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3일 일요일

간만의 스포츠베팅

얼마나 쉬었던가. 얼마 되지도 않는 베트맨의 예치금이 거의 떨어진 후 미련없이 베팅을 그만두었다. 스포츠를 나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해질 만큼 마이너스 행진이었다. 그나마 거액 베팅은 하지 않아서 그냥 몇 달 잘 놀았다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스포츠엔 별로 관심도 없어보이던 후배 녀석이 최근에 프로토를 좀 한다기에 자극을 받았나 보다. 문득 베트맨에 다시 예치금을 충전하고 간만에 베팅을 해 보았다. 시즌 초반의 광란이 지났기에 이번에는 그나마 안정적이고 예측가능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낙관을 하며.

토요일밤 경기를 보다 피곤하여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아침에 벌떡 일어나 경기 결과를 떨리는 마음으로 기대에 가득 차 천천히 본다. 이게 왠일인가. 리버풀부터 비겼단다. 아니 첼시까지? 리버풀은 조금 불안한 감이 있어 하나밖에 베팅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첼시까지 비길 줄은 몰랐다. 그나마 맨유가 비긴 것은 예상했던 바이지만 무득점 무승부일 줄이야.

현재까지 결과를 보니 모두 무승부인 2조합 한 개가 맞았고, 3조합 한 개는 두 개가 맞은 상황에서 내일 남은 경기 결과를 지켜봐야한다. 3조합까지 맞으면 약간 이득을 보고, 틀리면 4천원 정도 손해를 보는 형국이다.

간만에 한 이번 베팅이 주는 교훈은 국대 주간을 간과하지 말라는 것이다. 리버풀에 베팅할 때는 주전들의 부상이나 피로를 감안했는데 다른 팀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분석없이 거의 흐름에 대한 감만으로 베팅을 했는데 아주 빗나가지는 않은 것이 다행스럽긴 하다만. 프리메라나 세리에 쪽의 결과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는다. 역시 마구잡이로 베팅을 하는 것은 내 돈을 그냥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2008년 8월 30일 토요일

코드 블루 제9화의 백미

"팔은 ... 꼭 이을께"

"내 팔 어딨어?"

3분기 드라마 중 가장 스타들이 많이 출연하여 한껏 시청자들의 기대를 높였던 코드 블루. 그러나 기대는 금세 실망으로 바뀌었고, 위급한 환자를 헬기로 옮기는 의료 현장의 긴박감은 그다지 전달되지 않는다. 너무 진지해진 야마삐는 연기 변신을 제대로 못 한 것인지 기존의 가벼운 이미지가 강렬해서인지 시청률 상승 요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 라이어 게임으로 바까쇼지키나 캐릭터에 딱 맞음을 보인 토다 에리카는 비중도 높아 보이지 않고 야마삐처럼 캐릭터 변신이 힘겨워 보인다. 아라가키 유이는 그나마 성실한 이미지를 그대로 이어가는데 임팩트는 약하다.

사공이 너무 많은 이 드라마는 갈 길을 잃었고, 이 젊은 견습의들을 지도하는 야나기바 토시로의 팔 절단은 드라마 내용은 물론 시청자들의 절망감도 함께 표현하고 있다. 팔은 꼭 이어보려고 하는데 겨우 이어놓았을 뿐. 야나기바가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외친 자기 팔이 어딨냐는 외침은 드라마의 운명과 일치한다. 사공이 많은 드라마가 항상 실패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잘 융합되지 않는 젊은 의사들의 행보와 드라마 한 편을 꾸려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넣는 구구절절한 환자들의 사연은 잘 연결되지 않으며, 그저그런 메디컬 드라마가 하나 추가되었구나 싶은 씁쓸함만이 남는다.

비극적이지만 허탈한 웃음만 나는 사진 속의 장면처럼.

2008년 8월 27일 수요일

베이징 올림픽의 끝

일요일에 끝난 올림픽이 벌써 한두 달 전의 일처럼 느껴진다. 국제 유가는 하락세를 멈추고 다시 조금 올랐으며, 중국 경제는 올림픽 기간에 오히려 더 안 좋아졌고, 한국 경제는 주가의 꾸준한 하락과 급등하는 환율로 요약된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13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자랑스러운 태극전사들은 금의환향했다. IOC는 공식적으로 국가의 순위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메달 수의 정확한 집계를 위해 메달 순위를 기록한다. 본래 의미야 어찌되었건 한국은 목표로 했던 10-10을 초과하여 금메달 13개, 세계 7위라는 성과를 거둔다. 10+10=13+7. 지독한 우연인가.

한국은 이상한 나라다. 원래 스포츠 강국이지만 자국 개최를 등에 업고 세계 1위에 오른 중국을 제외하면 10위 안에 있는 국가 중 유일하게 전체 메달 중 금메달의 비율이 가장 높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세 종류 메달의 비율이 비슷하거나 가장 따기 힘든 금메달의 비율이 제일 낮아야 한다. 은메달을 따고도 처절한 눈물을 흘리는 한국 스포츠계의 풍토 때문일까. 우리 선수들은 유난히 금메달에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했던 것이리라.

메달 순위 세계 10위 안을 보면 흔히 선진국이라 부르는 혹은 강대국의 경험이 있는 국가들이다. 중국, 미국, 러시아, 영국, 독일, 호주, 한국, 일본, 이탈리아, 프랑스. 묘한 경쟁 의식을 가지게 되는 일본이 지난 대회 5위에서 8위로 변한 것이 눈에 띈다. 이래저래 한국은 자랑할만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이 글을 쓰게 된 주된 동기는 영국의 순위 때문이었다.

영국의 BBC는 영국의 올림픽 선수단의 환영식을 중계했다. 방송 자체를 아직 보진 못했지만 그런 게 있었던 건 확실하다. 한국의 경우도 기를 들고 앞장선 박태환, 장미란 등 금메달을 딴 선수를 중심으로 환영식을 열었다. 잠깐 보니 트로트, 댄스, 인순이 누나 등 온갖 장르를 넘나드는 가수들의 축하 공연이 있었고, 금메달 딴 선수들은 개인기를 선보였다. 국민대축제란다. 많은 네티즌들은 이런 행사를 왜 하냐, 지금이 80년대냐라며 불만을 표현했다.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수많은 근대 스포츠의 발상지이자 선진국인 영국에서도 내용은 다를지라도 환영식을 한단다. 영국에서 전통적으로 이런 행사를 계속 했다면 할 말이 없지만, 이번에 특별히 하는 거라도 쳐도 이해할만하다. 메달 순위 4위이기 때문이다. 한국 방송의 올림픽 중계만 봐서는 중국이나 미국이 금메달 따는 건 봐도 영국 금메달은 거의 못 본다. 어디서 그렇데 메달을 획득했을까 싶어 찾아보니 사이클에서 무려 8개. 요트, 조정, 수영 등 물 관련 스포츠에서 8개를 땄다. 얘네도 메달 편중이 참 심하구나 싶다.

5위를 한 독일은 카누, 승마, 펜싱, 근대5종, 트라이애슬론 등 한국에서 안 보여줄만한 종목들에서 많은 금메달을 얻었다. 재미를 잘 느끼지도 못하는 종목에서 선전했던 영국, 독일의 선수들의 경기 장면을 보여주지 않은 한국 방송의 중계 행태를 비난하자는 건 아니다. 자기들 유리한 종목에 많은 메달을 만들어 놓고 동양인이 유리한 종목은 메달 수를 적게 제한하는 있는지없는지 모를 차별을 규탄하자는 것도 아니다.

올림픽이 세계 평화와 인류의 화합을 위해 개최된다는 취지와 아주 작은 성과를 인정할수밖에 없지만 결국 국가 중심의 경쟁은 화합보다 큰 갈등의 씨앗이 되기에 경계해야 한다. 올림픽 메달 순위라는 것이 가볍게 볼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한국은 올림픽 메달이라는 것이 거의 모든 운동 선수들의 최종 목표가 되어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TV를 응시하면 자기 몸을 혹사하는 인간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펼쳐진다. 스포츠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다. 몸은 붕대투성이가 된다. 이건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다. 국가는 운동선수를 메달을 따는 기계로 만들어버린다. 메달에 너무나 집착하는 한국이기에 운동기계는 수시로 새 기계로 대체된다. 선진국에 급하게 도달하려는 국가의 비극이리라. 10대신 13을 얻은 이번 올림픽은 다음 올림픽 메달 수에 대한 부담을 낳아 한국 체육계에 불행한 미래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2008년 8월 24일 일요일

귀화 선수

단지 깨끗하게 잡힌다는 이유로 YTN FM을 즐겨듣는다. 9시가 넘으면 MLB 전문가로 유명한 송재우가 스포츠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오늘은 스포츠 평론가 최모씨(성함을 기억할 수 없다-_-)가 귀화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당예서의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탕나라는 이름이었던 당예서는 19세에 한국으로 건너와 작년에 한국 국적을 얻어 이번 올림픽에 한국 대표 선수로 탁구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자오즈민의 권유로 한국에 왔다는 새로운 정보를 얻기도 했다.

그녀는 탁구라는 종목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었으나 선수풀이 너무나 커서 경쟁의 치열함이 상상을 초월하는 중국에서 꿈을 이루지 못해 한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통해 올림픽 동메달을 땄다. 한국에서만 20대 초반을 포함하여 8년의 세월을 견뎌내며 얻어낸 메달. 시상식에서 눈이 빨개지고 부었다고 한다.

방송에서는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경쟁하는 국제경기 무대-이번엔 베이징올림픽의 경우에 한정했지만-에 귀화 선수를 보는 것이 흔치 않음을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인정한다. 다만 상업적 이익을 위해 국적을 간단히 바꾸는 선수들의 사례를 열거하며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결국 당연한 소리만 나왔다. 한국 탁구 전력을 상승시킨 당예서를 비난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호주와 일본으로 국적을 바꿔 양궁 경기에 나선 전 한국인들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 비난의 화살이 날아갔다.

국적을 바꾸는 것은 법적인 절차지만 개인 차원뿐 아니라 국가적 일이기도 하다. 외국의 뛰어난 선수에게 적지 않은 돈을 쥐어주면서 자국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운이 좋으면 귀화한 선수가 쉽사리 메달을 안겨줄 수도 있다. 축구계는 중동 국가들이 넘치는 오일 머니로 남미의 선수를 말그대로 사들인지 오래다.

국가가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자신이 국가에 무엇을 기여할 수 있는지 생각하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국가가 아무 도움이 안된다면 다른 대안을 생각하는 것도 개인에겐 합리적인 선택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요즘의 합리성은 금전적인 부분에서 크게 발휘되고 있으며, 스포츠계에서 최고가 되려는 선수들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부를 통한 향후의 안정적인 삶에 대한 희망과 무관하지 않으니 돈 있는 국가들이 우수한 선수를 사들이는 일이 더욱 증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큰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는 않다. 귀화를 선택하려는 선수의 측면을 보면 외국에서의 삶에 적응해야하는 어려움이 있다. 국제적인 경쟁력이 없다면 귀화를 한 나라의 지원이 장기간 이어질리도 없다. 한국에 메달을 안겼음에도 온갖 악성 루머에 시달리는 당예서를 봐도 새 국가의 기존 국민들이 곱게 보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외국 선수를 받아들이는 국가의 입장을 보자. 우선 큰 자금을 투자하면서 받아들이고 싶은 선수의 수가 많지 않다. 또 일례로 중국의 탁구 선수가 넘쳐난다고 쳐도 한국에서 데려오는 수는 1, 2명에 그칠 수밖에 없다. 어차피 국제대회에 출전가능한 대표팀 선수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개인적 차원에서 직면하는 문제는 국가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느날 갑자기 외국인에서 같은 국민이 된 부자 선수에 대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이질적인 선수가 정말 같은 국민인지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절차와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국제대회에서의 좋은 성적을 최우선하는 국가의 자연스러운 욕망과 별도로.

결국 귀화 선수를 두고 벌어지는 수요와 공급 관계는 극히 한정된 시장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귀화 선수를 국제대회에서 목격하는 일이 늘어날 수는 있고 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국가라는 틀에 대한 집착이 지속되는 한 국제스포츠계에 만연한 일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2008년 8월 23일 토요일

글쓰기의 어려움

개인의 지식이 얼마나 제한적인 범위에 머무르고 마는가를 여실히 느끼는 요즘 글을 쓴다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 일본의 소설가들은 그냥 살기 위해 다작을 한다는데 그네들의 학계도 비슷한 것 같다. 최소한 번역 분야에 있어서는.

