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3일 수요일

버로우

저그의 귀여운 짐승들이 지닌 기본 능력 버로우. 그다지 많이 쓰는 단어는 아니었는데 스타크래프트 이후 인터넷에서는 자주 쓰인다. 깝쳐대다가 쪽팔림으로 인해 얼굴을 들지 못하는 혹은 더 이상 댓글을 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하던 사람들 전부 버로우'라는 식으로.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못한 사람의 사정이 궁금하면 핸드폰의 연락처를 검색해서 통화버튼을 누르면 될 일이건만 그럴 용기가 쉽게 샘솟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과거에 내가 삽질을 심하게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부득불 싸이를 뒤져보게 되고 다른 유명 포털의 블로그도 기웃거리게 된다. 하지만 발견하게 된 사실은 그네들의 News를 얻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 모두 버로우.

나에 대한 것을 누가 몰래 알아보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싸이 홈피는 업데이트를 거의 안 해서 방명록에 누가 글을 남기는 것, 하루에 한 명이 방문하는 것조차 신기한 일이 되었다. 블로그가 몇 개 있지만 나의 아이덴터티를 드러내는 일도 별로 없고, 나의 관심사를 알 수 있을지 몰라도 나의 일상이 어떤가 나의 고민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낼 길은 별로 없을 것이다.

가끔 다른 사람을 통해 그 사람들의 사정을 듣는 일은 있다. 아 그렇구나 하면서도 왠지 너무나 멀어져버린,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진 것 같은 그 거리감에 서글퍼진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기존의 믿음에다 최근 본 리처드 도킨스의 DNA 이야기들을 보니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 헛갈리기만 한다. 허무주의는 강력한 마약이라 피폐한 일상에 대한 변명거리를 제공해주고, 니체의 초인론은 해결책이 아니라 두통거리를 더해준다.

내세나 신의 존재를 믿는 쉬운 방법은 어떨까?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인간의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여럿이 믿는다고 믿는 것을 믿는 것이 안전할 수 있다고 해도 우습다. 불교의 윤회론은 넓은 의미에서 꽤 과학적인 것 같다. 육신은 재가 되건 벌레들의 먹이가 되건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다시 무엇인가가 성장하는 자양분이 되어 육신으로 화할 것이니. 도가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지만 현실 도피적 성격 때문에 접근하기가 망설여진다.

진흙탕에서 이전투구를 벌이는 것. 그 쪼잔함이 삶의 본질이고 권력에의 의지이고 적자생존인지 모르겠으나 유한한 존재로서 내가 추구해야할 궁극의 이상이란 것이 있단 말인가. 그저 흐름에 몸을 맡겨 삶을 이어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저그는 버로우해서 체력을 보충하고, 은신하고, 때로 러커같은 흉악한 놈은 공격까지 한다. 버로우했다고 죽은 것은 아니다. 버로우의 생명력이랄까. 많은 이들이 말했듯이 세상은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이 글 쓰고 잠수타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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