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5일 수요일

인랑 (2018)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알고 있던 인랑이 김지운 감독에 의해 한국적 맥락으로 변형되어 극장에 걸렸다. 바로 오늘 개봉되었고 마침 시간이 되어 조조로 관람하였다.

예고편만 공개되었을 때 내가 가본 커뮤니티에서는 기대보다는 우려가 압도적이었고, 최근 며칠 시사회 반응은 좋았다는 글 제목을 얼핏 보았다. 원작을 보지 않았기에 원작과 비교하려고하는 부담감은 갖지 않은 채 편견없이 영화를 보았고, 그 결과 애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영화를 액션 영화로 분류한다면 수준급의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영화 초반의 시위와 테러 장면, 섹트라는 테러 집단을 응징하는 특기대의 진압 과정, 남산 타워에서의 총격 및 차량 액션(특히 드론의 총질이 훌륭했다), 그리고 공안부를 무찌르는 인랑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우성과 강동원의 대결까지 영화는 액션으로 가득하다.

로맨스 영화로 보면 어떨까. 영화는 최근 실제 연인설이 제기된 강동원과 한효주의 러브 라인을 주요 줄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둘은 처음부터 서로를 이용하여 자신의 혹은 조직의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 하지만 영화의 화면 배치가 암시하는 바 둘은 남산 케이블카에서의 첫 만남부터 사랑에 빠졌다. 그리하여 인랑이라고 하는 임중경(강동원)은 정우성이 잘 정리하듯 테러리스트인 한효주를 전혀 죽일 생각이 없었고, 조직의 명령을 거역하며 조직을 탈출한다. 하지만 강동원은 북한으로 가는 한효주를 따라가지 않고 역에 남으며 로맨스의 앞날, 결말을 애매하게 만든다.

정치 드라마로 보면 어떨까. 영화는 초반 정우성의 내러이션을 통해 2018년에서 6년 지난 2024년 남북이 통일에 전격 합의한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이 부분이 가장 문제적이라고 느껴지는데 왜냐하면 정우성은 '앞으로 6년' 후라며 2018년의 시점에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회고가 아니라 예언이기 때문이다. 내러이션의 정우성은 극중 특기대 훈련대장이라는 캐릭터가 아니라 2018년 현재 살아있는 배우 정우성이란 말인가? 다시 돌아가면 2024년부터 통일에 반대하는 세력이 무장을 하며 섹트라는 테러 집단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후 영화는 5년이 더 지난 2029년 시점에서 시작된다.

테러 집단의 이름을 섹트로 지은 것은 왜일까? 사실 섹트라면 종교적인 폐쇄 집단의 의미로 사용될 터인데 영화속 섹트가 종교적이라는 암시는 전혀 없었다. 더 구체적인 이름을 지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여하튼 영화의 핵심 배경은 남북이 주변 강대국의 무장화 움직임 속에서 생존을 위해 통일을 결단하지만 공안부로 대변되는 통일 반대 세력이 섹트 같은 테러 조직을 사실상 먹여살리며 공작을 벌였고 특기대가 이런 계획을 분쇄하며 더 공고한 통일의 길로 간다는 스토리다. 그렇다보니 맨 마지막의 어떤 컷은 통일부의 선전 영화인가 싶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 관계를 해소하는 차원의 통일에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음에도 왠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졌다. 결국 모든 일이 끝나고 DMZ로, 평양으로 그리고 신의주로 더 나아가 유럽까지 열차를 타고 달려가고 휴가를 보내는 꿈같은 일들이 펼쳐질 터인데 공안부의 자기파괴적 공작이 정당화될 수 있겠냐는 항변이 들리는 것 같았다.

현재 한국에는 없는 공안부는 그 깃발 모양에서부터 국정원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한 조직이다. 공안은 공각기동대에서 등장한 조직이고 인랑 원작에 등장하는지도 모르겠다. 북한 간첩을 만들어내기까지 하며 생존하는 국정원이 통일을 반기지 않을 가능성도 많겠지만 국가정보를 관리할 일이 통일 이후에도 충분히 많을 터인데 국정원을 통일 반대 세력으로 설정한 것은 그럴 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과하다는 느낌이다. 물론 영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이런 류의 국가 폭력 조직간의 대결을 설정했다고 넘어갈 수 있고 원작에 유사한 설정이 있었다고 짐작도 해본다.

영화가 근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는 방식은 약간 게으른 것 같았다. 사실상 거의 지금 현실을 그대로 가져갔고, 일반 주택가에는 통일에 반대하는 벽보들이 건물 외벽이나 담장을 뒤덮는 것으로서 포인트를 주었다. 차량에서는 택시들이 차 위에 무언가 볼록 튀어나온 형태로 다니는 것이 이색적이긴 하다. 버스의 번호 앞에 알파벳을 붙이기도 하고 전철역 출구에도 알파벳이 붙어서 현재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주긴 한다. 가장 다른 점은 총격전이 서울 중심에서 벌어진다는 것인데, 총기 모델을 보는 눈이 없어 얼마나 적실한 설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특기대의 방탄 능력이 뛰어난 아머? 전투복?과 빨간 두 개의 동그라미가 빛나는 안면 마스크가 가장 지금과 다른 시대라는 느낌을 주었다.

