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29일 목요일

유열의 음악앨범

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목으로 삼은 이 영화는 아이가 생긴 후 아내와 두번째로 극장에서 본 영화로 내 생애에 기록된다.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던 유열이라는 가수가 진행한 라디오 방송에 대한 영화는 얼핏 보기엔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미 수 년 전부터, 아마도 <건축학 개론>이 신호탄이었던 같은 90년대 청춘에 대한 회고물들은 계속 나오고 있으니 이번 영화도 그런 흐름의 하나로 읽을 수 있다.

영화는 94년 10월 1일을 기점으로 97년, 2000년? 2005년까지 몇 년씩 건너뛰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물론 광고된 대로 정해인과 김고은이 맡은 캐릭터들의 두근대는 사랑이 전개된다. 영화가 끝나고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동료 관객들은, 5, 60대 몇 명은 정해인이 드라마에서 보던 그의 특유의 미소를 그대로 영화에서 보여줬다며 실망 반 만족 반의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40대 중반 정도의 몇 명은 <엑시트> 같은 영화보다는 훨씬 좋았다며 만족해했다. 하지만 나는 영화가 무언가 이상했고, 많은 곱씹어보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지우 감독은 아마 <해피엔드>로 가장 유명한 감독일 것이고, <은교>도 화제작이었던 것 같고(아마 그 인연으로 김고은이 이 영화에 캐스팅되었을 것이고), 근래의 <4등>이라는 영화도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침묵>의 경우도 보고 나서 '이상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영화에 대한 타인의 설명을 조금 들어보면 그런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정도로 인정할 수는 있었다. 그의 이번 작품은 잘 팔리지만 이제 지긋해지고 있는 90년대를 배경에 대세?라고 할 정해인을 투입하여 살려내려고 하는 영화로도 보이지만 가만 생각하면 분명 그 이상의 의미를 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11년 정도의 시간을 다루는 이 영화는 많은 부분을 생략한다. 마치 <보이후드>에서 갑자기 생겨난 변화들을 관객이 천천히 파악해야하듯 이 영화를 보다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구석들이 많다. 그런 이야기의 축을 지탱하는 것이 1994년부터 13년동안 KBS 라디오에 존재했던 <유열의 음악앨범>이다. 그 프로그램이 시작되던 날 미수는 빵집을 찾아온 현우를 처음 만났고, 현우는 진행자가 바뀐 음악앨범을 들으며 기적을 선포했다. 공교롭게도 미수는 음악앨범 프로그램의 작가가 될 뻔했고(그녀의 과 동기인 친구는 그 방송 작가가 되었다), 군대에 간 현우에게 할 이야기를 음악앨범에 두부와 도너츠라는 가명을 이용한 사연을 보내 전하려 했고, 영화의 막판 현우는 음악앨범의 보이는 라디오 첫 방송 날 카메라를 만졌다. 그리고 현우는 유열의 배려로 부르고 싶은 이름, 미수가 유열의 입을 통해 나오도록 할 수 있었고 해피 엔딩이 찾아온다. 

위는 행복한 이야기들이지만 영화에는 우울하고 어두운 이야기가 짙은 안개처럼 깔려있다. 현우는 어떤 아이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의 범인으로서 소년원 생활을 해야했고, 그 기억을 지우고 싶지만 지우지 못 하고 산다. 현우의 친구가 옥상에서 떨어진 사건은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공놀이를 하는 와중에 실수로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현우와 그외 '불량' 청소년들이 그 아이를 집단으로 괴롭혀서 그 아이가 자살한 것인지 혹은 타살이기까지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현우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고, 그의 순진한 얼굴을 보건대 많은 관객은 그가 진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태권도장 운전기사로 일하는 친구는 현우가 '불량'한 그의 친구들과 다를 거라고는 그 잘생긴 얼굴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현우는 그의 고모와 할머니가 자신의 무죄를 믿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모와 할머니는 현우의 행실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된 한동안의 사건, 정황,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관객이 짧게짧게 보게 되는 현우의 미소, 정해인의 미소는 그의 어두운 이면을 거의 완전히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는 현우와 미소의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이 두 캐릭터는 단순히 젊고 애틋한 감정으로 살아나가는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사실 둘은 사회계급적으로 중간에도 미치기 힘든 높이로 설정되어있다. 현우는 부모가 없는 와중에 고모, 할머니와 살았고, 그마저도 소년원을 출소한 이후로는 홀로 산다. 미수의 빵집에서 알바를 했지만 폭력 사건에 휘말려 다시 소년원에 가야했고 20대 초반에 이삿짐을 나르는 일을 하다가 군입대를 한다. 제대 후 대학에 들어가게 되고는 영상작업 쪽 일을 하는데 안정된 직장은 아니었다. 미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언급이 있지만 아마 아버지는 더 일찍 돌아가신 듯 하며 역시 홀로 살아간다. 미수는 그나마 빵집을 물려받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곧 문을 닫게 된다. 1997년 IMF 구제금융의 해에 졸업반인 그녀는 대기업 취업에 실패하고 KBS의 단기 알바가 아니면 중소기업?의 정규직 채용이라는 선택지만을 갖고 있었고 안정성을 이유로 정규직을 택했다. 하지만 소음 공해의 직장은 견디기 어려웠고,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잊어버렸다. 몇 년 후 작은 출판사에 일하며 책을 만들어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지만 역시 그녀의 이상에 도달한 느낌은 아니었다.

