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타운 나인틴의 곡성 편을 어제 들었다. 처음 알게된 김반장이라는 사람이 영화를 네 번 봤다면서 영화의 여러 수수께끼에 대해 해설했다. 과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럴 듯한 설명들이긴 했다.
영화를 보고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기왕 이런 내용들을 들은 김에 관련 리뷰를 검색하다보니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지난 달에 무려 두 시간에 걸쳐 곡성에 대해서만 깊은 분석을 한 인터넷 방송을 발견했다.
이동진의 글을 본 기억은 별로 없다. 그의 팟캐스트를 듣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브랜드가 많은 신뢰를 주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다. 영화 곡성은 그가 한국영화로는 몇 년만에 만점의 평점을 주면서 관객몰이를 한 측면도 있는 듯 하다.
두 시간짜리 영상은 이동진의 평론가로서의 능력을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어필하는 점은 그의 설명이 크게 어렵지 않다는 점일 것 같다. 영화평론은 어렵고 현학적인 글이 워낙 많아서 이렇게까지 써야하나 싶은 느낌을 많이 받는데 이 영상은, 아마 대중적인 타겟을 염두에 둔 영상이기에 더욱 그렇겠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별로 없다.
그는 신중을 기하는 차원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주장을 한 사람의 의견으로만 받아들여달라고 당부했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이동진은 하나의 텍스트를 해석함에 있어 창작자의 의도를 밝히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수용하는 독자,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도 중요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누가 최초인지 모르지만 김반장도 제기한 장모 귀신(가능)설을 염두에 둔 듯한 코멘트도 영상 막판에 나오긴 하는데 이동진의 해석은 거의 무난하다. 부제 양이삼의 이름을 성경 구절의 차용이라고 추측한 부분이나 일광이 살을 날리는 대목에 대한 해석, 예를 들어 흑백이 각각 어느 편인지와 누가 누구를 해하는지에 대해 설명은 영화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한 번 영화를 본지라 세세한 부분에 대한 남들의 해석은 그게 그랬었나, 그랬구나라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긴 하다.
일단 이동진 해석에서 여전한 의문들을 적어보고 싶다. 천우희가 연기한 무명이 신적인 존재인 점은 분명하다. 무명이라는 이름조차 시나리오 상의 이름이고 누가 그녀를 무명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이동진이 정확히 지적했듯이 무명은 이름이 없다는 뜻임이 거의 확실해보인다. 그는 이름 없음이 신적인 존재의 증거라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일본인 혹은 외지인도 이름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분명 이름이 있'었'다. 그는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물론 곡성에 사는 누구도 일본인을 그의 행정상의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그저 불길한 일본인, 외지인일 따름이다. 교묘하게도 곽도원이 연기한 종구가 일본인의 여권을 휴대폰으로 사진찍을 때 이름이 있어야 할 부분은 가려진다. 만약 여권에 이름이 없다면 종구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여권에 외지인이라고 적혀있을리도 만무하다. 아마 원래 시나리오대로 영화 종반부에 그 일본인이 아주 오래 전에 한국에 들어온 증거가 팩스로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다면 그의 이름이 밝혀졌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마도 감독은 쿠니무라 준의 존재를 이름 없는 '외지인'으로 신비하게 남겨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논리적으로 외지인은 신적 존재로 충분히 간주할 수 있다.
이동진이 말했는지 지금은 조금 헛갈리는데 쿠니무라 준이 계속 신적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는 해설이 있었다. 그는 도망치고 숨고 울기도 한다. 전에 씨네21 기사에서 지적하듯 시장에서 닭값을 두고 흥정도 한다. 만약 이 외지인이 사흘만에 죽은 후 부활하는데, 죽기 전에는 신성이 약하거나 아예 없는 존재였다면 어떨까. 사실 예수에 대한 해석도 이 대목이 결정적이긴 하다. 예수가 원래 유일한 하느님과 동격이었는지 아니면 인간이었다가 신이 되었는지(혹은 자신이 신 혹은 하느님의 아들임을 깨달았는지) 아니면 아예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일 뿐인지.
곡성이 예루살렘이고 외지인이 예수의 모티브를 차용했다면 인간이다가 신이 되는 설정도 가능하다. 인간 중 무언가 다른 인간, 카리스마가 있는 인간, 선지자prophet가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로 봐도 무방하다. 원래 조금 특별한 능력이 있던 인간이 더 높은 신적 존재로 승격되는 것은 고대의 상상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 외지인의 존재는 애매하긴 하다. 일본인인데 죽기 전의 행동을 보면 무당 일을 하기도 하고, 알몸(훈도시는 청불 등급으로 가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외지인과 한 편임을 보여주기 위해 일광까지 훈도시를 입고 만다)으로 산짐승을 날로 먹기도 한다. 그런데 이 무당의 모습이 이동진은 네팔 샤만을 나홍진이 직접 관찰하고 섞어 놓은 것 같다고 한다. 일본 무당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굿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외지인의 행동은 일본적인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인틴에서는 온갖 레퍼런스를 차용하되 그대로 도입하지 않고 자꾸 비트는 것이 나홍진의 의도라는 말을 들었다. 예수인줄 알았는데 악마였고, 무당이 아이를 살리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외지인과 한 편이었고, 바보처녀인줄 알았는데 마을의 수호신 혹은 자연이고 등등.
이런 비틀기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무너졌다는 혐의나 비판의 근거가 될 터이다. 이승훈pd는 나홍진 감독이 곡성을 코미디라고 규정한 것에 대해 분개하는 듯 했는데 나 감독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원전을 비틀다 못해 정반대의 대상으로까지 전환시킨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다. 패러디는 적당히 원작을 바꿔야하기 때문이다.