영화는 인간 늑대라는 제목을 스토리 속에서 변주했다. 예고편에도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탈을 쓴 늑대가 인랑의 진실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사실 인랑의 실체는 영화를 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공안부에서 파악하는 인랑은 특기대 내의 비밀 조직이라는 것인데 영화 후반부의 장면을 보면 임중경만이 인랑인 것처럼 이해되기도 하여 헛갈렸다. 여하간 임중경은 인랑이라는 것이 확정적이고 그는 공안부의 겁없이 무장 안한 애송이들은 물론이고 쿨한 외모로 바주카포를 쏘아대는 공안부 내의 특임대도 홀로 다 물리치는 괴물 같은 전투 유닛이다. 갑옷 같은 전투복이 방탄 기능은 훌륭하지만 아이언맨 같은 능력을 주는 정도는 아닌 것 같고, 등에 짋어진 통 속에서 늑대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가스가 입으로 주입되는 건가 의아했다. 그런 전투력으로 왜 영화 초반에 섹트의 리더를 놓쳤을까?

임중경이 인랑이라는 설정을 통해 김지운 감독은 또 하나의 유명한 모티브를 결합시켰다. 바로 빨간 모자 이야기다. 이 모티브는 아주 꾸준하게 등장해서 집요할 정도이다. 영화에는 한효주를 중간으로 하고 초반에 한효주의 여동생 그리고 막판에 남동생이 전면에 등장하는데 이 세 남매 모두가 해당 시점에 빨간 외투를 걸치고 있다. 그에 더해 한효주는 강동원을 자신의 책방으로 유인한 이후 비극적 버전의 빨간 외투 이야기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빨간 모자를 누가 죽였나? 할머니? 늑대? 어머니? 그녀는 누구 탓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억울하다고 했다. 이 대사는 엔딩 크레딧 막판에 한 번 더 등장한다.

영화의 주요 기제 중 하나인 2024년의 피의 금요일은 특기대가 잘못된 정보에 의해 무장하지 않은 여고생 10여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임중경은 이 일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것으로 보이고 그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그는 한효주의 동생이 섹트의 일원으로서 자폭 테러를 할 순간인데도 그녀를 죽이지 못했다. 그 여동생은 자폭을 했지만 한효주는 당신이 죽인 건 아니라며 그를 두둔했다. 임중경은 상관 지시로 한효주를 죽여야했지만 역시 죽이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구원했으며, 마지막에는 투병생활을 하던 남동생이 누나와 북한으로 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 결국 늑대여야 할 임중경은 세 명의 빨간 모자를 모두 죽이지 않았다. 늑대가 할머니를 잡아먹고 빨간 모자를 잡아 먹는 것은 식욕이라는 욕망의 결과물이다. 물론 할머니를 먹고 배가 불렀을 터인데 금세 손녀까지 잡아먹는 것은 탐욕이라고 해야할 수도 있다. 빨간 모자는 엄마 심부름을 했을 뿐인데 왜 죽어야했나. 운이 나빴다고 해야 할까? 탐욕스러운 늑대가 존재한다는 것이 부조리한 것은 아닐까?

한효주는 자신이 섹트에 들어가 활동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여겼다. 여동생의 경우는 왜 그랬는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언니를 따라 가입하고 활동한 것인지 모른다. 특기대가 학살했던 여고생처럼 그녀도 고1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는 테러에 사용될 폭탄을 운반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순진했던 그녀, 자신을 둘러싼 특기대를 보며 분노의 자폭을 선택한 그녀는 세계 도처에서 자폭 테러를 하고 내전에 휩싸인 10대 전투원들을 연상시킨다. 그 어린 청춘들은 어른들이 주입한 생각대로 행동하다가 도구처럼 사용되고 그렇게 죽어갔다. 자신의 사고를 하지 못하는 존재는 바로 특기대 대원들이고 또한 공안부의 요원들이다. 그저 상관의 명령이 떨어지면 따지지 않고 움직이는 기계, 로봇, 짐승. 임중경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다며 특기대를 떠났고 인간이 되어가는 듯 보였다. 섹트와 공안부 양쪽으로부터 덫에 걸린 한효주는 두 조직이 붕괴되자 자유의 몸이 되었고, 그야말로 아무 죄 없는, 순진무구한 그녀의 남동생은 빨간 옷을 입고도 안전하게 북한 땅으로 떠났다.