이들의 삶을 작게 만든 대표적인 설정은 옥탑방이다. 아주 작은 옥탑방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래된 빌라촌의 꼭대기 집이 이상적인 거주 공간은 아니다. 미수는 그 집에서 몇 년인가 홀로 살았고, 그녀가 더 큰 집으로 떠난 이후 다른 여성이 살았고, 이어서 현우가 그 집에 살게 된다. 미수는 자기가 원래 살던 그 집에서 현우와 잠깐 동거를 했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다른 가족이라고는 없는 두 남녀가 작고 저렴한 공간에서 살아보겠다는 모습은 그들의 형편에 맞았기에 슬프기도 했다.

현우는 삶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낮은 캐릭터다.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그는 빵집 알바에 만족했고 그것은 기적이 선포된 94년 10월 1일 미수와의 만남 덕분이기도 했다. 그에게 기족이 일어나 빵이 생겼으니 그에게 다른 건 필요없어졌다. 그는 죄책감으로 미수를 다시 찾지 못할 때가 여러 번 생기게 되지만 일단 미수와 극히 가능성이 낮은 상황에서 만남을 반복할 때마다 그의 첫 기적 덕분인지 이 만남을 수긍하고 더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 같다. 삶에 좋은 일이 별로 없던 그는 미수라는 좋은 여성을 만났고, 빵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미수의 옥탑방에서 입대 전날 불면의 하룻밤을 보냈다. 그에게 미수, 빵집, 옥탑방은 거의 집착에 가까운 대상들이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라온 궤적이 이런 몇 가지 지점에 집착하게 했다는 설정은 불가능한 건 아니다. 오히려 측은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94년부터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품은 두 남녀가 몇 년마다 만나는 계기는 제각각이지만 헤어지는 이유의 근원은 거의 언제나 현우가 연루된 친구의 죽음이다. 그 죽음의 공범인 친구들은 그를 술자리로 이끌다가 폭력 사건에 연계되게 만들었고, 97년은 입대 상황이었으니 예외라 하겠고, 대학생인 그는 친구가 소개한 일자리인 헬스장에서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또 폭력 사건으로 경찰서에 끌려가고(이 때의 현우는 분명 무죄였다), 2004년, 즉 예의 그 사건에서 10년이 지난 후 죽은 친구의 가족을 찾아가는 상황 때문에 미수와 헤어지게 된다. 현우는 미수가 이제 그 사건을 잊어버리면 안 되냐고 하자 미수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너만은 내가 그런 일에 연루되었다는 것 자체를 몰랐으면 했다는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빵집에서 두부를 찾던 현우를 보며 미수는 그가 무슨 일을 저질렀음을 알지만 정확한 내용은 몰랐던 것 같고, 세세한 내용은 10년이 지나 현우의 친구에게 들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그녀가 현우를 더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다만 그가 그 일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는 것에 대해 실망한 정도였다. 하지만 현우에게 그 사건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서 그의 일생을 억누르고 있었다. 영화에 묘사되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도 소년원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오해와 지탄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둘이 사랑한다면 그러한 근원적 어둠을 계속 숨기고 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불가피한 충돌은 둘을 갈라놓았고, 유열의 음악앨범의 기적은 마지막 효력을 발휘하여 둘을 다시 강하게 결합시켰다.

영화에서 이해가 가지 않거나 작위적인 설정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애초에 현우는 빵집에서 왜 두부를 찾았을까? 두부과자를 빵집에서 팔기도 하지만 그는 원래 두부를 사는 일반적인 장소인 시장이나 마트에서 바로 두부를 사는 것이 두려웠을까? 당연히 두부가 없는 빵집에서 현우는 콩으로된 다른 것을 찾았지만 역시 그마저도 없다. 왜 콩이 든 음식을 찾을까? 애초 출소자가 두부를 먹는 것은 깨끗하게 살라는 의미 아닌가? 그렇다면 미수가 제시한 우유도 적절한 하얀 청결제가 아닐까? 감독은 여기서 '빵'을 이중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감방에 간 것을 '빵'에 다녀왔다고 하므로 빵집에서 '빵'을 나온 청소년이 유혹되고, 다시 빵집에서 일한다는 것은 그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콩음식을 찾을까? 애초에 우리는 감방 음식을 '콩밥'이라고 불렀으니 현우가 여전히 감방을 잊지 못했거나 감방으로 곧 갈 운명임을 제시한 것일까?

