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5일 토요일

Roma (2018)

알폰소 쿠아론의 화제작!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로마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지금 일반 상영관에서도 볼 수 있지만 보통 대중적 인기가 없는 영화를 상영하는 작은 영화관 몇 곳에서만 상영되고 있다. 김세윤 작가는 이 영화를 큰 스크린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오래 묵혀둔 프로젝터를 틀어서 80인치 스크린으로 감상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잠들기를 기다린 후 밤 늦게 보기 시작한 나는 중간에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시 졸고 말았다. 많이 놓치지는 않았으나 흐름이 조금 끊긴 것은 사실. 늦은 밤의 몽롱함 때문인지 이 극찬을 받은 영화, 내가 좋아했던 그 영화들의 감독의 신작이 처음에는 왜 그렇게 격찬을 받는지 잘 와닫지 않았다.

영화는 1970년경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다. 쿠아론 감독 자신의 이야기라는 정도는 알고 봤다. 큰 집에 사는 한 가족이 있다(그러니까 쿠아론의 가족인데 영화속 이름은 변경되었다). 가족은 할머니 하나(나중에 밝혀지기론 외할머니다), 부모, 아이들 넷이다. 개가 한 마리 있고 집에서 일하는 식모(?)는 두 명이다. 이 부유한 집의 가족과 식모들의 차이는 한 눈에 들어온다. 흑백 화면이기에 피부색 차이까지 잘 들어오지는 않지만 가족들은 백인(혼혈이라도 거의 백인에 가까운)이고 식모들은 인디오에 더 가까울 것으로 추정되는 인종이다. 가족의 친척, 그러니까 쿠아론의 삼촌집도 상당히 부유해보였고 이곳은 아예 미국인이 한 가족일 정도로 더욱 백인에 가까워보였다.

주인공은 식모 중 한 명인 클레오다. 아이들의 엄마처럼 늘씬하고 호리호리하지 않은, 그러니까 잘 사는 백인, 부르주아 백인과 거의 정반대에 놓인 인물로서 클레오가 설정된다. 그녀가 처음 등장하는 영화의 오프닝은 알고보면 바닥에 있던 개똥을 물로 닦아내는 광경이었다. 영화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는 이 집의 개 한 마리가 어떻게 그렇게 똥을 많이 싸느냐다. 클레오가 개똥을 자주 안 치웠던 것인지 몰라도 복도라고 불러야할지 모를 그 장소를 카메라가 비출 때는 자주 개똥이 여러 곳에 놓여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큰 집을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해야할 클레오에게는 큰 도전인 셈이다.

이런 현격한 계급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클레오가 집주인들로부터 천대를 받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우대를 받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저녁에 온 가족이 모여 예능 프로그램 혹은 웃긴 영화를 보고 있을 때 그녀도 그 옆에 앉아 같이 감상을 해도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의도치 않게 임신을 했어도 쫓겨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에게 아기침대까지 제공될 예정이었다. 클레오는 쉬는 시간에 밖에 나가 연애를 할 여유도 있었다. 특히 아이들에게 있어 그녀는 식모보다는 이모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평범한 일상은 아버지의 부재와 클레오의 임신으로 인해 바뀌어갔다. 클레오를 임신하게 만든 페르민은 그녀와의 연락을 끊었다. 출장을 갔다는 아버지는 사실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다. 페르민은 멕시코 정부의 사주를 받은 청년단체에서 일하며 결국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학살하는 주범 중 하나가 된다. 아기침대를 고르던 클레오는 그 때 학살의 광경을 목격하고, 그 중에 총을 든 페르민을 본 충격 때문인지 갑자기 양수가 터졌지만 아이를 사산하고 만다. 쿠아론 감독은 사산의 과정을 꽤 길고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학살자라는 충격은 연이은 사산의 충격으로 이어졌고, 그녀는 죽은 아이를 잠깐 안아보고 의료진에게 아이를 넘겨주어야했다.

영화에서는 자동차가 주요한 소재로 사용되었다. 이 집에는 자동차가 적어도 두 대는 있다. 아버지는 포드사의 폭이 넓은 자동차를 모는데 집안에 주차시킬 때마다 차 옆이 긁히지 않도록 조심해야할 정도로 너무 넓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떠난 이후 이 차를 매우 조심성없이 몰아서 양 옆이 다 긁히게 만든다. 마치 남편의 존재를 지우려는 듯한 그 행동은 결국 남편과의 결별을 정식화하는 과정에서 포드의 그 큰 차를 팔아치우고 더 작은 차를 사는 것으로 이어진다.