생각해보면 빨간 색의 모티브는 한국 사회의 레드 컴플렉스를 상징할 수도 있겠다.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이 되며 당의 색을 빨간 색으로 바꾸는 대변신으로 이 사회에서 빨간 색이 '빨갱이'로 연결될 여지는 훨씬 줄었지만 아직도 어디의 누군가는 종북 세력과 빨갱이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빨간 옷을 입고 북한에 간다는 설정은 그렇기 때문에 매우 도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만하면 다 썼을까? 잘 모르겠다.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처럼 분단 한국의 현실을 다른 모티브와 잘 섞어서 영화로 만들었다. 남과 북은 통일을 하겠다는데 대한민국 내 정부 조직들이 말 그대로의 전투를 벌이고, 어제의 동지가 다른 편에 넘어가 나를 죽이려고 하고, 상관과 부하가 생사의 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현재의 남북 화해 국면에서 앞으로 제발 이렇게는 하지 말자는 당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무열과 최민호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끝내야겠다. 김무열이라는 배우는 전에 본적이 없고, 샤이니의 최민호의 연기도 이 영화로 처음 보았다. 김무열은 강동원의 최대 적으로서 매우 비중있는 역을 맡았고 최민호는 비교적 짧게 출연한다.  김무열은 공안부에서 맡은 직책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젋은 얼굴이었지만 설득력있는 연기를 한 것 같고, 최민호는 곱상한 평소의 외모를 많이 망가뜨리며 애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인랑이라는 조직에 어울리는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캐스팅의 이유가 궁금하다. 늑대가 이렇게 고울 수도 있다는 사례? 

2018년 7월 11일 수요일

버닝(2018)

이창동 감독의 이 새로운 영화는 무엇에 대한 것일까? 아직 읽어보지 못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라고 한다. 제목 자체가 '버닝'이니 무언가를 태우는 이야기고 실제로 영화의 마지막은 방화의 장면이다.

사실 태우는 것은 마지막의 포르쉐와 그 안의 한 인간과 피묻은 옷들만이 아니었다. 담배와 대마초가 피워졌다. 비닐 하우스가 꿈 속에서 불탔다. 태양도 불타올랐다고 해야할까? 자동차가 연료를 태웠다? '보일'러?

영화의 중반부터 이야기는 반포에 사는 '벤'이 후암동에 사는 해미를 살해하는 이야기로 이해되었다.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의 일부 리뷰들을 보니 그런 해석도 가능하지만 감독은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았다는 글들이 많은 걸 보니 벤이 해미를 죽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거의 분명하게 그런 암시를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파주의 종수 집 근처의 비닐 하우스는 벤의 직접적인 언급과 달리 불타지 않았으므로 벤의 방화는 살인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언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벤은 해미의 실종을 연기처럼 사라졌다고까지 말했다. 벤의 집에 있는 해미의 시계, 벤의 집에 새로 들어온 주인 없는 고양이가 '보일'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장면까지. 대마초를 피우는 것으로 대표되지만 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벤이 해미를 죽이고, 해미와 비슷하게 연고가 없는 가난한 젊은 여성을 또 만나고 살인을 하는 이야기라고 볼 여지는 많다. 그렇다면 종수는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 벤을 죽였고 그것은 그에게 정당한 행위였을 것이다.

몇 개 본 리뷰에서 고양이가 이름에 반응한 것은 우연일 수도 있다는 의견은 수긍이 가지만 벤의 집 화장실에 있는 시계는 많이 의심스럽지 않은가? 물론 또 다른 씬에서 종수가 해미의 옛 동료를 만났을 때 그녀의 팔에 같은 시계가 있었으므로, 대량 생산된 손목 시계 하나가 그 주인의 정체를 확정시켜줄 수는 없다. 이것은 감독이 관객의 판단을 혼란시키기 위한 조치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확실히 모호한 장면들이 많다. 해미는 처음에는 그저 가끔씩 일하며 돈을 모아 아프리카 여행을 가는 흔한 청춘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들에게 그녀는 카드 빚이 많고 거짓말을 잘 하는 아이였다. 그녀는 파주의 옛집 옆에 우물이 있어서 자기가 그 안에 빠져있었다고 했지만 정작 그녀의 가족은 우물이 없었다고 하고 이장도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16년간 연락이 두절되었던 종수의 어머니는 우물은 있었다고 하는데 다만 물이 없는 마른 우물이라고 했다. 최소 16년 이전의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이제 우물이 불필요한 세상에서 기억에서 사라져도 이상치 않을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골에 살았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보면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지 여부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최소한 다섯 명의 당사자들의 기억이, 그것도 단순한 장소의 존재 여부가 엇갈린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아마 종수 엄마의 진술처럼 마른 우물이 있고, 아직은 어렸던 해미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고 종수가 해미를 구해준 적이 있고 해미 가족들은 마른 우물이니까 그런 우물이 없었다고 말했을 수는 있겠다. 