둘이 믿기 힘들게 헤어지고 재회하는 설정은 아마 너무 우연적이라고 지탄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기적을 선언한 영화이기에 이 정도는 넘어가줄 수 있다. 애초에 둘은 왜 서로의 집 주소나 집 위치 정도도 몰랐는지, 미수는 현우가 어느 부대로 배치받았는지 알아볼 시간은 없었던 것인지 궁금하다. 현우가 방송 카메라를 조작하는 직업을 갖게 될 개연성은 별로 없지만 <유열의 음악앨범>의 보이는 라디오를 위해 투입시키도록 그렇게 설정되었다. 생각해보면 94년부터 사진찍는 것에 의미를 두었던 친구이기도 하니 밑밥이 깔려있기는 했다. 영화 마지막 장면 자체가 현우가 찍은 웃는 미수의 얼굴이기도 하다. 별로 가진 것이 없는 그가 갖고 싶은 전부였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94년부터 2007년까지 존재했기에 영화의 이야기도 더 진행되었다고 해도 2007년이 최대치였다. 해당 프로그램은 <이현우의 음악앨범>이 되어 유열 시대와 비슷한 시간이 흘러갔다. 유열은 9년 동안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지 않다가 KBS의 다른 채널에서 음악앨범과 같은 시간대의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고 한다. 라디오의 사회적 의미가 예전같지 않음이 너무 당연하고, 이제는 보이는 라디오가 당연해진 시대에 통신 기술 수준이 낮았던 시절의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라디오 덕분에 가능했다는 설정은 이제는 믿기 어렵지만 아마 그 시절에는 그랬을 수 있겠다는 깨우침을 새삼 주는 영화. 그렇지만 높은 예매율에도 불구하고 큰 흥행은 힘들겠구나 싶은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본 후 시간이 좀 흐른 후 조금 더 호의적인 생각이 들지만 여전히 애매한 영화다.

2019년 8월 19일 월요일

Red Joan, Long shot

두 편의 정치적인 영화에 대한 감상을 적어본다. 우선 레드 조안은 캠브리지 출신의 여성 스파이에 대한 실화를 다룬 영화고, 롱 샷은 미모의 여성 미국 국무장관과 소위 대조적인 외모와 위치의 한 남성의 그럴듯하지 않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레드 조안의 핵심 메시지와 주장은 대담하다. 영국에서 핵무기를 개발하는데 깊히 관여한 여성 학자, 즉 주인공인 조안이 핵무기의 핵심 정보를 러시아에 넘기는 스파이 행위를 했는데 그 이유가 러시아가 더 빨리 핵무기를 개발해서 세계의 핵균형을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핵무기의 역설, 너무 파괴력이 커서 오히려 쓸 수 없다는 역설적인 상황은 대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고 체계라고 하겠다. 하지만 이것을 영국의 한 학자가 러시아 진영을 강화함으로써 세계 핵무기 균형을 이루도록 했다는 일화는 자못 흥미롭다.

영화에서 핵무기 정보를 넘기는 계기는 단지 그 뿐이 아니라, 실제 러시아측의 스파이이자 조안의 애인인 남성의 역할이 큰 것으로 나온다. 즉 영국에서 활약하는 러시아 스파이(그들은 원래는 영국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고, 자발적으로 러시아에 협조하는 것처럼 보였다)들이 영국의 핵개발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공교롭게도 지인인 조안이 핵심 인력임을 알고 접근하여 설득하고 회유하는 과정들이 있었다.

영국 엘리트들, 특히 캠브리지의 스파이들은 수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소설이자 영화로도 나온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도 그런 내용이었다. 스파이들은 단지 영국 내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정보기관의 최상층까지 자리하고 있었고, 레드 조안에서처럼 영국 외교성의 핵심에도 존재했다.

조안의 스파이 행위는 오래지 않아 발각되는데, 물론 그녀가 특정된 것이 아니라 연구팀에서 정보가 새나갔다는 정도가 확인되어 결국 그녀의 동료이자 연인인 교수가 잡혀가기에 이른다. 그녀가 발각되지 않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평가절하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작은 카메라를 핸드백의 작은 틈에 넣거나 여성용품 속에 숨겨서 검색을 회피하는 등의 기지를 발휘한 결과이기도 하다.

영국의 핵무기가 러시아보다는 빨리 개발되었다는데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는지 궁금해졌고, 러시아가 2차대전의 연합국에서 냉전의 양축으로서 갈라서는 과정이 가져온 상황 변화도 유의해서 볼만한 부분이었다.

롱 샷은 샤를리스 테론, 세쓰 로건 주연의 코미디 영화다. 세쓰 로건의 대사는 곱씹어볼 라인들이 굉장히 많아서 재미있다. 각본과 감독 모두 세쓰 로건과 전에 작업을 했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합이 잘 맞은 영화였다.

샤를리스 테론은 전형적인 금발 미인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녀에게 많응 영예를 안겼던 몬스터를 비롯해 매드 맥스에서도 망가뜨린 외모임에도 돋보인 연기력으로 승부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금발 미인의 전형을 들고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여 의아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만 결국 끝에 가면 어떤 전형을 넘어선 캐릭터를 연기한 셈이다.

테론이 연기한 샬롯 필드는 미국의 현 국무장관이고 재선을 포기한 현 대통령에 의해 차기 대권 후보로 지명될 예정이었다. 대통령은 브레이킹 배드로 유명해진 밥 오든커크가 연기하는데 상당 부분 트럼프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였다. 또 하나 등장인물로 부도덕한 재벌이 있는데 그의 헝클어진 듯한 붕뜬 머리 모양도 트럼프를 연상시키는 바가 있어서 트럼프를 두 개의 캐릭터러 분리하여 배치하는 설정으로도 보였다. 영화에서 실제로 둘은 밀접하게 이권을 공유하고 있어서 그런 혐의가 짙어진다.

