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31일 목요일

재수술

예지가 지금 수술장에 있다. 아침 이른 시간 수술 받으러 가기 전 예지의 얼굴은 근래 어느 때보다 여유로웠다.

예지야 이번에도 잘 견뎌주렴. 내일이 백일이잖니.

2013년 10월 4일 금요일

동평화시장 두번째 방문

여름에 태어난 딸 아이의 옷은 많지 않다. 처음에 당장 필요한 것만 사다보니 거의 배냇저고리만 있었고 추운 날씨에 대비할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리하여 두번째로 동대문에 갔다. 역시나 이번에도 동평화시장 2층에 있는 매장, 특히 해피유통이 주요 목적지였다. 지난 번에는 늦게 가는 통에 해피유통은 영업이 끝나 있었고, 이공만 갈 수 있었다.

이번에는 12시 경에 도착해서 무난하게 매장에서 물건을 고를 수 있었다. 위치가 어디인지 잠깐 헛갈렸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그곳이 해피유통이었다.

가보니 해피유통은 상가의 매장 중에서 규모가 큰 편이었다. 몇 칸을 차지하고 있었고, 한쪽에 신생아용 옷들이 한 무더기, 또 다른 쪽에 돌 지난 아이들 용 옷이 한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먼저 온 사람들은 거의 다 신생아용 옷을 고르고 있었다.

자리를 잡기도 어려울 정도였고, 통로가 좁다보니 지나가는 사람들과 수시로 부딪히게 된다. 그래도 소문의 그곳에 왔으니 옷을 건져보자는 심정으로 옷더미를 뒤적거려댔다. 전에 본 것처럼 장당 2,500원이어서 위아래 세트로 하면 5,000원이 된다.

브랜드는 잘 모르지만 많이 들어본 이름이 압소바, 해피랜드, 파코라반 등의 옷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하지만 추울 때 입기엔 얇아 보이는 것들이 많아서 망설여진다. 먼저 온 분들이 다 집어갔는지 가장 작은 사이즈인 75가 80에 비해 적어보였다. 그리고 간혹 옷들에 무언가 묻어있었다.

위아래 짝을 맞추기 어려워 고민하며 열심히 고르다보니 땀이 삐질 나는 와중에 또 다른 칸에 있는 주인 아저씨에게 무언가 물으러 갔더니 그쪽엔 세트로 된 내복이 똑같은 가격인 5,000원에 판매되고 있었다.

아내는 이걸 사면 되는데 괜한 고생을 했다고 말했고, 그 세트로 세 벌을 골랐다. 다만 그 옷은 위에 적은 유명 브랜드는 아니다. 아저씨 말로는 백화점에서도 판다고 한다.

세 벌을 골라버려서 먼저 고생하며 집어든 브랜드 내복들을 덜어냈다. 그래도 세 쌍은 남겨서 구매했다.

도합 6세트, 3만원 어치였다. 아저씨께서 양말 두 켤레(원래는 하나만 준다고 하셨는데 어쩌다 하나 더 얻었다)를 덤으로 주셨다.

해피유통에서 이거 외에도 우주복을 살까, 조끼를 살까 고민하던 차였는데 이공에도 가보고 싶어 이동했다. 전에는 주인 아저씨, 아주머니가 같이 계셨는데 오늘은 아저씨만 계셨다. 여기는 내복이 2,000원씩인데 수량은 훨씬 적었다.

내복을 더 살 건 아니라 우주복을 둘러봤는데 마음에 쏙 드는 건 없었다. 하지만 아내가 사고 싶어하는 것들이 있어서 하나 샀다. 우주복들은 3, 6, 9, 12달 식으로 판매가 되었고, 3달을 할까 6달을 할까 고민했는데 6달은 너무 클 것 같아 그냥 3달로 했다.

가격은 만 원(발목까지만 있어서 발을 내놓을 수 있는 건 8천원이라고 한다)이었다. 여기서도 양말 두 켤레를 덤으로 얻었다.

아저씨에게 전에도 여기 와서 속싸개를 산 적이 있다고 했더니 나를 알아보겠다고 말씀하셨다. 지난 번엔 물건이 없어서 못 팔았다고 말하는 걸 보니 기억을 하시는 것 같기도 하던데 다른 말을 들어보면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잘 끼워맞춘 말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여하튼 시간이 많지 않았던 관계로 이번엔 이렇게만 사고 돌아왔다. 집에 와서 브랜드 내복 하의의 라벨을 보니 2010년에 만들어진 옷이었다. 그래도 입혀보니 깨끗하고 새 옷 같다. 아이가 작아서 옷이 많이 클 줄 알았는데 너무 크지도 않았다.

2013년 8월 28일 수요일

동대문종합시장에서 천 기저귀 구매

믿기지 않던 시간들(짧게는 아내와 딸의 입원 기간인 50일에서 길게는 심장병 진단이 떨어진 5월 초부터 거의 넉 달)이 지나가고 꿈만 같이 아기가 집에서 자고 있다.

