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22일 월요일

How easy?

인생이란 참 어렵다. 무심하게 주변을 상관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말려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가버리기도 한다. 요즘의 내가 그런 것 같다.

아무 생각없이 사는 척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압박은 내 생각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결국 나는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심각한 over reaction이 발생해 파국을 맞는다.

감정이란 얼마나 요상한 것인가. 이성으로 감성을 통제한다는 것은 우스운 말이다. nonsense. 애시당초 이성은 그다지 이성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감정이 이성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논리적 반응이라고 할까. 그리고 반응은 상호작용을 통한 것이다. 자극을 준 쪽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외부 자극에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no interaction, no feeling이다.

책임을 묻고 싶지는 않다. 모든 인간관계는 일정 수준 이기적인 동기와 목적에서 시작되고 유지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강한 외부 자극을 준 사람은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자극이라는 것도 얼마나 주관적인 것이란 말인가. 특히 감정적인 자극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생각하는 정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괴로움의 제거, 행복한 삶을 추구하지만 너무나 간단히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육신에 남겨진 흉터처럼 정신적인 흉터도 남는다. 또 육체적인 것과 다르게 시간이 지나면서 커지고 악화되는 수도 있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나는 고통을 원했다. 무미건조한 삶을 바꾸기 위해서. 더 많은 고통이여 내게로 오라.

2007년 10월 8일 월요일

Meaning of Life

그런 제목의 풍자적인 영화도 얼마 전에 보긴 했다. 리버풀 선수들이 경기에서 뛰는 의미는 무엇일까? 라파가 리버풀에서 감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등 별 소득없는 고민을 하다가 어제와 그저께 답사 과정에서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결론은 물론 없다.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못된 그리고 무서운 특성이리라. 모든 일이 의미가 있을 수도 아무 의미도 없을 수도 있다. 건강에 좋은 것은 좋은 쪽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절망선생의 카후카나 불법체류하며 일본은 좋은 나라라고 연방 말하던 소녀처럼 사는 것일지도. 정말 아름다운 세상 아닌가? 세상의 따뜻한 무관심도 멋진 일이다.

전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믿음의 엔진이라는 책을 알라딘에서 주문했다. 믿음은 결국 목표를 미리 정해서 밀고나갈 수 있는 추진력을 부여하는 것 같다. 객관성, 선이 없다면 어떻게 살고 어떤 결과를 초래하건 상관없으리.

Lack of motivation?

리버풀이 챔피언스 리그 홈경기에서 패배한 이후 리그 18위의 토트넘에게 40분 끌려다니다가 겨우 비겼다. 전체적으로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마르세유와의 경기보다는 나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폴 로빈슨의 전방 롱패스에 이은 버바토프의 헤딩 떨구기, 그리고 로비 킨의 빠른 침투에 의한 슈팅이라는 똑같은 패턴으로 두 골을 허용했다.

팀이 강등권에서 허우적대는 가운데 마틴 욜의 경질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고, 125주년 기념 홈경기에서 4-1로 뒤쳐지다가 경기 막판 극적으로 4-4를 만들었던 토트넘이다. 4-4(오프사이드가 확실한 상황이었지만)가 되는 순간 White Hart Lane은 리그 우승이라도 한 분위기였고 욜 감독도 웃었다. 리버풀로 와서 2-1로 앞서는 순간에도 욜의 굳은 표정이 풀리지 않았지만 경기가 거의 끝나가자 승리를 만끽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토레스가 득점하면서 나올뻔한 웃음이 금세 들어갔다. 아직 경질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간만에 리그 수위를 달리며 17년간의 무관 생활을 청산하겠다는 각오와 성적과 선수 구성을 갖춘 것 같았던 리버풀이지만 몇 경기 째 삽질을 하고 있다. 동기는 충분하다. 외부의 압박이라는 측면에서는. 하지만 선수들의 심리도 그렇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British로 채워졌고, 리버풀 로컬 보이들이 주축이었던 80년까지의 리버풀은 편협할지 모르나 지역색, 지역에 대한 애정과 헌신이 가득한 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글로벌화를 노리는, 상업적 성공을 노리는 리버풀은 일정 수준의 성적을 내야하는 기계가 되었다. 심미적으로 라파의 전술 변화를 보는 즐거움이 있다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으나, 그나마도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리버풀이라는 팀을 가벼운 마음으로 보던 많은 신규 팬층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사실 그러거나 말거나다.

알론소와 아게르가 빠졌다고 이렇게 수비의 구멍이 커진다면 히피아와 마스체라노는 철저한 실패다. 히피아야 나이가 있다고 쳐도, 마스체라노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완전히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제라드는 이래저래 악재가 겹친 상황이 경기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라파는 골치가 아파질 수밖에 없고, 마피아같이 보이게 만드는 수염들을 이제는 깎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수석코치였던 파코의 빈 자리가 이렇게 큰 것일까? 조직력의 와해, 불분명한 내적인 동기 유발. 리버풀의 부진은 의외로 오래 갈 지도 모를 일이다.

2007년 10월 4일 목요일

My body

Is there 'my body' as such?

2007년 10월 3일 수요일

버로우

저그의 귀여운 짐승들이 지닌 기본 능력 버로우. 그다지 많이 쓰는 단어는 아니었는데 스타크래프트 이후 인터넷에서는 자주 쓰인다. 깝쳐대다가 쪽팔림으로 인해 얼굴을 들지 못하는 혹은 더 이상 댓글을 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하던 사람들 전부 버로우'라는 식으로.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못한 사람의 사정이 궁금하면 핸드폰의 연락처를 검색해서 통화버튼을 누르면 될 일이건만 그럴 용기가 쉽게 샘솟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과거에 내가 삽질을 심하게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부득불 싸이를 뒤져보게 되고 다른 유명 포털의 블로그도 기웃거리게 된다. 하지만 발견하게 된 사실은 그네들의 News를 얻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 모두 버로우.

