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5일 토요일

Roma (2018)

알폰소 쿠아론의 화제작!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로마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지금 일반 상영관에서도 볼 수 있지만 보통 대중적 인기가 없는 영화를 상영하는 작은 영화관 몇 곳에서만 상영되고 있다. 김세윤 작가는 이 영화를 큰 스크린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오래 묵혀둔 프로젝터를 틀어서 80인치 스크린으로 감상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잠들기를 기다린 후 밤 늦게 보기 시작한 나는 중간에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시 졸고 말았다. 많이 놓치지는 않았으나 흐름이 조금 끊긴 것은 사실. 늦은 밤의 몽롱함 때문인지 이 극찬을 받은 영화, 내가 좋아했던 그 영화들의 감독의 신작이 처음에는 왜 그렇게 격찬을 받는지 잘 와닫지 않았다.

영화는 1970년경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다. 쿠아론 감독 자신의 이야기라는 정도는 알고 봤다. 큰 집에 사는 한 가족이 있다(그러니까 쿠아론의 가족인데 영화속 이름은 변경되었다). 가족은 할머니 하나(나중에 밝혀지기론 외할머니다), 부모, 아이들 넷이다. 개가 한 마리 있고 집에서 일하는 식모(?)는 두 명이다. 이 부유한 집의 가족과 식모들의 차이는 한 눈에 들어온다. 흑백 화면이기에 피부색 차이까지 잘 들어오지는 않지만 가족들은 백인(혼혈이라도 거의 백인에 가까운)이고 식모들은 인디오에 더 가까울 것으로 추정되는 인종이다. 가족의 친척, 그러니까 쿠아론의 삼촌집도 상당히 부유해보였고 이곳은 아예 미국인이 한 가족일 정도로 더욱 백인에 가까워보였다.

주인공은 식모 중 한 명인 클레오다. 아이들의 엄마처럼 늘씬하고 호리호리하지 않은, 그러니까 잘 사는 백인, 부르주아 백인과 거의 정반대에 놓인 인물로서 클레오가 설정된다. 그녀가 처음 등장하는 영화의 오프닝은 알고보면 바닥에 있던 개똥을 물로 닦아내는 광경이었다. 영화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는 이 집의 개 한 마리가 어떻게 그렇게 똥을 많이 싸느냐다. 클레오가 개똥을 자주 안 치웠던 것인지 몰라도 복도라고 불러야할지 모를 그 장소를 카메라가 비출 때는 자주 개똥이 여러 곳에 놓여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큰 집을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해야할 클레오에게는 큰 도전인 셈이다.

이런 현격한 계급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클레오가 집주인들로부터 천대를 받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례적이다 싶을 정도로 우대를 받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저녁에 온 가족이 모여 예능 프로그램 혹은 웃긴 영화를 보고 있을 때 그녀도 그 옆에 앉아 같이 감상을 해도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의도치 않게 임신을 했어도 쫓겨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에게 아기침대까지 제공될 예정이었다. 클레오는 쉬는 시간에 밖에 나가 연애를 할 여유도 있었다. 특히 아이들에게 있어 그녀는 식모보다는 이모에 더 가까운 존재였다.

평범한 일상은 아버지의 부재와 클레오의 임신으로 인해 바뀌어갔다. 클레오를 임신하게 만든 페르민은 그녀와의 연락을 끊었다. 출장을 갔다는 아버지는 사실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다. 페르민은 멕시코 정부의 사주를 받은 청년단체에서 일하며 결국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학살하는 주범 중 하나가 된다. 아기침대를 고르던 클레오는 그 때 학살의 광경을 목격하고, 그 중에 총을 든 페르민을 본 충격 때문인지 갑자기 양수가 터졌지만 아이를 사산하고 만다. 쿠아론 감독은 사산의 과정을 꽤 길고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학살자라는 충격은 연이은 사산의 충격으로 이어졌고, 그녀는 죽은 아이를 잠깐 안아보고 의료진에게 아이를 넘겨주어야했다.

영화에서는 자동차가 주요한 소재로 사용되었다. 이 집에는 자동차가 적어도 두 대는 있다. 아버지는 포드사의 폭이 넓은 자동차를 모는데 집안에 주차시킬 때마다 차 옆이 긁히지 않도록 조심해야할 정도로 너무 넓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떠난 이후 이 차를 매우 조심성없이 몰아서 양 옆이 다 긁히게 만든다. 마치 남편의 존재를 지우려는 듯한 그 행동은 결국 남편과의 결별을 정식화하는 과정에서 포드의 그 큰 차를 팔아치우고 더 작은 차를 사는 것으로 이어진다.

새 차를 산 아내/어머니 소피아는 아이들과 클레오를 데리고 여행을 간다. 이 여행은 사실 남편이 자신의 짐을 빼도록 배려를 해준 것이었다. 여행 과정에서 바다를 즐겨 찾은 이 가족은 큰 위기에 처한다.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바다에서 놀던 아이 두 명이 엄마 말을 듣지 않고 더 깊은 곳에서 놀다가 거의 익사할 지경에 처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바다에 전혀 들어가지 않던 클레오-그녀가 수영을 할 수 있는지조차 불투명하며 그녀는 출산한지 얼마되지 않아 몸이 약한 상태였다-가 높은 파도 속으로 전진하며 두 아이를 구해내는 장면은 숭고하다고 할만하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잃은 것을 만회하려는 듯이 주인집의 아이들을 구조했다. 이어진 엄마와 네 자녀 그리고 클레오가 바닷가에서 얼싸안은 장면은 영화의 포스터 이미지이기도 하다. 혼자 남은 여자, 아이(들)을 홀로 키워야하는 처지의 엄마로서 소피아와 클레오는 운명을 공유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짐 정리, 집 정리를 하는 와중에 클레오가 옥상에 올라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긴 시간 동안 옥상 위의 클레오는 내려오지 않는다. 그녀가 위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고, 그녀가 아래로 몸을 던지거나 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영화 초반이 집의 일부인 바닥에 카메라를 고정시켜 보여주었던 것처럼 영화의 끝은 집의 가장 높은 곳을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며 잡고 있다. 상징의 차원에서 보자면 개똥을 치우기 위해 바닥을 응시하던 클레오를 더 고양된 인격을 가진 존재로 위치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전작인 그래비티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하겠는데, 그래비티에서는 우주에서 계속 하강해 물속을 거쳐 지상으로 올라오는 생명의 역사가 축약된 바 있다. 클레오는 승천한 것일까? 첫 장면에서 클레오가 안 보였지만 존재했던 것처럼 마지막에서도 그녀가 안 보여도 존재하고 있을 것 같다.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씬은 그래비티를 즉각 연상시킨다. 해외 리뷰에서도 감독이 이 영화를 본 것이 그래비티를 만든 직접적 계기인 것처럼 연출되었다는 평이 있다. 그러나 칠드런 오브 멘, 그래비티에 이어 로마도 직접적으로 젊은 엄마와 아기라는 소재가 사용되었고(이 투 마마 탐비엔도 그런 면이 있었던 것 같다), 이는 단순히 한 여성이 잉태를 하고 출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칠드런 오브 멘에서처럼 인류의 미래가 달린 문제일 수도 있고, 그래비티처럼 인류의 역사를 포함하면서 초월하는 생명의 역사에 대한 고찰이기도 했다. 후반부 바다에서 아이들을 구출하는 장면은 그래비티의 후반부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대학생들을 학살한 젊은 남성들이 훈련을 하던 장면에는 미국인 교관과 한국인 교관이 있었다. 한국인 교관은 새로 왔고 엄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는 한국말로 청년들을 통제했다. 실제 있었던 일인지 매우 궁금해지는 부분이었다. 71년에 왜 한국인 교관이 멕시코 정부의 일을 했던 것일까? 군부 독재의 경험 때문일까? 태권도? 월남전? 미국인 교관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는데 한국인이 개입되어있었다면 흥미로운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영화가 알폰소 쿠아론의 경험이 반영된 것이라면 그가 어린 시절 이런 광경을 목격했을까? 영화에서는 클레오만 그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쿠아론이 클레오의 말을 전해들었는지 아니면 아예 다른 경로로 전해들은 것을 클레오의 경험으로 상상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2018년 11월 26일 월요일

Mad men

매드멘은 존 햄을 스타덤에 세운(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드라마이고, 내가 AMC라는 채널을 인지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이미 드라마는 종결되었고, 나도 그 엔딩을 보긴 했다. 하지만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몰랐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어쩌다 시즌1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1편의 맨 처음에 매드멘이라는 말의 뜻이 나온다. 그동안은 왜 여기에 나오는 남자들이 미쳤다는 것인지 궁금했던 터였다. 알고 보니 미쳤다는 게 아니라 뉴욕 매디슨 애비뉴에 있는 광고 회사에 있기 때문에 매디슨의 축약으로 매드라는 말이 나온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캐릭터들이 평범하지는 않기에 미쳤다는 매드라도 이해를 할 수 는 있다.

존 햄이 연기한 돈 드레이퍼는 어린 시절 가난한 집에서 자라며 아버지에게 많이 맞았는데, 한국전쟁을 계기로 도널드 드레이퍼라는 남의 이름으로 살아가며 광고회사의 중역으로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그는 모델 출신의 아름다운 아내가 있음에도 여러 여성들과의 외도를 즐긴다. 다만 회사의 주인이자 동료인 로저 스털링이 외도 자체를 즐기는 것과 달리 돈 드레이퍼는 일종의 구원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전에 봤을 때는 잘 인지하지 못했지만 돈이 지속적으로 외도를 할 때는 한 명의 여성만 상대하고 있으니 결코 바람둥이는 아니다. 결국 시즌이 거듭되어 가면 그는 결국 아내와 이혼하고 자신의 비서와 결혼하지만 그 관계도 오래가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돈 드레이퍼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페기 올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페기를 연기한 엘리자베스 모스는 존 햄처럼 이 드라마로 스타덤에 올랐는데 이제는 핸드메이즈 테일 등을 통해 존 햄 이상의 명성을 얻고 있다. 페기는 돈의 비서로 출발하여 작가writer로 승진하는데 이어 계속하여 자신의 지위를 높여가는 여성을 대표한다. 1950년대에서 시작하는 드라마의 시대 배경에서 여자가 광고 카피를 쓴다는 것은 개가 글을 쓴다는 것과 비견될 정도로 남자 카피라이터의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능력과 야망에 더해 주요 남자 캐릭터들과의 미묘한 관계를 이용해 적대적인 세계에서 살아남는다. 비록 페기와 돈은 성이 다르지만 결국 닮은 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지금까지 다시 보기한 부분에서 인상적인 대목들이 몇 개 있다. 결혼하여 아이 둘을 두고 살아보니 너무 공감되는 장면이 있는데, 베티가 아들이 집안에서 사고를 치면서 화가 날대로 난 상태에서 돈에게 화를 내는 부분이다. 어린 딸과 아들을 아내가 혼자 돌봐야 하는, 요즘 엄마들 말대로 '독박 육아'의 상황에서 지쳐버린 아내가 남편에게 아이를 혼내라고 하자 남편, 즉 돈은 말로만 타이르고 나오고, 베티는 그게 뭐냐고, 때려야한다고 말하고, 아들이 또 사고를 치자 돈은 물건을 집어 던지며 이제 만족하냐고 소리치는 장면은 정도가 덜하지만 나도 겪은 일처럼 느껴졌다. 돈은 회사일을 핑계로 종종 늦게 들어오고, 그는 퇴근 후 주로 아이들의 잠든 모습을 보고, 아침에 잠깐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는 아이들과 별로 놀아주지 않고 아이들이 오면 TV를 보라고 보내버린다. 이 역시 나의 모습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 반성하게 된다.

페기가 피트 캠블의 아이를 낳는 상황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그녀가 임신 사실을 전혀 모르다가 갑자기 애를 낳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회사의 남자 직원들은 임신으로 후덕해진 페기를 조롱하다가 출산 후 날씬해진 페기를 보며 그녀가 돈의 아이를 낳은 것으로 짐작했다. 페기는 마침 돈의 명령으로 비서에서 작가로 갑자기 승진하기도 한 터였다. 페기는 입덧도 안 했단 말인가? 아이가 발로 차는 걸 느끼지 못할 수 있나? 그렇다고 심각하게 아이가 빨리 나온 것도 아니었다. 이 부분은 경험상 전혀 납득이 안 되었다. 그녀가 아기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기억이 정확치는 않지만 육아를 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녀는 태어난 아기를 안아보라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외면해버렸다. 아마 그녀 혼자 사다리를 타며 올라가기에도 벅찼기 때문에 195,60년대의 시대 배경에서 가정과 일 모두에서 성공하는 수퍼우먼을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페기와 피트의 관계도 불가사의다. 입사 후 얼마 되지도 않아 결혼식을 올리기 직전의 피트와 관계를 가진 페기는 한 번 회사에서 피트와 재차 관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피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할 남자인 걸 알고도 그와의 관계를 원했다. 아마 피트를 좋아하기도 한 것 같다.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의 구조와 흐름상 페기는 자기주도적이고 자기결정권을 수행하는 젊은 여성 캐릭터이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제도와 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가 남자를 선택해서 좋으면 관계를 가졌던 것 같다. 페기가 광고할 대상인 다이어트 기구를 체험하는 과정에서 기구의 부수적 효과인 자위의 기능을 발견하고 즐기는 장면들도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피임은 몰랐던 모양인데 그것이 당시 미국의 현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돈 드레이퍼가 가짜 정체성,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의 이름으로 사회적 성공을 하고, 그래서 자기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남의 성을 붙이는 결과를 낳고, 드라마 속 어느 히피?의 비난처럼 없는 욕망을 부추기는 광고업을 한다는 설정은 무슨 의미일까. 피트는 자기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고 있지만 자기는 아버지가 된 줄 모르며 아내와 산부인과에 가서 테스트를 받는다. 한편 그의 직업을 좋아하지 않던 아버지는 유명한 비행기 사고로 갑자기 죽는다. 바야흐로 시대는 TV의 대중화로 광고업도 큰 변화를 맞게 되어 해리 크레인이라는 캐릭터는 갑자기 TV 부문을 담당하게 된다. 전후의 번영은 계속되어 모든 산업이 성장하고, 광고는 소비자들의 욕망을 일깨우고 창출하여 성장은 가속화되는 흐름이 영원할 것 같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돈이 배다른 동생과 그가 상징하는 가난과 비굴의 과거를 단호하게 내친 것이 상징하듯 또 쿠퍼 사장이 휘트먼이라는 돈 드레이퍼의 과거의 자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처럼 지금 그리고 미래에 회사에 많은 이익을 낼 인물이라면 과거는 무의미했다. 로저 스털링은 어메리칸 에어라인을 얻을 수 있다면 과거의 고객이지만 소규모인 모호크 에어라인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의 욕망, 여성의 욕망은 광고업계가 가장 신경써야 할 큰 손이 되었다. 소련이 위성을 쏘아올리고, 미국에서는 케네디라는 젊다 못해 어린 대통령이 당선되는 시대의 분위기는 새로움을 숭상했던 것일까. 지금도 특히 IT라는 분야는 새로움을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하여 숭배한다. 혁신이 없는, 잡스가 없는 애플은 예전같지 않다고 비난한다. 모든 과거가 아름답지 않은 것처럼 모든 새로움이 좋은 것일리도 없다. 매드멘 시리즈의 마지막 광고는 코카 콜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찌되었건 해방을 경험한 돈 드레이퍼가 코카 콜라 광고를 만들었다는 건 우울한 일이다. 광고란 그렇게 거품이 가득한 달짝지근한 것이려나.

