만 이미 꼬드긴 여자도 꾸준히 배려하는 (물론 그렇지 않은 다수의 남자들이 있지만) 이유는? 그냥 멋있어 보여서일까? 여성이 약자라서? 하지만 이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어제 발견한 것 같다. 생물학적인 설명이다.

영화, 드라마에서 생명이 위태로운 위기의 순간, 예를 들어 타이타닉 같이 선박이 침몰하거나 로스트 에서처럼 비행기가 추락하고 무인도에서 살아야하는 상황을 보자. 구명보트에 탈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되어 있다면 누구를 태울 것인가. 생명은 분명 평등하지 않고 우선순위가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타려고 다투다 아비규환의 상태를 만드는 대신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선장 같은 사람이야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말할테고 삶의 나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

누가 오래 살 것인가를 따져볼 때 당연히 더 어린 사람을 살리는 쪽이 인류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유리한 선택이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어떨까? 요즘이야 여자들이 더 오래 산다고 하지만 수명을 놓고 볼 때 원래부터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자들의 가치는 아기를 낳아 인류의 존재를 지속시킬 수 있기에 빛난다. 영화 속에서 위기 상황에서도 여자를 우선하는 수많은 장면들은 남자가 단지 여자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를 희생했다기보다 인간에게 내재한 하나의 본능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생물학에서 종의 본능은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최우선 목표라고 보고 있으니 전혀 틀린 설명도 아닐 것이다.

2008년 6월 30일 월요일

크로싱: 비와 백구와 축구

아... 왜 이렇게 글 쓰는 게 늦어지나. 영화 본 지 보름은 지났건만. 기억을 그러모아 어떻게든 끝내보리라. 스포일러 당연히 있다.

처음부터 이 영화를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차인표가 나온 영화가 재미있었던 적도 없었고. 하지만 지난 달 말미를 기념하여 선택한 영화는 결국 '크로싱'이었다. 졸리와 맥어보이의 원티드를 원하기도 했고, 결국 그저께 본 쿵푸팬더를 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가벼운 영화들보다 볼만한 한국 영화 한 편을 우위에 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그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다.

영화는 고통 그 자체다. 영화평 중 "재미도 감동도 없는"이라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다.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들지만 이는 카타르시스도 아니고 누구나 영화를 보며 느낄 수밖에 없는 고통의 소산일 따름이기 때문이리라. 확실히 영화는 재미로 볼 것도 아니고, 감동보다는 분노만을 느끼게 만든다. 분단으로 이산 가족을 보지 못하는 아픔은 이미 60년이 다 된 일인데, 탈북자들도 상당수가 이산 가족이었다. 결국 차인표는 금방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달리 부인, 아들과 (생)이별을 한다. 많은 이별은 예정에도 없이 찾아오는 것이리라.

가족의 문제도 있지만 영화는 식량난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는 북한 정권을 정면으로 비난한다. 북한 국경의 경비병은 돈만 주면 편하게 두만강을 왕복하게 허용하지만 무임도강하는 생계형 도피자에게 기꺼이 개머리판, 총알 세례를 가한다. 중국으로 도망치다 걸리면 정신개조를 위해 수용소에서 무임금 노동력으로 소모되다 죽을 뿐이다. 구더기가 득실대는 상처를 안고 죽은 미선의 이미지는 말문을 막히게 할 뿐이다.

영화의 비판적 시각은 북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도적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탈북자 지원 사업에 대한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을 더 많이 구하기 위해 개인이 아닌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단체가 필요함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들은 관료제의 무뚝뚝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남한이 아니라 병든 아내와 아들이 있는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용수(차인표)의 기대는 간단히 무시된다.

기독교에 대한 영화의 시선은 약간 애매하다. 영화를 본 날 다른 이의 생각 궁금해 인터넷을 뒤진 결과 영화가 기독교에 지나치게 비판적이라 싫다는 반응들이 있었다. 나도 신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는 용수의 격렬한 반응을 보며 기독교계가 안 좋은 반응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엔딩 크레딧을 보니 이미 기독교계의 협조가 있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탈북자를 도운 것은 기독교계라는 기본 사실이 있기 때문일까. 종교의 이념 자체와 이를 사리사욕을 위해 악용하는 성직자, 교단의 문제는 별개로 둬야 하는데, 크로싱은 기독교 이념 자체를 지지하는 영화는 아니다.