제목인 롱 샷은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일을 의미한다. 라 라 랜드에서 밤이 시작되는 LA의 언덕에서 라이언 고슬링이 에마 스톤에게 we've got no shot이라고 말했듯이 남녀관계를 두고 쓰이는 표현이기도 하다. 영화의 기본 설정상 국무장관인 샬럿과 무직인 전 언론인 프레드의 별로 가능성없는 연애, 그리고 대통령을 향한 그녀의 야망에 객관적으로 방해 요소가 될 연애가 바로 롱 샷이다. 하지만 결국 대통령이 되는 샬럿이 자신이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임을 선포하는 것처럼 여성 대통령이라는 가상 현실도 롱 샷이기도 하다. HBO의 인기 시리즈인 빕VEEP에서도 셀리나 마이어스는 몇 시즌 동안 부통령으로 고통을 겪은 후 짤막한 대통령 생활을 한다. 그녀는 다음 선거에서 다른 여성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어주나, 마지막 시즌에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다시 대통령이 된다. 하우스 오브 카즈에서도 그랬던가? 미국에서 여성이 대통령이 되는 상황을 두 개의 미국 드라마에서는 일단 부통령인 상태에서 대통령이 사라진 후 그 자리를 이어받는 식으로 설정했다. 그만큼 여성 대통령이 미국에서 등장하기 어렵다는 반증일 것이며, 힐러리가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에 얼마나 가까웠던가를 되새기게 한다. 롱 샷과 위에 언급한 드라마들을 포함해 많은 픽션 속의 미 여성 대통령은 실제로 힐러리를 모델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공화당식 철학의 편안함을 설명하는 부분도 있는데 길지는 않지만 재치가 있고 설득력이 있었다. 다시 보고 싶은 부분이다.

픽션이기에 영화 마지막 부분의 위기가 극복되는 과정을 선선히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아마도 샬럿은 정치적으로 몰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녀는 정치가의 가식과 부도덕한 타협이 아니라 솔직함의 극치로서 난관을 돌파했다. 완벽해보이는 그녀도 애인이 있다(미혼인 그녀에게 전혀 흠은 아니다), 그 애인은 자신의 영상을 보며 자위를 한다(그녀는 다들 자위는 하지 않냐며 미 국민들에게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는 현실은 그녀의 입을 통해 폭로된다. 그것은 자폭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열광적 지지로 바뀌었다. 이미 그 선언 이전에 그녀의 인기는 차기 대통령감으로 손색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폭이 아닌 것을 알았을까? 진심이 통한다는 이상적인 결말이 비현실적이라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통쾌함을 안겨준 것도 사실이다.

2019년 8월 14일 수요일

작은 아씨들의 새 버전

가디언의 문화면을 읽다가 한국에서는 작은 아씨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Little Women이 새로운 영화로 개봉할 예정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트레일러가 포함되었는데 이 캐스팅은 그저 등장인물들 자체만으로 눈을 어지렆일 정도여서 이야기 자체는 신경쓰지 않고 무조건 보고 싶을 정도이다.

일단 감독이 전작 레이디버드로 능력을 공인받은 그레타 거윅이고, 네 아씨의 어머니가 로라 던, 네 아씨는 서샤 로난, 에마 왓슨, 플로렌스 퓨, 일라이자 스캔런에, 고모는 메릴 스트립이고 남자 상대역은 티모시 샬라메가 맡는다.

에마 왓슨이 맡은 역은은 원래 에마 스톤이 캐스팅 되었으나 다른 일정이 생겨서 교체되었다고 한다. 이 두 배우는 전에도 다른 영화, 라 라 랜드를 두고 캐스팅이 바뀌는 상황이 있었으니 재미있다. 둘의 이미지는 그리 비슷하지 않은데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일라이자 스캔런은 HBO의 샤프 오브젝츠의 무시무시한 딸을 연기했던 터라 트레일러에서 잠깐 봐도 사람을 서늘하게 만드는 기운이 있다. 영화에서 맡은 역할이 샤프 오브젝츠의 역할과 유사점이 있을까?

가디언 기사에 따르면 무려 8번째로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이 이야기에 대해 가만 생각하면 한 번도 읽은 적도 없고, 영화를 다 본 적도 없다. 미국 남북전쟁 이후의 상황이라고 하니 시대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시도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트레일러에 따르면 거윅의 새 영화는 올 크리스마스에 개봉한다고 한다.

2019년 6월 12일 수요일

기생충 (2)

어제 글을 쓰고 난 후 못 적은 내용이나 하룻동안 주워들은 이야기를 참고해서 더 써보려 한다.

이 영화에서 떠오른 다른 작품이 란티모스 감독의 '송곳니'외에도 데이빗 린치의 드라마 '트윈 픽스'가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인디언 복장 때문인데 '트윈 픽스'에서는 벤자민 혼의 지적 장애가 있는 아들이 인디언 복장을 하고 있었다. 트윈 픽스에서는 인디언 경찰도 있기 때문에 인디언은 여러 의미로 사용되지만, 시즌2에서 정신이 나간 상태로 남부군 놀이를 하던 벤자민 혼의 아들이 인디언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이상하게 만든 설정이라 할 만했다.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는 그 상하로 계속 이동하는 카메라 앵글 때문에 '기생충'과  닮아있다. 그 영화에서는 인종과 관련된 계급 문제가 핵심적인 소재였고, 분리된 주거와 다른 언어 등이 부각되었다. 영화 시작에서 개똥이 뒹구는 바닥을 물로 청소하는 앵글은 주인공의 낮은 계급을 극단적으로 부각시켰다. 하지만 어린 쿠아론에게 그 식모 아주머니는 누나 같고 어머니 같은 친근한 존재라는 점에서 단순한 계급 갈등이 아닌 묘한 라틴 아메리카적 현대의 특이성이 드러났다.