2018년 11월 4일 일요일

퍼스트맨 (2018)

 대미언 셔젤(?)의 신작 퍼스트맨에 대한 반응은 전작들에 비해 미지근하다. 위플래쉬의 폭발적 에너지, 라라랜드의 아름다움(?)에 비해 이 영화는 심하게 흔들리는 카메라웍으로 어지름증을 유발한다. 그만큼 1960년대 달에 인간을 보내겠다는 미국의 조급증은 위험한 사업을 진행했음을 반증하고 있고, 이 영화는 그런 면을 비교적 솔직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케네디가 완전히 무모한 계획을 공언한 것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인간은 비행기를 타고 대기권을 벗어난 비행을 하기 시작했고, 영화 시작부에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닐 암스트롱은 나사 소속이 아니라 어떤 민간 업체?에서 일하면서 대기권 밖으로의 비행을 경험했다. 그렇게 조금씩 지표면에서 더 멀어진 비행의 경험은 fly me to the moon이라는 낭만적 가사를 현실감있게 만들어나갔다.
 인간을 달로 보내는 과정은 많은 비용이 들었다. 물질적 비용뿐 아니라 오랜 시간 길러낸 미국 최고의 인적 자원들도 희생되었다. 영화에서도 자료 화면이나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지금 내 옆에서 힘들어하는 이웃, 미국인이 있는데 도대체 왜 달로, 우주로 가기 위해 터무니없는 돈을 쓰느냐는 항의가 등장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먼저 소련으로 인공위성을 보내고 사람을 태워서 보낸 소련과의 경쟁이었고, 이 경쟁은 단순한 과학 기술의 선봉에 서느냐가 아니라 장거리 미사일을 비롯한 군사적 위협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문득 소련이라고 인명 희생없이 그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들며 그런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해진다. 영화에서 나온대로 백인들만 달에 갔는데 유색인종의 우주 탐험 참여의 역사도 생각해봄직하다.
 퍼스트맨은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세계적 박스오피스 상황을 보면 한국에서는 비교적 성적이 좋은 편이다. 라 라 랜드에 대한 충성심이 반영되었을 것인데 그럼에도 졸렸다는 반응이 많아서인지 소위 대박 흥행까지는 아니었다. 미국인들은 닐이 달표면에 미국 국기를 세우는 장면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고 분개했고 그것이 저조한 흥행에 기여했다는데 한국 사람들은 그런 거야 상관없다.
 개인적으로는 딸이 아기 때에 워낙 병으로 고생을 했던 터라 영화 초반 닐의 어린 딸이 힘들어하다가 죽는 장면부터 왠지 공감이 되어버렸다. 그 괴로운 경험과 기억은 인류 최초로 달을 밟게 되는 닐의 여정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에게 달에 간다는 것은 딸의 죽음을 잊기 위한 새로운 도전같이 보이기도 했고, 그 도전의 과정에서 친구 이상, 거의 가족같은 동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죽어감에 따라 더 이상의 죽음을 막기 위해 나라도 성공해야겠다는 결의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워낙 보편적인 것이라 퍼스트맨 이후 본 영화들에서는 유사한 설정들이 눈에 띈다. 중국 돈으로 만든 에단 호크 주연의 24 hours to live에서 주인공 트래비스는 일 년 전에 아내와 아들을 잃었고 어떤 암살 계획의 진행 와중에 아들의 환영이 귀신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퍼스트맨에서 닐의 눈앞에도 죽은 딸이 종종 나타났다. 12 strong이라는 9.11 이후 탈리반을 물리치기 위한 미군 12명의 이야기에서는 파병이 결정된 이후 군인들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어, 퍼스트맨에서 닐이 달로 가기 직전 두 아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한 달도 되지 않은 듯 한데 훌루에서는 더 퍼스트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공개되었다. 무려 숀 펜이 주연인데 공교롭게도 우주비행에 대한 드라마였다. 줄거리를 정확히 모르고 봤을 때는 퍼스트 맨이라는 영화가 개봉하는데 더 퍼스트라는 드라마가 거의 비슷한 이야기로 방송을 한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작년 말과 올 초에 게티 가문의 이야기가 영화와 드라마로 거의 동시에 나왔던 것과 비슷해보였다. 알고 보니 드라마는 달 여행이 아니라 가상의 미래에 화성으로 인간을 보낸다는 설정이었다. 대망의 발사일에 우주선은 출발 얼마 후 폭발해버리고 새로운 우주인들을 모으고 다시 화성으로 가기 직전까지가 이 드라마 시즌1의 내용이었다.
 톰 행크스가 주연이었던 아폴로 13은 아직 안 본 상태인데,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당연히 닐 암스트롱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후의 이야기였다. 여하간 퍼스트 맨은 달 탐사에 대한 관심을 더 갖게 만들어서 HBO가 예전에 만들었던 From earth to the moon이라는 드라마도 볼 예정이다.
 며칠 전 드니 빌뇌브의 시카리오를 다시 보았다. 처음 볼 때는 음악의 작용과 마약 카르텔에 의해 처참히 죽은 시체들의 광경 때문에 인상적이었던 영화인데 두번째로 볼 때는 무엇이 올지 알고 있어서인지 이 단순한 플롯의 영화가 무엇이 대단했던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미국의 20?30?%가 마약을 하지 않았던들 이런 초법적 대처는 안 할 거라는 조쉬 브롤린의 대사가 아마도 영화를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을 것이다.

2018년 9월 12일 수요일

오작Ozark 시즌 2

시즌1때부터 벼랑 끝에서만 사는 남자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를 매 에피소드마다 보게 되면 긴장하게도 되지만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는 생각도 자꾸 든다. 잭 바우어라는 캐릭터가 주인공인 24의 스토리도 처음에는 재미있어도 시즌이 거듭되면 이건 좀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고 만다. 오작의 두번째 시즌은 시즌1에 비해 훨씬 흥미가 떨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멕시코 카르텔의 수장은 여성 변호사 캐릭터로 대체되었다. 주요 캐릭터들이 네 명이나 죽어나갔다. 사실 멕시코 카르텔과 지역 갱이 연루되었는데 이 정도 희생자는 적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시즌3가 나온다면 기존 캐릭터들의 공백을 어떻게든 메워야 한다. 물론 다 감안하고 캐릭터들을 퇴장시킨 것이겠지만 등장인물이 많지도 않은 드라마에서 이 정도의 공백은 커보인다. 스토리를 보건대 시즌2로 마무리지을 것 같지도 않다.

시즌2는 카지노를 새로 설립하여 위기를 타개하려는 마티 버드의 분투가 결실을 맺는 것으로 끝난다. 이번에는 마티의 역할이 매우 축소되어 그는 주인공이지만 스토리에서 매우 겉돌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를 대신하여 아내인 웬디의 활약이 대폭 늘어나고 마지막에는 그녀가 가족을 이끄는 역할을 이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아들은 어린 나이지만 총으로 사냥을 하며 피맛을 처음 경험하고, 아버지의 방법을 배워 가명 계좌를 만들고 돈을 해외로 반출한다. 아버지의 일상이 어린 자식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극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이런 흐름을 보면 버드 가족이 오작에서 새로운 범죄 조직의 보스가 되는 시나리오마저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갱단을 말로 구워 삶고, 멕시코 카르텔의 후원까지 얻었으며, 지역 정가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이 가족은 이미 지역 범죄의 핵심적 고리라고 볼 수 있다.

마티 버드의 가장 큰 난관은 다른 무엇보다도 멕시코 카르텔이다. 지역의 갱들은 지역을 벗어나면 신경쓰지 않아도 되지만 카르텔의 조직은 영향력의 지역적 범위가 완전히 다르다. 그리하여 마티는 호주의 황금 해안으로 탈출하는 꿈을 꾸었지만 아내는 카르텔과의 공생이야말로 생명 연장의 비책이라 생각한다. 만약 조직을 배반하지 않는다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웬디의 해결책이 더 나은지도 모른다. 다만 그 길은 영원한 범죄의 길이기에 마티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피터 뮬란이라는 배우는 오작 시즌1에서 처음 인지하게 되어 깊은 인상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웨스트월드 시즌2에서도 짧은 출연이었지만 좋은 연기를 펼쳤다. 그의 퇴장은 매우 아쉬웠는데, 그로 인해 오작의 세계는 여성들 셋 혹은 네 명이 범죄 조직/가족을 이끌면서 상호 작용을 하는 풍경이 펼쳐지게 되었다. 버드 가족, 랭모어 가족, 스넬 가족 모두 여성이 주도권을 차지했고, 카르텔의 대표인 여성 변호사 재닛 맥티어까지.

2018년 9월 3일 월요일

톰 클랜시의 잭 라이언 시즌1

아마존에서 제작한 드라마다. 1시즌이 8편으로 비교적 짧게 끝났다. 최근에 본 샤프 오브젝츠도 마찬가지로 8편이 한 시즌이었는데 두 드라마의 페이스는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잭 라이언은 액션으로 가득하고 제작비를 많이 들였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주연은 에밀리 블런트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되어 내게 충격을 준 존 크래신스키다. 톰 클랜시의 원작을 보지는 않았으나 이번 드라마에서 잭 라이언이라는 배역은 과거 아프간에서 파병 생활을 한 해병대 출신의 경제학 박사가 CIA의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이슬람 테러 조직의 리더를 포착해내고 그의 음모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역할이다. 그가 사무직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테러리스트인 술레이만, 그의 애인이 되는 애비 코니쉬의 캐씨가 모두 그를 처음에 분석가 혹은 사무직으로 알았다는 점이 반전의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잭 라이언은 해병대 출신이라 육체적인 다툼에서 그 능력이 발휘되기도 하지만 그의 큰 기여는 보통 사태의 핵심을 포착해내는 그의 분석력과 번득임에 있다. 그래서 그가 박사이면서 가장 똑똑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캐릭터라는 점이 중요하다.

드라마는 이슬람의 테러리스트라는 흔한 악역을 상정했지만 그 악이 탄생하고 숙성한 배경으로서의 미국 그리고 더 넓게 서구 문명의 책임에도 주목했다. 드라마의 시작이 1983년 미국의 폭격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두 형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바로 이들이 장래의 술레이만, 알리 형제인 것이다.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서 자라난 두 형제는 프랑스 백인들의 편견 때문에 정상적인 프랑스인이 될 수 없었고, 디지털 금융의 미래를 2001년에 꿈꾸었던 술레이만은 동생 대신 감옥 생활을 한 후 테러리스트가 된다. 

드라마는 과거와 미래의 이야기를 잘 엮고, 1편에서 8편의 구성도 잘 된 드라마였다. 하지만 천의무봉 같은 물샐틈 없는 이야기 구조는 아니였고, 엉성한 부분들도 있다. 시즌2 이후를 위한 포석일 수도 있겠고, 혹은 시즌 편 수를 조정하는 과정의 부산물인지도 모르겠다. 애인이 되는 에볼라 전문의 의사 캐씨와의 첫 만남부터 모든 이야기들에 우연적 요소가 많이 개입되는 점이 가장 눈에 띄고, 술레이만이 굳이 미국에 직접 와서 하필 잭 라이언의 총에 맞아 죽는 것은 스토리의 완결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지 모르지만 역시 현실적인 대목은 아니라고 하겠다. 드론 공격에 대한 스토리는 전체 흐름에서 매우 부차적으로 보이는데 왜 포함되었는지 의문이다. 미국의 드론 공격에 인간성이 개재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일까?

잭 라이언의 상사인 그리어가 모스크바로 가게 되는데 아마도 시즌2는 잭이 러시아에 가서 벌어지는 일일까? 드라마에서 CIA의 국장? 부국장?은 잭에게 높은 곳에 가기 위해서 필요한 점에 대해 말했는데 위키피디아의 잭 라이언 캐릭터 항목을 보면 그가 나중에 대통령이 된다고 하니 그야말로 그는 최대한 높이 올라간 인물인가 보다. 

2018년 8월 30일 목요일

샤프 오브젝츠 피날레

샤프 오브젝츠가 8편의 한 시즌으로 결말을 맺었다. 원작이 있는 드라마이고 원작 내용을 미리 알아버린 터라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8편이 펼쳐지는 방식 자체는 흥미로웠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8편은 카밀이 자기 집의 저녁 시간에 홀로 늦게 참석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카밀은 고기, 아마도 엄마 소유의 돼지 사육 농장에서 온 구운 고기를 먹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앓는다. 이후 그녀는 엄마인 아도라가 동생들에게 먹여온 파란 유리병의 독약을 기꺼이 먹고 더 달라고 한다. 이런 전개 자체가 한동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배가 아팠을까? 먹었던 고기에 엄마가 독약을 탔을까라는 의심만이 남았지만 확신은 생기지 않았다.

8편 리뷰들을 보니 애초에 카밀이 아도라의 악행, 자신의 딸들에게 독을 먹여 길들이는 그 범죄를 증명하기 위해, 자기 몸을 증거로 만들기 위한 희생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이해가 가지만 신문사의 편집자가 제 시간에 자기에게 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진정한 아버지 같은 역할을 맡긴 했다. 아마 카밀은 엄마의 독약 때문에 죽더라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는지 모른다. 이미 자기의 동생을 죽였던 엄마가 윈드 갭의 두 소녀 살해까지 저질렀다고 믿은 카밀은 그 범죄의 고리를 끊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편집자가 어떻게 아도라의 범죄를 경찰과 형사에게 설명했길래 그들이 설득되어 아도라의 저택에 쳐들어왔단 말인가. 아마 존 킨이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한 것이 영향을 끼치진 했을 것이다. 어떤 리뷰에 따르면 7편에서 뜬금없이 보인 카밀과 존의 정사가 존의 자존감을 되찾게 해주었다고 한다. 이해는 가는 설명이다.

8편은 많은 부분을 짤막한 장면을 이어붙여 빠른 전개를 보여주었다. 아도라가 체포된 이후 소설처럼 애마는 언니를 따라 세인트루이스로 가서 둘이 산다. 친구를 새로 사귀는데 그 친구가 어느 날 행방불명. 카밀은 애마의 인형 집에서 이빨들을 발견하고 윈드갭 소녀 살인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 깨닫는데 이 때 들어온 애마는 '엄마에게 말하지마'라고 말하며 드라마가 갑자기 끝난다. 이렇게 끝났어도 이야기는 되는데 감독은 크레딧이 조금 올라가는 와중에 짤막하게 애마의 세 건의 살인 장면을 삽입했다. 이후 숲 속의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아도라가 아니라 애마였다는 장면까지 보여준다.

이런 결말을 알고 처음부터 보면 조금 더 재미있어질 구석이 있다. 그리고 카밀의 시점에서 보였던 과거 장면, 글씨들까지 주의해서 보면 그녀의 심리를 더 이해할 수도 있겠다. 감성이 메말라서인지 비교적 찬사를 받고 있는 이 작품이 쉬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작가 자신의 인터뷰가 몇 개 공개되었는데 비커리 서장은 카밀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한다. 아도라는 어릴 때부터 비커리를 알았겠지만 계급적 차이 때문에 결코 심각한 연애를 하지는 않고 그냥 치근대는 수준에서 그쳤으리라는 것이다.

작년에 빅 리틀 라이스로 성공을 거둔 샤프 오프젝츠의 감독은 빅 리틀 라이스 시즌 2로 돌아온다고 한다. 캐스팅은 유지되는지, 이번에는 어떤 악을 다룰 예정인지 궁금하다. 샤프 오브젝츠를 이을 HBO의 다음 드라마는 작년에 시즌 1이 방영된 제임스 프랑코, 매기 질렌할의 듀스 시즌 2인 모양이다. 

2018년 8월 21일 화요일

싱글 라이더, 비밀은 없다, 불한당, 지금 만나러 갑니다

한국 영화들을 오래간만에 몰아봤다. 가장 인상적인 순서대로 제목에 적어봤다.

싱글 라이더는 작년 초반에 개봉했던 영화로 당시 정우가 주연한 재심과 제임스 맥어보이의 23 아이덴티티와 경쟁했다고 한다. 이병헌 주연의 영화지만 총 관객은 30만명 안팎에 그쳤다. 사실 나는 이런 영화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다.

영화의 반전이라고 할 부분에 대해서는 따지고 보면 큰 반전은 아니다. 왜냐하면 초반부터 암시는 매우 많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객들 앞에서 수모를 당한 후 집 노트북 앞에 앉은 재훈의 모습은 누가 봐도 자살을 결심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그가 고객들에게 남긴 이메일의 내용도 충분히 그렇다. 책상 위의 약통. 정신병원에서 처방받은 그 약들. 하지만 그가 시드니행 비행기를 예매하는 모습도 보이고 그가 실제로 비행기를 타고 호주로 가는 가니 관객들은 그가 죽으려고 하다가 그냥 호주로 간 것인가 착각을 일으킨다. 굳이 휴대전화를 침대 위에 두고 간 것도 워낙 고객이나 회사에서 전화가 자꾸 오니까 그랬으리라 이해를 해보기도 한다. 소희가 맡은 지니의 경우는 일단 재훈이 유령이 아니라고 간주한다면 그녀도 유령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비교적 분명하게 지니는 다른 한국인들에게 사기를 당해서 그들의 집에서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지만 그것이 약물로 잠든 것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 때 죽은 것이 나중에 드러나지만 유령이라면 왜 비틀거리며 등장했는가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 2년 동안 번 돈을 뺏기고도 여유로웠던 그녀의 모습은 아주 이상하긴 했다.

40대 초반의 남성과 20대 초반의 여성을 평행선에 놓았다가 교차시키며 한국의 현실을 호주에서 폭로하는 이 영화의 틀은 도식적이기도 하지만 설득력이 있었다. 땅 속에 뭍힌 지니의 모습은 처참했다. 그녀를 죽인 것은 마찬가지로 워킹 홀리데이로 호주에 온 한국인들. 오히려 호주인은 따뜻했다. 영화에서 약간 드러내긴 하지만 영어가 뭐길래 호주에 가서 배워야 하고, 왜 대학생들이 농장일을 하러 그 먼 곳까지 가야 할까라는 의문을 자연스럽게 제기한다.

비밀은 없다는 매우 색다른 느낌의 한국 영화다. 싱글 라이더에서도 새로운 느낌을 받았지만 비밀은 없다는 훨씬 더 이색적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자세히 고민해보지는 않았지만 그 이질감은 오래 남는다.

순서로 보면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이후 이 영화를 봐서 손예진 배역의 차이가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손예진이 이런 연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꼬마 아이의 엄마였다가 훨씬 큰 사춘기 아이의 엄마로서의 손예진. 그녀가 얼마 전에 밥 잘 사주는 누나 역할을 했음을 감안하면 이런 영화들에서 엄마 손예진은 아직도 조금 이상하게 느껴진다. 감독의 전작은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는데 이 영화는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애매하다.