억지로 읽지만 그런대로 얻는 것은 있는 방법론 도서를 보다보니 아무리 좋은 생각이 있어도 내놓아야 의미가 있다는 말이 있었다. 글을 쓰고 깨지고 하는 것이 자신의 학문의 발전을 위한 당연한 절차일텐데 요즘은 (나도 그렇도 다른 사람도) 글을 쓰고 나서의 비판이 두려워서인지 글을 잘 내놓지 않는 것 같다.

학계에 내놓는 논문도 아닌데 블로그에 글쓰기는 왜 이리 안 했던지. 그냥 머리가 무겁다. 추워진 날씨 탓도 있겠고. 베이징 올림픽에 대해서 할 말이 몇 가지 있었지만 다음 달이나 되어야 쓸 수 있을 것 같다.

2008년 7월 30일 수요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화려한 캐스팅과 믿을만한 감독이 만든 놈, 놈, 놈. 칸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후 2008년 7월 드디어 국내에서 개봉했다. 호의적인 평가가 많지만 별로라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어제 영화를 보기 직전 내 주변 사람마저 영화를 보며 잠깐 졸았다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나는 배우와 감독만 믿고 영화평, 영화 정보는 일체 보지 않은 채 관람을 했다.

주인공은 송강호?

영화가 시작하고 조금 후 하늘에서 새가 한 마리 날고 옆에 송강호라는 이름이 나왔다. 정우성, 이병헌 이름이 나왔던가 싶었다. 영화 제목은 분명 '좋은 놈', '나쁜 놈'에 이어 '이상한 놈'이 나오는데. 조금 후 다른 배우들의 이름이 나온다. 영화는 세 명 배우의 쓰리톱 체제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송강호야말로 주인공인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씨네21의 김지운 감독 인터뷰를 보니 그런 생각이 더 강해지게 된다.

'멋'의 기준은 개인차가 있겠으나, 언제나 홀홀단신으로 그야말로 웨스턴에서나 나오는 복장으로 장총을 정확하게 쏴대는 정우성은 멋있는 놈이다. 이병헌은 잔인한 캐릭터지만 총, 칼을 가리지 않고 최고의 기술을 선보인다는 측면에서 멋있다. 반면 송강호는 이전 영화들의 역할과 유사하게 이번에도 그다지 뛰어난 재능은 없으면서 실수를 연발하여 관객의 웃음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태구 역할을 맡은 송강호는 이상하고 웃기는 놈이지만 멋있는 놈은 아니다.

김지운 감독은 영화에 대한 많은 기대와 실망감에 대해 오락 영화로 봐달라는 주문을 했다. 오락 영화는 재미있어야 한다. 스펙터클이건 액션이건 코미디건. 이병헌이 멋있지만 창이 역할이 전면에 나섰다면 영화는 잔혹하게 흘렀을 것이다. 정우성도 멋있지만 이 친구는 당체 무슨 동기로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다. 원한 관계가 원래 있었는데 영화에서는 뺐다고 하고, 영화에서 독립군과 약간의 연결점이 있고 막판 일본군 살해 장면이 있어 애국심이라는 단서는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런 동기는 너무 미미해서 마지막까지 봐도 정우성도 꽤 이상한 놈으로 비춰진다. 그러기에 영화의 재미를 유지하는 상당 부분은 송강호가 이끌어야했고 이점으로만도 그가 진정한 주인공의 자격을 갖췄으리라.

영화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캐릭터가 얼추 딱 정립된 것처럼 보이면서도 캐릭터의 통일성이 불안하기 그지없다. 좋은 놈은 이상하고, 나쁜 놈은 좋았던 시절이 있는 것 같고, 이상한 놈은 좋은 면이 꽤 많지만 예전에는 유례없는 악한이었던 것 같다. 손가락 귀신에 얽힌 이병헌과 송강호의 관계는 수수께끼를 던진다. 이병헌은 뛰어난 칼 솜씨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을 자르지 못해 칼 탓만 하고 있었다. 과거 자신이 당했던 기억이 행동을 저지했으리라.

영화 막판에 밝혀지는 사실들은 송강호의 존재를 더 알 수 없게, 더 이상한 놈으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것 같다. 영화에 나타나지 않은 거대한 송강호의 실체가 있으리라는 상상만 할 뿐. 김지운 감독이 어떤 단서를 숨겨놨는지는 영화를 다시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감독의 설명을 들어보면 송강호야말로 나라잃은 민족의 잡초같은 삶을 대변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욕망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삶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연이지만 보물 지도를 획득해서 간직하고, 보물을 찾으면 어떻게 운반할지에 대한 고민도 없이 혼자서 돌진하고, 보물을 찾아봤자 하고 싶은 게 집 짓고 가축 기르는 것 밖에 없단다. 방향성을 잃은 민족의 이상할 수밖에 없는 삶?

영화의 내러티브가 부족함은 감독도 인정하는 바인데 보물지도의 행방을 아는 집단이 어찌 그리 많은지 모르겠고, 보물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던 것은 일본군밖에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석유를 보고 실망에 잠긴 송강호의 반응은 알 수 없기에 매혹적인 목표에 대한 단순하지만 질긴 욕망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 같다. 창이의 다이아를 챙긴 태구는 영화 막판 또 다시 무엇인가를 향해 질주한다. 질주의 끝은 없을 것이다.




세 주인공의 복장에 대한 집착은 대단하다. 가장 당하는 부분이 많은 송강호는 흐트러진 옷차림을 계속해서 교정하고 재생시킨다. 밧줄타기, 마상 총격을 일상으로 삼는 정우성이 모자를 항상 쓰고 있는 것도 희한하다. 옷으로 만들어내는 캐릭터. 캐릭터의 성격을 좋은, 나쁜, 이상한 놈으로 유지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싸우는 마당에서도 그들은 복장을 잘 갖춰야했다.


-영화에 들어가기 전 인터뷰에서 장르를 먼저 생각하고 이야기를 선택하는 영화는 <놈놈놈>이 마지막이라고 했잖나. 그때 장르를 선택한다는 것은 모종의 이야기와 주제도 같이 선택한다는 것을 포함한다고 말한 것 같다. 당시 웨스턴이라는 장르에 관해서는 시각적인 지점을 많이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기에 웨스턴이라는 장르에서 비롯된 이야기와 주제가 뭐였다고 생각하나.

=그때도 말했지만 웨스턴은 스페인 여행을 하다가 떠올린 것이다. 어릴 때부터 웨스턴을 만들고 싶다는 영화적 로망은 있었는데, 그런 벌판을 보니 일종의 해방감이나 막 내달리고 싶은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저 멀리에 뭐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마구 내달리고자 하는. 영화 안에도 그런 대사가 있지만, 꿈이나 욕망, 집착을 갖고 뭔가를 쫓아갈 때 그것을 또 쫓아오는 인생의 무리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집착이나 욕망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이런 광활한 대평원을 배경으로 웨스턴영화 안에서 보여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뭔가를 쫓아갔다가 그것을 보고 다시 어떤 다른 두려움과 공포가 쫓아와서 다시 거기서 벗어나 다시 무언가를 쫓아가는…. 인생은 이런 추격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엔딩의 대추격전에 인생의 카오스와 혼란과 아비규환을 집어넣으려 했던 것이다. 일제시대 한반도에서 쫓겨난 선조들도 만주라는 대륙을 봤을 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서 본능적으로 로또당첨을 바라는 식으로 그 공간에 뛰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태구라는 인물도 이를테면 알량한 로또 번호를 받은 건데 이게 맞는지 안 맞는지 끝까지 가서 확인해보고 싶어하는 거다. 로또나 지도나 한낱 종잇조각 아니냐.

-그런 추격전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구성해나갔나.

= 내가 영화를 만들 때는 어떤 이미지, 영화적 순간들을 가장 우위에 두고 거꾸로 만들어간다. 여기에 이르려면 무엇을 거쳐야 하나 하면서 거꾸로. 단점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놈놈놈>은 결국 마지막에 대평원을 달리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다. 물론 이야기를 직조하는 과정이 부실하다고 지적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내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나는 이야기가 부실하다는 부분보다는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성취하지 못했던 부분을 이야기하면 더 재밌지 않을까,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면서도 작은 영화에 스펙터클이 없는 게 큰 하자가 되지 않는 것처럼 이런 오락영화에서 이야기가 탄탄하면 더 좋겠지만 내러티브의 부재가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했던 것이다.

-그런 액션에서 추구했던 스타일이 있었나.

=한국에서 성취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우리가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귀시장은 사람들이 결과물만 보니까 쉽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반 헬싱>이나 <스파이더 맨>에서는 다 와이어캠으로 찍은 것이잖나. 그런데 우리는 와이어를 매단 사람들이 직접 했으니까. 그러니까 슈퍼크레인이라든가 와이어캠이라든가 도기캠이 해야 할 것들을 슈퍼맨, 와이어맨, 도기맨이 했다. (웃음) 이게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 일인가. 여러 재밌는 장면이 많은데, 지붕 위의 도원을 찍으면서 아래로 뛰어내리니까 카메라도 같이 뛰어내리고 다시 아래서 창이를 잡으면서 뒤로 빠지는 식의 촬영은 <스파이더 맨>에서도 없었을 거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이렇게 만들어낸 것은 어떤 영화에서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귀시장신과 대평원은.

=도원은 전문가이기 때문에 멀리서 모든 것을 파악하는 캐릭터다. 태구처럼 눈앞에 보이는 것을 치고 가는 게 아니라 그가 세력 분포를 파악한 뒤 하나씩 잡아가는 전문가스러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공중으로 올라가야 했다. 도원은 도르레 장치로 위에 올라가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수의 열세를 극복해나간다. 도원의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서 수직과 하강의 동선을 짰던 거다. 대평원은 아까 말했듯 욕망의 집합체, 카오스적인 상황을 정신없이 보여주기 위해 대폭발을 시켰던 것이다.

김지운 감독 씨네21 인터뷰
http://movie.naver.com/movie/mzine/read.nhn?office_id=140&article_id=0000011614

2008년 7월 27일 일요일

묘지

택시는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서울의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붉은 십자가들이 희고 거대한 묘역을 이루며 빛나고 있었다.

-이장욱, 고백의 제왕, 창비 2008 여름호.

소설 속에도 나오지만 기묘하게 불쾌해지고 불콰해져야 받아들일만한 이야기다. 도시의 밤 거리를 걸으면 유난히 십자가들이 눈에 띈다. 기독교인이 저렇게 많은 걸까, 저 많은 교회의 목사님들이 다 밥 먹고 살 정도로 교인이 충분한 건가 괜한 걱정을 하기도 했다.

컴컴한 밤 거리의 십자가들에서 묘지를 연상한 작가의 시선이 새로웠다. 하지만 사진의 출처인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면 외국인도 십자가를 보며 공동묘지를 연상했다고 한다. 사람을 못 박아 죽였으니 십자가 자체가 죽음이고, 서양의 묘지에서 십자가를 흔히 볼 수 있으니 서양인의 시각에선 곧바로 묘지를 연상했으리라.

신을 믿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측불가능한 현실의 삶을 쉽게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함이다. 도시의 밤거리를 붉게 물들인 십자가들은 신의 이름으로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련가. 현실을 제대로 살기도 전에 죽음과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저편의 세상을 생각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제멋대로 해석하는 신의 뜻은 얼마나 많은 억지를 조장하는가.

당당해져야 한다. 비루한 삶을 신에 기대어 이어가지 말고 더 강해져야 한다. 신이라는 버팀목을 믿는다면 더 열심히 연구해서 당당한 교인이 되어라. 열등감과 불안감에 폭력을 휘두르지 말고.

2008년 7월 24일 목요일

러브 레터, 트윈 픽스

올블로그에 갔다가 나카야마 미호에 대한 글을 봤다. 잊혀진 스타에 대한 글은 보기 힘든 법이라 반가운 마음에 가서 글을 읽다 러브 레터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브 레터는 여러 가지로 개인적인 의미가 있는 영화라 떠올리는 것만으로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게 된다.