'어느 가족'의 경우는 손석희 사장이 뉴스룸에서 봉준호 감독을 인터뷰하면서 자신이 '기생충'과 유사한 점이 있었던 것처럼 느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기실 피로 연결되지 않은 개인들이 가족인 척 하고 더 나아가 혈연 가족보다 더 정이 깊은 모습을 보여준 '어느 가족'과 적어도 가족들의 연대가 깨지지는 않은 '기생충'은 설정이 매우 다르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동아시아 국가의 감독들이 작년과 올해 깐느에서 최고상을 받았다는 점과 가족을 소재로 했다는 외양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손석희 사장이 무의식적으로 느낀 것으로 추정되는 공통점이 왠지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아마도 가난한 가족의 위태로운 상황이 아닐까?

인디언의 경우 몇 가지 해석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원주민의 상징으로 쓰였다는 게 일차적으로 설득력이 있었다. 인디언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었지만 백인 이주민에 의해 몰살되고 소수자로 전락했다. 사실 한국 관객만 염두에 두었다면 굳이 인디언 설정을 가지고 왔을까 싶은데 글로벌 관객을 대상으로 한다면 직관적으로 그네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면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영화 '기생충'에서 원주민은 누구인가? 굳이 따져보면 문광이 저택에서 가장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녀가 원주민에 해당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 건축가에게 고용되어 살았을 것이고, 박사장에게도 고용되어 살았다는 측면에서 인디언과 일대일 매치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인디언을 미국 내의 타자로 보면서 자본주의의 화신과 같은 미국과 한국의 관계에 대한 비유로서 인디언을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국 언론에서도 인정받은 글로벌 기업의 박사장,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저택을 차지한 외국인 등이 미국 혹은 자본주의의 상징으로서 원주민 격의 한국을 혹은 피지배계급을 억압하는 식으로 보는 류이다. 수긍은 가지만 그렇게까지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문득 드는 생각이지만 그리고 아마 부차적인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인디언 소품을 아마존을 통해 직구했다는 대사와 그들의 아픈 역사에 대해 아무 고민이 없이 놀이로 소모되는 인디언이라는 외피를 감안하면 인디언은 타자에 대한 무감각, 무공감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박사장과 아들 다송에게 인디언은 놀이의 하나이고 직구한 작은 인디언 도끼는 생존을 위한 방어/생계 수단이 아니라 상황극을 위한 소품이었다. 이 대목에서 다송이 쏘던 장난감 활도 도끼와 동일한 기능의 소품이라 하겠는데, '괴물'에서 배두나가 양궁을 했던 걸 감안한 이중적 장치라는 생각도 든다. 짧게 더 붙이면 저택의 건축가의 이름을 굳이 '남궁'씨로 정한 것은 '설국열차'의 남궁민수와 연결지은 감독의 의도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 봤다. 아마 잘 찾아보면 감독이 전작들의 소재 혹은 장면을 차용한 것들이 더 있을 것 같다. 

영화에 많이 등장한 '계획', '냄새', '선'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을 터인데 큰 주제이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더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내가 못 본 이야기 중에 개들에 대한 것을 써본다. 영화에서 저택에는 개가 세 마리 살았던 것 같다. 비글이 있었던 것 같고 나머지 둘을 잘 모르겠다. 개는 몇 차례 등장했는데 송강호가 연기한 기택의 가족들과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가령 박소담 역의 딸은 술 마시며 육포를 뜯어먹는데 그게 사실은 개먹이였다. 폭우로 캠핑이 취소되고 박사장 가족이 갑자기 돌아오며 벌어지는 대소동 이후 아들이 다혜의 침대 밑에 숨었을 때 그의 정체를 폭로할 뻔한 것은 그를 알아챈 강아지였다. 문광의 남편이 꼬챙이에 찔려 죽은 후 개는 죽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 꼬챙이에 여전히 남아있는 소시지를 탐했다. 이렇게 기택의 가족은 개와 유사한 처지로 묘사되는 경우들이 있었고, 그 개는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눈앞의 욕심에만 충실했다. 물론 영화 제목이 시사하는 바대로 기택 가족 그리고 문광의 가족은 기생충, 즉 벌레, 영화상에서는 특히 바퀴벌레와 동격으로 취급되었다. 송강호가 주인이 나간 집 거실에서 술파티를 벌이며 바퀴벌레가 불이 켜지면 막 구석으로 숨는다는 대사를 한 이후 곧바로 그것이 자신들에게 닥친 현실이 되며 기택 가족은 정말 바퀴벌레처럼 어두운 곳, 사각지대로 숨어들었다. 영화 초반 반지하 집에서 송강호는 식탁(?) 위의 바퀴벌레를 손으로 튕겨냈던 바, 이는 자신보다 더 낮은 자들에 대한 가혹한 태도를 암시할 수도 있고, 자신이 바퀴벌레가 되었을 때 인간의 손가락 튕김의 타격을 피하기 위해 몸부림칠지 몰랐다는 경고였을 수 있겠다. 더 생각해본다면 카프카의 '변신'에서 인간이 단지 벌레의 모양이 되었다는 이유로 죽어야만 했듯이 벌레가 아니라 정체가 인간인 타인에 대해 더 존중해야한다는 메타포일 수도 있겠다.