임신 중에 아내가 갑작스레 입원하며 내가 동대문에 가거나 인터넷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하곤 했다. 오늘은 천기저귀를 사러 동대문에 다녀왔다.

어찌된 연유인지 몰라도 인터넷에서는 동대문종합시장 A동 1층에 있는 조광상회가 유명하다. 천기저귀로 많이 쓰는 소창 한 필을 18,000원에 판다는 내용을 많이 보고 저렴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그냥 이 가게를 찾아갔다.

전에 동대문에 옷을 사러 가면 두타나 밀리오레 같은 곳에 갔고, 임산부를 위한 옷도 밀리오레 지하에서 샀던 터라 며칠 전 동평화시장에 갔던 거나 오늘 동대문종합시장에 간 것은 모두 첫 경험이었다.

동대문역 9번 출구로 나가서 좀 가다보니 동대문종합시장이 나온다. 그냥 들어가서 돌아다녔는데 D동이었다. 두리번거리니 B동이 보인다. B동에는 광목 같이 기저귀용으로 쓸만한 천을 파는 가게들이 많이 보였으나 A동에 있다는 조광상회를 찾기 위해 그냥 지나쳤다.

못 찾고 나와보니 결국 B, D가 붙어있고, A, C가 또 다른 한 묶음을 이루는 구조였다. A동에는 이불 파는 가게가 많고 조광상회 같이 천을 파는 가게는 거의 없었다. 어쨌거나 목표했던 곳은 발견했다. 통로의 맨 끝 가게였다.

기저귀천을 묻자 이것저것 말을 하려다가 인터넷보고 왔냐고 하길래 그렇다고 하니 많이들 산다는 천을 꺼내주었다. 나로서는 이게 그 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으나 인터넷의 정보를 바탕으로 장사를 하시는 분이니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고 두 필을 샀다. 역시나 가격은 한 필당 18,000원.

종이가 붙어있길래 읽어보니 강화도에서 만든 제품이었다. 상표랄까 그림이 있는데 방울이 두 개다. 그런데 '쌍방올'이라고 적혀있었던 것 같다.

여하튼 그렇게 천을 사고 있는데 알고보니 옆에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조광상회와 연결된 '이모님'이었다. 전화를 할 것도 없이 그 분을 따라 갔다. 아주머니는 라헬 홈패션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갖고 있었다. 전에 인터넷에서 본대로 지하로 갔는데 A동이 아니라 D동 지하다. 적지 않게 걸어야했다.

약간 당황스럽게도 인터넷에서 소위 오바로크 비용으로 한 필 당 5,000원을 보고 왔는데 7,000원을 부르셨다. 한 번 협상을 시도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아 인건비가 올랐나보다 하고 알았다고 했다. 다른데 가져가서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가능한 시간을 아끼느라 그냥 맡겨버렸다.

이모님은 3, 40분 정도 기다리라고 했다. 실제로는 거의 50분 정도 기다려야했던 것 같은데 기다란 천 두 뭉치가 20개의 기저귀용천으로 변신해있었다. 쌓아놓으니 제법 두께가 있어 간신히 백팩에 넣을 수 있었다.

집에 가져와 한 번 삶으려다가 집에 있는 걸로는 한 번에 삶기가 힘들어보여 그냥 세탁기를 한 번 돌려보았다. 누런 색은 거의 그대로 남아있어서 용량이 되는대로 삶아보기로 한다. 하나 이상한 건 20개 기저귀 중  두 개만 길이가 다르다는 점. 하나는 너무 길고, 하나는 짧다. 다른 길이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었다. 실수로 잘못 자르셔서 두 개만 길이가 다르게 만들어졌던 게 아닐까 싶다.

그 외 며칠 전과 오늘 동대문에서 물건 산 이야기를 덧붙여본다.

속싸개가 급하게 필요해 동평화시장의 그 유명한 해피유통과 이공에 들르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5시가 넘어 늦게 도착했더니 시장 전체가 파장 분위기였다. 해피유통도 닫혀있었고, 돌아다니는 와중에 몇 개 유아의류 가게가 열려있는 것을 보았다. 이공을 찾으러 걷다보니 이공은 깊숙히 들어가야 찾을 수 있었다. 아쉽게도 속싸개는 한 종류만 있다고 하길래 그거라도 달라고 했더니 두 개 사면 5,000원에 주신다고 하셔서 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크기가 일반적인 속싸개보다 작았다. 보통은 80cm 이상인데 이거는 70cm 대였다. 쓸 수는 있겠다 싶었다.

속싸개를 급한대로 사고 다른 가게에서 가제수건(거즈가 왜 가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을 두 뭉치 샀다. 4,000원 씩이었는데 동대문종합시장에서 3,000원에 파는 걸 알았다면 안 샀을 것이다(오늘 하나 샀다). 역시 급한대로 사버렸다. 이 가게는 속싸개가 일괄 만 원씩이라는데 조금 비싼 것 같아 안 샀다. 동평화시장 입구 근처의 다른 가게를 들르니 좀 괜찮은 것을 8,000~10,000원에 팔길래 8,000원짜리 곰돌이 얼굴이 그려진 속싸개를 하나 샀다.