오늘 다시 보며 드는 생각은 영화가 참 처음부터 어처구니 없었구나라는 것이다. 와타나베 히로코가 죽은 남자친구 이츠키의 졸업앨범을 볼 때 어머니가 이츠키는 전학을 갔다고 말해줬는데 주소록에 왜 남자친구인 이츠키의 주소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전학생 사진이 남아있는 것도 희한하긴 하지만 아마 그 졸업앨범에는 죽은 이츠키의 주소는 없었을 것이다. 와타나베 히로코의 순진함과 순수함 혹은 어리석음 덕택에 영화가 전개될 수 있었고 히로코가 몰랐던 진실이 밝혀지었던 것이구나 싶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전학을 한 학생에게도 졸업 앨범을 주나? 확인해볼 수 있을까.

며칠 전부터는 트윈 픽스를 다시 본다. 정확히 말하면 출시되자마자 아마존닷컴에서 사고는 처박아 둔 시즌 2 DVD를 보는 건데 전에 본 것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다. 아마도 고등학교 혹은 대학1학년 때 유선방송에서 KBS에서 방영한 버전을 재방송으로 볼 때 시즌2의 뒷부분을 봤던 것 같다. 그 부분만으로도 상당히 내 의식을 자극했고, 누가 범인인지는 극장판 Fire walk with me를 보며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시즌 2를 보다보니 이미 16화에 범인이 아주 명확하게 밝혀진다. TV 시리즈에서 범인이 밝혀지지 않아 극장판을 만든 것으로 생각했건만. 실망이고 17화 이후를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그래도 예전에는 그 부분만 봐도 재미있었으니 언젠가 이어서 보긴 할 것 같다.

2008년 7월 21일 월요일

적벽


대학원 사람들과 영화를 봤다. 한국에서는 '적벽대전'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했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적벽'이 원제였다. '적벽지전'이 다음 편이다. 나도 한동안 그랬지만 영화가 두 번으로 나뉘어 상영되는 것을 모르고 봤다가 낭패를 본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삼국지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적벽의 '전투'는 다음 편에 나올 것이다.

그렇지만 소규모 전투가 주를 이룬 이번 영화의 전투 장면도 볼만했다. 적벽의 대규모 전투를 보지 못해 실망한 사람이 많은 모양이지만 나는 아주 즐겁게 봤다. 나중에 밥을 먹으며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 당시의 무기를 제대로 고증한 것인지, 배우들의 신장이 적절했는지 등에 대한 논란이 일긴 했지만.

여러 판본으로 삼국지를 다섯 번 이상은 본 것 같고, 코에이의 게임도 많이 했건만 삼국지의 세세한 부분은 많이 잊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가 얼마나 원작에 충실했는가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다. 그래서 대강의느낌을 요약한다면 '적벽'은 역사서보다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에 더 중점을 둔 영화인 것 같고, 오우삼 스타일이 강하게 덧입혀졌고, 특히 전투 장면에서는 반지의 제왕 류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삼국지-용의 부활의 실패가 보여주듯 원작에서 과도하게 벗어난 작품은 감독의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관객의 공감을 얻기 힘든데 적벽은 적절한 선을 지켰다.

영화는 첫장면부터 악한 조조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만들어 나갔다. 간웅 조조의 이미지는 강력한 정치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정통 왕조의 황제를 무시하고, 민간인, 적군을 가리지 않고 대학살을 자행하고, 무엇보다도 소교라는 미녀를 얻기 위해 오를 치는 듯한 설정을 통해 구축된다. 하지만 조조의 대척점인 유비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인 것만도 아니다. 유비는 자기를 따르는 백성을 지키며 대의를 중시하는 장면을 빼면 그다지 호감이 가는 캐릭터로 그려지지 않았다. 신야에서 패한 이후상황이 안 좋긴 했으나 주유가 방문했을 때 누추한 곳에서 짚신을 삼고 있는 장면은 비참함을 과장한 것이리라.

누구를 유명 배우로 썼느냐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전통적으로 중시되는 유비, 관우, 장비, 조조라는 인물이 아니라 제갈량과 주유의 라이벌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간 금성무의 연기에 의문을 품어왔으나 이번 제갈량 역할은 그에게 꽤 적합했다. 문무를 겸비한 인물인 주유 역할의 양조위도 괜찮은 캐스팅. 장비, 관우는 소설의 이미지보다 작았고, 유비는 너무 늙었고, 조운은 너무 경쾌했다. 조조의 배우는 선한 이미지를 많이 풍기는 인물인데 그래서 오히려 간웅의 역할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손권도 아버지,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 한 나라의 지도자로 우뚝 서는 과도기 캐릭터의 모습을 잘 연기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영화를 보기 전에 라디오에서 오우삼 스타일이 어떻게 영화에 반영되는지 조금 들은 편이라 영화를 보면서 주목했는데 역시나. 유비, 손권의 동맹이 결정되는 주유와 제갈량의 악기 연주 장면은 과장되었고, 흰 비둘기는 여러 번 날아다녔다. 비둘기는 단순히 난 정도가 아니라 과도하게 클로즈업되기까지 했다. 워낙 주연급 인물이 많이 필요한 영화라 일대일 대결이 많지는 않았지만, 조운과 하후X의 전투 장면은 지나치게 길었다. 소설 속의 조운 실력이라면 그렇게 오래 경합할리가 없을 터인데.

장비는 장팔사모를 거의 쓰지 않았다. 전투 장면이나 평소의 모습까지 장비는 많은 부분에서 반지의 제왕의 드워프족 김미를 연상시켰다. 작고 단순한. 레골라스의 이미지는 관우, 조운의 전투 장면에서 조금씩 스며나왔다. 주유의 기술도 일부 그런 면이 있었고. 전투 장면에서는 이렇게 반지의 제왕이 섞여 있는데 이는 세계적 영화 흥행을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하지만 절대악이 있고 악의 세력의 근원을 없애는데 성공하는 반지의 제왕과 달리 삼국지에서 조조는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유비, 손권은 적벽에서 단기적인 성공만 거둘 뿐이다.

마지막으로 축구 장면에 대한 분석을 빠뜨릴 수 없다. 무기 부분도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축구는 거의 엉터리다. 중국 축구계는 축구의 중국 기원설을 계속 제기하는 모양이고, 영화는 그런 연장선으로 보인다. 골대가 현재와 다를 뿐 선수들이 태클을 한다거나 묘기를 부리며 드리블을 하는 것은 명백히 현대 축구의 모습이다. 심지어 공까지 거의 구형에 가까운데 과거에 그런 공을 썼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말을 타고 와서 응원하는 대규모 관중들을 보면 어이가 없어진다. 영화의 맥락에서 축구가 나온 것은 전쟁의 승부는 축구처럼 딱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즉 영화 막판의 전투에서 조조군이 패한 것은 적벽에서 수전을 통해 만회할 수 있다는 조조의 자신감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었다. 하지만 축구의 승부야말로 다음 경기에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것이다. 거의 10배의 병력으로 전쟁에서 지기는 어렵지만 동일한 숫자의 선수들이 뛰는 축구는 공정한 룰만 있다면 승부 예측이 훨씬 어려운 법이다. 그렇다면 조조의 지나친 자신감과 오만함에 대한 경고, 그리고 참패를 예고하는 언급일지도...

2008년 7월 15일 화요일

Why Lady First?

왜 남자들이 여자를 배려(하는 척) 해야하나? 단순히 여자를 꼬드기기 위한 행위일 수도 있지만 이미 꼬드긴 여자도 꾸준히 배려하는 (물론 그렇지 않은 다수의 남자들이 있지만) 이유는? 그냥 멋있어 보여서일까? 여성이 약자라서? 하지만 이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어제 발견한 것 같다. 생물학적인 설명이다.

영화, 드라마에서 생명이 위태로운 위기의 순간, 예를 들어 타이타닉 같이 선박이 침몰하거나 로스트 에서처럼 비행기가 추락하고 무인도에서 살아야하는 상황을 보자. 구명보트에 탈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되어 있다면 누구를 태울 것인가. 생명은 분명 평등하지 않고 우선순위가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타려고 다투다 아비규환의 상태를 만드는 대신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 선장 같은 사람이야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말할테고 삶의 나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

누가 오래 살 것인가를 따져볼 때 당연히 더 어린 사람을 살리는 쪽이 인류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유리한 선택이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어떨까? 요즘이야 여자들이 더 오래 산다고 하지만 수명을 놓고 볼 때 원래부터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자들의 가치는 아기를 낳아 인류의 존재를 지속시킬 수 있기에 빛난다. 영화 속에서 위기 상황에서도 여자를 우선하는 수많은 장면들은 남자가 단지 여자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를 희생했다기보다 인간에게 내재한 하나의 본능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생물학에서 종의 본능은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최우선 목표라고 보고 있으니 전혀 틀린 설명도 아닐 것이다.

2008년 6월 30일 월요일

크로싱: 비와 백구와 축구

아... 왜 이렇게 글 쓰는 게 늦어지나. 영화 본 지 보름은 지났건만. 기억을 그러모아 어떻게든 끝내보리라. 스포일러 당연히 있다.

처음부터 이 영화를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차인표가 나온 영화가 재미있었던 적도 없었고. 하지만 지난 달 말미를 기념하여 선택한 영화는 결국 '크로싱'이었다. 졸리와 맥어보이의 원티드를 원하기도 했고, 결국 그저께 본 쿵푸팬더를 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가벼운 영화들보다 볼만한 한국 영화 한 편을 우위에 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그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다.

영화는 고통 그 자체다. 영화평 중 "재미도 감동도 없는"이라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다.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들지만 이는 카타르시스도 아니고 누구나 영화를 보며 느낄 수밖에 없는 고통의 소산일 따름이기 때문이리라. 확실히 영화는 재미로 볼 것도 아니고, 감동보다는 분노만을 느끼게 만든다. 분단으로 이산 가족을 보지 못하는 아픔은 이미 60년이 다 된 일인데, 탈북자들도 상당수가 이산 가족이었다. 결국 차인표는 금방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달리 부인, 아들과 (생)이별을 한다. 많은 이별은 예정에도 없이 찾아오는 것이리라.

가족의 문제도 있지만 영화는 식량난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는 북한 정권을 정면으로 비난한다. 북한 국경의 경비병은 돈만 주면 편하게 두만강을 왕복하게 허용하지만 무임도강하는 생계형 도피자에게 기꺼이 개머리판, 총알 세례를 가한다. 중국으로 도망치다 걸리면 정신개조를 위해 수용소에서 무임금 노동력으로 소모되다 죽을 뿐이다. 구더기가 득실대는 상처를 안고 죽은 미선의 이미지는 말문을 막히게 할 뿐이다.

영화의 비판적 시각은 북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도적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탈북자 지원 사업에 대한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을 더 많이 구하기 위해 개인이 아닌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단체가 필요함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들은 관료제의 무뚝뚝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남한이 아니라 병든 아내와 아들이 있는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용수(차인표)의 기대는 간단히 무시된다.

기독교에 대한 영화의 시선은 약간 애매하다. 영화를 본 날 다른 이의 생각 궁금해 인터넷을 뒤진 결과 영화가 기독교에 지나치게 비판적이라 싫다는 반응들이 있었다. 나도 신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는 용수의 격렬한 반응을 보며 기독교계가 안 좋은 반응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엔딩 크레딧을 보니 이미 기독교계의 협조가 있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탈북자를 도운 것은 기독교계라는 기본 사실이 있기 때문일까. 종교의 이념 자체와 이를 사리사욕을 위해 악용하는 성직자, 교단의 문제는 별개로 둬야 하는데, 크로싱은 기독교 이념 자체를 지지하는 영화는 아니다.

크로싱은 수없이 많은 경계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살아가며 보통 주어진 틀 안에서 살아간다. 삶의 공간이건 신분의 문제이건 경계선을 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넘나드는 것을 일상으로 삼으면서 양 세계의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한다. 무당이나 성직자들도 그런 종류의 사람인데, 크로싱에서는 브로커라는 존재들이 해당된다. 용수의 한국행을 조장한 브로커는 사욕을 위해 용수를 속여서 이용했고, 준이의 한국행을 도운 브로커들은 돈을 받고 냉정하게 일을 처리할 뿐이지만 어린 준이의 절대적 불행에 동정하기도 한다.


이런 얘기들을 쓰려던 게 아니었는데 서론이 길어져서 본론에 충실할 수 없지만 제목에 충실한 내용은 아래 적어본다.

