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7일 수요일

Incendies 그을린 사랑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중 초기작인 Incendies, 한국 개봉명 '그을린 사랑'은 안 보고 있던 차였는데 영화가 레바논에 관한 것이라길래 잉?하며 급히 찾아보게 되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은 거의 다 봤다고 생각했고, 본 영화들 대부분은 할리웃 영화였기 때문이다. 조금 전 imdb에서 보니 감독작은 새로운 블레이드 러너를 포함하여 16개나 되므로 프리즈너스 이전 작품은 하나도 못 본 셈이다. 프리즈너스 이후 할리웃 대작들을 찍고 있다.

그을린 사랑이라는 제목 자체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무슨 의미인지, 무엇에 관한 영화인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을린 사랑이라는 국내 개봉명이 잘 된 번역이라고 말한다. '그을린'이라는 말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은데 사실 영화의 원작이 되는 연극 극본의 제목이 scorched, 즉 그을림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한국 번역자가 생각해낸 번역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앵상디 정도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프랑스어인 원제는 화재가 기본적인 의미이고, 확장적인 의미로 분쟁, 내전까지 의미하는 듯 하다. 여하간 불, 화재와 그 결과로서의 그을림이라는 연결이 이루어진다. 영화에서는 직접적인 의미에서의 화재는 버스에서 발생했고, 내전으로 인해 불에 타고 무너진 건물들을 볼 수도 있었다.

본 사람은 다 이해할 수 있을 영화 내용인데 영화의 구성은 쌍둥이 남매가 죽은 엄마의 과거의 비밀을 스스로 알아나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엄마를 고용했던 캐나다인 공증인은 아마도 비밀을 상당히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남매가 스스로 충격적인 비밀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린다.

인터넷에서 본 어떤 평은 단적으로 오이디푸스 신화를 현대에 적용한 거라고 평했다. 소년이 왕이 되지도 않고, 직접적으로 아버지를 죽인 것도 아니긴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를 몰라보고 성관계를 갖는 것(이런 중립적이고 온건한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만은 공통적이다. 영화가 오이디푸스에 해당할 남성이 아니라 어머니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도 큰 차이다.

영화의 충격적 반전은 사실이 완전히 까발려지기 전에 어느 정도 짐작은 가는 바였다. 설마 그렇게까지할까라는 의심은 있었지만. 애초에 어머니가 큰 아들을 낳은 시점 자체가 의문이었는데 왜냐하면 같은 배우가 계속 나오기 때문에 무슬림 난민인 남자 친구가 죽은 시점에 도대체 몇 살인가 헛갈리기 때문이다. 찾아보니 10대 시절이라는 건데, 이후 이 여성이 대학에 들어가고 운동을 하고 정치범으로 수용되는 걸 감안하면 처음 등장할 때 10대였던 것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마 화면상의 외모로는 별로 그렇게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40 전후가 되었을 그 비극의 순간에 큰 아들의 만행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영화의 원작이 레바논을 배경으로 했는지 모르겠지만 영화는 레바논을 배경으로 한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영화의 사건과 레바논 현대사에 일치점이 있을 뿐이다. 레바논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적은 없지만 오랜 내전이 있었고 그 성격이 무슬림과 기독교의 대결이라는 점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기독교인인데 갑자기 기독교 지도자를 암살하길래 이게 무슨 일인가 했는데 아들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무슬림쪽에 가담했던 모양이다.

세월이 지난 후에 화제작을 처음 접하면 김이 빠지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영화는 촬영이나 개봉 당시에 봐야 그 의미가 더 분명하게 드러날 터이다. 지금 와서야 보게된 그을린 사랑은, 만약 감독의 의도대로 레바논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사 일반적인 이야기라고 하면, 이게 무슨 희한한 이야기인가,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로 평가될 가능성도 다분한다. 실제 나의 느낌이 그렇다. 추리극 같았던 영화의 전개와 구성 방식은 뛰어났으나 현실적 의미를 배제한 채 중동 같긴 한데 아닐 수도 있다는 장소의 이상한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믿을 수 없이 무한한 모성애에 대한 경외감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까. 전쟁 세대와 전후 세대의 건널 수 없는 간극에 관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절대악에 대한 것일까, 절대악도 사연이 있다는 이해를 요구하는 것일까.