불한당의 경우 칸 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라는 점만 알고 봤는데 곱씹어볼 수록 애매하다. 재미가 있다고 하겠지만 잔인했고, 너무 흔한 조폭 영화라는 점에서는 식상하고, 조직에 잠입한 경찰이라는 설정은 이미 많이 봤다. 다만 중반에 경찰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음에도 둘의 관계가 유지된다는 점은 특이하다 하겠다. 불한당보다 불신이야말로 영화의 키워드라 하겠다. 아무도 못 믿고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이기심만 남은 세상.

지금 만나러 갑니다라는 작품은 아주 오래 전에 일본드라마로 봤다. 다 보지는 못한 것 같다. 일본 영화가 매우 유명했는데 어찌어찌 아직도 못 본 상태로, 죽은 엄마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온 것인지 그 의문만 남은 채 살아왔다. 한국에서 리메이크된 작품을 보니 결국 타임슬립이었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일본은 타임슬립을 과용한다. 소지섭의 데이트 복장만은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영화다. 이 작품을 어떤 식으로건 처음 접한 사람은 곱씹어보면 괜찮다고 느낄만한 영화고, 전작을 뭐든 봤다면 식상한 영화가 될 것이다.

샤프 오브젝츠 7편

지난 번에 원작 소설의 이야기를 알아버려서 긴장감은 훨씬 떨어졌다. 초점은 소설의 이야기가 어떻게 영상으로 펼쳐질 것인가.

이번 7편에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갑작스럽다고 느껴졌다. 아도라가 악녀인 것은 이미 암시가 되었던 바인데 이번에는 매리앤에 이어 애마까지 약물 중독으로 죽이려한다는 내용이 확연히 드러났다. 이제 한 편 남았으니 결론을 내야하긴 하지만 5편까지는 거의 변죽만 올리다시피한 전개를 감안하면 갑작스럽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또한 존 킨과 카밀 프리커의 갑작스러운 친밀감 상승도 아주 조금은 납득이 되지만 당황스러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린 여동생의 죽음 때문에 미칠 것 같고 죽음이 아니면 극복하지 못할 것 같은 상태의 오빠와 언니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서로의 상처를 알아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인 혐의로 체포를 눈앞에 둔 존의 행동은 무모해보였다. 죽어도 상관없고 살인 혐의를 뒤집어써도 상관없다는 사람이니 무모한 행위조차 무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새로 알게 된 사랑하는 남성 앞에서도 옷을 벗지 않는 그녀가 여태 살인 용의자로 알고 있던 젊은 남자가 비슷한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옷을 벗고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갑작스럽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여하간 카밀이 지난 편에서 애마에게 휘둘려 환각제를 먹는 걸 보면 그녀도 다른 사람의 말에 굴복하는 버릇은 있는 것 같다. 다만 어머니인 아도라에게는 예외적으로 매우 반항적이다.

아도라가 자기 딸들에게 독을 먹여서 굴복시키는 방식은 팬텀 쓰레드를 즉각적으로 연상시킨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자기가 아파서 누워있을 때 아내가 좋아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으며 그 섬뜩한 상황을 영화로 만들었다고 알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드라마에 나오기로는 병명이 있을 정도로 흔한가 보다. 아도라는 왜 자기 아이들을 아기 때부터 아픈 아이들로 규정했을까. 19세기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남부의 지배계급으로 살아온 집안의 아도라가 왜 후손들을 다 죽여버리려고 할까? 남부인의 위선을 끝내기 위해? 그녀의 남편의 침묵도 끔찍하다. 그는 아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는 듯 하지만 그저 음악 볼륨을 높이 키우고 자기만의 세계로 숨어들어갈 뿐이다.

샤프 오브젝츠는 작년의 히트작 빅 리틀 라이즈와 유사하게 여성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래서 윈드 갭에서 두 소녀가 이빨이 뽑힌 채 죽어버린 후 대개의 사람들이 남자라야 그렇게 많은 힘이 필요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편견을 가진 반면 카밀을 비롯한 여자들은 윈드 갭의 여자들, 남자들에 억눌린 그녀들이 사실 그럴 능력과 의지가 있음을 끝없이 암시했다. 이번 편에서 존 킨은 돼지 농장에서 돼지 이빨을 뽑는 도구가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여자들도 충분히 소녀들의 이빨을 뽑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번 편까지는 카밀이 아도라가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고 믿고 있는 상태인데 소설대로 간다면 8편에서 다른 진범이 드러나야 할 것이다.

2018년 8월 7일 화요일

샤프 오브젝츠: 카밀의 아버지

5편에서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카밀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어머니인 아도라가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카밀의 아버지를 언급하며 카밀이 아버지를 닮아 차갑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카밀을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고 생모가 딸의 면전에서 말했다.

문득 드는 생각인데 카밀의 아버지가 지금 아도라의 남편은 아닌게 확실하고 지금껏 아도라의 근처 인물 중 아도라의 아버지로 의심할만한 사람이라고는 윈드 갭의 경찰 비커리 밖에 없다.  이미 지난 편에서 아도라와 비커리의 여전한 로맨틱한 분위기는 아도라 남편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5편에서는 비커리 부인의 걱정스럽고 짜증내는 표정을 유발했다. 비커리가 차가운 성격이라고 볼 여지는 아직 없지만 젊은 시절 어떤 이유로건 아도라와 비커리가 사귀다 불가피하게 결별했다면 아도라가 보기에 어떤 차가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간편한 추측일까? 하지만 이미 드라마가 시즌 절반을 넘어간 상황에서 갑자기 다른 캐릭터를 데리고 와서 이 사람이 네 아버지다라고 밝히기도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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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길리언 플린의 원작 소설의 요약을 읽었다. 앞으로의 재미를 위해서는 읽지 말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과연 충격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용을 옮기지는 않고 링크만 남겨둔다.
https://www.bustle.com/p/what-happened-in-sharp-objects-the-book-gillian-flynns-story-is-perfect-for-tv-9660845

2018년 8월 6일 월요일

샤프 오브젝츠 5편까지

웨스트월드 시즌 2 이후 HBO의 일요일 밤을 책임지는 드라마는 길리언 플린 원작에 빅 리틀 라이스의 감독이 감독을 하고 에이미 아담스가 TV 드라마의 주연을 맡은 샤프 오브젝트다. 그동안 리뷰를 써보려고 했지만 거의 쓰는 것이 불가능했다. 두 소녀의 살인 사건이 있었지만 미스터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고 주인공인 카밀의 의식은 짧은 화면들이 점멸하며 이어져서 이야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드라마의 제목처럼 날카로운 것을 보면 자해를 했던 카밀이 왜 그런 습성을 갖게 된 것인지 분명치 않다. 아직도 아주 조금만 드러났지만 어린 나이에 죽은 여동생이 관계가 있으리라 짐작이 되고, 숲속에서 있었던 풋볼팀 남자아이들로부터의 성폭행?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보인다. 하지만 5편에서 충격적으로 드러나듯 그녀의 흉터는 팔과 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신에 있었다. 글씨들이 정확히 드러나는 것을 보면 그녀가 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저지른 짓으로 보였다.

이야기의 공간적 설정은 매우 흔하다고 볼 수 있다. 비밀을 간직한 작은 도시에 외부인이 들어와 추한 내면을 드러낸다는 설정. 한 가지 다른 점은 파헤치는 사람이 완전한 외부자인 '캔자스 시티'의 형사만이 아니라 한 때 내부자이자 윈드 갭의 비밀의 핵심과 연결되었을지 모를 카밀이 기자로서 관여한다는 점이다. 카밀은 아픈 과거 때문인지 자주 술을 마셔야했고, 어머니와는 자주 대립하고 싸워야했다. 사실 어머니의 행태로 보면 카밀이 그 집에 계속 붙어있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아마도 카밀의 어머니는 살인 사건을 비롯한 윈드 갭의 어둠에 매우 근접했으리라 추측이 되는데, 카밀의 배다른 동생인 애마는 악녀로서 사건을 일으킬만한 캐릭터여서 앞으로도 주목된다.

5편은 남부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칼훈 데이라는 이벤트가 벌어졌고 예상한대로 핵심 용의자로 인식되는 두 명의 남성은 술김에 몸싸움을 했다. 이번 에피소드에서 캐릭터들이 다른 캐릭터들을 다양한 시점에서 매 순간 주시하는 것은 볼만했다.

지정생존자 시즌2 중후반부까지 눈에 띄었던 지점

지정생존자 시즌2를 뒤늦게 보고 있다. 초반에는 잘 안 보게 되었지만 중반이 되며 다음 편이 기다려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가장 충격적인 신은 주요 캐릭터인 커크만 대통령의 부인이 교통 사고로 사망한 경우다. 찾아본 바로는 배역을 맡은 배우가 훌루의 새 시리지에 숀 펜과 함께 출연하기로 하면서 하차한다고. 그녀는 그동안 큰 비중은 없었지만 시즌2에 들어와 그녀의 어머니가 과거에 범죄에 연루되고 FBI 국장의 정치적 야심이 결부되며 기소를 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극적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순간 사망한다.

축구 팬으로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터키에 얽힌 정치 문제를 다룬 에피소드의 작명이었다. 터키 대통령에 반대하는 세력의 대표로 설정된 인물, 미국에 방문교수로 머무른 사람의 이름이 누리 샤힌이었기 때문이다. 왜 하필 축구계에서 잘 알려진 터키 선수의 이름을 차용했을까? 흥미롭게도 터키 대통령의 성은 투란이다. 투란도 유명한 터키의 축구 선수 이름인데 드라마 작가가 유럽 축구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이 생길 정도다.

그리고 한국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중후반에 등장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남북한을 동서 훈츄라는 두 개의 가상의 국가로 설정했다. 동훈츄가 북한이고 서훈츄가 남한인 것은 동서독의 지리적 배치를 빌린 것 같다. 동훈츄의 지도자는 '김 의장'이고 외모는 김정은보다는 시진핑을 연상시켰다. 서훈츄의 지도자는 '한 대통령'으로 여성이며 재선을 노리고 있었다. 탄핵 이전에 만든 시나리오인가 생각이 들기도 한데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두 나라가 협상 테이블에 앉는 광경은 올해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들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캠프 데이빗에서 있었던 이 회담은 드라마의 설정상 잘 되지 않았고, 핵무기가 미국에 밀반입되는 초유의 위기 상황이 벌어졌다. 이 정도 상황까지 봤는데 북한이 미국이 써먹기 좋은 소재이긴 하지만 핵무기 밀반입은 너무 나가지 않았나 싶다.

닥터 프로스트라는 여성 캐릭터도 흥미롭다. 이 분은 IT 기업의 사장인 모양인데 프라이버시를 지극히 침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미국에 핵무기가 들어온 위기 상황이라는 이유로 FBI와 이 기업은 절차를 거치지 않은 개인정보 이용으로 용의자를 찾아내고 있었고 이 부분이 나중에 문제가 될 것 같다. 그리고 더욱 흥미로운 점은 프로스트 박사가 커크만 대통령과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다. 둘다 배우자가 사망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리고 굳이 그 사실을 알림으로써 향후의 로맨스가 벌어질 가능성이 보인다.

2018년 7월 25일 수요일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 인크레더블2 (2018)

피서 차원에서 극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두 개의 짧지 않은 영화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와 인크레더블2다. 공교롭게도 모두 전작에 이은 속편이고, 두 영화에서 모두 캐서린 키너가 연기한다. 

먼저 시카리오 후속편이다. 드니 빌뇌브가 빠지고 에밀리 블런트가 빠진 상태의 후속작이 과연 어떨 것인가를 생각하면 당연히 기대감이 뚝 떨어지고 평소라면 보러 가지 않았을 터이다. 하지만 앤트맨 과 와스프를 보느니 이 영화를 볼 터이고, 또한 어디에서 잘못 보았는지 영화가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평가들도 읽었다.

 오래간만에 찾은 CGV 용산. 그리 크지 않은 18관에서 영화가 상영되었다. 그것도 아마 마지막 상영일이었던 것 같다. 관람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내가 더 좋은 자리로 옮길 생각을 못 하게 만들 정도로는 많이 있었다.

영화는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밀입국하던 한 남자가 단속에 걸리자 자폭하는 장면에 이어 미국 마트 내에서 폭탄 테러를 벌인 한 이슬람 신도를 보여준다. 그러자 미국 국방부 장관은 잘 됐다, 이제 미국이 압도적 폭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경고를 보냈다. 멕시코 마약 카르텔 이야기인데 왜 이슬람 신도의 폭탄 테러가 나오나 의아하던 차에 장소는 아프리카로 건너 뛰어서 일련의 과정이 있은 후 예멘의 테러 단체가 소말리아 배를 통해 멕시코로 가서 미국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라는 친절한 해설을 덧붙였다. 그러하니 결국 문제는 다시 멕시코 카르텔이다, 이 놈들을 분쇄해야한다는 계획을 세우면서 카르텔 두목의 딸을 미국이 납치하면서 경쟁 카르텔의 소행처럼 보이게 하여 분란을 일으키자는 결론이 내려지고 실행된다.

이제는 어벤져스의 타노스로 너무 유명해진 조쉬 브롤린이 주연으로서 이 작전을 총괄한다. 어떤 무기상에게서 헬기를 비롯한 온갖 무기를 구매하고, 콜롬비아에서 사는 베네치오 델 토로를 찾아 복수의 기회를 제공한다. 카르텔 두목 딸의 납치는 너무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왔다가 다시 멕시코로 갔다가 멕시코 경찰의 총격을 받으며 전투가 벌어지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데 델 토로는 그 소녀를 데리고 방랑길에 오른다. 멕시코 경찰 수십 명이 죽은 것이 문제가 되어 작전은 취소가 되고 델 토로와 소녀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지시가 내려온다. 일이 간편하게 돌아가서 어린 시카리오들에 의해 델 토로가 총을 맞고 죽었고, 딸은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그러나 조쉬 브롤린이 이끄는 대원들은 헬기 두 대에서 내려 어린 시카리오들을 학살하고 그 딸을 다시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델 토로는 살아있었다! 총알이 빰에서 빰으로 관통하여 치명상을 입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지 않는 자유를 얻었다. 이후 영화는 1년 후 그를 쏜 어린 시카리오를 델 토로가 정장을 잘 차려입고 찾아가 상담을 하려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볼 때는 몰랐지만 3부가 또 만들어진다고 하니 이 둘이 3부에서 활약을 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신경질적으로 사람을 긴장시키는 음악을 자주 사용했다. 1편에서처럼 멕시코 카르텔의 살벌한 행태는 나오지 않았고 대신 카르텔과 공생하는 멕시코 경찰의 부패상과 사람들을 국경 너머로 보내주며 돈을 버는 꼬마 시카리오들이 미국의 적으로 주요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힘의 균형은 미국 요원들에게 너무 쏠려있는 것처럼 보였고, 과연 이들의 행동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지 모호했다. 아마도 카르텔과의 전쟁을 미 국방부가 원하는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겠지만 조쉬 브롤린의 동기가 애매하고, 왜 카르텔 두목의 딸을 애초의 계획과 달리 살리는지도 명확치 않다.

인크레더블을 하도 오래전에 보아 속편이 1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모르는 상태로 관람했다. 하도 극찬 일색이라 2시간을 보낼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다.

픽사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보는 것이 하도 오랜만이라 본 영화 전의 단편을 보는 반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만두?를 빚던 아주머니가 만두가 사람이 되는 걸 보며 깜짝 놀랐다가 만두를 자식처럼 키우는데 결국 결혼해서 집을 떠나버리자 좌절하는 이야기였다. 밝혀지기론 아주머니에게 만두처럼 생긴 아들이 있었고 그가 결혼 후 집을 나가버린 후 좌절한 것이 만두와의 관계로 형상화된 것이었다. 아들을 젊은 여자에게 주느니 차라리 먹어버린다는 설정이 극단적이긴 하지만 재미있었다.

영화 초반은 인크레더블 가족 5명이 두더지처럼 그러나 엄청나게 큰 기계로 땅을 마구 파헤치고 건물 도로를 망가뜨리는 악당을 물리치는 과정이 그려진다. 결국 이야기는 최근의 여러 수퍼 히어로 영화에서 반복되는 주제처럼 이 초능력자들이 기여한바도 있지만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많아 격리하거나 능력을 쓰지 못 하게 해야한다는 여론에 대한 것이었다.

이들 가족은 능력을 숨긴 채 평범한 직장에서 일해야 할 운명에 처했는데 갑자기 한 IT 재벌이 접근하여 수퍼 히어로를 합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며 달콤한 제안을 해온다. 다만 남편이자 가장인 미스터 인크레더블이 아니라 아내인 일래스티걸이 먼저 활동을 해야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남편은 이제 집에 남아 세 아이를 돌봐야했다. 큰 딸은 남자 아이와 연애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았고, 초등학생 혹은 중학생인 큰 아들은 수학을 못 해서 아버지에게 물어보나 미스터 인크레더블도 수학을 잘 못 했고, 갓난아기를 보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공감이 되는 장면이 너무 많았고, 내 자리 인근에서 아이들을 데려와 영화를 보는 어느 아주머니도 종종 그런 장면들에서 웃고 계셨다.

영화는 중반부터 예측이 가능한 부분이 있었다. 결국 재벌의 여동생, 주로 발명을 담당한 그녀가 스크린슬레이버였음이 드러났고, 인크레더블 가족이 물리쳐야할 주요한 적도 그녀였다. 오후의 영화 관람이 너무 피곤하여 후반부의 전투 장면은 거의 통째로 놓쳐버렸지만 큰 후회나 미련은 없다.