위에 브로커 얘기를 적긴 했는데 영화에서 수많은 경계를 넘는 것은 비로 나타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지상의 물리적, 심리적 경계와 상관없이 조용히 그리고 차갑게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씻어내린다. 눈물도 비에 대응하는 설정이다. 영화 말미의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물이었다. 경계들 때문에 헤어진 사람들은 경계를 넘어 원래 하나였던 사람과 만나지 못하게 되면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준이는 비를 좋아한다. 맑은 날이 아니라 궂은 날에 내리는 비를 좋아한다멸 결과는 뻔할지도 모른다. 비는 수해를 낳기도 하지만 가뭄을 해갈하기도 하니 이중적 장치이지만 준이가 비를 좋아한다는 설정은 결말의 파국을 예고한 것 같다.


백구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기른 마지막 개가 (이름까지) 백구여서인지 영화를 보며 반가우면서 안타까웠다. 부인과 아들까지 죽는 마당에 개라고 무사할리 없다. 북한의 식량난 때문에 백구는 영화 초반 준이네 식구의 지위에서 아침 밥상을 가득 채운 음식으로 변했다. 엔딩 부분의 가상의 행복한 삶 속에서도 백구는 빠질 수 없는 일원이었다. 백구의 죽음, 그것은 한 마리 개의 죽음 이상의 의미다. 이어지는 불행을 알리는 중요한 서막이었다. 만약 백구가 진돗개라면 애시당초 함경도에 있을 가능성 자체가 거의 없다. 백구는 북한의 현실의 일부라기보다 메타포로 사용된 설정이다.


마지막으로 축구를 보자. 크로스, 크로싱은 센터링이라는 잘못된 용어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축구에서 득점을 위한 중요한 기술이다. 대지를 가르듯 그라운드를 횡단하여 스트라이커의 머리와 다리로 전달되는 공의 아름다움...

심각한 영화 타인의 삶에서도 축구 장면이 스쳐가듯 나온다. 이렇게 축구는 평화로운 일상의 일부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으로 많은 영화에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용수는 축구 '선수'였고, 준이도 축구를 너무 좋아한다. 그리고 사진에도 나오지만 백구도 축구를 좋아한다. -_- 축구 선수라는 설정은 이상한 곳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바로 주중 독일 대사관에 북한 사람들이 몰려 들어갈 때 축구 선수라는 경력이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용수는 북한을 떠나며 아내의 약과 아들의 축구화, 축구공을 사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중국에서 번 돈은 잃어버렸지만 남한에서 번 돈은 고스란히 모아 나이키 축구공을 사기에 이른다. 하지만 공을 받을 준이는 북한도 아닌 몽골의 사막이라는 타향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용수는 아들에게 크로스를 할 기회도 얻지 못한 것이다.

절대 고통의 영화 크로싱. 하지만 이런 현실이 멀지 않은 곳에, 소위 같은 민족에게 일어나는 일임에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이 고통을 가중시킨다. 영화 포스터는 "그 날, 우리는 살기 위해 헤어졌습니다"라고 말한다. 살기 위한 몸부림은 모든 생명의 본능이다. 하지만 살기 위한 헤어짐은 용수의 삶과 다른 가족의 죽음으로 결론이 났으니 용수는 그냥 북한에 있으면서 온 가족의 가난한 삶을 지켜보는 편이 나았으려나?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사회는 다수의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기에 개개인의 불행은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지 모른다.

2008년 6월 29일 일요일

콜레라 시대의 사랑

(...) 이제는 나이도 들고 성질도 온순해졌지만, 두 사람은 가능하면 그 사건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간신히 치유된 상처는 마치 어제 입은 상처처럼 다시 피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1권 p.57.

(...) 그녀의 편지는 그 어떤 감정의 위험도 피했으며, 단지 항해 일지를 쓰듯이 성실하게 자신의 일상적인 일들을 이야기하는데 그쳤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 그 편지들은 심심풀이용으로, 자기 손은 불에 넣지 않으면서 뜨거운 불길을 유지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반면에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한 줄 한 줄마다 자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1권 p.124.

"부자라니, 난 그저 돈 많은 가난한 사람일 뿐이오. 그건 다른 것이오."
2권. p.10.

(...) 고독한 사냥꾼으로서 먹이를 낚으면서 너무나 많은 과부들을 알게 된 플로렌티노 아리사는 세상은 행복한 과부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 젊은 신부의 수많은 꿈 중의 하나에 불과한 안정을 대가로 자신의 성(姓)뿐만 아니라 개성까지도 포기한 시절 이후, 다시금 자신이 자유 의지의 주인이 되었다는 의식을 갖곤 했다. 오직 그 여자들만이 자신이 미친 듯이 사랑했고 또한 아마도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 하지만 죽는 날까지 젖을 주고 더러워진 기저귀를 갈아주며, 아침마다 술책을 사용하여 기분 좋게 해주어야 했던 남자가 자신의 사주를 받아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을 본 여자들은 그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삶이었다. 사랑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별개의 것, 즉 또 다른 삶이었다.
2권. pp.73~74.

사실대로 말하자면 후베날 우르비노의 구혼은 결코 사랑의 이름으로 제안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제안했다고 하기엔 이상한 세속적인 재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즉 사회적, 경제적 안정과 질서, 행복, 눈앞의 숫자 등 모두 더하면 사랑처럼 보일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거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만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었고, 이런 의문은 그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녀 역시 사랑이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2권. p.78.

그러자 모든 의심이 사라졌고, 이성이 가장 점잖은 행동이라고 지시하는 바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행할 수 있었다. 페르미나 다사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기억을 즉시 수세미로 문질러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고, 자신의 기억 속에 그가 차지하고 있었던 자리에 양귀비의 초원을 꽃 피웠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것은 마지막으로 평소보다 더 깊은 한숨을 쉬며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 올케들이 수도원의 감옥에서 산 채로 썩지 않은 것은 이미 자신 안에 그런 감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2권. p.80.

(...) 페르미나 다사가 자신이 죽음의 함정에 빠져 있다고 잘못을 돌린 사람은 (...) 바로 남편이었다. 직업적인 권위와 세속적인 매력 뒤에 감춰진 본모습이 구원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그는 가문의 사회적 무게 덕택에 대담해진 가련한 악마였던 것이다.
2권. p.81.

"아주 특별한 종류의 콜레라임에 틀림없군. 시체들의 목덜미에 하나같이 확인 사살한 총구멍이 나 있으니 말이야."
2권. p.118.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눈물 모양의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서 더욱 빛나고 있었다. 앨리스가 다시 한 번 거울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2권. p.120.

두 사람은 서로 그대로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니까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라 손자뻘 정도 되는 이미 사라진 두 젊은 남녀의 덧없는 기억 이외에는 공통점이 아무 것도 없는, 죽음의 습격만을 기다리고 있는 두 늙은 남녀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2권. p. 256.

"빌어먹을. 모두 지옥이나 가라고 해. 우리 과부들이 좋은 게 있다면, 우리에게 명령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야."
2권. p.288.

(...) 그런 다음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그의 꺾을 수 없는 힘, 그리고 용감무쌍한 사랑을 보면서 한계가 없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일지도 모른다는 때늦은 의구심에 압도되었다.
선장이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2권. p. 331.

2008년 6월 28일 토요일

장미의 이름

(...) 철학에 대한 증오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가짜 그리스도는 그 사자가 그랬듯이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잘 들어 두어라.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호르헤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리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장미의 이름(하) pp.638~639.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장미의 이름을 이제서야 아주 힘겹게 한 번 읽게 되었다. 교황과 황제 그리고 수도회간의 투쟁 부분은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만 책읽기를 힘들게 만든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다 읽고 나니 그 지루했던 부분들이 책 전체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부분들이었음이 느껴진다. 지루하고 유치찬란한 그 논쟁들은 그 과거는 물론 지금까지도 어느 사회에서나 되풀이되고 있고, 언제든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을 것이니...

묵시록의 상황이 그대로 연출되어 일곱 개의 나팔이 하나씩 울린다는 생각이 든다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할 필요도 없다. 이미 구원받을 자와 비참한 최후를 맞을 사람은 정해졌을 터이니. 행여 세계가 멸망하는 징조가 보이기 시작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상징적 의미로) 일곱 개 나팔이 다 울릴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두번째 나팔부터 막도록 노력하면 어떨까.

2008년 6월 23일 월요일

Terminator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6년 생활을 마감하던 마지막 겨울 방학을 장식한 영화가 있었으니 터미네이터다. 시골 소년이었던 나는 중학생이 되어 원주 시내에서 좀 놀겠다는 기대도 있었고, 풋사랑의 재미를 느끼는 시절이기도 했다. 소위 청소년이 되려는 시기에 본 터미네이터는 당시의 상황과 어울려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랑하는 방법도 학습하는 것인지라 그 때까지는 영화의 키스 장면이 나와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 수 없었다. 시골 마을에서 키스는 커녕 어떤 농밀한 신체 접촉도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학급 친구들이 저학년 시절 이성에 대한 단순한 적대심을 버리고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하여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주고, 졸업 선물을 주고 받는 등 변화가 나타났다. 그래서인지 이전에 많은 로맨스 영화들을 봤겠지만 로맨스가 주된 내용이 아닌 터미네이터의 연애 장면이 오히려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터미네이터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시간축을 무시한 영화의 내용이었다. 존 코너의 아버지가 미래에서 날아왔다는 설정 때문에 애당초 존 코너는 어떻게 존재하게 된 것인지 궁금증이 생겼고, 마침 토요명화에서 방영한 터미네이터를 본 학급 친구와 그 이야기를 나눴으나 별 소득은 없었던 것 같다.

여하튼 터미네이터는 몸짱 아놀드가 돌아오겠다, 돌아왔다를 연발하며 3편까지 제작되었고, 최근 2, 3편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번에 볼 때 시간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를 주목했지만 대충 얼버무리기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3편은 어떤 블로그에서 본 대로 1, 2편의 패러디 영화의 성격이 강했다.

시간 이동은 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였다. 그러나 '잘못된' 과거를 바꾸겠다는 은밀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변경된 과거로 인해 현재가 통째로 바뀌는 위험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거나, 과거에서 다른 행동을 해도 결국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과로 이어지곤 했다. 터미네이터에서는 기계들이 인간 군대의 지도자를 제거하기 위해 과거로 인간형 병기를 보낸다는 설정이다. 미래 인간 군대에서도 대응하기 위한 사람과 기계 병기를 차례로 보내는데 결국 존 코너를 지켜낸다.

터미네이터에 대한 몇 가지 설명 방식들을 봤지만 납득하기는 힘들고, 지금 떠오르는 의문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기계들은 왜 존 코너 암살을 위한 터미네이터를 띄엄띄엄 보내나?
- 터미네이터1, 2, 3는 거의 10년씩의 시간 간격을 두고 제작되었다. 이런 제작 시기의 문제 때문에 10년 주기로 기계들이 과거로 투입되는 것은 이해할만하나 매번 업그레이드된 성능의 터미네이터를 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터미네이터 여러 대를 보내지도 않고, 더 자주 보내지도 않은 이유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3편에서 아놀드는 자신이 공장에서 양산되는 모델임을 밝히기도 했다.) 로봇과 인간의 전쟁이 몇 년 지속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로봇이 스스로 개발을 거듭해 진화된 병기를 양산했다면, 존 코너가 이끄는 인간이 한정된 자원과 재래식 무기로 어떻게 승리를 할 수 있는지도 납득하기 힘들다.