방수요는 알만한 사람들이 없어도 된다고 하는데 아내는 괜히 하나 필요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어서 하나 사기로 했다. 오늘 기저귀가 만들어지는 시간 동안 종합시장을 돌아다니다 한 곳에서 샀다. 큰 사이즈는 일괄 25,000이었고, 작은 사이즈는 15,000원이었는데 작은 걸로 하나 샀다.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다지 이거저거 사라고 권유하지도 않고 내가 산 품목을 말씀드리자 그것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제수건 10장을 더 사고 말았다.

2013년 8월 7일 수요일

수술

아이의 수술날짜와 시간이 결정되었다. 멀지도 않고 바로 내일, 아침 8시.

총동맥간증 혹은 동맥간증에 대한 라스텔리 수술. 아이는 예정일보다 한 달 일찍 태어나 보름만에 큰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이야 되겠지만 얼마나 잘 되느냐가 관건이다. 달리 방법이 없으므로 긍정적인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2013년 8월 4일 일요일

추울까

딸의 몸무게가 어제보다 40그램 늘어 2.6kg이 되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어제 2.56, 그 전에 2.55, 그 전에 2.56, 그 전에 2.53이었던가. 조금 헛갈린다. 하여간 처음에 2.49kg에서 시작해 언젠가 2.53kg이 되고 늘다가 다시 줄었고 이후 지금까지 증가하는 추세다.

아직도 빠는 힘이 강하진 않은데 그래도 먹은 것은 잘 소화해내고 있다고 한다. 아까 만났을 때는 분유를 먹기 전이었는데 반 정도만 젖병으로 먹었다.

어제부터인가는 담요를 덮지 않고 옷만 입은 채로 있었다. 아내는 추울 것 같다는 말을 했고, 그래서 잠깐 담요를 덮어주었다.

딸은 오늘 어제처럼 눈을 활짝 뜨지 않았고 거의 계속 자고 있었지만 한 번 정도는 눈을 뜨고 우리를 봐주었다.

2013년 8월 3일 토요일

효녀

딸이 태어난지 열흘이 되었지만 아직 긴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기에 우리가 생물학적 부녀 관계라고 해도 진정한 인간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나는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고 아이가 그 말에 반응하는 듯 보이면 기뻐한다.

어제 딸이 눈을 떠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소원은 오늘 곧바로 이루어졌다.

오늘은 장인 어른이 동행했다. 두 명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내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장인 어른이 내게 와서는 아이가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있더라는 소식을 전했다.

설마 하루만에 그렇게 바뀌었을까 의문을 가졌지만 곧 내 눈으로 정말 그렇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는 정말로 양쪽 눈을 뜨고 있었다.

아직 힘이 없는 듯한 눈동자였지만 커뮤니케이션의 주요 통로인 눈을 통해 서로를 볼 수 있게 되니 아이가 더 이상 아무 것도 모르는 신생아가 아닌 것 같다.

옆으로 누워 먼저 와 있던 엄마만 바라보다가 내가 가서 부르니 내 쪽으로 눈동자를 움직여주었다. 엄마 손을 꼭 잡고, 다른 손으론 내 손도 잡아주었다.

그리곤 조금 후에 잠이 들었다.

하루만에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준 이 아이가 효녀가 아니고 무엇인가. 오늘도 아이가 잘 자기를 바라며, 오늘의 작은 성취에 기뻐하며 앞으로는 너무 자주 소원을 빌지는 않기로 했다.

설국열차 - 안 본 영화 이야기

봉준호 감독이 설국열차라는 제목의 신작을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는 여러 차례 들어왔는데 이제 실제 작품이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영화 평점이 전작들에 비해 낮다는 기사를 봤지만, 어제까지 개봉 3일만에 160만이 넘는 관중을 동원했다고 한다.

많지 않은 극장행 경험 중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등 세 편이나 포함되어 있으니 알게 모르게 이 감독의 영화들은 내 마음에 꽤 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영화는 사정상 보러 갈 여력이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전작들에 비해 기대감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물론 보지 않고 이런 말을 쓴다는 건 무책임하긴 하다.

예고편, 인터뷰 등을 통해 파악한 핵심 이야기는 이런 것들이리라. 지구는 인류가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고, 오직 설국열차라는 거대한 기차 안에서만 살 수 있다. 기차 안에는 재미있게도 상하위층의 인간들이 골고루(?) 탑승하고 있다.

즉 인간 사회란 것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열차 속의 인간이 인류 전체이자 인류 그 자체로 남게 된 상황을 봉준호 감독이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열차 속에는 아마도 독재자가 있는 것 같고, 사회가 그렇듯 하층민은 열악하게, 상층민은 여유롭게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는 영화를 보지 않아 모르겠으나 하층민들은 도끼를 들고 반란(?)을 일으켜 상층민들이 사는 열차칸으로 전진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설국열차의 모든 구조를 알고 있는 송강호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도끼든 이들의 봉기가 성공하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과연 인류가 다 죽게 된 상황, 설국열차 안에 있다고 해도 긴 시간의 생존이 보장될 것 같지는 않은 상황에서 이 모든 억압과 다툼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렇게 따지면 설국열차의 세팅이 아니라 지금 인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인지 모르겠다. 생물학적 사망을 피할 수 없는 인간들이 아웅다웅할 필요가 있나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한편으론 자연 자체가 적자생존의 공간이고, 인간사가 언제나 투쟁의 연속이라면 계급간, 집단간 충돌도 불가피하다.

