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31일 토요일

리멤버 (2015)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화인줄 전혀 모르고 봤다가 결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느낌을 받았다. 스포는 언제나 철저히 하는 블로그였으니 혹시 스포를 원치 않는 사람은 읽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혼잣말일 수도 있겠지만.

치매 노인인 남자 주인공이 아내가 최근에 죽고 난 후 친구 노인으로부터 비밀 지령을 받게 된다. 둘은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생존자들로, 그들에게 고통을 준 독일 장교가 미국에 와서 살고 있음을 알고 그를 총으로 죽이기로 한다. 하지만 동명의 남자가 네 명이라 하나하나 확인해봐야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네 명을 만나는 순서는 친구 노인이 정해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기실 치매 노인은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던 유대인인양 팔뚝에 숫자 문신이 있었지만 놀랍게도 자기가 죽이려고 했던 바로 그 독일인 장교였던 것이다. 바로 그 점이 가장 논쟁적이고도 도발적이다. 아무리 치매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미국으로 도피한지 70년은 되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미국에서 유대인 행세를 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독일인인 것을, 유대인 학살의 주범임을 그렇게 철저히 잊어버릴 수 있었을까?

나치에 부역했지만 당시엔 10대 소년에 불과해 아우슈비츠에 가고 싶어도 못 갔던 어느 독일인의 아들 에피소드에서 치매 노인은 나치 독일에 대한 혐오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70년의 세월은 이 정도의 자기기만도 가능하게 한단 말인가.

치매 노인이 본색을 드러낸 건 네 명 중 마지막으로 동료 장교였던 독일인을 찾아가서 바그너를 연주할 때다. 그 동료 노인은 자신을 찾아온, 스스로를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는 노인이 자신의 친구였음을 즉시 알아보았다. 치매 노인은 유대인도 음악으로서 바그너를 좋아할 수도 있지 않냐고 항변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치매 노인은 그 전에는 아마도 폴란드 작곡가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했던 것 같은데 그것이야말로 가면이었을까?

그 전에 요리사 출신 독일인의 아들을 아주 무참히도 정확히 총으로 죽였던 것, 그리고 태연히 그 집에서 샤워를 하고 잠을 잔 것은 처음에는 우연과 치매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면 젊은 시절 장교로서 개미 죽이듯 사람을 죽였던 습관이 튀어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아무렇지 않게 잠을 자고 현장을 떠났으리라.

결론을 알고 보면 영화 전체의 틀은 완전히 다른 식으로 해석된다. 치매 노인의 여행은 자신의 과거의 잘못에 대한 기억을 억지로 소환해내는 여정이었고, 결국 자살로 귀착될 운명이었다. 아우슈비츠 피해자와의 만남은 동감의 과정이 아니라 참회의 과정이 되었다.

2016년 12월 19일 월요일

강서도서관 시스템 교체

강서도서관이 11월 후반부터 12월 초반까지 2주간 문을 닫았다가 열었다. 올해 언젠가 한 번 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기간이 더 긴 것 같았다. 단순히 서가의 배열을 바꾸고 책을 옮겨서 꽂는 작업만 한 것이 아니라 대출, 반납을 위한 시스템이 완전히 교체되어 있었다.

양천과 강서도서관을 모두 이용하는 입장에서 보면 양천도서관은 대출과 반납을 이용자가 직접 처리할 수 있는 무인단말기가 있어서 편리한 반면 강서도서관은 지난 달까지는 직원에게 책을 가져가서 바코드를 읽어들이는 방식으로 처리해야 했다. 대출의 경우엔 옆에 있는 기계에서 이용자가 직접 책을 한 번 쓱 밀어줘야 했다.

양천도서관이 강서에 비해 규모가 약간 더 커 보이긴 했고, 이용자 수는 훨씬 많아 보이긴 했다. 아마 무인단말기 없이 대출과 반납을 위해 직원들을 찾아야했다면 꽤 복잡했을 것 같긴 하다.

강서도서관에서 길게 줄을 서본 적은 없던 터라 무인 기계의 도입이 시급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편리한 건 사실이다. 양천도서관의 기계와 달리 대출할 때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절차가 없기도 하지만 기계가 더 최근 것이라 그런지 처리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다. 대학교 도서관의 대출 기계도 이렇게 빠르지는 않다. 물론 다른 기계들처럼 강서도서관 것도 5권까지만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다는 한계는 동일하다.