고양이의 경우도 그렇다. 해미는 자기의 원룸에 고양이가 있다고, 그러니까 밥 좀 주라고 종수에게 부탁했다. 다만 고양이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니 안 보일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종수는 고양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고양이 사료를 몇 번 주는 씬을 감안하면 고양이가 먹은 건지 누가 치운 건지 몰라도 최소한 사료가 없어지긴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원룸의 주인은 고양이를 키울 수 없는 건물이라고 말했다. 종수조차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러 오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고양이라는 소재는 양자물리학의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염두에 둔 것일까? 벤이 동시 존재를 말한 걸 감안하면 영화는 양자물리학을 적극 도입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마저 들게 만든다.

물론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최승호의 등장이었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어떻게 봐도 최승호 같이 생긴 이 배우가 누구인지가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가장 궁금했다. 정말 최승호라는 이름이 있었고 구글 검색은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파란만장한 젊은 날을 살았고, 자존심이 너무 세어서 손해를 본 중장년의 남성이라는 캐릭터는 어느 정도는 그의 삶과 일치하는 것도 같다. 현실에서는 언론인으로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살던 그가 공무원을 폭행하여 재판정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장면은 재미있었다.

어떤 리뷰는 이 영화를 계급 관계로 해석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렇게 볼 여지가 다분하다. 벤은 자신은 직업이 없다고 하는데 그는 반포의 고급 빌라?에 살며 포르쉐를 몰고 다닌다. 설정상 나이는 30전후일 것 같았다. 벤은 해미나 나중에 데리고 다닌 젊은 여성을 자신의 부자 친구 모임에 초대하여 그녀들이 소위 '쇼'를 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그 가난한 여성들의 몸부림을 비웃는다. 벤이 어떤 직업을 갖고 일한다는 암시는 전혀 없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일을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젊은 여자를 데리고 시간을 보내고, 운동을 하고 쇼핑을 한다. 미술관?에서 가족과 만나는 씬을 보면 가족이 부유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벤이 엄밀한 의미의 부르주아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재벌2, 3세 같이 조상이 돈이 많은 젊은이라고 분류해야 할 수도 있다.

종수는 어떨까. 그는 육체 노동, 그것도 일용직 성격의 일을 하며 돈을 번다. 아버지의 부재로 떠맡게 된 파주의 집에서 외양간을 치우기도 한다. 그는 해미의 원룸이 근사하다며 자신의 '방'은 싱크대 옆에 변기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정체성은 작가다. 그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을 써본 적도 없고 무엇을 써야할지도 모른다. 오직 영화의 막판이 되어야 해미의 방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쓸 뿐이다. 사실 그 전에 아버지 죄의 정상참작을 위한 탄원서라는 소설을 쓰긴 했다. 이장은 그 탄원서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그 글이 소설에 다름 아님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그 글은 매우 잘 써졌다며 작가로서 종수의 재능을 암시했다. 누군가의 리뷰에서 말하는 것처럼 해미의 방에서 쓴 글의 내용이 이후 장면들일 수도 있겠다. 일단 그가 왜 해미의 방에 있는지가 납득이 가지 않지만 시점의 측면에서는 확실히 그 때부터 종수의 시점을 벗어난 것 같다. 혹은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쓰는 장면 자체가 소설이 아닐까? 혹은 해미의 방은 사실 종수의 방이고, 해미가 실종되자 종수는 그 이전까지의 장면 모두를 소설로서 써본 것이 아닐까? 주인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줄 때는 자신이 같이 있으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라며 잔뜩 경계한 상태였는데 모든 장면이 시간 순으로 진행되었다면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는 전혀 어떤 결정적 해석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쓰고 보니 마지막 생각, 자신의 방에서 소설을 쓰는 종수의 상상이 영화의 대부분이라는 해석이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이 된다.

현재로서는 마지막으로 쓰고 싶은 것은 미국과 중국에 대비된 한국의 처지를 영화가 다룬 방식이다. 이 부분은 그렇게 두드러지는 소재는 아니지만 TV 장면 속의 트럼프, 벤의 집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중국에 대한 대화 등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현재 국제사회의 G2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게다가 종수의 집은 대남 방송이 들리는 휴전선 근처의 마을이다. 이런 정치적 현실은 강대국에 의해 운명이 좌우된 대한민국의 탄생과 현재까지의 역사를 환기시킨다. 마치 벤이 비닐하우스 태우는 것이 자연법칙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강대국들은 범죄적 행위가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벤은 한국 출신의 미국인이 아닌가?

파주라는 공간은 출판사가 많고 신도시가 존재하지만 영화 속의 그 장소는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젊은 여성들이 떠난 농촌에는 외국인 여성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수 아버지를 위한 탄원서를 받기에 부적절했다. 의사소통도 되지 않고 이 땅에 정착하지 얼마 되지 않은 귀화한 한국인은 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파주에서 좋은 이웃이었다는 증거로 전혀 적당하지 않았다. 종수는 아마도 고등학교까지는 파주에서 다녔을 것 같지만 그 마을에 그가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고향에서마저 소외된 종수는 이미 명백한 현실이 된 이웃 사람 동남아 여성에게서 이중의 소외감을 느낀다.