나에 대한 것을 누가 몰래 알아보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싸이 홈피는 업데이트를 거의 안 해서 방명록에 누가 글을 남기는 것, 하루에 한 명이 방문하는 것조차 신기한 일이 되었다. 블로그가 몇 개 있지만 나의 아이덴터티를 드러내는 일도 별로 없고, 나의 관심사를 알 수 있을지 몰라도 나의 일상이 어떤가 나의 고민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낼 길은 별로 없을 것이다.

가끔 다른 사람을 통해 그 사람들의 사정을 듣는 일은 있다. 아 그렇구나 하면서도 왠지 너무나 멀어져버린,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진 것 같은 그 거리감에 서글퍼진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기존의 믿음에다 최근 본 리처드 도킨스의 DNA 이야기들을 보니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 헛갈리기만 한다. 허무주의는 강력한 마약이라 피폐한 일상에 대한 변명거리를 제공해주고, 니체의 초인론은 해결책이 아니라 두통거리를 더해준다.

내세나 신의 존재를 믿는 쉬운 방법은 어떨까?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인간의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여럿이 믿는다고 믿는 것을 믿는 것이 안전할 수 있다고 해도 우습다. 불교의 윤회론은 넓은 의미에서 꽤 과학적인 것 같다. 육신은 재가 되건 벌레들의 먹이가 되건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다시 무엇인가가 성장하는 자양분이 되어 육신으로 화할 것이니. 도가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지만 현실 도피적 성격 때문에 접근하기가 망설여진다.

진흙탕에서 이전투구를 벌이는 것. 그 쪼잔함이 삶의 본질이고 권력에의 의지이고 적자생존인지 모르겠으나 유한한 존재로서 내가 추구해야할 궁극의 이상이란 것이 있단 말인가. 그저 흐름에 몸을 맡겨 삶을 이어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저그는 버로우해서 체력을 보충하고, 은신하고, 때로 러커같은 흉악한 놈은 공격까지 한다. 버로우했다고 죽은 것은 아니다. 버로우의 생명력이랄까. 많은 이들이 말했듯이 세상은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 글 쓰고 잠수타야 하려나.

2007년 10월 1일 월요일

Blown!

젠장. 익숙치않은 블로그 탓에 30분간 작성한 포스트가 날아갔다. 시나브로 찾아온 10월에 대한 단상을 주저리주저리 써봤건만 역시 쓸데없는 짓이었다는 것인가.

이 블로그의 너무나 단순한 인터페이스가 마음에 들 것인지 더 쓰면서 두고 볼 일이다.



이런. 살아남아 있었다. 역시 아직 잘 모르다보니... 자동저장이 제대로 작동하는 블로그다.

도둑처럼 찾아온 10월

'시월애'라는 영화를 리메이크한 산드라 블록과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Lake house'를 얼마 전에 보았다. 영화를 보다가 둘이 이런 영화에 어울리는 캐스팅이었을까 의문이 들던 찰나 이 둘이 꽤 오래전에 '스피드'라는 영화로 급부상한 커플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키아누는 매트릭스 시리즈로 최고의 배우로서 자리를 굳힌 인상이지만, 산드라 블록은 옛 명성은 있되 주목할만한 영화에서 비중있는 배역을 맡지는 못한 것 같다. 스피드를 본 것은 중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은데 둘은 정말 긴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만난 것이다.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비포 선라이즈 이후 10년만인가에 비포 선셋을 찍는 기이한 사건도 있었건만 키아누 리브스와 산드라 블록의 만남은 세월의 무게를 새삼 느끼게 한다.


Lake house의 원작 시월애를 찍은 두 명은 어떤가. 전지현은 연기력은 포기하고 TV광고를 특화 사업으로 밀고 나갈 기세다. 요즘은 들고다니지도 않는 삼성 마이마이를 들으며 요염한 춤을 추던 그녀. 뭇 남성들이 '하악~' 소리를 내뱉게 만드는 상상속의 말그대로 아이돌. 이정재는? 글쎄. 연기에 아주 많은 소질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역시 인상적인 작품은 없었다. 그럼에도 시월애는 내 기억에 강한 이상으로 자리잡은 얼마 안 되는 영화 중 하나다. 군대 시절 시월애 편지지로 편지를 써서 그런 걸까?


오늘은 2007년 10월 1일의 시작이다. 아직도 2007년이라는 숫자가 어색한데 이제 올해도 한 분기밖에 남지 않았다. 나이야 별 상관없지만 몸은 늙게 마련이고, 이쯤되면 점점 추워지게 마련이다. 몇 주 동안 기숙사에서 혼자 있는 동안은 끝없는 외로움에 지쳐 잠이 들어버리기 일쑤였다. 이 시월에, 어색한 2007년의 10월에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바닷가의 '일 마레'건 시카고 호숫가의 'Lake house'이건 우체통을 발견하면 편지를 하고 볼 일인가?


시도때도 없이 노래방에서 불러보는 승환의 '만추'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계절이 되고 있다. 혼란스럽게 여러 일에 집적거려보지만 이번에 작으나마 결실을 맺는 것이 있을런지.

It's another boring, tiring blog?

억제되지 않은 블로그를 만들어보고 싶다. 카테고리를 설정하고, 점잖은 말로 쓰기만 하는 블로그에 지쳤다. 물론 내탓이었지만.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