아침밥을 먹다가 문득 근대 사회의 이익집단과 비교되는 전통 사회의 공동체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을까 의문이 생겼다. 인간의 지리적 이동이 근대에 비해 크게 적었던 것을 제외한다면 인간 사이의 갈등이라는 차원에서 더 좋았던 시절이라고 볼 수만은 없지 않을까라는. 물론 대부분 아는 이웃들 사이의 삶과 옆집의 인간이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회는 꽤 다르긴 할 것이다. 하지만 신분 간의 갈등 관계로 인한 불만이 아무리 하층민이 신분 상승을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작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실제 전통사회의 모습을 보기 위해선 더 읽어보아야 할 것이 많겠지만.

동물 집단에도 있는 상하 구분이 인간 사회에 있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성경의 천상세계 그리고 지옥에도 온갖 등급이 있는데 인간의 평등이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

물론 봉감독이 평등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상상하는 건 아니고 이야기를 두서없이 적다보니 이렇게 흐르고 말았다. 한국의 보수 인사들이 문화계가 좌파들에게 잠식당했다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그 주요 인물이 봉준호인 이상 누군가는 이 영화도 좌파의 흉계로 여기고 있을 테다.

이렇게 상상의 나래만 펼칠 것이 아니라 언젠가 실제로 보고 더 생각해보고 싶다.

2013년 8월 2일 금요일

아이의 눈을 번쩍 뜨게 한 이야기

아직 정식 이름이 없는 내 딸이 태어난지 9일째다. 아이는 보러 갈 때마다 거의 언제나 자고 있다. 병원 측에서 일부러 그 때 재우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냥 그 시간이 밥 먹고 쉴 타이밍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아이는 계속 자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보러가면 아내가 계속 이야기를 해주는 편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눈을 좀처럼 뜨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의 눈동자를 보는 것이 나로서는 상당히 간절히 바라는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가끔씩 눈을 떠주지만 두 눈을 제대로 뜬 적은 아직 없었다. 며칠 전에는 한쪽 눈만 떴고, 그 다음 날에는 다른 쪽 눈만 떴다. 어젠가도 양쪽 눈을 다 뜬 적은 있지만 너무 조금만 열렸을 뿐이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아이가, 더구나 한 달을 일찍 나온 아이가 눈을 좀 못 뜬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의료진에서도 그게 문제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도 언제나 눈을 감고 있는 아이는 아직 완전히 이 세상에 온 것 같지가 않게 느껴지고, 아직도 엄마 뱃속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느낌이 들어 이 세상을 마주하길 바라게 된다.

그래서였을까. 오늘 아이 엄마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에 커서 공부를 못 해도 된다, 학원 억지로 보내지 않겠다, 하고 싶은 걸 해라라는 일련의 말들을 했는데 아이가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떴다가 감았다.

나는 마치 엄마의 말이 깜짝 놀랄 이야기라 정신이 번쩍 든 아이가 눈을 뜬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사교육을 살살 시키고, 공교육과 입시 시스템의 압박감을 덜어준다는 이야기가 아직 세상을 모르는 신생아의 눈을 뜨게 만들 정도로 솔깃한 제안이었던가 싶어 웃고 말았다.

내일은 딸이 좀 약한 이야기를 들려주더라도 보고 싶은 그 눈동자를 공개하길 바란다.

2013년 8월 1일 목요일

아빠

딸아이가 태어난지 일주일이 지났다. 어려움이 많았던 터라 하나하나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고통의 시간, 기억을 되새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현실적으로 내가 맡아서 처리해야 할 일도 많기에 무언가를 차분히 적기가 쉽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짧은 생에서 자식이 태어나서 내 눈 앞에 있다는 것은 앞으로 천천히 적게 될 지난 시간들과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는 온갖 일들에도 불구하고 감격이었다.

나도 아빠가 되었다.

곧 딸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이야기는 이어서 적어보기로 한다.




2013년 6월 27일 목요일

단편적 감상 정리

그동안 읽고 본 것들이 많지만 딱히 정리를 해두지 못했다.

읽은 것으로 우선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있겠다. 영국과 파리를 재미있게 비교한 도입부만 영문판으로 몇 번을 읽다 그만두었는데, 전자책으로 대출이 가능해서 번역본으로 읽었다.

18세기말 혁명 전야의 프랑스와 영국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특히 프랑스의 현실이 처참하게 묘사되어 있다. 더구나 혁명은 주동자에 의해 예고되었던 것처럼 되어 있었고, 혁명을 주도한 소위 민중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담겨있다. 소설 막판의 희생은 디킨스의 재미있는 설정으로 보인다. 프랑스 귀족을 대신해 단두대에서 죽은 영국인은 무엇을 의미할까.