이동진의 말 중 기독교와 무속이라는 두 가지 종교(?)는 사실 아무 종교여도 무관했고 다만 한국 영화기에 한국인에 가장 친숙한 두 개를 차용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또한 이동진은 양이삼 부제가 외지인을 만나 악마를 보게 되는 절정의 순간에 대한 해석에서 부제가 동굴에 찾아갔기에 악마의 모습을 보인 것이지 다른 사람이 갔으면 다른 정체를 드러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외지인의 정체가 가변적이라면 외지인의 정체는 일본인 기반에 무속인이되 일본적이기도 네팔적이기도 한 의례를 행하고 예수처럼 비난받고 고난을 받아 처형당한 후 사흘 후에 부활하지만 결국 악마로 정체가 드러나기도 하는 혼종성이 정당화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압도적으로 많이 차용된 기독교 모티브를 감안한다면 이렇게 분명치 않은 정체는 상당한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기독교인의 분개를 살 것이 분명하다.
일광은 외지인과 한 편이라는 점이 분명하다고 인정된다. 그런데 언제부터 둘이 한 편이 된 것일까? 영화상에서는 그 점이 분명치 않다. 둘은 공통적으로 훈도시를 입고, 미놀타 카메라로 희생자들의 사진을 찍는 행동을 하며 무당이다. 이동진은 일광이라는 이름이 일본의 빛이라는 뜻이라고까지 해석했다.
그런데 무당이라고 하면 구한말 개화기에 타파해야할 구습, 악습의 대표적인 경우였다. 서양에서 일본을 경유해 들어온 소위 서구 문명의 기준에 비춰서 그러했다. 여전히 무당은 한국인의 삶 속에 살아있는 존재들이기만 대개는 케이블 방송의 싸구려 방송 소재로나 사용하는 미신으로 여기고 있다.
어쨌거나 무당이라면 한국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이런 무당이 일본에서 온 악마를 추종하는 것은 어찌 보면 상당히 냉소적인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어제 읽은 곡성에 대한 몇 개의 영어 리뷰에서는 일제 식민지의 과거가 몇 번 언급되었다. 영미권 기자/비평가의 눈에는 한국의 식민지 과거가 영화에 개입되었다고 보는 모양인데 이 점에 대해 상세한 분석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동진은 무당에 대해 설명하며 사실 무당들이 토속적 귀신만 섬기는 게 아니라 현대에 오면 맥아더도 신으로 섬기고 또 누구인지 기억이 안나지만 하여간 서구의 누군가를 신으로 모시는 포용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무속의 맥아더 숭배는 잘 알려진 바이고, 현대 이전에는 중국의 귀신들도 모셨으니, 일본 귀신이 용하다면 못 모실 일도 없을 터이다. 이렇게까지 하여 일광이 외지인과 한 편이 된 것을 이해는 하더라도 어떤 계기로 둘이 만났는가는 설명되지 않는다. 김반장의 해석을 보면 마을의 다른 집들에서 살인 사건이 날 때마다 할매들이 무당을 불렀고 그 때마다 일광이 오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을 내놨는데 그렇다면 해명이 될 듯도 한데 완벽한 이론은 아닌 것 같다.
이동진은 두 시간의 긴 해석을 하며 결국 이 영화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에 대한 것이라고 정리해냈다. 종교라는 것은 세상의 악, 개인의 불행에 대한 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답은무명이 집으로 가려는 종구를 붙잡으며 비논리적으로 내뱉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답은 답이라는 거다. 기실 기독교에서도 믿지 못할 것을 일단 믿어야한다는 거니 종교는 원래 그런 속성이 있다고도 하겠다. 하지만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세상의 질서인 코스모스가 있고, 이는 신이 이미 정해놓은 바인데 여기에 우연이라는 카오스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공포에 떨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는 카오스마저도 자신들의 논리로 다 설명해낼 수 있다. 부제는 악마가 마을 불행의 원인임을 확인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고 겁이 많은 종구는 딸이 왜 피부병이 생기고 욕을 하고 칼을 휘두르는지 끝내 모른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물론 종구가 죽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긴 하다).
평범한 인간들은 우연히 닥치는 불행에 무력하게 무너진다. 이동진이 정리하기도 했고 나홍진이 직접 말하기도 했지만 감독은 세상의 어떤 범죄들은 인간이 저지른다고 보기에 너무 처참하고 이해불가하기 때문에 신적 존재, 아마도 악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행할 수 없는 악행이 있다는 것이다. 악령에 사로잡힌 인간이나 악마 자체가 인간 사회에 있다고 본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평범한 사람이 이런 악마를 마주치면 낚여서 버둥대다 당하는 수밖에 없다는 체념적인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편 감독은 종구를 위로하려고 했다, 최선을 다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다독인다고 하는데 얼마나 위안을 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최근 IS가 일으키는 무차별 테러는 폭탄 조끼가 아니라 대형 트럭으로 사람을 쳐서 80명을 넘게 죽이는, GTA에서도 차마 하기 힘든 형태로까지 나오고 있다. 이 희생자들의 가족은 악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악마는 꼬리가 있지도 뿔이 달리지도 않았다. 분명한 종교적, 정치적 의도에 의해 일어난 테러이고, 근원을 따지면 서구의 책임도 적지 않다. 곡성의 하이브리드 악마는 구마 사제도 없애지 못할 것 같은데, 인간 세계의 눈에 보이는 악마적 존재라고 해서 처치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선악의 구분 자체가 작위적이기도 하니.
2016년 7월 20일 수요일
2016년 6월 29일 수요일
곡성 (2016)
숱한 화제를 낳은 영화라는 소문만 듣고 있다가 오늘 보게 되었다. 주변인의 말로는 해석이 분분한 이 영화에 대한 설명 중 외계인 이야기도 있다던데 아무리 생각해도 외계인이 어떻게 나온 해석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기독교 역사에 관심을 갖던 터라 영화 도입부부터 누가복음의 구절을 인용한 영화의 스탠스가 도전적으로 다가왔다. 과연 기독교를 어떻게 영화에 버무린 것일까.