2. 2, 3편의 터미네이터는 어떻게 의복까지 함께 복원되는가?
- 2, 3편의 터미네이터들이 알몸으로 과거로 갔다가 처음 얻어입은 옷을 입은 상태로 매번 재생되는데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몇 번씩 총알로 벌집이 되는 터미네이터들이 그 때마다 옷까지 다 헤지면 또 누군가의 의복을 갈취해야하니 번거롭고, 단순히 의상 담당자가 귀찮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누드를 덜 보여줘서 심의 등급을 낮추거나, 막되먹은 기계라도 옷을 입혀서 관객의 눈을 편하게 해주기 위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3. 터미네이터는 왜 인간형인가?
- 이것은 얼핏 생각하는 것보다 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3편에서 기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순간을 보면 로봇들은 인간처럼 머리와 몸통이 있지만 다리 대신 바퀴가 달려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인간과 기계의 전투가 심화될 때를 보면 기계들은 보통 두 다리를 가진 인간형이다. 과연 두 다리를 가진 로봇이 가장 효율적일까? 기계들이 인간형인 것은 효율성이나 기계들의 진화의 산물이라기보다 기계와 인간의 대결을 역사상 지속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결의 또 다른 형태로 풍자한 것이 아닐까 싶다.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 매트릭스 등에서 꾸준히 인간 아닌 것이 인간과 같은 의지와 감정을 가지게 된다면 인간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들이 제기되어왔다. 순전히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나 인간의 신체가 노화, 사고, 병으로 망가졌을 때를 대비해 '만든' 복제인간의 존재는 어떻게 봐야 할까? 터미네이터는 스스로 기계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기에 인간이 되겠다고 하지는 않고 무게나 힘 등에서 인간과 확실히 차이가 나기에 문제가 덜 되지만 아일랜드에서처럼 복제인간들이 인권을 주장하고 나서면 외형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어 골치아픈 문제가 제기된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2편에서는 확실히 그리고 3편에서는 불분명하게 아놀드가 프로그램된 명령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을 통해 스스로를 버리는 모습이 나온다. 비록 아놀드는 자신은 죽음에 대한 관념이 없다고 하지만 2편의 자살신은 에일리언 시리즈에서 시고니 위버가 용광로에 뛰어들어 죽는 장면과 여러모로 유사해보인다.
이 시리즈에서 기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 매트릭스 시리즈에서처럼 인간을 동력원으로 착취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인간의 통제가 '싫은' 것인지, 기계가 아닌 존재들은 전부 없애겠다는 것인지, 그렇다면 에너지는 어떻게 얻으려고 했던 것인지, 의지가 있다면 기계들끼리의 권력 투쟁은 없었는지 등 설명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 3편 마지막에서는 스카이넷이 요즘 회자되는 집단 지성과 비슷한 것처럼 설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기계들의 '배후'나 다른 기계를 통제하는 메인 컴퓨터는 정말 없는지도 궁금한 점이다.

4. 시간 여행이 애당초 가능한 것인가?
- 이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시간이 시계에서 보는 가시적인 존재가 아님은 물론, 선후 관계가 항상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 정도만 말할 수 있으리라. 과거, 현재, 미래라는 분류의 불분명함. 불가능한 진보. 영원회귀...

2008년 6월 15일 일요일

토마토의 공포

매점에서 토마토가 다 팔려나가 대신 과자 한 봉지를 사고 말았다. 토마토에 대한 이 글은 쓴다고 생각한지 한참 지났지만 이제서야 대충이라도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쇠고기로 인해 촉발된 먹거리에 대한 걱정은 우리가 별 생각없이 섭취했던 온갖 음식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생쥐깡, 통조림의 온갖 이물질 등 눈에 보이는 것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걱정도 스멀스멀 자라났다.

그러는 와중에 미국에서는 살모넬라 토마토가 나타나 식중독을 일으키는 것이 큰 이슈가 되었다. 그나마 좋아하는 토마토인데 식중독이라니 믿을 거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우리' 토마토는 안전하다고 했겠고 나도 몇 개 먹었지만, 스스로를 신이 축복한 나라로 여기는 미국에서 왜 그리 위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지는 신만이 알 일인지 어떤지.

미국은 토마토의 위험을 이미 인지했는지 단지 상상력이 풍부해서인지 토마토가 식인을 하는 영화들을 두 편이나 만든 바 있다. 토마토 공격대, 토마토 대소동 2. 보진 않았지만 1988년에 만들어진 2편에는 무려 조지 클루니가 출연했단다.

스파이더윅 크로니클이라는 최근 영화를 보면 (정확하진 않지만 단순화해서) 괴물들을 퇴치하는데 토마토가 사용된다. 그래서 여기부터는 토마토에 어떤 신성한 의미가 부여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토마토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찾아보았지만 뾰족한 해답은 없었다. 다만 케찹이나 파스타 등 음식 재료로 널리 쓰이는 토마토가 처음부터 환영받는 먹거리는 아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초창기 미국의 청교도들은 토마토를 최음제로 여겨 기피했다고 한다.

스페인 발렌시아의 토마토 축제는 유명하고, 축제 기간 동안 엄청난 분량의 토마토가 놀잇감으로 사용되지만 이 축제 자체는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스파이더윅 크로니클에서 토마토가 사용되는 장면을 보면 붉은 점액이 퍼지는 이미지를 보게 되는데 토마토의 붉은 색이 피와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생명과 열정. 발렌시아에서 토마토를 던지며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감각을 되살리는 것일까.

http://en.wikipedia.org/wiki/Tomato

The level of Being

그저께는 짐짝이 되었다. 다마스에 네 명이 타야했는데 두 명은 좌석에 앉았지만, 둘은 화물칸에 짐들과 함께 앉았다. 크지도 않은 다마스에 덩치 큰 장정 두 명이 있으니 쪼그려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둘은 인간으로서 좌석에 앉지 못하고 화물이 되어 철창 밖을 바라보는 아픔을 느꼈다. 안에서 소리를 쳐도 아는 형조차 무심하게 눈앞에서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그 안에 갖혀있다는 가상의 상황을 연기한 것뿐이지만 그 갑갑함은 예전에 술집에서 주변 사람의 장난으로 수갑을 했을 때에 못지 않았다. 문득 인간 존재의 등급이 이렇게 철저하게 나눠지는구나 싶었다.

얼마전 에반게리온 시리즈에 등장하는 제레가 독일어이며 영혼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레(SEELE, soul). 위키피디아의 에반게리온 용어 해설 페이지를 보니 제레는 써드 임팩트을 일으켜 인류보완계획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들이 현실 속에서 찌질하게 살아가며 서로에게 상처주는 일을 없애고, 인류를 한 차원 높은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 차원 높은 인간. The Higher Man. 니체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 실체는 알 수 없지만 종교를 통해 추구하는 것도 현실의 고난과 번뇌를 초월하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인간이 되는 것조차 얼마나 힘든 일이던가.



에반게리온에서는 고슴도치인지 바늘두더지인지 헛갈리지만 서로 다가갈수록 상처를 주는 그 딜레마는 원래 쇼펜하우어가 한 말이란다. 하지만 가만 생각하니 고슴도치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지 의문이 생겼다. 위 사진들처럼 고슴도치는 종종 몸을 맞대고 살아가는데 다치고, 딜레마 상황에 놓일까? 따지고 보면 고슴도치의 딜레마란 인간 관계의 어려움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례지만 현실적인 상황은 아닌 것이다.

인간이 되는 것은 다른 생명체를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니 삶이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http://en.wikipedia.org/wiki/Neon_Genesis_Evangelion_glossary
http://scshin.egloos.com/3598268

2008년 6월 10일 화요일

The King: 사기다! (strong spoiler)

이 투 마마에서 처음 접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라틴계의 미소년 쯤으로 여겨졌다. 아마로 신부의 죄에서는 처녀가 애를 배도록 만든 신부 역할을 맡아서 좀 깬다 싶었다. 수면의 과학에서도 범상치 않은 역할이었고, 그나마 바벨에서는 이해할만한 인물을 연기했다. 하지만 난 평범한 캐릭터보다 희한하고 엽기적인 캐릭터에 더 열광하는지라 이 배우가 마음에 들었다.그런데 베르날의 영화 중 내가 놓친 영화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좋은 영화를. 바로 더 킹이다.

아주 우연히 그리고 급작스럽게 더 킹을 만났다. 매달 발급되는 알라딘의 맥스무비 할인쿠폰을 이용해서 급하게 볼 영화를 찾던 와중에 씨네큐브에서 이 영화가 상영할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혼자 보기에 좋은 영화인 것 같아 덥썩 예매했다.

극장에 가기 전에 영화 정보를 확인하지 않아서 신작 영화인줄 알았고,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계속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미 2005년에 개봉되었단다. 이 글을 쓰는 것은 영화를 보고 시간이 꽤 지난 시점이라 기억이 많이 사라진 것이 아쉽지만 영화의 내적 논리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보는 재미를 느낀 흔치 않은 영화였다. '~의 왕'도 아닌 더 킹이라는 대범한 제목을 건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주요 줄거리는 막 제대한 엘비스(베르날)가 죽은 어머니가 남긴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만난 적이 없는 아버지를 찾아나서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이다. 핵심은 가족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주인공들을 살펴보면 윌리엄 허트(데이빗, 아버지 역),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엘비스, 데이빗의 사생아), 펠 제임스(맬러리, 데이빗의 딸), 폴 다노(폴, 데이빗의 아들), 로라 해링(트윌라, 데이빗의 부인)이다. 사진 속에 나타나듯 원래 가족의 일원인 폴 다노는 사라지고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연히.

느닷없이 아버지를 처음 찾아간 날 엘비스는 가혹하게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들어야했다. 데이빗의 논리는 예전의 사고는 안타깝지만 지금의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엘비스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현실을 거부하고 거대한 복수를 계획한다. 그 복수 과정에 이복동생과의 사랑이라는 변수가 개입하여 문제는 아주 복잡해진다.

여동생 맬러리와 엘비스가 심각한 사이라는 것을 눈치챈 폴은 엘비스를 찾아가 따졌고, 나중에 엘비스는 아니라고 했지만 내 생각엔 다분히 고의적으로 폴을 살해했다. 영화 전반부에 폴이 데이빗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라는 말이 거듭해서 명시적으로 언급되었는데, 그 아들이 사라진 것이다. 가족은 큰 위기에 빠진다.

영화의 배경으로 깔리는 교회의 이미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는 교회와 기독교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데이빗은 지역 사회에서 신뢰를 받는 목사지만 목회자가 되기 이전에 엘비스라는 사생아를 낳았다. 하지만 신의 은총으로 과거의 과오는 용서받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신이 자신의 과거를 지워줬다고 믿었는지 몰라도 그 무책임함은 결국 부적절한 아들이 적합한 아들을 살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아내와 아들, 딸 한 명씩을 둔 단란하고 이상적인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겠다는 욕심은 부적절한 아들을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집으로 불러들였고, 결국 아내와 딸까지 잃고 만다. 이제 그가 적합하다고 믿은 가족은 사라지고 원래 가족이 되었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원래의 아들(엘비스)만이 남는다. 그 아들은 묻는다. 신은 나를 용서할 것인가?


마침내 데이빗은 비록 사생아지만 엘비스가 자신의 아들임을 교회 내에서 선포했고, 소수의 신도는 저주를 하며 떠났지만 많은 이들은 아름다운 장면이라며 박수를 쳤다. 현실의 아들이 사라진 이후에 많은 무리를 하며 받아들인 또 다른 아들.


맬러리는 오빠를 사랑하고 오빠의 아이를 잉태한 것을 나중에야 알았고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엘비스는 태연하게 음료수를 마시며 왕관을 쓴다. 목사인 아버지 데이빗이 기독교의 권위와 가식을 등에 업고 자기를 거부했을 때부터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았던 것일까. 아무도 사생아이자 살인자인 엘비스를 저지하지 못했다. 나는 맬러리가 자살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엘비스가 맬러라와 트윌라를 제대하며 은닉해서 가져온 총으로 죽이며 스토리를 완결했다.

영화의 내용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매력적인 십대 여고생 역할을 맡은 펠 제임스가 사실은 30대라는 것이 가장 충격적이다. 사기 수준이다. 영화 찍을 때는 비록 20대 후반이었지만, 심지어 오빠로 나온 폴 다노는 물론 베르날보다도 나이가 많다. 나는 완전히 10대로 철썩같이 믿고, 성관계 장면을 어떻게 찍은 것일까, 역시 18세는 넘은 배우겠구나 짐작하는 정도였건만.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로라 해링을 다시 만난 것도 반가웠는데 장성한 자식들을 둔 중년 여성으로 나와 이질감이 느껴지긴 했다.

2008년 5월 18일 일요일

Speed Racer: Panic!

아동용 영화같다는 영화 평을 얼핏 보고 극장에 갔지만 레이싱 영화가 어떻길래 그럴까 고개가 꺄우뚱해졌다. 어쨌거나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라는 말에 어느 정도의 기대를 갖고 갔다.



주인공의 성은 레이서요, 이름이 스피드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조롱한대로 영화는 아동용이라는 꼬리표를 붙여도 어색하지 않았다. 실제 레이싱 경기장의 박진감이 아니라 CG로 창조한 롤러코스터 같은 경기장에서 카트레이서를 방불케 하는 폭력적 레이스가 펼쳐졌다.