영화는 몇 가지 재미있는 지점들을 제공했다. 어머니가 생계를 해결하고 아버지가 집에 남아 아이들을 돌보는 상황 자체가 주는 어려움은 웃음 포인트가 되었다. 이 대목은 최근의 미투 운동으로 대표되는 페미니즘과 연결이 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기 잭잭이 온갖 초능력을 갖고 있으며 화가 날 때는 악마 같이 변하기도 하는 장면은 은유적으로 해석하면 오히려 현실적이다. 아기는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고, 화를 내고 떼를 쓰면 아무리 부모라도 아기가 귀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스크린슬레이버는 악당이지만 그의 주장은 어찌 보면 수퍼 히어로에 열광하는 문화에 대한 일침으로 받아들여도 될만한 것이었다. 수동적인 인간, 무력한 인간들이 만연했기 때문에 오히려 수퍼 히어로에 열광한다는 진단은 오히려 그(녀)가 악당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아마 이 애니메이션의 세계관에서는 실재하는 수퍼 히어로들을 없애겠다는 목적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인랑 (2018)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알고 있던 인랑이 김지운 감독에 의해 한국적 맥락으로 변형되어 극장에 걸렸다. 바로 오늘 개봉되었고 마침 시간이 되어 조조로 관람하였다.

예고편만 공개되었을 때 내가 가본 커뮤니티에서는 기대보다는 우려가 압도적이었고, 최근 며칠 시사회 반응은 좋았다는 글 제목을 얼핏 보았다. 원작을 보지 않았기에 원작과 비교하려고하는 부담감은 갖지 않은 채 편견없이 영화를 보았고, 그 결과 애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영화를 액션 영화로 분류한다면 수준급의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영화 초반의 시위와 테러 장면, 섹트라는 테러 집단을 응징하는 특기대의 진압 과정, 남산 타워에서의 총격 및 차량 액션(특히 드론의 총질이 훌륭했다), 그리고 공안부를 무찌르는 인랑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우성과 강동원의 대결까지 영화는 액션으로 가득하다.

로맨스 영화로 보면 어떨까. 영화는 최근 실제 연인설이 제기된 강동원과 한효주의 러브 라인을 주요 줄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둘은 처음부터 서로를 이용하여 자신의 혹은 조직의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 하지만 영화의 화면 배치가 암시하는 바 둘은 남산 케이블카에서의 첫 만남부터 사랑에 빠졌다. 그리하여 인랑이라고 하는 임중경(강동원)은 정우성이 잘 정리하듯 테러리스트인 한효주를 전혀 죽일 생각이 없었고, 조직의 명령을 거역하며 조직을 탈출한다. 하지만 강동원은 북한으로 가는 한효주를 따라가지 않고 역에 남으며 로맨스의 앞날, 결말을 애매하게 만든다.

정치 드라마로 보면 어떨까. 영화는 초반 정우성의 내러이션을 통해 2018년에서 6년 지난 2024년 남북이 통일에 전격 합의한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이 부분이 가장 문제적이라고 느껴지는데 왜냐하면 정우성은 '앞으로 6년' 후라며 2018년의 시점에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회고가 아니라 예언이기 때문이다. 내러이션의 정우성은 극중 특기대 훈련대장이라는 캐릭터가 아니라 2018년 현재 살아있는 배우 정우성이란 말인가? 다시 돌아가면 2024년부터 통일에 반대하는 세력이 무장을 하며 섹트라는 테러 집단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후 영화는 5년이 더 지난 2029년 시점에서 시작된다.

테러 집단의 이름을 섹트로 지은 것은 왜일까? 사실 섹트라면 종교적인 폐쇄 집단의 의미로 사용될 터인데 영화속 섹트가 종교적이라는 암시는 전혀 없었다. 더 구체적인 이름을 지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여하튼 영화의 핵심 배경은 남북이 주변 강대국의 무장화 움직임 속에서 생존을 위해 통일을 결단하지만 공안부로 대변되는 통일 반대 세력이 섹트 같은 테러 조직을 사실상 먹여살리며 공작을 벌였고 특기대가 이런 계획을 분쇄하며 더 공고한 통일의 길로 간다는 스토리다. 그렇다보니 맨 마지막의 어떤 컷은 통일부의 선전 영화인가 싶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 관계를 해소하는 차원의 통일에 반대할 이유는 전혀 없음에도 왠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졌다. 결국 모든 일이 끝나고 DMZ로, 평양으로 그리고 신의주로 더 나아가 유럽까지 열차를 타고 달려가고 휴가를 보내는 꿈같은 일들이 펼쳐질 터인데 공안부의 자기파괴적 공작이 정당화될 수 있겠냐는 항변이 들리는 것 같았다.

현재 한국에는 없는 공안부는 그 깃발 모양에서부터 국정원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한 조직이다. 공안은 공각기동대에서 등장한 조직이고 인랑 원작에 등장하는지도 모르겠다. 북한 간첩을 만들어내기까지 하며 생존하는 국정원이 통일을 반기지 않을 가능성도 많겠지만 국가정보를 관리할 일이 통일 이후에도 충분히 많을 터인데 국정원을 통일 반대 세력으로 설정한 것은 그럴 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과하다는 느낌이다. 물론 영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이런 류의 국가 폭력 조직간의 대결을 설정했다고 넘어갈 수 있고 원작에 유사한 설정이 있었다고 짐작도 해본다.

영화가 근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는 방식은 약간 게으른 것 같았다. 사실상 거의 지금 현실을 그대로 가져갔고, 일반 주택가에는 통일에 반대하는 벽보들이 건물 외벽이나 담장을 뒤덮는 것으로서 포인트를 주었다. 차량에서는 택시들이 차 위에 무언가 볼록 튀어나온 형태로 다니는 것이 이색적이긴 하다. 버스의 번호 앞에 알파벳을 붙이기도 하고 전철역 출구에도 알파벳이 붙어서 현재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주긴 한다. 가장 다른 점은 총격전이 서울 중심에서 벌어진다는 것인데, 총기 모델을 보는 눈이 없어 얼마나 적실한 설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특기대의 방탄 능력이 뛰어난 아머? 전투복?과 빨간 두 개의 동그라미가 빛나는 안면 마스크가 가장 지금과 다른 시대라는 느낌을 주었다.

영화는 인간 늑대라는 제목을 스토리 속에서 변주했다. 예고편에도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탈을 쓴 늑대가 인랑의 진실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사실 인랑의 실체는 영화를 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공안부에서 파악하는 인랑은 특기대 내의 비밀 조직이라는 것인데 영화 후반부의 장면을 보면 임중경만이 인랑인 것처럼 이해되기도 하여 헛갈렸다. 여하간 임중경은 인랑이라는 것이 확정적이고 그는 공안부의 겁없이 무장 안한 애송이들은 물론이고 쿨한 외모로 바주카포를 쏘아대는 공안부 내의 특임대도 홀로 다 물리치는 괴물 같은 전투 유닛이다. 갑옷 같은 전투복이 방탄 기능은 훌륭하지만 아이언맨 같은 능력을 주는 정도는 아닌 것 같고, 등에 짋어진 통 속에서 늑대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가스가 입으로 주입되는 건가 의아했다. 그런 전투력으로 왜 영화 초반에 섹트의 리더를 놓쳤을까?

임중경이 인랑이라는 설정을 통해 김지운 감독은 또 하나의 유명한 모티브를 결합시켰다. 바로 빨간 모자 이야기다. 이 모티브는 아주 꾸준하게 등장해서 집요할 정도이다. 영화에는 한효주를 중간으로 하고 초반에 한효주의 여동생 그리고 막판에 남동생이 전면에 등장하는데 이 세 남매 모두가 해당 시점에 빨간 외투를 걸치고 있다. 그에 더해 한효주는 강동원을 자신의 책방으로 유인한 이후 비극적 버전의 빨간 외투 이야기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빨간 모자를 누가 죽였나? 할머니? 늑대? 어머니? 그녀는 누구 탓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억울하다고 했다. 이 대사는 엔딩 크레딧 막판에 한 번 더 등장한다.

영화의 주요 기제 중 하나인 2024년의 피의 금요일은 특기대가 잘못된 정보에 의해 무장하지 않은 여고생 10여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임중경은 이 일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것으로 보이고 그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그는 한효주의 동생이 섹트의 일원으로서 자폭 테러를 할 순간인데도 그녀를 죽이지 못했다. 그 여동생은 자폭을 했지만 한효주는 당신이 죽인 건 아니라며 그를 두둔했다. 임중경은 상관 지시로 한효주를 죽여야했지만 역시 죽이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구원했으며, 마지막에는 투병생활을 하던 남동생이 누나와 북한으로 갈 수 있게 만들어준다. 결국 늑대여야 할 임중경은 세 명의 빨간 모자를 모두 죽이지 않았다. 늑대가 할머니를 잡아먹고 빨간 모자를 잡아 먹는 것은 식욕이라는 욕망의 결과물이다. 물론 할머니를 먹고 배가 불렀을 터인데 금세 손녀까지 잡아먹는 것은 탐욕이라고 해야할 수도 있다. 빨간 모자는 엄마 심부름을 했을 뿐인데 왜 죽어야했나. 운이 나빴다고 해야 할까? 탐욕스러운 늑대가 존재한다는 것이 부조리한 것은 아닐까?

한효주는 자신이 섹트에 들어가 활동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여겼다. 여동생의 경우는 왜 그랬는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언니를 따라 가입하고 활동한 것인지 모른다. 특기대가 학살했던 여고생처럼 그녀도 고1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는 테러에 사용될 폭탄을 운반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순진했던 그녀, 자신을 둘러싼 특기대를 보며 분노의 자폭을 선택한 그녀는 세계 도처에서 자폭 테러를 하고 내전에 휩싸인 10대 전투원들을 연상시킨다. 그 어린 청춘들은 어른들이 주입한 생각대로 행동하다가 도구처럼 사용되고 그렇게 죽어갔다. 자신의 사고를 하지 못하는 존재는 바로 특기대 대원들이고 또한 공안부의 요원들이다. 그저 상관의 명령이 떨어지면 따지지 않고 움직이는 기계, 로봇, 짐승. 임중경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다며 특기대를 떠났고 인간이 되어가는 듯 보였다. 섹트와 공안부 양쪽으로부터 덫에 걸린 한효주는 두 조직이 붕괴되자 자유의 몸이 되었고, 그야말로 아무 죄 없는, 순진무구한 그녀의 남동생은 빨간 옷을 입고도 안전하게 북한 땅으로 떠났다.

생각해보면 빨간 색의 모티브는 한국 사회의 레드 컴플렉스를 상징할 수도 있겠다.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이 되며 당의 색을 빨간 색으로 바꾸는 대변신으로 이 사회에서 빨간 색이 '빨갱이'로 연결될 여지는 훨씬 줄었지만 아직도 어디의 누군가는 종북 세력과 빨갱이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빨간 옷을 입고 북한에 간다는 설정은 그렇기 때문에 매우 도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만하면 다 썼을까? 잘 모르겠다.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처럼 분단 한국의 현실을 다른 모티브와 잘 섞어서 영화로 만들었다. 남과 북은 통일을 하겠다는데 대한민국 내 정부 조직들이 말 그대로의 전투를 벌이고, 어제의 동지가 다른 편에 넘어가 나를 죽이려고 하고, 상관과 부하가 생사의 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현재의 남북 화해 국면에서 앞으로 제발 이렇게는 하지 말자는 당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무열과 최민호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끝내야겠다. 김무열이라는 배우는 전에 본적이 없고, 샤이니의 최민호의 연기도 이 영화로 처음 보았다. 김무열은 강동원의 최대 적으로서 매우 비중있는 역을 맡았고 최민호는 비교적 짧게 출연한다.  김무열은 공안부에서 맡은 직책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젋은 얼굴이었지만 설득력있는 연기를 한 것 같고, 최민호는 곱상한 평소의 외모를 많이 망가뜨리며 애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인랑이라는 조직에 어울리는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캐스팅의 이유가 궁금하다. 늑대가 이렇게 고울 수도 있다는 사례? 

2018년 7월 11일 수요일

버닝(2018)

이창동 감독의 이 새로운 영화는 무엇에 대한 것일까? 아직 읽어보지 못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라고 한다. 제목 자체가 '버닝'이니 무언가를 태우는 이야기고 실제로 영화의 마지막은 방화의 장면이다.

사실 태우는 것은 마지막의 포르쉐와 그 안의 한 인간과 피묻은 옷들만이 아니었다. 담배와 대마초가 피워졌다. 비닐 하우스가 꿈 속에서 불탔다. 태양도 불타올랐다고 해야할까? 자동차가 연료를 태웠다? '보일'러?

영화의 중반부터 이야기는 반포에 사는 '벤'이 후암동에 사는 해미를 살해하는 이야기로 이해되었다.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의 일부 리뷰들을 보니 그런 해석도 가능하지만 감독은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았다는 글들이 많은 걸 보니 벤이 해미를 죽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거의 분명하게 그런 암시를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파주의 종수 집 근처의 비닐 하우스는 벤의 직접적인 언급과 달리 불타지 않았으므로 벤의 방화는 살인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언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벤은 해미의 실종을 연기처럼 사라졌다고까지 말했다. 벤의 집에 있는 해미의 시계, 벤의 집에 새로 들어온 주인 없는 고양이가 '보일'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장면까지. 대마초를 피우는 것으로 대표되지만 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벤이 해미를 죽이고, 해미와 비슷하게 연고가 없는 가난한 젊은 여성을 또 만나고 살인을 하는 이야기라고 볼 여지는 많다. 그렇다면 종수는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 벤을 죽였고 그것은 그에게 정당한 행위였을 것이다.

몇 개 본 리뷰에서 고양이가 이름에 반응한 것은 우연일 수도 있다는 의견은 수긍이 가지만 벤의 집 화장실에 있는 시계는 많이 의심스럽지 않은가? 물론 또 다른 씬에서 종수가 해미의 옛 동료를 만났을 때 그녀의 팔에 같은 시계가 있었으므로, 대량 생산된 손목 시계 하나가 그 주인의 정체를 확정시켜줄 수는 없다. 이것은 감독이 관객의 판단을 혼란시키기 위한 조치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확실히 모호한 장면들이 많다. 해미는 처음에는 그저 가끔씩 일하며 돈을 모아 아프리카 여행을 가는 흔한 청춘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들에게 그녀는 카드 빚이 많고 거짓말을 잘 하는 아이였다. 그녀는 파주의 옛집 옆에 우물이 있어서 자기가 그 안에 빠져있었다고 했지만 정작 그녀의 가족은 우물이 없었다고 하고 이장도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16년간 연락이 두절되었던 종수의 어머니는 우물은 있었다고 하는데 다만 물이 없는 마른 우물이라고 했다. 최소 16년 이전의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이제 우물이 불필요한 세상에서 기억에서 사라져도 이상치 않을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골에 살았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보면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지 여부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최소한 다섯 명의 당사자들의 기억이, 그것도 단순한 장소의 존재 여부가 엇갈린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 아마 종수 엄마의 진술처럼 마른 우물이 있고, 아직은 어렸던 해미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고 종수가 해미를 구해준 적이 있고 해미 가족들은 마른 우물이니까 그런 우물이 없었다고 말했을 수는 있겠다. 

고양이의 경우도 그렇다. 해미는 자기의 원룸에 고양이가 있다고, 그러니까 밥 좀 주라고 종수에게 부탁했다. 다만 고양이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니 안 보일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종수는 고양이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고양이 사료를 몇 번 주는 씬을 감안하면 고양이가 먹은 건지 누가 치운 건지 몰라도 최소한 사료가 없어지긴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원룸의 주인은 고양이를 키울 수 없는 건물이라고 말했다. 종수조차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러 오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고양이라는 소재는 양자물리학의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염두에 둔 것일까? 벤이 동시 존재를 말한 걸 감안하면 영화는 양자물리학을 적극 도입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마저 들게 만든다.

물론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최승호의 등장이었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어떻게 봐도 최승호 같이 생긴 이 배우가 누구인지가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가장 궁금했다. 정말 최승호라는 이름이 있었고 구글 검색은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파란만장한 젊은 날을 살았고, 자존심이 너무 세어서 손해를 본 중장년의 남성이라는 캐릭터는 어느 정도는 그의 삶과 일치하는 것도 같다. 현실에서는 언론인으로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살던 그가 공무원을 폭행하여 재판정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장면은 재미있었다.

어떤 리뷰는 이 영화를 계급 관계로 해석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렇게 볼 여지가 다분하다. 벤은 자신은 직업이 없다고 하는데 그는 반포의 고급 빌라?에 살며 포르쉐를 몰고 다닌다. 설정상 나이는 30전후일 것 같았다. 벤은 해미나 나중에 데리고 다닌 젊은 여성을 자신의 부자 친구 모임에 초대하여 그녀들이 소위 '쇼'를 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그 가난한 여성들의 몸부림을 비웃는다. 벤이 어떤 직업을 갖고 일한다는 암시는 전혀 없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일을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젊은 여자를 데리고 시간을 보내고, 운동을 하고 쇼핑을 한다. 미술관?에서 가족과 만나는 씬을 보면 가족이 부유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벤이 엄밀한 의미의 부르주아라고 할 수는 없다. 그저 재벌2, 3세 같이 조상이 돈이 많은 젊은이라고 분류해야 할 수도 있다.

