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31일 화요일

마지막 날 짤막 리뷰들

Watchmen : 시간과 계란과 수퍼맨과 흑인 학살의 이야기. 훌륭한 구성이었지만 끝나고 나니 의외로 큰 여운은 없음.


The Witcher : 소설과 게임의 이야기의 넷플릭스 드라마화. 어느 원작도 경험하지 못 하고 본 이후의 느낌은 다른 이들처럼 시간관이 이상하다. 몇 개의 인상적인 장면 존재.

For all mankind : Watchmen처럼 대안역사 이야기. 달에 소련이 더 먼저 착륙한다는 설정은 재미있으나, 이 대안역사 혹은 평행우주 스토리는 시간이 진척될수록 의미가 급격히 퇴락하는 느낌.

The Mandolarian : 디즈니의 OTT의 야심작. 존 파브로가 만들고, 유명 배우, 유명 감독이 에피소드 제작에 참여했지만 아기 요다야말로 핵심. 아기의 체구에 노안으로 유명한 요다를 아기로 만든 반전은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음.

Wildlife : 폴 다노가 감독한 작품. 캐리 멀리건, 제이큰 질렌할의 좋은 조합.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삶이 wildfire를 핑계로 집 나간 남편 덕에 더 곤란해진 젊은 엄마의 고난.

Loving Vincent, At eternity's gate : 고흐가 근래에 훌륭한 두 편의 영화로 재조명된 이유가 궁금. 그리고 왜 그의 말년이 대상이 되었는가? 사실상 그에 대해 너무 몰랐다.


Once upon a time in Hollywood : 잘 적응이 되지 않는 타란티노의 영화들인데 이 영화는 그나마 이해가 됨. 역시 대안적 현실에 대한 영화로 그가 그동안 그런 영화를 찍어왔다는 것도 잘 몰랐음. 

The Two Popes : 지금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축구팬이라는 점으로 시작과 끝을 맺음. 교황마저, 전대 교황에 비해 찬사를 받는 현 교황마자 매우 어두운 과거가 있었음을, 그럼에도 그는 계속 속죄를 위해 행동했음을 보여줌.

Marriage story : 보기 전의 찬사를 이해하기 어려웠고, 보면서 괴롭다가 결국 인생은 흘러간다는 결과에 씁쓸하며 무덤해짐. 

The Irishman : 스콜세지 감독이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를 긁어모아 만든 매우 긴 영화. 보면서는 반신반의했지만 평론가들의 설명을 듣고 납득. 존 케네디를 누가 죽였는지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알게 됨.


Ford v Ferrarri : 믿고 보는 두 주연배우가 출연했고 레이스 씬도 볼만했는데 거기까지인 듯. 포드 자동차가 레이싱에 참여하고 우승해서 포드의 매출이 늘어난 것인지? 이후 르망24의 우승팀들을 보니 절대 강자는 없다는 걸 보고 놀람.

Under the Silver Lake : It follows의 감독이 만든 문제작. 혹평이 대세인데 관대한 평도 아무리 좋게 봐줘도 각본은 문제라고. 과연 새로운 컬트 무비가 될까? 앤드루 가필드도 로버트 패틴슨과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2019년 12월 13일 금요일

Watchmen ep8

8편이 방영됨으로써 이제 Watchmen은 1편만이 남았다. 원래는 한 시즌으로 끝날 예정이지만 린델로프의 최근 인터뷰에서 이번 시즌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다음' 시즌도 있는 것 아니냐는 기대도 커지는 중이다.

린델로프의 충신들은 그의 전작인 더 레프트오버스를 근래 가장 뛰어난 TV 드라마라고 칭송하는 바인데, 이번 Watchmen도 거의 그 정도에 위치시키고 있는 중이다. 레프트오버스는 소설 원작이 있고, 원작자가 각본에 참여한 반면 이번 Watchmen의 원작자 앨런 무어는 TV 드라마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차이는 있지만 린델로프는 괜찮은 원작을 자신의 해석을 버무려 작품으로 잘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이번 작품은 원작 이후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라 그가 보여야할 재주가 더 많았다.

이번 8편은 지난 7편까지 부재했던 신, 닥터 맨하튼이 등장한다. 과연 9편까지 나오기는 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있었지만 그는 8편에 등장했고 중심 캐릭터다. 1편 말미의 후속 에피소드에 대한 예고편에서 한 컷으로 닥터 맨하튼으로 짐작되는 인물이 등장하긴 했다. 하지만 닥터 맨하튼의 가면이 있을뿐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진짜 그인지는 불확실했다. 진짜라면 왜 닥터 맨하튼의 가면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의문은 곧 풀렸다. 베트남이 배경인 장면에서 이제 성인이고 베트남 경찰이 된 앤젤라 에이바는 바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데 누군가 길에 떨어진 닥터 맨하튼의 가면을 집어들어 쓰고 그녀에게 다가가 자기가 닥터 맨하튼이라 주장한다. 그는 진짜였고, 사람들이 자신을 따라하는, 코스프레라고 할만한 행위가 일반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목을 끌기 실어 닥터 맨하튼 가면을 썼던 것이다. 더 황당하게도 그는 그녀와 이미 사랑에 빠졌다고 주장했고, 앞으로 있을 둘의 사사랑의 시작과 끝을 설명했다.

닥터 맨하튼은 마치 "어라이벌"의 헵타포드처럼 시간을 순차적인 것이 아닌, non-linear하게 경험하기에 연애의 시작과 끝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그녀와 첫 데이트를 하고 성교도 하고 같이 10년을 살게 되지만 그 끝에 다다른 시점이야말로 그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순간이라고 고백한다. 보통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신과 같은 존재의 경험이니 존중하는 수밖에 달리 이해할 도리가 없다.

이번 편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자신의 능력을 타인에게 넘겨줄 수 있다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미 윌 리브스나 앤젤라 에이바 둘 중 하나가 닥터 맨하튼의 능력을 이어받을 것이라는 예상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계란, 와플, 수영장 물 등이 전달 매체다.

8편 말미에 텔레포트된 닥터 맨하튼이 9편에서 최후를 맞이하는지, 그렇다면 그 능력이 다른 캐릭터게 전달되는지, 아니면 최후가 아닌지 밝혀질 예정이다. 그리고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에서 고통당하는 에이드리안 바이트가 말발굽으로 탈옥에 성공해서, 지구에 돌아오는 것인지도(많이들 그렇게 예상한다), 또 돌아온다면 어떤 형태인지도 주목된다.

2019년 12월 5일 목요일

Watchmen 7화

몇 번을 Watchmen에 대해 글을 쓰다 멈추었다. 워낙 다룰 지점이 많아서 일단 시작하면 계획한 시간 내에 마무리를 지을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어서다. 그래서 전체적인 이야기는 미루기로 하고 최근 에피소드만 다루는 방법을 시도한다.

지난 6편에서 후디드 저스티스의 정체가 윌 리브스였음이 드러나며 큰 충격을 안겼는데 이번 편은 화성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닥터 맨하탄이 실제로는 드라마의 주 무대인 오클라호마의 털사에 있음이 밝혀졌다. 애초에 왜 대도시가 아닌 작은 도시 털사에 세계 최고의 갑부가 이상한 건축물을 세우고, 경찰들이 세븐스 캐벌리에 의해 살해되는지가 문제시 되었다. 드라마의 크리에이터인 데미언 린델로프는 트윈 픽스 이후 많은 미국 드라마들이 그렇듯이 작은 도시의 비밀스러운 사건을 다루는 것인냥 말했지만 애초에 닥터 맨하탄이 털사에 있었기 때문에 중요했던 것이다.

닥터 맨하탄은 왜 털사로 왔는가. 이는 다음 8편에 더 밝혀진 예정이지만 이번 시리즈의 취지와 연결짓자면 털사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블랙 월 스트리트' 학살 사건 때문일 것이다. 이 사건은 윌이라는 꼬마 흑인을 수퍼맨의 운명을 지닌 '후디드 저스티스'로 변모시켰고, 후디드 저스티스는 복면 영웅들이 줄줄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윌이 후디드 저스티스가 된 실제 장소는 털사가 아니라 뉴욕이었지만, 그의 아내인 쥰은 아들을 데리고 털사로 돌아갔다.

이번 7편은 윌과 쥰의 손녀인 드라마의 주인공 앤젤라 아바의 베트남에서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다룬다. 앤젤라의 아버지는 털사에서 자랐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는데, 이 세계관에서는 닥터 맨하탄에 의해 베트남이 미국의 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굳이 털사로 돌아오지 않고 베트남에 체류 중이었다. 그는 베트남에서 흑인 아내를 만났고 딸 앤젤라를 키웠다. 레이디 트리우가 베트남 출신인 것처럼 이 드라마는 베트남이 기왕에 미국의 일부가 된 이상 그 설정을 극대화하여 미국 최고의 부자가 베트남 출신이라는 설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앤젤라의 어린 시절 베트남인들 중에는 닥터 맨하탄의 가공할 폭력과 그로 인한 굴욕적 항복에 분개하는, '민족주의자'라고 할 사람들, 미국의 입장에서는 테러리스트라 할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앤젤라의 부모가 모두 폭탄 테러의 희생자가 된다. 아직 영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베트남에서 흑인 고아가 되어 고아원에서 구박만 받는 앤젤라는 겨우겨우 할머니 쥰을 만나지만 심장이 좋지 않은 그녀는 앤젤라를 털사로 데려갈 택시 옆에서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 린델로프는 최신 인터뷰에서 앤젤라를 가능한 가장 외롭게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지난 6편에 이어 7편에서도 앤젤라는 윌의 노스탤지어 약을 복용하며 윌의 경험을 거의 직접적 체험인 것처럼 겪었고, 자신의 기억과 할아버지의 기억을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미국 현대사의 치부인 베트남, 그리고 미국사 전체에 걸쳐 치부로 남은 인종 문제가 결합되어 드라마는 극적인 상상을 자극하고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레이디 트리우가 성공한 것은 순전히 기술적 분야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녀의 정체가 완전히 밝혀진 것은 아니기에, 즉 그녀의 아버지가 에이드리안 바이트라는 설이 지배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그녀의 성공이 아버지 덕이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천재 백인의 딸이기에 가능한 성공이었다면 전복적인 의미는 축소된다. 그러면서도 베트남전에서 고통받은 어머니라는 존재도 부각되었기에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비록 가상의 현실이지만 베트남이라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 여전히 현재의 미국 안에 각인되어있다는 상징적 설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떤 이가 이 드라마가 재미있지만 왜 인종 문제에만 집착하는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원작은 권력의 문제를 복합적으로 다뤘는데 왜 린델로프는 명백하게 선악이 갈리는 인종 문제에 초점을 맞추냐는 주장이다. 나도 원작을 읽지는 않았지만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 본다. 하지만 많은 등장인물들이 피부색이 달라도 이중적이거나 근본적인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설정임을 감안하면 그렇게 단순한 구도라고 비판할 수만은 없다.

일단 마무리하고 다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2019년 10월 4일 금요일

Joker (2019)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소문의 영화 '조커'.  호아킨 피닉스는 워낙 예전부터 좋아하던 배우라 출연작들을 거의 빼놓지 않고 보는 편이다. 그가 DC 코믹스의 영화에 출연한 것은 의외였는데 그 결과물은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호평들에 의문을 제기하며 영화의 주제가 애매하다거나 도덕적이지 않다는 부정적 평가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약간 졸린 상태로 보았는데 수면 부족이라는 영화 외적인 원인이 크지만 영화가 후반부가 되기 전에는 졸린 기운을 확 깨울 장면이 등장하지도 않았다. 만화, 그래픽 노블 원작의 영화에서 기대하게 되는 액션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영화였고, 내가 그런 걸 기대한 것도 아니긴 했다.

배트맨 중심의 기존 영화들에서 조커는 주인공을 돋보이게 할 빌런 역할이었다. 그의 내면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는 그 빌런을 전면에 내세워서 정신이 온전치 않고 육체적으로도 그다지 강하지 않은 낮은 계급, 실업자 남성 아서 플렉이 어떻게 조커가 되는지 그 과정을 펼쳐보인다.

첫 장면에서 아서 플렉은 거울 앞에서 광대 분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광대 등을 요청하는 곳에 보내는 인력파견업체 소속의 노동자였다. 그는 어느 폐업 정리 중인 업체 앞에서 광고판을 드는 아르바이트를 하다 어느 청소년들 무리에게 광고판을 빼앗긴 후 집단 구타까지 당했다. 영화속 사회상을 보건대 아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약자일 이 청소년들은 더 약자로 보이는 아서의 약함을 확인하자 잔인하게 짓밟았다. 쥐, 수퍼쥐가 창궐하고 쓰레기 문제가 심각한 고담의 상징적인 한 단면이었다.

이후 아서의 궤적은 몇 가지 이야기 축을 통해 진행된다. 이웃집 여자 소피, 머레이 프랭클린, 어머니, 웨인 가문, 동료가 건네준 총 등이다.

이웃집의 소피는 어린 딸이 있는 젋은 흑인 여성인데, 앨리베이터에서 둘이 처음 만났는데 복도에서 헤어지며 무슨 이유인지 아서를 보며 자신의 머리에 손가락을 대고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아서도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그 다음날인지 아서는 소피를 하루 종일 따라다녔고, 그 날 저녁 소피가 아서를 방문해 자기를 하루 종일 따라다녔냐고 추궁했다. 이후 어느 사건을 계기로 둘이 사귀게 되는데 영화 후반부에 밝혀지듯 이는 망상이었다. 그래서 어디부터가 아서의 망상인지가 관건이 된다.

머레이 프랭클린은 아서와 어머니가 즐겨보는 TV 쇼의 진행자다.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하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평론계에서는 마틴 스코세지의 옛날 작품들인 '택시 드라이버', '더 킹 오브 코미디'와 직접 비교가 되고 있다. 택시 드라이버는 영화 주제의 측면에서, 더 킹 오브 코미디는 로버트 드니로의 바뀐 입장, 드니로의 자리에 들어간 아서 플렉, 호아킨 피닉스의 위치 등이 비교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이번 영화 조커가 너무 낡은 틀을 가져다 쓴 것은 아니냐는 비아냥도 받고 있는 것이다.

여하튼 아서는 머레이 프랭클린을 코미디를 하고 싶은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는데, 사건의 우연하고 잔인한 전환에 의해 머레이가 자신의 쇼에서 처음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하는 아서의 영상을 조롱하게 되고, 또 공교롭게 그 일로 아서의 영상이 화제가 되자 아서가 머레이의 쇼에 출연하고, 그 기회에 아서는 '조커'로서, 자신을 쇼에서 '조커'로 불러준 그 창시자, 아버지를 총으로 사살한다.