스타 배우가 주연한 영화 개봉을 기회로 '위대한 개츠비' 마케팅이 출판계에 활발했다. 열림원은 김석희 번역본으로 새 책을 내놨는데, 아마 실용서로 구분해서 신간임에도 50% 할인을 해서 팔았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책을 중고로 조금 더 싸게 사서 읽어봤다. 번역은 정확성은 대조를 하지 않아 모르겠으나 매끄러웠다.

그러나 유명하다는 것만 알고 내용은 전혀 모르던 이 소설을 읽어본 결과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김석희씨가 후기로 쓴 말 같은데 개츠비가 '위대한'지는 모르겠고, '대단한' 사람이긴 하다. 부르디외의 구별짓기가 생각나고, 벼락부자가 더구나 부당한 돈으로 일어선 젊은이의 앞날이 밝기는 힘들다는 뻔한 교훈이 생각난달까. 오히려 개츠비는 불쌍한 인간이라는 게 정당한 평가 같다.

영화들 중에서 최근에 본 것으로 시작해보자.

더스틴 호프만의 영화 '콰르텟'은 가슴 따뜻한 이야기였는데, 실제 음악인들이 영화에 다수 출연하였다. 그리고 이제야 생각나는 것이지만 주연 배우 네 명이 모두 음악인은 아니었던 것처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젊은 시절 그들의 사진이 올라간 것은 그들의 음악적 성취에 대한 경의라기보다 음악을 했건, 연기를 했건 그들이 노년까지 열심히 살았음을 축하하는 그리고 존경을 표하는 의미였던 것 같다.

'프랭크와 로봇'은 흥미로운 소재지만 과연 새로운 점이 있을까 의구심을 품으며 보게 되었고, 영화 막판의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지며 영화를 한 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의지와 무관하게 사라지는 인간의 기억, 원한다면 저장소에 영원히 기억을 간직할 수 있는 로봇. 기억이 사라져도 사랑은 알아본다는 기막힌 진리? 가장 익숙하고 잘 하는 것을 집중하면 기억을 찾을 수도 있다는 희망? 여하튼 기대보다는 상당히 좋은 영화였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보고 싶다. 오늘은 이만.

2013년 2월 27일 수요일

아카데미 시상식

BAFTA를 봐서인지 아카데미 시상식이 수상자에 있어서는 크게 새로울 것이 없었다. 골든 글로브까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 세 개의 시상식이 있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주 잘 만들었거나 운이 좋은 사람은 몇 달 안에 영광스러운 상을 끌어모을 수도 있다.

문자 중계로 수상 소감을 얼핏 봐서 수상자들의 떨리는 감사의 말들이 그다지 감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단점이 있었다. 어쨌거나 장장 세 시간에 달한 시상식을 봤는데, 호아킨 피닉스가 열연한 더 마스터가 아무 상도 얻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고, 제로 다크 써티도 아마 수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르고는 이번에도 좋은 상을 받아갔고, 장고 언체인드, 링컨 같은 순전히 미국적인 영화들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스필버그의 링컨이라니, 과연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놨을지 빨리 보고 싶다.

아직 보지 못했고 국내 개봉중인 실버 라이닝스 플레이북이 제니퍼 로렌스로 여우주연상을 배출했는데, 생각해보니 아직 제니퍼의 출연작을 하나도 못 본 것 같다. 이 영화에 대한 기대도 커진다.

레미제라블은 이번에도 앤 해써웨이에게 여우조연상을 안겼지만 많은 상을 받진 못했다. 휴 잭맨은 시상식 공연에서 제일 처음 나와 단독샷으로 많이 노출되었지만, 러셀 크로우는 이젠 조연이 어울리는 배우가 된 것인가 싶어 마냥 안타까웠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3D와 컴퓨터 그래픽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이안이 감독상을 받았다. 이런 영화에서 감독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궁금한 일이다. 특수효과를 이러저러한 식으로 만들어달라고 주문을 하긴 했겠고, 그게 전체적으론 더 중요한 일이긴 할 것이다.

많은 남자배우들이 무대에서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하고 나와서 아니, 턱수염은 수많은 나비넥타이처럼 아카데미 시상식의 드레스코드인가라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찾아보니 그건 아니고 그냥 요즘 할리우드 남자배우들이 수염을 많이 기른다고 한다.

마지막 최고의 작품상을 미셸 오바마가 (아마도 백악관에서) 발표하는 장면도 이색적이었다. 기왕이면 행사장에 나와서 발표를 해도 좋으련만, 경호상의 이유였을까?

