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일 금요일

아이의 눈을 번쩍 뜨게 한 이야기

아직 정식 이름이 없는 내 딸이 태어난지 9일째다. 아이는 보러 갈 때마다 거의 언제나 자고 있다. 병원 측에서 일부러 그 때 재우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냥 그 시간이 밥 먹고 쉴 타이밍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아이는 계속 자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보러가면 아내가 계속 이야기를 해주는 편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눈을 좀처럼 뜨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의 눈동자를 보는 것이 나로서는 상당히 간절히 바라는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가끔씩 눈을 떠주지만 두 눈을 제대로 뜬 적은 아직 없었다. 며칠 전에는 한쪽 눈만 떴고, 그 다음 날에는 다른 쪽 눈만 떴다. 어젠가도 양쪽 눈을 다 뜬 적은 있지만 너무 조금만 열렸을 뿐이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아이가, 더구나 한 달을 일찍 나온 아이가 눈을 좀 못 뜬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의료진에서도 그게 문제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도 언제나 눈을 감고 있는 아이는 아직 완전히 이 세상에 온 것 같지가 않게 느껴지고, 아직도 엄마 뱃속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느낌이 들어 이 세상을 마주하길 바라게 된다.

그래서였을까. 오늘 아이 엄마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에 커서 공부를 못 해도 된다, 학원 억지로 보내지 않겠다, 하고 싶은 걸 해라라는 일련의 말들을 했는데 아이가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떴다가 감았다.

나는 마치 엄마의 말이 깜짝 놀랄 이야기라 정신이 번쩍 든 아이가 눈을 뜬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사교육을 살살 시키고, 공교육과 입시 시스템의 압박감을 덜어준다는 이야기가 아직 세상을 모르는 신생아의 눈을 뜨게 만들 정도로 솔깃한 제안이었던가 싶어 웃고 말았다.

내일은 딸이 좀 약한 이야기를 들려주더라도 보고 싶은 그 눈동자를 공개하길 바란다.

2013년 8월 1일 목요일

아빠

딸아이가 태어난지 일주일이 지났다. 어려움이 많았던 터라 하나하나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고통의 시간, 기억을 되새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현실적으로 내가 맡아서 처리해야 할 일도 많기에 무언가를 차분히 적기가 쉽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짧은 생에서 자식이 태어나서 내 눈 앞에 있다는 것은 앞으로 천천히 적게 될 지난 시간들과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는 온갖 일들에도 불구하고 감격이었다.

나도 아빠가 되었다.

곧 딸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이야기는 이어서 적어보기로 한다.




2013년 6월 27일 목요일

단편적 감상 정리

그동안 읽고 본 것들이 많지만 딱히 정리를 해두지 못했다.

읽은 것으로 우선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있겠다. 영국과 파리를 재미있게 비교한 도입부만 영문판으로 몇 번을 읽다 그만두었는데, 전자책으로 대출이 가능해서 번역본으로 읽었다.

18세기말 혁명 전야의 프랑스와 영국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특히 프랑스의 현실이 처참하게 묘사되어 있다. 더구나 혁명은 주동자에 의해 예고되었던 것처럼 되어 있었고, 혁명을 주도한 소위 민중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담겨있다. 소설 막판의 희생은 디킨스의 재미있는 설정으로 보인다. 프랑스 귀족을 대신해 단두대에서 죽은 영국인은 무엇을 의미할까.

스타 배우가 주연한 영화 개봉을 기회로 '위대한 개츠비' 마케팅이 출판계에 활발했다. 열림원은 김석희 번역본으로 새 책을 내놨는데, 아마 실용서로 구분해서 신간임에도 50% 할인을 해서 팔았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책을 중고로 조금 더 싸게 사서 읽어봤다. 번역은 정확성은 대조를 하지 않아 모르겠으나 매끄러웠다.

그러나 유명하다는 것만 알고 내용은 전혀 모르던 이 소설을 읽어본 결과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김석희씨가 후기로 쓴 말 같은데 개츠비가 '위대한'지는 모르겠고, '대단한' 사람이긴 하다. 부르디외의 구별짓기가 생각나고, 벼락부자가 더구나 부당한 돈으로 일어선 젊은이의 앞날이 밝기는 힘들다는 뻔한 교훈이 생각난달까. 오히려 개츠비는 불쌍한 인간이라는 게 정당한 평가 같다.

영화들 중에서 최근에 본 것으로 시작해보자.