2017년 6월 6일 화요일

라이프 (2017)

몇 가지 점에서 의외인 영화였다. 영화 포스터에 등장했고 몸값도 적지 않을 라이언 레이놀즈는 누가 봐도 주인공 중 하나 그러니까 영화 막판에야 죽을지 말지가 결정될 인물로 보였는데 정말 빨리 죽었다. 후반부에 시체로서 한 번 더 등장한다.

후반부에 반전으로 화성 생물체인 캘빈과 제이크 질렌할이 탄 팟?pod이 지구의 바다에 도착하고, 레베카 퍼거슨의 팟은 우주 멀리 날아가버린다. 이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두 남녀의 계획대로 레베카는 지구로, 질렌할과 캘빈은 우주로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캘빈의 지능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말이다. 지구로 향하도록 우주선을 조종할 능력까지 갖췄다니.

일본의 명배우 사나다 히로유키를 볼 수 있었는데 영화상에서 적지 않은 나이에 아이를 얻었지만 우주에서 비명횡사해서 안타깝다.

목성에 도착한 지구인들이 괴생물체에 봉변을 당한 유로파가 떠오르기도 했고, 마션을 비롯해 요즘에는 많은 영화들이 화성 거주를 논의해서 화성에서 정말 살 작정인가 생각이 들기도 하는 영화였다.

트윈 픽스 시즌3 에피소드 5

첫번째 주에 트윈 픽스 새 시즌의 네 편을 일거에 토해낸 쇼타임은 한 주의 휴식기를 갖고 나서 에피소드 5를 공개했다. 여전히 제목은 '더 리턴'이다. 그러니까 더 리턴 파트 5인 셈이다.

이번 편에서 트윈 픽스 지역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대신 빨간 방을 벗어나 더기의 자리로서 세상에 돌아온 쿠퍼의 세상 적응기가 주를 이룬다. 더 리턴이라는 제목들은 트윈 픽스라는 문제적 화제작의 귀환이기도 하고 시즌 3의 흐름상 주인공인 쿠퍼가 세상에 돌아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난 에피소드 4에서 커피를 먹으며 쿠퍼의 정신이 돌아왔는가 싶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문장을 말하지 못 하고 대화 상대방이 말하는 단어들 중 가장 기억에 남거나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만을 따라할 뿐이다. 대신 커피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여서 댐 굳 커피를 명대사로 만든 지난 시즌을 떠올리게 한다.

린치의 작품이라기엔 의외일 정도로 친절하게 지난 시즌과 이번 시즌의 연결점을 확인시켜주는 장면들이 있어서 TV 드라마는 확실히 영화와 다르고, 매니아가 아닌 일반적인 시청자를 신경썼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이번 5편에서 드디어 얼굴을 드러냈다. 이전 편에서 셸리의 딸로 베키라는 이름만 거론된 캐릭터다. 트윈 픽스의 10대 답게 문제아 기질이 다분해보였다. 페기 립튼을 다시 보는 것도 좋았다. 원래 시즌 1, 2에는 얼굴이 뛰어난 젊은 여배우들이 많았지만 페기 립튼의 미모가 가장 돋보였다. 그러나 27년의 세월은 그녀의 미모가 예전같을 수는 없도록 만들었다. 얼마전 검색하다가 그녀가 퀸시 존스의 부인이고 딸도 유명 배우가 되었음을 알게 되기도 했다.

예전에 바비의 아버지인 브릭스 소령은 블랙 코미디 같은 현란한 말 솜씨로만 기억되었고, 그가 로라의 죽음 등 트윈 픽스의 비밀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은 못 했는데 이번 편을 볼 때 상당히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트윈 픽스의 초자연적 현상을 조사하는 역할이었던 모양이다. 시즌 3가 트윈 픽스의 마지막일지 어떨지 모르지만 시즌 1, 2의 미스터리를 상당히 풀어줄 듯한 느낌은 든다.

2017년 5월 24일 수요일

트윈 픽스의 템포

새로은 트윈 픽스를 보고 나서 진행이 상당히 느리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최근의 미드들이 많은 경우 빠른 전개를 특징으로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어떤 드라마들은 대사가 너무 빠르면서 많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경우도 많다. 그런 영상들에 익숙해진 이후 트윈 픽스를 보면 답답함마저 느껴진다.