아직 이창동 감독이 직접 말한 내용이나 씨네21 등에 실린 관련 글은 하나도 읽지 않았다. 조만간 읽어보고 생각을 더 정리해봐야겠다.

2018년 6월 26일 화요일

웨스트월드 시즌2 피날레

웨스트월드는 이상한 장면을 제시하며 시즌2를 마무리했다. 맨인블랙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자기가 죽였던 딸이 눈앞에 보였고 결국 드러나기로 그 장면 속의 맨인블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충실성 테스트를 받고 있었다. 수십 년 전의 영화판 웨스트월드에서 율 브리너를 연상시키는 맨인블랙이 로봇이 되었다면 원작에 더 부합하게 되는 흐름이라고도 하겠지만 율 브리너가 원래는 테마파크의 주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니니 유사성은 그 정도에서 멈추는 모양이다.

지난 9편은 웨스트월드를 너무나 자주 찾은 윌리엄이 무엇이 현실인지 무엇이 진짜인지 너무 헛갈려 자신의 팔에 선을 꽂는 단자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칼로 살을 헤집는 장면이 등장했다. 10편에서는 진실을 확인시키지 않고 모호하게 지나갔다. 하지만 10편 마지막 부분이 훨씬 이후의 시점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때까지는 맨인블랙이 인간이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10편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고스트 네이션의 아케체타가 말하는 '문'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대목이었다. 재미있게도 그 문은 호스트들에게만 보였다. 호스트들은 땅바닥부터 하늘까지 길쭉한 틈이 생겨나는 걸 보았고 그 '문' 너머에 아무 것도 없는 들판이 있는 것도 보았다. 이곳은 포드가 호스트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었다. 호스트들이 그 문턱을 넘으면 로봇의 육신은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육신의 이미지, 데이터가 저 편으로 넘어가서 새로운 선택을 하며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호스트들의 데이터가 담긴 더 크레이들과 쌍을 이뤄서 존재하는 곳, 게스트들의 정보가 저장된 더 포지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이곳의 사상은 극단적이기까지 하다. 인간의 복잡성을 호스트의 몸에 주입하면 자꾸 에러가 나지만 알고 보면 인간은 변하지 않는 존재이기에 단순하게 가면 기계의 몸과 조화를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호스트들이 인간들이 짜놓은 내러티브 상에서 행복하게 혹은 문제없이 살아가는 경우와 같다. 호스트와 인간의 경계는 매우 흐릿하다. 양장본 속에 코드로 정리된 책 한 권이 인간의 전 생애라는 시각적 묘사는 훌륭하면서도 섬뜩했다.

10편에서는 그 동안의 여러 의문을 해소시켜주기도 했다. 시즌2 내내 혼란스러운 버나드의 기억은 그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었다. 버나드는 포드의 존재를 프로그램에서 지워버렸지만 이제는 그가 옆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언제나 포드를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1편에서 버나드가 자신이 홍수를 일으켰다고 했는데 10편을 보건대 그가 아니라 돌로레스가 홍수를 일으킨 것 같다. 그가 일부러 자신이 했다고 말한 것일까? 돌로레스가 버나드를 창조했다는 것은 설명이 되었는데 10편을 보건대 그녀는 버나드를 두 번이나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처음 포드의 명령으로 아놀드와 비슷하게 버나드를 만들어낸 이후 웨스트월드를 탈출하여 다시 만들어내는.

주목할만한 반전은 테사 톰슨이 연기한 헤일이 버나드가 되살린, 헤일의 외모를 한 돌로레스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돌로레스가 다른 외형을 갖고 소원대로 웨스트월드를 탈출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녀가 탈출한 세계에는 여전히 헤일의 외형을 한 호스트가 있고 돌로레스의 형상을 한 호스트도 있다. 두 개의 돌로레스인지 아니면 나중에는 헤일의 형상에 다른 '펄'을 넣은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또 재미있는 것은 스텁스라는 캐릭터가 호스트인 걸로 보인다는 점이고, 더욱 놀라운 점은 그가 헤일 버전의 돌로레스를 알아보면서도 그녀를 검색대에서 순순히 보내준다는 것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시즌2에 대해 호평보다는 지나치게 혼란스럽다는 평가를 하는 가운데 언제나 시청자를 속일 수 있는 이 시리즈가 시즌3 이상 존속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시즌 피날레의 거의 유일한 위안은 다음 달 시작될 HBO의 새 시리즈가 꽤나 기대가 된다는 점이다. 에이미 아담스 주연의 Sharp objects!

2018년 6월 15일 금요일

웨스트월드 시즌2 7, 8편

지난 주에 7편에 대한 리뷰를 쓰고 있었으나 마무리가 되지 않아 쓰다 만 내용들을 맨 마지막에 두고 8편 리뷰를 써보려고 한다.