더스틴 호프만의 영화 '콰르텟'은 가슴 따뜻한 이야기였는데, 실제 음악인들이 영화에 다수 출연하였다. 그리고 이제야 생각나는 것이지만 주연 배우 네 명이 모두 음악인은 아니었던 것처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젊은 시절 그들의 사진이 올라간 것은 그들의 음악적 성취에 대한 경의라기보다 음악을 했건, 연기를 했건 그들이 노년까지 열심히 살았음을 축하하는 그리고 존경을 표하는 의미였던 것 같다.

'프랭크와 로봇'은 흥미로운 소재지만 과연 새로운 점이 있을까 의구심을 품으며 보게 되었고, 영화 막판의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지며 영화를 한 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의지와 무관하게 사라지는 인간의 기억, 원한다면 저장소에 영원히 기억을 간직할 수 있는 로봇. 기억이 사라져도 사랑은 알아본다는 기막힌 진리? 가장 익숙하고 잘 하는 것을 집중하면 기억을 찾을 수도 있다는 희망? 여하튼 기대보다는 상당히 좋은 영화였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보고 싶다. 오늘은 이만.

2013년 2월 27일 수요일

아카데미 시상식

BAFTA를 봐서인지 아카데미 시상식이 수상자에 있어서는 크게 새로울 것이 없었다. 골든 글로브까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세 개의 시상식이 있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주 잘 만들었거나 운이 좋은 사람은 몇 달 안에 영광스러운 상을 끌어모을 수도 있다.

문자 중계로 수상 소감을 얼핏 봐서 수상자들의 떨리는 감사의 말들이 그다지 감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단점이 있었다. 어쨌거나 장장 세 시간에 달한 시상식을 봤는데, 호아킨 피닉스가 열연한 더 마스터가 아무 상도 얻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고, 제로 다크 써티도 아마 수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르고는 이번에도 좋은 상을 받아갔고, 장고 언체인드, 링컨 같은 순전히 미국적인 영화들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스필버그의 링컨이라니, 과연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놨을지 빨리 보고 싶다.

아직 보지 못했고 국내 개봉중인 실버 라이닝스 플레이북이 제니퍼 로렌스로 여우주연상을 배출했는데, 생각해보니 아직 제니퍼의 출연작을 하나도 못 본 것 같다. 이 영화에 대한 기대도 커진다.

레미제라블은 이번에도 앤 해써웨이에게 여우조연상을 안겼지만 많은 상을 받진 못했다. 휴 잭맨은 시상식 공연에서 제일 처음 나와 단독샷으로 많이 노출되었지만, 러셀 크로우는 이젠 조연이 어울리는 배우가 된 것인가 싶어 마냥 안타까웠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3D와 컴퓨터 그래픽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이안이 감독상을 받았다. 이런 영화에서 감독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궁금한 일이다. 특수효과를 이러저러한 식으로 만들어달라고 주문을 하긴 했겠고, 그게 전체적으론 더 중요한 일이긴 할 것이다.

많은 남자배우들이 무대에서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하고 나와서 아니, 턱수염은 수많은 나비넥타이처럼 아카데미 시상식의 드레스코드인가라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찾아보니 그건 아니고 그냥 요즘 할리우드 남자배우들이 수염을 많이 기른다고 한다.

마지막 최고의 작품상을 미셸 오바마가 (아마도 백악관에서) 발표하는 장면도 이색적이었다. 기왕이면 행사장에 나와서 발표를 해도 좋으련만, 경호상의 이유였을까?

2013년 2월 25일 월요일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 Balada Triste De Trompeta

경고받은 대로 충격적인 영상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쎈 공포영화의 레벨은 아니었지만 현실감이 있기에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었던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가 광대들의 이야기지만 처음부터 현대사의 비극인 스페인 내전으로 시작하여 프랑코가 스페인 1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1973년의 이야기로 끝난다. 그러므로 영화는 프랑코 독재기를 광대들을 이용하여 은유하였다고 볼 수 있다. 프랑코는 직접적으로 영화에서 등장하기도 하는데 슬픈 광대인 하비에르는 원수인 살세도 대령의 명령으로 개가 되어 프랑코에게 사냥당한 새를 물어서 바친다. 그러자 프랑코조차도 그러한 인권 모독을 참지 못하는 우스운 장면이 연출된다.