2013년 2월 25일 월요일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 Balada Triste De Trompeta

경고받은 대로 충격적인 영상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쎈 공포영화의 레벨은 아니었지만 현실감이 있기에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었던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가 광대들의 이야기지만 처음부터 현대사의 비극인 스페인 내전으로 시작하여 프랑코가 스페인 1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1973년의 이야기로 끝난다. 그러므로 영화는 프랑코 독재기를 광대들을 이용하여 은유하였다고 볼 수 있다. 프랑코는 직접적으로 영화에서 등장하기도 하는데 슬픈 광대인 하비에르는 원수인 살세도 대령의 명령으로 개가 되어 프랑코에게 사냥당한 새를 물어서 바친다. 그러자 프랑코조차도 그러한 인권 모독을 참지 못하는 우스운 장면이 연출된다.

영화 후반 광기어린 슬픈 광대의 폭주가 이어지던 와중 실제 사건이었던 폭탄 테러 장면이 나오는데 영화에서 볼 때는 '프레지던트'였는데 찾아보니 프랑코의 후임으로 1973년 총리가 되었던 루이스 까레로 블랑코가 그 때 죽었다.

해외를 포함해 몇 개의 영화평을 참고하긴 했지만 기독교, 가톨릭에 대한 영화의 표현에 대한 국내 영화 리뷰는 잘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부분이 거대한, 정말 거대한 십자가 위에서 세 명이 생사를 걸고 싸운 장면이었고, 하비에르가 살세도 대령을 살해하는 즈음 교황 복장을 했던 것을 보면 영화가 가톨릭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 시대상황을 잘 모르겠다. 모르긴해도 교계가 독재체제에 저항하진 않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의 핵심이 사랑이라고 할 때 광기로 폭주하는 두 광대와 가해의 결과물인 자신의 피를 맛있다는 듯 혀로 핥는 영화 초반의 나탈리아의 모습은 도대체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슬픈 광대의 아버지를 포함해 내전의 양 당사자들의 해골이 여기저기 발로 차이는 계곡은 내전의 상처가 프랑코가 물러날 시기에도 여전하고 아마도 이후로 4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아물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내전은 외국과의 전쟁보다 더 아플 수 밖에 없으리라.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피에타

김기덕 감독에게 국제적 영광을 안겨준 영화 피에타. 영화 소개를 볼 때 조민수가 이정진의 진짜 어머니가 아니고 이정진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과 관련있는 인물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정말 독특한 무엇을 말했는지는 회의적이다. 예쁜 대부분의 메이저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작은 공장(?)들의 비참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정도일까?

그럴 리가 없지만 에미애비도 없을 것 같은 천하의 나쁜 놈의 개과천선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그려낸 영화인데 확실히 아는 형님의 말씀처럼 기존 김기덕 영화를 볼 때와 같은 엽기적 장면이 없었다. 이정진이 연기한 강도가 의외로 너무 쉽게 미선을 자기의 어머니로 받아들였다는 게 오히려 가장 미스터리다. 잃을 것이 없도록 막다른 곳에 몰린 미선이 강도의 악행을 견뎌냈기 때문이겠지만 애초에 강도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라는 설정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극단을 치닫지도 않았고 매우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죄인은 희망을 봤다가 잔인하게 빼았기는 중형에 처해졌고 예견된 것처럼 그 길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그런데 영화 제목인 피에타가 이 영화와 실제로 어떻게 연결이 되는 것인가?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테마일 터인데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제외하면 미선과 강도의 관계에서 유사성이 있기는 한 것인지 궁금하다.

처음엔 흥미로운 사람이라 생각해서 챙겨봤지만 김기덕의 영화에 완전히 적응하기는 어려웠다. 이번 작품이 비록 호평 일색이고 국제영화제 최고상을 수상했으나 나로선 정말 그런 대접을 받을 작품인지 물음표를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영화제 수상 이 이거 좋은 영화라고 말하는 것처럼 간편한 일도 없겠고,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나니 별로라고 말하는 것도 비겁한 측면이 있지만 여하튼 그렇다.

2013년 1월 19일 토요일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오늘로 18대 대선이 끝난지 한 달이 되었다. 한 달 전 그날의 기억은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가 나온 이후로도 불쑥불쑥 솓아나곤 한다.

유시민이 골든 크로스를 이야기하고, 나꼼수를 끝낸 김어준 등이 딴지라디오를 통해 투표일에 생방송을 하며 희희덕거리던 그 시간들을 잠깐씩이나마 함께 하며 전세가 뒤집어졌으리라 착각했다.

그러나 며칠동안 어지럽던 머릿속은 의외로 쉽게 정리되었다. 결국 박근혜는 17대 당 경선에서 진 이후부터 계속해서 차기 대권의 가장 유력한 주자였고, 안철수가 등장한 이후 몇 차례 여론조사에서 뒤지는 결과가 나왔지만 어떤 요인이 가장 컸던 간에 결국 마지막 공식 여론조사까지도 문재인 후보에게 앞선 상태였다.

