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3일 토요일

효녀

딸이 태어난지 열흘이 되었지만 아직 긴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기에 우리가 생물학적 부녀 관계라고 해도 진정한 인간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나는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고 아이가 그 말에 반응하는 듯 보이면 기뻐한다.

어제 딸이 눈을 떠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소원은 오늘 곧바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장인 어른이 동행했다. 두 명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장인 어른이 내게 와서는 아이가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있더라는 소식을 전했다.

설마 하루만에 그렇게 바뀌었을까 의문을 가졌지만 곧 내 눈으로 정말 그렇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는 정말로 양쪽 눈을 뜨고 있었다.

아직 힘이 없는 듯한 눈동자였지만 커뮤니케이션의 주요 통로인 눈을 통해 서로를 볼 수 있게 되니 아이가 더 이상 아무 것도 모르는 신생아가 아닌 것 같다.

옆으로 누워 먼저 와 있던 엄마만 바라보다가 내가 가서 부르니 내 쪽으로 눈동자를 움직여주었다. 엄마 손을 꼭 잡고, 다른 손으론 내 손도 잡아주었다.

그리곤 조금 후에 잠이 들었다.

하루만에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준 이 아이가 효녀가 아니고 무엇인가. 오늘도 아이가 잘 자기를 바라며, 오늘의 작은 성취에 기뻐하며 앞으로는 너무 자주 소원을 빌지는 않기로 했다.

설국열차 - 안 본 영화 이야기

봉준호 감독이 설국열차라는 제목의 신작을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는 여러 차례 들어왔는데 이제 실제 작품이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영화 평점이 전작들에 비해 낮다는 기사를 봤지만, 어제까지 개봉 3일만에 160만이 넘는 관중을 동원했다고 한다.

많지 않은 극장행 경험 중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등 세 편이나 포함되어 있으니 알게 모르게 이 감독의 영화들은 내 마음에 꽤 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영화는 사정상 보러 갈 여력이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전작들에 비해 기대감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물론 보지 않고 이런 말을 쓴다는 건 무책임하긴 하다.

예고편, 인터뷰 등을 통해 파악한 핵심 이야기는 이런 것들이리라. 지구는 인류가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고, 오직 설국열차라는 거대한 기차 안에서만 살 수 있다. 기차 안에는 재미있게도 상하위층의 인간들이 골고루(?) 탑승하고 있다.

즉 인간 사회란 것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열차 속의 인간이 인류 전체이자 인류 그 자체로 남게 된 상황을 봉준호 감독이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열차 속에는 아마도 독재자가 있는 것 같고, 사회가 그렇듯 하층민은 열악하게, 상층민은 여유롭게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는 영화를 보지 않아 모르겠으나 하층민들은 도끼를 들고 반란(?)을 일으켜 상층민들이 사는 열차칸으로 전진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설국열차의 모든 구조를 알고 있는 송강호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도끼든 이들의 봉기가 성공하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과연 인류가 다 죽게 된 상황, 설국열차 안에 있다고 해도 긴 시간의 생존이 보장될 것 같지는 않은 상황에서 이 모든 억압과 다툼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렇게 따지면 설국열차의 세팅이 아니라 지금 인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인지 모르겠다. 생물학적 사망을 피할 수 없는 인간들이 아웅다웅할 필요가 있나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한편으론 자연 자체가 적자생존의 공간이고, 인간사가 언제나 투쟁의 연속이라면 계급간, 집단간 충돌도 불가피하다.

아침밥을 먹다가 문득 근대 사회의 이익집단과 비교되는 전통 사회의 공동체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을까 의문이 생겼다. 인간의 지리적 이동이 근대에 비해 크게 적었던 것을 제외한다면 인간 사이의 갈등이라는 차원에서 더 좋았던 시절이라고 볼 수만은 없지 않을까라는. 물론 대부분 아는 이웃들 사이의 삶과 옆집의 인간이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회는 꽤 다르긴 할 것이다. 하지만 신분 간의 갈등 관계로 인한 불만이 아무리 하층민이 신분 상승을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작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실제 전통사회의 모습을 보기 위해선 더 읽어보아야 할 것이 많겠지만.

동물 집단에도 있는 상하 구분이 인간 사회에 있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성경의 천상세계 그리고 지옥에도 온갖 등급이 있는데 인간의 평등이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

물론 봉감독이 평등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상상하는 건 아니고 이야기를 두서없이 적다보니 이렇게 흐르고 말았다. 한국의 보수 인사들이 문화계가 좌파들에게 잠식당했다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그 주요 인물이 봉준호인 이상 누군가는 이 영화도 좌파의 흉계로 여기고 있을 테다.

이렇게 상상의 나래만 펼칠 것이 아니라 언젠가 실제로 보고 더 생각해보고 싶다.