한 편으로는 이 기계의 도입으로 도서관의 인력 수요가 줄어들 것도 분명해보인다. 전에는 항상 두세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앞으로도 그렇게 될까? 양천도서관은 서고에 있는 도서를 가져다 주시는 분이 참 바빠 보였는데 강서도서관은 당분간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조금 쓸데없는 걱정이긴 하다.

2016년 12월 12일 월요일

테일 오브 테일즈. 엘르. 더 이노센츠

테일 오브 테일즈는 동화적인 이야기 세 편이 하나에 담긴 옴니버스 스타일의 영화다. 동화라고는 해도 피가 흥건하고 성인의 알몸이 등장하는 등 수위가 높다. 그렇다고 말초적 자극을 위한 B급 영화는 아니다. 

감독에 대해 잘 몰랐는데 나폴리 지역의 범죄조직을 극사실적으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은 영화 "고모라"를 만든 분이었다. 고모라 이후 리얼리티라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고 얼마 전 테일 오브 테일즈를 만든 것이다. 

테일 오브 테일즈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만든 영화지만 대사는 모두 영어고, 토비 존스 같이 유명한 영국 배우도 기용했다. 출신이 영미권은 아니지만 할리우드에 익숙한 얼굴인 샐마 헤이엑, 뱅상 카셀도 주연으로 등장한다. 리뷰들을 읽다보니 영어 영화를 만든 것은 관람객 층의 확대를 꾀한 조치였던 것 같은데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영화의 원작은 17세기 나폴리 지역의 시인인 바실레의 작품들이라고 한다. 처음 들은 이름이지만 그의 작품은 그림 형제를 비롯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 작가들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한다. 

영화에 나오는 성들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데 모두 이탈리아에 실제로 있는 성들이라고 한다. 나폴리는 10년도 전 전에 가본 적이 있는데 치안이 불안하다느니 소매치기 조심하라느니 등의 말을 들었다. 거의 동시대에 촬영이 되었을 고모라를 생각하면 감독이 현재의 나폴리를 상상의 중세 나폴리의 엽기적 일들을 통해 풍자한 것은 아닐까 상상하게 된다. 

재미있게 본 영화고 지나치게 잔혹한 장면도 없어 불편함이 남지 않아 좋았지만 되새겨보면 난감함이 남는다. 영어로 된 리뷰들을 보니 아무래도 전작이 뛰어난 감독이다보니 그걸 감안해 호의적으로 평가한 부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로저버트닷컴의 리뷰는 내 감상과 비슷하게 영화의 메시지 차원에서는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볼 수 있었다. 실제로 다른 리뷰에서도 영화의 촬영 같은 기술적 부분에 대한 좋은 평가가 내용적인 부분보다 앞섰던 것 같다.

벼룩을 고기를 먹이며 애완용으로 기르면 커다란 개만큼 커진다는 상상은 황당하게 웃겼고, 문틈으로 삐져나온 노파의 손가락을 핥아대던 뱅상 카셀의 연기도 우습다. 해저 괴물의 심장으로 인해 하루만에 태어난(아비 없이! 두 명이나!) 아이들 이야기는 결말이 너무 미약했고,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성 위의 허공에서 줄타기를 하는 사람은 왜 등장하는지도 의아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또 다른 영화, 문제작들의 아버지 폴 버호벤의 신작 "엘르" 속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가 바로 고공 줄타기, 그것도 아래 안전망이 없는 진짜 줄타기 연기였다는 평가를 어떤 리뷰에서 읽을 수 있었다. 

어떤 식이긴 폴의 영화를 볼 때는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데 두 시간이 넘는 이 영화는 어떤 불편함이 앞으로 전개될까 궁금해하며 힘들게 버텨야했다. 다름 아닌 강간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가디언을 보다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말론 브란도의 강간 장면에서 베르톨루치 감독이 현실성(성기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무엇인가가 삽입되기는 했다고 한다)을 높이기 위해 브란도와 짜고, 19살의 여배우 슈나이더에게는 알리지 않고 그 장면을 촬영했다고 하여 영화계의 성폭력 문제가 불거진 바가 있었다. 당시 어떤 기사는 "엘르"의 위페르는 무엇을 찍는지 알고 찍었다고 라스트 탱고와 비교를 했던 것이다. 엘르가 이자벨 위페르의 영화라는 점 말고는 다른 정보가 전혀 없던 시점이었다. 감독이 폴이었다는 것은 영화를 보면서 알았다. 