파트 1의 초반에 뉴욕 고층 건물의 유리 박스 장면이 대표적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유리 상자와 그 내부를 촬영하는 카메라 몇 대가 느릿하게 보여지고, 그 방을 관리하는 아르바이트생은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스피커를 통해 지시가 가끔 내려오면 그대로 이행할 따름이다.

빨간 방 속 인물들의 대사도 느리고, 거인의 말도 느리다. 별 일도 아닌 듯한 대사를 듣기 위해 시청자들은 많은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갑자기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법도 없다. 연옥과 같은 빨간 방 속에서 쿠퍼가 가끔 이상한 일을 갑작스럽게 겪긴 하지만 그 갑작스러움 조차도 길게 묘사가 된다.`

듀코브니의 재등장은 예기치 못 했다. 지난 주 정도의 뉴스를 보니 트윈 픽스로 가장 성공한 배우가 바로 듀코브니라고 한다. 사실 트윈 픽스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이후 성공적인 배우 커리어를 이어간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린치가 배우로서 깊숙히 이번 시리즈에 개입한 것도 관심거리다. 트윈 픽스의 이야기는 린치와 프로스트가 만들어냈고, 린치는 이번 시즌 3 전체의 감독을 맡았다. 그런 그가 예전과 달리 배우로서도 많이 출연할 기미가 보인다.

2017년 5월 23일 화요일

마침내 트윈 픽스의 귀환

2년 전의 약속대로 트윈 픽스가 돌아왔다. 1990~91년의 원래 시리즈에서 25년 후에 만나자던 로라의 대사가 거짓말처럼 지켜졌다. 물론 제작 기간 때문에 셈에 따라 26 혹은 27년 후에 돌아온 것인지도 모르지만 정확히 25년 후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시즌1, 2가 미국의 공중파에서 방영된 것과 달리 이번 시즌은 케이블 채널인 쇼타임에서 방영된다. 그런만큼 폭력과 노출의 수위는 영화판처럼 높았고 난해하기로 따지면 데이빗 린치 감독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여서 별로 일반 TV 시청자를 위한 드라마는 아니라는 느낌이다. 실제 방영 직후 타임지 온라인 판의 리뷰는 시청자에게 지나치게 친절하지 않은 이 드라마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우선 1, 2번 에피소드가 한꺼번에 방영되었다. 마치 27년 전 충격적인 트윈 픽스의 첫 여정이 두 개 에피소드 분량의 파일럿으로 시작된 것을 반복하는 것처럼. 온라인을 통해서는 3, 4번 에피소드까지도 공개되었다. 한 에피소드마다 거의 한 시간을 꽉 채우고 있어 최종적으로 18회까지 방영될 이번 시리즈는 18시간의 쉽지 않은 여행이 될 터이다.

방영 전 뉴스를 통해 원작 출연자 중 의외로 많은 얼굴들이 이번에 참여해서 놀라웠다. 파이어 워크 위드 미 시절부터 이탈한 출연진도 있었고, 밥 역할의 프랭크 실바와 로그 레이디처럼 돌아가신 분도 있지만 벤자민 혼과 그의 동생 같은 인물도 재등장한다. 하지만 많은 인물들이 에피소드 2까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공간적 범위가 트윈 픽스를 벗어나 뉴욕과 사우스 다코타, 라스 베가스까지 확장되었기 때문에 새 공간의 새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명하다보니 정작 트윈 픽스의 기존 인물 중 얼굴을 내비친 사람은 몇 명 없다. 새로 참여한 엄청난 네임 밸류의 배우들이 언제 등장할지도 초미의 관심사다. 현재는 벤자민 혼의 호텔에 비서로 출연한 애슐리 주드 정도가 있었다.

몇 개의 언론 리뷰들을 읽어봤는데 대체적인 줄거리는 25년 동안 붉은 방에 사로잡힌 쿠퍼가 세상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라는 데 일치한다. 세상에는 25년 전 밥에 사로잡혀버린, evil 쿠퍼가 악행을 저지르고 다닌다. 나중에는 더기라는 또 다른 버전의 쿠퍼도 세상에서 살고 있음이 드러나는데 이 존재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이야기에서는 붉은 방의 쿠퍼가 더기와 교환되는 형식인데..