영화 후반 광기어린 슬픈 광대의 폭주가 이어지던 와중 실제 사건이었던 폭탄 테러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에서 볼 때는 '프레지던트'였는데 찾아보니 프랑코의 후임으로 1973년 총리가 되었던 루이스 까레로 블랑코가 그 때 죽었다.

해외를 포함해 몇 개의 영화평을 참고하긴 했지만 기독교, 가톨릭에 대한 영화의 표현에 대한 국내 영화 리뷰는 잘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부분이 거대한, 정말 거대한 십자가 위에서 세 명이 생사를 걸고 싸운 장면이었고, 하비에르가 살세도 대령을 살해하는 즈음 교황 복장을 했던 것을 보면 영화가 가톨릭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 시대상황을 잘 모르겠다. 모르긴해도 교계가 독재체제에 저항하진 않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의 핵심이 사랑이라고 할 때 광기로 폭주하는 두 광대와 가해의 결과물인 자신의 피를 맛있다는 듯 혀로 핥는 영화 초반의 나탈리아의 모습은 도대체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슬픈 광대의 아버지를 포함해 내전의 양 당사자들의 해골이 여기저기 발로 차이는 계곡은 내전의 상처가 프랑코가 물러날 시기에도 여전하고 아마도 이후로 4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아물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내전은 외국과의 전쟁보다 더 아플 수 밖에 없으리라.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피에타

김기덕 감독에게 국제적 영광을 안겨준 영화 피에타. 영화 소개를 볼 때 조민수가 이정진의 진짜 어머니가 아니고 이정진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과 관련있는 인물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정말 독특한 무엇을 말했는지는 회의적이다. 예쁜 대부분의 메이저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작은 공장(?)들의 비참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정도일까?

그럴 리가 없지만 에미애비도 없을 것 같은 천하의 나쁜 놈의 개과천선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그려낸 영화인데 확실히 아는 형님의 말씀처럼 기존 김기덕 영화를 볼 때와 같은 엽기적 장면이 없었다. 이정진이 연기한 강도가 의외로 너무 쉽게 미선을 자기의 어머니로 받아들였다는 게 오히려 가장 미스터리다. 잃을 것이 없도록 막다른 곳에 몰린 미선이 강도의 악행을 견뎌냈기 때문이겠지만 애초에 강도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라는 설정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극단을 치닫지도 않았고 매우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죄인은 희망을 봤다가 잔인하게 빼았기는 중형에 처해졌고 예견된 것처럼 그 길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그런데 영화 제목인 피에타가 이 영화와 실제로 어떻게 연결이 되는 것인가?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테마일 터인데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제외하면 미선과 강도의 관계에서 유사성이 있기는 한 것인지 궁금하다.

처음엔 흥미로운 사람이라 생각해서 챙겨봤지만 김기덕의 영화에 완전히 적응하기는 어려웠다. 이번 작품이 비록 호평 일색이고 국제영화제 최고상을 수상했으나 나로선 정말 그런 대접을 받을 작품인지 물음표를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영화제 수상 이 이거 좋은 영화라고 말하는 것처럼 간편한 일도 없겠고,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나니 별로라고 말하는 것도 비겁한 측면이 있지만 여하튼 그렇다.

2013년 1월 19일 토요일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오늘로 18대 대선이 끝난지 한 달이 되었다. 한 달 전 그날의 기억은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가 나온 이후로도 불쑥불쑥 솓아나곤 한다.

유시민이 골든 크로스를 이야기하고, 나꼼수를 끝낸 김어준 등이 딴지라디오를 통해 투표일에 생방송을 하며 희희덕거리던 그 시간들을 잠깐씩이나마 함께 하며 전세가 뒤집어졌으리라 착각했다.

그러나 며칠동안 어지럽던 머릿속은 의외로 쉽게 정리되었다. 결국 박근혜는 17대 당 경선에서 진 이후부터 계속해서 차기 대권의 가장 유력한 주자였고, 안철수가 등장한 이후 몇 차례 여론조사에서 뒤지는 결과가 나왔지만 어떤 요인이 가장 컸던 간에 결국 마지막 공식 여론조사까지도 문재인 후보에게 앞선 상태였다.