8편은 많은 전문 리뷰어들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에피소드로 평가받았고, 나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엄청나게 많이 등장했지만 언제나 왜 나오는지는 오리무중이었던 고스트 네이션, 인디언족의 정체가 그 우두머리인 아케체타의 회상을 통해 드러났다. 에피소드 시작 부분에서 잠시 드러나듯이 아케체타는 웨스트월드가 조성되기 이전부터 제작된 초기 모델이었다. 그는 처음에 평화로운 인디언 부족의 역할을 공원 내에서 맡고 있었지만 돌로레스가 처음 일으킨 대학살의 현장을 목격하고, 또 역할 변경으로 그의 사랑인 코하나가 자신을 못 알아보는 지경에 이르자 그녀를 납치하여 다시 자신을 알아보게 만들었지만 그녀를 웨스트월드 관리자들에게 빼앗기자 죽음을 감수하며 그녀를 찾아나섰다. 코하나가 기계적 세팅을 초월하여 과거의 사랑을 깨닫는 과정이나 아케체타가 하계에서 죽은 사랑을 찾아나서서 기어이 발견하는 과정은 매우 감동적이다.

미로에 대한 이야기가 시즌2에서 다시 등장했는데, 요컨대 포드 박사가 별 의미없이 혹은 다른 의도로 두었던 물건이었지만 아케체타는 그것이 대단한 의미를 가진, 비밀의 열쇠라고 생각했고 그 미로 문양에 대한 집착은 실제로 그가 자신에게 부여된 경계를 초월하여 ‘저너머 언덕’ 혹은 그가 칭하는 ‘문’을 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아마 10편에서 전모가 드러날 것으로 기대되는 그 장소는 이번에 비교적 오래 카메라에 잡혔지만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메이브는 이번 편에서 거의 드러누워 델로스 사의 직원들에 의해 해체되거나 사라지는 등 운명의 기로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딸을 통해 아케체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아케체타는 메이브의 딸을 지켜내기 위해 계속 주변을 맴돌았다는 점도 밝혀졌다. 그 이유는 그 딸이 아케체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줬기 때문이다.

맨인블랙이 거의 죽을 지경인 가운데 그에게 배신당한 그의 딸이 기어이 고스트 네이션에 사로잡힌 그를 찾아내어 인디언보다 더한 고통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데려갔다. 9편 예고편은 윌리엄 가족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과연 그의 딸이 정말 인간과 호스트의 합성인지 궁금하다.


<쓰다만 7편 리뷰>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많은 총격전이 있었고 수많은 캐릭터들이 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메이브와 맨인블랙의 대결은 두 핵심 캐릭터가 사망할 것처럼 연출되었다. 총에 네 번이나 맞은 맨인블랙, 늙은 윌리엄이 죽지 않는다면, 또 델로스의 보안요원들의 총에 제대로 맞은 메이브가 죽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맨인블랙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메이브는 죽을 것 같은 상황이지만 죽지는 않았다.

클레멘타인이나 안젤라처럼 확실하게 역할이 끝나는 캐릭터들도 있었다. 심지어 테사 톰슨의 헤일 캐릭터도 돌로레스에 의해 죽기 직전이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그랬지만 그 때마다 닥치는 급박한 상황 덕에 죽음을 면했다. 하지만 포드 박사처럼 죽었어도 신 같은 권능을 자랑하는 캐릭터가 있는 세상에서 이러한 죽음들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들의 실제 세상에서의 그것과 다를 것이다. 

버나드는 크레이들의 서버 안, 네트워크에서 포드와 재회했고 웨스트월드의 세상에서 게스트가 호스트를 가지고 노는 것보다 호스트들이 게스트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행동을 저장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놀드의 이미지로 창조된 자신의 탄생 과정을 알게 된다. 

2018년 6월 1일 금요일

13 reasons why 시즌 2

많은 이들이 기다린 넷플릭스의 유명 드라마 13 리즌스 와이의 시즌 2가 얼마 전에 공개되었다. 영국 가디언에서는 청소년들의 시험 기간에 이 드라마가 공개되어 우려가 된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청소년들이 시험의 스트레스가 극심한 때에 이런 드라마를 보다가 자살 충동에 빠질까 우려한 것이다. 드라마는 그에 대한 대응으로 1편의 시작부터 학교에서의 어려움을 어디로 신고하라고 안내했고, 드라마의 매 편이 끝날 때마다 홈페이지 주소를 보여줬다.