새 차를 산 아내/어머니 소피아는 아이들과 클레오를 데리고 여행을 간다. 이 여행은 사실 남편이 자신의 짐을 빼도록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 여행 과정에서 바다를 즐겨 찾은 이 가족은 큰 위기에 처한다.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바다에서 놀던 아이 두 명이 엄마 말을 듣지 않고 더 깊은 곳에서 놀다가 거의 익사할 지경에 처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바다에 전혀 들어가지 않던 클레오-그녀가 수영을 할 수 있는지조차 불투명하며 그녀는 출산한지 얼마되지 않아 몸이 약한 상태였다-가 높은 파도 속으로 전진하며 두 아이를 구해내는 장면은 숭고하다고 할만하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잃은 것을 만회하려는 듯이 주인집의 아이들을 구조했다. 이어진 엄마와 네 자녀 그리고 클레오가 바닷가에서 얼싸안은 장면은 영화의 포스터 이미지이기도 하다. 혼자 남은 여자, 아이(들)을 홀로 키워야하는 처지의 엄마로서 소피아와 클레오는 운명을 공유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짐 정리, 집 정리를 하는 와중에 클레오가 옥상에 올라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긴 시간 동안 옥상 위의 클레오는 내려오지 않는다. 그녀가 위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고, 그녀가 아래로 몸을 던지거나 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영화 초반이 집의 일부인 바닥에 카메라를 고정시켜 보여주었던 것처럼 영화의 끝은 집의 가장 높은 곳을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며 잡고 있다. 상징의 차원에서 보자면 개똥을 치우기 위해 바닥을 응시하던 클레오를 더 고양된 인격을 가진 존재로 위치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전작인 그래비티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하겠는데, 그래비티에서는 우주에서 계속 하강해 물속을 거쳐 지상으로 올라오는 생명의 역사가 축약된 바 있다. 클레오는 승천한 것일까? 첫 장면에서 클레오가 안 보였지만 존재했던 것처럼 마지막에서도 그녀가 안 보여도 존재하고 있을 것 같다.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씬은 그래비티를 즉각 연상시킨다. 해외 리뷰에서도 감독이 이 영화를 본 것이 그래비티를 만든 직접적 계기인 것처럼 연출되었다는 평이 있다. 그러나 칠드런 오브 멘, 그래비티에 이어 로마도 직접적으로 젊은 엄마와 아기라는 소재가 사용되었고(이 투 마마 탐비엔도 그런 면이 있었던 것 같다), 이는 단순히 한 여성이 잉태를 하고 출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칠드런 오브 멘에서처럼 인류의 미래가 달린 문제일 수도 있고, 그래비티처럼 인류의 역사를 포함하면서 초월하는 생명의 역사에 대한 고찰이기도 했다. 후반부 바다에서 아이들을 구출하는 장면은 그래비티의 후반부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대학생들을 학살한 젊은 남성들이 훈련을 하던 장면에는 미국인 교관과 한국인 교관이 있었다. 한국인 교관은 새로 왔고 엄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는 한국말로 청년들을 통제했다. 실제 있었던 일인지 매우 궁금해지는 부분이었다. 71년에 왜 한국인 교관이 멕시코 정부의 일을 했던 것일까? 군부 독재의 경험 때문일까? 태권도? 월남전? 미국인 교관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는데 한국인이 개입되어있었다면 흥미로운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영화가 알폰소 쿠아론의 경험이 반영된 것이라면 그가 어린 시절 이런 광경을 목격했을까? 영화에서는 클레오만 그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쿠아론이 클레오의 말을 전해들었는지 아니면 아예 다른 경로로 전해들은 것을 클레오의 경험으로 상상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2018년 11월 26일 월요일

Mad men

매드멘은 존 햄을 스타덤에 세운(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드라마이고, 내가 AMC라는 채널을 인지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이미 드라마는 종결되었고, 나도 그 엔딩을 보긴 했다. 하지만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몰랐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어쩌다 시즌1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1편의 맨 처음에 매드멘이라는 말의 뜻이 나온다. 그동안은 왜 여기에 나오는 남자들이 미쳤다는 것인지 궁금했던 터였다. 알고 보니 미쳤다는 게 아니라 뉴욕 매디슨 애비뉴에 있는 광고 회사에 있기 때문에 매디슨의 축약으로 매드라는 말이 나온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캐릭터들이 평범하지는 않기에 미쳤다는 매드라도 이해를 할 수 는 있다.

