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9일 화요일

조카들

어린애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준다. 조카라는 존재들은 내가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데 큰 공헌을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꽤 곤란한 감정을 안겨준다. 병으로 내 다리를 찍어대는 너무 솔직한 남자 조카의 물리적 행동이 아니더라도.

제일 큰 조카는 형과 내가 형제인데 너무 안 닮았다고 연방 말한다. 유전에 대한 책을 대충 읽어본터라 자식에게 부모의 특성이 매번 랜덤으로 섞이니 완전 딴판인 형제가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형과 나는 정말 별로 닮지 않은 모양이다. 부모와 자식이 닮지 않으면 상당한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킬 일이지만 형제간이야 뭐.

이 조카는 요즘 키가 쑥쑥 크면서 계속 배가 고프다고 한다. 학교 공부는 곧잘 하는 모양인데 재치가 번뜩이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머리쓰는 퍼즐을 잘 하는 것을 보니 뿌듯하면서도 내가 하지 못한 것을 조카가 하니 자신에 대해 좀 실망스럽기도 하다.

작은 조카는 자신의 성 때문에 고민이란다. 나도 성 때문에 몇 번 얼굴 붉힌 적이 있지만 나이 먹고 나면 그런대로 견딜만하고 대충 맞받아치는 여유도 생기건만 어릴 적엔 견디기 힘들 수 있다. 그래서 어머니 즉 형수 성을 따라 개명하고 싶다는 소망을 말한다. 성을 바꾸는 건 사실 사회의 (비록 부당한 면이 있더라도) 질서를 무너뜨리고 큰 혼란을 겪을 수 있는 일이라 신중해야 하건만 평생 따라다니는 이름이 어떤 이유에건 놀림의 대상이 된다면 괴롭다.

제일 어린 조카는 영악하다. 둘째는 원래 그런 건지 몰라도 어떻게든 형에게로 관심이 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같다. 돌보는 사람을 힘들게 한다. 말도 못하는 젖먹이들은 참 어떻게 다뤄야할지 난감하다.

2008년 2월 12일 화요일

Capacity

휴대폰을 바꾸고 좋은 점이 많았다. 내장 카메라도 있고, 쓰지는 않지만 mp3도 재생할 수 있고, 무엇보다 각종 저장 공간이 늘어났다. 그런데 오늘 휴대폰 화면에 경고 문구가 뜨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54개 저장 공간이 남았습니다.

통화기록이나 문자 메시지나 전부 처음 샀을 때부터 다 기록되어 있기에 이건 한계가 없다보다 싶을 정도였건만 결국 문자는 250개까지가 한계인가보다. 그래서 '쓸모없는' 문자들을 지워나간다.

그렇게 공간을 확보했건만 62개의 공간이 남았다고 다시 경고 문구가 나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더 지워나간다.

아직 오지도 않은 70개의 문자를 걱정하며.


5학년이 될 현지는 내 이전 휴대폰을 보고 저장된 번호가 200개가 넘는다며 놀라워했다. 90%는 한번 이상 연락하지 않은 사람이건만 아마도 앞으로도 없을 쓸모를 위해 혹은 단순히 지우기가 귀찮아서 남겨두고 있다.

기계는 물리적 능력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의 마음은 그나마 유연한 것 같다. 하지만 우울한 뉴스들을 볼 때면 한계는 깨질 위기에 직면하다가 간신히 회복되거나 조금씩 팽창된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거나 모든 것을 체념하는 상태.

승환옹이 노래하듯 너무 많은 이해심은 무관심일 수도 있다. 나의 이해심은 사해와 같이 넓으니 분노하라 일도 별로 없고 그래서 씁슬하다.

2008년 1월 5일 토요일

2008년, 소설들

어느덧 2008년도 달리고 있다. 내가 잡을 수 없는 속도로. Let it be. Let it go.

학기가 끝난 후로는 Lost를 보는 것 이외의 시간에 주로 소설을 보고 있다. 김영하의 '빛의 제국'을 시작으로, 전에 사두었던 2005, 2006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이어, 추천을 받은 '그리스인 조르바'와 '테메레르'를 읽고 있다. '빛의 제국'의 침울한 분위기는 이상문학상의 단편들을 보며 더 가라앉기도 하고 정화되기도 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서울의 짐을 줄이기 위해 원주로 옮길 생각이었는데 읽다 보니 너무 좋아 다시 서울로 가져왔다. 저자 약력에 나오듯이 카잔차키스는 니체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동안 니체가 말한 새로운 인간상이 손에 잡히지 않아 고민했는데 조르바라면 가깝겠다 싶었다. 그렇게 느끼는대로 살면 좋으련만.