크로싱은 수없이 많은 경계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살아가며 보통 주어진 틀 안에서 살아간다. 삶의 공간이건 신분의 문제이건 경계선을 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넘나드는 것을 일상으로 삼으면서 양 세계의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한다. 무당이나 성직자들도 그런 종류의 사람인데, 크로싱에서는 브로커라는 존재들이 해당된다. 용수의 한국행을 조장한 브로커는 사욕을 위해 용수를 속여서 이용했고, 준이의 한국행을 도운 브로커들은 돈을 받고 냉정하게 일을 처리할 뿐이지만 어린 준이의 절대적 불행에 동정하기도 한다.


이런 얘기들을 쓰려던 게 아니었는데 서론이 길어져서 본론에 충실할 수 없지만 제목에 충실한 내용은 아래 적어본다.

위에 브로커 얘기를 적긴 했는데 영화에서 수많은 경계를 넘는 것은 비로 나타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지상의 물리적, 심리적 경계와 상관없이 조용히 그리고 차갑게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씻어내린다. 눈물도 비에 대응하는 설정이다. 영화 말미의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물이었다. 경계들 때문에 헤어진 사람들은 경계를 넘어 원래 하나였던 사람과 만나지 못하게 되면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준이는 비를 좋아한다. 맑은 날이 아니라 궂은 날에 내리는 비를 좋아한다멸 결과는 뻔할지도 모른다. 비는 수해를 낳기도 하지만 가뭄을 해갈하기도 하니 이중적 장치이지만 준이가 비를 좋아한다는 설정은 결말의 파국을 예고한 것 같다.


백구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기른 마지막 개가 (이름까지) 백구여서인지 영화를 보며 반가우면서 안타까웠다. 부인과 아들까지 죽는 마당에 개라고 무사할리 없다. 북한의 식량난 때문에 백구는 영화 초반 준이네 식구의 지위에서 아침 밥상을 가득 채운 음식으로 변했다. 엔딩 부분의 가상의 행복한 삶 속에서도 백구는 빠질 수 없는 일원이었다. 백구의 죽음, 그것은 한 마리 개의 죽음 이상의 의미다. 이어지는 불행을 알리는 중요한 서막이었다. 만약 백구가 진돗개라면 애시당초 함경도에 있을 가능성 자체가 거의 없다. 백구는 북한의 현실의 일부라기보다 메타포로 사용된 설정이다.


마지막으로 축구를 보자. 크로스, 크로싱은 센터링이라는 잘못된 용어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축구에서 득점을 위한 중요한 기술이다. 대지를 가르듯 그라운드를 횡단하여 스트라이커의 머리와 다리로 전달되는 공의 아름다움...

심각한 영화 타인의 삶에서도 축구 장면이 스쳐가듯 나온다. 이렇게 축구는 평화로운 일상의 일부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으로 많은 영화에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용수는 축구 '선수'였고, 준이도 축구를 너무 좋아한다. 그리고 사진에도 나오지만 백구도 축구를 좋아한다. -_- 축구 선수라는 설정은 이상한 곳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바로 주중 독일 대사관에 북한 사람들이 몰려 들어갈 때 축구 선수라는 경력이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용수는 북한을 떠나며 아내의 약과 아들의 축구화, 축구공을 사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중국에서 번 돈은 잃어버렸지만 남한에서 번 돈은 고스란히 모아 나이키 축구공을 사기에 이른다. 하지만 공을 받을 준이는 북한도 아닌 몽골의 사막이라는 타향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용수는 아들에게 크로스를 할 기회도 얻지 못한 것이다.

절대 고통의 영화 크로싱. 하지만 이런 현실이 멀지 않은 곳에, 소위 같은 민족에게 일어나는 일임에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이 고통을 가중시킨다. 영화 포스터는 "그 날, 우리는 살기 위해 헤어졌습니다"라고 말한다. 살기 위한 몸부림은 모든 생명의 본능이다. 하지만 살기 위한 헤어짐은 용수의 삶과 다른 가족의 죽음으로 결론이 났으니 용수는 그냥 북한에 있으면서 온 가족의 가난한 삶을 지켜보는 편이 나았으려나?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사회는 다수의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기에 개개인의 불행은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지 모른다.