존 햄이 연기한 돈 드레이퍼는 어린 시절 가난한 집에서 자라며 아버지에게 많이 맞았는데, 한국전쟁을 계기로 도널드 드레이퍼라는 남의 이름으로 살아가며 광고회사의 중역으로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그는 모델 출신의 아름다운 아내가 있음에도 여러 여성들과의 외도를 즐긴다. 다만 회사의 주인이자 동료인 로저 스털링이 외도 자체를 즐기는 것과 달리 돈 드레이퍼는 일종의 구원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전에 봤을 때는 잘 인지하지 못했지만 돈이 지속적으로 외도를 할 때는 한 명의 여성만 상대하고 있으니 결코 바람둥이는 아니다. 결국 시즌이 거듭되어 가면 그는 결국 아내와 이혼하고 자신의 비서와 결혼하지만 그 관계도 오래가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돈 드레이퍼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페기 올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페기를 연기한 엘리자베스 모스는 존 햄처럼 이 드라마로 스타덤에 올랐는데 이제는 핸드메이즈 테일 등을 통해 존 햄 이상의 명성을 얻고 있다. 페기는 돈의 비서로 출발하여 작가writer로 승진하는데 이어 계속하여 자신의 지위를 높여가는 여성을 대표한다. 1950년대에서 시작하는 드라마의 시대 배경에서 여자가 광고 카피를 쓴다는 것은 개가 글을 쓴다는 것과 비견될 정도로 남자 카피라이터의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능력과 야망에 더해 주요 남자 캐릭터들과의 미묘한 관계를 이용해 적대적인 세계에서 살아남는다. 비록 페기와 돈은 성이 다르지만 결국 닮은 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지금까지 다시 보기한 부분에서 인상적인 대목들이 몇 개 있다. 결혼하여 아이 둘을 두고 살아보니 너무 공감되는 장면이 있는데, 베티가 아들이 집안에서 사고를 치면서 화가 날대로 난 상태에서 돈에게 화를 내는 부분이다. 어린 딸과 아들을 아내가 혼자 돌봐야 하는, 요즘 엄마들 말대로 '독박 육아'의 상황에서 지쳐버린 아내가 남편에게 아이를 혼내라고 하자 남편, 즉 돈은 말로만 타이르고 나오고, 베티는 그게 뭐냐고, 때려야한다고 말하고, 아들이 또 사고를 치자 돈은 물건을 집어 던지며 이제 만족하냐고 소리치는 장면은 정도가 덜하지만 나도 겪은 일처럼 느껴졌다. 돈은 회사일을 핑계로 종종 늦게 들어오고, 그는 퇴근 후 주로 아이들의 잠든 모습을 보고, 아침에 잠깐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는 아이들과 별로 놀아주지 않고 아이들이 오면 TV를 보라고 보내버린다. 이 역시 나의 모습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 반성하게 된다.