물론 새로운 살인, 기괴한 살인이 등장한다. 로라 팔머의 살인에서 신체훼손은 없었으나 이번 트윈 픽스의 살인(들)은 지나치게 끔찍하다. 미스터리는 더 커졌고, 그에 발맞춰 린치의 카메라워크는 시청자의 눈을 말그대로 어지럽게 만든다. 이미지들은 흔들리고, 춤을 추고, 땅이 갈라지고, 눈 앞에서 갑자기 등장하거나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거인, 작은 나무 모양의 '팔(arm)', 외팔이 남성, 로라 팔머의 수수께끼가 던져지는 가운데 뭐가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린치와 프로스트가 만든 이 트윈 픽스의 세상은 2년 동안 여름마다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군 미스터 로봇이나 봄마다 돌아온 게임 오브 쓰론처럼 쉬운 예측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시청자들은 우리가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것인지를 쇼가 끝난 이후에도 한참 고민해야 할지 모른다. 여하튼 귀환을 환영한다.

2017년 2월 13일 월요일

핵소 리지

멜 깁슨 감독의 신작 영화 핵소 리지는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오키나와에서 미일 양군이 치열하게 싸운 장소의 이름이다. 데스먼드 도스라는 실제 인물이 이 장소에서 미군이 모두 철수했는데 혼자 남아 수십 명의 동료와 몇 명의 일본군까지 구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영화화했다.

영화가 재미있는 점은 데스먼드 도스라는 인물이 원래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는데 자원 입대하였고, 더구나 군대에서 중대장은 물론 동료군인들이 제대하라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가지 않고 굳이 죽음의 소굴로 들어갔다는 거다.

거기다 핵심적인 내용은 그가 제칠일안식교라는 특정한 교파의 신자라서 총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인데도 군대에 갔다는 것이다. 그는 총은 안 잡아도 의무병은 될 수 있지 않겠냐고 생각하고 군대에 갔다. 더구나 교리상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에 쉬어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군대에서 허용되리라 생각했다니 평시도 아닌 전시의 군인으로서는 매우 독특한 사람이라 할 수밖에 없고 그런 병사를 부하로 두어야했던 장교나 부사관들이 화를 낸 것도 당연히 이해가 간다. 오직 그가 정말로 전쟁터에서 쓸모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야 칭송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

영화의 절반은 데스먼드가 군대에 가기 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차대전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친구들이 눈앞에서 죽어간 후유증으로 알콜중독에 빠지고 가족들을 때렸다. 어릴 적 동네의 높은 산에 오르기를 좋아했던 데스먼드는 어린 시절 동생(?형?)을 돌로 때려 죽일 뻔한 경험을 통해 10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머리에 박혀버린다.

데스먼드에 대한 실화에 따르면 영화에도 나온 장면이지만 그가 아마도 10대 후반은 되었을 시절 아버지가 권총을 들고 어머니를 학대할 때 막으려고 하다가 권총이 발사된 걸 보고는 총을 잡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런 장면에서 데스먼드와 제칠일안식교의 관계는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상에서는 원래 해당 교파의 신자이기 때문에 총을 잡기 않는 것처럼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그 사건 이후로 총을 안 잡겠다고 맹세했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교파의 신자가 된 것이 부모의 영향인지 아니면 벽에 걸린 10계명의 그림 때문인지도 불확실하다.

그는 장성하여 바보같은 미소를 지으며 어떤 간호사에게 빠져들었고 그 간호사는 그 멍청한 웃음에 진실함을 느껴 그와 결혼한다. 그 시기는 그의 군 입대와 겹쳐진다. 영화에 따르면 그는 청혼을 한 이후 입대했고, 군대에서 휴가를 얻어 결혼한다. 이후 그는 돌연 핵소 리지가 있는 오키나와에 도착한다. 이 부분도 현실과 다르다. 현실에서는 이미 그 전에 괌 등지에서 전투를 경험한 이후 오키나와로 이동했는데 영화는 아무 설명없이 첫 실전을 핵소 리지에서 경험한 것처럼 그려놨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초짜 의무병의 기적같은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강조하는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그는 영화에서 그려진 대로 혹은 부족하게 그려졌지만 공식적으로 75명의 부상병을 구해낸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자신은 50명쯤 구한 것 같다고 했고, 당시 함께 있던 동료들은 100명은 구했을 것이라고 증언해서 중간의 75명으로 정했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볼 수도 있다.