어머니와 웨인 가문의 흐름은 연결되는 이야기 구조다. 어머니는 토마스 웨인에게 자꾸 편지를 보내며 답장을 기다린다. 토마스 웨인은 브루스 웨인이라는 낮의 이름으로 유명한 배트맨의 아버지다. 하지만 기다리는 편지는 오지 않고, 왜 자꾸 토마스에게 편지를 부치라는지 궁금해진 아들은 편지를 뜯어보고는 충격적인 문구를 발견한다. 어머니는 아서가 토마스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충격을 받은 아서는 토마스에게 접근해 추궁했고, 어머니는 정신이 이상하다, 너는 입양된 애다라는 말과 함께 주먹질로 답을 받았다. 젊은 시절 정신병원에 있는 어머니 장면이 나오며 모든 것은 어머니의 망상이라는 결론이 난 듯 했지만 후반부 젋은 시절 어머니 사진 뒷면에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T. W.의 손글씨가 적혀있었다. T. W.는 누가 봐도 토마스 웨인으로 추측되고, 후반부의 증거이기 때문에 오히려 아서가 정말로 토마스의 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한다. 아까 인터넷 커뮤니티의 영화 관련 글에서 아서 어머니가 여러 남자를 만났다는 설명이 영화에 있었다는데 나는 기억에 없어서 확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주장도 입양이라는 웨인 집안의 설명은 기각한다는 전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아서가 입양아라면 어릴 적에 그를 학대해서 정신이 온전치 않게 만든 어머니의 행동이 조금은 더 이해가 갈 수도 있지만, 친자식이라고 하면 모자가 모두 온전치 않은 상황이 어떤 유전적인 질병처럼 이해가 쉽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어머니는 남자에게 버려진 충격 때문에, 자식은 어머니의 학대 때문이라는 다른 이유로 정신이 온전치 않게 된 것으로 해석되어야 맞을 것이다. 결국 토마스는 아서의 지하철 살인 사건으로 촉발된 광대 가면 폭도 중 한 명에게 총을 맞아 죽는데 이로서 아서는 두 명의 아버지 격의 인물을 살인하게 된다.

동료가 건네준 총은 아서에게 자신감을 불어준 중요한 계기가 된다. 아서처럼 광대로 분장하는 듯한 직장 동료는 영화 시작부분에서 아서가 구타를 당하자 권총을 건네주면서 자신을 지키라고 권했다. 아서는 하필 그 총을 어린이 병원에 가지고 가서 춤을 추다 떨어뜨렸고 그 소식을 들은 직장 상사로부터 해고를 당한다. 이후 승객이 거의 없는 지하철 안에서 아서는 자기를 괴롭히는 세 명의 젊은 남성(그들은 직전에 한 여성을 희롱하고 있었다)에게 구타를 당했고, 품 속의 권총으로 세 명을 확인 사살했다. 도망친 그는 어느 외진 공간에서 천천히 춤을 추며 달라진 자신을 확인했고, 망상 속에서 옆 집의 소피와 사랑을 나눈다.

아서가 죽인 세 남자는 웨인의 금융 회사의 직원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들로부터 살인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정반대의 환호를 받고 광대 가면을 쓴 모방 범죄를 낳았다. 슬픔의 광대였던 아서는 자신을 흉내낸 광대 가면을 보며 기뻐했고, 자신의 모방품의 표정을 따라했다. 광대 가면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가면이 가진 자들에 대한 상징으로서, V for vendetta의 가이 포크스 가면을 연상시키며 사용되며 살인 용의자인 아서는 광대 분장의 물결 속에서 자신을 숨기기가 더 편해졌다. 그리고 TV 쇼라는 무대에서 자신의 범죄를 드러내고, 자신을 무시한 머레이를 생방송에서 죽이며 광대 가면들의 영웅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아서는 고담의 무력한 경찰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의사? 상담사?와 대화를 하다가 자신의 질병인 아무 때나 터지는 웃음을 선보이며 그녀를 살해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나는 점은 영화의 OST 중 여러 경우가 순전히 아서의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음악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의 음악, 그러니까 영화 제작하는 팀에서 사후적으로 넣었을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영화 속의 맥락에서는 그런 음악이 실제로 재생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어느 순간 머릿 속으로 음악을 틀고 춤을 추고,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는 것이었다. 그 음악들은 분명 예전 노래였다. 다른 사람들의 말이 맞다면 80년대 혹은 이전 시대 미국의 노래일 것이다. 마지막 씬에서도 머릿속으로 자기 혼자 상대방을 죽일 생각을 하고는 웃음이 터지고 음악을 틀고 일을 벌였다.

영화를 해석하는 여러 의견 중에는 마지막 정신병원 씬 때문에 마지막을 뺀 영화 전체의 이야기가 조커가 정신병원에서 하는 망상이라는 것도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커는 배트맨이라는 이야기의 세계에서 실재하는 캐릭터이고, 영화에서 그 모든 일을 겪고 벌이며 아서가 조커로 변신했다는 전개가 이상한 것도 아니므로 하나마나한 해석으로 보인다. 물론 정신병이 있는 화자는 말그대로 믿을 수 없는 화자이고, 소피와 사귄 부분이 영화 속에서 다 거짓이었던 것으로 판명되었으므로 어디까지가 진실이었는지 더 따질 구석은 있지만 감독이 그 이상 관객을 속일 의도는 없어보인다. 지금은 이 정도까지 쓰고 더 쓸 여력이 있다면 다음 글을 적어보기로 한다.

2019년 9월 27일 금요일

A dog's journey, Ad astra, The boys, Carnival Row

A dog's journey는 이전 개봉작 A dog's purpose의 후속편, 2편에 해당하는 영화다. 베일리라는 개가 한 주인 곁에 가기 위해 계속 환생하는 이야기로, 이번 영화에서는 데니스 퀘이드가 연기한 이쓴 대신 그의 손녀 CJ의 곁으로 계속 돌아간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영화 후반부에 이쓴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묘하게 설득되는 영화다. 이제 개 없이 산 인생이 너무 길어졌지만 어릴 적에는 언제나 개 옆에서 살았던 나의 눈물샘도 터졌다. 천국에서 개와 다시 만난다는 결말은 행복해보이기도 했다. 제작사 중에 알리바바가 포함되어서인지 핵심 캐릭터 중 한 명이 중국계 배우였다. 노골적인 중국 제작사의 개입 같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역시 조금은 눈에 거슬린 설정이었다.

몇 달 전부터 호평을 받은 영화인 애드 아스트라는 브래드 피트라는 대형 배우를 캐스팅한 영화지만 국내 흥행은 별로다. 영화 제작사 자체가 플랜 비이기 때문에 피트가 제작자이기도 하다. 그는 근래 주로 조연으로 출연하며 돈을 대는 역할로 변신했지만 요즘 국내 극장에는 그의 주연작 두 편이 동시에 개봉 중이다.

영화를 보며 콘래드의 heart of darkness가 떠올랐고, 다른 사람들이 인터스텔라, 그래비티 등과 이 영화를 비교하는 것도 이미 읽어봤다. 영화를 본 후 가디언의 관련 기사들을 보니 하트 오브 다크니스의 영화판인 지옥의 묵시록 외에도 프로이트, 다윈, 오즈의 마법사,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 온갖 레퍼런스 등이 언급되고 있었다.

영화의 핵심 이야기는 너무 단순하기조차해서 영화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피트, 즉 로이가 굳이 해왕성까지 다녀와야했냐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그 고생을 해야했냐는 것인데 캐릭터가 변신을 하려면 그런 고난이 필요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어릴 적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찾아 떠난 여행, 그 아버지는 자신의 목적이 이룰 수 없는 것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심지어 동료들을 살해했다. 로이는 마음뿐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눈이 거의 먼 아버지를 지구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남아있는 끈은 매우 얇다는 것을 확인한 후 아버지를 두고 해왕성에서 지구로 돌아온다.

'써지'를 일으켜 지구의 인명을 대량으로 죽이는 아버지를 살해해야하는 미션을 어찌되었건 성공시킨 그는 지구로 돌아올 명분을 갖추게 되었고 그의 헤어진 부인과 재회한다. 그는 마틴 신처럼 'horror, horror'를 외치는 대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그 부인이 근래 영화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리브 타일러라는 것을 엔딩 크레딧을 보면서야 알아챘다. 도날드 써덜랜드는 로이의 아버지역인 토미 리 존스와 같은 나이로 설정되는데 왜 대령밖에 안 되는지, 근 미래 미국 우주사령부에는 정년이라는 게 없는지 의문스러웠고, 달 표면의 차량 추격씬은 이상했지만 처음 보는 장면이라 신선했다. 우주 장면들은 기술적으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은 유지했다.

감독의 전작이 lost city of z라는 걸 생각해보니 주제면에서 두 영화가 매우 유사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남미의 원주민 중에 수준높은 문명을 보유한 증거가 있다는 것이나 우주 어디엔가 지성을 가진 다른 생명체가 있다는 믿음 등은 매우 그럴 듯 하면서도 한두 명이 증명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그 불가능성을 믿지 않는 모험가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한다. 하지만 로이는 아버지만큼 신념이 있지는 않았기에, 더구나 태양계 인근에 지성을 가진 외계생명이 없다면 지구의 인간들,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충실해야하지 않겠냐는 점을 강하게 느꼈던 것 같다.

더 보이스와 카니발 로는 모두 근 몇 달 안에 공개된 아마존 자체 제작 드라마들이다. 둘 다 화제작이고 더 보이스 쪽이 더 인기를 얻었던 모양이다. DC의 수퍼히어로들의 복사판 캐릭터들이 보우트라는 기업의 소속 연예인처럼 활동하는 세상의 이야기를 다룬 더 보이스는 여러가지 면에서 재미있는 창작물이다. 그래픽 노블 원작이 있는 작품이고 데니스 퀘이드의 아들이 주인공으로 연기하는 걸 처음 접하게 되기도 했다. 이 세계의 수퍼 히어로가 DC와 다른 점은 크립톤에서 날아오지도 신화 세계에서 인간계로 넘어온 것도 아닌 인간의 과학적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고민은 DC 캐릭터들의 그것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인간적 고민의 결과로 초인간적 파괴성이 지구를 덮치게 된다.  시즌 피날레의 반전(?)과 함께 시즌 2가 기다려진다.

카니발 로는 올란도 블룸을 오래간만에 볼 수 있고, 요즘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영국 배우 카라 델레바인도 주연으로 출연한다. 중후반에선가 잠깐 나오는 그림의 설명처럼 뿔달린 악마, 인간, 날개달린 천사의 특성이 이상하게 뒤틀린 세계에서 인간은 군림하고, 뿔달린 인종과 날개 달린 인종은 모두 노예나 사회 하층민으로 살아야한다. 줄거리는 매우 치밀하게 짜여졌고, 미국과 유럽을 괴롭히는 이민자 문제가 잘 녹아있다. 시즌 2가 나온다면 아무래도 덜 재미있을 전개 상황이지만 그래도 조금 기대는 해본다.

2019년 8월 29일 목요일

유열의 음악앨범

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목으로 삼은 이 영화는 아이가 생긴 후 아내와 두번째로 극장에서 본 영화로 내 생애에 기록된다.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던 유열이라는 가수가 진행한 라디오 방송에 대한 영화는 얼핏 보기엔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미 수 년 전부터, 아마도 <건축학 개론>이 신호탄이었던 같은 90년대 청춘에 대한 회고물들은 계속 나오고 있으니 이번 영화도 그런 흐름의 하나로 읽을 수 있다.

영화는 94년 10월 1일을 기점으로 97년, 2000년? 2005년까지 몇 년씩 건너뛰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물론 광고된 대로 정해인과 김고은이 맡은 캐릭터들의 두근대는 사랑이 전개된다. 영화가 끝나고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동료 관객들은, 5, 60대 몇 명은 정해인이 드라마에서 보던 그의 특유의 미소를 그대로 영화에서 보여줬다며 실망 반 만족 반의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40대 중반 정도의 몇 명은 <엑시트> 같은 영화보다는 훨씬 좋았다며 만족해했다. 하지만 나는 영화가 무언가 이상했고, 많은 곱씹어보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지우 감독은 아마 <해피엔드>로 가장 유명한 감독일 것이고, <은교>도 화제작이었던 것 같고(아마 그 인연으로 김고은이 이 영화에 캐스팅되었을 것이고), 근래의 <4등>이라는 영화도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침묵>의 경우도 보고 나서 '이상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영화에 대한 타인의 설명을 조금 들어보면 그런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정도로 인정할 수는 있었다. 그의 이번 작품은 잘 팔리지만 이제 지긋해지고 있는 90년대를 배경에 대세?라고 할 정해인을 투입하여 살려내려고 하는 영화로도 보이지만 가만 생각하면 분명 그 이상의 의미를 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11년 정도의 시간을 다루는 이 영화는 많은 부분을 생략한다. 마치 <보이후드>에서 갑자기 생겨난 변화들을 관객이 천천히 파악해야하듯 이 영화를 보다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구석들이 많다. 그런 이야기의 축을 지탱하는 것이 1994년부터 13년동안 KBS 라디오에 존재했던 <유열의 음악앨범>이다. 그 프로그램이 시작되던 날 미수는 빵집을 찾아온 현우를 처음 만났고, 현우는 진행자가 바뀐 음악앨범을 들으며 기적을 선포했다. 공교롭게도 미수는 음악앨범 프로그램의 작가가 될 뻔했고(그녀의 과 동기인 친구는 그 방송 작가가 되었다), 군대에 간 현우에게 할 이야기를 음악앨범에 두부와 도너츠라는 가명을 이용한 사연을 보내 전하려 했고, 영화의 막판 현우는 음악앨범의 보이는 라디오 첫 방송 날 카메라를 만졌다. 그리고 현우는 유열의 배려로 부르고 싶은 이름, 미수가 유열의 입을 통해 나오도록 할 수 있었고 해피 엔딩이 찾아온다. 