여하튼 괴상한 이 영화는 평단에서 호평을 받았다. 재미있게도 영화 리뷰들 중 몇 개가 영화가 B급과 고차원적 영화 사이라면서 B+ 등급을 매겼다. 결국 A는 줄 수 없다는 건데 소재의 자극성이 한몫했으리라. 

위페르의 극중 이름은 미셸 르블랑이고, 10살 때 살인마 아버지의 범행 현장에 있고 심지어 그의 범행을 도왔던 혐의를 받고 자랐다. 그녀는 문학 혹은 학계에 있다가 잔혹하고 에로틱한 비디오 게임(플스용인듯) 회사를 차려 큰 돈을 벌었다. 어릴 적의 충격 때문인지 혹은 원래 그런지 그녀는 게임이 더욱 더 자극적이게 만들도록 요구했고, 그 목적을 위해 아르바이트 모델 여성이 사진사에 의해 거칠게 옷이 벗겨져도 개의치, 아니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아마 영화 시작하자마자 그녀 자신이 괴한에게 강간을 당하고 나서도 별일 없었다는 듯이 지내고 아무렇지 않게 전남편과 절친에게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말하는 것이 그녀의 태도를 가장 잘 대변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강간범을 알아채고는 그 사람을 유혹하는 장면은 처음에 이상했다. 범인이 아주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은 나중 일이지만 강간범에 대한 환상은 미셸이 많이 뒤틀린 사람임을 보여준다. 강간범 혹은 그녀의 이웃인 은행원은 미셸이 요구하면 거부한다. 다만 자신이 거칠게 여자를 때릴 때에만 성욕이 생긴다. 영화 말미에서 은행원의 아내가 말하듯(그녀는 예전에 남편의 범행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좋은 사람인데 어떤 부분에서는 고통받는 영혼이었다. 한 리뷰에서 잘 지적했듯이 성행위에서 여자가 주도하려고 할 때 남자가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다는 지적은 맞는 것 같다. 

영화에서 가장 코믹한 부분은 미셸의 아들인 뱅상이 약혼녀가 출산을 했는데 피부색이 상당히 어두운데도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그 옆에 같이 혼 흑인 친구가 자꾸 싱글싱글 대고 있어서 그 친구야말로 아기의 친아빠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도록 찍은 장면이다. 뱅상의 약혼녀는 그럼에도 언제나 당당하고 항상 뱅상에게 야단을 친다. 

더 이노센츠라는 영화도 공교롭게 강간에 대한 영화다. 처음에 수녀원이 화면에 등장해서인지 그런 영화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945년 폴란드라고 하니 홀로코스트와 관련이 있을까 추측해보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라고 하면 수백 만명이 죽은 유대인들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 영화는 여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영화 속 희생자 여성은 다름 아니 수녀들이다. 폴란드의 수녀원이기에 독일군도 지나갔고 러시아군도 지나갔다. 그들은 그냥 지나간 것이 아니라 수녀들을 강간하고 갔다. 영화 속에서는 독일군의 강간은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고, 러시아군들이 하루도 아닌 며칠을 머물렀다고 한다. 

강간은 그 자체로 심각한 범죄지만 여러 수녀들이 임신을 하게 되었고 수녀원이라는 설정은 더 큰 문제를 제기한다. 수녀들은 성적 순결을 맹세한 이들이고, 그렇다고 자살을 할 수도 없다. 그녀들은 아이를 낳았고, 아이는 원장 수녀에 의해 어디론가 옮겨졌다. 원장의 설명은 아기들이 어떤 가족에게 넘겨서 잘 클 거라는 것이었지만 영화 속 한 사례가 보여주듯 아기들은 추운 겨울밤 들판에서 얼어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너무 힘든 상황이었는데 프랑스 적십자 소속의 한 여성 의사가 수녀원에서 출산을 돕게 되었고, 어느 날 불쑥 찾아온 러시아군들에게 수녀원에 티푸스?가 있다는 거짓말로 그들의 방문을 막고, 결국 나중에는 수녀원에서 수녀들이 낳은 아기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에 대한 해답까지 제시하게 된다. 