그러나 감독 인터뷰에서 드러난 대로 곡성이 예루살렘이고 외지인인 일본인이 예수처럼 왔다가 죽고 부활하는 설정이긴 한데 외지인은 자신의 정체가 결국 악마임을 확연히 드러내버린다. 인간들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신적 존재인 예수가 악마적인 야비한 미소와 시커먼 얼굴을 드러낼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이것은 기독교적 구도를 차용했지만 결코 기독교적인 내용은 아니다.
악마는 자신을 해치러온 부제가 너는 누구냐며 정체를 묻자, 너는 이미 내가 악마라고 확신하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악마는 영화 중반에서도 자신의 집을 찾아온 경찰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도 어차피 안 믿을 거라고 말했다. 마치 이미 어떤 확신을 갖고 있는 이상 자신이 하느님과 교신하는 예수라고 해도 너는 안 믿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듯 하기도 했다. 영화는 확실히 반복적으로 뜬 소문을 믿는 나약한 인간들의 심리, 신념을 문제시하고 있다.
일종의 반전처럼 일본인이 한 때 곡성의 문제의 근원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선한 무당인 것처럼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가 이미 그렇지 않은 이상 일본인이 악마라는 점을 의심할 수는 없다.
인터뷰에 따르면 나홍진 감독이 이 영화에서 신적 존재로 위치시킨 캐릭터는 천우희가 연기한 '무명'이라는 여성이다. 사람이 아니라 영적 존재라는 것인데 누가복음의 구절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유령(혹은 그냥 영)은 육신이 없지만 자신은 육신이 있다고 말하며 의심하지 말라고 한다. 무명이 육신이 없는 듯 나오는 장면이 있다고 누군가 적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딱히 알아채지는 못 했다. 오히려 악마인 외지인은 자신의 육체성을 부제에게 확인시켰다.
어찌되었건 씨네21의 칼럼에서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예수 혹은 그에 필적한 악마라는 존재, 혹은 그와 별개로 혹은 다른 종교적 맥락에서 신적 존재로서 무명이 등장한다고 할 때 이들의 존재적 위치는 너무 일관성이 없다. 순전히 관객을 헛갈리게 만들려다 실수를 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나홍진 감독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하필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질문을 한다고 할 때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영화의 논리를 볼 때 악의 근원은 악마다. 씨네21 칼럼의 내용에 비춰볼 때 감독의 전작인 추격자와 황해에도 역시 악마가 등장했다고 한다. 그 대척점으로서 위치한 무명은 마을 사람들을 지키려고 하고, 조언을 해주기도 하지만 방관한다. 나홍진은 신이 개입할 수는 없다고 방관해야 한다는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일광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황정민이 분한 무당은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애초 시나리오 상으로는 분명히 악마와 한 편이다. 둘이 같은 차에 타는 장면이 원래 시나리오에 있고 촬영도 했지만 뺐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 왜 한 편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영화 장면으로만 보면 둘 모두 피해자들의 사진을 찍는 습관이 있어서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고, 갈등 구조상 무명이 악마, 일광과 모두 대립하고 있다는 정도가 아니었던가?
다시 악마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기독교 신학의 하나의 해석으로서 인간 예수가 신적 존재로 고양되었다는 입장과 유사하게 영화 속 악마도 아마도 무당이었던 인간이었다가 점점 더 힘이 센 악마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면 영화에서 일본인의 모습은 너무 이상하다. 시나리오 상 일본인은 신원조회 결과 수십 년 전에 죽었어야 할 인물이라는 점이 증명된다고 하니 영화 속 모습이 어떤 평범한 인간이 악마가 들어왔건 무슨 이유가 되었건 더 센 악마로 변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미 악마인데 수십 년 전 일본인의 외양을 하고 돌아다니며 시장에서 한국말도 못 해서 애처로운 얼굴로 닭값을 흥정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일광이 굿을 할 때 말뚝? 정?을 박을 때 죽을 것처럼 구는 것은 또 무언가. 기독교적 악마를 한국 무당이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인가? 보통 엑소시즘, 구마는 가톨릭 사제가 해야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새로운 종교적 해석인가?
영화를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검은 사제다. 오컬트라는 장르적 요소도 있고, 신부와 부제가 등장하기도 하고 돼지 때문이기도 하다. 검은 사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에 등장하는 마가복음의 구절,악마(악령)들이 돼지 속으로 들어갔다는 그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어린 돼지 속에 악마를 가둔다. 곡성은 영화 초반에 스치듯 돼지 한 마리를 카메라로 잡는데 확언할 수는 없지만 어떤 연관이 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나홍진 감독은 주인공인 평범하고 그저 아픈 딸을 구하는 일념 하에 살인도 불사하는 한 아버지가 딸이 미쳤건 악마에 씌어서건 엄마와 외할머니를 죽이는 걸 막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 정도 했으면 최선을 다 했다, 나머지는 인간이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사회의 상처입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힘빠지게 만드는 역설적인 이야기 같기도 하다.
악마, 귀신, 무당 같은 것들을 그저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한 은유로서 받아들이면 될까? 일제 식민지적 유산의 악마성, 치명성일까? 그저 독버섯이 문제인데 소문에 현혹된 사람들이 괜시리 종교적 장치들에 달려든 것이 오히려 문제일까? 그런 식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감독이 의도하고 그려낸 영화 내의 논리와는 다르다. 작품이 일단 창작자의 손을 떠나면 더 이상 창작자만의 것이 아니기도 하니 마음껏 해석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무섭다는 평들 때문에 잔혹한 장면이 나올까 괜히 겁먹고 긴장하다가 그렇게 잔인하지는 않아 안도하기도 했다. 다시 보거나 더 생각해보거나 해야겠지만 떡밥이 많은 것에 비해 영화의 영양가가 높은 것인가는 현재로서는 회의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기독교 역사에 관심을 갖던 터라 영화 도입부부터 누가복음의 구절을 인용한 영화의 스탠스가 도전적으로 다가왔다. 과연 기독교를 어떻게 영화에 버무린 것일까.