2008년 6월 29일 일요일

콜레라 시대의 사랑

(...) 이제는 나이도 들고 성질도 온순해졌지만, 두 사람은 가능하면 그 사건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간신히 치유된 상처는 마치 어제 입은 상처처럼 다시 피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1권 p.57.

(...) 그녀의 편지는 그 어떤 감정의 위험도 피했으며, 단지 항해 일지를 쓰듯이 성실하게 자신의 일상적인 일들을 이야기하는데 그쳤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 그 편지들은 심심풀이용으로, 자기 손은 불에 넣지 않으면서 뜨거운 불길을 유지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반면에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한 줄 한 줄마다 자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1권 p.124.

"부자라니, 난 그저 돈 많은 가난한 사람일 뿐이오. 그건 다른 것이오."
2권. p.10.

(...) 고독한 사냥꾼으로서 먹이를 낚으면서 너무나 많은 과부들을 알게 된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세상은 행복한 과부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 젊은 신부의 수많은 꿈 중의 하나에 불과한 안정을 대가로 자신의 성(姓)뿐만 아니라 개성까지도 포기한 시절 이후, 다시금 자신이 자유 의지의 주인이 되었다는 의식을 갖곤 했다. 오직 그 여자들만이 자신이 미친 듯이 사랑했고 또한 아마도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 하지만 죽는 날까지 젖을 주고 더러워진 기저귀를 갈아주며, 아침마다 술책을 사용하여 기분 좋게 해주어야 했던 남자가 자신의 사주를 받아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을 본 여자들은 그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삶이었다. 사랑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별개의 것, 즉 또 다른 삶이었다.
2권. pp.73~74.

사실대로 말하자면 후베날 우르비노의 구혼은 결코 사랑의 이름으로 제안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제안했다고 하기엔 이상한 세속적인 재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즉 사회적, 경제적 안정과 질서, 행복, 눈앞의 숫자 등 모두 더하면 사랑처럼 보일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거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만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었고, 이런 의문은 그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녀 역시 사랑이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2권. p.78.

그러자 모든 의심이 사라졌고, 이성이 가장 점잖은 행동이라고 지시하는 바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행할 수 있었다. 페르미나 다사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기억을 즉시 수세미로 문질러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고, 자신의 기억 속에 그가 차지하고 있었던 자리에 양귀비의 초원을 꽃 피웠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것은 마지막으로 평소보다 더 깊은 한숨을 쉬며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 올케들이 수도원의 감옥에서 산 채로 썩지 않은 것은 이미 자신 안에 그런 감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2권. p.80.

(...) 페르미나 다사가 자신이 죽음의 함정에 빠져 있다고 잘못을 돌린 사람은 (...) 바로 남편이었다. 직업적인 권위와 세속적인 매력 뒤에 감춰진 본모습이 구원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그는 가문의 사회적 무게 덕택에 대담해진 가련한 악마였던 것이다.
2권. p.81.

"아주 특별한 종류의 콜레라임에 틀림없군. 시체들의 목덜미에 하나같이 확인 사살한 총구멍이 나 있으니 말이야."
2권. p.118.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눈물 모양의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서 더욱 빛나고 있었다. 앨리스가 다시 한 번 거울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2권. p.120.

두 사람은 서로 그대로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니까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라 손자뻘 정도 되는 이미 사라진 두 젊은 남녀의 덧없는 기억 이외에는 공통점이 아무 것도 없는, 죽음의 습격만을 기다리고 있는 두 늙은 남녀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2권. p. 256.

"빌어먹을. 모두 지옥이나 가라고 해. 우리 과부들이 좋은 게 있다면, 우리에게 명령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야."
2권. p.288.

(...) 그런 다음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그의 꺾을 수 없는 힘, 그리고 용감무쌍한 사랑을 보면서 한계가 없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일지도 모른다는 때늦은 의구심에 압도되었다.
선장이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2권. p. 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