세계대전의 와중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폴란드에 수많은 고아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그 고아들을 수녀원에서 돌보면 수녀들의 아기를 다른데 보내지 않고도 기를 수 있다는 처방이었다. 

아무 죄가 없는, innocent 수녀들의 이야기는 눈물없이는 보기 힘들다. 꽤 유명한 영화인가 싶었는데 네이버 영화에는 소개조차 되지 않은 듯 하다. 

2016년 11월 21일 월요일

설리 : 허드슨 강의 기적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신작이라 봤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적잖은 실망감을 느끼고 말았다. 전작인 아메리칸 스나이퍼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며, 영화의 정서도 유사한 지평에 있다.

대략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미국에는 새떼 때문에 양쪽 엔진이 망가진 비행기가 뉴욕 근처에서 회항해도, 심지어 강물에 착륙해도 승객 하나 죽지 않는 결과를 가져온 유능한 비행사가 있다, 그런데 이 국민적 영웅 비행사가 왜 인근 공항으로 가지 않고 위험하게 강물로 갔는지를 철저하게 조사하는 감시 시스템이 있다, 일견 감시 시스템은 괜한 시비를 거는 asshole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진실을 덮으며 자신들에 유리한 주장을 유지하지 않고 잘못을 인정할 아량도 있다는 등등.


물론 오늘날 한국의 현실, 특히 세월호 이후 정부의 대처를 떠올리며 미국의 이러한 시스템, 가장 늦게 강물에 가라앉는 비행기에서 나오는 기장, 신속한 구조대의 출동 등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이는 실제 있었던 일이니 세월호와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대도시 속의 강에서 일어난 일과 유난히 물살이 센 바다 위의 일의 대처법이 같을 수는 없지만, 영화 터널이 그러했듯 이 영화를 보며 세월호는 어쩔 수 없이 생각난다. 미국에서는 기장이 잘 한 일까지도 철저히 조사를 받는데 한국의 세월호 조사가 어떠했는지, 또 정부, 여당에서 얼마나 비협조적이고 심지어 방해를 했는지를 생각하면 두 나라의 상황이 얼마나 천지차이인가.

영화에서 많은 포인트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비행기에 겨우겨우 늦게 타게 된 세 남자는 비행기가 강물 위로 비상착륙을 할 때 얼마나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했을까. 비행기가 절망적인 상황으로 하강하는 와중에 여자 승무원들은 어떻게 그렇게 침착할까. 9/11 이후 일어난 이 사건은 만약 비행기가 설리의 꿈, 상상 속의 장면처럼 고층 빌딩과 충돌했다면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남겼을까. 대도시 주변해 공항이 있으면 얼마나 위험한가. 그렇다면 제2롯데월드는.

그러나 앞에서 적은대로 영화를 보고 가장 앞에 나오는 감정은 미국의 자뻑 같은 이런 영화를, 비록 전작 아메리칸 스나이퍼만큼 논쟁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왜 이스트우드가 자꾸 만드는걸까였다. 

2016년 9월 11일 일요일

존스 자유주 Free state of Jones

프리 스테이트 오브 존스는 매튜 매커너히의 신작이라 관심이 있는 작품이었고, 무엇보다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언급이 되어 보고 싶은 영화였다. 구글 검색에서 한글로는 존스 자유주라는 식의 번역어를 볼 수 있었다.

예고편을 볼 때는 남북전쟁 장면 밖에 안 보여서 전쟁 영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전쟁 장면은 영화 앞 부분에 잠깐 등장할 뿐이다. 나중에 펼쳐질 이야기도 일종의 전쟁이라고 볼 수는 있겠으나 통상 우리가 아는 남북전쟁의 전투와는 전혀 다르다.

영화는 놀랍게도 남부 사람이면서 오히려 남부군과 전쟁을 벌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들이 남부 중에서도 가장 독하다는 미시시피 사람들의 일부라서 더 놀랍다.