그러나 감독 인터뷰에서 드러난 대로 곡성이 예루살렘이고 외지인인 일본인이 예수처럼 왔다가 죽고 부활하는 설정이긴 한데 외지인은 자신의 정체가 결국 악마임을 확연히 드러내버린다. 인간들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신적 존재인 예수가 악마적인 야비한 미소와 시커먼 얼굴을 드러낼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이것은 기독교적 구도를 차용했지만 결코 기독교적인 내용은 아니다.
악마는 자신을 해치러온 부제가 너는 누구냐며 정체를 묻자, 너는 이미 내가 악마라고 확신하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악마는 영화 중반에서도 자신의 집을 찾아온 경찰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도 어차피 안 믿을 거라고 말했다. 마치 이미 어떤 확신을 갖고 있는 이상 자신이 하느님과 교신하는 예수라고 해도 너는 안 믿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듯 하기도 했다. 영화는 확실히 반복적으로 뜬 소문을 믿는 나약한 인간들의 심리, 신념을 문제시하고 있다.
일종의 반전처럼 일본인이 한 때 곡성의 문제의 근원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선한 무당인 것처럼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가 이미 그렇지 않은 이상 일본인이 악마라는 점을 의심할 수는 없다.
인터뷰에 따르면 나홍진 감독이 이 영화에서 신적 존재로 위치시킨 캐릭터는 천우희가 연기한 '무명'이라는 여성이다. 사람이 아니라 영적 존재라는 것인데 누가복음의 구절에서는 부활한 예수가 유령(혹은 그냥 영)은 육신이 없지만 자신은 육신이 있다고 말하며 의심하지 말라고 한다. 무명이 육신이 없는 듯 나오는 장면이 있다고 누군가 적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딱히 알아채지는 못 했다. 오히려 악마인 외지인은 자신의 육체성을 부제에게 확인시켰다.
어찌되었건 씨네21의 칼럼에서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예수 혹은 그에 필적한 악마라는 존재, 혹은 그와 별개로 혹은 다른 종교적 맥락에서 신적 존재로서 무명이 등장한다고 할 때 이들의 존재적 위치는 너무 일관성이 없다. 순전히 관객을 헛갈리게 만들려다 실수를 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나홍진 감독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하필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질문을 한다고 할 때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영화의 논리를 볼 때 악의 근원은 악마다. 씨네21 칼럼의 내용에 비춰볼 때 감독의 전작인 추격자와 황해에도 역시 악마가 등장했다고 한다. 그 대척점으로서 위치한 무명은 마을 사람들을 지키려고 하고, 조언을 해주기도 하지만 방관한다. 나홍진은 신이 개입할 수는 없다고 방관해야 한다는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일광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황정민이 분한 무당은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애초 시나리오 상으로는 분명히 악마와 한 편이다. 둘이 같은 차에 타는 장면이 원래 시나리오에 있고 촬영도 했지만 뺐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 왜 한 편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영화 장면으로만 보면 둘 모두 피해자들의 사진을 찍는 습관이 있어서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고, 갈등 구조상 무명이 악마, 일광과 모두 대립하고 있다는 정도가 아니었던가?
다시 악마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기독교 신학의 하나의 해석으로서 인간 예수가 신적 존재로 고양되었다는 입장과 유사하게 영화 속 악마도 아마도 무당이었던 인간이었다가 점점 더 힘이 센 악마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면 영화에서 일본인의 모습은 너무 이상하다. 시나리오 상 일본인은 신원조회 결과 수십 년 전에 죽었어야 할 인물이라는 점이 증명된다고 하니 영화 속 모습이 어떤 평범한 인간이 악마가 들어왔건 무슨 이유가 되었건 더 센 악마로 변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미 악마인데 수십 년 전 일본인의 외양을 하고 돌아다니며 시장에서 한국말도 못 해서 애처로운 얼굴로 닭값을 흥정하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일광이 굿을 할 때 말뚝? 정?을 박을 때 죽을 것처럼 구는 것은 또 무언가. 기독교적 악마를 한국 무당이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인가? 보통 엑소시즘, 구마는 가톨릭 사제가 해야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새로운 종교적 해석인가?
영화를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는 검은 사제다. 오컬트라는 장르적 요소도 있고, 신부와 부제가 등장하기도 하고 돼지 때문이기도 하다. 검은 사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에 등장하는 마가복음의 구절,악마(악령)들이 돼지 속으로 들어갔다는 그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어린 돼지 속에 악마를 가둔다. 곡성은 영화 초반에 스치듯 돼지 한 마리를 카메라로 잡는데 확언할 수는 없지만 어떤 연관이 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나홍진 감독은 주인공인 평범하고 그저 아픈 딸을 구하는 일념 하에 살인도 불사하는 한 아버지가 딸이 미쳤건 악마에 씌어서건 엄마와 외할머니를 죽이는 걸 막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 정도 했으면 최선을 다 했다, 나머지는 인간이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사회의 상처입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힘빠지게 만드는 역설적인 이야기 같기도 하다.
악마, 귀신, 무당 같은 것들을 그저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한 은유로서 받아들이면 될까? 일제 식민지적 유산의 악마성, 치명성일까? 그저 독버섯이 문제인데 소문에 현혹된 사람들이 괜시리 종교적 장치들에 달려든 것이 오히려 문제일까? 그런 식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감독이 의도하고 그려낸 영화 내의 논리와는 다르다. 작품이 일단 창작자의 손을 떠나면 더 이상 창작자만의 것이 아니기도 하니 마음껏 해석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무섭다는 평들 때문에 잔혹한 장면이 나올까 괜히 겁먹고 긴장하다가 그렇게 잔인하지는 않아 안도하기도 했다. 다시 보거나 더 생각해보거나 해야겠지만 떡밥이 많은 것에 비해 영화의 영양가가 높은 것인가는 현재로서는 회의적이다.