'테메레르'는 판타지 소설을 많이 보던 지인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는데, 의외다. 여성 저자가 군인들의 이야기를 써서 그런지 섬세한 심리 묘사를 보다 보면 너무 귀여운 것 아닌가 싶다. 또 눈높이를 모든 연령층에 맞추려고 했는지 꽤 쉽게 읽힌다. 프랑스군에서 뺏은 중국 출신의 용이 부화하자마자 영어를 하는 설정도 재밌다. 용이 아무리 천재라도 나면서 영어를 안단 말인가? 아니면 원래 모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나? 쉽게 쉽게 페이지가 잘 넘어가니 흐뭇. 3권까지 나왔는데 도서관에 있는 2권은 대출중이라 너무 빨리 읽을까 걱정이다.

2007년 12월 28일 금요일

빛의 제국- 김영하

기영은 옛 허리우드극장 자리에 들어선 서울아트시네마를 좋아했다. (...) 낡고 오래된 필름과 그것을 보러 오는 사람들, 그들은 서로에게 무심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속물들의 허세로부터 비롯된 이상한 편안함이었다. 속물이 속물인 것을 감추려면 쿨할 수밖에 없다. 쿨과 냉소가 없다면 그들의 속물성은 금세 무자비한 햇빛 아래 알몸을 드러낼 것이다. 대도시의 익명성은 세련을 가장한 이런 속물성 덕분에 유지된다. p.101.

도대체 '그런 것'의 어떤 면이 진부한 것인지 알기 위해 그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해야 했다. 진부함을 이해하기 위해 치열하게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옮겨다 심은 사람'의 삶이라 할 수 있었다. p.103.

남과 북의 윤리는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처럼 닮아 있어서 만나자마자 서로를 알아보았다. p.189.

2007년 11월 28일 수요일

구스 반 산트

어제 극장에서 '파라노이드 파크'를 본 이후 집에서 '라스트 데이즈'와 '엘리펀트'를 연달아 봤다. 감독의 필르모그라피를 보다가 '굿 윌 헌팅'의 감독이었다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래? 왠지 깐느에서나 상영하고 상을 받을만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인줄 알았건만. 내 기억의 구스 반 산트는 '아이다호' 그리고 '엘리펀트'로 남아있고, 몇번씩이나 용기를 내서 보려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던 '라스트 데이즈'의 감독이었다. '그런' 영화들에 대한 이미지는 딱히 뭐라 잡아내기 어렵다. 이번에 한 번 잡아보려고 했건만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다.

'파라노이드 파크'를 보러 가기 전 맥스무비에서 영화 정보를 누르니 별 내용이 없었다. 무슨 영화일까? 평점은 꽤나 높건만... 궁금증만 커져갔다. 영화 전반부의 이미지를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졸고 있었다. 대략 20분간의 내용은 극히 희미하게 남아있다. 어느 순간 알렉스는 여자 친구와 탈의실에서 장난을 치고 있다. 경찰이 찾아와 살인으로 추정되는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스케이트 보더들을 불러모으고 조사했고, 알렉스는 파라노이드 파크에서 있었던 사고의 진상을 기억해낸다. 아니 감독은 중반부에 그 일을 보여준다. 알렉스는 항상 기억하고 있지만 감추고 싶었을 뿐이다. 새로 친해진 여자애와 이야기를 하던 도중 하나의 해결책으로 사건을 글로 적은 이후 태우며 위로해볼 뿐이다.