2013년 8월 2일 금요일

아이의 눈을 번쩍 뜨게 한 이야기

아직 정식 이름이 없는 내 딸이 태어난지 9일째다. 아이는 보러 갈 때마다 거의 언제나 자고 있다. 병원 측에서 일부러 그 때 재우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냥 그 시간이 밥 먹고 쉴 타이밍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아이는 계속 자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보러가면 아내가 계속 이야기를 해주는 편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눈을 좀처럼 뜨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의 눈동자를 보는 것이 나로서는 상당히 간절히 바라는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가끔씩 눈을 떠주지만 두 눈을 제대로 뜬 적은 아직 없었다. 며칠 전에는 한쪽 눈만 떴고, 그 다음 날에는 다른 쪽 눈만 떴다. 어젠가도 양쪽 눈을 다 뜬 적은 있지만 너무 조금만 열렸을 뿐이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아이가, 더구나 한 달을 일찍 나온 아이가 눈을 좀 못 뜬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의료진에서도 그게 문제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도 언제나 눈을 감고 있는 아이는 아직 완전히 이 세상에 온 것 같지가 않게 느껴지고, 아직도 엄마 뱃속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느낌이 들어 이 세상을 마주하길 바라게 된다.

그래서였을까. 오늘 아이 엄마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에 커서 공부를 못 해도 된다, 학원 억지로 보내지 않겠다, 하고 싶은 걸 해라라는 일련의 말들을 했는데 아이가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떴다가 감았다.

나는 마치 엄마의 말이 깜짝 놀랄 이야기라 정신이 번쩍 든 아이가 눈을 뜬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사교육을 살살 시키고, 공교육과 입시 시스템의 압박감을 덜어준다는 이야기가 아직 세상을 모르는 신생아의 눈을 뜨게 만들 정도로 솔깃한 제안이었던가 싶어 웃고 말았다.

내일은 딸이 좀 약한 이야기를 들려주더라도 보고 싶은 그 눈동자를 공개하길 바란다.

2013년 8월 1일 목요일

아빠

딸아이가 태어난지 일주일이 지났다. 어려움이 많았던 터라 하나하나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고통의 시간, 기억을 되새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현실적으로 내가 맡아서 처리해야 할 일도 많기에 무언가를 차분히 적기가 쉽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짧은 생에서 자식이 태어나서 내 눈 앞에 있다는 것은 앞으로 천천히 적게 될 지난 시간들과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는 온갖 일들에도 불구하고 감격이었다.

나도 아빠가 되었다.

곧 딸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이야기는 이어서 적어보기로 한다.




2013년 6월 27일 목요일

단편적 감상 정리

그동안 읽고 본 것들이 많지만 딱히 정리를 해두지 못했다.

읽은 것으로 우선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있겠다. 영국과 파리를 재미있게 비교한 도입부만 영문판으로 몇 번을 읽다 그만두었는데, 전자책으로 대출이 가능해서 번역본으로 읽었다.

18세기말 혁명 전야의 프랑스와 영국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특히 프랑스의 현실이 처참하게 묘사되어 있다. 더구나 혁명은 주동자에 의해 예고되었던 것처럼 되어 있었고, 혁명을 주도한 소위 민중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담겨있다. 소설 막판의 희생은 디킨스의 재미있는 설정으로 보인다. 프랑스 귀족을 대신해 단두대에서 죽은 영국인은 무엇을 의미할까.

스타 배우가 주연한 영화 개봉을 기회로 '위대한 개츠비' 마케팅이 출판계에 활발했다. 열림원은 김석희 번역본으로 새 책을 내놨는데, 아마 실용서로 구분해서 신간임에도 50% 할인을 해서 팔았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책을 중고로 조금 더 싸게 사서 읽어봤다. 번역은 정확성은 대조를 하지 않아 모르겠으나 매끄러웠다.

그러나 유명하다는 것만 알고 내용은 전혀 모르던 이 소설을 읽어본 결과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김석희씨가 후기로 쓴 말 같은데 개츠비가 '위대한'지는 모르겠고, '대단한' 사람이긴 하다. 부르디외의 구별짓기가 생각나고, 벼락부자가 더구나 부당한 돈으로 일어선 젊은이의 앞날이 밝기는 힘들다는 뻔한 교훈이 생각난달까. 오히려 개츠비는 불쌍한 인간이라는 게 정당한 평가 같다.

영화들 중에서 최근에 본 것으로 시작해보자.

더스틴 호프만의 영화 '콰르텟'은 가슴 따뜻한 이야기였는데, 실제 음악인들이 영화에 다수 출연하였다. 그리고 이제야 생각나는 것이지만 주연 배우 네 명이 모두 음악인은 아니었던 것처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젊은 시절 그들의 사진이 올라간 것은 그들의 음악적 성취에 대한 경의라기보다 음악을 했건, 연기를 했건 그들이 노년까지 열심히 살았음을 축하하는 그리고 존경을 표하는 의미였던 것 같다.