2016년 6월 21일 화요일
아이 인 더 스카이 eye in the sky
미국에 의한 드론 공격의 비인간성은 몇 번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된 것 같은데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영국이 주도하는 작전의 드론 미사일 공격을 다룬다. 주도권은 영국군이 가지고있지만 드론은 영국 것이 아니라 미국 소유다. 이 드론을 조종하는 인물 중 하나가 아론 폴이다.
007시리즈도 그렇지만 이런 영화를 보면 여전히 제국주의 시절을 영국이 잊지 못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게 된다. 영국 고위층들은 우호국의 특정 지역에 미사일을 쏘게 되는 작전을 오직 미국과 상의하여 실행해버린다. 다른 행위자들의 의견 따위는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헬렌 미렌은 작전을 총지휘하는 대령이다. 그녀는 영국과 미국에서 공히 높은 순위에 오른 테러리스트(아마 넘버2, 3, 4였을 것이다)들이 한 자리에 모인 절호의 기회, 그들이 입은 조끼 폭탄이 도심에서 터질 경우 80여명이 죽을 수 있는 사고를 막기 위해 케냐에서 드론 공격을 준비하게 된다.
정책결정자들의 우왕좌왕이 거듭되는 가운데 영국 군부는 계속 작전 실행을 요구했고 간신히 결정이 내려진 찰나 테러리스트 결집지의 바로 옆집에 사는 꼬마가 어머니가 집의 화덕에서 구운 빵을 하필 미사일 투하 지점 바로 옆에서 팔게 되며 이야기의 핵심적 갈등이 빚어진다.
미사일을 쏠 경우 이 꼬마 아이가 죽을 확률이 최대 65%인데 실행해야 하는가. 만약 테러리스트들을 놔둘 경우 수십 명 혹은 백 명 이상이 죽거나 다칠 예정인데 꼬마 아이 한 명의 죽음을 묵과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샌덜 교수의 Justice에서 다뤘던 내용 같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투하 지점을 약간 조정하였으나 죽을 확률은 65%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암묵적이고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분석관은 사망확률을 최대 45%라고 수정해서 보고했고 결국 떨어진 미사일에 여자아이는 죽고 만다. 처음에 약간 몸을 움직여 희망이 보이는 듯 했지만 병원에 가는 길에 숨을 거둔다.
탑 타겟 테러리스트를 일소했다는 기쁨에 들떠야 할 정책 결정자들과 군인들은 아무 것도 모른채 빵을 다 팔았다는 뿌듯함을 느끼며 고작 몇 걸음만 가면 있는 자기 집에 돌아가려던 여자아이의 죽음 앞에서 찝찝함만 남기고 말았다.
작전 지역이 케냐가 아니라 소말리아라면 모두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웠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큰 차이는 아닐 수도 있다. 결국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한다면 인간적으로 죄를 지었다는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자기 합리화가 쉬울 것인가는 상황마다 다를 수는 있겠다.
제목은 드론 비행기와 소형 감시카메라로 작전을 수행하는 상황에 대한 암시라고 할 터인데 요즘 종교적 글을 조금 읽다보니 다른 식으로도 읽힌다. 하늘의 시선은 신적인 시선이기도 하다. 난데 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미사일은 불벼락, 번개, 천벌을 떠올리게 한다. 제국의 통치자들은 식민지 혹은 그에 준하는 지역에 대해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감정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고 하늘의 눈은 그런 오만함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007시리즈도 그렇지만 이런 영화를 보면 여전히 제국주의 시절을 영국이 잊지 못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게 된다. 영국 고위층들은 우호국의 특정 지역에 미사일을 쏘게 되는 작전을 오직 미국과 상의하여 실행해버린다. 다른 행위자들의 의견 따위는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헬렌 미렌은 작전을 총지휘하는 대령이다. 그녀는 영국과 미국에서 공히 높은 순위에 오른 테러리스트(아마 넘버2, 3, 4였을 것이다)들이 한 자리에 모인 절호의 기회, 그들이 입은 조끼 폭탄이 도심에서 터질 경우 80여명이 죽을 수 있는 사고를 막기 위해 케냐에서 드론 공격을 준비하게 된다.
정책결정자들의 우왕좌왕이 거듭되는 가운데 영국 군부는 계속 작전 실행을 요구했고 간신히 결정이 내려진 찰나 테러리스트 결집지의 바로 옆집에 사는 꼬마가 어머니가 집의 화덕에서 구운 빵을 하필 미사일 투하 지점 바로 옆에서 팔게 되며 이야기의 핵심적 갈등이 빚어진다.
미사일을 쏠 경우 이 꼬마 아이가 죽을 확률이 최대 65%인데 실행해야 하는가. 만약 테러리스트들을 놔둘 경우 수십 명 혹은 백 명 이상이 죽거나 다칠 예정인데 꼬마 아이 한 명의 죽음을 묵과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샌덜 교수의 Justice에서 다뤘던 내용 같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투하 지점을 약간 조정하였으나 죽을 확률은 65%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암묵적이고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분석관은 사망확률을 최대 45%라고 수정해서 보고했고 결국 떨어진 미사일에 여자아이는 죽고 만다. 처음에 약간 몸을 움직여 희망이 보이는 듯 했지만 병원에 가는 길에 숨을 거둔다.
탑 타겟 테러리스트를 일소했다는 기쁨에 들떠야 할 정책 결정자들과 군인들은 아무 것도 모른채 빵을 다 팔았다는 뿌듯함을 느끼며 고작 몇 걸음만 가면 있는 자기 집에 돌아가려던 여자아이의 죽음 앞에서 찝찝함만 남기고 말았다.
작전 지역이 케냐가 아니라 소말리아라면 모두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웠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큰 차이는 아닐 수도 있다. 결국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한다면 인간적으로 죄를 지었다는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자기 합리화가 쉬울 것인가는 상황마다 다를 수는 있겠다.