그냥 뒀으면 자연적으로 혹은 일본인의 확인 사살로 목숨을 잃었을 수십 명을 구한 인물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호평을 보내는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은 멜 깁슨이 도스를 그려내는 방식을 향한다. 영화가 그를 한 명의 사람이 아니라 마치 메시아처럼 그려냈다는 것이다. 실제 예수의 생에 대한 흥행작 감독이기도 한 멜 깁슨은 브레이브 하트에서도 죽음을 불사하는 영웅적 인물을 그려낸 바 있다.

영화에서 일본군이 도처에 깔렸고, 실수로 들어간 굴 속도 일본군이 그렇게 많건만 도스가 어떻게 발각되지 않았는지도 신기한 일이고, 더구나 굴 속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인 부상병을 치료해주는 장면은 더욱 기가 막히다. 절벽 아래 있던 미군들이 일본군마저 밧줄로 내려보내는 미지의 인물을 미쳤다고 생각한 것도 이상하지 않다. 전쟁 중에 적군을 적대적으로 보는 건 당연하다고 해도 될 일인데 그런 적군마저 다쳤다면 사랑으로 보듬는 그의 모습은 인간을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몸이 멀쩡한 일본군이었다면 아마도 도스를 그 자리에서 죽였을 것이다. 그만큼 일본군들은 그저 악귀 같은 존재들로 그려졌다. 한국, 중국이나 동남아 같은 식민지가 아니라 자신들의 영토(오키나와가 근대에 일본에 편입된 건 일단 부차적으로 치자)를 지키는 군인들이지만 영화에서는 땅 속에서 우르르 튀어나오는 짐승이나 벌레떼처럼 그려졌고, 항복하는 척하면서도 수류탄을 몰래 던지는 악마 같은 심성이 드러나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일본인들의 말, 일본어는 자막도 안 달아서 그저 외계어, 효과음 정도로 치부된다.

데스먼드는 홀로 남아 미친듯이 한 명 한 명 부상병들을 절벽 아래로 내려보낸 후 부대원들과의 다음 공격에도 참가하여 큰 부상을 입는다. 영화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수류탄 파편으로 인한 다리 부상 외에 오랜 병원 신세를 진 끝에 폐 하나도 결핵으로 잃게 된다. 영화에 나오지 않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가 영화에서 결혼한 여성이 죽은 이후 다른 여성과 다시 결혼한다는 점이다. 할아버지가 된 후의 일이긴 하다.

2017년 2월 6일 월요일

어라이벌에 대한 생각 (2)

한국에서 '컨택트'라는 다소 어이없는 제목이 붙어 개봉한 영화 어라이벌의 원작 소설을 영어로 읽어보고, 영화를 다시 보았다. 원문으로 읽은 테드 창의 원작 소설 'The story of your life'은 지나치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과학적 논리나 용어들이 많아서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원작 소설은 단편이라고는 해도 너무 짧은 이야기도 아니었다. 읽은데 시간이 적잖이 걸렸는데, 무엇보다 우선 평가할 점은 영화가 원작의 내용을 꽤 많이 가져가서 썼다는 점이다. 캥거루라는 단어의 기원이나 논 지로 썸 게임 같은 부분은 정확히 옮겨서 이용되었다. 영화 엔딩 부분도 원작의 엔딩과 맞추기 위해 꽤 노력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책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영화에서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강대국들의 갈등과 세계적 전쟁 발발 가능성이라는 장치를 이용한 반면 소설에는 그런 긴장감이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샹 장군 같은 인물이 원작에는 없다. 영화는 딸 하나의 출생과 죽음의 과정을 짤막하게 보여준 후 곧바로 외계인이 온 후 인간들의 불안을 다루며 무언가 불길한 일이 생길 거라는 암시를 계속 준다. 감독의 전작들을 생각한다면 어떤 흉한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지만 영화는 평화를 주는 외계인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불안의 정서는 영화적 긴장감을 위한 장치로 볼 수 밖에 없다.

딸의 이름이 영화에서 하나라고 제시되는데 원작에는 안 나왔던 것 같다. 하나Hannah라는이름의 영어 철자가 앞에서부터 읽어도, 뒤어서부터 거꾸로 읽어도 같아진다는 바로 그 설정 때문에 선택된 이름일 것이다. 마치 주인공인 루이스가 외계인 헵파포드가 준 보편언어 덕분에 선형적이지 않은 시간 관념을 갖게 된 것처럼.