종수는 어떨까. 그는 육체 노동, 그것도 일용직 성격의 일을 하며 돈을 번다. 아버지의 부재로 떠맡게 된 파주의 집에서 외양간을 치우기도 한다. 그는 해미의 원룸이 근사하다며 자신의 '방'은 싱크대 옆에 변기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정체성은 작가다. 그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을 써본 적도 없고 무엇을 써야할지도 모른다. 오직 영화의 막판이 되어야 해미의 방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쓸 뿐이다. 사실 그 전에 아버지 죄의 정상참작을 위한 탄원서라는 소설을 쓰긴 했다. 이장은 그 탄원서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그 글이 소설에 다름 아님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그 글은 매우 잘 써졌다며 작가로서 종수의 재능을 암시했다. 누군가의 리뷰에서 말하는 것처럼 해미의 방에서 쓴 글의 내용이 이후 장면들일 수도 있겠다. 일단 그가 왜 해미의 방에 있는지가 납득이 가지 않지만 시점의 측면에서는 확실히 그 때부터 종수의 시점을 벗어난 것 같다. 혹은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쓰는 장면 자체가 소설이 아닐까? 혹은 해미의 방은 사실 종수의 방이고, 해미가 실종되자 종수는 그 이전까지의 장면 모두를 소설로서 써본 것이 아닐까? 주인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줄 때는 자신이 같이 있으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라며 잔뜩 경계한 상태였는데 모든 장면이 시간 순으로 진행되었다면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는 전혀 어떤 결정적 해석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쓰고 보니 마지막 생각, 자신의 방에서 소설을 쓰는 종수의 상상이 영화의 대부분이라는 해석이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이 된다.

현재로서는 마지막으로 쓰고 싶은 것은 미국과 중국에 대비된 한국의 처지를 영화가 다룬 방식이다. 이 부분은 그렇게 두드러지는 소재는 아니지만 TV 장면 속의 트럼프, 벤의 집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중국에 대한 대화 등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현재 국제사회의 G2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게다가 종수의 집은 대남 방송이 들리는 휴전선 근처의 마을이다. 이런 정치적 현실은 강대국에 의해 운명이 좌우된 대한민국의 탄생과 현재까지의 역사를 환기시킨다. 마치 벤이 비닐하우스 태우는 것이 자연법칙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강대국들은 범죄적 행위가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벤은 한국 출신의 미국인이 아닌가?

파주라는 공간은 출판사가 많고 신도시가 존재하지만 영화 속의 그 장소는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젊은 여성들이 떠난 농촌에는 외국인 여성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수 아버지를 위한 탄원서를 받기에 부적절했다. 의사소통도 되지 않고 이 땅에 정착하지 얼마 되지 않은 귀화한 한국인은 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파주에서 좋은 이웃이었다는 증거로 전혀 적당하지 않았다. 종수는 아마도 고등학교까지는 파주에서 다녔을 것 같지만 그 마을에 그가 아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미 고향에서마저 소외된 종수는 이미 명백한 현실이 된 이웃 사람 동남아 여성에게서 이중의 소외감을 느낀다.

아직 이창동 감독이 직접 말한 내용이나 씨네21 등에 실린 관련 글은 하나도 읽지 않았다. 조만간 읽어보고 생각을 더 정리해봐야겠다.

2018년 6월 26일 화요일

웨스트월드 시즌2 피날레

웨스트월드는 이상한 장면을 제시하며 시즌2를 마무리했다. 맨인블랙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자기가 죽였던 딸이 눈앞에 보였고 결국 드러나기로 그 장면 속의 맨인블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충실성 테스트를 받고 있었다. 수십 년 전의 영화판 웨스트월드에서 율 브리너를 연상시키는 맨인블랙이 로봇이 되었다면 원작에 더 부합하게 되는 흐름이라고도 하겠지만 율 브리너가 원래는 테마파크의 주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니니 유사성은 그 정도에서 멈추는 모양이다.

지난 9편은 웨스트월드를 너무나 자주 찾은 윌리엄이 무엇이 현실인지 무엇이 진짜인지 너무 헛갈려 자신의 팔에 선을 꽂는 단자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칼로 살을 헤집는 장면이 등장했다. 10편에서는 진실을 확인시키지 않고 모호하게 지나갔다. 하지만 10편 마지막 부분이 훨씬 이후의 시점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때까지는 맨인블랙이 인간이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10편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고스트 네이션의 아케체타가 말하는 '문'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대목이었다. 재미있게도 그 문은 호스트들에게만 보였다. 호스트들은 땅바닥부터 하늘까지 길쭉한 틈이 생겨나는 걸 보았고 그 '문' 너머에 아무 것도 없는 들판이 있는 것도 보았다. 이곳은 포드가 호스트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었다. 호스트들이 그 문턱을 넘으면 로봇의 육신은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육신의 이미지, 데이터가 저 편으로 넘어가서 새로운 선택을 하며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호스트들의 데이터가 담긴 더 크레이들과 쌍을 이뤄서 존재하는 곳, 게스트들의 정보가 저장된 더 포지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이곳의 사상은 극단적이기까지 하다. 인간의 복잡성을 호스트의 몸에 주입하면 자꾸 에러가 나지만 알고 보면 인간은 변하지 않는 존재이기에 단순하게 가면 기계의 몸과 조화를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호스트들이 인간들이 짜놓은 내러티브 상에서 행복하게 혹은 문제없이 살아가는 경우와 같다. 호스트와 인간의 경계는 매우 흐릿하다. 양장본 속에 코드로 정리된 책 한 권이 인간의 전 생애라는 시각적 묘사는 훌륭하면서도 섬뜩했다.

10편에서는 그 동안의 여러 의문을 해소시켜주기도 했다. 시즌2 내내 혼란스러운 버나드의 기억은 그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었다. 버나드는 포드의 존재를 프로그램에서 지워버렸지만 이제는 그가 옆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언제나 포드를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1편에서 버나드가 자신이 홍수를 일으켰다고 했는데 10편을 보건대 그가 아니라 돌로레스가 홍수를 일으킨 것 같다. 그가 일부러 자신이 했다고 말한 것일까? 돌로레스가 버나드를 창조했다는 것은 설명이 되었는데 10편을 보건대 그녀는 버나드를 두 번이나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처음 포드의 명령으로 아놀드와 비슷하게 버나드를 만들어낸 이후 웨스트월드를 탈출하여 다시 만들어내는.

주목할만한 반전은 테사 톰슨이 연기한 헤일이 버나드가 되살린, 헤일의 외모를 한 돌로레스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돌로레스가 다른 외형을 갖고 소원대로 웨스트월드를 탈출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을 보면 그녀가 탈출한 세계에는 여전히 헤일의 외형을 한 호스트가 있고 돌로레스의 형상을 한 호스트도 있다. 두 개의 돌로레스인지 아니면 나중에는 헤일의 형상에 다른 '펄'을 넣은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또 재미있는 것은 스텁스라는 캐릭터가 호스트인 걸로 보인다는 점이고, 더욱 놀라운 점은 그가 헤일 버전의 돌로레스를 알아보면서도 그녀를 검색대에서 순순히 보내준다는 것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시즌2에 대해 호평보다는 지나치게 혼란스럽다는 평가를 하는 가운데 언제나 시청자를 속일 수 있는 이 시리즈가 시즌3 이상 존속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시즌 피날레의 거의 유일한 위안은 다음 달 시작될 HBO의 새 시리즈가 꽤나 기대가 된다는 점이다. 에이미 아담스 주연의 Sharp objects!

2018년 6월 15일 금요일

웨스트월드 시즌2 7, 8편

지난 주에 7편에 대한 리뷰를 쓰고 있었으나 마무리가 되지 않아 쓰다 만 내용들을 맨 마지막에 두고 8편 리뷰를 써보려고 한다.

8편은 많은 전문 리뷰어들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에피소드로 평가받았고, 나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엄청나게 많이 등장했지만 언제나 왜 나오는지는 오리무중이었던 고스트 네이션, 인디언족의 정체가 그 우두머리인 아케체타의 회상을 통해 드러났다. 에피소드 시작 부분에서 잠시 드러나듯이 아케체타는 웨스트월드가 조성되기 이전부터 제작된 초기 모델이었다. 그는 처음에 평화로운 인디언 부족의 역할을 공원 내에서 맡고 있었지만 돌로레스가 처음 일으킨 대학살의 현장을 목격하고, 또 역할 변경으로 그의 사랑인 코하나가 자신을 못 알아보는 지경에 이르자 그녀를 납치하여 다시 자신을 알아보게 만들었지만 그녀를 웨스트월드 관리자들에게 빼앗기자 죽음을 감수하며 그녀를 찾아나섰다. 코하나가 기계적 세팅을 초월하여 과거의 사랑을 깨닫는 과정이나 아케체타가 하계에서 죽은 사랑을 찾아나서서 기어이 발견하는 과정은 매우 감동적이다.

미로에 대한 이야기가 시즌2에서 다시 등장했는데, 요컨대 포드 박사가 별 의미없이 혹은 다른 의도로 두었던 물건이었지만 아케체타는 그것이 대단한 의미를 가진, 비밀의 열쇠라고 생각했고 그 미로 문양에 대한 집착은 실제로 그가 자신에게 부여된 경계를 초월하여 ‘저너머 언덕’ 혹은 그가 칭하는 ‘문’을 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아마 10편에서 전모가 드러날 것으로 기대되는 그 장소는 이번에 비교적 오래 카메라에 잡혔지만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메이브는 이번 편에서 거의 드러누워 델로스 사의 직원들에 의해 해체되거나 사라지는 등 운명의 기로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딸을 통해 아케체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아케체타는 메이브의 딸을 지켜내기 위해 계속 주변을 맴돌았다는 점도 밝혀졌다. 그 이유는 그 딸이 아케체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줬기 때문이다.

맨인블랙이 거의 죽을 지경인 가운데 그에게 배신당한 그의 딸이 기어이 고스트 네이션에 사로잡힌 그를 찾아내어 인디언보다 더한 고통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데려갔다. 9편 예고편은 윌리엄 가족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과연 그의 딸이 정말 인간과 호스트의 합성인지 궁금하다.


<쓰다만 7편 리뷰>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많은 총격전이 있었고 수많은 캐릭터들이 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메이브와 맨인블랙의 대결은 두 핵심 캐릭터가 사망할 것처럼 연출되었다. 총에 네 번이나 맞은 맨인블랙, 늙은 윌리엄이 죽지 않는다면, 또 델로스의 보안요원들의 총에 제대로 맞은 메이브가 죽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맨인블랙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메이브는 죽을 것 같은 상황이지만 죽지는 않았다.

클레멘타인이나 안젤라처럼 확실하게 역할이 끝나는 캐릭터들도 있었다. 심지어 테사 톰슨의 헤일 캐릭터도 돌로레스에 의해 죽기 직전이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그랬지만 그 때마다 닥치는 급박한 상황 덕에 죽음을 면했다. 하지만 포드 박사처럼 죽었어도 신 같은 권능을 자랑하는 캐릭터가 있는 세상에서 이러한 죽음들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들의 실제 세상에서의 그것과 다를 것이다. 

버나드는 크레이들의 서버 안, 네트워크에서 포드와 재회했고 웨스트월드의 세상에서 게스트가 호스트를 가지고 노는 것보다 호스트들이 게스트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행동을 저장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놀드의 이미지로 창조된 자신의 탄생 과정을 알게 된다. 

2018년 6월 1일 금요일

13 reasons why 시즌 2

많은 이들이 기다린 넷플릭스의 유명 드라마 13 리즌스 와이의 시즌 2가 얼마 전에 공개되었다. 영국 가디언에서는 청소년들의 시험 기간에 이 드라마가 공개되어 우려가 된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청소년들이 시험의 스트레스가 극심한 때에 이런 드라마를 보다가 자살 충동에 빠질까 우려한 것이다. 드라마는 그에 대한 대응으로 1편의 시작부터 학교에서의 어려움을 어디로 신고하라고 안내했고, 드라마의 매 편이 끝날 때마다 홈페이지 주소를 보여줬다.

이러한 제작사 측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의 내용은 매우 우울하다. 시즌1에서 하나 베이커의 자살 장면이 너무 적나라하여 불편했는데 이번에는 최종회에서 너무나 가학적이고 범죄에 분명한 집단 괴롭힘 장면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괴롭힘의 피해자가 총을 들고 축제의 현장에 가려고 할 때는 미국에서 현재도 학교의 총기 사고로 시끄러운 와중에 설마 드라마가 이렇게까지 나가도 될까 우려했는데 다행히 총을 발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드라마에서 몇 번이나 권총 사격을 하며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을 때는 결국 총을 들고 사고를 일으킬 것이라는 분명한 예고였다. 어쩌면 현재 미국 학교에서 일어난 사고들이 시즌2가 더욱 막장으로 끝나는 것을 막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 드라마는 다양성에 대한 집착하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인종, 성적 취향, 계급에 있어서 온갖 종류의 인간들을 모아놓았다. 여전히 핵심 캐릭터는 백인들인 것은 분명하고 바로 주변의 이차적인 캐릭터들에는 많은 흑인이 등장하고 히스패닉도 있다. 재미있게도 동양계 학생 캐릭터는 백인과의 혼혈이거나 아예 입양된 경우였다.

시즌2가 이룬 바는 무엇일까. 브라이스의 범죄는 하나 베이커 하나로 끝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당연하게도 예전부터 있었고,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는 놀라움? 자신의 여자친구마저 그 쓰레기 같은 클럽하우스로 데려가 강간한다는 설정? 아니면 남성 동성애의 만연? 하나 베이커가 재크 뎀프시와 섹스를 하는 사이였다는 점? 하나가 이전 학교에서 따돌림의 가해자였다는 점? 결국 우리는 남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 그 남이 자신의 자식이라도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점이 미덕이라면 미덕일 것이다.

하나가 따돌림을 하는 주체였다는 부분은 최근에 읽은 이기호의 '한정희와 나'라는 단편 소설과 너무 겹쳐졌다. 부모를 사실상 잃고 혈연도 아닌 남의 집에서 살면서 학교에서 다른 아이를 따돌리고, 그 아이가 임대아파트에 산다고 놀렸다는 한정희라는 캐릭터. 특히 아이들의 세상에서는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따돌리는 대열에 합류한다는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운가보다. 어른들의 세상에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할 것이다.

하나 베이커를 잊지 못하다보니 아예 유령으로 자기 곁에 두게 된 클레이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며 이만.

어 콰이어트 플레이스

에밀리 블런트가 출연하여 관심을 갖고는 있었지만 별다른 정보없이 영화를 봤다. 씨네21 같은 곳에서 얼핏 보기로 평이 나쁘지 않아 보였고, 감상 후 해외의 리뷰들도 대부분 호평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디에서 그렇게 높이 평가할 부분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보지 못 하는 반면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괴물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내지 못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영화가 내세운 가장 독특한 설정이다.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설정은 매우 큰 제약이다. 영화는 그 한계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에밀리 블런트를 출산이 임박한 엄마로 설정했다. 당연히 출산 과정은 많은 소리를 동반하게 되고, 엄마의 고통보다도 막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영화에서는 아기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워서 상자 안에 넣어 소리를 최소화한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왜 영화의 부부-이들은 실제 부부사이란다-는 소리를 내면 안 되는 세상에서 아이를 갖게 되었을까. 영화의 흐름을 보건대 초반부에 로켓 장난감을 갖고 놀다 소리를 내고 괴물의 희생양이 된 막내 아들을 생각하며 아이를 더 낳은 것 같다는 심증은 간다. 하지만 우는 아기를 언제나 산소마스크를 씌워 조용히 만들 수는 없다. 내가 기르고 있는 경험을 토대로 보건대 아이들이 언제 울지 언제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래의 막내, 셋째가 아이다운 호기심 때문에 죽음을 맞이했다면 넷째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장난치다 소리를 내는 위험한 상황은 몇 번이고 일어날 수 있다. 그럴 경우 형, 누나와 부모는 셋째 때처럼 침묵을 하며 남은 이들의 목숨을 유지하거나 비극의 광경을 함께 슬퍼하다가 죽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대책없이 아이를 낳은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기계를 만지는 능력 외에 직접 무언가를 제작하는 능력까지 갖고 있었다. 기계 장치가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는데 누나 역할의 아이가 실제로 청각장애가 있고 영화에서도 그런 설정이라고 하니 보청기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기계의 볼륨을 높일 때 나는 소리를 괴물들이 질겁을 하는 것만 보면서는 원래 괴물을 공격하는 무기인줄로 알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런 효과를 미리 알고 제작했다면 진작에 실험을 했을 터이니 보청기의 부수 효과가 괴물을 퇴치했다고 봐야겠다. 괴물들은 두꺼운 철판도 종이처러 가볍게 찢어버리는 다리를 갖고 있지만 일단 괴로운 소리를 들은 후 엽총으로 얼굴을 맞으면 퇴치가 되었다. 인간들이 마침내 괴물을 퇴치할 매뉴얼을 얻었다.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욕조에서 피를 흘리며 아이를 낳기 직전의 상태였던 에밀리 블런트가 나중에 샤워실에서 피묻은 손으로 벽을 턱 짚으며 아이를 남편에게 내보인 장면이었다. 싸이코나 타이타닉의 유명한 장면들이 연상되면서, 괴물을 유도하기 위한 용도였으나 어찌되었건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포가 터지는 와중에 에밀리 블런트는 아이를 낳고 탯줄도 끊으며 알아서 출산 과정을 처리했다. 그녀가 자체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혈압계로 자신의 상황을 체크하고 달력에 날짜를 표시하며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것을 생각하면 출산 과정을 그것도 남편의 도움이 없을 경우도 가정하여 대비했을 것이다.