그녀가 세 차례 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TV 토론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들을 여러 번 보여줬지만 '소위 진보' 팟캐스트나 언론의 시각과 달리 대세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진보 측에서 박근혜 혹은 새누리당의 네거티브를 문재인의 상승세의 증거로 봤듯이, 돌이켜보면 진보의 대세 역전'설'은 자기 세력의 결집을 더 강화하려는 제스처였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결국 진보의 작전은 인구 구성비가 늘어나는 50대 이상의 노령 인구, 특히 50대의 믿기 어려운 결집이라는 역효과를 낳았는지 모른다. 역시 인과 관계를 엄밀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12월 20일 이후 한동안 이어진 진보 팟캐스트들의 거대한 침묵을 기억한다. 투표한 사람들의 48%는 '멘붕'을 겪었고, 그들에겐 '힐링'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화 레미제라블이 흥행했다고도 이야기된다. 그러나 아마도 당장에 진보 팟캐스트들이 힐링을 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챙겨듣는 팟캐스트는 별로 없지만 진보도 방송국을 가져야겠다는 논의가 대두되는 것 같긴 하다. 보수 일색인 종편들이 시청률이 그렇게 형편없다고 조롱을 받고 적자 상태지만 대선에는 큰 영향을 끼쳤다는, 객관적으로 연관관계를 찾기가 쉽지 않은 요인이 많이 지적되었다. 내가 보기엔 진보의 방송국은 그런 목소리도 내보낼 수 있어야하지 않느냐, 그래야 균형이 맞지 않느냐는 당위성을 주장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힘을 잃은 진보 팟캐스트들의 자구책이자 실질적이고 되기만 한다면 나름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의 시도로도 보인다. 그들의 많은 좋은 말들을 나도 잘 들었지만 많은 경우 팟캐스트는 자신들의 책을 파는 창구이기도 했다. 그들이 자기 책의 xx쇄를 찍었다고 자랑했지만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지금에 와선 회의적이다. 몇 차례 지적되었지만 진보 팟캐스트라는 것이 종류도 많고 다운로드 수도 많을지 몰라도 듣는 사람이 여러 개를 듣는 것이었다. 그 한계, 혹은 폐쇄성이 나꼼수로 시작된 팟캐스트 세상이 많은 이들을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는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었던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아무리 스마트폰 혁명이 일어나도 다운로드를 혹은 스트리밍을 해야하는 팟캐스트는 바쁜 인간에게 적지 않은 적극성을 요구하는 일 같다. 버튼 하나로 켤 수 있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라는 현재 기준으론 구식의 방법들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얼마 전에 김어준, 주진우는 어디 갔는지 찾아본 적이 있는데 해외로 갔다는 것 같다. 정봉주가 징역형을 마치는 자리에도 나오지 않았다. 대선 전 나꼼수의 방송이 뜸하던 시절 정봉주의 인터뷰 기사에서는 정봉주와 나머지 멤버 사이의 갈등 혹은 적어도 상당한 의견 차이가 드러났다. 그렇다고 상호비방을 하진 않았지만 애초에 재미로 시작했던 장난같은 일이 너무 커졌기에 나꼼수의 세네 사람이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어준과 주진우는 어떤 큰 일을 도모한다고 자처하고 있을까. 누군가의 조롱처럼 그들이 도망갔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민주당을 쥐락펴락하려 했고 실제로 그런 순간들도 있었던 그들로서는 그 단맛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위치에 있건 영향력이란 것은 얻어내는 측면도 있으므로 이들의 한계가 애초에 정해졌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얻어낸 영향력을 어떻게 활용할지 그 관리의 측면에서 나꼼수는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그들이 더 큰 정치적 악행들의 증거를 갖고 있지만 터뜨리지 않는다는 건 사실일지 모르지만 추종자들을 음모론에 더 빠지게 만드는 폐해도 있다. 언어 차원에선 B급이라고 보기도 힘든 저렴한 그들의 언어는 대중성을 획득했지만 국민 전체로 봤을 때는 다수가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러저러한 말들을 적었지만 지금은 박근혜라는, 정말 그런 시대가 오리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미 현실이 된,  박정희의 딸의 시대를 착잡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 마치 그 아버지의 치세를 연상케 하는 경제부흥,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참으로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아리송하게 만든다. 절대 빈곤을 넘어서 선진국의 문턱에 있는 국가에서의 잘 살아보세의 '잘'은 무슨 의미일까. 분명 수십 년 전의 '잘'과는 달라야만 한다. 그러나 레토릭이 아니라 실제 새 대통령의 사고방식이 아버지와 유사하다면 앞으로 5년을 지난 5년만큼이나 마음 졸이며 봐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