매커너히는 뉴트 나이트라는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 뉴트는 남북전쟁에 남부군으로 참전하지만 조카가 허망하게 죽은 이후 그 시체를 데리고 고향에 간 이후 탈영자가 된다. 이후 넓은 늪지대에 피신하며 이미 피신해있던 흑인 노예 출신 도망자들과 함께 살게 되고 이어지는 탈영자들을 규합하며 이 집단의 지도자가 된다.

탈영자들은 남부군에서 노예 20명이 있으면 한 명의 병역이 면제되는 불합리한 제도에 불만을 느꼈고, 결국 남북전쟁은 남부의 노예소유주들을 위한 것이며 노예가 없는 사람들은 부자들을 위해 총알받이가 될 뿐이라고 결론짓는다.

늪에 피신한 탈영자들은 규모가 커졌고 심지어 남부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할 정도에 이르게 된다. 이들은 북부군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나 영화상에서 북부의 장군들은 존스 주의 이 자유인들의 능력을 높게 사지 않았고 도움은 총만 조금 준 것으로 되어 있다.

탈영자 내부에서 백인이 흑인 노예 출신들을 차별하려는 기색이 보이자 뉴트는 탈영자 백인이 흑인과 다른 게 뭐냐고 반문한다. 부자의 속박에 얽매인 백인은 피부색이 하얄뿐 니거nigger인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자유인이라는 가치를 최우선으로 내세우며 남부군을 내쫓은 넓은 지역을 하나의 국가로 선포한다. state는 미국에서는 하나의 주이긴 하지만 영화에서는 주가 아니라 국가처럼 자신들의 영역을 생각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감독은 1860년대의 이 이야기를 평면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약간 비틀면서 관객의 추리를 유도하는데, 바로 뉴트와 흑인 배우자의 후손이 백인과 결혼하면서 겪는 재판의 과정이었다. 겉보기에 백인인 뉴트의 후손은 따져보니 흑인 노예의 피가 흐르는 것이 확인되었고, 재판정은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판정을 내린다.

이 판결은 나중에 찾아보니 1950년대의 이야기라고 한다. 뉴트의 후손인 남성에게는 징역형이 내려졌으나 실제로 감옥에 갇히지는 않았다고 한다. 영화에서 뉴트가 탈영 생활을 한 이후 부인은 아들 하나와 함께 멀리 떠났다가 몇 년 후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이후 뉴트는 원래 아내와 흑인 아내 둘을 함께 데리고 살았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어느 한 부인과 그 자녀들이 다른 집에서 살았던 모양이다. 영화와 다르게 뉴트는 원래 부인과 자녀를 9명이나 두었고, 흑인 아내와는 5명을 낳았다고 한다.

뉴트는 시대를 꽤 앞서 살았던 사람임에 분명하고 영화에서 그려진 것보다는 덜 도덕적인 사람인 것 같다.

2016년 7월 25일 월요일

이미그런트, 테스터먼트 오브 유스, 싱 스트리트

최근 본 일련의 세 편의 영화들은 마리옹 꼬띠아르가 폴란드 출신으로 미국 이민을 꿈꾸는 여자로 나온 이미그런트, 1차대전을 겪으며 주변의 친구, 연인, 동생을 잃은 한 여인이 반전운동가로 변신하는 테스터먼트 오브 유스 그리고 원스와 비긴 어겐 감독의 신작으로 아일랜드가 배경인 싱 스트리트다.

이미그런트는 2013년 영화이고 출연작을 꼭 챙겨보는 호아킨 피닉스의 영화임에도 늦게 본 감이 있다. 깐느 영화제에도 나갔던 작품 같은데 허탈함이 남는 영화였다. 호아킨 피닉스가 처음부터 수작을 부렸으리라는 짐작이 중간부터 들었는데 실제로 그러했다. 마리옹 꼬띠아르는 유독 사랑했던 것 같지만 기존의 여성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붙잡았을 것 같다. 도와주고 여성들이 미국에 입국할 때 같이 왔던 가족이 억류되어있을 때 사실 빼낼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는 식으로.