페기가 피트 캠블의 아이를 낳는 상황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그녀가 임신 사실을 전혀 모르다가 갑자기 애를 낳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회사의 남자 직원들은 임신으로 후덕해진 페기를 조롱하다가 출산 후 날씬해진 페기를 보며 그녀가 돈의 아이를 낳은 것으로 짐작했다. 페기는 마침 돈의 명령으로 비서에서 작가로 갑자기 승진하기도 한 터였다. 페기는 입덧도 안 했단 말인가? 아이가 발로 차는 걸 느끼지 못할 수 있나? 그렇다고 심각하게 아이가 빨리 나온 것도 아니었다. 이 부분은 경험상 전혀 납득이 안 되었다. 그녀가 아기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기억이 정확치는 않지만 육아를 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녀는 태어난 아기를 안아보라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외면해버렸다. 아마 그녀 혼자 사다리를 타며 올라가기에도 벅찼기 때문에 195,60년대의 시대 배경에서 가정과 일 모두에서 성공하는 수퍼우먼을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페기와 피트의 관계도 불가사의다. 입사 후 얼마 되지도 않아 결혼식을 올리기 직전의 피트와 관계를 가진 페기는 한 번 회사에서 피트와 재차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피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할 남자인 걸 알고도 그와의 관계를 원했다. 아마 피트를 좋아하기도 한 것 같다.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의 구조와 흐름상 페기는 자기주도적이고 자기결정권을 수행하는 젊은 여성 캐릭터이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제도와 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가 남자를 선택해서 좋으면 관계를 가졌던 것 같다. 페기가 광고할 대상인 다이어트 기구를 체험하는 과정에서 기구의 부수적 효과인 자위의 기능을 발견하고 즐기는 장면들도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피임은 몰랐던 모양인데 그것이 당시 미국의 현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돈 드레이퍼가 가짜 정체성,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의 이름으로 사회적 성공을 하고, 그래서 자기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남의 성을 붙이는 결과를 낳고, 드라마 속 어느 히피?의 비난처럼 없는 욕망을 부추기는 광고업을 한다는 설정은 무슨 의미일까. 피트는 자기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고 있지만 자기는 아버지가 된 줄 모르며 아내와 산부인과에 가서 테스트를 받는다. 한편 그의 직업을 좋아하지 않던 아버지는 유명한 비행기 사고로 갑자기 죽는다. 바야흐로 시대는 TV의 대중화로 광고업도 큰 변화를 맞게 되어 해리 크레인이라는 캐릭터는 갑자기 TV 부문을 담당하게 된다. 전후의 번영은 계속되어 모든 산업이 성장하고, 광고는 소비자들의 욕망을 일깨우고 창출하여 성장은 가속화되는 흐름이 영원할 것 같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돈이 배다른 동생과 그가 상징하는 가난과 비굴의 과거를 단호하게 내친 것이 상징하듯 또 쿠퍼 사장이 휘트먼이라는 돈 드레이퍼의 과거의 자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처럼 지금 그리고 미래에 회사에 많은 이익을 낼 인물이라면 과거는 무의미했다. 로저 스털링은 어메리칸 에어라인을 얻을 수 있다면 과거의 고객이지만 소규모인 모호크 에어라인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의 욕망, 여성의 욕망은 광고업계가 가장 신경써야 할 큰 손이 되었다. 소련이 위성을 쏘아올리고, 미국에서는 케네디라는 젊다 못해 어린 대통령이 당선되는 시대의 분위기는 새로움을 숭상했던 것일까. 지금도 특히 IT라는 분야는 새로움을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하여 숭배한다. 혁신이 없는, 잡스가 없는 애플은 예전같지 않다고 비난한다. 모든 과거가 아름답지 않은 것처럼 모든 새로움이 좋은 것일리도 없다. 매드멘 시리즈의 마지막 광고는 코카 콜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찌되었건 해방을 경험한 돈 드레이퍼가 코카 콜라 광고를 만들었다는 건 우울한 일이다. 광고란 그렇게 거품이 가득한 달짝지근한 것이려나.

2018년 11월 4일 일요일

퍼스트맨 (2018)