몇 가지 오해와 편견이 영화의 이해를 막았다. 제목의 '파라노이드'에 집착해서 소년의 망상이 불러일으킨 비극을 예상했었다. 스케이트 보드까지 나오는 대목에서 콘 사토시의 '망상대리인'과 오버랩되며 알렉스가 악질 범죄자인양 상상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부모가 이혼하려는 상황이라는 점을 빼면 그다지 별날 것도 없는 소년이다. 게다가 스케이트 보드는 잘 못타기 때문에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들의 더 프로페셔널한 무대인 파라노이드 파크에 진출하고 싶어하면서도 머뭇거리고 있었다. 어느 날 갔던 파라노이드 파크(이 장면을 놓친 것 같다)는 잔혹한 기억만을 남길 뿐이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스토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화면의 구성을 보는 것이 핵심이다. 왕가위 영화의 촬영을 도맡았던 크리스토퍼 도일이 만든 화면은 아주 아름답지는 않았으나(차라리 '엘리펀트'의 화면이 더 좋았다) 알렉스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측면에서는 훌륭했다. 오늘 본 '엘리펀트'에서 부모들의 얼굴이 희미하거나 아예 잘린 상태인 것과 이혼을 앞둔 알렉스 부모들의 얼굴이 희미하게 처리된 것이 유사하다. 미국 청소년들에게 부모란 그 정도 존재인가보다. 우리나라라고 별로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Knocked Up에서 사고쳐서 만든 아이라도 잘 기르겠다고 애쓰던 주인공들의 커플 되어보기 프로젝트를 보면 애들 교육은 왜 모양이 되고 마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라스트 데이지'는 어제 재생해서 눈을 화면에 두긴 했지만 제대로 봤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엘리펀트' 만큼이나 건조한 시선의 영화였다. 옐로우 페이지 아저씨의 설교, 선교사 아저씨들의 설교는 소귀의 경읽기도 그런 경우가 없을 터인데 참 열심이다 싶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무래도 보이즈 투 멘의 'On Bended Knee' 뮤직비디오가 상당히 길게 흘러나온 장면이다. 아예 TV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왜 그랬을까? 커트 코베인이 아닌 '블레이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긴 했지만 너바나의 음악이 아니라 R&B 음악이. 어색하게 보이기 효과를 노린 것일까. 커트 코베인이라고 해서 너무 이상한 놈은 아니다 보이즈 투 멘도 듣는다 뭐 이런거? 세세한 감상을 쓰기에 영화는 너무 지루했다. 다시 볼 지 모르겠으나 촬영 시점이라는 측면에서 '엘리펀트'와 상당히 유사한 것 같다.

'엘리펀트'를 다시 보니 의외로 새롭다. 무능하거나 문제있는 어른들. 그들 밑에서 문제가 있기도 하고 그냥 평범하기도한 아주 당연한 아이들이 육성된다. 확실히 영화는 여러 사람들의 시점을 통해 한 가지 사건을 보여주지만 그렇게 봐도 별다를 것이 없다. 가장 크게 사회문제로 대두된 '교내 총격 사고'만이 부각되지만, 미국판 이지메, 히틀러 영상물, 락 음악,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 뒷담화, 인터넷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총기 등 어찌 보면 흔하디 흔한 것들이 총체적으로 하나의 사건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즉 각각의 요소를 해결한다고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물론 노력은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원인이 있는 것인양 떠들고 사회 전체의 분위기, 정서를 바꾸지 않는 한 문제는 계속된다.

'파라노이드 파크'의 광고 카피에도 있지만 의외로 늙으신 구스 반 산트 감독님은 반항아 기질이 있는 미소년들을 좋아하나보다. 리버 피닉스, 맷 데이먼(?)에 이어 계속 새로운 얼굴들을 제시한다. 처음 연기를 하는 친구들도 많다. 최근 본 구스 반 산트의 영화들에서 배우들은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자기 자신의 모습 그대로 행동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배우지만 배우가 아닌. '엘리펀트'에서는 실제 고등학교 학생들이 실제 이름으로 영화에 나오기도 한다. 영화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는 요즘 구스 반 산트의 영화들은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는 것 같다. 아주 돈 벌자는 것도 아니고, 알흠다운 화면을 보여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영화제를 위한 영화를 찍는 것 같긴 하고, 어찌 보면 소소한 일들만 그려내는 것 같고, 뭐라 한 마디로 하긴 어렵지만 그나마 볼 만한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은 든다. 비록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2007년 11월 14일 수요일

아그본라호

지난 주 버밍엄에서는 로컬 더비 경기가 있었다. 결과는 더비의 2:1 승리.

MOTD를 보다보니 1:1 상황에서 빌라 출신의 버밍엄 수비수 리지웰이 헤딩한 공이 골문으로 들어가기 직전 아그본라호가 간신히 걷어냈다. 이후 아그본라호는 헤딩으로 결승골을 넣었다. 재밌는 점은 그가 평생 아스톤 빌라의 팬이었고, 이제 빌라의 떠오르는 스타로서 더비 경기에서 결승골은 넣었다는 것이다. 아그본라호가 지난 시즌부터 주전이 되었고, 버밍엄이 이번 시즌에 승격한 점을 생각하면 그 골은 넣은 것이 얼마나 극적이고 감격적인 상황인지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포셀이 1:1 동점을 만드는 골을 넣었을 때 버밍엄 시티 팬들이 기뻐하는 모습도 잊을 수 없다. 아무리 더비 경기라지만 그렇게 환호할 줄은 몰랐다. 리버풀 더비에서도 그랬던가?

2007년 11월 10일 토요일

살인

"살인이 잔혹한 것은, 살인이 피해자를 죽이는데 그치지 않고 그 가족의 생활과 마음까지 서서히 죽여가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가족을 죽이는 것은 살인자 본인이 아니라 그 가족들 자신의 마음이야."

from 미야베 미유키 "모방범" 3권 p.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