몇 차례 보고들은 해석 중 하나로 기택 가족이 '전원 백수'이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니 너무 잘 한다는 설정에 대한 것이 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고 설득력이 떨어진다. 어느 누구도 그 정도로 맡은 일을 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기우는 영어보다 연애를 더 하는지도 모르고, 기정은 그림을 무슨 식으로 가르치는지 모를 일이다. 기택도 경력에 비해서는 운전을 잘 했고, 충숙은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는데, 단지 투포환 선수여서 힘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온갖 요리를 잘 하고 저택의 집안일을 잘 해내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능력은 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거나, 재기의 발판이 없어서 주저앉은 사람이 많다는 의미였다는 해석이 나온다. 그리고 인생사에서 운이 있고 없고에 따라 사람의 경제적 처지가 극명하게 갈릴 수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땅부자, 비트코인 부자, 주식 부자 중 많은 경우가 극히 운이 좋았을 것이다. IT 기업도 속성상 대기업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면 그 사장은 벼락부자일 가능성이 높다.


문광의 남편 근세가 있던 지하실의 많은 책들은 의문스러운 소품이다. 그 책들이 고시서적으로 보이기에 근세가 젊은 시절을 고시공부로 보낸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있고 그럴 듯 하긴 하다. 하지만 이미 사업을 하다가 망한 사람이 다시 고시 공부를 하는 걸까? 고시가 아니라 공무원 시험 준비라고 해도 마찬가지인데 이미 사회 재진입을 포기한 근세에게 있어 그런 수험 서적의 의미는 무엇일까? 클래식 음악을 듣고 책을 많이 본 유사 지식인임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젊은 시절 고시를 준비한 게 아니라 사업이 망한 이후 오히려 살길은 공무원이라는 생각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공무원 열풍을 풍자한 것일까? 치킨집, 대만 카스테라나 공무원이나 모두 극한의 생존 문제의 결론으로서 나온 눈에 보이는 해결방안이고 동시에 치열한 경쟁 때문에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은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 정도로 기생충 이야기는 일단 마쳐야겠다.

2019년 6월 11일 화요일

기생충 (2019)

소문의 그 영화, 사람들이 스포일을 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는 그 영화 기생충을 나도 보았다. 안경을 가져가지 않아 또렷하지 않은 영상을 봐야했지만 후반부의 폭력적인 장면들을 덜 생생하게 본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다.

평자들은 주로 계급의 문제로 이 영화를 해석하고 있고 상하의 구별이 뚜렷한 영화의 카메라 앵글을 보건대 그런 해석은 타당하다. 천국-연옥-지옥과 딱 맞지는 않지만 저택-반지하-지하(의 지하)라는 공간적 배치는 사람의 등급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가 흔히 하는 방식처럼 부르주아를 비난하고 노동자를 더 대우해야한다는 차원의 이야기는 아닌 듯 하다. 어떤 대사에서 부자가 착하다는 말이 강조되고, 빈자들은 사기, 주거침입, 절도 더 나아가 폭행, 살인을 별다른 죄책감없이 행했다.

상황은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마치 영화 '어스'를 연상시키는 지하세계의 사람들은 노동자보다 더 낮은, 아예 보이지 않는 존재들까지 다룬다. 지하인은 모스 부호라는 형식으로 주인에게 신호를 보내지만 주인은 신경을 쓰지 않거나 오독하거나 이해를 하지 못 한다. 오직 지하세계를 경험한 반지하인 아들이 나중에 신호를 이해하게 되지만 응답할 방법은 없다. 단지 상상 속에서 부자가 되어 그 저택을 사고 지하의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사실상 희망없는 꿈 밖에.

영화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아버지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였다. 최근에 경제적 상황이 안 좋은 이유는 대왕 카스테라를 비롯한 반짝 인기업종을 따라하다가 망했다는, 뉴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망한 자영업자의 경로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지하세계의 남성, 문광의 남편도 대왕카스테라가 망하고 사채를 빌려쓴 결과 지하인이 되었다고 설정이 되었다. 양자를 가른 것은 사채를 썼느냐의 여부인 듯 하고 그 결과로 반지하인은 상승을 꿈꾸기도 하지만 지하인은 상승의 꿈을 포기하고 주인에게 감사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지하인과 반지하인의 대결에 대해 섬뜩함을 느낀다는 평을 커뮤니티에서 많이 보았다. 전투는 부자나 정치인을 향해 벌여야하는데 빈자들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은 지배전략의 효과이기도 하고 쉬운 싸움 상대를 고른 결과일 수도 있겠다.

남궁현자라는 유명건축인이 설계한 것으로 설정된 저택의 풍경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출세작 '송곳니'의 저택을 연상시켰다. 다시 확인해본 결과 카메라 앵글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통유리를 통해 집 안에서 잔디 마당을 볼 수 있다는 점과 잔디 마당이 넓고 주요 공간으로 활용된다는 점에서는 유사했다. 봉준호 감독이 '송곳니'를 참고했다면 반지하 집 안에서 밖을 바라본 풍경을 대비시켰다는 점에서 더 진척을 이뤘다고 할 수 있겠다.