 대미언 셔젤(?)의 신작 퍼스트맨에 대한 반응은 전작들에 비해 미지근하다. 위플래쉬의 폭발적 에너지, 라라랜드의 아름다움(?)에 비해 이 영화는 심하게 흔들리는 카메라웍으로 어지름증을 유발한다. 그만큼 1960년대 달에 인간을 보내겠다는 미국의 조급증은 위험한 사업을 진행했음을 반증하고 있고, 이 영화는 그런 면을 비교적 솔직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케네디가 완전히 무모한 계획을 공언한 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인간은 비행기를 타고 대기권을 벗어난 비행을 하기 시작했고, 영화 시작부에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닐 암스트롱은 나사 소속이 아니라 어떤 민간 업체?에서 일하면서 대기권 밖으로의 비행을 경험했다. 그렇게 조금씩 지표면에서 더 멀어진 비행의 경험은 fly me to the moon이라는 낭만적 가사를 현실감있게 만들어나갔다.
 인간을 달로 보내는 과정은 많은 비용이 들었다. 물질적 비용뿐 아니라 오랜 시간 길러낸 미국 최고의 인적 자원들도 희생되었다. 영화에서도 자료 화면이나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지금 내 옆에서 힘들어하는 이웃, 미국인이 있는데 도대체 왜 달로, 우주로 가기 위해 터무니없는 돈을 쓰느냐는 항의가 등장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먼저 소련으로 인공위성을 보내고 사람을 태워서 보낸 소련과의 경쟁이었고, 이 경쟁은 단순한 과학 기술의 선봉에 서느냐가 아니라 장거리 미사일을 비롯한 군사적 위협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문득 소련이라고 인명 희생없이 그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며 그런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해진다. 영화에서 나온대로 백인들만 달에 갔는데 유색인종의 우주 탐험 참여의 역사도 생각해봄직하다.
 퍼스트맨은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세계적 박스오피스 상황을 보면 한국에서는 비교적 성적이 좋은 편이다. 라 라 랜드에 대한 충성심이 반영되었을 것인데 그럼에도 졸렸다는 반응이 많아서인지 소위 대박 흥행까지는 아니었다. 미국인들은 닐이 달표면에 미국 국기를 세우는 장면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고 분개했고 그것이 저조한 흥행에 기여했다는데 한국 사람들은 그런 거야 상관없다.
 개인적으로는 딸이 아기 때에 워낙 병으로 고생을 했던 터라 영화 초반 닐의 어린 딸이 힘들어하다가 죽는 장면부터 왠지 공감이 되어버렸다. 그 괴로운 경험과 기억은 인류 최초로 달을 밟게 되는 닐의 여정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에게 달에 간다는 것은 딸의 죽음을 잊기 위한 새로운 도전같이 보이기도 했고, 그 도전의 과정에서 친구 이상, 거의 가족같은 동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죽어감에 따라 더 이상의 죽음을 막기 위해 나라도 성공해야겠다는 결의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워낙 보편적인 것이라 퍼스트맨 이후 본 영화들에서는 유사한 설정들이 눈에 띈다. 중국 돈으로 만든 에단 호크 주연의 24 hours to live에서 주인공 트래비스는 일 년 전에 아내와 아들을 잃었고 어떤 암살 계획의 진행 와중에 아들의 환영이 귀신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퍼스트맨에서 닐의 눈앞에도 죽은 딸이 종종 나타났다. 12 strong이라는 9.11 이후 탈리반을 물리치기 위한 미군 12명의 이야기에서는 파병이 결정된 이후 군인들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어, 퍼스트맨에서 닐이 달로 가기 직전 두 아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한 달도 되지 않은 듯 한데 훌루에서는 더 퍼스트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공개되었다. 무려 숀 펜이 주연인데 공교롭게도 우주비행에 대한 드라마였다. 줄거리를 정확히 모르고 봤을 때는 퍼스트 맨이라는 영화가 개봉하는데 더 퍼스트라는 드라마가 거의 비슷한 이야기로 방송을 한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작년 말과 올 초에 게티 가문의 이야기가 영화와 드라마로 거의 동시에 나왔던 것과 비슷해보였다. 알고 보니 드라마는 달 여행이 아니라 가상의 미래에 화성으로 인간을 보낸다는 설정이었다. 대망의 발사일에 우주선은 출발 얼마 후 폭발해버리고 새로운 우주인들을 모으고 다시 화성으로 가기 직전까지가 이 드라마 시즌1의 내용이었다.
 톰 행크스가 주연이었던 아폴로 13은 아직 안 본 상태인데,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당연히 닐 암스트롱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후의 이야기였다. 여하간 퍼스트 맨은 달 탐사에 대한 관심을 더 갖게 만들어서 HBO가 예전에 만들었던 From earth to the moon이라는 드라마도 볼 예정이다.
 며칠 전 드니 빌뇌브의 시카리오를 다시 보았다. 처음 볼 때는 음악의 작용과 마약 카르텔에 의해 처참히 죽은 시체들의 광경 때문에 인상적이었던 영화인데 두번째로 볼 때는 무엇이 올지 알고 있어서인지 이 단순한 플롯의 영화가 무엇이 대단했던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미국의 20?30?%가 마약을 하지 않았던들 이런 초법적 대처는 안 할 거라는 조쉬 브롤린의 대사가 아마도 영화를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을 것이다.

2018년 9월 12일 수요일

오작Ozark 시즌 2

시즌1때부터 벼랑 끝에서만 사는 남자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를 매 에피소드마다 보게 되면 긴장하게도 되지만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는 생각도 자꾸 든다. 잭 바우어라는 캐릭터가 주인공인 24의 스토리도 처음에는 재미있어도 시즌이 거듭되면 이건 좀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고 만다. 오작의 두번째 시즌은 시즌1에 비해 훨씬 흥미가 떨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멕시코 카르텔의 수장은 여성 변호사 캐릭터로 대체되었다. 주요 캐릭터들이 네 명이나 죽어나갔다. 사실 멕시코 카르텔과 지역 갱이 연루되었는데 이 정도 희생자는 적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시즌3가 나온다면 기존 캐릭터들의 공백을 어떻게든 메워야 한다. 물론 다 감안하고 캐릭터들을 퇴장시킨 것이겠지만 등장인물이 많지도 않은 드라마에서 이 정도의 공백은 커보인다. 스토리를 보건대 시즌2로 마무리지을 것 같지도 않다.