영화의 전체적 틀은 맨 앞에 딸 하나의 출생과 사망이라는 하나의 스토리가 있다고 제시한 다음, 영화의 대부분인 그 다음 이야기가 딸의 출생이라는 사건의 시작이 어떻게 가능했나라는 그 전 이야기를 다룬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 루이스는 외계인이 떠나면서 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다시 말한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인상적인 점은 영화 제목인 어라이벌이 딸의 출생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된 것이었다. 그리고 디파쳐는 딸의 사망을 말하는 단어로 등장했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어라이벌은 외계인 헵타포드의 도래로 보는 게 일차적인 반응일 수밖에 없다. 물론 헵타포드의 도착도 중요한 사건이지만 루이스의 인생에서는 남편될 남자와의 만남, 그리고 그와 낳은 딸과의 삶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헵타포드가 3천년의 미래를 운운하며 루이스의 행동이 인류와 헵타포드 종족의 긴 미래에 핵심적이라고 하기에도 모자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됨을 알려주긴 하지만 개인사로 보자면 그건 부차적이다.

그렇게 보자면 원작 소설의 한글 번역본의 제목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잘못 된 게 아닌가 싶다. '당신'은 따지고 보면 루이스의 딸, 영화에서는 하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아이다. 그렇다면 존칭을 붙일 게 아니라 "너의 인생의 이야기"라고 해야 적절하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고 하면 마치 작가가 독자들을 '당신'으로 지칭하는듯한 뉘앙스가 강하다.

소설에서는 빛이 공기 중에서 물로 이동할 때 굴절되는 현상을 매우 강조한다. 빛이 가장 빠른 길이 어디인지 미리 아는 것처럼 물을 만나자 정확한 각도로 꺾여서 이동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기 중의 한 지점 a에서 물 속의 한 지점 b까지는 직관적으로는 직선적으로 이동해야 가장 빠를 것 같지만 빛으로서는 굴절되어 이동해야 가장 빠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가 마치 정해져있다는 듯한 영화의 메시지와 연결시켜 보면 현 시점에서 가장 빠른 길로 보이는 과정이 나중의 시점까지 고려할 때 실제로 가장 빠른 진행 과정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루이스가 영화에서 보인 여러 행동처럼 타인의 눈으로 보면 무모하게 혹은 미친 것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정답일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작에서는 다른 역설적 논리도 다룬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서 나중에 되새겨보아야겠다. 하지만 모든 일의 과정이 정해져있다는 식의 논리라면 꽤나 위험하기도 하다. 또 인간들이 헵타포드의 비선형적 시간 관념을 그들의 언어를 배움으로써 터득하게 되면, 즉 루이스처럼 미래를 알 게 되는 인간들이 많아지면 그것이 반드시 평화에 이바지할 것인지도 의문이다. 논리적으로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때문에 사회적 혼란이 생각만큼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모든 인간이 자기가 예쁜 외동딸을 낳을 건데 10대나 20대에 불치병으로 혹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것을 알고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영화와 소설이 달랐던 점 하나만 더 적고 마무리하겠다. 영화에서 이언과 루이스의 결합이 그럴 듯하다는 장치들이 깔려있기는 하지만 무언가 둘이 사랑에 빠지기엔 부족했다는 느낌이 있다. 반면 소설에서는 이 두 연인이 외계인이 떠나기 전에 이미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래서 루이스는 남자에게 나를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연구에 참여시킨 게 아니냐고 농담을 던진다.

컨택트는 외계인과의 만남을 뜻하는 말로 많이 사용되는 것 같다. 조디 포스터가 주연했던 예전 영화에서는 그들과 만나기 위한 지난한 과정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 어라이벌에서 외계인은 멀리서 메시지만 보낸 게 아니라 지구의 열두 곳에 갑자기 도래했다. 그들과의 접촉, 컨택트는 의미있는 일이었지만 원작 소설이 그렇고 영화의 엔딩이 그렇듯 남녀의 사랑과 아이를 갖자는 둘의 결단의 결과인 한 자녀의 도착, 탄생이야말로 영화의 주제다. 그러므로 컨택트라는 한국 개봉시의 영화명은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