위는 행복한 이야기들이지만 영화에는 우울하고 어두운 이야기가 짙은 안개처럼 깔려있다. 현우는 어떤 아이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의 범인으로서 소년원 생활을 해야했고, 그 기억을 지우고 싶지만 지우지 못 하고 산다. 현우의 친구가 옥상에서 떨어진 사건은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공놀이를 하는 와중에 실수로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현우와 그외 '불량' 청소년들이 그 아이를 집단으로 괴롭혀서 그 아이가 자살한 것인지 혹은 타살이기까지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현우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고, 그의 순진한 얼굴을 보건대 많은 관객은 그가 진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태권도장 운전기사로 일하는 친구는 현우가 '불량'한 그의 친구들과 다를 거라고는 그 잘생긴 얼굴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현우는 그의 고모와 할머니가 자신의 무죄를 믿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모와 할머니는 현우의 행실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된 한동안의 사건, 정황,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관객이 짧게짧게 보게 되는 현우의 미소, 정해인의 미소는 그의 어두운 이면을 거의 완전히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는 현우와 미소의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이 두 캐릭터는 단순히 젊고 애틋한 감정으로 살아나가는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사실 둘은 사회계급적으로 중간에도 미치기 힘든 높이로 설정되어있다. 현우는 부모가 없는 와중에 고모, 할머니와 살았고, 그마저도 소년원을 출소한 이후로는 홀로 산다. 미수의 빵집에서 알바를 했지만 폭력 사건에 휘말려 다시 소년원에 가야했고 20대 초반에 이삿짐을 나르는 일을 하다가 군입대를 한다. 제대 후 대학에 들어가게 되고는 영상작업 쪽 일을 하는데 안정된 직장은 아니었다. 미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언급이 있지만 아마 아버지는 더 일찍 돌아가신 듯 하며 역시 홀로 살아간다. 미수는 그나마 빵집을 물려받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곧 문을 닫게 된다. 1997년 IMF 구제금융의 해에 졸업반인 그녀는 대기업 취업에 실패하고 KBS의 단기 알바가 아니면 중소기업?의 정규직 채용이라는 선택지만을 갖고 있었고 안정성을 이유로 정규직을 택했다. 하지만 소음 공해의 직장은 견디기 어려웠고,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잊어버렸다. 몇 년 후 작은 출판사에 일하며 책을 만들어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지만 역시 그녀의 이상에 도달한 느낌은 아니었다.

이들의 삶을 작게 만든 대표적인 설정은 옥탑방이다. 아주 작은 옥탑방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래된 빌라촌의 꼭대기 집이 이상적인 거주 공간은 아니다. 미수는 그 집에서 몇 년인가 홀로 살았고, 그녀가 더 큰 집으로 떠난 이후 다른 여성이 살았고, 이어서 현우가 그 집에 살게 된다. 미수는 자기가 원래 살던 그 집에서 현우와 잠깐 동거를 했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다른 가족이라고는 없는 두 남녀가 작고 저렴한 공간에서 살아보겠다는 모습은 그들의 형편에 맞았기에 슬프기도 했다.

현우는 삶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낮은 캐릭터다.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그는 빵집 알바에 만족했고 그것은 기적이 선포된 94년 10월 1일 미수와의 만남 덕분이기도 했다. 그에게 기족이 일어나 빵이 생겼으니 그에게 다른 건 필요없어졌다. 그는 죄책감으로 미수를 다시 찾지 못할 때가 여러 번 생기게 되지만 일단 미수와 극히 가능성이 낮은 상황에서 만남을 반복할 때마다 그의 첫 기적 덕분인지 이 만남을 수긍하고 더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 같다. 삶에 좋은 일이 별로 없던 그는 미수라는 좋은 여성을 만났고, 빵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미수의 옥탑방에서 입대 전날 불면의 하룻밤을 보냈다. 그에게 미수, 빵집, 옥탑방은 거의 집착에 가까운 대상들이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라온 궤적이 이런 몇 가지 지점에 집착하게 했다는 설정은 불가능한 건 아니다. 오히려 측은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94년부터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품은 두 남녀가 몇 년마다 만나는 계기는 제각각이지만 헤어지는 이유의 근원은 거의 언제나 현우가 연루된 친구의 죽음이다. 그 죽음의 공범인 친구들은 그를 술자리로 이끌다가 폭력 사건에 연계되게 만들었고, 97년은 입대 상황이었으니 예외라 하겠고, 대학생인 그는 친구가 소개한 일자리인 헬스장에서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또 폭력 사건으로 경찰서에 끌려가고(이 때의 현우는 분명 무죄였다), 2004년, 즉 예의 그 사건에서 10년이 지난 후 죽은 친구의 가족을 찾아가는 상황 때문에 미수와 헤어지게 된다. 현우는 미수가 이제 그 사건을 잊어버리면 안 되냐고 하자 미수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너만은 내가 그런 일에 연루되었다는 것 자체를 몰랐으면 했다는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빵집에서 두부를 찾던 현우를 보며 미수는 그가 무슨 일을 저질렀음을 알지만 정확한 내용은 몰랐던 것 같고, 세세한 내용은 10년이 지나 현우의 친구에게 들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그녀가 현우를 더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다만 그가 그 일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는 것에 대해 실망한 정도였다. 하지만 현우에게 그 사건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서 그의 일생을 억누르고 있었다. 영화에 묘사되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도 소년원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오해와 지탄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둘이 사랑한다면 그러한 근원적 어둠을 계속 숨기고 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불가피한 충돌은 둘을 갈라놓았고, 유열의 음악앨범의 기적은 마지막 효력을 발휘하여 둘을 다시 강하게 결합시켰다.

영화에서 이해가 가지 않거나 작위적인 설정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애초에 현우는 빵집에서 왜 두부를 찾았을까? 두부과자를 빵집에서 팔기도 하지만 그는 원래 두부를 사는 일반적인 장소인 시장이나 마트에서 바로 두부를 사는 것이 두려웠을까? 당연히 두부가 없는 빵집에서 현우는 콩으로된 다른 것을 찾았지만 역시 그마저도 없다. 왜 콩이 든 음식을 찾을까? 애초 출소자가 두부를 먹는 것은 깨끗하게 살라는 의미 아닌가? 그렇다면 미수가 제시한 우유도 적절한 하얀 청결제가 아닐까? 감독은 여기서 '빵'을 이중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감방에 간 것을 '빵'에 다녀왔다고 하므로 빵집에서 '빵'을 나온 청소년이 유혹되고, 다시 빵집에서 일한다는 것은 그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콩음식을 찾을까? 애초에 우리는 감방 음식을 '콩밥'이라고 불렀으니 현우가 여전히 감방을 잊지 못했거나 감방으로 곧 갈 운명임을 제시한 것일까?

둘이 믿기 힘들게 헤어지고 재회하는 설정은 아마 너무 우연적이라고 지탄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기적을 선언한 영화이기에 이 정도는 넘어가줄 수 있다. 애초에 둘은 왜 서로의 집 주소나 집 위치 정도도 몰랐는지, 미수는 현우가 어느 부대로 배치받았는지 알아볼 시간은 없었던 것인지 궁금하다. 현우가 방송 카메라를 조작하는 직업을 갖게 될 개연성은 별로 없지만 <유열의 음악앨범>의 보이는 라디오를 위해 투입시키도록 그렇게 설정되었다. 생각해보면 94년부터 사진찍는 것에 의미를 두었던 친구이기도 하니 밑밥이 깔려있기는 했다. 영화 마지막 장면 자체가 현우가 찍은 웃는 미수의 얼굴이기도 하다. 별로 가진 것이 없는 그가 갖고 싶은 전부였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94년부터 2007년까지 존재했기에 영화의 이야기도 더 진행되었다고 해도 2007년이 최대치였다. 해당 프로그램은 <이현우의 음악앨범>이 되어 유열 시대와 비슷한 시간이 흘러갔다. 유열은 9년 동안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지 않다가 KBS의 다른 채널에서 음악앨범과 같은 시간대의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고 한다. 라디오의 사회적 의미가 예전같지 않음이 너무 당연하고, 이제는 보이는 라디오가 당연해진 시대에 통신 기술 수준이 낮았던 시절의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라디오 덕분에 가능했다는 설정은 이제는 믿기 어렵지만 아마 그 시절에는 그랬을 수 있겠다는 깨우침을 새삼 주는 영화. 그렇지만 높은 예매율에도 불구하고 큰 흥행은 힘들겠구나 싶은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본 후 시간이 좀 흐른 후 조금 더 호의적인 생각이 들지만 여전히 애매한 영화다.

2019년 8월 19일 월요일

Red Joan, Long shot

두 편의 정치적인 영화에 대한 감상을 적어본다. 우선 레드 조안은 캠브리지 출신의 여성 스파이에 대한 실화를 다룬 영화고, 롱 샷은 미모의 여성 미국 국무장관과 소위 대조적인 외모와 위치의 한 남성의 그럴듯하지 않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레드 조안의 핵심 메시지와 주장은 대담하다. 영국에서 핵무기를 개발하는데 깊히 관여한 여성 학자, 즉 주인공인 조안이 핵무기의 핵심 정보를 러시아에 넘기는 스파이 행위를 했는데 그 이유가 러시아가 더 빨리 핵무기를 개발해서 세계의 핵균형을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핵무기의 역설, 너무 파괴력이 커서 오히려 쓸 수 없다는 역설적인 상황은 대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고 체계라고 하겠다. 하지만 이것을 영국의 한 학자가 러시아 진영을 강화함으로써 세계 핵무기 균형을 이루도록 했다는 일화는 자못 흥미롭다.

영화에서 핵무기 정보를 넘기는 계기는 단지 그 뿐이 아니라, 실제 러시아측의 스파이이자 조안의 애인인 남성의 역할이 큰 것으로 나온다. 즉 영국에서 활약하는 러시아 스파이(그들은 원래는 영국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고, 자발적으로 러시아에 협조하는 것처럼 보였다)들이 영국의 핵개발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공교롭게도 지인인 조안이 핵심 인력임을 알고 접근하여 설득하고 회유하는 과정들이 있었다.

영국 엘리트들, 특히 캠브리지의 스파이들은 수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소설이자 영화로도 나온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도 그런 내용이었다. 스파이들은 단지 영국 내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정보기관의 최상층까지 자리하고 있었고, 레드 조안에서처럼 영국 외교성의 핵심에도 존재했다.

조안의 스파이 행위는 오래지 않아 발각되는데, 물론 그녀가 특정된 것이 아니라 연구팀에서 정보가 새나갔다는 정도가 확인되어 결국 그녀의 동료이자 연인인 교수가 잡혀가기에 이른다. 그녀가 발각되지 않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평가절하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작은 카메라를 핸드백의 작은 틈에 넣거나 여성용품 속에 숨겨서 검색을 회피하는 등의 기지를 발휘한 결과이기도 하다.

영국의 핵무기가 러시아보다는 빨리 개발되었다는데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는지 궁금해졌고, 러시아가 2차대전의 연합국에서 냉전의 양축으로서 갈라서는 과정이 가져온 상황 변화도 유의해서 볼만한 부분이었다.

롱 샷은 샤를리스 테론, 세쓰 로건 주연의 코미디 영화다. 세쓰 로건의 대사는 곱씹어볼 라인들이 굉장히 많아서 재미있다. 각본과 감독 모두 세쓰 로건과 전에 작업을 했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합이 잘 맞은 영화였다.

샤를리스 테론은 전형적인 금발 미인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녀에게 많응 영예를 안겼던 몬스터를 비롯해 매드 맥스에서도 망가뜨린 외모임에도 돋보인 연기력으로 승부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금발 미인의 전형을 들고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하여 의아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만 결국 끝에 가면 어떤 전형을 넘어선 캐릭터를 연기한 셈이다.

테론이 연기한 샬롯 필드는 미국의 현 국무장관이고 재선을 포기한 현 대통령에 의해 차기 대권 후보로 지명될 예정이었다. 대통령은 브레이킹 배드로 유명해진 밥 오든커크가 연기하는데 상당 부분 트럼프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였다. 또 하나 등장인물로 부도덕한 재벌이 있는데 그의 헝클어진 듯한 붕뜬 머리 모양도 트럼프를 연상시키는 바가 있어서 트럼프를 두 개의 캐릭터러 분리하여 배치하는 설정으로도 보였다. 영화에서 실제로 둘은 밀접하게 이권을 공유하고 있어서 그런 혐의가 짙어진다.

제목인 롱 샷은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일을 의미한다. 라 라 랜드에서 밤이 시작되는 LA의 언덕에서 라이언 고슬링이 에마 스톤에게 we've got no shot이라고 말했듯이 남녀관계를 두고 쓰이는 표현이기도 하다. 영화의 기본 설정상 국무장관인 샬럿과 무직인 전 언론인 프레드의 별로 가능성없는 연애, 그리고 대통령을 향한 그녀의 야망에 객관적으로 방해 요소가 될 연애가 바로 롱 샷이다. 하지만 결국 대통령이 되는 샬럿이 자신이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임을 선포하는 것처럼 여성 대통령이라는 가상 현실도 롱 샷이기도 하다. HBO의 인기 시리즈인 빕VEEP에서도 셀리나 마이어스는 몇 시즌 동안 부통령으로 고통을 겪은 후 짤막한 대통령 생활을 한다. 그녀는 다음 선거에서 다른 여성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어주나, 마지막 시즌에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다시 대통령이 된다. 하우스 오브 카즈에서도 그랬던가? 미국에서 여성이 대통령이 되는 상황을 두 개의 미국 드라마에서는 일단 부통령인 상태에서 대통령이 사라진 후 그 자리를 이어받는 식으로 설정했다. 그만큼 여성 대통령이 미국에서 등장하기 어렵다는 반증일 것이며, 힐러리가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에 얼마나 가까웠던가를 되새기게 한다. 롱 샷과 위에 언급한 드라마들을 포함해 많은 픽션 속의 미 여성 대통령은 실제로 힐러리를 모델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공화당식 철학의 편안함을 설명하는 부분도 있는데 길지는 않지만 재치가 있고 설득력이 있었다. 다시 보고 싶은 부분이다.

픽션이기에 영화 마지막 부분의 위기가 극복되는 과정을 선선히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아마도 샬럿은 정치적으로 몰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녀는 정치가의 가식과 부도덕한 타협이 아니라 솔직함의 극치로서 난관을 돌파했다. 완벽해보이는 그녀도 애인이 있다(미혼인 그녀에게 전혀 흠은 아니다), 그 애인은 자신의 영상을 보며 자위를 한다(그녀는 다들 자위는 하지 않냐며 미 국민들에게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는 현실은 그녀의 입을 통해 폭로된다. 그것은 자폭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열광적 지지로 바뀌었다. 이미 그 선언 이전에 그녀의 인기는 차기 대통령감으로 손색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폭이 아닌 것을 알았을까? 진심이 통한다는 이상적인 결말이 비현실적이라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통쾌함을 안겨준 것도 사실이다.