제목은 드론 비행기와 소형 감시카메라로 작전을 수행하는 상황에 대한 암시라고 할 터인데 요즘 종교적 글을 조금 읽다보니 다른 식으로도 읽힌다. 하늘의 시선은 신적인 시선이기도 하다. 난데 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미사일은 불벼락, 번개, 천벌을 떠올리게 한다. 제국의 통치자들은 식민지 혹은 그에 준하는 지역에 대해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감정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고 하늘의 눈은 그런 오만함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더 패쓰(path) 시즌1
아론 폴의 전성기인 모양이다. 브레이킹 배드의 찌질한 마약쟁이역으로 나왔을 때는 크랜스턴의 훌륭한 조연 정도로 생각했는데 드라마 종영 이후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맹활약하고 있다.
더 패쓰는 신흥종교인 마이어리즘의 집단 거주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 드라마인데 아론 폴은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방황하는 인물이다. 미셸 모너핸과 휴 단시가 또 다른 주연들이다.
모너핸은 꽤 좋게 봐온 배우인데 중요한 역할들을 맡긴 하지만 원톱이라는 이미지까지는 구축하지 못한 듯 하여 아쉬움이 있고, 휴 단시는 미드 하니발 시리즈를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인데 이 드라마에서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연기를 했다.
마이어리즘이라는 종교는 추상적인 '사다리'를 올라가 '빛'에 가능한 가까이 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듯 하다. 신을 빛으로 표현하는 것은 기독교 혹은 유대교에서도 이미 봐온 바였기 때문에 마이어리즘이 이상한 광신도 집단이라기보다 여러 종교 집단들의 이야기로 봐도 좋을 듯 하다. 기독교도 신흥 종교의 시절을 거쳐 세계 종교가 되었으니 현재 지배적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또 하나의 신흥 종교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다. 그러나 외적으로 cult라고 표현되는 부정적 뉘앙스의 종교집단으로 낙인찍힌 마이어리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기를 일으킬 혐오의 대상이다.
여하튼 마이어리즘은 1대 교주격인 스티브라는 인물이 병상에 계속 누워있다가 죽는 것으로 설정이 되는데 놀랍게도 시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멀쩡히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인다. 어떤 속임수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무슨 내막이 있는 것인지는 다음 시즌에 밝혀질 것으로 보이지만 이 자체로는 예수 이야기와 유사성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휴 단시는 스티브의 뒤를 자신이 이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인물로 스티브의 유지가 자신에게 왔다고 거짓말을 하며 마이어리즘을 자신의 방식대로 이끌려고 한다.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을 통해 단시가 이끄는 새로운 방식의 마이어리즘은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나 1대 종교 지도자들의 승인을 얻지 않은 상태라 시즌 2에 큰 고난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는 아론 폴의 종교적 방황, 즉 빛은 커녕 마이어리즘이 완전 사기라고 믿게 된 상황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와 엮이며 역동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실제로는 어떤 부적절한 관계도 없었지만 믿음의 상실 때문에 자꾸 겉도는 상황이 아내에게는 새 여자로 인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론 폴은 아내인 모너핸이 휴 단시와 종교적 업무 때문에 자꾸 얽히는 것도 그렇고 아내가 자기보다 먼저 단시를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둘의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한다. 단시는 모너핸에 대한 감정이 상당했고, 반대 방향의 감정도 무시할 정도는 아니지만 모너핸은 결코 선을 넘지 않았다.
시즌1에서 이야기되지 않지만 아론 폴이 종반으로 갈수록 어떤 '비전'들, 죽은 동물이나 뱀이 자기에게 기어오는 환시를 보게 되며 단시나 모너핸이 아닌 폴이야말로 마이어리즘에서 어떤 종교적 경지에 오르게 되는 역설이 벌어지지 않을까 짐작하게 된다.
여하튼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한 드라마지만 나름 시즌2가 기대된다.
더 패쓰는 신흥종교인 마이어리즘의 집단 거주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 드라마인데 아론 폴은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방황하는 인물이다. 미셸 모너핸과 휴 단시가 또 다른 주연들이다.
모너핸은 꽤 좋게 봐온 배우인데 중요한 역할들을 맡긴 하지만 원톱이라는 이미지까지는 구축하지 못한 듯 하여 아쉬움이 있고, 휴 단시는 미드 하니발 시리즈를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인데 이 드라마에서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연기를 했다.
마이어리즘이라는 종교는 추상적인 '사다리'를 올라가 '빛'에 가능한 가까이 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듯 하다. 신을 빛으로 표현하는 것은 기독교 혹은 유대교에서도 이미 봐온 바였기 때문에 마이어리즘이 이상한 광신도 집단이라기보다 여러 종교 집단들의 이야기로 봐도 좋을 듯 하다. 기독교도 신흥 종교의 시절을 거쳐 세계 종교가 되었으니 현재 지배적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또 하나의 신흥 종교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다. 그러나 외적으로 cult라고 표현되는 부정적 뉘앙스의 종교집단으로 낙인찍힌 마이어리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기를 일으킬 혐오의 대상이다.
여하튼 마이어리즘은 1대 교주격인 스티브라는 인물이 병상에 계속 누워있다가 죽는 것으로 설정이 되는데 놀랍게도 시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멀쩡히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인다. 어떤 속임수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무슨 내막이 있는 것인지는 다음 시즌에 밝혀질 것으로 보이지만 이 자체로는 예수 이야기와 유사성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휴 단시는 스티브의 뒤를 자신이 이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인물로 스티브의 유지가 자신에게 왔다고 거짓말을 하며 마이어리즘을 자신의 방식대로 이끌려고 한다.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을 통해 단시가 이끄는 새로운 방식의 마이어리즘은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나 1대 종교 지도자들의 승인을 얻지 않은 상태라 시즌 2에 큰 고난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는 아론 폴의 종교적 방황, 즉 빛은 커녕 마이어리즘이 완전 사기라고 믿게 된 상황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와 엮이며 역동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실제로는 어떤 부적절한 관계도 없었지만 믿음의 상실 때문에 자꾸 겉도는 상황이 아내에게는 새 여자로 인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론 폴은 아내인 모너핸이 휴 단시와 종교적 업무 때문에 자꾸 얽히는 것도 그렇고 아내가 자기보다 먼저 단시를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둘의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한다. 단시는 모너핸에 대한 감정이 상당했고, 반대 방향의 감정도 무시할 정도는 아니지만 모너핸은 결코 선을 넘지 않았다.