그녀가 세 차례 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TV 토론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들을 여러 번 보여줬지만 '소위 진보' 팟캐스트나 언론의 시각과 달리 대세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진보 측에서 박근혜 혹은 새누리당의 네거티브를 문재인의 상승세의 증거로 봤듯이, 돌이켜보면 진보의 대세 역전'설'은 자기 세력의 결집을 더 강화하려는 제스처였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결국 진보의 작전은 인구 구성비가 늘어나는 50대 이상의 노령 인구, 특히 50대의 믿기 어려운 결집이라는 역효과를 낳았는지 모른다. 역시 인과 관계를 엄밀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12월 20일 이후 한동안 이어진 진보 팟캐스트들의 거대한 침묵을 기억한다. 투표한 사람들의 48%는 '멘붕'을 겪었고, 그들에겐 '힐링'이 필요했다. 그래서 영화 레미제라블이 흥행했다고도 이야기된다. 그러나 아마도 당장에 진보 팟캐스트들이 힐링을 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챙겨듣는 팟캐스트는 별로 없지만 진보도 방송국을 가져야겠다는 논의가 대두되는 것 같긴 하다. 보수 일색인 종편들이 시청률이 그렇게 형편없다고 조롱을 받고 적자 상태지만 대선에는 큰 영향을 끼쳤다는, 객관적으로 연관관계를 찾기가 쉽지 않은 요인이 많이 지적되었다. 내가 보기엔 진보의 방송국은 그런 목소리도 내보낼 수 있어야하지 않느냐, 그래야 균형이 맞지 않느냐는 당위성을 주장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힘을 잃은 진보 팟캐스트들의 자구책이자 실질적이고 되기만 한다면 나름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의 시도로도 보인다. 그들의 많은 좋은 말들을 나도 잘 들었지만 많은 경우 팟캐스트는 자신들의 책을 파는 창구이기도 했다. 그들이 자기 책의 xx쇄를 찍었다고 자랑했지만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지금에 와선 회의적이다. 몇 차례 지적되었지만 진보 팟캐스트라는 것이 종류도 많고 다운로드 수도 많을지 몰라도 듣는 사람이 여러 개를 듣는 것이었다. 그 한계, 혹은 폐쇄성이 나꼼수로 시작된 팟캐스트 세상이 많은 이들을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는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었던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아무리 스마트폰 혁명이 일어나도 다운로드를 혹은 스트리밍을 해야하는 팟캐스트는 바쁜 인간에게 적지 않은 적극성을 요구하는 일 같다. 버튼 하나로 켤 수 있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라는 현재 기준으론 구식의 방법들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얼마 전에 김어준, 주진우는 어디 갔는지 찾아본 적이 있는데 해외로 갔다는 것 같다. 정봉주가 징역형을 마치는 자리에도 나오지 않았다. 대선 전 나꼼수의 방송이 뜸하던 시절 정봉주의 인터뷰 기사에서는 정봉주와 나머지 멤버 사이의 갈등 혹은 적어도 상당한 의견 차이가 드러났다. 그렇다고 상호비방을 하진 않았지만 애초에 재미로 시작했던 장난같은 일이 너무 커졌기에 나꼼수의 세네 사람이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어준과 주진우는 어떤 큰 일을 도모한다고 자처하고 있을까. 누군가의 조롱처럼 그들이 도망갔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민주당을 쥐락펴락하려 했고 실제로 그런 순간들도 있었던 그들로서는 그 단맛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위치에 있건 영향력이란 것은 얻어내는 측면도 있으므로 이들의 한계가 애초에 정해졌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얻어낸 영향력을 어떻게 활용할지 그 관리의 측면에서 나꼼수는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그들이 더 큰 정치적 악행들의 증거를 갖고 있지만 터뜨리지 않는다는 건 사실일지 모르지만 추종자들을 음모론에 더 빠지게 만드는 폐해도 있다. 언어 차원에선 B급이라고 보기도 힘든 저렴한 그들의 언어는 대중성을 획득했지만 국민 전체로 봤을 때는 다수가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러저러한 말들을 적었지만 지금은 박근혜라는, 정말 그런 시대가 오리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미 현실이 된,  박정희의 딸의 시대를 착잡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 마치 그 아버지의 치세를 연상케 하는 경제부흥,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는 참으로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 아리송하게 만든다. 절대 빈곤을 넘어서 선진국의 문턱에 있는 국가에서의 잘 살아보세의 '잘'은 무슨 의미일까. 분명 수십 년 전의 '잘'과는 달라야만 한다. 그러나 레토릭이 아니라 실제 새 대통령의 사고방식이 아버지와 유사하다면 앞으로 5년을 지난 5년만큼이나 마음 졸이며 봐야할 것 같다.

보르지아 시즌 2

시즌 1을 본 것이 먼 기억 속에 있는데 이제서야 시즌 2를 봤다. 마키아벨리의 시대이기도 했던, 마키아벨리가 칭찬했던 체자레 보르지아가 살던, 시오노 나나미 때문에 더 각광받는 드라마틱한 시대를 그린 이 드라마의 시즌 2는 재미있는 포인트가 많았다.

그 유명한 카테리나 스포르자의 치마 걷어올리기 장면(긴가민가 했는데 그 분이었다)을 뺄 수 없고, 대항해시대의 시작과 이 시기가 겹쳐지며 신대륙의 담배(씨가로)를 교황이 피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시즌 2의 큰 축들을 보면 루크레치아의 연인인 비천한 신분의 파올로가 로마에 왔다가 살해되는 것, 후안의 죽음으로 끝난 체자레와의 형제 대결, 교황 대 줄리아노 주교, 교황 대 사보나롤라 그리고 교황 대 프랑스 왕의 대결 구도 등이 있다.