2019년 8월 14일 수요일

작은 아씨들의 새 버전

가디언의 문화면을 읽다가 한국에서는 작은 아씨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Little Women이 새로운 영화로 개봉할 예정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트레일러가 포함되었는데 이 캐스팅은 그저 등장인물들 자체만으로 눈을 어지렆일 정도여서 이야기 자체는 신경쓰지 않고 무조건 보고 싶을 정도이다.

일단 감독이 전작 레이디버드로 능력을 공인받은 그레타 거윅이고, 네 아씨의 어머니가 로라 던, 네 아씨는 서샤 로난, 에마 왓슨, 플로렌스 퓨, 일라이자 스캔런에, 고모는 메릴 스트립이고 남자 상대역은 티모시 샬라메가 맡는다.

에마 왓슨이 맡은 역은은 원래 에마 스톤이 캐스팅 되었으나 다른 일정이 생겨서 교체되었다고 한다. 이 두 배우는 전에도 다른 영화, 라 라 랜드를 두고 캐스팅이 바뀌는 상황이 있었으니 재미있다. 둘의 이미지는 그리 비슷하지 않은데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일라이자 스캔런은 HBO의 샤프 오브젝츠의 무시무시한 딸을 연기했던 터라 트레일러에서 잠깐 봐도 사람을 서늘하게 만드는 기운이 있다. 영화에서 맡은 역할이 샤프 오브젝츠의 역할과 유사점이 있을까?

가디언 기사에 따르면 무려 8번째로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이 이야기에 대해 가만 생각하면 한 번도 읽은 적도 없고, 영화를 다 본 적도 없다. 미국 남북전쟁 이후의 상황이라고 하니 시대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시도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트레일러에 따르면 거윅의 새 영화는 올 크리스마스에 개봉한다고 한다.

2019년 6월 12일 수요일

기생충 (2)

어제 글을 쓰고 난 후 못 적은 내용이나 하룻동안 주워들은 이야기를 참고해서 더 써보려 한다.

이 영화에서 떠오른 다른 작품이 란티모스 감독의 '송곳니'외에도 데이빗 린치의 드라마 '트윈 픽스'가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인디언 복장 때문인데 '트윈 픽스'에서는 벤자민 혼의 지적 장애가 있는 아들이 인디언 복장을 하고 있었다. 트윈 픽스에서는 인디언 경찰도 있기 때문에 인디언은 여러 의미로 사용되지만, 시즌2에서 정신이 나간 상태로 남부군 놀이를 하던 벤자민 혼의 아들이 인디언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이상하게 만든 설정이라 할 만했다.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는 그 상하로 계속 이동하는 카메라 앵글 때문에 '기생충'과  닮아있다. 그 영화에서는 인종과 관련된 계급 문제가 핵심적인 소재였고, 분리된 주거와 다른 언어 등이 부각되었다. 영화 시작에서 개똥이 뒹구는 바닥을 물로 청소하는 앵글은 주인공의 낮은 계급을 극단적으로 부각시켰다. 하지만 어린 쿠아론에게 그 식모 아주머니는 누나 같고 어머니 같은 친근한 존재라는 점에서 단순한 계급 갈등이 아닌 묘한 라틴 아메리카적 현대의 특이성이 드러났다.

'어느 가족'의 경우는 손석희 사장이 뉴스룸에서 봉준호 감독을 인터뷰하면서 자신이 '기생충'과 유사한 점이 있었던 것처럼 느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기실 피로 연결되지 않은 개인들이 가족인 척 하고 더 나아가 혈연 가족보다 더 정이 깊은 모습을 보여준 '어느 가족'과 적어도 가족들의 연대가 깨지지는 않은 '기생충'은 설정이 매우 다르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동아시아 국가의 감독들이 작년과 올해 깐느에서 최고상을 받았다는 점과 가족을 소재로 했다는 외양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손석희 사장이 무의식적으로 느낀 것으로 추정되는 공통점이 왠지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아마도 가난한 가족의 위태로운 상황이 아닐까?

인디언의 경우 몇 가지 해석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원주민의 상징으로 쓰였다는 게 일차적으로 설득력이 있었다. 인디언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었지만 백인 이주민에 의해 몰살되고 소수자로 전락했다. 사실 한국 관객만 염두에 두었다면 굳이 인디언 설정을 가지고 왔을까 싶은데 글로벌 관객을 대상으로 한다면 직관적으로 그네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면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영화 '기생충'에서 원주민은 누구인가? 굳이 따져보면 문광이 저택에서 가장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녀가 원주민에 해당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애초 건축가에게 고용되어 살았을 것이고, 박사장에게도 고용되어 살았다는 측면에서 인디언과 일대일 매치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인디언을 미국 내의 타자로 보면서 자본주의의 화신과 같은 미국과 한국의 관계에 대한 비유로서 인디언을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국 언론에서도 인정받은 글로벌 기업의 박사장,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저택을 차지한 외국인 등이 미국 혹은 자본주의의 상징으로서 원주민 격의 한국을 혹은 피지배계급을 억압하는 식으로 보는 류이다. 수긍은 가지만 그렇게까지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문득 드는 생각이지만 그리고 아마 부차적인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인디언 소품을 아마존을 통해 직구했다는 대사와 그들의 아픈 역사에 대해 아무 고민이 없이 놀이로 소모되는 인디언이라는 외피를 감안하면 인디언은 타자에 대한 무감각, 무공감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박사장과 아들 다송에게 인디언은 놀이의 하나이고 직구한 작은 인디언 도끼는 생존을 위한 방어/생계 수단이 아니라 상황극을 위한 소품이었다. 이 대목에서 다송이 쏘던 장난감 활도 도끼와 동일한 기능의 소품이라 하겠는데, '괴물'에서 배두나가 양궁을 했던 걸 감안한 이중적 장치라는 생각도 든다. 짧게 더 붙이면 저택의 건축가의 이름을 굳이 '남궁'씨로 정한 것은 '설국열차'의 남궁민수와 연결지은 감독의 의도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 봤다. 아마 잘 찾아보면 감독이 전작들의 소재 혹은 장면을 차용한 것들이 더 있을 것 같다. 

영화에 많이 등장한 '계획', '냄새', '선'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을 터인데 큰 주제이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더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내가 못 본 이야기 중에 개들에 대한 것을 써본다. 영화에서 저택에는 개가 세 마리 살았던 것 같다. 비글이 있었던 것 같고 나머지 둘을 잘 모르겠다. 개는 몇 차례 등장했는데 송강호가 연기한 기택의 가족들과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가령 박소담 역의 딸은 술 마시며 육포를 뜯어먹는데 그게 사실은 개먹이였다. 폭우로 캠핑이 취소되고 박사장 가족이 갑자기 돌아오며 벌어지는 대소동 이후 아들이 다혜의 침대 밑에 숨었을 때 그의 정체를 폭로할 뻔한 것은 그를 알아챈 강아지였다. 문광의 남편이 꼬챙이에 찔려 죽은 후 개는 죽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 꼬챙이에 여전히 남아있는 소시지를 탐했다. 이렇게 기택의 가족은 개와 유사한 처지로 묘사되는 경우들이 있었고, 그 개는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눈앞의 욕심에만 충실했다. 물론 영화 제목이 시사하는 바대로 기택 가족 그리고 문광의 가족은 기생충, 즉 벌레, 영화상에서는 특히 바퀴벌레와 동격으로 취급되었다. 송강호가 주인이 나간 집 거실에서 술파티를 벌이며 바퀴벌레가 불이 켜지면 막 구석으로 숨는다는 대사를 한 이후 곧바로 그것이 자신들에게 닥친 현실이 되며 기택 가족은 정말 바퀴벌레처럼 어두운 곳, 사각지대로 숨어들었다. 영화 초반 반지하 집에서 송강호는 식탁(?) 위의 바퀴벌레를 손으로 튕겨냈던 바, 이는 자신보다 더 낮은 자들에 대한 가혹한 태도를 암시할 수도 있고, 자신이 바퀴벌레가 되었을 때 인간의 손가락 튕김의 타격을 피하기 위해 몸부림칠지 몰랐다는 경고였을 수 있겠다. 더 생각해본다면 카프카의 '변신'에서 인간이 단지 벌레의 모양이 되었다는 이유로 죽어야만 했듯이 벌레가 아니라 정체가 인간인 타인에 대해 더 존중해야한다는 메타포일 수도 있겠다.

몇 차례 보고들은 해석 중 하나로 기택 가족이 '전원 백수'이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니 너무 잘 한다는 설정에 대한 것이 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고 설득력이 떨어진다. 어느 누구도 그 정도로 맡은 일을 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기우는 영어보다 연애를 더 하는지도 모르고, 기정은 그림을 무슨 식으로 가르치는지 모를 일이다. 기택도 경력에 비해서는 운전을 잘 했고, 충숙은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는데, 단지 투포환 선수여서 힘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온갖 요리를 잘 하고 저택의 집안일을 잘 해내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능력은 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거나, 재기의 발판이 없어서 주저앉은 사람이 많다는 의미였다는 해석이 나온다. 그리고 인생사에서 운이 있고 없고에 따라 사람의 경제적 처지가 극명하게 갈릴 수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땅부자, 비트코인 부자, 주식 부자 중 많은 경우가 극히 운이 좋았을 것이다. IT 기업도 속성상 대기업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면 그 사장은 벼락부자일 가능성이 높다.


문광의 남편 근세가 있던 지하실의 많은 책들은 의문스러운 소품이다. 그 책들이 고시서적으로 보이기에 근세가 젊은 시절을 고시공부로 보낸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있고 그럴 듯 하긴 하다. 하지만 이미 사업을 하다가 망한 사람이 다시 고시 공부를 하는 걸까? 고시가 아니라 공무원 시험 준비라고 해도 마찬가지인데 이미 사회 재진입을 포기한 근세에게 있어 그런 수험 서적의 의미는 무엇일까? 클래식 음악을 듣고 책을 많이 본 유사 지식인임을 강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젊은 시절 고시를 준비한 게 아니라 사업이 망한 이후 오히려 살길은 공무원이라는 생각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공무원 열풍을 풍자한 것일까? 치킨집, 대만 카스테라나 공무원이나 모두 극한의 생존 문제의 결론으로서 나온 눈에 보이는 해결방안이고 동시에 치열한 경쟁 때문에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은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 정도로 기생충 이야기는 일단 마쳐야겠다.

2019년 6월 11일 화요일

기생충 (2019)

소문의 그 영화, 사람들이 스포일을 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는 그 영화 기생충을 나도 보았다. 안경을 가져가지 않아 또렷하지 않은 영상을 봐야했지만 후반부의 폭력적인 장면들을 덜 생생하게 본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다.

평자들은 주로 계급의 문제로 이 영화를 해석하고 있고 상하의 구별이 뚜렷한 영화의 카메라 앵글을 보건대 그런 해석은 타당하다. 천국-연옥-지옥과 딱 맞지는 않지만 저택-반지하-지하(의 지하)라는 공간적 배치는 사람의 등급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가 흔히 하는 방식처럼 부르주아를 비난하고 노동자를 더 대우해야한다는 차원의 이야기는 아닌 듯 하다. 어떤 대사에서 부자가 착하다는 말이 강조되고, 빈자들은 사기, 주거침입, 절도 더 나아가 폭행, 살인을 별다른 죄책감없이 행했다.

상황은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마치 영화 '어스'를 연상시키는 지하세계의 사람들은 노동자보다 더 낮은, 아예 보이지 않는 존재들까지 다룬다. 지하인은 모스 부호라는 형식으로 주인에게 신호를 보내지만 주인은 신경을 쓰지 않거나 오독하거나 이해를 하지 못 한다. 오직 지하세계를 경험한 반지하인 아들이 나중에 신호를 이해하게 되지만 응답할 방법은 없다. 단지 상상 속에서 부자가 되어 그 저택을 사고 지하의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사실상 희망없는 꿈 밖에.

영화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아버지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였다. 최근에 경제적 상황이 안 좋은 이유는 대왕 카스테라를 비롯한 반짝 인기업종을 따라하다가 망했다는, 뉴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망한 자영업자의 경로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지하세계의 남성, 문광의 남편도 대왕카스테라가 망하고 사채를 빌려쓴 결과 지하인이 되었다고 설정이 되었다. 양자를 가른 것은 사채를 썼느냐의 여부인 듯 하고 그 결과로 반지하인은 상승을 꿈꾸기도 하지만 지하인은 상승의 꿈을 포기하고 주인에게 감사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지하인과 반지하인의 대결에 대해 섬뜩함을 느낀다는 평을 커뮤니티에서 많이 보았다. 전투는 부자나 정치인을 향해 벌여야하는데 빈자들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은 지배전략의 효과이기도 하고 쉬운 싸움 상대를 고른 결과일 수도 있겠다.

남궁현자라는 유명건축인이 설계한 것으로 설정된 저택의 풍경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출세작 '송곳니'의 저택을 연상시켰다. 다시 확인해본 결과 카메라 앵글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통유리를 통해 집 안에서 잔디 마당을 볼 수 있다는 점과 잔디 마당이 넓고 주요 공간으로 활용된다는 점에서는 유사했다. 봉준호 감독이 '송곳니'를 참고했다면 반지하 집 안에서 밖을 바라본 풍경을 대비시켰다는 점에서 더 진척을 이뤘다고 할 수 있겠다.

인디언 설정은 어떤 의미였을까? 인디언 차림의 송강호는 결국 살인을 저지른다. 그 대상은 공교롭게도 숙주인 이선균. 그도 인디언 차림이었다. 송강호가 인디언 흉내를 낸 것은 근무의 연장이었을 뿐이지만 같은 인디언을 죽인다는 설정은 인디언의 폭력성이라는 잘못된 이미지를 차용한 것은 아닐 터이다. 숙주와 기생충,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라도 원래는 같은 족속, 인간이라는 것을 환기하는 것일까? 원래 인디언 놀이는 다송이라는 아들 캐릭터가 시작한 것이다. 지하인이라는 귀신을 본 후의 부작용인 듯한데 인디언놀이가 다송의 '~인 체'하는 삶의 방식의 일환인지(실제 다송은 인디언의 옷, 화살, 텐트라는 외양 외에 인디언에 대해 이해하려는 태도는 전혀 없다)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영화에서 가장 웃음을 안겨준 대사는 '코너링'이었다. 처음 운전기사가 된 송강호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사장역의 이선균은 음료가 가득 든 컵을 들고 차가 회전할 때 음료가 얼마나 흔들리는지를 지켜보았다. 결과적으로 음료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그러니까 차가 부드럽게 방향전환을 하는 걸 확인하자 사장이 '코너링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사는 다른 누구도 아닌 경찰이 우병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아들을 운전병으로 뽑은 이유로 내놓은 말이기도 했다. 즉 우병우에 대한 환기와 동시에 오랜 운전 경력이 있다면 정말 코너링이 좋을 수도 있었는데 우병우의 아들이 정말 그러했을까라는 의구심을 다시 갖게 만드는 짧지만 복합적인 장면이었다.