시즌1에서 이야기되지 않지만 아론 폴이 종반으로 갈수록 어떤 '비전'들, 죽은 동물이나 뱀이 자기에게 기어오는 환시를 보게 되며 단시나 모너핸이 아닌 폴이야말로 마이어리즘에서 어떤 종교적 경지에 오르게 되는 역설이 벌어지지 않을까 짐작하게 된다.
여하튼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한 드라마지만 나름 시즌2가 기대된다.
2016년 6월 9일 목요일
더 블랙리스트 시즌3까지
제임스 스페이더의 대 변신을 볼 수 있는 미드. 물론 변신이라는 것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먼 옛날 그가 어딘가 여리면서도 섹시한 외모를 자랑하던 때를 기억해야 할 터이다. 그 시절을 아는 나에게 까까머리 중년 아저씨로 등장한 스페이더의 비주얼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현재의 외모가 자꾸 보면 어렵지 않게 납득이 된다.
여하튼 아무리 생각해도 리즈(엘리자베스)의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레딩턴(스페이더)인데, 그 추측이 자꾸 부정당하니 좀 혼란스럽지만 결국 레딩턴은 리즈의 아버지 역할임에는 분명하다.
레딩턴은 시즌1에서 리즈에게 나는 네 아빠가 아니란다라고 말했고, 시즌3에서는 알렉산더 커크라는 인물이 소련식 이름을 대며 자기가 리즈의 아빠라고 주장했다. 호기심이 동해 구글링을 해보니 별 이야기는 없지만 커크가 리즈 어머니의 남편일 수는 있지만 생물학적 아버지는 아닐 가능성이 제기되었는데 그게 현재로서는 가장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레딩턴이 리즈 엄마와 결혼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많고, 어떤 이유에서건 리즈 엄마가 커크와 혼인 관계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레딩턴이 리즈가 자기 딸임을 알고 있는 반면 커크는 자기 딸로 착각을 하고 있으리라고 상상해볼 수 있다.
레딩턴이 리즈가 죽었다고 생각한 이후 좌절하고 리즈 외할아버지와 만나는 에피소드를 보면 그가 리즈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보기가 힘들다. FBI에 자수한 이후의 모든 생사를 넘나든 위험 감수는 리즈를 지키기 위함이었는데 이것은 어떤 계약이나 신의 관계만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과정이었다.
정체를 밝히기 싫은 리즈의 친부가 따로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커크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레딩턴과 커크는 대립 관계이니 그가 커크를 보호하기 위해 정체를 감추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커크가 리즈의 생부가 맞는데 리즈 생모의 부탁을 받고 레딩턴이 리즈에게 비밀로 한 것일까?
여하간 시즌3까지 수많은 에피소드들에서 희한한 사건들이 많았지만 대부분이 리즈를 지키기 위한 레딩턴의 의도적인 정보 제공의 결과물들이었다. 그 많은 이야기가 결국 아버지-딸의 재회 및 신뢰 쌓기의 과정이다. 톰 킨이 회개하기도 했고 갑자기 고아인 그의 어머니가 거물임이 밝혀지고, 유명 카메오들이 많이도 죽어나갔지만 큰 줄기이자 이 쇼의 핵심은 그 둘의 이야기다.
여하튼 아무리 생각해도 리즈(엘리자베스)의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레딩턴(스페이더)인데, 그 추측이 자꾸 부정당하니 좀 혼란스럽지만 결국 레딩턴은 리즈의 아버지 역할임에는 분명하다.
레딩턴은 시즌1에서 리즈에게 나는 네 아빠가 아니란다라고 말했고, 시즌3에서는 알렉산더 커크라는 인물이 소련식 이름을 대며 자기가 리즈의 아빠라고 주장했다. 호기심이 동해 구글링을 해보니 별 이야기는 없지만 커크가 리즈 어머니의 남편일 수는 있지만 생물학적 아버지는 아닐 가능성이 제기되었는데 그게 현재로서는 가장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레딩턴이 리즈 엄마와 결혼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많고, 어떤 이유에서건 리즈 엄마가 커크와 혼인 관계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레딩턴이 리즈가 자기 딸임을 알고 있는 반면 커크는 자기 딸로 착각을 하고 있으리라고 상상해볼 수 있다.
레딩턴이 리즈가 죽었다고 생각한 이후 좌절하고 리즈 외할아버지와 만나는 에피소드를 보면 그가 리즈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보기가 힘들다. FBI에 자수한 이후의 모든 생사를 넘나든 위험 감수는 리즈를 지키기 위함이었는데 이것은 어떤 계약이나 신의 관계만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과정이었다.
정체를 밝히기 싫은 리즈의 친부가 따로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커크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레딩턴과 커크는 대립 관계이니 그가 커크를 보호하기 위해 정체를 감추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커크가 리즈의 생부가 맞는데 리즈 생모의 부탁을 받고 레딩턴이 리즈에게 비밀로 한 것일까?
여하간 시즌3까지 수많은 에피소드들에서 희한한 사건들이 많았지만 대부분이 리즈를 지키기 위한 레딩턴의 의도적인 정보 제공의 결과물들이었다. 그 많은 이야기가 결국 아버지-딸의 재회 및 신뢰 쌓기의 과정이다. 톰 킨이 회개하기도 했고 갑자기 고아인 그의 어머니가 거물임이 밝혀지고, 유명 카메오들이 많이도 죽어나갔지만 큰 줄기이자 이 쇼의 핵심은 그 둘의 이야기다.