테스터먼트 오브 유스는 요즘 주목받는 스웨덴 배우 비칸더르의 출연작으로 게임 오브 쓰론의 남자주인공인 킷 해링턴이 비칸더르의 상대역이다. 킹스맨, 독수리 에디로 유명해진 태런 에저턴은 비칸더르의 동생. 실화 배경의 영화는 1차대전으로 인한 아픔을 누구보다 깊게 겪은 한 여인이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과정이 펼쳐진다. 시골 출신의 옥스퍼드 여성 신입생이라는 위치, 여성참정권 문제, 전시 간호사의 삶 등 남성의 입장에서 이해하거나 알기 어려운 시각을 경험하게 한다.

싱 스트리트는 관객 평점이 8점을 넘을 정도로 호평을 받아 도대체 무언가 했더니 감독의 전작 음악영화들이 유명했다. 실제 영화도 마음에 든다. 여기에도 게임 오브 쓰론의 리틀핑거가 아버지역으로 나오고 어머니역의 배우는 전에 다른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다. 왕좌의 게임이 영국배우들을 얼마나 많이 썼는지 새삼 느껴진다. 여하튼 싱 스트리트는 무엇보다 노래들이 좋았다. 배우들의 극중 상황에 따라 바로바로 반영되는 가사들의 노래는 기분을 좋게 만들고 무엇보다 up이라는 노래가 좋았다. 곱씹어보면 판타지 영화나 다름없으나 기분이 좋아졌으니 그만이다.

2016년 7월 20일 수요일

영화 곡성에 대한 말과 글을 보고

시네타운 나인틴의 곡성 편을 어제 들었다. 처음 알게된 김반장이라는 사람이 영화를 네 번 봤다면서 영화의 여러 수수께끼에 대해 해설했다. 과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럴 듯한 설명들이긴 했다.

영화를 보고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기왕 이런 내용들을 들은 김에 관련 리뷰를 검색하다보니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지난 달에 무려 두 시간에 걸쳐 곡성에 대해서만 깊은 분석을 한 인터넷 방송을 발견했다.

이동진의 글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그의 팟캐스트를 듣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브랜드가 많은 신뢰를 주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다. 영화 곡성은 그가 한국영화로는 몇 년만에 만점의 평점을 주면서 관객몰이를 한 측면도 있는 듯 하다.

두 시간짜리 영상은 이동진의 평론가로서의 능력을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어필하는 점은 그의 설명이 크게 어렵지 않다는 점일 것 같다. 영화평론은 어렵고 현학적인 글이 워낙 많아서 이렇게까지 써야하나 싶은 느낌을 많이 받는데 이 영상은, 아마 대중적인 타겟을 염두에 둔 영상이기에 더욱 그렇겠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별로 없다.

그는 신중을 기하는 차원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주장을 한 사람의 의견으로만 받아들여달라고 당부했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이동진은 하나의 텍스트를 해석함에 있어 창작자의 의도를 밝히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수용하는 독자,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도 중요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누가 최초인지 모르지만 김반장도 제기한 장모 귀신(가능)설을 염두에 둔 듯한 코멘트도 영상 막판에 나오긴 하는데 이동진의 해석은 거의 무난하다. 부제 양이삼의 이름을 성경 구절의 차용이라고 추측한 부분이나 일광이 살을 날리는 대목에 대한 해석, 예를 들어 흑백이 각각 어느 편인지와 누가 누구를 해하는지에 대해 설명은 영화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한 번 영화를 본지라 세세한 부분에 대한 남들의 해석은 그게 그랬었나, 그랬구나라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긴 하다.

일단 이동진 해석에서 여전한 의문들을 적어보고 싶다. 천우희가 연기한 무명이 신적인 존재인 점은 분명하다. 무명이라는 이름조차 시나리오 상의 이름이고 누가 그녀를 무명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이동진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무명은 이름이 없다는 뜻임이 거의 확실해보인다. 그는 이름 없음이 신적인 존재의 증거라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일본인 혹은 외지인도 이름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분명 이름이 있'었'다. 그는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물론 곡성에 사는 누구도 일본인을 그의 행정상의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그저 불길한 일본인, 외지인일 따름이다. 교묘하게도 곽도원이 연기한 종구가 일본인의 여권을 휴대폰으로 사진찍을 때 이름이 있어야 할 부분은 가려진다. 만약 여권에 이름이 없다면 종구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여권에 외지인이라고 적혀있을리도 만무하다. 아마 원래 시나리오대로 영화 종반부에 그 일본인이 아주 오래 전에 한국에 들어온 증거가 팩스로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다면 그의 이름이 밝혀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마도 감독은 쿠니무라 준의 존재를 이름 없는 '외지인'으로 신비하게 남겨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논리적으로 외지인은 신적 존재로 충분히 간주할 수 있다.