인디언 설정은 어떤 의미였을까? 인디언 차림의 송강호는 결국 살인을 저지른다. 그 대상은 공교롭게도 숙주인 이선균. 그도 인디언 차림이었다. 송강호가 인디언 흉내를 낸 것은 근무의 연장이었을 뿐이지만 같은 인디언을 죽인다는 설정은 인디언의 폭력성이라는 잘못된 이미지를 차용한 것은 아닐 터이다. 숙주와 기생충,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라도 원래는 같은 족속, 인간이라는 것을 환기하는 것일까? 원래 인디언 놀이는 다송이라는 아들 캐릭터가 시작한 것이다. 지하인이라는 귀신을 본 후의 부작용인 듯한데 인디언놀이가 다송의 '~인 체'하는 삶의 방식의 일환인지(실제 다송은 인디언의 옷, 화살, 텐트라는 외양 외에 인디언에 대해 이해하려는 태도는 전혀 없다)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영화에서 가장 웃음을 안겨준 대사는 '코너링'이었다. 처음 운전기사가 된 송강호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사장역의 이선균은 음료가 가득 든 컵을 들고 차가 회전할 때 음료가 얼마나 흔들리는지를 지켜보았다. 결과적으로 음료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그러니까 차가 부드럽게 방향전환을 하는 걸 확인하자 사장이 '코너링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사는 다른 누구도 아닌 경찰이 우병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아들을 운전병으로 뽑은 이유로 내놓은 말이기도 했다. 즉 우병우에 대한 환기와 동시에 오랜 운전 경력이 있다면 정말 코너링이 좋을 수도 있었는데 우병우의 아들이 정말 그러했을까라는 의구심을 다시 갖게 만드는 짧지만 복합적인 장면이었다.

마찬가지로 문광이라는 캐릭터가 반지하인 가족을 궁지로 몰아놓은 이후 북한 뉴스 여자 앵커를 흉내내는 장면은 현 국제정치 상황을 반영했다. 모르는 사람인 척하며 온 가족이 빌붙어서 부자집에 고용된 상황을 폭로하는 영상을 보낼 메시지의 전송 버튼이 김정은의 미사일 버튼같다는 평가도 대사로 등장했다. 메시지 전송과 미사일 발사를 비유할 수는 있지만 문광이 뉴스 앵커를 흉내낼 하등의 이유는 없다. 그래서 뜬금없다는 평가를 볼 수도 있었다. 아마 감독은 국내 정치의 계급 투쟁 혹은 생존 투쟁과 함께 북한이 얽힌 국제정치의 상황까지 짧게나마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는 배우들의 이전 작품에서의 캐릭터를 잘 활용했다.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이었던 송강호가 운전기사로 일한다는 설정은 금방 납득이 갔고, 조여정의 역할도 이전 작품들의 이미지를 상당히 가져와서 활용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선균은 여러 이미지를 연기할 수 있기에 이번 작품 캐릭터의 전거를 어디에서 찾아야하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고, 나머지 배우들은 이전 활동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에 뭐라 말하기 어렵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분배적 정의가 실현되면 비극은 줄어들 수 있다는 메시지가 아니라면 영화의 톤은 매우 비관적이다.

2019년 6월 7일 금요일

미끄러짐

결혼 초에 샀던 크록스 슬리퍼는 이제 바닥이 많이 닳았다. 그래서 미끄러운 곳을 지나가거나 눈비가 오는 날에는 좀 위험하다. 어제는 전형적으로 그런 위기 상황에서 큰 사고가 날 뻔했다.

차를 가져가지 않고 마을버스로 동네 마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빗줄기가 예상보다 훨씬 굵어졌다. 우산도 가지고 나오지 않은 터라 택시를 타려고 했지만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몇 대는 그냥 지나가버렸고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그냥 마을버스를 다시 탈까 싶던 와중에 용케 택시를 잡은 아내가 나를 불렀고, 아들을 안고 있던 나도 부랴부랴 택시로 뛰어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횡단보도와 인접한 약간 경사진 보도블록에서 미끄러졌고, 내 품에 있던 아이는 대략 1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날아갔다.

나는 약간 아팠지만 어디 까진 곳도 없었는데, 아들은 황당한 상황에 처음에 멍한 상태였다가 울기 시작했다. 원래는 아이를 그 자리에서 달래야할 터이지만 비가 계속 많이 내리는 상황이라 아내가 아이를 안고 택시 안으로 급히 들어갔고, 행인들이 애를 어쩌나라며 걱정하는 소리를 하는 와중에 나도 약간의 민망함과 아이에 대한 걱정과 함께 택시에 탔다.

다행히 아이는 다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이후 식탁 모서리에 부딪혀 한 번 더 울어야했지만.

바닥이 닳은 크록스 신발을 아내는 당장 버리겠다고 말했다. 전에도 미끄러진 적이 있던 터이긴 했다. 아내의 조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만 다행으로 아이가 안정적인 자세로 떨어졌지만 조금만 다르게 날아갔어도 크게 다쳤을 수도 있었다.

살다보면 찰나의 순간이 엄청나게 다른 결과로 나올 수도 있었음을 실감하는 일들이 생각보다는 종종 생긴다. 아내의 기도 덕분에 그나마 이렇게 버텨올 수 있었을까?