이러한 제작사 측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의 내용은 매우 우울하다. 시즌1에서 하나 베이커의 자살 장면이 너무 적나라하여 불편했는데 이번에는 최종회에서 너무나 가학적이고 범죄에 분명한 집단 괴롭힘 장면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괴롭힘의 피해자가 총을 들고 축제의 현장에 가려고 할 때는 미국에서 현재도 학교의 총기 사고로 시끄러운 와중에 설마 드라마가 이렇게까지 나가도 될까 우려했는데 다행히 총을 발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드라마에서 몇 번이나 권총 사격을 하며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을 때는 결국 총을 들고 사고를 일으킬 것이라는 분명한 예고였다. 어쩌면 현재 미국 학교에서 일어난 사고들이 시즌2가 더욱 막장으로 끝나는 것을 막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 드라마는 다양성에 대한 집착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인종, 성적 취향, 계급에 있어서 온갖 종류의 인간들을 모아놓았다. 여전히 핵심 캐릭터는 백인들인 것은 분명하고 바로 주변의 이차적인 캐릭터들에는 많은 흑인이 등장하고 히스패닉도 있다. 재미있게도 동양계 학생 캐릭터는 백인과의 혼혈이거나 아예 입양된 경우였다.

시즌2가 이룬 바는 무엇일까. 브라이스의 범죄는 하나 베이커 하나로 끝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당연하게도 예전부터 있었고,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는 놀라움? 자신의 여자친구마저 그 쓰레기 같은 클럽하우스로 데려가 강간한다는 설정? 아니면 남성 동성애의 만연? 하나 베이커가 재크 뎀프시와 섹스를 하는 사이였다는 점? 하나가 이전 학교에서 따돌림의 가해자였다는 점? 결국 우리는 남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 그 남이 자신의 자식이라도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점이 미덕이라면 미덕일 것이다.

하나가 따돌림을 하는 주체였다는 부분은 최근에 읽은 이기호의 '한정희와 나'라는 단편 소설과 너무 겹쳐졌다. 부모를 사실상 잃고 혈연도 아닌 남의 집에서 살면서 학교에서 다른 아이를 따돌리고, 그 아이가 임대아파트에 산다고 놀렸다는 한정희라는 캐릭터. 특히 아이들의 세상에서는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따돌리는 대열에 합류한다는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운가보다. 어른들의 세상에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할 것이다.

하나 베이커를 잊지 못하다보니 아예 유령으로 자기 곁에 두게 된 클레이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며 이만.

어 콰이어트 플레이스

에밀리 블런트가 출연하여 관심을 갖고는 있었지만 별다른 정보없이 영화를 봤다. 씨네21 같은 곳에서 얼핏 보기로 평이 나쁘지 않아 보였고, 감상 후 해외의 리뷰들도 대부분 호평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서 그렇게 높이 평가할 부분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보지 못 하는 반면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괴물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내지 못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영화가 내세운 가장 독특한 설정이다.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설정은 매우 큰 제약이다. 영화는 그 한계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에밀리 블런트를 출산이 임박한 엄마로 설정했다. 당연히 출산 과정은 많은 소리를 동반하게 되고, 엄마의 고통보다도 막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영화에서는 아기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워서 상자 안에 넣어 소리를 최소화한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왜 영화의 부부-이들은 실제 부부사이란다-는 소리를 내면 안 되는 세상에서 아이를 갖게 되었을까. 영화의 흐름을 보건대 초반부에 로켓 장난감을 갖고 놀다 소리를 내고 괴물의 희생양이 된 막내 아들을 생각하며 아이를 더 낳은 것 같다는 심증은 간다. 하지만 우는 아기를 언제나 산소마스크를 씌워 조용히 만들 수는 없다. 내가 기르고 있는 경험을 토대로 보건대 아이들이 언제 울지 언제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래의 막내, 셋째가 아이다운 호기심 때문에 죽음을 맞이했다면 넷째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장난치다 소리를 내는 위험한 상황은 몇 번이고 일어날 수 있다. 그럴 경우 형, 누나와 부모는 셋째 때처럼 침묵을 하며 남은 이들의 목숨을 유지하거나 비극의 광경을 함께 슬퍼하다가 죽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대책없이 아이를 낳은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기계를 만지는 능력 외에 직접 무언가를 제작하는 능력까지 갖고 있었다. 기계 장치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는데 누나 역할의 아이가 실제로 청각장애가 있고 영화에서도 그런 설정이라고 하니 보청기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기계의 볼륨을 높일 때 나는 소리를 괴물들이 질겁을 하는 것만 보면서는 원래 괴물을 공격하는 무기인줄로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런 효과를 미리 알고 제작했다면 진작에 실험을 했을 터이니 보청기의 부수 효과가 괴물을 퇴치했다고 봐야겠다. 괴물들은 두꺼운 철판도 종이처러 가볍게 찢어버리는 다리를 갖고 있지만 일단 괴로운 소리를 들은 후 엽총으로 얼굴을 맞으면 퇴치가 되었다. 인간들이 마침내 괴물을 퇴치할 매뉴얼을 얻었다.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욕조에서 피를 흘리며 아이를 낳기 직전의 상태였던 에밀리 블런트가 나중에 샤워실에서 피묻은 손으로 벽을 턱 짚으며 아이를 남편에게 내보인 장면이었다. 싸이코나 타이타닉의 유명한 장면들이 연상되면서, 괴물을 유도하기 위한 용도였으나 어찌되었건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포가 터지는 와중에 에밀리 블런트는 아이를 낳고 탯줄도 끊으며 알아서 출산 과정을 처리했다. 그녀가 자체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혈압계로 자신의 상황을 체크하고 달력에 날짜를 표시하며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것을 생각하면 출산 과정을 그것도 남편의 도움이 없을 경우도 가정하여 대비했을 것이다.