이동진이 말했는지 지금은 조금 헛갈리는데 쿠니무라 준이 계속 신적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는 해설이 있었다. 그는 도망치고 숨고 울기도 한다. 전에 씨네21 기사에서 지적하듯 시장에서 닭값을 두고 흥정도 한다. 만약 이 외지인이 사흘만에 죽은 후 부활하는데, 죽기 전에는 신성이 약하거나 아예 없는 존재였다면 어떨까. 사실 예수에 대한 해석도 이 대목이 결정적이긴 하다. 예수가 원래 유일한 하느님과 동격이었는지 아니면 인간이었다가 신이 되었는지(혹은 자신이 신 혹은 하느님의 아들임을 깨달았는지) 아니면 아예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일 뿐인지.

곡성이 예루살렘이고 외지인이 예수의 모티브를 차용했다면 인간이다가 신이 되는 설정도 가능하다. 인간 중 무언가 다른 인간, 카리스마가 있는 인간, 선지자prophet가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로 봐도 무방하다. 원래 조금 특별한 능력이 있던 인간이 더 높은 신적 존재로 승격되는 것은 고대의 상상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 외지인의 존재는 애매하긴 하다. 일본인인데 죽기 전의 행동을 보면 무당 일을 하기도 하고, 알몸(훈도시는 청불 등급으로 가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외지인과 한 편임을 보여주기 위해 일광까지 훈도시를 입고 만다)으로 산짐승을 날로 먹기도 한다. 그런데 이 무당의 모습이 이동진은 네팔 샤만을 나홍진이 직접 관찰하고 섞어 놓은 것 같다고 한다. 일본 무당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굿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외지인의 행동은 일본적인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인틴에서는 온갖 레퍼런스를 차용하되 그대로 도입하지 않고 자꾸 비트는 것이 나홍진의 의도라는 말을 들었다. 예수인줄 알았는데 악마였고, 무당이 아이를 살리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외지인과 한 편이었고, 바보처녀인줄 알았는데 마을의 수호신 혹은 자연이고 등등.

이런 비틀기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무너졌다는 혐의나 비판의 근거가 될 터이다. 이승훈pd는 나홍진 감독이 곡성을 코미디라고 규정한 것에 대해 분개하는 듯 했는데 나 감독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원전을 비틀다 못해 정반대의 대상으로까지 전환시킨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다. 패러디는 적당히 원작을 바꿔야하기 때문이다.

이동진의 말 중 기독교와 무속이라는 두 가지 종교(?)는 사실 아무 종교여도 무관했고 다만 한국 영화기에 한국인에 가장 친숙한 두 개를 차용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또한 이동진은 양이삼 부제가 외지인을 만나 악마를 보게 되는 절정의 순간에 대한 해석에서 부제가 동굴에 찾아갔기에 악마의 모습을 보인 것이지 다른 사람이 갔으면 다른 정체를 드러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외지인의 정체가 가변적이라면 외지인의 정체는 일본인 기반에 무속인이되 일본적이기도 네팔적이기도 한 의례를 행하고 예수처럼 비난받고 고난을 받아 처형당한 후 사흘 후에 부활하지만 결국 악마로 정체가 드러나기도 하는 혼종성이 정당화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압도적으로 많이 차용된 기독교 모티브를 감안한다면 이렇게 분명치 않은 정체는 상당한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기독교인의 분개를 살 것이 분명하다.

일광은 외지인과 한 편이라는 점이 분명하다고 인정된다. 그런데 언제부터 둘이 한 편이 된 것일까? 영화상에서는 그 점이 분명치 않다. 둘은 공통적으로 훈도시를 입고, 미놀타 카메라로 희생자들의 사진을 찍는 행동을 하며 무당이다. 이동진은 일광이라는 이름이 일본의 빛이라는 뜻이라고까지 해석했다.