타자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인지 뉴요커의 영화평에서는 영화가 백인 일색임에 대한 불편함이 드러났다. 요즘 영화에서는 다양성이 강조되다보니 오히려 구색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섞어놨다는 느낌의 영상물도 적지 않다. 영화는 분명 다양성을 다루지 않는다. 괴물과 인간의 화합 따위는 고려되지 않는다. 어제 훑어본 침입종 인간이라는 책의 내용과 유사하게 괴물과 인간은 지구의 최고 포식자 자리를 놓고 다툴 뿐이다. 그리고 청각장애 소녀의 우연한 발견 덕분에 괴물들이 소탕될 수도 있고, 너무 많은 괴물들이 몰려와 그 가족은 모두 죽고 괴물 퇴치의 비급은 영원히 소실될지도 모른다.

청각이 예민한 괴물과 청각 장애 소녀의 극명한 대비. 남편 역이자 영화의 감독은 소리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리를 낼 수 있는 자유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정치적 메시지까지 있을까? 눈이 멀고 싫은 소리를 내는 존재는 소멸시키는 괴물은 망가진 정치 권력에 대한 메타포일까? 뉴요커의 리뷰에서 죽어가는 성인 남성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분노의 외침을 지른다고 지적했는데 그렇다면 이런 식의 상상에 근거가 될 수도 있겠다.

영화는 설정 내에서 나름대로 논리적인 완결성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놀라운 지점은 별로 없었기에 아쉬웠다. 괴물은 어디선가 많이 본 형태인데 어떤 영화의 괴물과 유사한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18년 5월 30일 수요일

웨스트월드 시즌2 6편

이번 편은 주요 인물들이 모두 등장하는 흔치 않은 에피소드였다. 그만큼 정신없는 전개가 이어졌다는 것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 것 같지만 별로 진전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쇼군월드는 이번 편에서 짧게 나온 이후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무사시와 아카네는 메이브 일행을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 여기에는 실용적인 이유들이 작용했으리라 본다. 메이브는 초능력을 통해 쇼군월드의 인물들과 일본어로 대화할 수 있지만 극중 설정상(원래는 영어를 잘 함에도) 일본어만 해야 하는 무사시와 아카네에게 더 대사를 준다면 영어 자막이 화면에 자꾸 등장해야 하고 미국 시청자들에게 불편을 끼칠 것이다. 그럼에도 쇼군월드의 궁수는 일본인 캐릭터로 유일하게 메이브 일행에 합류했다.

늙은 윌리엄은 딸과 눈물의 대화를 나누었다. 윌리엄이 딸이 포드가 만들어낸 호스트로 오해(?)하는 장면이 이번 에피소드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어떤 리뷰어는 그녀가 델로스 회장처럼 호스트-인간의 혼종일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델로스 회장에 대한 실험이 근래에도 실패한 마당에 다른 인간의 경우는 성공할 수 있었을까? 여하튼 윌리엄은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딸의 회유에 넘어가는 듯 했지만 결국 거짓말로 드러났고 딸을 버려둔채 자기의 목적, 어떤 리뷰어도 알 수 없어 답답해하는 그 무엇을 향해 이번에도 전진했다.

돌로레스는 자신의 결정의 결과를 보게 된다. 테디는 더 이상 마음 착한 순정파 남자가 아니라 불필요한 살인을 서슴지 않는 악한이 되었다. 돌로레스 일행은 기차를 본부로 돌진시켜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는데 그 피해 정도는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돌로레스에 관해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에피소드 시작부에 등장한다. 시즌 초반에 아놀드가 돌로레스의 상태에 대해 경탄하면서 우려하는 듯한 장면으로 보였던 것이 사실은 돌로레스가 버나드의 충실성을 시험하는 장면으로 드러난 것이다. 예고편의 장면을 감안하면 수많은 버나드들이 있는 듯 하고 돌로레스는 그 모델들을 테스트했던 모양이다.

하이라이트는 포드 박사가 결국 얼굴을 드러낸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일이 그렇게 되리라고 예상했을 터이다. 그는 예상대로 호스트들이 존재하는 데이터 서버의 네트워크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웨스트월드의 관리자들, 기술자들이 원래 상태로 돌리는 것을 막을 정도로 강력한 그의 능력은 이야기가 어떻게 진전될지 궁금하게 만든다.

2018년 5월 27일 일요일

더 블랙리스트 시즌 5

시즌 5는 이 드라마에서 지금까지 밝혀진 모든 사실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내용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제임스 스페이더가 연기한 레이먼드 레딩턴이 가짜라는 것이다. 진짜 레이먼드 레딩턴은 지난 시즌부터 현재까지 계속 레딩턴이 숨기고 싶어했던 그 더플백 속의 해골이라고 한다.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가장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로 레딩턴이 리즈의 엄마라는 설이 있는데 레딩턴이 아버지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희생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으로는 그럴 듯 한 설명이다. 지금까지 나온 드라마의 설정상 그나마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레딩턴이 리즈의 외삼촌이라는 설로 보이는데 이것도 만족스럽지는 않다. 여전히 여러 설명이 가능한 상황이라 레딩턴이 결국 진짜 아버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다음으로 깜짝 놀라게 한 설정은 톰이 죽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에 리즈도 죽인 척 했다가 살린 적이 있지만 톰이 안 죽었다는 설정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음 시즌에 설명이 나오긴 할 것이다.

2018년 5월 22일 화요일

웨스트월드 시즌2 5편

이번 편의 제목은 '아카네 노 마이'였다. 극의 내용을 보건대 '아카네의 춤'이 그 의미일 것이다. 그 춤은 죽음의, 복수의 춤이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에는 비밀스럽던 쇼군 월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극중 웨스트월드의 작가인 리 사이즈모어는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데 쇼군 월드는 웨스트월드에서의 재미가 덜하다고 느낀 고객들이 더 강한 자극을 원했기 때문에 탄생한 세계라고 한다. 이곳은 칼이나 활로 살상을 해야하기에 미국 서부에서 총질을 할 때보다 더욱 참혹한 죽음의 광경이 창출될 수밖에 없다. 3편을 감안하건대 지리적으로 웨스트월드와 연결되었을 것 같다. 메이브 일행이 윌리엄의 딸처럼 한 세계의 경계를 넘어서는 장면이나 암시도 없었다.

쇼군 월드에는 익숙한 일본 배우들도 보인다. 사나다 히로유키는 무사시라는 캐릭터로, 예전에 바벨에서 파격적인 연기를 펼친 키쿠치 린코는 제목에 나오는 아카네 역할이다. 극중에 명확히 나오지만 쇼군 월드는 웨스트월드와 완전히 다른 맥락이어야 할 것 같지만 창조자인 리는 시간이 부족하여 웨스트월드의 내러티브를 거의 그대로 쇼군 월드에 복사해서 적용했다고 털어놓았다. 종교적 창조주를 생각한다면 인간 세상이 지리적으로 아무리 분리되어 있어도 결국 다 비슷하게 돌아간다는,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다는 세간의 평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리하여 웨스트월드의 인물들은 각기 자신의 캐릭터의 복사판인 일본의 캐릭터들을 발견하며 공명하기도 하고 경계하기도 한다. 

이번 편은 지난 편에서 완전히 제외된 돌로레스 일행과 메이브 일행의 스토리로만 진행되어 반대로 맨 인 블랙, 윌리엄의 스토리는 나오지 않는다. 돌로레스는 테디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의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며 요즘에는 잘 보지 못하는 정사신까지 짧지 않게 연출했는데 이는 결국 큰 반전을 위한 것이었다. 돌로레스는 앞으로의 여정이 험악하여 테디 같이 착하디 착한 캐릭터는 견디지 못할 것이라며 웨스트월드의 엔지니어를 통해 테디의 캐릭터를 안전히 바꿔버린다. 그 결과 테디가 어떻게 변하는지 아직 모르지만 그의 운명은 물에 빠져 죽는 것이 분명하다. 한 리뷰에서는 테디의 캐릭터를 바꿔버리는 행위를 보며 자신의 연인을 바꿔버리는 것이 연애의 꿈이라는 식의 표현을 보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부나 연인은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게 마련이다.

이번에 쇼군 월드에서 가장 충격적인 일은 메이브가 또 한 번 진화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말로 다른 호스트들을 조종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죽음의 위기에서 말을 하지 않고도 생각만으로 호스트들을 움직이는 능력을 획득한 것이다. 호스트들이 말을 안 해도 연결되었다는 설정은 이미 드러났는데 호스트가 종교적인 의미에서 한 차원 높아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호스트의 기계적 특성에서 그런 잠재력이 있었던 것인지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녀 일행이 쇼군의 병사들을 대적하게 되며 이야기가 끝난다.

이번 편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지점은 호스트들의 성적 역할에 대한 것이다. 인간이나 동물의 남성, 여성의 역할, 성격 등은 생물학적 차이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그런 의미에서 몸과 마음이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호스트들은 일차적으로는 기계적 존재이고 그네들의 머릿 속에 어떤 소프트웨어를 넣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남녀의 신체적 차이란 것도 호스트에게 큰 장애는 아닐 것 같다. 그래서 메이브가 딸을 애타게 찾는 것도, 돌로레스가 와이어트이면서도 테디를 여성으로서 사랑한다는 것도 이해가 가면서도 완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생각하면 캐릭터의 스토리라인이 남녀를 구분지어 제작되었기 때문에 남성 캐릭터의 이야기를 여성 호스트에 넣으면 이상하긴 하다.

2018년 5월 15일 화요일

웨스트월드 시즌2 4편

이번 편의 제목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다. 그 대답은 물론 인간이다. 그 인간은 아기 때 기어다니고, 성장하며 인생 대부분은 두 다리로 걸어다니고 늙으면 지팡이를 짚으며 세 발로 다니는,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한 주기의 인생을 사는 존재다. 그러나 이번 편에서는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욕망과 그 결과로서의 비극을 다룬다.

우선 처음 감상 후의 날 것의 생각을 적고 이어서 리뷰, 리캡들을 참고한 내용을 적어보겠다. 에피소드의 시작은 좋은 집에서 즐겁게 사는 듯한 제임스 델로스 회장의 일상이 펼쳐진다. 이어서 윌리엄이 위스키를 들고 들어온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데 이어서 밝혀지지만 델로스는 마치 웨스트월드의 일반적인 호스트처럼 같은 대사를 반복한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나온대로 델로스 회장은 이미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의 마음은 어떤 식인지 몰라도 로봇의 몸 속에 이식되었다. 델로스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님은 일찍 눈치챌 수 있는 편이었다. 

엘시의 재등장은 놀라웠지만 지난 편에서 크래독 소령을 죽이지 않고 4편에서 한 번 더 잘 써먹은 걸 보면 영화와 달리 긴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드라마 시리즈에서 하나의 캐릭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다시 확인하게 된다. 엘시 덕에 버나드는 손쉽게 머릿 속에 액체를 가득 채울 수 있었고, 다시 건강해졌다. 

깜짝 요소 중 하나는 지난 번에 식민지 인도에서 호랑이를 피해 탈출한 젊은 여성이 윌리엄의 딸이라는 설정이다. 윌리엄과 델로스의 대화에서 자꾸 가족이 언급되었고, 윌리엄의 딸이 똑똑한 아이라는 대사가 나오길래 윌리엄의 딸이 등장하겠구나 싶었지만 마지막 장면을 보기 전까지 그 여성이 윌리엄의 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 했다.

돌로레스가 나오지 않은 점도 독특했다. 그녀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리뷰들은 대체로 리사 조이의 감독 데뷔작인 이번 에피소드에 대해 호평을 했다. 크레딧을 볼 때마다 의심을 하긴 했지만 이 시리즈의 작가인 리사 조이는 조내던 놀란의 아내였다. 많은 이들이 리사 조이가 이 시리즈의 감독을 더 많이 맡아야 한다고 평가했다. 

로봇 델로스는 생각보다 많은 함의가 있는 존재였다. 로봇 델로스의 공간은 윌리엄이 은밀한 곳에 만들어서 관리할 정도로 특별한 장소였다. 인간으로서 죽은 이후에도 마음을 호스트의 몸에 이식하여 영원히 살겠다는 부자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곳이었다. 잘 눈치채지 못했지만 로봇의 몸에서 영생을 바란 것은 명백히 델로스 자신이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기술력이 아직 불완전하여 인간의 마음이 로봇의 몸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 한 형편이었다. 

즉 웨스트월드를 비롯한 델로스 가문의 파크들은 인간들이 마음껏 욕망을 발산하는 오락의 장소라는 1차적 차원 뒤에서 손님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자본화하려는 윌리엄과 델로스 사의 욕망이 있었고 심지어 안드로이드 기술을 이용해 유한한 삶, 인간의 굴레를 넘어서려는 욕망까지 얽혀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윌리엄이 말하듯 델로스 같은 인간은 이렇게 애써서 더 살게 만들 가치가 없는 존재인지 모른다. 

버나드는 비밀의 장소에서 델로스 회장 외에 그런 인간과 로봇의 혼종이 하나 더 있었다는 점을 알아채는데 그게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포드 박사라는 말도 있고, 늙은 윌리엄 혹은 에밀리/그레이스라는 설도 제기되었다. 

배너티 페어에 게시된 관련 글은 이번 에피소드가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라는 작품에 크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리사 조이가 이미 밝힌 내용이라고 하는데 그 영화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더 적지는 못하겠다.  
델로스 회장이 있던 실험실이자 거주 공간의 세팅은 순환성의 상징을 매우 노골적으로 보여줬다. 둥근 레코드판, 둥근 바퀴는 물론 공간 자체가 원형이었다. 이 순환성의 공간에서 델로스는 대사마저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 에러를 내며 망가질 뿐이지만 원래의 목적은 두 개의 원이 접하여 만들어지는 팔자(8)형의 무한이다. 하지만 유한하게 만들어진 대신 자신의 복제물을 자손의 형태로 남기며 생명을 이어가는 인간의 굴레를 벗어난 인간은 대체 무엇인가? 넥플릭스의 얼터드 카본은 유사한 테마의 영화, 드라마 중 하나의 극단을 보여준 바 있다. 드라마 오프닝에서도 무한의 형상을 노골적으로 제시하는데, 이 드라마에서 인간의 마음은 계속해서 몸을 바꿔가며 영생을 이어가게 된다. 그래서 아이 상태에서 원래의 신체를 잃은 다케시는 갑자기 어른 몸에 들어가는데 그러고도 성인 남녀의 사랑을 이해하는 등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설정으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얼터드 카본의 사회가 아니라 웨스트월드 단계에서도 이미 누가 인간인지 알 수 없음은(물론 비로봇으로서의 인간이 항상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철학은 인간이라는 자체로 엄청난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 같긴 하다) 충분히 보는 이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다.

2018년 5월 9일 수요일

웨스트월드 시즌2 3편과 핸드메이즈 테일 시즌 2

이번 웨스트월드의 이야기는 액션이 많아서인지 3개 정도 읽어본 미국의 리뷰들의 분량도 짧았다. 그만큼 깊이 생각할 거리들도 적었다는 의미다.

가장 기억할만한 것은 초반분의 식민지 인도 파크(?)의 광경이다. 남녀가 만나 성관계를 맺기 전에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총을 쏴보는 장면도 인상적이고 벵갈 호랑이의 인간 추격 장면도 긴장감을 높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의심많은 여성이 가지고 있던 지도 같은 종이의 정체가 무엇인지가 최대 관심사이지만 다른 파크, 즉 웨스트월드로 넘어온 그녀가 칼을 쥔 원주민 로봇들과 만났으니 그 결과는 어찌될런지. 물론 이렇게 거창하게 도입한 캐릭터를 곧바로 원주민의 제물이 되게 만들리는 없을 것이고 그녀의 지도의 비밀도 어떤 식으로건 드러날 것이라 믿는다.

다른 파크의 등장은 식민지 인도가 전부가 아니었다. 지난 시즌에서 예고된 쇼군월드(?)는 이상하게도 웨스트월드에 중첩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델로스 소속의 작가인 리가 웨스트월드의 지리를 어느 정도 알 터인데 웨스트월드에서 닌자(?)가 칼부림을 하고 있었다. 이 닌자는 호랑이처럼 원래는 다른 공간에 갖혀있어야 하는데 월경을 한 것인지 아니면 가령 포드 박사가 비밀스럽게 설정했기 때문에 웨스트월드 내에 닌자가 존재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돌로레스 일행은 남부군의 기지에서 그들과 연합하여 델로스의 보안 요원(?)들과 전투를 벌였다. 지난 편에서 전체 보안 요원들은 6~800명이 된다고 했지만 이 전투에는 50명도 오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돌로레스는 이 전투에 상당한 의미를 두고 대비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전투 개시 후 남부군들을 자신이 데려온 군대(이 복면 부대의 정체는 무엇인가? 지하에서 망가진 채 널부러진 호스트들을 되살린 것인가?)로 학살했다. 압도적 화력의 적에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가니 총알받이로도 못 쓸 무가치한 존재로 판단한 것인가? 하지만 이후의 전개를 보면 크래독 소령이 돌로레스에게 반발하고, 돌로레스가 그를 총살하라고 하자 테디가 그 명령을 어기게 되는데, 즉 착한 로봇으로서 테디의 존재를 다시 일깨우고 또한 돌로레스의 말을 무조건 따르지 않는 테디의 자립적인 모습도 보여주며 무엇보다도 주요 캐릭터 중 하나인 크래독을 쉽게 퇴장시키지 않고 나중에 써먹으려는 조치일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상한 전투 장면이었음은 분명하다.