2015년 10월 21일 수요일
센스8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워쇼스키 남매의 드라마.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산만했다. 등장인물들이 어쩔 수 없이 영어를 다 한다는 것도 거슬린다. 다작 배우 이경영은 심지어 여기에도 등장하고, 보기 힘든 차인표는 영어 때문인지 캐스팅되었다. 배두나를 격투기의 달인으로 설정한 이유는 뭘까 궁금하다. 한국의 태권도와 연결시킨 걸까?
트렌스젠더 여성에게 레즈비언 연인이 있고 멕시코 최고의 섹시 남자 배우가 알고 보니 게이라는 등 설정도 역설적이고 파격적인데다 지상파 방송 같은 제약도 받지 않으니 파격적인 장면들도 많다. 아마 가장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출산 장면이 아닐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지만 그렇다고 다리 사이에서 아이 머리가 나오는 걸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기억은 없다.
동성애자는 성적 소수자이고 트렌스젠더는 더욱 소수일 것이다. 마침 워쇼스키 한 명은 트렌스젠더이니 드라마는 알고 보면 감독인 자기들 이야긴지도 모르겠다 싶다.
흥미로운 드라마였으나 세간의 평대로 그다지 추천할만한 요소는 별로 없었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산만했다. 등장인물들이 어쩔 수 없이 영어를 다 한다는 것도 거슬린다. 다작 배우 이경영은 심지어 여기에도 등장하고, 보기 힘든 차인표는 영어 때문인지 캐스팅되었다. 배두나를 격투기의 달인으로 설정한 이유는 뭘까 궁금하다. 한국의 태권도와 연결시킨 걸까?
트렌스젠더 여성에게 레즈비언 연인이 있고 멕시코 최고의 섹시 남자 배우가 알고 보니 게이라는 등 설정도 역설적이고 파격적인데다 지상파 방송 같은 제약도 받지 않으니 파격적인 장면들도 많다. 아마 가장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출산 장면이 아닐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지만 그렇다고 다리 사이에서 아이 머리가 나오는 걸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기억은 없다.
동성애자는 성적 소수자이고 트렌스젠더는 더욱 소수일 것이다. 마침 워쇼스키 한 명은 트렌스젠더이니 드라마는 알고 보면 감독인 자기들 이야긴지도 모르겠다 싶다.
흥미로운 드라마였으나 세간의 평대로 그다지 추천할만한 요소는 별로 없었다.
파고 시즌 2의 2화
다소 평면적이라고 느껴졌던 1화와 달리 2화는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맛이 있었다.
영화에서 봤던 사람을 기계로 갈아버리는 장면도 나오고 엄청난 폭력성을 잠재했음이 분명한 갱단의 중간 보스가 침착하게 경찰과 대면하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인상적인 대사는 2차 대전 이후 6년 간 살인 사건이 없던 파고가 지금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는 한탄. 때는 1979년이었고(마침 '가장 폭력적인 해' 정도로 번역될 제목의 영화도 비슷한 시기였다), 와플 가게의 살인 사건은 워터게이트와 연결되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던스트의 남편이 왜 옷을 다 벗어서 태운 것인가? 피를 닦는 과정에서 더럽혀진 옷을 다시 입기는 힘들겠으나 속옷까지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일부로 살을 찌운 듯한 정육점의 직원 캐릭터의 신체를 오랜 시간 카메라가 잡은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남편 캐릭터는 살인을 아마도 처음 저지른 것 같았으나 옷을 태우는 의식을 치른 이후 각오한 듯 잔인한 사체 처리 과정을 해낸다. 사실 그는 직업상 살인은 아니라도 살우, 살돈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사람이다.
분할 화면은 보기에 불편함이 있는데 특별히 어떤 효과를 노린 것인지 잘 모르겠다. 동시간대 다른 인물들을 비교하는 것 정도일 터인데.
2화 마지막은 전지적 작가 시점의 나레이션이 나온다. 지역 갱단과 더욱 광범위한 지역을 커버하는 캔자스 시티의 갱단 그리고 경찰이 모두 사라진 사내를 찾고 있다. 이들의 만남과 충돌은 더 많은 피를 예고하고 있다.
영화에서 봤던 사람을 기계로 갈아버리는 장면도 나오고 엄청난 폭력성을 잠재했음이 분명한 갱단의 중간 보스가 침착하게 경찰과 대면하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인상적인 대사는 2차 대전 이후 6년 간 살인 사건이 없던 파고가 지금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는 한탄. 때는 1979년이었고(마침 '가장 폭력적인 해' 정도로 번역될 제목의 영화도 비슷한 시기였다), 와플 가게의 살인 사건은 워터게이트와 연결되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던스트의 남편이 왜 옷을 다 벗어서 태운 것인가? 피를 닦는 과정에서 더럽혀진 옷을 다시 입기는 힘들겠으나 속옷까지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일부로 살을 찌운 듯한 정육점의 직원 캐릭터의 신체를 오랜 시간 카메라가 잡은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남편 캐릭터는 살인을 아마도 처음 저지른 것 같았으나 옷을 태우는 의식을 치른 이후 각오한 듯 잔인한 사체 처리 과정을 해낸다. 사실 그는 직업상 살인은 아니라도 살우, 살돈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사람이다.
분할 화면은 보기에 불편함이 있는데 특별히 어떤 효과를 노린 것인지 잘 모르겠다. 동시간대 다른 인물들을 비교하는 것 정도일 터인데.
2화 마지막은 전지적 작가 시점의 나레이션이 나온다. 지역 갱단과 더욱 광범위한 지역을 커버하는 캔자스 시티의 갱단 그리고 경찰이 모두 사라진 사내를 찾고 있다. 이들의 만남과 충돌은 더 많은 피를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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