인투더와일드를 비롯해 요즘 많은 영화에 출연하는 에밀 허쉬가 스피드 레이서 역을 맡았고, 로스트에서 최고의 훈남으로 등극한 매튜 폭스가 레이서 X로 나온다. 수잔 서랜든이 비교적 젊은 엄마로 나와 어색했고, 존 굿맨은 키가 너무 크게 나와 한동안 알아보지 못했다. 비는 역시 대사가 많지 않았고(이건 영화 전체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캐릭터의 일관성이 떨어지는 역할을 맡았다. 과연 미국에서조차 저조한 흥행을 거둔 이 영화로 비가 월드 스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원작 만화라는데 영화가 원작의 세세한 부분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은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만.



감독은 이 영화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가족에 대한 사랑? 거대 자본이 짜고 치는 판에서 레이싱에 대한 순수한 열정만으로 우승하는 도전 정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기대한 것은 매트릭스 3부작의 영향이 클 것이다. 실제 이 영화는 매트릭스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화려한 영상은 기본이고, 네오에 대응하는 스피드 레이서라는 한 명의 영웅에 의해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기본 줄기도 그렇다. 하지만 매트릭스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진 반면 스피드 레이서는 별다른 두통거리를 주지 않는다. 매트릭스가 생각하거나 즐길 수 있는 두 가지 알약을 줬다면 스피드 레이서는 보고 즐기라는 헐리웃 영화의 기본적인 메뉴만 제공할 뿐이다. 그것도 나름의 미덕이지만 워쇼스키의 영화를 기다린 팬들은 아마도 더 많은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2008년 5월 14일 수요일

Dodgeball: A True Underdog Story


"Dodgeball(피구의 제왕)"을 처음으로 다 봤다. 몇 년 전 한국에서 극장 개봉하기 전 올해 꼭 봐야 할 영화로 점찍어두었건만 약속은 지키지 못했고 시간이 마구 흘러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상영할 때 뒷부분만 봤다. 하지만 뒤만 봐서는 이 영화가 왜 그렇게 기대작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교롭게 최근 일본 피트니스 클럽에 대한 책을 읽어서인지 이번에 제대로 보니 영화는 의외로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Dodgeball은 의미상 거의 피구와 대응하는 단어다. '피구왕 통키'의 기억 때문일까? 피구는 왠지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찾아보니 Dodgeball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주로 하는 스포츠로 미국에는 프로 다지볼 리그도 있단다(http://www.thendl.com/). 요는 피구왕 통키의 경우가 일본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스포츠를 부각한 것과 달리 '피구의 제왕'은 적어도 그럴 듯한 배경은 있다는 점이다. 비록 영화에서 국제 피구 대회가 소재이긴 하지만(불꽃슛을 장착하지 못한 일본 팀은 아주 간단히 패배한다).

영화는 짐(gym)간의 대결을 다루는데 궁극적으로는 이상적인 신체에 대한 이념의 대결이기도 하다.


헬스클럽, 피트니스클럽, 체육관 등 뭐로 부르건 간에 요즘 사회에는 위 사진의 배경처럼 성난 황소를 다룰 정도의 힘과 근육을 기르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 훈련하는 장소들이 즐비하다. 영화가 시작할 때 벤 스틸러는 날씬하고 근육으로 다져진 몸매를 자랑하며 자신의 Globo Gym을 광고한다. 짐의 이름은 나이키, 맥도날드처럼 흔히 볼 수 있는 글로벌 기업을 연상시킨다. 또 벤 스틸러의 영화 속 이름은 White Goodman이다. 이름부터 좋은 이미지가 풀풀 풍겨나오지만 그의 좋은 몸매와 부 그리고 그의 피트니스 제국은 결국 패배하고 만다.

상대편으로 나온 빈스 본은 Average Joe's 짐을 운영한다. 이 짐은 우락부락한 몸매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아주 '평균적'인 혹은 막되먹은 몸매를 가져도 괜찮은 장소다. (영화 막판에 여자친구를 임신시키는 발칙한 놈이지만)고등학생부터 중년의 아저씨까지 연령도 다양하다. 이 짐은 친근하고 가족적인 공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러니다. 체육관이 꼭 근육질 몸매를 만들기 위한 곳은 아니라도 속성상 막되먹은 몸매로 바보같은 장난을 하기 위한 장소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몸을 가눌 수도 없이 비만에 찌든 벤 스틸러가 닭다리를 물어뜯는 모습은 첨단 시설에서 만들어낸 근육질 몸과 소파에 앉아 스낵을 먹으며 만들어낸 뚱보가 한끗 차이임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국 사회에 만연한 패스트푸드로 인한 비만을 탈출하기 위한 운동이 지나치게 되면 즉 강박관념의 산물이라면 언제라도 실패할 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애버리지 조의 체육관이 영화 막판처럼 대규모가 되었는데 글로보 짐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을까? 피터(빈스 본)의 선의가 후대 경영자에게까지 이어질까? 괜한 걱정인지 모르지만 미국식 자본주의 사회에서 애버리지 조는 취약한 구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영화 초반처럼 경영난에 시달리며 또 다른 White Goodman에게 합병당할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자본이 공격하는 공(ball)을 피하기(dodge) 위해서 또 다시 라스 베가스에서 도박을 해야한다면 지나치게 취약한 구조다. 게다가 피터가 개성있는 몸매를 중시하지만 형체없고 막연한 평균(average)을 동시에 말한다면 결국 글로보 짐의 흔한 근육덩어리들과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 없지 않을까? 평범한 막되먹은 몸매와 평범한 근육질 몸매... 애버리지 조의 막되먹음도 자유로운 바디라인을 권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Mad Cow Disease or BSE(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광우병 열풍이다. 이미 외국에서 여러 번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광우병에 걸렸을 수도 있는 소를 한국이 수입하게 된다고 하자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고 있다. 문득 작년에 본 꿀벌의 실종에 대한 다큐가 떠오른다. 꿀벌의 죽음에 따른 생태계의 파괴, 그 이후의 예측할 수 없는 파국이 예고되고 있지만 그다지 신경쓰는 사람은 없다. 광우병에 대해서 국내 언론도 간간이 위험을 경고했고 작년 KBS는 꽤 정성들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 쇠고기 협상 이전에 광우병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다.

이번 쇠고기 협상에 별 문제가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주장하듯 광우병에 걸린 소를 먹을 확률이 지극히 낮은 것은 맞는 말이다. 자동차 사고로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지만 자동차 운전을 막지 않듯 광우병에 걸린 소가 있다고 소를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억지인 측면이 있다.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한다는 '기우'라는 고사가 떠오르는데 과학적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하더라도 대재앙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거나 애써 무시하며 살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면 왜 이번 쇠고기 협상이 문제인가?

미국에 대한 정치적 선물이었다는 의혹을 제기할 수 있겠고, 단지 졸속협상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다. 영어 해석에 문제가 있는 관료들의 무능함, 거짓이 드러났는데 뻔뻔하게 같은 말을 반복하는 태도도 물론 문제였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쇠고기를 먹는 식습관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소뼈가 들어간 음식을 즐겨먹는 한국인의 식습관을 문제삼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극히 제한된 시기에 맛볼 수 있었던 쇠고기를 일상적으로 먹는 지금의 생활이 올바른지 생각해볼 일이다.

인류가 육식을 한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육식을 위해 다른 동물들을 우리에 가두고 조직적으로 기른 역사는 길지 않으리라. 대통령의 말대로 우리는 누구나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를 꼭 먹어야 할까? 농경사회에서 소는 기본적으로 농사를 짓기 위한 도구였기에 소를 많이 먹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쇠고기는 고급 한식당이나 아웃백과 같은 비싼 패밀리 레스토랑의 주요 메뉴로 사용된다. 비싼 고기를 먹는 폼나는 생활... 우리는 미국인들처럼 쇠고기를 마음껏 먹고 싶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19세기말에 시작된 근대인으로의 신체 개량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며칠 전 경향신문에서 고미숙씨는 광우병은 육식을 위해 소를 사육한 인간이 받는 천벌이라고 했다. 인간을 위해 길러졌기에 이종(異種)인 인간이 당연히 피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어제는 눈이 왔다고 하는데 요즘 환경 재앙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많아지고 있고 강도도 높아지고 있다. 쓰촨성의 지진은 대륙판의 충돌로 인한 것이라는데 그런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단지 지금 잘살아보겠다는 개개인의 몸부림은 가까운 미래의 재앙을 점점 키우고 있는 것 같다. 굳이 광우병 고기를 먹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미쳐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2008년 4월 18일 금요일

어른이 무섭지 않다

이제 와서 내가 어른이 아니라고 하면 야유를 받을 일인지 모르지만 마음만은 청춘이고 싶은데 길을 걷다 문득 내가 어른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국 YMCA의 역사를 훑어보며 '청년'이라는 말을 YMCA에서 쓰기 시작하자 그 말이 유행처럼 번져나가서 짝퉁 '청년회'를 막느라 고생했다는 대목을 발견했다. 그 전에는 소년에서 바로 장년으로 점프하는 체계였다고 한다. 아동이라는 것도 근대가 창출해낸 것이라고 하는데, 인생의 구분이 참 세분화되었구나 싶다. 유아, 소아, 어린이, 소년, 청소년, 청년, 젊은이, 청장년, 장년, 중년, 노년 등등. 그건 오르고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더 늘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결혼은 안 했으니 아직 청년에 머무른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회사에 다닌 경험 때문인지 50~60대를 만나도 별 부담없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개인적인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이면 문제가 달라지긴 하지만. 학교에서 계속 있었다면 1년이라는 학년 차이도 크게 느껴지고 3년 이상 차이나면 아득한 선배로 생각하기 쉬웠을 터이다. 대학 2, 3학년 친구들이 노땅이 되었다고 좌절하는 것이 가소롭게 보인지 이미 오래. 이런 저런 일로 사장님들과도 많이 만나다 보니 이젠 어른이 무섭지 않다. 대신 애들이 무섭다.

2008년 4월 17일 목요일

일본 축구 도입사

JFAはいつ設立されたの?

1921(大正10)年9月10日に、大日本蹴球協会(The Football Association of Japan)として設立されました。
1917(大正6)年に東京の芝浦埋立地で第3回極東選手権大会が行われ、日本は初めて公式な国際試合に出場しました。しかし、結果は中国にもフィリピンにも惨敗。この結果を受け、日本のサッカーを強くしたい、アジア諸国と対等な試合ができるようにしたいと、翌年の1918(大正7)年に東京・名古屋・豊中で大会を開催しました。出場したのは主に中等学校チームで、大学や専門学校は少数でしたが、新聞報道の誤りにより、ロンドンのメディアでは全日本選手権大会が行われたと報道されてしまいました。翌1919(大正8)年に、イギリス大使館を通じてイングランドサッカー協会(The Football Association)から大銀杯が贈られ、「全日本蹴球協会の成立を聞き、はるかに祝意を表してこの銀杯を寄贈します。全国大会で優勝したチームに授与するようお取り計らいください」と書かれた手紙が添えられていました。このときまだ全国規模の大会も行われておらず、日本のサッカー競技を統括する組織もできていませんでした。しかし、この寄贈された大銀杯を授与すべく全日本選手権大会を行うこととし、東京高等師範学校の校長であった嘉納治五郎と、校友会蹴球部部長の内野台嶺らが中心となって大日本体育協会の協力を得、1921(大正10)年9月10日に大日本蹴球協会(The Football Association of Japan)を設立することとなりました。戦後、名称を「日本蹴球協会」と改めて国際サッカー連盟(FIFA)に加盟、1974年に財団法人化した際に「財団法人 日本サッカー協会」と名称変更しました。
http://www.jfa.or.jp/fanzone/faq/jfa/answer/index.html#answer2


日本での競技の歴史

日本にサッカーがやって来たのは、一説には19世紀、明治時代のことだといわれています。初めて組織化されたのは1921年で、創立された協会は「大日本蹴球協会」でした。