시즌2는 카지노를 새로 설립하여 위기를 타개하려는 마티 버드의 분투가 결실을 맺는 것으로 끝난다. 이번에는 마티의 역할이 매우 축소되어 그는 주인공이지만 스토리에서 매우 겉돌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를 대신하여 아내인 웬디의 활약이 대폭 늘어나고 마지막에는 그녀가 가족을 이끄는 역할을 이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아들은 어린 나이지만 총으로 사냥을 하며 피맛을 처음 경험하고, 아버지의 방법을 배워 가명 계좌를 만들고 돈을 해외로 반출한다. 아버지의 일상이 어린 자식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극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이런 흐름을 보면 버드 가족이 오작에서 새로운 범죄 조직의 보스가 되는 시나리오마저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갱단을 말로 구워 삶고, 멕시코 카르텔의 후원까지 얻었으며, 지역 정가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이 가족은 이미 지역 범죄의 핵심적 고리라고 볼 수 있다.

마티 버드의 가장 큰 난관은 다른 무엇보다도 멕시코 카르텔이다. 지역의 갱들은 지역을 벗어나면 신경쓰지 않아도 되지만 카르텔의 조직은 영향력의 지역적 범위가 완전히 다르다. 그리하여 마티는 호주의 황금 해안으로 탈출하는 꿈을 꾸었지만 아내는 카르텔과의 공생이야말로 생명 연장의 비책이라 생각한다. 만약 조직을 배반하지 않는다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웬디의 해결책이 더 나은지도 모른다. 다만 그 길은 영원한 범죄의 길이기에 마티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피터 뮬란이라는 배우는 오작 시즌1에서 처음 인지하게 되어 깊은 인상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웨스트월드 시즌2에서도 짧은 출연이었지만 좋은 연기를 펼쳤다. 그의 퇴장은 매우 아쉬웠는데, 그로 인해 오작의 세계는 여성들 셋 혹은 네 명이 범죄 조직/가족을 이끌면서 상호 작용을 하는 풍경이 펼쳐지게 되었다. 버드 가족, 랭모어 가족, 스넬 가족 모두 여성이 주도권을 차지했고, 카르텔의 대표인 여성 변호사 재닛 맥티어까지.

2018년 9월 3일 월요일

톰 클랜시의 잭 라이언 시즌1

아마존에서 제작한 드라마다. 1시즌이 8편으로 비교적 짧게 끝났다. 최근에 본 샤프 오브젝츠도 마찬가지로 8편이 한 시즌이었는데 두 드라마의 페이스는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잭 라이언은 액션으로 가득하고 제작비를 많이 들였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주연은 에밀리 블런트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되어 내게 충격을 준 존 크래신스키다. 톰 클랜시의 원작을 보지는 않았으나 이번 드라마에서 잭 라이언이라는 배역은 과거 아프간에서 파병 생활을 한 해병대 출신의 경제학 박사가 CIA의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이슬람 테러 조직의 리더를 포착해내고 그의 음모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역할이다. 그가 사무직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테러리스트인 술레이만, 그의 애인이 되는 애비 코니쉬의 캐씨가 모두 그를 처음에 분석가 혹은 사무직으로 알았다는 점이 반전의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잭 라이언은 해병대 출신이라 육체적인 다툼에서 그 능력이 발휘되기도 하지만 그의 큰 기여는 보통 사태의 핵심을 포착해내는 그의 분석력과 번득임에 있다. 그래서 그가 박사이면서 가장 똑똑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캐릭터라는 점이 중요하다.

드라마는 이슬람의 테러리스트라는 흔한 악역을 상정했지만 그 악이 탄생하고 숙성한 배경으로서의 미국 그리고 더 넓게 서구 문명의 책임에도 주목했다. 드라마의 시작이 1983년 미국의 폭격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두 형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바로 이들이 장래의 술레이만, 알리 형제인 것이다.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서 자라난 두 형제는 프랑스 백인들의 편견 때문에 정상적인 프랑스인이 될 수 없었고, 디지털 금융의 미래를 2001년에 꿈꾸었던 술레이만은 동생 대신 감옥 생활을 한 후 테러리스트가 된다. 

드라마는 과거와 미래의 이야기를 잘 엮고, 1편에서 8편의 구성도 잘 된 드라마였다. 하지만 천의무봉 같은 물샐틈 없는 이야기 구조는 아니였고, 엉성한 부분들도 있다. 시즌2 이후를 위한 포석일 수도 있겠고, 혹은 시즌 편 수를 조정하는 과정의 부산물인지도 모르겠다. 애인이 되는 에볼라 전문의 의사 캐씨와의 첫 만남부터 모든 이야기들에 우연적 요소가 많이 개입되는 점이 가장 눈에 띄고, 술레이만이 굳이 미국에 직접 와서 하필 잭 라이언의 총에 맞아 죽는 것은 스토리의 완결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지 모르지만 역시 현실적인 대목은 아니라고 하겠다. 드론 공격에 대한 스토리는 전체 흐름에서 매우 부차적으로 보이는데 왜 포함되었는지 의문이다. 미국의 드론 공격에 인간성이 개재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일까?