그런데 무당이라고 하면 구한말 개화기에 타파해야할 구습, 악습의 대표적인 경우였다. 서양에서 일본을 경유해 들어온 소위 서구 문명의 기준에 비춰서 그러했다. 여전히 무당은 한국인의 삶 속에 살아있는 존재들이기만 대개는 케이블 방송의 싸구려 방송 소재로나 사용하는 미신으로 여기고 있다.

어쨌거나 무당이라면 한국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이런 무당이 일본에서 온 악마를 추종하는 것은 어찌 보면 상당히 냉소적인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어제 읽은 곡성에 대한 몇 개의 영어 리뷰에서는 일제 식민지의 과거가 몇 번 언급되었다. 영미권 기자/비평가의 눈에는 한국의 식민지 과거가 영화에 개입되었다고 보는 모양인데 이 점에 대해 상세한 분석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동진은 무당에 대해 설명하며 사실 무당들이 토속적 귀신만 섬기는 게 아니라 현대에 오면 맥아더도 신으로 섬기고 또 누구인지 기억이 안나지만 하여간 서구의 누군가를 신으로 모시는 포용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무속의 맥아더 숭배는 잘 알려진 바이고, 현대 이전에는 중국의 귀신들도 모셨으니, 일본 귀신이 용하다면 못 모실 일도 없을 터이다. 이렇게까지 하여 일광이 외지인과 한 편이 된 것을 이해는 하더라도 어떤 계기로 둘이 만났는가는 설명되지 않는다. 김반장의 해석을 보면 마을의 다른 집들에서 살인 사건이 날 때마다 할매들이 무당을 불렀고 그 때마다 일광이 오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을 내놨는데 그렇다면 해명이 될 듯도 한데 완벽한 이론은 아닌 것 같다.

이동진은 두 시간의 긴 해석을 하며 결국 이 영화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에 대한 것이라고 정리해냈다. 종교라는 것은 세상의 악, 개인의 불행에 대한 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답은무명이 집으로 가려는 종구를 붙잡으며 비논리적으로 내뱉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답은 답이라는 거다. 기실 기독교에서도 믿지 못할 것을 일단 믿어야한다는 거니 종교는 원래 그런 속성이 있다고도 하겠다. 하지만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세상의 질서인 코스모스가 있고, 이는 신이 이미 정해놓은 바인데 여기에 우연이라는 카오스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공포에 떨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는 카오스마저도 자신들의 논리로 다 설명해낼 수 있다. 부제는 악마가 마을 불행의 원인임을 확인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고 겁이 많은 종구는 딸이 왜 피부병이 생기고 욕을 하고 칼을 휘두르는지 끝내 모른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물론 종구가 죽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긴 하다).

평범한 인간들은 우연히 닥치는 불행에 무력하게 무너진다. 이동진이 정리하기도 했고 나홍진이 직접 말하기도 했지만 감독은 세상의 어떤 범죄들은 인간이 저지른다고 보기에 너무 처참하고 이해불가하기 때문에 신적 존재, 아마도 악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행할 수 없는 악행이 있다는 것이다. 악령에 사로잡힌 인간이나 악마 자체가 인간 사회에 있다고 본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평범한 사람이 이런 악마를 마주치면 낚여서 버둥대다 당하는 수밖에 없다는 체념적인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편 감독은 종구를 위로하려고 했다, 최선을 다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다독인다고 하는데 얼마나 위안을 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최근 IS가 일으키는 무차별 테러는 폭탄 조끼가 아니라 대형 트럭으로 사람을 쳐서 80명을 넘게 죽이는, GTA에서도 차마 하기 힘든 형태로까지 나오고 있다. 이 희생자들의 가족은 악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악마는 꼬리가 있지도 뿔이 달리지도 않았다. 분명한 종교적, 정치적 의도에 의해 일어난 테러이고, 근원을 따지면 서구의 책임도 적지 않다. 곡성의 하이브리드 악마는 구마 사제도 없애지 못할 것 같은데, 인간 세계의 눈에 보이는 악마적 존재라고 해서 처치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선악의 구분 자체가 작위적이기도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