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18대 대선이 끝난지 한 달이 되었다. 한 달 전 그날의 기억은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가 나온 이후로도 불쑥불쑥 솓아나곤 한다.
유시민이 골든 크로스를 이야기하고, 나꼼수를 끝낸 김어준 등이 딴지라디오를 통해 투표일에 생방송을 하며 희희덕거리던 그 시간들을 잠깐씩이나마 함께 하며 전세가 뒤집어졌으리라 착각했다.
그러나 며칠동안 어지럽던 머릿속은 의외로 쉽게 정리되었다. 결국 박근혜는 17대 당 경선에서 진 이후부터 계속해서 차기 대권의 가장 유력한 주자였고, 안철수가 등장한 이후 몇 차례 여론조사에서 뒤지는 결과가 나왔지만 어떤 요인이 가장 컸던 간에 결국 마지막 공식 여론조사까지도 문재인 후보에게 앞선 상태였다.
그녀가 세 차례 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TV 토론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들을 여러 번 보여줬지만 '소위 진보' 팟캐스트나 언론의 시각과 달리 대세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진보 측에서 박근혜 혹은 새누리당의 네거티브를 문재인의 상승세의 증거로 봤듯이, 돌이켜보면 진보의 대세 역전'설'은 자기 세력의 결집을 더 강화하려는 제스처였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결국 진보의 작전은 인구 구성비가 늘어나는 50대 이상의 노령 인구, 특히 50대의 믿기 어려운 결집이라는 역효과를 낳았는지 모른다. 역시 인과 관계를 엄밀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12월 20일 이후 한동안 이어진 진보 팟캐스트들의 거대한 침묵을 기억한다. 투표한 사람들의 48%는 '멘붕'을 겪었고, 그들에겐 '힐링'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화 레미제라블이 흥행했다고도 이야기된다. 그러나 아마도 당장에 진보 팟캐스트들이 힐링을 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챙겨듣는 팟캐스트는 별로 없지만 진보도 방송국을 가져야겠다는 논의가 대두되는 것 같긴 하다. 보수 일색인 종편들이 시청률이 그렇게 형편없다고 조롱을 받고 적자 상태지만 대선에는 큰 영향을 끼쳤다는, 객관적으로 연관관계를 찾기가 쉽지 않은 요인이 많이 지적되었다. 내가 보기엔 진보의 방송국은 그런 목소리도 내보낼 수 있어야하지 않느냐, 그래야 균형이 맞지 않느냐는 당위성을 주장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힘을 잃은 진보 팟캐스트들의 자구책이자 실질적이고 되기만 한다면 나름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의 시도로도 보인다. 그들의 많은 좋은 말들을 나도 잘 들었지만 많은 경우 팟캐스트는 자신들의 책을 파는 창구이기도 했다. 그들이 자기 책의 xx쇄를 찍었다고 자랑했지만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지금에 와선 회의적이다. 몇 차례 지적되었지만 진보 팟캐스트라는 것이 종류도 많고 다운로드 수도 많을지 몰라도 듣는 사람이 여러 개를 듣는 것이었다. 그 한계, 혹은 폐쇄성이 나꼼수로 시작된 팟캐스트 세상이 많은 이들을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는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었던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아무리 스마트폰 혁명이 일어나도 다운로드를 혹은 스트리밍을 해야하는 팟캐스트는 바쁜 인간에게 적지 않은 적극성을 요구하는 일 같다. 버튼 하나로 켤 수 있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라는 현재 기준으론 구식의 방법들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얼마 전에 김어준, 주진우는 어디 갔는지 찾아본 적이 있는데 해외로 갔다는 것 같다. 정봉주가 징역형을 마치는 자리에도 나오지 않았다. 대선 전 나꼼수의 방송이 뜸하던 시절 정봉주의 인터뷰 기사에서는 정봉주와 나머지 멤버 사이의 갈등 혹은 적어도 상당한 의견 차이가 드러났다. 그렇다고 상호비방을 하진 않았지만 애초에 재미로 시작했던 장난같은 일이 너무 커졌기에 나꼼수의 세네 사람이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어준과 주진우는 어떤 큰 일을 도모한다고 자처하고 있을까. 누군가의 조롱처럼 그들이 도망갔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민주당을 쥐락펴락하려 했고 실제로 그런 순간들도 있었던 그들로서는 그 단맛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위치에 있건 영향력이란 것은 얻어내는 측면도 있으므로 이들의 한계가 애초에 정해졌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얻어낸 영향력을 어떻게 활용할지 그 관리의 측면에서 나꼼수는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그들이 더 큰 정치적 악행들의 증거를 갖고 있지만 터뜨리지 않는다는 건 사실일지 모르지만 추종자들을 음모론에 더 빠지게 만드는 폐해도 있다. 언어 차원에선 B급이라고 보기도 힘든 저렴한 그들의 언어는 대중성을 획득했지만 국민 전체로 봤을 때는 다수가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러저러한 말들을 적었지만 지금은 박근혜라는, 정말 그런 시대가 오리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미 현실이 된, 박정희의 딸의 시대를 착잡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 마치 그 아버지의 치세를 연상케 하는 경제부흥,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참으로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아리송하게 만든다. 절대 빈곤을 넘어서 선진국의 문턱에 있는 국가에서의 잘 살아보세의 '잘'은 무슨 의미일까. 분명 수십 년 전의 '잘'과는 달라야만 한다. 그러나 레토릭이 아니라 실제 새 대통령의 사고방식이 아버지와 유사하다면 앞으로 5년을 지난 5년만큼이나 마음 졸이며 봐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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