その後、1925年に(財)日本体育協会、1929年に国際サッカー連盟(FIFA)に加盟。1936年には第11回ベルリン大会に初出場を果たしました。

日本チームがオリンピックで初めてメダルを獲得したのは、1968年の第19回メキシコシティー大会で、銅メダルでした。

日本のサッカーの歴史は、(財)日本サッカー協会のホームページ「主要年表」で詳細がご覧いただけます。

http://www.joc.or.jp/sports/football.html


母国からの伝来
フットボールが日本にやってきたのは1873年(明治6年)。東京築地にあった海軍兵学寮の教官として来日した英国海軍のアーチボールド・ダグラス少佐と33人の部下たちが、訓練の余暇にレクリエーションとしてプレーしたのが最初だとされている。

1873年といえば、明治新政府によって欧米に派遣された岩倉使節団が帰国した年。新しい国づくりのために、西洋の国家制度や産業、文化などを積極 的に取り込もうとする機運が日本に溢れていた時期でもあった。また、英国で初めてフットボールの統一ルールが定められ、イングランドサッカー協会(FA) が設立されてから10年後のことであった。

フットボールの普及
ダグラス 少佐らの帰国後、日本からフットボールの記憶が消えてしまう時期もあったが、1900年代に入るとフットボールは日本国内に急速に普及していく。それは学 校教育を通してという日本特有のものであったが、東京高等師範学校で教えていたスコットランド生まれのデ・ハビラントや、名古屋の第八高等学校蹴球部を指 導したオックスフォード出身のウィルデン・ハートら、多くの英国人がフットボールの普及にかかわった。

1917年(大正6年)には日本で最初のフットボールの公式国際大会が芝浦埋立地で行われ、これを契機に普及の輪は大きく広がっていく。そして翌 1918年(大正7年)1月には、現在の全国高校サッカー選手権の前身である日本フットボール大会(大阪)が、2月には関東蹴球大会(東京)、東海蹴球大 会(名古屋)がそれぞれ開催された。

しかしさまざまな事情から、それらを統括する全国的な組織が誕生することはなかった。そんな時、ある出来事がフットボール創世記の日本に起こる。そして、それが日本フットボール界を大きく前進させることになった。

誤解が生んだ貴重な贈り物
1919 年(大正8年)3月12日、東京朝日新聞紙上に突如として掲載された記事は、当時のフットボール関係者を驚かした。紙面には立派な銀製のトロフィーの写真 とともに「イングランドサッカー協会から『日本の蹴球協会』へ純銀製の立派なカップを寄贈してきた」という内容の記事が掲載されていたからだ。

外国通信社の誤解により、前年に大阪、東京、名古屋で行われた大会が、「日本にも国内を統括する団体ができ、その全日本選手権の地方予選が3カ所で同時に行われた」かのようにロンドンへ伝わった。

このニュースを受けたイングランドサッカー協会(FA)では、早速、日本へ銀杯(FA杯)を寄贈する話がまとまり、1919年(大正8年)1月には FA杯と「フットボール協会の設立に祝意を表するとともに全日本選手権の優勝チームに授与してほしい」との書簡がロンドンから送られたのだった。

同年3月28日、当時の東京高等師範校長であり、大日本体育協会会長を務めていた嘉納治五郎が英国大使館にてFA杯を受領。その際、英国大使は「これによって、日本のスポーツが一層盛んになり、そしてまた、両国の国際関係も親密になるように」と述べた。

協会設立と全日本選手権
そし て1921年9月10日に大日本蹴球協会が設立された。同年11月には全日本選手権が行われ、優勝チームである東京蹴球団にはエリオット駐日英国大使から FA杯が授与された。なお、大日本蹴球協会、ならびに全日本選手権設立の際には、英国大使館書記官ウィリアム・ヘーグが多大な尽力を果たした。

こうして4チームのエントリー(うち1チームは事情により棄権)で始まった全日本選手権は拡大を続け、日本で最も権威のある大会として受け継がれている。

一時は出場資格が限られた時期もあったが、第52回大会(1972年度・昭和47年度)から、日本協会全加盟チームに出場資格を与えるオープン化に踏み切ると、この年の大会には地域予選を含めて75チームが参加。翌年にはその数は807まで増加した。

その後も拡大の一途をたどる大会は、第78回大会(1997年度・平成9年度)からは、全国を9ブロックに分けて行っていた予選を廃止し、全国47 都道府県代表チームに出場権を与えるとともに、18歳未満の第2種加盟チームにも門戸を開放。地方予選からの参加チーム総数は6,000を越えた。

なお、決勝大会は各都道府県予選を勝ち抜いた47チームに、Jリーグ加盟チーム、JFL上位チーム、総理大臣杯上位チーム、全日本ユース優勝チーム を加えた80チームで争われているが、こうした出場資格の拡大はイングランドのFAカップの精神に習ってのこと。イングランドから寄贈されたFA杯から始 まった大会にとっては当然の流れだった。

http://www.britishcouncil.org/jp/japan-sport-footballculture-history-japan.htm


(4)日本のサッカーの歴史
サッカーは、明治維新後に日本に伝えられたと言われています。1873年(明治6年)には、当時日本の海軍兵学寮に教官として招かれたイギリス人将 校ダグラス少佐が、日本海軍の軍人たちにサッカーを教えたという記録が残されています。19世紀の終わりになると、学校の先生を養成するために設立された 師範学校を中心に、サッカーのクラブが設立されるようになります。そして、師範学校を卒業したサッカー選手が、全国各地で学校の先生となってサッカーが広 く全国に広まることとなりました。
その結果、1918年(大正7年)には現在の高校選手権のもととなる日本最初のサッカー大会が大阪でスタートするとともに、1921年(大正10 年)には、現在の日本サッカー協会のもととなる「全日本蹴球協会」が設立され、第1回の「全国優勝競技大会」(現在元旦に決勝戦が行われる天皇杯全日本選 手権大会の前身)が行われました。

http://www.mext.go.jp/worldcup/dokuhon/2_1_4.htm


일본 야구 日本での競技の歴史

日 本の社会人野球の発端は1879年(明治11年)に新橋駅の鉄道関係者によってつくられた、「新橋アスレチックスクラブ」でした。日本の景気が好調だった 1916年頃(大正5年)、企業が野球チームを持つようになり、各地で実業団野球大会が開催さ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都市対抗野球大会の誕生は1927年 (昭和2年)です。

1949年(昭和24年)2月16日には342の加盟チームを有する日本社会人野球協会が発足、1990年(平成2年)に現在の(財)日本野球連盟が設立されました。

1992 年第25回バルセロナ大会から野球がオリンピック競技になることを受け、全日本アマチュア野球連盟が同日設立されました。(財)日本野球連盟は、社会人や 少年野球などアマチュア野球の大会開催、野球技術や審判技術の向上のための講習会、少年野球の育成に努めています。

オリンピックには、1992年第25回バルセロナ大会から3大会連続出場し、バルセロナでは銅メダル、1996年第26回アトランタ大会で銀メダル、2000年第27回シドニー大会では4位入賞という成績を残しています。

2008년 4월 14일 월요일

위험사회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우리는 보통 그 점을 잊고 살아간다. 그걸 생각하다간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하던 옛사람처럼 되고 말았으리라.

울리히 벡이 학교를 다녀가기도 했지만 위험사회라는 것이 실감이 나는 것 같다. 어린애들이 납치되고 죽어서 돌아오고, 굴지의 기업인 삼성은 특검으로 뒤숭숭하고, 닭, 오리들이 떼로 죽어나간다. 생쥐깡을 비롯한 음식물 안전에 대한 논란은 음식물 가격 급상승과 더불어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안겨준다. 사회에 의심과 적대감이 넘친다. 불법 체류 노동자의 범죄가 터지니 다 내쫓아버리라고 하고, 태안의 환경 문제가 다시 지적되자 거기 사시는 분들이 알아서 하세요라는 여론이 급등한다. 이것뿐이겠는가. 느닷없는 4월의 더위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한편 Sharkwater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왔는데 상어보다 무서운 사람이야기다. 사람이 건드리지 않으면 상어도 무섭지 않아라는 것 같은데 과연 그런지는 더 알아볼 일이다.

2008년 4월 10일 목요일

미녀들의 수난-무방비 도시, 연의 황후

캐스팅만 보면 꽤 기대를 가질 만한 두 편의 영화였지만 보고난 후의 감상은 모두 별로였다. 오히려 심각한 주제는 뒤로 가고 종종 실소를 자아낼 뿐이었다.

개봉 전부터 손예진의 파격 변신이 예고된 무방비 도시를 보며 관객들은 적어도 배우들의 외모 변신에 무방비로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밖의 극적 전개에서는 제대로 당했을 것이다. 조폭의 변종인 폭력적인 소매치기단의 권력 다툼이 그렇게 심각하지 몰랐고, 로미오와 줄리엣 류의 해서는 안 되는 사랑, 부모에 대한 원망 등 비극적 요인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어 슬픔을 강요하지만 그다지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진 않는다. 강한 여장부로 분한 손예진은 영화 내내 여러 남자들의 물리적 폭력과 협박에 의외로 쉽게 굴복하며 그녀가 강한 캐릭터인 건 맞는지조차 의심을 사게 했다.

연의 황후에서 진혜림은 연의 공주으로서 최초로 여성 군주가 되기 위한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하지만 훈련을 받는 그녀의 표정은 항상 코믹하게 끝난다. 영화 내내 코믹 연기가 절반은 되는 것 같았다. 군주의 책임을 버리고 유유자적하는 멋진 남성과의 전원 생활을 택했지만 혈통은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최근 많이 보게 된 견자단의 연기는 좋았건만 좀처럼 시대상황에 맞지 않는 온갖 설정은 몰입을 방해한다. 중국의 자신감은 역사마저 간단히 무시하게 만드는 것인지, 이 영화가 원래 판타지 영화인지 모호하기만 하다.

미녀들이 수다를 떨건 수난을 당하건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두 영화는 결국 여성의 역할과 이미지에 대한 고정 관념을 고착시키는 건 아니었을까.

2008년 4월 4일 금요일

The other Boleyn girl

스칼렛 요한슨, 나탈리 포트만 뭐가 더 필요한가? 에릭 바나는 나오거나 말거나.

이 영화를 보며 스칼렛 요한슨의 섹시함은 얼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탈리 포트만과 비교가 됐기 때문인지 아니면 병상에 오래 누워있다가 출산 연기를 해서 그런지 극중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에서 섹시함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괴상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5년쯤 전에 영국사 강의를 들을 때 박지향 교수님은 헨리 8세 부분에서 앤 불린 이야기가 꽤 유명하다고 했다. 난 전혀 몰랐는데. 이 여자가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이고 정식으로 왕비가 된 것도 미드 튜더스를 보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것 같다. 거기다 메리 불린? 메리의 존재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이 영화는 너무 부각을 해서 실존 인물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위키피디아(http://en.wikipedia.org/wiki/The_Other_Boleyn_Girl)를 찾아보니 실존 인물이지만 극정 설정과 달리 메리가 앤의 언니라는 의견이 더 많고 프랑스 궁정에 갔다 온 것도 메리란다.

워낙 걸출한 두 여배우가 주연을 맡아 그녀들의 섹시함 대결(영화 전단지엔 어김없이 뜨거운 베드신을 찬사하는 문구가 포함되었다)에 시선이 집중되기 쉽지만 영화 전체의 흐름을 보자면 긴 이야기를 다 넣기 위해 설렁설렁 넘어가는 부분이 많음을 지적할 수 있다. 앤 불린이 헨리와 처음 만났을 때와 프랑스에 다녀온 이후 변한 점을 느낄 수 없었는데도 헨리는 아들을 낳은 메리를 버리고 앤에게 달려든다. 몸을 허락하지 않는 앤을 위해 캐서린을 버리고 로마 가톨릭에도 등을 돌린 헨리의 모습은 미색에 미혹되어 정신이 나간 발정난 남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단순히 정욕을 위해 그렇게 엄청난 정치적 결정들을 내렸을까? 이런 것들은 원작 소설을 봐야 제대로 잘못을 추궁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헨리 8세는 너무나 감정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튜더스의 헨리 8세가 너무 날씬하다 못해 빈약해 보이는 반면 에릭 바나는 원래 체격도 있는데다 잔뜩 부풀려진 의상을 종종 입어서 덩치에 있어서는 그림을 통해 접하는 실제 헨리 8세에 근접한 것 같다. 앤 불린은 그림 속의 인물보다 너무 예쁘지만 그 시대에는 나탈리의 미모가 부족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목인 The other Boleyn girl은 당연히 메리를 두고 말하는 것이지만(극중 둘의 어머니가 헨리에게 Which one?이라고 묻듯) 영화의 비중으로 보면 오히려 앤 불린이 The other 쪽인 것 같다. 작가는 메리가 앤의 위치에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야심가가 아닌 순수하게 남자를 사랑한 여자 쪽이. 사랑은 얼마나 허망하던가. 메리는 왜 헨리를 사랑했으며 어떻게 계속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2008년 4월 3일 목요일

[일드] 허니와 클로버





젊은 청년이 눈물을 펑펑 쏟으니 가슴이 아프다. 한편 이 청년의 오해를 생각하니 더 기가 막히다. 그는 왜 우는가? 착각했기 때문이다.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네잎 클로버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샌드위치 속에 숨겨진 네잎 클로버를 구하기 위해 하구짱이 얼마나 고생했을까라며 그녀의 정성에 감탄했던 것이다. 원작인 책이나 먼저 나온 애니메이션 판을 보지 않아서 제목인 허니와 클로버에서 클로버가 뭔지 궁금했는데 결국 이 클로버들인가 보다. 하지만 내 경험상 네잎 클로버가 의외로 집중 서식하는 지역이 있기도 하고, 요즘은 돈으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드라마의 분위기상 하구미가 돈내고 샀을 것 같진 않지만 운이 좋아 한꺼번에 여러 개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좋아하는 여자로부터 정성이라 생각하고 감동하긴 했겠지. 허니와 클로버 극장판에서 워낙 실망을 했던 터라(아오이 유우의 머리는 정말...) 드라마는 상대적으로 잘 만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러모로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것은 드라마에 대한 것인지 내 청춘에 대한 것인지.