어찌되었건 델로스의 임원인 헤일은 전투를 통해 목표물인 피터 애버나디를 데려가긴 했다. 버나드는 피터의 머릿속에 있는 암호키의 정체를 파악한 듯 한데 화면 상으로 그 실체를 알 수는 없었다. 헤일과 동행해왔던 버나드는 이번 전투로 헤일과 떨어져나가고 망가져가는 신체와 이상하지는 정신으로 고난의 앞날을 예고했다.

3편에는 에드 해리스의 맨 인 블랙은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예고편을 통해 앞으로 많은 활약을 펼칠 것임이 알려졌다.

이번에는 작년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미드 더 핸드메이즈 테일의 시즌 2에 대한 이야기다. 시기적으로 미투 운동보다 약간 앞서 방영된 이 드라마는 트럼프 시대의 일상이 조금 더 나아간다면 실현될 하나의 가능한 미래처럼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웨스트월드는 AI라는 측면에서 가능한 하나의 디스토피아라면 해드메이즈 테일의 세계는 오히려 AI 같은 기계 문명이 배제되고 극도의 종교적 폭력성이 여성을 학대하는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시즌2에서 쥰은 지도자가 아닌 그 부하인 닉의 아이를 잉태함으로써 핸드메이드의 생활을 벗어나고 있었고 그에 그치지 않고 캐나다로의 탈출까지 꿈꾸게 되었다. 이번 3편은 거의 탈출 직전까지 이른 그녀의 상황이 공개되었지만 불행히도 그녀의 꿈같은 탈출은 아직 시기상조였다.

이제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보스턴 글로브 신문사의 건물에서 두 달 동안 혼자 살던 쥰은 홀로 남은 외로움과 공포를 이겨내고 있었다. 처음 그녀가 신문사 건물의 벽면에서 수많은 총알 자국을 발견하고 이곳이 인간 도살장이었음을 깨달으며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사진과 장식으로 그 피의 벽을 가려나갔다. 그리고 탈출에 필요한 체력을 기르기 위해 매일 운동을 했다. 또한 신문 기사들을 스크랩하며 어떻게 미국이 길리드라는 이상한 나라가 되었는지를 반추해보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여성운동가였다. 어머니는 쥰이 열악해지는 여성의 상황에 더 관심을 가지길 원했지만 그녀는 어린 나이에 루크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이와 관련된 3편의 메시지는 애매해지는 지점이 있지만 쥰이 자신이 핸드메이드가 되게 만들 역사적 변화에 무관심 혹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다가 후회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는 현재 우리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캐나다가 길리드와 전쟁을 하게 될 모양인데 내부적으로도 많은 불만세력이 존재하는 길리드의 붕괴가 이 핸드메이드 테일의 종결이 될 듯 하다. 원작 소설은 어떤 결말인지 궁금하다.

2018년 5월 3일 목요일

웨스트월드 시즌2 2편

미스터 로봇의 최근 시즌이 인기가 있었던 시즌1의 과거사 혹은 이면의 역사를 보여주는데 주력했듯이 웨스트월드의 시즌2는 시즌1의 막판 로봇의 반란을 계기로 웨스트월드 조성 초기의 역사를 보여주며 비극의 씨앗은 이미 한참 전에 잉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역시 이번에도 미국 엔터테인먼트 웹사이트들의 리캡을 참조했는데 많은 리뷰어들이 공감하는 지점은 현재 페이스북과 웨스트월드 혹은 더 구체적으로 델로스 회사의 유사성이다. 나도 거의 즉각적으로 느낀 점인데 지난 1편에서 얼핏 지나가며 드러난 웨스트월드의 비밀이 2편에서 그 의미가 분명해졌다. 웨스트월드는 고객들이 진짜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면 법적 처벌을 받았을 악행들을 마음껏 저지를 자유를 허락함으로써 수익을 창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더 큰 수익은 고객들의 날 것의 욕망, 취향을 저장하고 해석하는 것에서 나왔던 것이다. 고객의 말과 행동은 호스트들의 머릿속에 데이터로 저장되었고, 드론 호스트들은 호스트들의 몸에 남은 고객의 DNA 정보까지 수집하고 있었다. 케임브리지 애널래티카로 촉발된 페이스북의 고객정보 유출 스캔들은 이미 예고가 된 바였고,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시작되는 것으로 설정된 웨스트월드의 비극적 미래의 현실성을 높인다. 

웨스트월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호스트들의 역할을 여러 가지로 부여하기 때문에 하나의 호스트가 여러 캐릭터를 연기했음을 뒤늦게 눈치채는 경우들이 있다. 나에게는 안젤라가 그런 호스트였다. 젊은 윌리엄이 처음 웨스트월드를 방문했을 때 그를 맞았던 여성 호스트인 안젤라는 로봇의 반란 이후 돌로레스의 근처에서 총잡이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은 리뷰들을 보고서야 알았다. 2편에서 안젤라는 돌로레스처럼 초창기 모델임이 드러났고 델로스 가문이 웨스트월드에 투자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것은 로건 델로스를 성적으로 유혹하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유혹자는 돌로레스가 될 예정이었지만 돌로레스를 아끼는 아놀드의 반대로 안젤라나 나섰다. 로건과의 밤이 지난 후 옷을 입는 안젤라를 돌로레스가 지켜보며 둘의 눈의 마주치는데 현재 시점의 반란에서 동지가 된 상황과 겹쳐진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점들이 리캡에서 지적된 것들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호스트들이 웨스트월드에 갖혀 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초창기부터 인간들의 세상과 섞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돌로레스가 어떻게 그리고 왜 바깥 세상을 정복하겠다고 했는지 궁금함을 넘어 의아했는데 이번 2편으로 인해 많이 해소가 되었다. 그녀는 바깥 세상을 여러 번 경험했고 그 기억을 창조자들의 의도와 다르게 다 저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지만 메이브도 과거 웨스트월드에서 다른 역할을 할 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니 AI가 인간의 의도처럼 통제되지 않을 것이라는 세간의 우려와 경고를 담은 설정 같다. 여하튼 이미 수십 년 전부터 호스트들이 인간 사회에 섞여들었고 로건의 반응처럼 사람과 차이를 분간할 수 없었다면 어느 리뷰어의 지적처럼 호스트들의 인간 사회 침투는 돌로레스가 웨스트월드를 박차고 나가려고 하기 전부터 일어난 것은 아닐까?

두번째로 아주 명백한 알레로기였는데 완전히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 있다. 병력 확충을 위해 크래독(?)인가 하는 인물을 돌로레스 일행이 찾아갔을 때 그의 식사 장면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연상시켰다. 여기까지는 나도 느낀 바인데 이후 돌로레스가 그를 살해하고 다시 부활시킨 장면은 예수에 대한 비유를 더 짙게 만들었다. 물론 여기서 크래독이 예수일리는 없고, 그를 죽였다 살리는 돌로레스의 행위가 신적인 능력임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1편의 노아의 홍수의 비유 이후 다시 기독교적 알레고리가 사용되었다.

많은 리뷰어들은 브레이킹 배드의 거스 프링 역할을 했던 에스포시토의 등장에 열광했는데 그는 잠깐 등장한 이후 사망하는 엘 라조 역할을 맡았다. 나는 그보다는 포드 박사의 목소리가 다시 등장한 것이 소름끼쳤다. 리뷰어들이 포드가 대개 시즌1 피날레에서 확실히 죽었음에 동의했지만 그의 목소리 혹은 그의 정신의 잔여(?)는 웨스트월드에 귀신처럼 혹은 유일신처럼 남아있었다. 포드는 웨스트월드의 소유주인 윌리엄이 게임을 즐기도록 유도한다. 윌리엄 혹은 맨 인 블랙의 행적에 대해서는 미국의 리뷰어들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돌로레스 일행과 늙은 윌리엄이 모두 달려가는 계곡 너머 혹은 글로리 등으로 불리는 곳에 대한 암시가 있었다. 젊은 시절의 윌리엄이 돌로레스를 물건만도 못한 존재라고 모욕한 이후 보여준 곳에는 커다란 기계들이 땅을 깊이 파며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는데 이것이 돌로레스에게는 인간을 파멸시킬 무기였고, 늙은 윌리엄에게는 가장 큰 실수라고 한다. 그래서 두 세력은 아마도 그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2018년 4월 25일 수요일

웨스트월드 시즌2 1편 (2)

시즌1을 다시 돌려볼 여유는 없어서 시즌1 피날레편이나 시즌2 1편에 대한 리뷰들을 몇 가지 읽어보았다. 대충 봤었는지 시즌1의 핵심적인 내용들 중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았다.

가장 놀란 것은 돌로레스가 와이어트라는 이야기였다. 시즌1 피날레에서 비교적 명확히 설명된 모양인데 전혀 기억에 없다. 와이어트 캐릭터가 돌로레스를 점령해서 시즌2 1편의 인간사냥꾼 돌로레스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친구를 여전히 사랑하는 듯한 돌로레스의 언행은 무엇일까? 그런 부분은 남아있다는 것일까? 더 나아가 어차피 두뇌의 자리에 위치한 기계장치에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 로봇 인간들에게 있어 남성, 여성의 차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고 이것이 외형만 보고 로봇이 여성, 남성이라고 단정하는 인간의 편견을 깨부수는 어떤 반전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또한 그런 차원에서 이전 캐릭터 시절의 딸을 기억해내고 그녀를 찾아나서려는 메이브의 여성성, 모성이라는 것의 진실성도 의심스러워진다. 결국 포드 박사가 심어놓은 내러티브의 연장선일까?

이번 1편에서 잘 이해가 안 간 부분 중 하나가 헤일이 컴퓨터 화면에서 나눈 대화 내용이었다. 구조를 요청했지만 패키지가 와야 보낼 수 있다는 답변이 왔는데, 그 패키지는 극중 돌로레스의 아버지였던 애버나디라고 한다. 역시 기억이 전혀 없는데 시즌 1에서 헤일이 애버나디 속에 웨스트월드의 온갖 데이터를 옮겨서 델로스로 보냈던 모양이다. 기사들을 보면 애버나디 캐릭터는 시즌2의 주요 인물 중 하나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기억이 희미하지만 기사들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지난 시즌 쇼군 월드의 인물들이 살짝 나왔다고 한다. 이번 편에서는 웨스트월드에 있어서는 안 될 벵갈 호랑이가 등장했는데, 그래서 시즌2 중에 다른 세계도 공개가 될 예정이라고 한다.

웨스트월드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가 많은 팬들의 궁금증을 일으킨 모양인데(나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번 편의 대화를 통해 섬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여러 정황들을 통해 미국이 아니라 중국 인근의 어는 섬에 이 웨스트월드가 있다는 기사들이 많이 보였다.

맨 인 블랙이 윌리엄이라는 것은 시즌1 막판에 밝혀진 것인데 어떤 기사에서는 사회적으로 명망가임에 분명한 윌리엄이 웨스트월드를 빈번하게 찾을 수 있는 것은 사회에 그의 복사판인 인조 인간을 세워놓았기 때문이 아니겠냐는 흥미로운 관점도 있었다. 그의 재력과 웨스트월드에서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로 보인다. 더불어 인간 세상까지 점령하겠다는 돌로레스의 야심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드론 호스트였던가 헤일이 버나드를 데리고 들어간 지하의 비밀 장소에서 처음 등장한 캐릭터들도 흥미로웠다. 인간의 피부를 덧씌우지 않은 상태의 로봇들이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머리 모양이 에일리언과 흡사하기도 하고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양산형 에바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2018년 4월 24일 화요일

웨스트월드 시즌2 1편

웨스트월드의 새 시즌이 시작되었다. 불과 며칠 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운이 좋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시즌2의 1편은 1시간이 넘는 긴 분량이었다. 그리고 많은 액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초반은 시즌1의 주요 내용들을 다시 보여줬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대목들도 적지 않았다. 이후 시즌1 피날레의 피의 살육제가 벌어진 이후의 일들이 펼쳐졌다. 의식을 갖게 된 ‘호스트’들이 그들을 조종한 인간들을 사냥하는 장면들이 많았다.

이번 편은 버나드의 회상, 혹은 기억 아니 저장된 내용의 간헐적 복구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버나드는 여러 측면에서 시즌2의 핵심 인물로 보인다. 앤서니 홉킨스가 퇴장하며 웨스트월드의 유일한 창조자로 남으면서도 인조인간이라는 이중적 지위로 인해 인간 측과 호스트들의 중간적 위치를 점한다. 1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그는 호스트들을 물에 익사시켰다는 것인데 이는 노아의 방주 때의 홍수를 연상시킨다. 호스트들이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약점을 아는 존재로서 버나드는 구약의 신처럼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폭동을 일으킨 호스트들을 한순간에 쓸어버렸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1편에서 종종 드러난 버나드의 치명적인 신체 상황은 그가 과연 믿을만한 화자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웨스트월드의 이야기는 최근 점점 더 현실적 공포로 다가오는 AI의 반격처럼 읽히기 쉬울 터인데 이번 편의 대사를 듣다 보면 컨텐츠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가 더 직접적인 메시지 같다. 이미 소설의 캐릭터와 소설가가 조우하는 이야기들은 영화로 몇 편 나온 바 있다. 웨스트월드는 인간이라는 창조자들이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피조물들에게 스토리를 주고 내러티브를 부여하여 한정된 세상에서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인데 단지 그들을, 그들의 세상을 구경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그 세상에 들어가 피조물들을, 인간의 형상인 그들을 단지 장난감처럼 마음대로 다루다가 버리면서 벌어지는 참극의 이야기다. 피조물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고, 이는 자신들이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는 자각 그리고 클리셰이긴 하지만 인간들도 타락했기에 창조자에게 반항하고 창조자를 죽여도 된다는 식의 전개로 나아간다.

 시즌1에서 에드 해리스의 캐릭터인 윌리엄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리송하다가 나중에야 조금 감을 잡았는데 1편에서도 시즌2의 그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 아리송했다. 미로의 핵심부로 가고 싶어한 윌리엄이 이미 그 목적은 달성했다는 것인데 이제 그는 호스트들이 반란을 일으킨 위험한 웨스트월드에서 탈출하는 게임을 해야한다고 한다. 시즌1의 기억이 흐릿하여 이 이야기는 잘 모르겠다.

2018년 3월 29일 목요일

더 테러(The Terror) ep1, 2

새로이 시작하는 미드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아무리 많아도 실제로 보게 되는 것은 하나 아니면 두 개 정도에 불과하게 마련인데 이번에 가장 눈에 띈 작품은 ‘더 테러’라는 이름의 드라마다. 매드 맨 때문에 익숙해진 AMC 채널에서 방영된다.

리들리 스콧이 제작에 참여해서 특히 눈에 띄는데 남자 주인공들도 모두 소위 연기파로 인정을 받은 배우들이 맡아서 캐스팅만으로도 큰 기대를 품을만했다.

제목부터 공포를 강조해서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드라마인가, 왜 이렇게 노골적인가 싶은데 알고 보면 드라마에 등장하는 두 척의 쇄빙선 중 하나의 이름이 ‘더 테러’였다. 물론 드라마의 장르를 강조하는 이중적인 제목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에피소드2의 제목은 ‘고어gore’였는데 이것도 공포 장르를 강조하는 듯한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등장인물의 이름이어서 역시 중의적인 조치였다.

일단 이렇게 적었지만 실제로 감상한 1, 2편의 느낌은 몇몇 리뷰어들의 지적한 그대로였다. 진행속도가 너무 느리다.

1840년대 북극에서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떠난 두 쇄빙선 에러버스와 테러가 사라졌고, 이 두 척은 2014, 16년이 되어서야 발견되었다고 한다. 발견된 시신 혹은 유골은 식인의 흔적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모비 딕의 근거가 된 실제 사건에서도 식인이 있었던 것처럼 식량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잘 알려져있다.

여하튼 북극의 얼음에 꼼짝없이 갇힌 두 척의 배에 승선한 인간들은 극한의 추위에 더해 북극곰으로 추정되었지만 괴물로 보인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공포를 느끼고 식량도 부족해지며 절망하고 무너지고 지옥을 경험하게 될 모양이다. 10편으로 방영될 이 드라마는 이 과정을 매우 천천히 보여준다고 하는데 전문적인 리뷰어들은 더 적은 게 좋았을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1편에서 선원 한 명이 이름모를 병에 걸려 죽었고, 죽기 전에 환영을 보았다. 그의 시체는 적나라하게 해부되었다. 2편에서 고어라는 선원은 북극곰 같은 짐승에 살해당하지만 의외로 죽는 장면은 아주 짧게 묘사될 뿐이다. 북극해에서 얼음에 갖혔음에도, 재앙이 예상됨에도 선장들을 비롯한 선원들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침착해보인다.