2019년 5월 20일 월요일

왕좌의 게임 시즌8 피날레

드디어 역사상 가장 화제를 몰았던 TV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왕좌의 게임이 종영되었다. 지난 편에서 대너리스가 드로곤의 화염으로 킹스 랜딩을 초토화한 상황에서 이제 어떻게 상황들이 마무리되느냐가 남은 상황이었다. 최대 관심사인 누가 왕이 되느냐에 대해 작가들은 예상하지 못한 결말을 내놓았고, 그 외에 아랴의 선택 정도가 예외적이었던 것 같다. 피날레 에피소드 내내 날리던 회색의 재는 마치 눈처럼 보였다. 흰 눈의 겨울, 나잇킹의 죽음의 시간에 이어 회색의 종말, 잿더미의 시간이 출현하고야 말았다. 누군가 대니를 막아야했다.

지난 편에서 보인 대너리스의 학살은 존 스노우의 충성심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대니가 즉위식을 하던 장면에서 드로곤의 날개가 마치 대니의 날개인양, 즉 대니가 마치 악마의 날개를 단 것처럼 편집한 것은 대니의 정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존은 자신이 왕이 될 생각은 없지만 대니가 여왕으로 세븐 킹덤을 통치하게 놔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죽인다. 다소 허무했던 그 살해 장면에서 드로곤은 화염을 내뿜었으나 시리즈의 주인공인 존 스노우가 아니라 아이언 쓰론을 향한 것이었고, 그래서 모두가 탐내고 대니가 만져보며 기뻐했던 그 철의 왕좌는 녹아내렸다. 마치 그 왕좌가 자신의 어머니, 대니를 죽였다고 원망하는 것처럼. 원군도 거의 없이 왕을 살해한 존은 언설리드 군대에 의해 투옥되었다.

대니의 왕위 즉위식 격이었던 장면에서 암살자 아랴가 걷는 장면이 보여 많은 이들의 예상처럼 그녀가 대니를 암살할 것인가 귀추가 주목되었으나 아직 그런 행동을 할만한 이유가 그녀에게 부족했다고 작가들이 판단한 것 같다. 나중에 대서양 개척을 떠나는 탐험대를 이끄는 그녀를 보건대 전문 암살자로 성장한 자신의 과거와 완전한 결별을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역사에서 보았던 것처럼 유럽인들의 대서양 횡단은 또 다른 학살을 낳았기에 그녀의 행보에 대한 설정에는 의문이 따른다.

로버트 배러씨언이 죽은 이후 최대의 관심사인 세븐 킹덤의 최종 주인공은 브랜이 되었다. 티리언이 수감자의 상태로 손이 묶인 상황에서 브랜이야말로 '스토리'와 기억의 왕이기 때문에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브랜이 왕이 될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 그야말로 쿨하게 내가 무엇 때문에 여태 살았다고 생각하냐는 되묻는 장면은 실소를 자아냈다. 아이언 쓰론이 사라진 상태에서 이미 왕좌인양 의자에 앉아서 오래 생활한 브랜의 모습은 준비된 왕의 그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모든 것은 예정된 대로 벌어진다는 듯한 브랜의 통치를 과연 통치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대니와 산사의 최대 갈등 지점인 북부의 독립은 산사의 소원대로 성취되었다. 다른 지역의 군주들이 자신들의 독립을 함께 주장하지 않는 것은 이상했다. 아마도 티리언의 주장처럼 대니 이후의 군주를 자신들 중 누군가가 합의로 선출한다면 자신이나 그 가문에서 왕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참았으리라 상상해본다. 샘이 소위 대중 민주주의를 주장했고 다른 군주들은 모두 실소하며 무시해버렸는데, 죽을 것으로 예상된 대니 이후의 정치체로 민주주의를 상상한 팬들도 적지는 않았다. 여기서의 결론은 최소한 혈연으로 인한 왕위 계승이 아니라 능력에 따른 왕위 계승을 합의했는데 이것이 실제로 어떻게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포스트 브랜의 세븐 킹덤은 아마도 나이트 킹의 기억, 드래곤들과 대니의 이야기가 전설이 되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격랑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쓸데없는 팬의 걱정일 것이다.

지난 편에서 고스트를 북부로 보내버린 존 스노우에게 반려견에 대한 예의가 부족하다고 질타한 팬들이 많았는데 의외로 존은 고스트와 재회하고 앞으로 헤어지지 않을 것 같다.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겠다고 약속한 존에게 가장 애정에 가까운 것을 줄 상대는 고스트밖에 없다. 약간 멍청한 표정의 토문드가 마지막 장면을 위해 다시 등장했는데 그와 브리엔 사이에 다음 기회가 있을런지 없을런지도 조금은 궁금하다. 제이미가 죽었기에 그로서는 작은 희망을 걸지도 모를 일이다.

티리언이 몇 차례에 걸쳐 핸드 오브 킹이 되며 인생이 희한한 방식으로 반복되는 모습도 있었고, 시리즈의 첫 장면이 장벽 너머에서 시작된 죽음이었던데 반해 마지막은 다시 삶의 터전을 개척하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로 그려진 것도 수미쌍관을 위해서는 좋은 선택이었다. 시리즈는 세븐 킹덤의 왕을 여자로 만드는데는 실패했지만 최소한 북부에서 독립된 왕국을 여왕이 통치하게 되었고, 브랜이라는 최고의 능력자이지만 장애인이 왕이 되었다는 설정도 사회적 올바름의 측면에서는 고무적인 선택이라고 하겠다. 마음에 안 드는 팬들도 많겠지만 최소한 게으른 마무리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