엔딩곡 '캔버스'는 돌아오지 않는 20대의 사랑에 대한 애잔함이 잘 표현된 좋은 노래였다.

2008년 3월 30일 일요일

사슴남자 아오니요시-두 번의 키스로 끝난 드라마




노다메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타마키 히로시와 꾸준히 명성을 쌓아올린 아야세 하루카라는 두 스타를 앞세운 사슴남자 아오니요시가 종영되었다. 보조 캐릭터들의 네임 밸류도 상당해서 시작 전에는 꽤 기대를 모았지만 지속적으로 시청한 한국의 팬이 많을 것 같지는 않다.

타마키가 인기를 얻은 노다메 칸타빌레는 만화적인 비현실성과 체코, 프랑스를 넘나드는 촬영지로 인해 일본색이 전면에 부각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그야말로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일본 드라마는 보통 한국과 별 차이가 없는 도시적 배경이 바탕으로 깔린 것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오래된 도시인 나라, 오사카, 교토의 풍경, 각 도시의 상징, 전설이 드라마의 핵심인 이 드라마가 한국 대중에게는 낯설 수 밖에 없다.

물론 이 드라마가 한국에서 인기를 끌어야할 이유도 없고, 일본에서 대충 인기를 끌면 된다. 하지만 요즘 일본 드라마는 한국 케이블 방송 편성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한류 열풍에도 불구하고 일본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직접적인 리메이크인 하얀 거탑은 물론이고 뉴하트의 설정은 일본의 의룡을 떠올리게 한다.

여하튼 이 드라마는 일본 드라마의 전반적인 시청률 하락에도 불구하고 최고 인기 드라마의 시청률인 20%선에 근접조차 하지 못했다. 배우들의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인기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극적 구성의 치밀함을 논하고 싶지는 않으나 하이라이트라할 '눈'의 쟁탈전과 메기를 누르기 위한 의식이 마지막화 초반에 끝나버려 김이 빠진 부분이 없지 않다. 타마키의 분열증적 캐릭터는 노다메에서 치아키의 매력과 너무 이질적이었고, 아야세는 호타루의 빛에서 개그 캐릭터로 성공한 것을 밀고 나갈 셈인 모양인데 이번에는 성공적이지 않았다.

가장 주목할만한 캐릭터는 최근 각종 드라마, 영화에서 주가를 높이고 있는 타베 미카코인 것 같다. 드라마 초반 화난 얼굴로 결석하고 칠판에 낙서를 해서 선생을 골탕먹이는 의문의 소녀로 등장했지만 막판 타마키, 아야세와 대동단결하여 일본의 붕괴를 막는다. 이 배우는 귀엽긴 하나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는데 꾸준히 등장하는 것을 보니 연기력이 상당한 모양이다. 하지만 드라마 막판 타마키와의 키스신은 역대 최악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사프리의 이토 미사키와 카메나시 카즈야의 키스와 비견할 바는 아니라도.

드라마의 주역 중 하나는 때로는 CG로 변신하기도 했던 로봇 사슴이다. 일본의 기술력을 칭찬해야 하는지 코웃음을 쳐야 하는지 애매한 인조 사슴의 연기는 극에 몰입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1분기 드라마 중 아직 다 못 본 장미없는 꽃집을 제외하면 요즘 일본 드라마가 왜 이런가 하는 통탄을 해 마지 않을 상황이다. 허니와 클로버는 아름다운 배우들로 꾸몄으나 영화판만큼이나 실망을 안겨줬고, 내일의 키타요시오는 초반의 실망감을 후반에 약간 만회한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아직 2분기 드라마에 대한 정보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톱스타들을 끌어 모아서 졸작을 만들지는 말기를 소망한다.

2008년 3월 25일 화요일

Into the wild



처음에는 라스트 킹 오브 스코틀랜드가 떠올랐다. 하지만 라스트 킹의 니콜라스 게리건은 순진한 마음에 우간다로 떠났지만, 인투 더 와일드의 Christopher McCandless는 아니 알렉산더 수퍼트램프는 꽤 작정을 하고 집을 떠난다. 영국 지식인으로서의 오만한 봉사 의식과 달리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가정의 부조리를, 사회의 요구들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떠난다.

월든을 탐독하던 그의 선택은 무엇인가. 영화를 보면서 그가 언젠가는 사회로 돌아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하망하게도 그는 독초를 먹고 외롭게 죽는다. 그럼에도 영화는 그가 본 마지막 장면을 상상하며(실제 이야기지만 마지막 장면 만큼은 상당한 상상력을 발휘했으리라) 그에게 있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회에는 없는 무언가로 와일드한 태양을 제시한다.

주인공은 알래스카로 떠나기 직전 만난 노인에게 당신은 두려움이 많다고 약올렸다. 하지만 알렉스는 어떨까. 자신이 원하는 바를 극한까지 추구한다는 면에서 용기가 많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출발 자체가 도피였다. 시궁창에서 살지 않겠다고 뛰쳐나가는 것은 좋으나 누구도 납득하지 않는 알래스카에서의 삶 속에서 그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2008년 3월 7일 금요일

도킨스의 개체 중심적 사고

...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들 중 절반은 잠재적으로 배우자가 될 가능성이 있고, 새끼의 양육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이용 가치가 있을 잠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같은 종에 속하는 성원들은 서로 아주 닮아 있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생활방식으로 유전자를 보존하는 기계이므로,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놓고 다투는 특히나 직접적인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

이상원, 이기적 유전자와 사회생물학, p.50.(ㄴ도킨스 글 직접 인용한 것)

동족상잔이야말로 자연스럽다?

2008년 2월 19일 화요일

조카들

어린애들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준다. 조카라는 존재들은 내가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데 큰 공헌을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꽤 곤란한 감정을 안겨준다. 병으로 내 다리를 찍어대는 너무 솔직한 남자 조카의 물리적 행동이 아니더라도.

제일 큰 조카는 형과 내가 형제인데 너무 안 닮았다고 연방 말한다. 유전에 대한 책을 대충 읽어본터라 자식에게 부모의 특성이 매번 랜덤으로 섞이니 완전 딴판인 형제가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형과 나는 정말 별로 닮지 않은 모양이다. 부모와 자식이 닮지 않으면 상당한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킬 일이지만 형제간이야 뭐.

이 조카는 요즘 키가 쑥쑥 크면서 계속 배가 고프다고 한다. 학교 공부는 곧잘 하는 모양인데 재치가 번뜩이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머리쓰는 퍼즐을 잘 하는 것을 보니 뿌듯하면서도 내가 하지 못한 것을 조카가 하니 자신에 대해 좀 실망스럽기도 하다.

작은 조카는 자신의 성 때문에 고민이란다. 나도 성 때문에 몇 번 얼굴 붉힌 적이 있지만 나이 먹고 나면 그런대로 견딜만하고 대충 맞받아치는 여유도 생기건만 어릴 적엔 견디기 힘들 수 있다. 그래서 어머니 즉 형수 성을 따라 개명하고 싶다는 소망을 말한다. 성을 바꾸는 건 사실 사회의 (비록 부당한 면이 있더라도) 질서를 무너뜨리고 큰 혼란을 겪을 수 있는 일이라 신중해야 하건만 평생 따라다니는 이름이 어떤 이유에건 놀림의 대상이 된다면 괴롭다.

제일 어린 조카는 영악하다. 둘째는 원래 그런 건지 몰라도 어떻게든 형에게로 관심이 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같다. 돌보는 사람을 힘들게 한다. 말도 못하는 젖먹이들은 참 어떻게 다뤄야할지 난감하다.

2008년 2월 12일 화요일

Capacity

휴대폰을 바꾸고 좋은 점이 많았다. 내장 카메라도 있고, 쓰지는 않지만 mp3도 재생할 수 있고, 무엇보다 각종 저장 공간이 늘어났다. 그런데 오늘 휴대폰 화면에 경고 문구가 뜨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54개 저장 공간이 남았습니다.

통화기록이나 문자 메시지나 전부 처음 샀을 때부터 다 기록되어 있기에 이건 한계가 없다보다 싶을 정도였건만 결국 문자는 250개까지가 한계인가보다. 그래서 '쓸모없는' 문자들을 지워나간다.

그렇게 공간을 확보했건만 62개의 공간이 남았다고 다시 경고 문구가 나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더 지워나간다.

아직 오지도 않은 70개의 문자를 걱정하며.


5학년이 될 현지는 내 이전 휴대폰을 보고 저장된 번호가 200개가 넘는다며 놀라워했다. 90%는 한번 이상 연락하지 않은 사람이건만 아마도 앞으로도 없을 쓸모를 위해 혹은 단순히 지우기가 귀찮아서 남겨두고 있다.

기계는 물리적 능력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의 마음은 그나마 유연한 것 같다. 하지만 우울한 뉴스들을 볼 때면 한계는 깨질 위기에 직면하다가 간신히 회복되거나 조금씩 팽창된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거나 모든 것을 체념하는 상태.

승환옹이 노래하듯 너무 많은 이해심은 무관심일 수도 있다. 나의 이해심은 사해와 같이 넓으니 분노하라 일도 별로 없고 그래서 씁슬하다.

2008년 1월 5일 토요일

2008년, 소설들

어느덧 2008년도 달리고 있다. 내가 잡을 수 없는 속도로. Let it be. Let it go.

학기가 끝난 후로는 Lost를 보는 것 이외의 시간에 주로 소설을 보고 있다. 김영하의 '빛의 제국'을 시작으로, 전에 사두었던 2005, 2006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이어, 추천을 받은 '그리스인 조르바'와 '테메레르'를 읽고 있다. '빛의 제국'의 침울한 분위기는 이상문학상의 단편들을 보며 더 가라앉기도 하고 정화되기도 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서울의 짐을 줄이기 위해 원주로 옮길 생각이었는데 읽다 보니 너무 좋아 다시 서울로 가져왔다. 저자 약력에 나오듯이 카잔차키스는 니체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동안 니체가 말한 새로운 인간상이 손에 잡히지 않아 고민했는데 조르바라면 가깝겠다 싶었다. 그렇게 느끼는대로 살면 좋으련만.

'테메레르'는 판타지 소설을 많이 보던 지인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는데, 의외다. 여성 저자가 군인들의 이야기를 써서 그런지 섬세한 심리 묘사를 보다 보면 너무 귀여운 것 아닌가 싶다. 또 눈높이를 모든 연령층에 맞추려고 했는지 꽤 쉽게 읽힌다. 프랑스군에서 뺏은 중국 출신의 용이 부화하자마자 영어를 하는 설정도 재밌다. 용이 아무리 천재라도 나면서 영어를 안단 말인가? 아니면 원래 모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나? 쉽게 쉽게 페이지가 잘 넘어가니 흐뭇. 3권까지 나왔는데 도서관에 있는 2권은 대출중이라 너무 빨리 읽을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