잭 라이언의 상사인 그리어가 모스크바로 가게 되는데 아마도 시즌2는 잭이 러시아에 가서 벌어지는 일일까? 드라마에서 CIA의 국장? 부국장?은 잭에게 높은 곳에 가기 위해서 필요한 점에 대해 말했는데 위키피디아의 잭 라이언 캐릭터 항목을 보면 그가 나중에 대통령이 된다고 하니 그야말로 그는 최대한 높이 올라간 인물인가 보다. 

2018년 8월 30일 목요일

샤프 오브젝츠 피날레

샤프 오브젝츠가 8편의 한 시즌으로 결말을 맺었다. 원작이 있는 드라마이고 원작 내용을 미리 알아버린 터라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8편이 펼쳐지는 방식 자체는 흥미로웠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8편은 카밀이 자기 집의 저녁 시간에 홀로 늦게 참석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카밀은 고기, 아마도 엄마 소유의 돼지 사육 농장에서 온 구운 고기를 먹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앓는다. 이후 그녀는 엄마인 아도라가 동생들에게 먹여온 파란 유리병의 독약을 기꺼이 먹고 더 달라고 한다. 이런 전개 자체가 한동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배가 아팠을까? 먹었던 고기에 엄마가 독약을 탔을까라는 의심만이 남았지만 확신은 생기지 않았다.

8편 리뷰들을 보니 애초에 카밀이 아도라의 악행, 자신의 딸들에게 독을 먹여 길들이는 그 범죄를 증명하기 위해, 자기 몸을 증거로 만들기 위한 희생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이해가 가지만 신문사의 편집자가 제 시간에 자기에게 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진정한 아버지 같은 역할을 맡긴 했다. 아마 카밀은 엄마의 독약 때문에 죽더라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는지 모른다. 이미 자기의 동생을 죽였던 엄마가 윈드 갭의 두 소녀 살해까지 저질렀다고 믿은 카밀은 그 범죄의 고리를 끊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편집자가 어떻게 아도라의 범죄를 경찰과 형사에게 설명했길래 그들이 설득되어 아도라의 저택에 쳐들어왔단 말인가. 아마 존 킨이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한 것이 영향을 끼치진 했을 것이다. 어떤 리뷰에 따르면 7편에서 뜬금없이 보인 카밀과 존의 정사가 존의 자존감을 되찾게 해주었다고 한다. 이해는 가는 설명이다.

8편은 많은 부분을 짤막한 장면을 이어붙여 빠른 전개를 보여주었다. 아도라가 체포된 이후 소설처럼 애마는 언니를 따라 세인트루이스로 가서 둘이 산다. 친구를 새로 사귀는데 그 친구가 어느 날 행방불명. 카밀은 애마의 인형 집에서 이빨들을 발견하고 윈드갭 소녀 살인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 깨닫는데 이 때 들어온 애마는 '엄마에게 말하지마'라고 말하며 드라마가 갑자기 끝난다. 이렇게 끝났어도 이야기는 되는데 감독은 크레딧이 조금 올라가는 와중에 짤막하게 애마의 세 건의 살인 장면을 삽입했다. 이후 숲 속의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아도라가 아니라 애마였다는 장면까지 보여준다.

이런 결말을 알고 처음부터 보면 조금 더 재미있어질 구석이 있다. 그리고 카밀의 시점에서 보였던 과거 장면, 글씨들까지 주의해서 보면 그녀의 심리를 더 이해할 수도 있겠다. 감성이 메말라서인지 비교적 찬사를 받고 있는 이 작품이 쉬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작가 자신의 인터뷰가 몇 개 공개되었는데 비커리 서장은 카밀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한다. 아도라는 어릴 때부터 비커리를 알았겠지만 계급적 차이 때문에 결코 심각한 연애를 하지는 않고 그냥 치근대는 수준에서 그쳤으리라는 것이다.

작년에 빅 리틀 라이스로 성공을 거둔 샤프 오프젝츠의 감독은 빅 리틀 라이스 시즌 2로 돌아온다고 한다. 캐스팅은 유지되는지, 이번에는 어떤 악을 다룰 예정인지 궁금하다. 샤프 오브젝츠를 이을 HBO의 다음 드라마는 작년에 시즌 1이 방영된 제임스 프랑코, 매기 질렌할의 듀스 시즌 2인 모양이다. 