'프랭크와 로봇'은 흥미로운 소재지만 과연 새로운 점이 있을까 의구심을 품으며 보게 되었고, 영화 막판의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지며 영화를 한 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의지와 무관하게 사라지는 인간의 기억, 원한다면 저장소에 영원히 기억을 간직할 수 있는 로봇. 기억이 사라져도 사랑은 알아본다는 기막힌 진리? 가장 익숙하고 잘 하는 것을 집중하면 기억을 찾을 수도 있다는 희망? 여하튼 기대보다는 상당히 좋은 영화였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보고 싶다. 오늘은 이만.

2013년 2월 27일 수요일

아카데미 시상식

BAFTA를 봐서인지 아카데미 시상식이 수상자에 있어서는 크게 새로울 것이 없었다. 골든 글로브까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세 개의 시상식이 있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주 잘 만들었거나 운이 좋은 사람은 몇 달 안에 영광스러운 상을 끌어모을 수도 있다.

문자 중계로 수상 소감을 얼핏 봐서 수상자들의 떨리는 감사의 말들이 그다지 감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단점이 있었다. 어쨌거나 장장 세 시간에 달한 시상식을 봤는데, 호아킨 피닉스가 열연한 더 마스터가 아무 상도 얻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고, 제로 다크 써티도 아마 수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르고는 이번에도 좋은 상을 받아갔고, 장고 언체인드, 링컨 같은 순전히 미국적인 영화들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스필버그의 링컨이라니, 과연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놨을지 빨리 보고 싶다.

아직 보지 못했고 국내 개봉중인 실버 라이닝스 플레이북이 제니퍼 로렌스로 여우주연상을 배출했는데, 생각해보니 아직 제니퍼의 출연작을 하나도 못 본 것 같다. 이 영화에 대한 기대도 커진다.

레미제라블은 이번에도 앤 해써웨이에게 여우조연상을 안겼지만 많은 상을 받진 못했다. 휴 잭맨은 시상식 공연에서 제일 처음 나와 단독샷으로 많이 노출되었지만, 러셀 크로우는 이젠 조연이 어울리는 배우가 된 것인가 싶어 마냥 안타까웠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3D와 컴퓨터 그래픽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이안이 감독상을 받았다. 이런 영화에서 감독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궁금한 일이다. 특수효과를 이러저러한 식으로 만들어달라고 주문을 하긴 했겠고, 그게 전체적으론 더 중요한 일이긴 할 것이다.

많은 남자배우들이 무대에서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하고 나와서 아니, 턱수염은 수많은 나비넥타이처럼 아카데미 시상식의 드레스코드인가라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찾아보니 그건 아니고 그냥 요즘 할리우드 남자배우들이 수염을 많이 기른다고 한다.

마지막 최고의 작품상을 미셸 오바마가 (아마도 백악관에서) 발표하는 장면도 이색적이었다. 기왕이면 행사장에 나와서 발표를 해도 좋으련만, 경호상의 이유였을까?

2013년 2월 25일 월요일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 Balada Triste De Trompeta

경고받은 대로 충격적인 영상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쎈 공포영화의 레벨은 아니었지만 현실감이 있기에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었던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가 광대들의 이야기지만 처음부터 현대사의 비극인 스페인 내전으로 시작하여 프랑코가 스페인 1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1973년의 이야기로 끝난다. 그러므로 영화는 프랑코 독재기를 광대들을 이용하여 은유하였다고 볼 수 있다. 프랑코는 직접적으로 영화에서 등장하기도 하는데 슬픈 광대인 하비에르는 원수인 살세도 대령의 명령으로 개가 되어 프랑코에게 사냥당한 새를 물어서 바친다. 그러자 프랑코조차도 그러한 인권 모독을 참지 못하는 우스운 장면이 연출된다.

영화 후반 광기어린 슬픈 광대의 폭주가 이어지던 와중 실제 사건이었던 폭탄 테러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에서 볼 때는 '프레지던트'였는데 찾아보니 프랑코의 후임으로 1973년 총리가 되었던 루이스 까레로 블랑코가 그 때 죽었다.

해외를 포함해 몇 개의 영화평을 참고하긴 했지만 기독교, 가톨릭에 대한 영화의 표현에 대한 국내 영화 리뷰는 잘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부분이 거대한, 정말 거대한 십자가 위에서 세 명이 생사를 걸고 싸운 장면이었고, 하비에르가 살세도 대령을 살해하는 즈음 교황 복장을 했던 것을 보면 영화가 가톨릭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 시대상황을 잘 모르겠다. 모르긴해도 교계가 독재체제에 저항하진 않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의 핵심이 사랑이라고 할 때 광기로 폭주하는 두 광대와 가해의 결과물인 자신의 피를 맛있다는 듯 혀로 핥는 영화 초반의 나탈리아의 모습은 도대체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슬픈 광대의 아버지를 포함해 내전의 양 당사자들의 해골이 여기저기 발로 차이는 계곡은 내전의 상처가 프랑코가 물러날 시기에도 여전하고 아마도 이후로 4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아물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내전은 외국과의 전쟁보다 더 아플 수 밖에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