마찬가지로 문광이라는 캐릭터가 반지하인 가족을 궁지로 몰아놓은 이후 북한 뉴스 여자 앵커를 흉내내는 장면은 현 국제정치 상황을 반영했다. 모르는 사람인 척하며 온 가족이 빌붙어서 부자집에 고용된 상황을 폭로하는 영상을 보낼 메시지의 전송 버튼이 김정은의 미사일 버튼같다는 평가도 대사로 등장했다. 메시지 전송과 미사일 발사를 비유할 수는 있지만 문광이 뉴스 앵커를 흉내낼 하등의 이유는 없다. 그래서 뜬금없다는 평가를 볼 수도 있었다. 아마 감독은 국내 정치의 계급 투쟁 혹은 생존 투쟁과 함께 북한이 얽힌 국제정치의 상황까지 짧게나마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는 배우들의 이전 작품에서의 캐릭터를 잘 활용했다.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이었던 송강호가 운전기사로 일한다는 설정은 금방 납득이 갔고, 조여정의 역할도 이전 작품들의 이미지를 상당히 가져와서 활용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선균은 여러 이미지를 연기할 수 있기에 이번 작품 캐릭터의 전거를 어디에서 찾아야하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고, 나머지 배우들은 이전 활동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에 뭐라 말하기 어렵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분배적 정의가 실현되면 비극은 줄어들 수 있다는 메시지가 아니라면 영화의 톤은 매우 비관적이다.

2019년 6월 7일 금요일

미끄러짐

결혼 초에 샀던 크록스 슬리퍼는 이제 바닥이 많이 닳았다. 그래서 미끄러운 곳을 지나가거나 눈비가 오는 날에는 좀 위험하다. 어제는 전형적으로 그런 위기 상황에서 큰 사고가 날 뻔했다.

차를 가져가지 않고 마을버스로 동네 마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빗줄기가 예상보다 훨씬 굵어졌다. 우산도 가지고 나오지 않은 터라 택시를 타려고 했지만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몇 대는 그냥 지나가버렸고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그냥 마을버스를 다시 탈까 싶던 와중에 용케 택시를 잡은 아내가 나를 불렀고, 아들을 안고 있던 나도 부랴부랴 택시로 뛰어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횡단보도와 인접한 약간 경사진 보도블록에서 미끄러졌고, 내 품에 있던 아이는 대략 1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날아갔다.

나는 약간 아팠지만 어디 까진 곳도 없었는데, 아들은 황당한 상황에 처음에 멍한 상태였다가 울기 시작했다. 원래는 아이를 그 자리에서 달래야할 터이지만 비가 계속 많이 내리는 상황이라 아내가 아이를 안고 택시 안으로 급히 들어갔고, 행인들이 애를 어쩌나라며 걱정하는 소리를 하는 와중에 나도 약간의 민망함과 아이에 대한 걱정과 함께 택시에 탔다.

다행히 아이는 다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이후 식탁 모서리에 부딪혀 한 번 더 울어야했지만.

바닥이 닳은 크록스 신발을 아내는 당장 버리겠다고 말했다. 전에도 미끄러진 적이 있던 터이긴 했다. 아내의 조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만 다행으로 아이가 안정적인 자세로 떨어졌지만 조금만 다르게 날아갔어도 크게 다쳤을 수도 있었다.

살다보면 찰나의 순간이 엄청나게 다른 결과로 나올 수도 있었음을 실감하는 일들이 생각보다는 종종 생긴다. 아내의 기도 덕분에 그나마 이렇게 버텨올 수 있었을까?

2019년 5월 20일 월요일

왕좌의 게임 시즌8 피날레

드디어 역사상 가장 화제를 몰았던 TV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왕좌의 게임이 종영되었다. 지난 편에서 대너리스가 드로곤의 화염으로 킹스 랜딩을 초토화한 상황에서 이제 어떻게 상황들이 마무리되느냐가 남은 상황이었다. 최대 관심사인 누가 왕이 되느냐에 대해 작가들은 예상하지 못한 결말을 내놓았고, 그 외에 아랴의 선택 정도가 예외적이었던 것 같다. 피날레 에피소드 내내 날리던 회색의 재는 마치 눈처럼 보였다. 흰 눈의 겨울, 나잇킹의 죽음의 시간에 이어 회색의 종말, 잿더미의 시간이 출현하고야 말았다. 누군가 대니를 막아야했다.

지난 편에서 보인 대너리스의 학살은 존 스노우의 충성심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대니가 즉위식을 하던 장면에서 드로곤의 날개가 마치 대니의 날개인양, 즉 대니가 마치 악마의 날개를 단 것처럼 편집한 것은 대니의 정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존은 자신이 왕이 될 생각은 없지만 대니가 여왕으로 세븐 킹덤을 통치하게 놔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죽인다. 다소 허무했던 그 살해 장면에서 드로곤은 화염을 내뿜었으나 시리즈의 주인공인 존 스노우가 아니라 아이언 쓰론을 향한 것이었고, 그래서 모두가 탐내고 대니가 만져보며 기뻐했던 그 철의 왕좌는 녹아내렸다. 마치 그 왕좌가 자신의 어머니, 대니를 죽였다고 원망하는 것처럼. 원군도 거의 없이 왕을 살해한 존은 언설리드 군대에 의해 투옥되었다.

대니의 왕위 즉위식 격이었던 장면에서 암살자 아랴가 걷는 장면이 보여 많은 이들의 예상처럼 그녀가 대니를 암살할 것인가 귀추가 주목되었으나 아직 그런 행동을 할만한 이유가 그녀에게 부족했다고 작가들이 판단한 것 같다. 나중에 대서양 개척을 떠나는 탐험대를 이끄는 그녀를 보건대 전문 암살자로 성장한 자신의 과거와 완전한 결별을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역사에서 보았던 것처럼 유럽인들의 대서양 횡단은 또 다른 학살을 낳았기에 그녀의 행보에 대한 설정에는 의문이 따른다.

로버트 배러씨언이 죽은 이후 최대의 관심사인 세븐 킹덤의 최종 주인공은 브랜이 되었다. 티리언이 수감자의 상태로 손이 묶인 상황에서 브랜이야말로 '스토리'와 기억의 왕이기 때문에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브랜이 왕이 될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 그야말로 쿨하게 내가 무엇 때문에 여태 살았다고 생각하냐는 되묻는 장면은 실소를 자아냈다. 아이언 쓰론이 사라진 상태에서 이미 왕좌인양 의자에 앉아서 오래 생활한 브랜의 모습은 준비된 왕의 그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모든 것은 예정된 대로 벌어진다는 듯한 브랜의 통치를 과연 통치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대니와 산사의 최대 갈등 지점인 북부의 독립은 산사의 소원대로 성취되었다. 다른 지역의 군주들이 자신들의 독립을 함께 주장하지 않는 것은 이상했다. 아마도 티리언의 주장처럼 대니 이후의 군주를 자신들 중 누군가가 합의로 선출한다면 자신이나 그 가문에서 왕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참았으리라 상상해본다. 샘이 소위 대중 민주주의를 주장했고 다른 군주들은 모두 실소하며 무시해버렸는데, 죽을 것으로 예상된 대니 이후의 정치체로 민주주의를 상상한 팬들도 적지는 않았다. 여기서의 결론은 최소한 혈연으로 인한 왕위 계승이 아니라 능력에 따른 왕위 계승을 합의했는데 이것이 실제로 어떻게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포스트 브랜의 세븐 킹덤은 아마도 나이트 킹의 기억, 드래곤들과 대니의 이야기가 전설이 되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격랑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쓸데없는 팬의 걱정일 것이다.

지난 편에서 고스트를 북부로 보내버린 존 스노우에게 반려견에 대한 예의가 부족하다고 질타한 팬들이 많았는데 의외로 존은 고스트와 재회하고 앞으로 헤어지지 않을 것 같다.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겠다고 약속한 존에게 가장 애정에 가까운 것을 줄 상대는 고스트밖에 없다. 약간 멍청한 표정의 토문드가 마지막 장면을 위해 다시 등장했는데 그와 브리엔 사이에 다음 기회가 있을런지 없을런지도 조금은 궁금하다. 제이미가 죽었기에 그로서는 작은 희망을 걸지도 모를 일이다.

티리언이 몇 차례에 걸쳐 핸드 오브 킹이 되며 인생이 희한한 방식으로 반복되는 모습도 있었고, 시리즈의 첫 장면이 장벽 너머에서 시작된 죽음이었던데 반해 마지막은 다시 삶의 터전을 개척하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로 그려진 것도 수미쌍관을 위해서는 좋은 선택이었다. 시리즈는 세븐 킹덤의 왕을 여자로 만드는데는 실패했지만 최소한 북부에서 독립된 왕국을 여왕이 통치하게 되었고, 브랜이라는 최고의 능력자이지만 장애인이 왕이 되었다는 설정도 사회적 올바름의 측면에서는 고무적인 선택이라고 하겠다. 마음에 안 드는 팬들도 많겠지만 최소한 게으른 마무리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

2019년 5월 15일 수요일

왕좌의 게임 시즌8 5화, 웰컴 투 마르웬, 더 프론트 러너

왕좌의 게임 마지막 시즌은 세 편 연속 영화 한 편 분량의 러닝 타임을 보이고 있다. 나이트 킹과 화이트워커들의 소멸 이후 4화에서 대너리스의 드래곤이 하나 더 사망하고 이제 5편에 이르면 시리즈 최고의 악당 중 하나로 설정된 써씨가 퇴장한다. 대니와 드로곤의 분노의 화염으로 킹스 랜딩이 초토화될 때 그 불길을 피하며 탈출하는 과정은 한 모녀와 아랴의 동선을 통해 처연하게 표현되었다.

왕좌의 게임 시리즈는 원작 소설의 흐름을 따라가다가 아직 출간되지 않은 6권 이후의 이야기가 TV에 먼저 방영되는 중이다. 레딧의 어떤 이는 작가인 마틴이 이미 6, 7권을 썼지만 시리즈 종영 이후에 출간하기로 합의했다는 설을 주장했는데 진위 여부가 어찌되었건 작가의 본심을 알 수 없는 독자들은 TV 시리즈의 전개, 특히 파이널 시즌의 흐름에 분개하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 큰 흐름에 있어 TV 시리즈의 작가들과 마틴 간의 합의가 있었다고는 봐야하지 않을까? 그런 점을 인정하더라도 책의 깊이에 TV 드라마가 따라가지 못 한다는 불평은 남는다. 나는 책을 안 봤기 때문에 뭐라고 평가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시즌8이 왜 이전의 10편 구도가 아니라 6편으로 끝나느냐는 불만이 많다. 하지만 3~5편이 통상적인 에피소드의 2배임을 감안하면 대략 10편 구성의 한 시즌과 비슷한 시간을 상영한다고 볼 수도 있다. 전투의 시작과 끝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영화 상영 시간과 맞먹는 진행이 필요했다면 그것은 그대로 존중할만하다. 윈터펠의 전투가 두 편으로 나눠진다면 그것도 적절치 못했을 것이다.

독자들 혹은 이전 시즌들에 대한 애정이 큰 사람들은 시즌7, 8에 대해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모든 요구를 충족할 수는 없다. 아직도 밝혀졌으면 좋을 이야기들이 많은데 그 부분은 아마도 마틴의 소설이 출간된다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남은 한 편의 결말이 팬들의 큰 분노를 일으킬지도 모르지만 선제작을 끝낸 이 이야기는 수정될리 없다. 아주 깊이 왕좌의 게임의 세계관에 빠져들지도 않고 가볍게 충성했던 팬으로서 시즌8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비난에 동참하고 싶지는 않다.

스티브 카렐 주연의 웰컴 투 마르웬이라는 영화에는 브리엔 오브 타스, 이제는 기사가 된 브리엔, 제이미 래니스터와 사랑을 확인한 브리엔이 출연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녀는 러시아 억양의 영어를 구사하는 다소 어색한 배역을 소화했다. 영화는 하이힐을 신는 남자에게 가해진 린치를 소재로 삼았는데 영화 말미를 보니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었다. 실제 인물과 닮은 인형들의 인형극 이야기를 현실과 착각하는 카렐이 연기한 인물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은 영화다. 비록 영화는 덜 '남성적'이지만 어쨌거나 남성인 주인공을 내세우지만 그를 구원하는 것은 여성들이라는 점에서 최근 미국 연예계의 여성주의적 흐름과 공명하고 있다.  

더 프론트 러너라는 영화는 이제 울버린 역할에서 벗어난 휴 잭맨이 미국의 유력 대선후보였던 개리 하트를 연기한 작품이다. 개리 하트라는 이름은 생소했지만 1988 대선에서 모든 예비후보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여 사실상 백악관을 예약했다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지지자이자 선거 캠프에서 일했던 한 젊고 똑똑한 여성과의 불륜설로 인해 3주만에 후보에서 사퇴하고 만다. 영화에서 잠깐씩 소개된 개리 하트의 공약, 그의 연설, 그의 젊은 리더로서의 이미지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 불륜은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영화는 만약 그 때 조지 부시가 아니라 개리 하트가 당선되었다면 미국이 그리고 탈냉전의 세계가 얼마나 달라졌을지에 대한 아쉬움을 감추고 있는 듯 했다. 불륜은 정치인에게 치명적인 결점이기에 개리가 대통령이 되었어야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영화는 그 윤리적 부분을 강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추문을 퍼뜨린 마이애미 헤럴드라는 언론의 행태, 그 자극적인 소재를 보도하려는 신문과 방송의 과열된 취재에 대한 비판도 동반되었다. 미국 정치를 잘 모르지만 개리 하트의 이미지는 1992년에 등장한 또 하나의 젊은 정치인 빌 클린턴을 연상시켰다. 클린턴은 비록 취임 후지만 역시 젋은 여성과의 성추문을 일으켜서 묘하게도 공통점이 추가되었다.