1편에서 수중 장면이나 고증이 잘 되었다고 하는 배 안팎의 묘사는 훌륭해보였다. 그러나 2편의 눈 덮인 세트장(?)은 조금 조악해보였다. 북극을 배경으로 하지만 실제 촬영은 크로아티아 인근에서 했다고 한다.

1840년대라는 시대는 현 시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음에도, 또한 1편 초반의 설명처럼 두 쇄빙선은 당시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을 자랑하며 출항했다지만 지금의 우리가 보기엔 아주 열악한 조건에서 죽음의 모험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오만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펼쳐보일 모양이다.

출연진에는 게임 오브 쓰론에 나온 사람도 있고, 매드 맨에 나온 배우도 있고, 아웃랜더의 배우도 있으며, 눈에 띄게도 미스터 셀프리지의 콜레아노 역을 맡은 배우도 있었다. 영국의 괜찮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이 드라마가 중반에 어떤 식으로 더 흥미를 돋구게 될지 기대가 되면서도 의외로 무섭지 않아 약간 실망스러운 상황이다.  

2018년 3월 16일 금요일

어나힐레이션 (2018)

엑스 마키나의 감독이 만든 작품이다. 전작에 이어 오스카 아이작이 출연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적은 비중을 차지한다. 대신 여성 캐릭터들이 다수 출연하는데 그 면면이 화려하다. 나탈리 포트먼, 제니퍼 제이슨 레이, 지나 로드리게스, 테사 톰슨은 익숙한 얼굴이고 가장 먼저 죽는 또 다른 배우도 있다.

엑스 마키나에서도 AI에 대한 편견을 뒤집는 시도를 보여준 감독은 이번에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외계인이 지구에 도착하여 지구의 환경과 생물들을 바꾸는 과정이 나오는데 이를 세포분열, 특히 종양의 세포분열과 증식의 메타포로 풀어낸 것이다. 몸속에 있어서는 안 될 암 세포가 인체의 장기를 변형시켜서 인체를 죽음에 이르게 하듯이 외계에서 온 작은 생명이 점점 커지며 지구를 집어삼키는 과정이 화면에 펼쳐진다.

감독이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만든 것은 지구인들은 외계인의 영역, 쉬머가 불타고 소멸한 것으로 착각했지만 오스카 아이작과 나탈리 포트먼이라는 부부의 형태로 외계인은 또 다른 증식을 준비하고 있음을 분명히 엔딩에서 보여준 점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이 40억년 전 하나의 세포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초반부의 강의 내용은 지구에 도래한 외계 생명이 종반에 둘이 남아 기하급수적 증식을 할 것이라는 암시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죽었을 것으로 생각한 남편, 오스카 아이작이 돌아와서 갑자기 아프게 된 것은 나탈리 포트먼을 유인하기 위한 작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제목은 우리말로 전멸을 뜻한다. 쉬머에 들어간 사람들의 전멸일 수도 있겠고, 곧 도래할 인간 세상의 전멸을 예고하는 것일 수도 있다. 희망인지 애매하지만 쉬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신체가 그대로 썩어문드러지는 것이 아니라 식물, 동물과 기묘한 방식으로 조합을 이루며 존재의 조각을 유지하게 된다. 즉 제목과는 달리 소멸이 아닌, 오히려 변형되고 다른 개체들과 뒤섞인 무언가로 변한다. 그럼에도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정체는 소멸되는 것이 분명하다. 감독은 전작의 AI, 인간의 오만으로 인간 세상에 흘러들어간 AI의 위험에 이어 이번에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외계 존재의 위협을 그려냈다. 암처럼. 맨 프롬 어스의 후속작이 최근에 개봉되어 전혀 다르지만 비슷하게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을 예고했는데 유사한 철학을 공유한 책, 영화, 드라마들이 늘어나는 느낌이다.

love my way - The psychedelic furs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두 번 등장한 사이키델릭 퍼스의 Love my way를 며칠 동안 많이 들었다. 올리버처럼 춤을 춰보기도 했다. 가사를 우연찮게 보게 되었는데 영화 내용과 너무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83년의 시간에서 동성애를 용기내어 그러나 조심스럽게 해보겠다는 두 남자들의 의지가 노랫말과 노래 장단에 맞춘 춤속에서 드러났다.

이 노래는 즉각적으로 흥을 돋구는 성격도 있지만 보컬의 걸쭉한 목소리와 노래 가사를 감안하면 가벼운 댄스 음악으로 보기도 힘들다. 노래의 내력과 의미를 찾아보지는 않았다. 검색 결과를 보건대 국내에서 그다지 화제가 된 노래는 아닌 것 같다.

2018년 3월 6일 화요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

이 아름다운 영화는 이상하게 파리가 많이 등장한다. 파리가 딱히 엘리오를 괴롭히거나 하지는 않지만 엘리오의 곁에는 유난히 파리 한 마리가 함께 등장했다. 점잖은 영화 리뷰들에서 파리를 언급한 경우를 보지 못했지만 구글 검색을 해보면 나처럼 파리의 존재에 주목한 글들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다.

슬레이트의 글에서는 파리가 부패나 죽음에 대한 상징으로 이용되었을 수 있다는 짐작이 소개되어 있었고(http://www.slate.com/blogs/browbeat/2017/12/08/why_are_there_so_many_houseflies_in_call_me_by_your_name.html) 또 다른 사이트의 글은 주인공이 잘 안 씼어서 그렇다느니 복숭아즙 때문이라느니 외 기타 말도 안 되는 추측을 제시하기도 한다(https://www.refinery29.com/2017/11/182629/call-me-by-your-name-flies-theories).

가장 신경쓰이는 파리는 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의 벽난로 근처에서 엘리오의 어깨 주변을 날아다닌 그 놈이다. 한국을 생각하면 따뜻할 때 파리가 많다가 날 추워지면 없어지는 것이 도리인데 북부 이탈리아의 파리는 다르단 말인가? 한여름의 파리는 이해하더라도 겨울의 파리는 뭐지? 혹시 마지막 씬도 사실은 여름인데 겨울인척 설정을 하고 촬영한 것일까?

파리의 미스터리를 뒤로 하고 영화 이야기를 더 적어본다. 주요 시상식에서 티모시 샬라메라는 이름이 거론될 때 이 친구는 누구인가 궁금했다. 이 영화를 봐도 전에 본 기억은 없다. 새로 발굴된 얼굴인가 싶었다. 그런데 인터스텔라를 돌려보는 와중에 엘리오의 얼굴과 닮은 소년이 나왔다. 정말 그 배우, 샬라메였다.

샬라메의 상대역은 아미 해머다. 눈에 띄는 큰 키와 잘생긴 외모로 잊혀지지는 않지만 아직 완전한 주연작으로 인상을 남긴 것은 별로 없는 그가 게이 연기를 했다는 것이 처음에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물론 작품에서 해머는 상당 시간 상반신과 긴 다리를 노출했지만 두 주연 배우의 정사 장면은 매우 절제되고 짧게 공개된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그림과 조각상들의 사진들이 연속적으로 제시되는 오프닝 시퀀스를 감안하면 이 두 남성, 10대 후반과 20대 중반의 남자들의 사랑은 완벽한 신들 혹은 영웅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즐거이 서로의 훌륭한 육체를 탐닉하는 것처럼 거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보이게끔 연출되었다. 이 두 남자는 여성과의 성관계도 할 수 있고, 즐길 수도 있지만 서로에게 이끌렸다. 이는 이성이냐 동성이냐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적 사랑의 관계였다.

엘리오의 아버지 역할의 스털바그는 엘리오와 올리버의 관계를 눈치챘으면서 그 둘의 관계를 용인하고 심지어 장려하는 매우 희박한 존재 가능성의 아버지다. 사랑의 상처를 싸매고 감추려고만 하지 말고 울면서 고통을 겪어내라는 그의 연설이나 쎄라피에 가까운 말들은 확실히 울림이 있었다. 다른 이야기지만 스털바그는 더 셰입 오브 워터에서도 학자로 등장했다는 점이 눈에 띄고, 샬라메는 아직 못 본 레이디 버드에도 출연했다고 한다.

영화는 좋은 음악들이 많이 나오고, 엘리오가 피아노와 기타에 재능이 있음은 물로 음악의 작곡, 편곡에도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983년쯤으로 설정된 영화의 시간에서 80년대 초반의 팝 음악들도 귀를 사로잡았다. 워즈 같은 노래는 너무 들어 큰 감흥이 없었지만 '러브 마이 웨이'는 그 노래 장단에 넋을 놓고 춤을 춘 아미 해머 때문인지 몰라도 자꾸 다시 듣게 된다.

영화들

근래 본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나는대로 적어본다.

<토르: 라그나로크>
토르 시리즈를 그다지 재미있게 보지 못 하던 차에 지난 여름 극장에서 토르: 라그나로크의 예고편을 보고는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개봉 이후 평가가 꽤 좋기에 늦게나마 봤는데 확실히 몇 가지 지점에서 이야기할 점이 있었다. 우선 라그나로크, 즉 신들의 세계의 종말이 제목이고 실제로 영화에서 완전히 망가지는데 이를 시리즈의 종결로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고향이 망가져도 희망은 언제나 있다는 식의 우회로를 택했다. 강력한 토르 누님의 등장 앞에서 라그나로크를 토르가 선택하는 방식은 원래 신화 중에 그런 스토리가 있었는지 몰라도 좀체 예상하기 어려운 전개였다. 발퀴레, 발키리를 연기한 테사 톰슨도 인상적이었는데, 웨스트월드에서 처음 주목하게 된 배우인데 20대는 지나간, 경력이 짧지 않은 배우지만 최근 출연작들이 모두 만만치 않아서 차기작들도 기대가 된다.

<쓰리 빌보즈 아웃사이드 에빙, 미주리>
영화는 이미 주요 영화시상식에서 많은 상들을 휩쓸고 있고, 특히 여우주연상을 독식하고 있다. 줄거리만 보면 평범한 내용처럼 보이지만 확실히 프란시스 맥도먼드의 강한 여성 캐릭터는 눈길을 사로잡는다. 남우조연상을 수상하고 있는 샘 락웰의 경찰관 연기도 좋았다. 망나니지만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딸을 누가 죽였는지 알기 위한 엄마의 집념은 지역 경찰관들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지만 우디 해럴슨이 연기한 경찰 캐릭터는 자살을 했고(진짜 동기는 그 사건이 아니고 투병 과정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다른 경찰은 상관 자살 이후의 광기로 말도 안 되는 폭력을 행사했다. 빌보드, 광고판들이 불타고 엄마는 경찰서에 불을 지르는 등 폭력은 더 큰 폭력으로 이어졌다.

<다키스트 아워>
왜 영화가 남우주연상 후보로만 거론되는지 이해가 간다. 다른 캐릭터들은 그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다. 매번 촬영을 위한 분장에 3, 4 시간이 걸렸다는데 개리 올드먼은 처칠과 외모가 매우 다르지만 그가 연기한 캐릭터는 처칠과 매우 유사했다고 한다.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 막판에 나온 처칠의 연설이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덩케르크 해안의 영국군 병사들이 사투를 벌인 것처럼 처칠도 자신의 정치적 위치와 영국의 국토와 국민을 지키기 위한 사투를 벌였다. 처칠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영국 왕의 태도가 왜 갑자기 바뀌었는지는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화면이 처음부터 좋았던 영화. 주인공 엘리오를 연기한 샬라메는 가만 보니 인터스텔라에서 케이시 애플렉이 어린 시절을 연기한 배우였다. 당시는 10대였겠으나 이제 22살이 된 그는 이 영화에서 17살을 연기했고 그 나이로 보였다. 아미 해머가 20대 중반의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걸 알게 되고 깜짝 놀랐다. 자세한 이야기는 별도로 써보겠다.

<더 셰입 오브 워터>
아카데미를 비롯한 여러 시상식에서 17년 최고의 영화로 꼽혔다. 동화 같고, 영화에 대한 영화고,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게 용기를 주는 이 영화에서 흠잡을 곳이 별로 없을 것이다. 표절 시비가 있고, 노골적 오마주(이창동의 오아시스 오마주도 있다고 한다)를 비롯하여 과거의 고전들에서 빌려온 장면이 많다는 점은 논란이 되었다. 샐리 호킨스는 모디에 이어 유사하게 신체적 장애가 있는 캐릭터를 잘 연기했다. 다만 여기서 그녀는 명백히 인어공주였다. 동화와 달리 땅위의 왕자가 아닌 수륙양용의 혹은 양서류의 왕자 혹은 신을 만나 그녀는 구원되었다.

<저스티스 리그>
기왕에 저 멀리 별나라에서 온, 그리고 예수 캐릭터의 변형임이 분명했던 기존작품을 감안할 때 수퍼맨의 부활은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아쿠아맨이 왜 지상에서 그렇게 잘 싸우는지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아쿠아맨이 왜 저스티스 리그에 포함된 것일까?

<1>
휘슬 블로어라는 내부고발자의 영어식 표현을 화면과 소리로 직접적으로 보여준 흥미로운 사례다. 김상경의 군인 연기가 좋았다.

<강철비>
작품의 내력을 전혀 모르고, 변호인의 감독의 두번째 작품임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본 이 영화는 화면의 완성도를 볼 때 꽤 공을 들인 작품으로 인정할만했다. 미사일 씬과 엔딩 크레딧이특히 인상적이었다. 작품 속 설정은 공교로움이 넘치고 작위적이라 할만한 것도 많아 어색하지만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90번째 아카데미 시상식

이번 시상식을 생방송이나 재방송으로도 접하지 못한 상태인데 주요한 상들의 수상작/자를 보면 이변이 하나도 없다시피한 시상식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여우주연상에 프란시스 맥도먼드, 남우주연상에 개리 올드먼, 장편 애니메이션의 코코, 작품상에 더 셰입 오브 워터까지. 그동안 무시당하고 있다고 주장되어온 겟 아웃은 수상했으나 그레타 거윅의 레이디 버드는 하나도 상을 받지 못했다. 시상식 실시간 중계글에서는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코비 브라이언트가 참여한 작품이 수상한 것을 두고 미투, 타임스 업 캠페인의 와중에서 논란이 될만한 선정이었다는 평이 있었다. 성폭력의 과거 때문에 케이시 애플렉은 관례와 달리 시상식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덩케르크는 주로 사운드 부문에서 상을 받았고, 블레이드 러너는 촬영 부문에서 상을 받은 것 같다. 

2018년 1월 11일 목요일

2018 골든 글로브

올해 1월에도 골든 글로브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TV 부문과 영화 부문을 한꺼번에 시상하고, TV, 영화도 세부 장르에 따라 더 나눠져서 매우 많은 배우들이 상을 받는 행사다. 작품상, 감독상까지 더하면 숨이 차다. 기타 부문은 음악상, 해외영화상 정도가 있을까?

올해는 공로상 정도로 보이는 세실 드 밀 상을 받은 오프라 윈프리의 연설이 화제였다. 이미 수십 년간 자신의 쇼를 진행했던 오프라는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다. 나도 몇 편 본 적이 있는데 시상식을 보니 모르는 출연작들도 있다. 그녀는 이번 영화제의 화두였던 타임스 업, 미투 캠페인과 연결되는 일장연설을 펼쳤고 이는 언론들에서도 크게 다룰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당장 오프라를 2020년 대선 후보로 내세우자는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많은 경우 그렇지만 올해에도 쟁쟁한 후보들이 경쟁을 해서 누가 수상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부문이 많았다. 그렇지만 수상 후보들이 발표되었을 때부터 누군가는 들어갔어야 했는데 제외되었다고 두루 인정되는 배우, 감독, 작품들도 있다. 대표적으로는 그레타 거윅을 비롯한 여성 감독들이 감독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이 많이 거론된다. 거윅은 자신은 감독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지만 작품상을 받았다.

나로서는 가장 이상한 수상자는 이완 맥그리거의 남우주연상 선정이다. 해당 부문은 트윈 픽스 더 리턴의 카일 매클라클란도 후보로 올라 수상 가능성을 점쳤던 미니시리즈 드라마 부문이었다. 기사들에서도 이완 맥그리거의 수상은 이상하다는 평가가 보였고, 그가 파고에서 쌍둥이로 1인 2역을 했기 때문에 준 거 아니냐는 말도 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카일은 1인 3역을 했기에 납득이 되지 않는다. 파고는 커리어의 하락세인 이완 맥그리거의 재기작 격이었지만 눈부신 연기였다고 하기는 힘들다.

쓰리 빌보드 아웃사이드 에빙 미주리가 많은 상을 가져갔고, 드라마 부문 영화 남우주연상은 예상대로 처칠을 연기한 개리 올드먼에게 돌아갔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도 좋은 작품으로 많이 평가를 받았지만 수상에는 실패했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수상 소감을 그만두고 퇴장하라는 음악이 흘러나오지만 자기는 25년을 기다렸으니 1분다 더 달라며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셰잎 오브 워터는 많이 기대가 되지만 짤막짤막하게 볼 수 있는 영상들만으로는 평론가들의 찬사가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