시즌 2를 요약하라면 rise of Cesare라고 해야 할런지 모르겠다. 체자레는 형인 후안보다 정치력이나 군사적 지도력이 더 뛰어남을 과시했고, 패전의 과정에서 치명적 상처를 얻은 후안을 결국 살해하며 후안의 지위를 탈취할 것을 암시했고, 아버지인 교황으로부터 주교의 지위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시즌 3가 있다면 더 악랄해진 체자레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시즌 1에도 나왔던 마키아벨리는 당대에도 상당히 비중있었던 인물로 그려진다. 후안도 그를 알았고, 그의 정보력을 높이 평가했다. 무엇보다 체자레가 마키아벨리의 도움을 많이 받는 것으로 그려진다.

누구보다 인상적인 캐릭터인 미켈레토가 어머니로부터 의학 교육을 받는 것으로 오해받는 장면이나 그가 동성애자임이 드러난 것 등도 깨알같은 재미를 준다.

시즌 2는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여자만 밝히는 것이 아니라 교황이 아니라 성직자로서 응당 가져야 할 인간적 측면이 있음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아들 후안의 죽음을 접했을 때 그가 가장 무너져내리고 있었는데 마침 그 때 독이 든 와인을 들이키며 시즌 2가 끝났다.

리치 맨 푸어 우먼

일본에서 유학 온 후배로부터 일본에서 인기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드라마다. 오구리 슌은 나름 좋게 봤던 배우였고 이 드라마에서는 그의 전형적인 캐릭터를 잘 발휘했다.

몇 달 전엔가 이시하라 사토미 미모의 '포텐이 터졌다'는 말을 듣고 정말 그런가 했는데 내가 보기엔 여전히 예전의 그 이시하라 사토미였다. 그녀도 오구리 슌처럼 전형적인 역할을 잘 소화했던 것 같다.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 드라마다. 20대에 일본 최고 수준의 IT 기업을 일궈낸 휴가 토오루. 그러나 그는 학력이 일천하다. 그의 절친이자 사업 파트너 아사히나는 동경대 출신이다. 그리고 나츠이 마코토 역의 이시하라 사토미도 동대 출신. 동대 출신들은 당연히 기대되는 대로 지식을 잘 암기하고 사람들에게 예의바르지만 꽉 막히고 최고가 되기엔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그러나 넥스트 이노베이션이라는 IT계의 신성은 아사히나가 개인정보를 유출하며 급격히 무너진다. 아사히나의 배반은 이해가 갈 듯 하면서도 상당히 우발적이라는 인상을 받았고 개연성이 떨어져 보였다. 나츠이에 대한 애정 표현도 얼마나 진실성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결국 넥스트 이노베이션은 신데렐라 같은 기업이었지만 천재 사장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일본 산업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다. 토오루는 극 후반으로 갈수록 겸손함을 배우며 또 신생 IT 기업의 한계를 체감하며 안정적 성장을 추구하는 기존의 대기업의 힘에 의지한다. 드라마는 그러면서 젊은 벤처 기업의 성공 이야기를 미화하지만은 않으면서 그렇다고 기를 꺾지도 않는다. 새로운 기업가와 기존의 중견 기업이 모두 살아야한다는 정석의 대답을 내놓았달까.

이 드라마의 중요한 한 축은 토오루의 어머니 찾기였다. 토오루는 천재지만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일치시키지 못하는 병이 있었다. 어머니와 어린 시절 헤어진 것이 그 원인인 듯 한데, 이 드라마에서 넥스트 이노베이션의 신성장 핵심 프로젝트로 제시된 개인정보 종합 관리 솔루션인 '퍼스널 파일'도 토오루의 어머니 찾기가 원래 목적이 아니냐는 혐의를 받았다. 그런데 사실은 나츠이가 고향에 있을 때 인근에 살던 토오루의 어머니 사와키 치히로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이름을 이용해 넥스트 이노베이션에 들어갈 수 있었다(초반엔 거대한 음모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어찌어찌하여 어머니를 만난 토오루는 자신이 그녀의 아들임을 밝히지 않고 돌아선다. 약간 맥이 빠지지만 나중에 다시 만날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미모로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아이부 사키가 아사히나의 여동생으로 출연했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그다지 미모가 빛나지 않았다. 캐릭터에도 아쉬움이 있었고, 음식점 쪽의 사람들은 주요 역할은 아니지만 정리가 잘 되지 않은 느낌이다.

야스오카 역의 '아사리 오스케'(몇 번 본 배우지만 이름은 처음 적어봤다)는 전에 신선조에서 처음 봤던 것 같은데 가끔씩 유쾌한 캐릭터로 나오고 있다.

재미있게 쭉 볼 수 있는 드라마지만 그렇게 대단한 드라마였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분기엔 경쟁자가 워낙 없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