2019년 4월 29일 월요일

왕좌의 게임 시즌8 1~3화

왕좌의 게임의 마지막 시즌이 중반으로 왔다. 이번 3편은 거의 영화 상영 시간에 버금가는 긴 러닝 타임으로 제작되었다. 지난 화에서 예고되었듯이 나잇킹이 이끄는 죽음의 부대와 산 사람들의 전투가 윈터펠에서 벌어졌다.

지난 편들에서 전투 계획은 수립되었다. 수적으로 희망은 없지만-왜냐하면 나잇킹은 이번 3편에서 보여주듯 죽은 자들을 깨울 수 있기 때문이다-나잇킹을 브랜에게 유인하면 무슨 수가 생길 거라는 전략이다. 하지만 유인하고 나서 누가 나잇킹을 죽일지는 정해두지 않았다. 실제 전투가 끝난 3편 마지막에 나잇킹을 해치우는 주인공은 뜻밖의 인물이다.

3편의 핵심 인물은 멜리산드레였다. 에피소드의 처음과 끝을 장식했다고 하겠는데,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다. 그녀는 3편 초반에 홀연히 말을 타고 등장하여 도쓰라키 부대의 칼에 말그대로 불을 붙였다. 전투의 선봉에 선 도쓰라키 기병대는 어둠 속에서 급속히 줄어드는 불빛과 함께 거의 전멸했다. 멜리산드레는 나중에 성 외곽의 목책(?)에 불을 지르는 역할을 하고, 나중에 아랴에게 큰 목적을 암시하는 말을 전하고는 전투가 끝난 후 처음에 약속한 것처럼 새벽이 오기 전에 죽음을 맞는다. 그녀는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 예전 시즌에 잠시 드러난 것처럼 아주 늙은 노파라는 실제의 형상으로서 사라지는데, 이 시리즈의 원작에서 얼음과 불로 상징되는 두 축에서 불을 대변했던 그녀가 대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마치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듯 그녀는 스타니스의 편에서 싸우기도 하고, 존 스노우를 되살리기도 하다가 죽음의 부대를 막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역시 이 에피소드의 결말을 책임진 아랴에 대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녀는 전투 초반에 멀뚱멀뚱 있다가 화살이나 몇 번 쏘는 소극적인 전투원이었다. 그러나 근접 전투가 시작되자 새로 만든 무기를 휘두르며 실력을 보였다. 그럼에도 죽음의 부대원들의 수는 압도적이라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맞았고 때로 하운드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녀는 파란 눈도 많이 죽일 거라는 멜리산드레의 예언을 듣자 그녀의 역할을 직감하고 사라졌다. 드라카리스로 인한 용의 분노의 화염에도 죽지 않는 나잇킹으로 인해 좌절하던 존 스노우가 나잇킹이 다시 일으킨 새로운 부대원들을 헤치며 브랜을 향해 힘겹게 나아가며 시선을 끄는 사이, 그리고 씨온 그레이조이가 브랜을 호위하며 마지막까지 싸우고 거의 나잇킹을 죽일 뻔하다 최후를 맞이하며 또 시청자들의 혼을 빼놓는 사이에 전투는 브랜을 죽이기 위해 다가간 나잇킹의 순간으로 치달았다. 나잇킹이 등에서 칼을 뽑으려는 찰나 아랴가 어디에선가(어디에 숨었던 것인지 모른다!) 날아들어 나잇킹을 칼로 찌르려는데 나잇킹이 눈치채고 아랴를 나꿔채서 그녀의 계획은 수포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손에서 칼을 놓고 아래 쪽에 있던 다른 손으로 칼을 잡고는 나잇킹을 찔렀고 그렇게 죽음의 부대는 소멸된다.

이 전투에서 많은 캐릭터들이 최후를 맞이했다. 조라 모몬의 죽임이 가장 큰 캐릭터의 최후가 되겠고, 당찬 캐릭터로 많은 사랑을 받은 리아나는 무려 거인을 죽이면서 함께 죽었다. 그 외에도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많이 등장했던 캐릭터들이 죽었고, 다행히 고스트는 죽지 않았다(4편 예고에 등장하므로).

다른 전투의 근접씬도 그렇지만 드래곤들의 전투도 워낙 정신없는 화면 전환 때문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구름 위에서 벌인 전투 씬은 볼만했다. 나잇킹에게 넘어간 드래곤은 막판에 죽은 게 확실하고, 대너리스이 드래곤도 살아있는데, 존 스노우가 탔던 드래곤은 어떻게 되었는지(예고편에 등장한 듯도 하다) 궁금하다. 여하튼 어마어마한 CG 비용으로 출연이 제한되었던 드래곤들은 이번 편에서 많이 등장했다.

다음 편에서는 써씨가 지배하는 킹스 랜딩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진 것이 암시된다. 남은 편수를 감안하면 역시 1시간이 넘는다지만 다음 편에서 모든 것이 결론이 나지는 않을 것 같다. 아마도 전투가 벌어진다면 두 편은 필요하지 않을까?

지난 에피소드들에서 분명히 드러났지만 왕좌의 게임은 의외로 매우 여성의 역할이 부각되는 드라마가 되었다. 킹스 랜딩은 써씨가, 북부는 산사가 그리고 모든 왕국을 지배하겠다는 대너리스까지 여성 군주들이 두드러진다. 물론 가장 강력하게 왕좌를 주장할 수 있는 인물로서 존 스노우, 즉 에이곤 타르가르옌이 권력을 내키지 않아하지만 남아있긴 하다. 매드 킹보다는 훨씬 나은 대너리스이기에 그녀의 지배가 나쁠 것 같지는 않지만 일곱 왕국을 모두 지배해야겠다는 그 욕망은 북부의 자치를 원하는 산사와 충돌했기에 갈등의 소지가 크다. 개과천선한 제이미가 래니스터 가문의 새 지도자가 된다면 평화적이고 분권형의 왕국 배치가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의 부대가 거의 윈터펠을 점령하고 모든 산 사람을 없애기 직전인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헛된 구상처럼 보였다. 이 참사 후에 살아남은 자들이 곧바로 권력을 위한 전투를 벌이는 것은 전혀 아름답지 않지만 그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한계이자 어떤 본능과 같은 것이라고 이 쇼는 말하는 것인가. 누군가 왕좌에 앉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끝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비록 이 왕좌의 게임은 곧 종영을 해야하지만.

2019년 2월 26일 화요일

아카데미 시상식, 콜드 워, 그린 북, 트루 디텍티브 시즌 3

연례행사인 아카데미 시상식이 지나갔다. 어제는 다른 볼 일이 있다보니 시상식을 라이브로 보거나 소식을 곧바로 확인할 수 없었다. 예전처럼 작품상을 엉뚱한 작품에 수여할 뻔한 사고도 없었고, 워런 비티가 다시 나오지도 않은 모양이다. 대신 로마는 이번에도 주요 부문의 상을 받아갔고, 10개의 후보가 되었다는 더 페이버릿은 여우주연상만 받아갔다. 가디언에서는 시상식 전에 거의 글렌 클로스의 수상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기사를 냈던 바 있지만 실제로는 올리비아 콜먼의 수상으로 끝났다. 이전에 골든 글로브, 바프타 등에서 계속 올리비아 콜먼이 받았는데 왜 글렌 클로스의 수상을 점쳤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처음 아카데미에서 후보로 오르고 삼십 몇 년을 기다렸다는 글렌 클로스는 이번에도 수상하지 못 했다.

놀랍게도 라미 말렉은 이번에도 남우주연상을 받아갔고, 가장 논란이 된 것은 그린 북의 작품상 수상이다. 가장 마지막에 수여되어 시상식 최고의 영예로 간주될만한 부문에서 그린 북이 수상한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이 되었다.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백인 구원자'라는 흔한 소재라는 점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돈 셜리 친척 쪽에서 문제를 삼기도 했고, 무엇보다 토니 발레롱가의 아들이자 각본에 참여한 아들 닉이 이슬람 혐오 트윗을 했던 전력이 문제가 되었다.

영상이 아닌 사진 한 컷으로만 접했지만 레이디 가가와 브래들리 쿠퍼가 피아노에서 얼굴을 맞대고 어 스타 이스 본의 노래를 부른 장면은 트위터에서 많은 구설에 올랐던 모양이다. 이 영화는 많은 상을 받을 것 같다는 예상이 많았지만 이번 시상 시즌에서 거의 레이디 가가 정도만 상을 받고 말았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최종 단계에서 외국어 영화 후보에 오르지 못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만비키 가조쿠나 파벨 파블리코브스키의 콜드 워조차도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에 수상의 영광을 양보해야했다.

콜드 워는 폴란드 출신 감독 자신의 부모님 이야기다. 부모님이 젊은 시절 침대에서 뒹구는 장면을 연출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법도 하지만 이 남녀의 사랑은 평범하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와 같은 관계로 시작된 이 둘의 만남은 베를린, 크로아티아, 파리, 폴란드를 거치며 많은 굴곡이 있었다.

김혜리 기자의 평가에서 좋은 포인트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는데, 이 둘이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지위가 변하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최종적으로 남자는 고문으로 인해 손이 망가져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없게 되고, 여성은 폴란드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차지한다. 막판의 장면들로 보건대 여성은 다른 남성과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은 듯 했는데, 그렇지만 이 두 남녀는 기어이 결혼을 한다. 그렇다면 파블리코브스키 감독은 언제 태어난 것인가? 혹여 감독의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니라 다른 남성이었던 것인가 궁금해졌다. 만약 어머니가 이미 다른 남성과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것이라면 어머니가 이후의 삶에서 이전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없었을 터인데 영화는 많은 것이 생략되어 그런 부분은 그저 궁금해할 따름이다.

냉전의 시대에 자유 세계에 살았던 사람에게는 공산 세계의 삶을 잘 상상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감독의 어머니가 자유의 상징과 같은 공간인 파리에서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 돌아간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 자신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지옥같을 수 있음도 생각해본다.

논란의 영화 그린 북에 대해 한국에서는 평이 좋은 것 같다. 너무 영리하고 치밀하다는 평가도 들어봤는데, 영미권에서는 여러 논란 때문에도 그렇고 작품 자체에 대해서도 전형성을 얼마나 벗어난 것이냐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들이 많았다. 결국 돈 셜리 입장이 아니라 토니 발레롱가 쪽의 시각에서 재구성한 이야기이다보니 토니가 미화되었을 것이다.

마허샬라 알리가 연기한 돈 셜리는 피아노 연주를 하며 백인 상류사회에서 섞일 수 있는 입장권은 갖고 있지만 미국 남부 지역에서는 자신이 연주하는 장소에서조차 식사를 할 수 없는 웃긴 상황을 마주한다. 그는 그런 상황을 알면서, 그린 북에 나온대로 흑인 전용 시설을 이용해야함을 알면서 그런 흑인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그 투어를 견뎌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케네디와 킹 목사의 시절의 남부는 큰 변화가 시작되는 시점이었고, 돈 셜리의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런 노력들이 많은 기여를 했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마허샬라 알리는 며칠 전 종영한 HBO의 시리즈 트루 디텍티브 시즌 3의 주연이기도 했다. 이 시리즈가 시즌 1의 강렬한 인상 이후 시즌 2의 상대적인 폭망(?) 이후에 시작되어 많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낳았는데 다 끝난 후에 나쁘지 않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겠다. 이번에는 레딧에서 많은 설들을 읽지 않았기에 중반에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의아한 적도 많았지만 시즌 피날레는 일찌감치 사건의 전말을 해명하고 나서 이후로도 긴 이야기를 펼쳐보였다.

시즌 1에서처럼 악마같은 범죄자는 시즌 3에 없었다. 불행한 인물들이 있었고, 그들의 실수는 소년의 죽음을 초래했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애매한 한 소녀는 어쨌거나 성인이 되었고 의외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평생을 죄책감에 살았던 한 형사는 이제 아들, 딸 그리고 손자, 손녀 그리고 한동안 멀어졌던 형사 동료이자 친구와 함께 편안한 여생을 살아갈 것처러 그려졌다. 하지만 손자, 손녀가 자전거를 타는 풍경은 시리즈 초반에 범죄의 대상이 된 그 소년, 소녀를 즉각 연상시켜 이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의문에 빠지게 만든다. 한국 영화 써니 때의 리뷰에서도 썼던 것 같지만 아이들의 미래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때 이른 죽음에 이를 수도 있고, 누구보다 오래 살 수도 있고, 사회적 성공 가도를 달릴 수도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그 아이들의 의지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들을 보살필 어른들의 세상과의 작용의 결과일 수 있다.

알리가 연기한 웨인 형사는 베트남 참전 경험이 있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 베트남의 정글로 들어가는 회상 장면인데, 그가 아내에게도 털어놓지 못 하는 지옥도가 펼쳐졌던 모양이다. 노인이 된 웨인은 갑자기 기억을 잃어버리는 증상을 앓고 있는데 이것이 베트남전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노인이 된 상태에서 아주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 때로는 그가 정말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기억상실 상태를 연기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니까 정신이 말짱한데 아닌 척 하는 것인지 애매한 부분도 있었다. 시즌 피날레에서도 그랬는데 나는 그가 죽은 줄 알았던 줄리 퍼셀을 대면하고는 알아본 것으로 이해했는데 미국의 리뷰들에서는 기억상실 상태라 몰라본 것이라는 평가도 많았다. 어쨌거나 그가 과거를 통째로 망각하는 상태는 아닌 이상 어느 시점에서는 줄리 퍼셀이 살아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음을 충분히 인지했을 것이라 본다. 

문라이트에 이어 그린 북으로 최근 몇 년 간 두 번이나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알리는 무슬림이기도 해서 많은 기록을 세우는 중이다. 이번 트루 디텍티브 시리즈로도 수상을 할 수 있으니 그가 앞으로 어떤 작품에 출연할지도 기대가 된다.

2019년 2월 14일 목요일

어느 가족, 더 페이버릿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만비키 가조쿠, 한국 개봉명 어느 가족은 감독의 전작들을 많이 연상시켰다. 예전에 듣기로 감독이 가족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만들지 않겠다며 세 번째 살인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는 다시 가족이라는 소재를 가져왔고 매우 도발적으로 다루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되어 간다에서 가난하지만 아이와 놀아주는 것을 강조한 릴리 프랭키는 만비키 가조쿠에서도 따뜻한 아버지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그의 따뜻함 뒤에 어두운 과거와 비밀이 있었다. 할머니 역할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 여러 번 노모 역할로 등장한 키키 키린이 맡았다. 하지만 영화는 그녀의 유작으로 남았다. 원래도 고령이었지만 영상 속 키키 키린은 정말 병약해보였다. 그녀에게도 비밀이 있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아이와 중년의 남성이 어느 마트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훔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일본 마트에는 CCTV가 없는 것인지 매우 궁금하다!). 그들은 집에 가는 길에 아동 학대를 당하는 것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 아이에게 먹을 것을 줄 요량으로 집에 데려온다. 그렇게 아이는 가족 구성원이 된다.