2018년 8월 21일 화요일

싱글 라이더, 비밀은 없다, 불한당, 지금 만나러 갑니다

한국 영화들을 오래간만에 몰아봤다. 가장 인상적인 순서대로 제목에 적어봤다.

싱글 라이더는 작년 초반에 개봉했던 영화로 당시 정우가 주연한 재심과 제임스 맥어보이의 23 아이덴티티와 경쟁했다고 한다. 이병헌 주연의 영화지만 총 관객은 30만명 안팎에 그쳤다. 사실 나는 이런 영화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다.

영화의 반전이라고 할 부분에 대해서는 따지고 보면 큰 반전은 아니다. 왜냐하면 초반부터 암시는 매우 많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객들 앞에서 수모를 당한 후 집 노트북 앞에 앉은 재훈의 모습은 누가 봐도 자살을 결심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그가 고객들에게 남긴 이메일의 내용도 충분히 그렇다. 책상 위의 약통. 정신병원에서 처방받은 그 약들. 하지만 그가 시드니행 비행기를 예매하는 모습도 보이고 그가 실제로 비행기를 타고 호주로 가는 가니 관객들은 그가 죽으려고 하다가 그냥 호주로 간 것인가 착각을 일으킨다. 굳이 휴대전화를 침대 위에 두고 간 것도 워낙 고객이나 회사에서 전화가 자꾸 오니까 그랬으리라 이해를 해보기도 한다. 소희가 맡은 지니의 경우는 일단 재훈이 유령이 아니라고 간주한다면 그녀도 유령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비교적 분명하게 지니는 다른 한국인들에게 사기를 당해서 그들의 집에서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지만 그것이 약물로 잠든 것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 때 죽은 것이 나중에 드러나지만 유령이라면 왜 비틀거리며 등장했는가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 2년 동안 번 돈을 뺏기고도 여유로웠던 그녀의 모습은 아주 이상하긴 했다.

40대 초반의 남성과 20대 초반의 여성을 평행선에 놓았다가 교차시키며 한국의 현실을 호주에서 폭로하는 이 영화의 틀은 도식적이기도 하지만 설득력이 있었다. 땅 속에 뭍힌 지니의 모습은 처참했다. 그녀를 죽인 것은 마찬가지로 워킹 홀리데이로 호주에 온 한국인들. 오히려 호주인은 따뜻했다. 영화에서 약간 드러내긴 하지만 영어가 뭐길래 호주에 가서 배워야 하고, 왜 대학생들이 농장일을 하러 그 먼 곳까지 가야 할까라는 의문을 자연스럽게 제기한다.

비밀은 없다는 매우 색다른 느낌의 한국 영화다. 싱글 라이더에서도 새로운 느낌을 받았지만 비밀은 없다는 훨씬 더 이색적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자세히 고민해보지는 않았지만 그 이질감은 오래 남는다.

순서로 보면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이후 이 영화를 봐서 손예진 배역의 차이가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손예진이 이런 연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꼬마 아이의 엄마였다가 훨씬 큰 사춘기 아이의 엄마로서의 손예진. 그녀가 얼마 전에 밥 잘 사주는 누나 역할을 했음을 감안하면 이런 영화들에서 엄마 손예진은 아직도 조금 이상하게 느껴진다. 감독의 전작은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는데 이 영화는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애매하다.

불한당의 경우 칸 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라는 점만 알고 봤는데 곱씹어볼 수록 애매하다. 재미가 있다고 하겠지만 잔인했고, 너무 흔한 조폭 영화라는 점에서는 식상하고, 조직에 잠입한 경찰이라는 설정은 이미 많이 봤다. 다만 중반에 경찰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음에도 둘의 관계가 유지된다는 점은 특이하다 하겠다. 불한당보다 불신이야말로 영화의 키워드라 하겠다. 아무도 못 믿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이기심만 남은 세상.

지금 만나러 갑니다라는 작품은 아주 오래 전에 일본드라마로 봤다. 다 보지는 못한 것 같다. 일본 영화가 매우 유명했는데 어찌어찌 아직도 못 본 상태로, 죽은 엄마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온 것인지 그 의문만 남은 채 살아왔다. 한국에서 리메이크된 작품을 보니 결국 타임슬립이었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일본은 타임슬립을 과용한다. 소지섭의 데이트 복장만은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영화다. 이 작품을 어떤 식으로건 처음 접한 사람은 곱씹어보면 괜찮다고 느낄만한 영화고, 전작을 뭐든 봤다면 식상한 영화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