타자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인지 뉴요커의 영화평에서는 영화가 백인 일색임에 대한 불편함이 드러났다. 요즘 영화에서는 다양성이 강조되다보니 오히려 구색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섞어놨다는 느낌의 영상물도 적지 않다. 영화는 분명 다양성을 다루지 않는다. 괴물과 인간의 화합 따위는 고려되지 않는다. 어제 훑어본 침입종 인간이라는 책의 내용과 유사하게 괴물과 인간은 지구의 최고 포식자 자리를 놓고 다툴 뿐이다. 그리고 청각장애 소녀의 우연한 발견 덕분에 괴물들이 소탕될 수도 있고, 너무 많은 괴물들이 몰려와 그 가족은 모두 죽고 괴물 퇴치의 비급은 영원히 소실될지도 모른다.

청각이 예민한 괴물과 청각 장애 소녀의 극명한 대비. 남편 역이자 영화의 감독은 소리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리를 낼 수 있는 자유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정치적 메시지까지 있을까? 눈이 멀고 싫은 소리를 내는 존재는 소멸시키는 괴물은 망가진 정치 권력에 대한 메타포일까? 뉴요커의 리뷰에서 죽어가는 성인 남성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분노의 외침을 지른다고 지적했는데 그렇다면 이런 식의 상상에 근거가 될 수도 있겠다.

영화는 설정 내에서 나름대로 논리적인 완결성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놀라운 지점은 별로 없었기에 아쉬웠다. 괴물은 어디선가 많이 본 형태인데 어떤 영화의 괴물과 유사한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18년 5월 30일 수요일

웨스트월드 시즌2 6편

이번 편은 주요 인물들이 모두 등장하는 흔치 않은 에피소드였다. 그만큼 정신없는 전개가 이어졌다는 것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 것 같지만 별로 진전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쇼군월드는 이번 편에서 짧게 나온 이후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무사시와 아카네는 메이브 일행을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 여기에는 실용적인 이유들이 작용했으리라 본다. 메이브는 초능력을 통해 쇼군월드의 인물들과 일본어로 대화할 수 있지만 극중 설정상(원래는 영어를 잘 함에도) 일본어만 해야 하는 무사시와 아카네에게 더 대사를 준다면 영어 자막이 화면에 자꾸 등장해야 하고 미국 시청자들에게 불편을 끼칠 것이다. 그럼에도 쇼군월드의 궁수는 일본인 캐릭터로 유일하게 메이브 일행에 합류했다.

늙은 윌리엄은 딸과 눈물의 대화를 나누었다. 윌리엄이 딸이 포드가 만들어낸 호스트로 오해(?)하는 장면이 이번 에피소드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어떤 리뷰어는 그녀가 델로스 회장처럼 호스트-인간의 혼종일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델로스 회장에 대한 실험이 근래에도 실패한 마당에 다른 인간의 경우는 성공할 수 있었을까? 여하튼 윌리엄은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딸의 회유에 넘어가는 듯 했지만 결국 거짓말로 드러났고 딸을 버려둔채 자기의 목적, 어떤 리뷰어도 알 수 없어 답답해하는 그 무엇을 향해 이번에도 전진했다.

돌로레스는 자신의 결정의 결과를 보게 된다. 테디는 더 이상 마음 착한 순정파 남자가 아니라 불필요한 살인을 서슴지 않는 악한이 되었다. 돌로레스 일행은 기차를 본부로 돌진시켜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는데 그 피해 정도는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돌로레스에 관해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에피소드 시작부에 등장한다. 시즌 초반에 아놀드가 돌로레스의 상태에 대해 경탄하면서 우려하는 듯한 장면으로 보였던 것이 사실은 돌로레스가 버나드의 충실성을 시험하는 장면으로 드러난 것이다. 예고편의 장면을 감안하면 수많은 버나드들이 있는 듯 하고 돌로레스는 그 모델들을 테스트했던 모양이다.

하이라이트는 포드 박사가 결국 얼굴을 드러낸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일이 그렇게 되리라고 예상했을 터이다. 그는 예상대로 호스트들이 존재하는 데이터 서버의 네트워크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웨스트월드의 관리자들, 기술자들이 원래 상태로 돌리는 것을 막을 정도로 강력한 그의 능력은 이야기가 어떻게 진전될지 궁금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