그 집의 가족은 얼핏 보기에 할머니가 있고, 중년의 부부가 있고, 20살 전후의 젊은 여자가 있고,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 아이와 새로 들어온 미취학 여아로 구성된다. 하지만 사실상 그 누구도 혈연은 아니다. 진실이 드러난 바에 따르면 할머니와 젊은 여자는 일종의 할머니와 손녀 관계이지만 손녀의 부모와 할머니의 혈연 관계가 없다. 중년의 부부는 중심축이라고 하겠는데 일종의 불륜 관계였고 심지어 여성의 원래 남편을 공모하여 죽이기까지 했다. 초등학생 남아와 미취학 여아는 모두 이 부부가 주워온(?) 아이들이다. 이 부부는 사실상 할머니도 주워왔고, 그런 면에서 이 불법의 부부는 불법의 삼대 가족을 생성해냈다.

돈이 부족한 이 가족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돈을 번다. 각자 직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할머니의 경우 할아버지의 또 다른 가족들로부터 돈을 뜯어낸다. 그렇긴 하지만 돈이 부족하다보니 마트 절도를 통해 생활을 이어간다.

어린 아이들은 영화 첫 장면에서처럼 절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자기들끼리 일을 벌이기도 한다. 버려진 아이들은 이 새로운 가족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리를 요구하기 위해 자기 몫의 생활비를 벌려고 생각하고 스스로 절도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영화 후반부의 비극의 시작을 알린다. 린이라는 이름을 새로 부여받은 여아가 무리한 절도를 시도하고 시선을 돌리기 위해 오빠가 아무 것이나(양파?) 들고 도주하다가 고가 도로에서 뛰어내려서 입원한다. 하지만 이 사건을 조사하는 경찰의 질문에 유사 부모는 경찰로부터 도주했고, 아마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의 신고로 아동보호 기관의 조사가 시작되어 이들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린은 학대자인 원래 부모에게 돌려보내졌고, 영화의 결말이 보여주듯 이 생물학적 부모이지만 학대자에 불과한 가족 세계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남자 아이는 아동보호 시설에 보내지지만 유사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그가 범죄자이지만 아버지로 남았으면 하는 심정을 유지한다. 불륜 남녀 중 여성이 모든 죄를 떠안으며 5년의 수감 생활을 시작하는데 그녀는 임신을 할 수 없었던 모양이고 그런 신체적 결함이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온 동기가 되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법적으로 '유괴'였다.

영화에서는 유쾌한 순간들도 많이 그려지고 영화 포스터의 해변 장면이 대표적일 것이다.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에서도 해변 장면이 포스터에 나오는데 이 때는 영화 결말부인 반면 만비키 가조쿠에서 해변 장면은 비극 직전의 하나의 이상적인 시점으로 등장했다. 합법의 테두리에서는 존재할 수 없고, 텔레비전에 충격적인 사건(유괴, 살인, 사체유기 등등)으로 보도될 범죄의 집합체인 이 유사 가족은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되어 간다에서 혈연상 남의 자식을 잘 길러냈던 릴리 프랭키가 이번 영화에서 사실상 같은 배역이었다는 것이 재미있다. 생각해보면 이번 영화는 가슴이 따뜻해지기 보다는 서늘해지는 경향이 더 크기에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세 번째 살인에 이어 더 어두운 이야기를 펼쳐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감독은 이미 파괴된 가족을 복원하기가 어렵다면, 그리고 유사 가족의 형태라도 인간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합법의 범위를 더 넓혀야하지 않겠냐는 질문을 던지는 듯 하다. 치정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범죄를 저지르기 쉽다는 예단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도 있었다. 애초에 가족이 잘 굴러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이제 그러기가 쉽지 않다면 각 가족을 구성하는 인간 개개인의 문제를 넘어선 더 근원적인 원인에 대한 규명도 필요할 것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이자 각종 유명 시상식에서 상복이 터진 더 페이버릿은 사실 전혀 모르고 있었던 앤 여왕의 치세, 18세기 초반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우주연상을 쓸어담는 올리비아 콜먼이 앤 여왕이고, 레이첼 바이스가 말보로 공작부인인 새라, 에마 스톤이 새라의 사촌이자 몰락한 가문 출신의 애비게일 역을 맡았다.

영화의 이야기 자체는 단순한 편이다. 기왕에 앤 여왕의 총애를 받던 새라가 있고, 새로 궁전에 들어와 허드렛일부터 시작한 애비게일이 허브를 이용해 여왕의 병을 치료하는 것을 계기로 점점 여왕의 총애를 얻게 되어 결국 새라를 궁에서 축출하고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는 이야기다. 이 과정에는 동성애가 적극 개입된다. 역사상의 사실로서 앤 여왕이 동성애를 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한다. 다만 소문이 위력을 발휘하던 상황이 영화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어떤 소문, 모함으로서 그런 이야기가 존재했는지도 모르겠다. 극중에서는 새라가 여왕이 자신에게 보낸 적나라한 연애 편지를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인 조나단 스위프트에게 넘겨 스캔들을 일으키겠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아마 그와 비슷한 소문이었을 것이다.

새라의 남편은 말보로 공작으로 그는 처칠 수상의 조상이기도 하다. 당시는 프랑스와의 전투가 진행되었는데 말보로 공작이 전투를 이끌었고, 승전보도 올리는 모양이었고, 궁에서는 토리와 휘그가 본격적으로 대립을 하고 있었다. 새라는 전투 승리를 위해 토지세를 두 배로 올리는 안을 원했고, 토리를 대표하는 할리는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즉 당시의 전세는 지원병이 있다면 영국의 대승이 예상되었지만 국내 정치에서 새라에 반대하는 토리 측에서 토지세 인상을 반대하여 결과적으로 추가 파병이나 군비 지원을 반대하였고 일련의 과정을 통해 새라가 패배하고 영국은 프랑스와 휴전하기에 이른다.

과거의 사건, 더구나 잘 모르는 영국의 어느 시절에 대해 말하기는 어렵다. 영화에서 묘사된 새라는 앤 여왕을 조종하는 실력자인데 그녀의 정책은 전장에 있는 남편을 죽일 수도 있지만 영국의 패권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왕권을 뒤흔드는 존재는 왕정 통치기에 매우 위험할 수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의회를 통한 견제가, 모략의 형태로 나타나긴 했지만 실현된 것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비게일은 새라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앤 여왕은 그녀의 행태가 새라보다 더 추악할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고 아비게일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더 페이버릿이 왜 평단의 극찬을 받는지는 잘 모르겠다. 실제 오늘 아침 가디언에서 한 페미니스트는 유명 여배우 셋이 출연하고 영국의 어느 여왕의 시절을 다루며 여성 동성애 스토리가 있다는 이유로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야하는지 모르겠다며 실망감을 보이기도 했다. 란티모스 감독의 전작들이 블랙 코미디적이면서 괴팍하고 신화적 이야기를 다뤄서 소화하기 어려웠던 반면 이번 영화도 블랙 코미디적이긴 하지만 스토리 자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전혀 없다. 이해를 못 해야 좋은 영화인 것은 전혀 아니지만 스토리에서 어떤 깊이를 발견할 수 있느냐를 생각하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궁 내부의 권력 암투라고 하면 한국의 사극에서 흔하디 흔한 소재이고 여왕이 포함되는 여성 동성애라고 하더라도 새롭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전혀 모르던 시기에 대한 어떤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는 역사 지식의 측면에서는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내용에서는 무엇이 특별했던가. 앞서 말한 페미니스트는 광각 혹은 어안 렌즈의 과다 사용이 시상식을 휩쓰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전작인 한국 개봉명 '킬링 디어'에서도 광각 렌즈가 주요하게 쓰였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여왕의 외로움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라고는 한다.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앤은 17명이나 자식을 낳았지만 아무도 장성하지 못했고, 그 슬픔과 무상함을 영화에서는 17마리의 토끼를 기르는 것으로 표현했다. 아비게일은 실세 권력이 된 후 무도하게도 토끼 한 마리를 발로 잔인하게 밟아보았지만 그것은 그녀의 몰락을 의미했다. 하지만 심한 질환에 계속 시달리는 앤 여왕은 결국 후계자가 없었고, 영국은 하노버 왕조의 치세로 넘어간다. 앤 여왕을 17번 잉태시킨 남성 배우자는 누구였는가? 앤 여왕이 영화에서처럼 동성애를 했다면 그것은 결실없는 양성애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을까? 앤 여왕이 아이가 세상을 떠날 때마다 자기의 일부분도 사라진다고 했는데 이는 매우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고, 그런 면에서 앤 여왕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겨워했던 것이 납득이 된다. 영화의 세 주인공인 여성들은 모두 불행한 결말을 맞을 것이 예고되었고 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 추구의 무상함을 반증하기도 한다.

2019년 2월 11일 월요일

2018 연말의 한국 대작 영화들

최근 씨네21에는 송경원 기자가 쓴, 대자본을 투입하고 2018년 연말에 개봉하여 모두 손익분기점에 크게 미치지 못한 세 편의 영화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글을 읽다보니 영화를 보고 읽어야할 것 같아 영화들을 보고 나중에 기사의 나머지를 읽었다. 송경원의 글은 대개 수긍할만했지만 나로서는 과하게 비판적이라는 느낌이었다.

마약왕은 송강호 원톱 주연 영화로서 송강호에게 절대적으로 기대고 있다. 나도 개봉 전부터 큰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 기왕에 흥행에 실패한 이후 봐서인지 큰 재미를 느끼진 못했다. 작은 밀수꾼이 마약 밀매를 하다가 나중에 제조도 하고, 피맛을 본 이후에는 직접 몸에 뽕을 놔서 마약쟁이가 되고 파멸한다는 이야기다. 우민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이두삼에게서 박정희를 발견한다면 제대로 본 거라고 친절하고 설명하는 걸 읽고 난 후 보니 과연 그러했다. 친절하게 이두삼의 부인을 육영수 여사의 머리 스타일로 변신시킨 장면까지 있었다. 설에 만난 친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이제는 자기가 보수화되었다고 말하는 그는 박정희가 없었으면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들 수가, 그러니까 이런 경제발전의 세상을 만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오랜 친구의 그런 반응은 나를 적잖이 당황스럽게 만들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지만, 이 시점에 박정희 말년에 대한 비판 영화가 적절한 것이냐라는 질문은 던질 수도 있겠다.

아마 영화의 기획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기 전에 이루어졌고, 원래의 박근혜 정권 말기를 겨냥한 영화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파급력도 크고 논쟁도 더 크게 되었을 터이지만 갑자기 시작된 문재인 정부에서 이 영화는 이미 몰락한 박정희 정부와 그의 딸인 박근혜 정권도 과거의 일이 된 상황에서 이들 부녀의 정권이 이렇게 추악했다는 걸 환기시키는 역할 정도에 그쳤다. 이두삼은 직접적으로 박정희와 악수하고 대면하는 위치에 올랐고, 권력의 중요직에 있는 여러 인물에게 뇌물을 바쳤다. 박정희 사후 여러 곳에 전화를 돌리는 이두삼의 수첩에는 여러 권력자들의 연락처가 몇 페이지에 걸쳐 빼곡히 적혀있었다.

후반부의 텅빈 저택에서 엽총을 쏘아대는 이두삼의 광경은 연극적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상당히 길게 묘사된 그 장면에서 감독은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을까?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에만 빠져있는 폭군의 말로?

스윙 키즈는 어떤가. 작년 초에 이런 영화가 올해 개봉한다는 씨네21의 기사에서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탭 댄스를 추는 모임이 만들어진다는 줄거리를 보고 경악했던 기억이 난다. 거제 수용소에서 탭 댄스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 엄청난 거리감은 결국 영화의 설득력을 무너뜨렸다. 강형철의 예전 작품인 써니는 웃음 포인트는 많았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몇 장면 때문에 좋게 평가할 수 없었다. 스윙 키즈는 비극의 장소인 포로수용소에서마저 많은 웃음 포인트를 넣었고 어떤 지점에서는 설득이 될 뻔도 했다.

감독의 인터뷰를 영화를 본 후에 많이 찾아서 읽어보았다. 나로서는 뜨악한 설정은 기록사진에서 수용소에서 탈춤 추는 걸 보고 떠올렸다고 한다. 완전한 판타지는 아니라는 것이고, 영화는 뮤지컬 원작이 있다고도 한다. OK. 영화가 흥겨운 전반부와 광기의 후반부로 급격히 전환되는 이유에 대해 감독은 뻔한 전개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막판 주인공들이 갑자기 죽어버리는 설정에 대해 친구는 B급, C급 영화에서 많이 보던 장면이라 평했다. 하지만 거제수용소의 실제 역사를 감안한다면 감독이 비극의 결말을 제시하며 남북한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의 비극을 환기한다는 그 취지에는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흑인 하사, 가짜 전쟁영웅의 동생인 북한군 포로,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게 들어온 민간인, 뚱뚱한 영양실조의 중국군 포로, 젊은 여성으로 이루어진 스윙 키즈 탭 댄스단은 여러 마이너리티들의 조합이자 전쟁 참전국들이 고르게 포함된 다층적 메타포일 것이다. 결국 이 순진무구한 존재들은 이데올로기의 광기 때문에 비참하게 죽어간다(미국인은 죽지 않는다. 그들이 살인자였다). 감독의 취지는 남북 화해 모드의 현실에서 이 관계가 다시 옛날처럼 전쟁으로 돌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매우 동감하게 된다. 하지만 포로 수용소라는 장소를 그저 용광로 같은 소재로 보지 말고 그 비극성의 역사적 심각함을 생각했어야 한다. 애초에 시작을 말았어야 할 기획이라고 본다.

영화 개봉 초기의 반응은 칭찬 일색이었다. 특히 언론 기사, 리뷰는 거의 하나도 빼지 않고 긍정적이었다. 흥행 참패 이후에서야 150억 투자한 상업 영화 감독으로서 책임감이 없었다는 때늦은 비판이 나오긴 했다. 아이돌 출신 배우의 열연, 새로운 배우들의 발견, 신나는 탭 댄스, 올바른 영화의 취지까지 흠을 잡지 않으려면 장점은 많다. 그러나 보헤미안 랩소디가 역주행 흥행을 하는 상황에서 몰살로 끝나는 영화의 결말은 너무 어두웠던 모양이다. 그 반작용인 것처럼 극한직업이라는 코미디 영화가 지금까지 흥행 싹쓸이를 하고 있다.

PMC 더 벙커는 송경원 기자가 세 작품 중 그나마 후하게 평한 영화였다. 많은 대사가 영어로 처리되는데 새로운 느낌을 준다는 장르적 차원에서는 호의적으로 평할만한 영화였다. 특히 막판에 낙하산 씬과 미사일 씬은 한국 영화에서 이런 것도 볼 수 있구나 싶었다. 아주 짧은 시간을 다룬 이 영화에서 대선 투표일에 출구 조사 결과가 대통령이 인터뷰하는 와중에 실시간으로 급변하는 장면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눈여겨본 것은 하정우가 맡은 배역의 이름인 에이햅이다. 에이햅은 모비 딕의 그 유명한 선장 캐릭터다. 선장, 캡틴. 에이햅이 다리를 잃은 것은 흰 고래 때문이고 그 고래에 대한 집착, 죽음에 대한 집착이 소설의 줄기다. 이 영화가 소설의 에이햅과 같은 것은 한쪽 다리를 잃은 캐릭터라는 점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에이햅이 의족을 한 이유는 낙하산에서 한 명을 더 안고 내려와서이고 이는 죽어가는 동료를 데리고 다녀야하느냐는 영화에서 줄기차게 제기되는 문제와 연결된다. 결과적으로 죽어버리더라도 그냥 놔두면 속절없이 죽을 동료를 살려보겠다는 노력은 해야하지 않겠냐는 것이 영화의 대답이었다. 실제로 영화는 그냥 두면 죽을 북한 의사를 애써 살려내는 것으로 끝난다. 소설 모비 딕이 죽을 것을 알면서 죽으러가는 이야기라면 영화는 노력해도 동료가 거의 죽을 걸 알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살려보는 노력을 해본다는 이야기다.

영화가 복잡하게 돌아가서 미국이 대선일에 서울 하늘에서 미사일을 북한 소행으로 위장해 날리고 막고, 중국이 북한을 먹으려고 하기도 하고, 중국과 미국이 공중전을 벌이는 등 살벌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잘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 모든 소동의 결과 미국 대통령은 재선을 하는 모양인데 한반도는 어떻게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정우는 사실상 미국인이고 이선균은 북한 사람인데 이 사람들이 한국 땅에서 살아남아서 나중에 어떻게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세 영화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남북 관계를 다룬다. 스윙 키즈가 이념 대립의 극한에서 전쟁을 벌이던 과거를, 마약왕은 일본이라는 제3국을 경유한 남북 민간 합작의 한 형태를, PMC는 가상의 미래에 지하 벙커에서의 전투를 그린다. PMC는 굳이 따지면 남한 쪽은 개입을 하지 않는다고 하겠다. 미군과 북한군 그리고 민간 전투 집단들의 조합. 근래에 북한을 다룬 영화는 너무 많다 싶을 정도로 많이 나왔다. 한국 내의 사건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총기를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너무 좋은 소재였을까? 북한을 전반적으로 악마처럼 그리는 경우는 거의 없는 듯 하지만 언뜻언뜻 드러나는 실제 북한의 모습과 영화 속의 그 모습들은 얼마나 닮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떤 가상의 전형을 만들어 놓고 답습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도 된다.

더 와이프, 보헤미안 랩소디

이제 BAFTA까지 지나갔고 주요 시상식이자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아카데미 시상식만이 남았다. 2018년의 영화에서 주요 부문의 상은 쿠아론 감독의 로마와 란티모스 감독의 더 페이버릿이 나눠갖고 있다. 작품상은 아직까지는 로마의 독주다. 여우 주연상은 더 페이버릿의 올리비아 콜먼이 거의 독차지하고 있다. 올리비아 콜먼의 필모그래피를 보니 내가 보고는 싶었지만 못 본 작품이 대부분이라 얼굴이 익숙치 않다. 콜먼과 여우 주연상을 다툴 또 다른 배우는 바로 더 와이프의 글렌 클로스였는데 아직까지는 밀리고 있다.

더 와이프는 영화 말미에 중요한 반전 혹은 비밀이 드러나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가만 생각하면 그러한 감춰진 진실은 미리 짐작할 여지들이 많은 편이기도 하다. 제목부터가 더 와이프로 영화에서 노벨문학상을 받는 그녀의 남편이 주인공이 아니다. 카메라도 이상하리만치 글렌 클로스를 많이 잡는다. 그래서 진실을 알고 있는 부인이 영화 스토리상의 기괴한 역설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계속 살펴보는 것이 영화의 핵심이라 하겠다.

글렌 클로스는 아마 좋은 배우이겠으나 이전 작품에서 그녀를 눈여겨본 기억은 없다. 아주 오래전 그녀가 젊은 시절의 영화에서는 어떤 시각적 만족을 주는 배우 정도로 여겼을까? 그녀의 출연작을 별로 본 것 같지도 않다. 이번 영화 더 와이프는 영화의 스토리도 단순하지만 흥미롭게 논할 지점도 있었고 글렌 클로스의 연기도 칭찬할만했다. 글렌 클로스의 젊은 시절은 연기한 배우는 어딘가 눈에 익었지만 사실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내가 닮았다고 생각한 배우는 다운튼 애비의 셋째 딸 역할의 배우였다.

골든 글로브에서 라미 말렉이 남우주연상을 받았을 때는 언론의 반응이 완전히 납득하겠다는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제 그는 BAFTA에서도 같은 상을 받았다. 영화 자체로는 평단의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보헤미안 랩소디였지만 프레디 머큐리를 연기한 라미 말렉은 실존 인물과 외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칭찬을 받은 편이긴 하다. 과연 아카데미에서도 상을 받을까? 나는 그가 주연한 드라마 미스터 로봇으로 너무 익숙한 배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몰랐던 사람이 훨씬 많았던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워낙 많은 관객을 모은 영화고, 그래서 급조된 자칭 올드팬도 양산되는 모양인데 나는 퀸 노래를 이래저래 오래 전부터 들어는 봤지만 테잎이나 cd를 산 적도 없었다. 아주 어릴 적에는 보헤미안 랩소디의 희한한 뮤직 비디오에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고, 20대에 일본 드라마 주제가로 이런 노래도 있었나 알게 되기도 하고, 히스 레저의 더 나이츠 테일에서 시대에 안 맞는 위 윌 락 유를 접하는 정도의 기억?

영화는 요즘 많이 다뤄지는 남성 동성애가 주요한 소재로 쓰였고, 한 단어로 말할 수 없는 머큐리의 출신 성분의 복잡함에도 '파키'로 불리며 차별당했던 인종차별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낸다. 그의 노래에 넋놓고 좋아하는 여자친구나 팬들의 표정은 너무 단조롭다는 느낌을 주지만 당시에 영국에서라면 그런 사람들이 많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든다.

2019년 1월 10일 목요일

플로렌스 퓨,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문득 최근에 본 '리틀 드러머 걸'의 여주인공을 어디에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찬욱 감독이 만든 존 르 카레 원작의 이 드라마는 마이클 섀넌과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라는 유명 배우가 출연했지만 주인공인 여배우는 처음 보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본 적이 있는 얼굴 같았고, 그 이전 작품은 레이디 맥베스가 아닌가 싶었다. 검색해보니 정말 그러했다. 그녀의 이름은 플로렌스 퓨.
  리틀 드러머 걸에서 극중 역할이 배우이면서 스파이로 활약하는 것인데 그녀의 거침없는 행동, 연기는 레이디 맥베스에서 그녀의 배역을 생각하면 매우 납득이 갔다. 그녀의 출연작은 아직 많지 않은데 거의 주연으로 출연했고 앞으로도 여러 작품이 공개될 예정이다.
 레이디 맥베스는 제목에서부터 직접적으로 맥베스와 연결점이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마담 보바리와 유사성도 있다. 맥베스를 생각하니 최근에야 감상하게 된 넷플릭스의 대표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즈도 맥베스에서 따온 듯한 설정이 있다.

 소문의 일본 영화인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과연 훌륭했다. 딱 보면 저예산인 것이 분명한 조잡한 화면의 영화이지만 그 시도 자체는 확실히 칭찬할만했다.
 표면적으로 네 겹의 이야기가 겹쳐진 설정, 소설로 치면 액자 소설 같은 그러나 액자라고 하기는 애매한 중층의 서사 구조는 단순한 설정에 지친 사람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을 것 같다.
 1차적인 차원, 바로 영화 시작 부분에서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좀비 주제의 공포 영화 장면이 진행된다. 그러나 곧바로 영화감독이라고 주장하는 캐릭터가 배우들의 연기를 지적하며 더 실감나게 하라고 다그친다. 즉 처음부터 영화의 이야기가 이중적임이 드러난다. 처음 등장한 여자, 남자 캐릭터는 사실 영화 속의 영화의 배우들이다.
 좀비 영화 촬영 현장의 애환이 이어지더니 갑자기 영화 세트 밖에서 진짜 좀비가 나타나고 영화 스태프들이 차례차례 좀비로 변하며 여주인공을 제외한 모두가 좀비가 되거나 사망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렇게 1차적인 이야기가 종료되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이어서 1개월전으로 시간이 거슬러올라간다. 먼저 이야기에서 영화감독 역할로 출연한 배우가 실제 현실에서 영화 감독이었음이 드러나고 그가 생방송으로 좀비 영화를 찍기로 결정되는 과정이 펼쳐진다.
 이야기는 또 한 번 전환되는데 영화 감독에게 아내와 딸이 있음이 드러난다. 그런데 아내는 1차적인 차원에서 출연했던 배우였다. 딸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영화 스태프를 직업으로 갖고 있다. 아내와 딸은 각기 다른 동기로 영화감독이 만들게 된 생방송 좀비 영화의 각본을 달달 외우게 된다. 영화 제작 과정, 특히 저비용 영화에서 흔히 그렇듯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촬영 전 준비과정부터 그랬는데 실제 촬영일에 위기는 절정에 이른다. 두 명의 출연 배우가 나타나지 못하며 영화감독과 그의 아내(그녀는 예전에 배우였으나 너무 배역에 몰두하여 다른 배우의 팔을 부러뜨린 후 연기를 그만두었다)가 대신 연기를 하게 된다. 영화 속 감독이 자신의 영화의 배우로도 출연하는 것이다. 좀비 역할을 맡은 사람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고, 카메라 담당은 갑자기 허리가 망가져 카메라를 들지 못하고, 영화 스태프 역할을 맡은 배우는 물을 잘못 먹어 설사를 한다. 그러나 생방송을 위해 영화는 계속 촬영된다.
 첫번째 좀비 배우가 술에 취하자 감독이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는 위치에서 그의 몸을 움직여서 연기하도록 만든다. 감독의 소위 디렉팅이라는 것을 매우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만한데 사실 1차적 차원에서 이 좀비가 매우 실감났다는 것이 참으로 역설적이다.
 감독의 아내는 오래간만의 연기자 복귀 자리에서 뛰어난 연기력과 순발력을 보였지만 나중에는 의욕이 넘치다못해 폭주하여 영화 자체를 망가뜨리게 된다. 그러자 그녀를 기절시키며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깨어난 그녀는 다시 영화에 등장하여 처음 그 장면을 볼 때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세번째 이야기 구조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은 감독의 딸이 펼친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배우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영화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생방송으로 돌아가는 원 컷 영화의 촬영과정에서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해결책을 제시했다. 사실상의 감독이 된 것이다. 클라이막스는 마지막 장면인데 이 장면을 찍기 위한 장비가 고장나자 그녀는 인간 피라미드를 쌓아서 그 장면의 촬영을 가능하도록 만든다. 이 지점은 사실 감동적이기까지 한데 왜냐하면 어린 시절 젊은 아빠가 꼬마인 그녀를 목마를 태우는 사진 한 장에서 딸이 영감을 받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전 장면에서 어린 시절 딸 사진을 보며 통곡하던 아버지, 감독이 나왔던 바, 자신과의 사진을 촬영 현장에 갖고 온 아버지에 대한 딸의 고마움이 영화를 무사히 끝마치는 원동력이 된다.
 이렇게 영화는 끝이 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영화의 촬영 장면들이 또 다른 카메라에 의해 찍힌 것이 보인다. 여기서의 장면은 조금 전까지 배우들이 영화 스태프로서 좀비 영화를 찍는 것과 다르다. 이전에는 영화 속 감독과 스태프가 생방송 영화 촬영 및 상영이라는 좀체 있기 어려운 작업을 해내는 과정이 드러났지만 기실 그들이 찍은 영상이 영화 첫 부분의 1차적 차원의 영화가 아니었다. 실제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라는 이 영화의 촬영 스태프들이 1차적 차원을 찍은 것이고, 세번째 단계의 영화 촬영 장면은 이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촬영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아마 정확한 설명을 위해서는 각 차원과 인물들에 대해 번호를 매길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내가 적은 것이 영화를 보지 않은 누군가에게 오해없이 전달되리라는 자신은 없다.
 영화에는 많은 카메라와 모니터 혹은 TV 화면이 등장한다. 영화를 실제 만드는 배우와 스태프 이외에 제작자, 시청자까지 다층적인 인물들도 있다. 배우를 찍는 카메라를 또 촬영화고 있는 카메라를 다시 촬영하는 카메라의 복잡한 구성도 있고, 영화에서 감독 역할을 맡은 배우는 순전히 소품으로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진지한 연기를 주문하고 카메라를 멈추면 안 된다고 외친다.
 방송사와 제작자는 비교적 영화 작품 자체에 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생방송으로 촬영되어 공개되는 영화라는 모험을 하지만 감독 선정부터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던 것이 드러나고, 영화의 전개가 몇 차례 이상해지더라도 크게 신경쓰지 않거나 그냥 중단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 속 감독과 배우인 아내, 그리고 큰 역할을 한 딸은 매우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진지하게 이 허술한 좀비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해낸다.
 엔딩 크레딧의 영화 스태프들이 열심히 뛰어다니며 영화를 찍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그 열정과 진지함을 생각하면 이 영화는 영화를 만든다는 행위의 진지함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인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진지함에 있어 배우보다는 감독이나 스태프들이 더 강조되고 있기도 하다. 마지막 인간 피라미드 장면에 이르면 배우, 스태프, 제작자가 모두 혼연일체가 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데 이를 보는 관객도 헛웃음도 짓다가 따뜻한 감동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